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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는 마음] 기대에서 비롯되는 그림자 : 증거로서 느끼게 되는 '강요 ; 압박 ; 강제' rel. 통제에의 환상

GraU 2016. 8. 29. 13:59





책임감과 창의성은 통제에 반비례한다

사람의 내면에서 우러나는 책임감과 창의성은
외부로부터의 관리와 통제, 제약의 정도에 반비례 한다.


누구나 관리와 통제를 싫어하기 때문에
지나친 상명하달식 압박은 오히려
반작용을 불러오기 십상이다.



- 중국 최대 호텔 체인 치텐 창업회장 정난옌 (‘쾌속성장’에서)




촌철활인 : 한치의 혀로 사람을 살린다!

사람들은 스스로 타오를 수 있는
장작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책임감과 창의성을 높여 성과를 극대화하기 사용하는
관리와 통제는 마른 장작에 물을 붓는 것과 같습니다.
사명과 비전을 공유하고,
자율과 선택권을 줌으로써
장작에 기름을 부어주는 것이 리더의 역할입니다








모티베이션, 동기부여  -  목적의식 -   비전 공유  -  '하고 싶음'

자발성의 인정 -  존재의 인정 -   '받음' ,  받아들임과 받아들여짐 에 대한 경험.



교육 이 복지가 되는 이유.

흔히들 교육하면 떠오르는  그 정책의 메커니즘 말고.


사회 어디에나 있을 수 있으며,

특히 제도화 (구체화) 되어지는 어디에서나

각각의 다른 양태로  형상화(표상) 되는, 그리하여


이건 이거고,

거긴 그거인 것으로 잘 못 인식되어


내 아이를 가르칠 때와

내 상사의 훈육 이 전혀 다른  스펙트럼이 되어버리는.


가르칠 줄 알고,

가르침이 가지는 힘을 전해줄 줄 안다는 의미에서 시작되는


소위 교육이라는 의미심장한  보편지향성 에  대한 동의가 없이는

교육이 곧 최선의 복지라는 의미를


또  도구화 된 구호로 받아들일 수 밖에.



방법론 에 머물러 있는,  단순화 되고,  분명하게  공고히 된 체계로서 그 진화를 가늠짓는

현재의 .

어떻게


이렇게 물으면서도,  항상 방법론에 대해서만  표면화 된  따따부따 로 

서로  '이기기 위해' 싸우는.



다양한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 일 수 밖에 없는 이  근원적 소통의 한계는,  


과학적 방법론이 가져온  그림자 임을  공유한 상태로

실제 문제화 :  공론화 :  나아가 이슈화  되지 않는 한,

도구화 되어, 소위 패션이 지나가면 잊혀지게 될 뿐.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함은,

그것이 당위 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연적이기 때문인 이치.



움직이지 않으면 숨쉬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만히 있으면, 뒤쳐지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만,


또한 그자리에서  가만있는 이를  책망하는

그 힘의 자리를  눈치 챌 수 있을 때에라야

이쪽과 저쪽이 균형을 잡게 되는.







현상의 수준에서 알건 모르건 간에

내가 원하는 대로

니가 있어주길 바라는 현실  그 아래에


내 나름대로의 '사랑: ' 이 존재함을, 

그것이 나의 힘을 구가하는 수준에서는 '강요'가 될 수 밖에 없슴은.


자신이 피해자라고 대외적으로 명확히 읽혀지는 경우에라도,


소위 관찰되는 것 : 대상  의 자발성에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그  스스로에게서 비롯되어야 하는  '의지' 에 까지 이르지 못하는,

아니  굳이  '위한다'는 이름으로  너는 따라오기만 하면 돼  식의

       내가 생각하기에는 최소한은 이것은  할 수 있어야지 하는 식의


'기대'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나 아닌  대상으로 향하는 마음


종속적이게 되어버리는 줄 모르고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슬픈 가면.




진화의 수순과  '순환 : 되풀이됨'  이 그러하듯이

또 굴러가게 되는 것은


세상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간여, 관여된  주체들의  '의지'의 향연일 뿐.





.



도대체


나는  진짜로


나에 대해  진정 알아보고 싶긴 한 것인가


하는 점.




.


실제 근본적인 수준에서

소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면,

실질적인 소통은 되지 않는다.


혼자

또는

여럿이 

어떤 스펙트럼 에서도.


내가 그 문제를 이러이러하게 본다 로 시작되는  소통의 전제에 있어야 하는 것은,

진정으로  그 고통을 겪어 보았느냐, 정말 알기는 알고 그러느냐 로 부터,


적당하게 겪을 만한 노력을 보상과 바꾸어 "교환" 하는 소위 상업주의적 가치관 에서 기인되는

3인칭 방관자적(전지적) 시점 견지 경향과 함께,


과연, 내가 쥔 것들을 휘두르지 않고, 즉  나누는 척 하지 않고

나눌 수 있느냐의


간단한 몇가지의 필터를  고려하는 것 만으로도,


'정말  그 문제에 간여하고 싶은가'  라는 질문이 가지는

자기 자신에게로의 출발에서의 무게를 짐작하는데 용이하리라 본다.


쉽게.

그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려면 이러이러해야한다는 논리는

그 다음이라는 말.


사실, 논리 세움이 시작됨은, 종국에는, 강요의 출발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때에라야

자신이 스스로에게 강요하여 지키려고 하는 신념을 온전히 볼 수 있으며,


이것이, 그 이전까지는 부지불식간에  나 아닌 남에게도  나의 상을 위해 그 신념을 강요하고 있었음을 깨닫는 데서 출발한다는 의미가 됨은



'관계' 에 있어서의 기전이


나 와  나의 인식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나의 상정

나에 대한 인식

나를 보는 눈

가치매김

.

.

.




이 과정에 개입되는 

공고화 (자기정당화, 정체성, 동일성 확보) 된  무의식적 동조로 인한

인식되지 못한 채로 전이되는

보이지 않는(의식하지 못하는) 프로퍼갠더 의  존재를 알아차림은,


굳이 적어놓지 않더라도

자기 보기  뿐만이 아닌,  "사회"1의 모든 측면에서도 유효할 수 밖에 없다.








+


A society grows when old men plant trees whose shade they shall never sit in.


.그리스 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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