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감과 창의성은 통제에 반비례한다
사람의 내면에서 우러나는 책임감과 창의성은
외부로부터의 관리와 통제, 제약의 정도에 반비례
한다.
누구나 관리와 통제를 싫어하기 때문에
지나친 상명하달식 압박은 오히려
반작용을 불러오기 십상이다.
- 중국 최대 호텔 체인 치텐 창업회장 정난옌 (‘쾌속성장’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타오를 수 있는
장작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책임감과 창의성을 높여 성과를 극대화하기
사용하는
관리와 통제는 마른 장작에 물을 붓는 것과 같습니다.
사명과 비전을 공유하고,
자율과 선택권을 줌으로써
장작에
기름을 부어주는 것이 리더의 역할입니다
모티베이션, 동기부여 - 목적의식 - 비전 공유 - '하고 싶음'
자발성의 인정 - 존재의 인정 - '받음' , 받아들임과 받아들여짐 에 대한 경험.
교육 이 복지가 되는 이유.
흔히들 교육하면 떠오르는 그 정책의 메커니즘 말고.
사회 어디에나 있을 수 있으며,
특히 제도화 (구체화) 되어지는 어디에서나
각각의 다른 양태로 형상화(표상) 되는, 그리하여
이건 이거고,
거긴 그거인 것으로 잘 못 인식되어
내 아이를 가르칠 때와
내 상사의 훈육 이 전혀 다른 스펙트럼이 되어버리는.
가르칠 줄 알고,
가르침이 가지는 힘을 전해줄 줄 안다는 의미에서 시작되는
소위 교육이라는 의미심장한 보편지향성 에 대한 동의가 없이는
교육이 곧 최선의 복지라는 의미를
또 도구화 된 구호로 받아들일 수 밖에.
방법론 에 머물러 있는, 단순화 되고, 분명하게 공고히 된 체계로서 그 진화를 가늠짓는
현재의 .
왜
어떻게
이렇게 물으면서도, 항상 방법론에 대해서만 표면화 된 따따부따 로
서로 '이기기 위해' 싸우는.
다양한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 일 수 밖에 없는 이 근원적 소통의 한계는,
과학적 방법론이 가져온 그림자 임을 공유한 상태로
실제 문제화 : 공론화 : 나아가 이슈화 되지 않는 한,
도구화 되어, 소위 패션이 지나가면 잊혀지게 될 뿐.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함은,
그것이 당위 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적이기 때문인 이치.
움직이지 않으면 숨쉬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만히 있으면, 뒤쳐지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만,
또한 그자리에서 가만있는 이를 책망하는
그 힘의 자리를 눈치 챌 수 있을 때에라야
이쪽과 저쪽이 균형을 잡게 되는.
현상의 수준에서 알건 모르건 간에
내가 원하는 대로
니가 있어주길 바라는 현실 그 아래에
내 나름대로의 '사랑: ' 이 존재함을,
그것이 나의 힘을 구가하는 수준에서는 '강요'가 될 수 밖에 없슴은.
자신이 피해자라고 대외적으로 명확히 읽혀지는 경우에라도,
소위 관찰되는 것 : 대상 의 자발성에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그 스스로에게서 비롯되어야 하는 '의지' 에 까지 이르지 못하는,
아니 굳이 '위한다'는 이름으로 너는 따라오기만 하면 돼 식의
내가 생각하기에는 최소한은 이것은 할 수 있어야지 하는 식의
'기대'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나 아닌 대상으로 향하는 마음
종속적이게 되어버리는 줄 모르고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슬픈 가면.
진화의 수순과 '순환 : 되풀이됨' 이 그러하듯이
또 굴러가게 되는 것은
세상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간여, 관여된 주체들의 '의지'의 향연일 뿐.
.
도대체
나는 진짜로
나에 대해 진정 알아보고 싶긴 한 것인가
하는 점.
.
실제 근본적인 수준에서
소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면,
실질적인 소통은 되지 않는다.
혼자
또는
여럿이
어떤 스펙트럼 에서도.
내가 그 문제를 이러이러하게 본다 로 시작되는 소통의 전제에 있어야 하는 것은,
진정으로 그 고통을 겪어 보았느냐, 정말 알기는 알고 그러느냐 로 부터,
적당하게 겪을 만한 노력을 보상과 바꾸어 "교환" 하는 소위 상업주의적 가치관 에서 기인되는
3인칭 방관자적(전지적) 시점 견지 경향과 함께,
과연, 내가 쥔 것들을 휘두르지 않고, 즉 나누는 척 하지 않고
나눌 수 있느냐의
간단한 몇가지의 필터를 고려하는 것 만으로도,
'정말 그 문제에 간여하고 싶은가' 라는 질문이 가지는
자기 자신에게로의 출발에서의 무게를 짐작하는데 용이하리라 본다.
쉽게.
그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려면 이러이러해야한다는 논리는
그 다음이라는 말.
사실, 논리 세움이 시작됨은, 종국에는, 강요의 출발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때에라야
자신이 스스로에게 강요하여 지키려고 하는 신념을 온전히 볼 수 있으며,
이것이, 그 이전까지는 부지불식간에 나 아닌 남에게도 나의 상을 위해 그 신념을 강요하고 있었음을 깨닫는 데서 출발한다는 의미가 됨은
'관계' 에 있어서의 기전이
나 와 나의 인식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나의 상정
나에 대한 인식
나를 보는 눈
가치매김
.
.
.
이 과정에 개입되는
공고화 (자기정당화, 정체성, 동일성 확보) 된 무의식적 동조로 인한
인식되지 못한 채로 전이되는
보이지 않는(의식하지 못하는) 프로퍼갠더 의 존재를 알아차림은,
굳이 적어놓지 않더라도
자기 보기 뿐만이 아닌, "사회"1의 모든 측면에서도 유효할 수 밖에 없다.
+
A society grows when old men plant trees whose shade they shall never sit in.
.그리스 속담.
- 인간 - 인류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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