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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 :

GraU 2016. 7. 20. 10:56


육아   rel. 오은영




가르쳐야할 때 혼내면 미움만 남아요

http://m.media.daum.net/m/media/society/newsview/20160706030108456?seriesId=113835



조언에 사로잡힌 육아

http://m.media.daum.net/m/media/newsview/20160622030153361?seriesId=113835





모처럼 한가한 토요일, 윤재와 아빠는 각각 한 손에 장난감 로봇을 들고 놀고 있다. 아빠의 로봇은 악당, 윤재의 로봇은 지구특공대. 윤재의 로봇이 아빠의 로봇을 공격하는 것 같더니, 아빠의 로봇 팔이 떨어져 나갔다. 아빠는 “각오해라”라며 윤재의 로봇을 온몸으로 부딪쳐 박살내버렸다. 화가 난 윤재는 아빠를 닥치는 대로 발로 찼다. 아빠는 잠시 생각했다. ‘친구 같은 아빠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참아야 하는 거야? 같이 때려야 하는 거야?’


영주 엄마는 한숨을 내쉬며 가계부를 쓰고 있다. 이번 달 교육비가 무려 3배나 초과했다. 전집을 안 샀으면…, 특별학습을 신청하지 않았으면…, 논술을 시작하지 않았으면…, 잠시 후회가 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젓는다. ‘내가 이 돈 아까워하면 안 되지. 무릇 부모는 아이를 잘 가르쳐야 하는 거니까.’



민철이가 동생을 때렸다. 엄마가 왜 때렸는지를 물었다. 아끼는 조립식 장난감을 동생이 망가뜨렸다고 한다. 엄마는 민철이가 그 장난감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알기에, 동생을 때린 그 마음이 이해가 갔다. 차마 민철이를 혼내지 못했다. “그래, 그랬구나. 민철이가 많이 속상했구나”만 되뇌었다. 엄마의 머릿속에는 어제 TV에서 본 전문가의 말이 맴돌고 있었다. “아이의 마음을 읽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의 육아는 너무 많은 명제에 사로잡혀 있다. 다양한 전문가들이 혹은 아이를 잘 키워낸 유명인들이 ‘이렇게 키워라, 저렇게 키워라’라는 명제를 쏟아놓는다. 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그 좋은 말들이 육아를 더 힘들게 하기도 한다. 더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육아 명제는 너무나 짧다. 중요한 내용이 압축되어 있기는 하지만, 한 구절만 보아서는 아무리 좋은 명제도 구체적으로 적용하기는 어렵다. 그러다 보니 명제의 ‘단어’에만 집착하여 잘못된 방식으로 적용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친구 같은 아빠’는 아빠들이 워낙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친구처럼 친밀한 시간을 되도록 많이 보내라는 뜻이다. 아이에게 부모의 사랑에 대한 깊은 믿음과 단단한 신뢰를 갖게 하기 위해서다. 친구처럼 행동하라는 것이 아니다. ‘잘 가르쳐야 한다’는 명제도 무조건 빨리 많이 가르치는 것이 좋다는 얘기가 아니다. 여기서 가르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어떤 능력, 수치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도덕이나 인성과 관련이 깊다. ‘아이 마음 읽어주기’는 아이의 생각, 마음, 감정 등을 수긍해주고 존중해주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수긍은 하되, 잘못된 행동은 안 되는 거라고 분명히 알려줘야 한다. 따라서 모든 상황에서 최우선은 아니다. 아이가 위험할 때, 옳고 그른 것을 가르쳐줄 때,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할 때는 훈육이 먼저고, 마음 읽기가 나중이다. 마음 읽기는 아이의 역성을 들어주기가 아니다.



‘좋은 부모’라는 말도 그렇다. 도대체 좋은 부모란 무엇일까? 너무나 모호하고 추상적인 개념이다. ‘좋은’이라는 단어에 사로잡혀 육아의 모든 것에 ‘좋은’을 적용하려고 들면 과잉 육아를 하기 쉽다. 당연히 육아가 버겁고 힘들어진다. 쉽게 화나고 자주 불안해진다.


육아 명제를 따르는 것은 좋다. 하지만 그 명제로 인해 오히려 피해를 보지 않으려면, 내 육아에 적용하기에 앞서 ‘내 육아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한다. 아이를 키우는 기간은 최소 20년이다. 그 긴 여정 동안 아이를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 성장시키기 위해서 나는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어떻게 일관되고 지속적으로 도와줄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 고민 속에는 나는 어떤 부모가 될 것인가, 아이가 어떻게 자라기를 바라는가, 아이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도 포함될 것이다. 고민을 거듭하다 보면, 나의 육아에 대한 기본적인 지침, 기준, 개념들이 정리된다. 그것이 쌓이면 가치관이나 철학도 생길 것이다. 명제는 그 이후에 내 삶에 적용해야 한다.


앞으로도 육아 명제들은 계속 나올 것이다. 광고 카피처럼 바로 따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자극적인 것도 있을 것이다. 그때마다 ‘내 육아의 철학은 무엇인가’부터 생각하자. 없다면 그것부터 고민해야 한다. 육아 명제는 ‘어떻게’를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왜’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나의 육아에 또 하나의 화두를 던져주는 것이다. ‘이런 명제가 왜 나왔을까. 나의 육아에 더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뭘까’를 생각해봐야 한다. 그리하면, 명제의 좋은 점만 나의 가치관에 녹아들어 나의 가치관이 확장될 것이다. 더불어 어떤 육아 명제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자연스럽게 아이를 키우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오은영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





http://m.media.daum.net/m/media/newsview/20160720030217358?seriesId=113835










1. 전한다는 것.

2. 만든다는 것.

3. 알아챈다는 것.




보이는 대로 :  말대로 따르는, "말" 로 전해지는 것 vs. 스스로 만드는, "행동을 보고배우는 것"



인공지능 -  학습기반으로의 전향이 가져온 놀라운 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발성" 의 파악이 전제되지 않는 한.    


그와 마찬가지로.


또 더 나아가, 강한 인공지능을 두려워 함은 내적 욕구의 외적 반연이라는 점에서 당연한 일.

다만, 짧디 짧은 인공지능의 역사가 함축할 수 밖에 없는, 아니 불가능하리라 여겨져도 모두 담아내야만 하는  "인간"의 지적 능력 의 전후좌우에 대한 앎이라는 대전제로 볼 때, 인간 스스로가 스스로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한, 그 두려움은 계속 될 수 밖에 없다는 것과, 두려워 하는 원인 자체를 모르고 소위 '창조'를 진행했을 때는 원래 있을리 없는  피조물의  성격까지  바뀌게 되는. 즉 창조자가 가진 두려움은 실체화 되어버릴수 밖에 없다는 이치를.





아주 다른 이야기 같지만,

부모 입장에서 아이를 가르친다는 것, 아니 그 이전에  자식을  키운다는 것, 한 인간을 책임진다는 것에 대한  소위 '근원적 두려움'에 대한 원인을 제대로 찾거나, 아예 그러지 않을 수 있는(있는 데도 불구하고 없는 척하는 것이 아닌) 상황 으로 온전히 머물수 있어야만,  이 '가르침'이라는 것이  완전한 것 처럼 여겨지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1


원칙과 진리, 또는 이러이러해야만 한다는 논리,법칙의 전수 로는

불가능하였던 인공지능의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룰 기반 vs. 학습기반)



대상을 가르침으로서  내가 얻고자 하는 것

그 자리를 떠남 없이 떠나지 않고는  앙금은 항상 남기 마련.

그것이  성취를 발목잡거나, 뒤의 일에 대한 감춰진 원인으로 '존재'하게 됨은

근본적으로 그 구도를  가르치는 자로서 즐겼기 때문이며, 그 사실을 모르더라도

기대어버렸기 때문이다. 쉽게는  이정도면 훌륭해. 나로선 더할나위 없어.


즉 참음의 순간이 거기에 있고, 그와 동시에 "나"의 것이 되어버리는.




개인의 일에서도 마찬가지인

가르치는 순간에서의

스스로 배움을 가로막는 이 기전은

이에 대해 경계하고 경계한다고 해서 그 순간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다 큰 뭉테기에 따라오는 .

그를 해결치 않으면, 다람쥐 챗바퀴.



다만 그를 알고도 또 그자리로 다시 갈 수 있느냐는

저마다의 문제.


실, '다시 간다'는 이 이야기- 정정진- 는 소위


'안다'고 떠들어도,  그렇게 '하기' 힘들다


는  이 짧은 문장 안에

같은 말을 서로 다른 의미로 받아 들이게 되는 그 원리가 들어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의 그림자 -  '닮은' 수준이 아니라,  내가 가진 세포를 가지고 있는 나와 같지만, 내가 아닌 존재


왜  부모가 되어보지 않고는 어른이 된 것이 아니라고 여기게 되는 이유 중 하나.

또다른 나.  알건 모르건,  솟구쳐 오르는 무언가. 그것을 참아내면서 또 다른 '나'를 위해 희생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뿌듯함.

실제 그 안에 머무는 상태로는  밖의 누군가가  비판적으로 일컫는 모든 말이  시답잖게 여겨지는.

껄끄럽게 여겨져도 생각해볼 거리가 많은.




자기를 보는 일에 있어서 겪게되는 기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읽는 자 마다마다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서로 서로간의 '비교' 에 기반하는 '바라봄'임을 알아차린다면, 그 다음이 멀지 않다. 현재를, 지금을, 내가 있는 여기를 알아차린다면 그 다음, 나아갈 곳, 지나온 곳, 옆에 있는 이들이 보이듯이. 하지만, 보고자 하는 의지조차 꺼진 멈춤 속에 있다면.




혼자 일 때 못하던 일을 자기 자식 앞에서는 하게 되는.


이 사실을 소위 '인정'한다면, 그 다음,

그렇다면 '할 수 있게된 현재' 의   나  는   순전히  나 의 결과물인가 하는 것.


혼자 일 수 없다는 의미.


또한,

함께 일 때도

혼자 일 때에도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




나 없는  나 만의  '의미새김'  (생,멸).


부유하는 의미들의 내 나름대로의 해석을 찾는 단계가 아닌

그 의미들의 '의미없슴'과   (유,무)

소위

나 없는  나 만의  '의미새김'  (생,멸).



무소의 뿔 처럼 혼자서 가라


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원래 그러한거였다는.





힘을 휘두름 - 자신도 모른채 - 그 위에서 가지게 되는




삶의 어느 단계, 누구에게나 있는



자신만의 신념  으로 완곡히 표현되는



마흔 넘은 남자는  모두 악당 ?







겪으면, 변한다.


당신이  거의 모든 인류의 스승이더라도.

당신에게 물으러 온 자마다  알맞은 대답을 해 주던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에게 똑같은 잣대로 대하는 것이 평등하다라는 신념 아래, 그리여기는 사람들에게

내재하는



소위, 근거를 가지고 행동하라


그 근원이 어디서 비롯되었으며

실제 남을 해치면서까지  관철될 필요가 있는지






물론,

대상을 하나로 둘 수 있는 생각들에 대한 이야기일 뿐.















자왈, 人能弘道 非道弘人   위령편 , 논어


   朱註

弘, 廓而大之也. 人外無道, 道外無人. 然人心有覺, 而道體無爲.  


故 人能대기도, 도불능대기인야.  장자왈,  심능진성, 인능홍도야, 성불지검기심, 비홍무인야.







  1. 다른의미가 아닌, ;니가 이말을 할 만한 위치이냐, 경험해봤느냐, 알지도 못하면서 뭐라는 거야 하는 바로 그자리. 이는 실제 그 이야기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순간 자연히 의미없어지는 자리매김일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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