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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K 와 5G 의 결합 / 융합 : 엔터테인먼트 - 테크놀로지 - 미디어 - " and."

GraU 2019. 1. 7. 13:19




https://blog.naver.com/e_library/120055052214










https://www.google.com/search?q=partiality+%ED%8C%8C%ED%8E%B8%ED%99%94+eco+localism&safe=vss&tbm=isch&source=iu&ictx=1&fir=lPtnwX4FfSvxFM%253A%252CEGr2eNfcQ6xzYM%252C_&usg=AI4_-kRdF8q-UGIH44-dcePhcv-1qEsl1Q&sa=X&ved=2ahUKEwjZkvXfzdrfAhVMQd4KHQD_BXoQ9QEwAHoECAAQBA#imgrc=te9HBey-simtfM:












http://gojivse.tistory.com/entry/%EC%9D%B8%ED%84%B0%EB%84%B7%EC%9D%84-%ED%86%B5%ED%95%9C-%ED%98%84%EB%8C%80%EC%82%AC%ED%9A%8C%EC%9D%98-%EC%9E%AC%EB%B6%80%EC%A1%B1%ED%99%94




http://trusaf.blog.me/70003382967


 [뉴미디어_사상]_라스웰과_맥루한을_넘어서-효과_미디어패러다임에서_상징적_교환패러다임으로_20040406-trusaf.hwp




1999.1.  한국언론학보 43권,   김정탁


각주가 생략되었으므로, 되도록 화일 참조 할 것.






라스웰과 맥루한을 넘어서

- 효과·미디어패러다임에서 상징적 교환패러다임으로 -






I. 들어가는 말


20세기가 저물어 가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백년 전 20세기 시작이 이루어졌고, 그리고 매스미디어의 영향력은 20세기 시작과 함께 사람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에 있어서 전단의 효과, 제 1차 세계대전에 있어서 선전전의 파괴력, 퓰리처와 허스트 계열 신문의 치열한 판매경쟁으로 초래된 미국과 스페인간의 전쟁 등을 통해서 사람들은 매스미디어의 영향력을 실감했다. 


이 같은 상황이 커뮤니케이션 학 성립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20세기 들어서면서 독일에서 공시학(publiczistik), 그리고 미국에서 매스커뮤니케이션(mass communication)학의 등장이 이를 말해준다. 따라서 20세기는 커뮤니케이션 학에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매스미디어 영향력이 크다는 1백년 전의 가정은 오늘날 커뮤니케이션 학에 있어서 여전히 유효하다. 매스미디어 효과 연구가 대효과(great effect)에서 제한효과(limited effect)로, 그리고 중간효과(moderate effect)를 거쳐서 다시 대효과(great effect)의 분석 틀로 옮아 왔다는 것이 하나의 예다. 그리고 이 같은 가정을 부인한다면 커뮤니케이션 학의 성립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게다가 커뮤니케이션 학의 각론들, 예컨대 '문화커뮤니케이션,' '정치커뮤니케이션,' '국제커뮤니케이션,' '광고커뮤니케이션,' '대중문화론,' '저널리즘론,' '언론법제론' 등은 매스미디어의 영향력을 크다고 가정하지 않으면 논의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이 같은 사실은 매스커뮤니케이션 학 연구에 있어서 서로의 입장을 달리하고 있는 '표준커뮤니케이션'과 '비판커뮤니케이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비판커뮤니케이션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비판커뮤니케이션 학은 표준커뮤니케이션 학과 달리 매스미디어 효과가 크다는 기본 틀에서 거의 벗어난 일이 없다. 그것은 비판커뮤니케이션 학이 매스미디어가 지배이데올로기의 확산에 기여한다는 점을 기치로 내세워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해서 오늘날 인간커뮤니케이션은 크게 변화하고 있다. 20세기를 '교통통신의 세기'라고 칭하지만 20세기가 끝나는 현 시점에서도 커뮤니케이션 혁명은 멈출 줄 모르고 계속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컴퓨터와 첨단 정보통신기술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형태의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함으로써 이질적인 커뮤니케이션 양식들의 융합, 정보의 디지털화와 시각화, 종합화, 정보전달의 상호작용성과 비동시성으로 특징 되는 새로운 미디어 환경이 대두하고 있다. 이른바 '멀티미디어화'로 총칭되는 이러한 새로운 환경은 인간커뮤니케이션에 상당한 변화를 주고 있다. 


사실 20세기가 시작되었을 때 인류가 접할 수 있었던 매스미디어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전송수단(means of communication)'으로서 미디어는 출판이 주류였고, '표현수단(means of expression)'으로서 미디어는 신문, 잡지, 책뿐이었다. 그리고 20세기 초반이 되어서 방송이라는 전송수단이 등장함으로써 표현수단은 라디오, 텔레비전으로까지 확대되었다. 

그런데 1980년대부터 시작된 새로운 미디어의 본격적인 등장은 인류가 접할 수 있는 미디어의 양과 질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화를 주었다. 예를 들어 출판과 방송이라는 올드미디어(old media) 시절에는 전송수단과 표현수단의 상호교차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책과 신문은 출판(publishing)이라는 전송수단을 통해서,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방송(broadcasting)이라는 전송수단을 통해서만 메시지 전달이 가능했다. 


그러나 동축케이블과 광케이블의 등장은 이런 전송수단과 표현수단의 폐쇄적 구분을 무너뜨렸다. 특히 광케이블에 기초한 통신망을 통해서 신문, 잡지, 라디오, 텔레비전이라는 다양한 표현수단은 하나로서 그 연결이 가능해졌다. 이는 출판과 방송으로서 구분되었던 전송수단이 인터넷이라는 하나의 전송수단으로서 통합되었고, 이렇게 통합된 전송수단은 대부분의 표현수단과 연결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올드미디어 시절 전송수단과 표현수단의 독점적이고, 폐쇄적인 관계는 무너졌다.


그런데 커뮤니케이션 기술에 있어서 이 같은 중요한 진전은 인간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도 엄청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20세기 들어서면서 소개되었던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는 인간커뮤니케이션을 어떻게 하면 메시지를 동시에 많은 사람에게 전달 할 수 있는가 하는 '대량화(massification)' 쪽으로 그 지평을 넓혔다.


반면 20세기말에 개발되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는 인간커뮤니케이션을 '대중화(大衆化)' 쪽 보다는 '분중화(分衆化)' 내지는 '점중화(點衆化)' 쪽으로 가고 있다. 게다가 인간커뮤니케이션 기능조차도 시간적, 또는 공간적으로 확대하는 쪽으로 그 범위를 넓히고 있다. 


컴퓨터와 커뮤니케이션의 결합을 통한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의 비약적인 발전은 공간적으로는 원거리에 떨어진 사람과의 대화를 면대면(face-to-face) 대화의 형태로 바꾸고 있으며, 시간적으로는 언제든지 접근 가능한 동시대(real time)로 바꾸고 있다.



그렇다면 커뮤니케이션 학 연구에 있어서 매스미디어의 영향력이 대단히 크다는 가정 하에서 성립된 커뮤니케이션 학의 효과패러다임이 여전히 유효할 것인가, 또는 새로운 세기에 있어서 매스커뮤니케이션 현상이 커뮤니케이션 학의 여전히 지배적 연구 대상으로 남을 수 있을 지에 대한 의문이 심각하게 제기된다. 


그것은 커뮤니케이션 학 연구에 있어서 효과패러다임이 매스미디어 테크놀로지의 등장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데 오늘날 전개되는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는 결코 매스미디어 테크놀로지의 확장이 아니라 인간커뮤니케이션의 원초적 기능, 즉 시간 및 공간적 확장으로 보아지기 때문이다. 


이는 '매스미디어'로 대표되는 20세기형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가 매스커뮤니케이션 학을 탄생시켰다면 '멀티미디어'로 대표되는 21세기형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는 매스커뮤니케이션 학 패러다임의 종언을 알리고, 새로운 패러다임 하의 커뮤니케이션 연구의 필요성을 제시함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는 새논(C. Shannon)과 위너(N. Wiener)을 양축으로 하는 정보이론(information theory)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커뮤니케이션 현상에 대해서 서로 대조적인 입장에서 출발했는데 새논은 일방적 커뮤니케이션, 혹은 선형적 모델(linear model)에 기초한 반면 위너의 입장은 인공두뇌모델(cybernetics model)에 기초했다.

그런데 선형적 모델은 불가피하게 방향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이런 선형적 방향성은 의도성 문제와 맞물려서 '의도한 효과'가 산출되는 쪽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새논은 인간커뮤니케이션을 메시지가 송신자로부터 수신자에게로 전달되는 과정으로 설명했다. 

반면 위너는 커뮤니케이션을 시간의 진행에 따라 끊임없이 스스로 수정되는 과정으로 설명하고, 이 과정에서 정보의 피드백 현상을 강조했다. 이 두 개의 커뮤니케이션 모델 중에서 지난 반세기 이상 커뮤니케이션 현상은 주로 새논의 모델을 통해서 설명되어 왔다. 


새논의 모델은 라스웰의 유명한 커뮤니케이션 정의, 즉 '누가 무슨 메시지를 어떤 경로를 통해서 누구에게 얼마만한 효과를 갖고서 전달하느냐(Who says what in which channel to whom with what effect)'와도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 모델에 영향을 받은 버로(D. Berlo)의 이른바 'S-M-C-R(source-message-channel-receiver)' 모델은 인간커뮤니케이션, 특히 매스커뮤니케이션 현상을 설명하는 고전적 모델로서 사용되어져 왔다. 그 결과 매스커뮤니케이션은 '한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방적 행위'로 일반화되었으며, 지금까지의 커뮤니케이션 이론도 소수의 메시지 생산자와 다수의 메시지 소비자라는 새논류의 커뮤니케이션 모델이 유일하게 가능한 방식으로 자리잡아 왔다.

그러나 컴퓨터를 이용한 상호작용적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새논류의 선형적 모델은 도전 받기 시작했다. 선형적 모델은 인간커뮤니케이션 활동을 주체들간에 정보가 교환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어느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정보가 전달되는 과정으로 보아왔는데 컴퓨터와 매개·결합·융합된 커뮤니케이션 양식이 작동하는 사이버스페이스(cyberspace) 하에서는 선형적 모델은 더 이상 기능할 수 없다. 따라서 선형적 모델은 매스미디어 효과를 분석하는 데는 유용한 틀로서 활용되었으나 상호작용적 커뮤니케이션을 설명하는 데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20세기 초 매스커뮤니케이션이 '학'으로서 처음 성립할 때 매스커뮤니케이션 학은 매스미디어라고 하는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 변수가 매개되어 있었다. 이는 커뮤니케이션 학과 테크놀로지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새로운 미디어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고 있는 현 시점에 있어서 매스커뮤니케이션 학으로 대표되는 인간커뮤니케이션 연구는 새로운 변화를 모색해야 할 단계라고 본다.


따라서 본 논문은 급변하는 커뮤니케이션 환경에 적합한 새로운 연구패러다임을 찾고자 한다. 이를 위해 지금까지 커뮤니케이션학 연구를 라스웰(H. Lasswell) 류의 효과패러다임이라고 규정하고, 이 효과패러다임이 오늘날의 커뮤니케이션 현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더 이상 기능하기 힘든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그리고 효과패러다임의 한 대안으로 상정할 수 있는 맥루한(M. McLuhan)의 미디어론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맥루한 미디어론의 한계점도 함께 지적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같은 분석을 통해서 커뮤니케이션 학의 새로운 연구패러다임의 등장의 필요성을 밝히고, 그 대안으로서 상징적 교환 패러다임 등장의 불가피성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Ⅱ.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의 방향성



오늘날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전세계적으로 발명특허 이루어지는 테크놀로지의 약 90% 정도가 커뮤니케이션과 관련된 테크놀로지이고, 그 중 절반이 미디어 테크놀로지라고 한다. 따라서 오늘날 커뮤니케이션 현상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엄청난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뉴미디어 테크놀로지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고서는 그 분석의 정당성을 얻기 힘들다고 본다.


그런데 뉴미디어는 올드미디어의 상대적인 개념이다. 예를 들어 신문, 잡지와 같은 미디어들이 주류를 이루었던 인쇄미디어(printing media) 시대에 있어서 정보를 전파로 전달하는 라디오와 같은 미디어가 등장했을 때는 라디오가 뉴미디어였고, 라디오가 대중미디어로 보편화되었을 때는 텔레비전은 뉴미디어였다. 케이블과 인테넷이 등장한 지금에 있어서 다시 텔레비전과 라디오는 방송미디어(broadcasting media)로서 올드미디어이다. 


그러나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뉴미디어가 커뮤니케이션 기술 분야에 있어서 중심적인 화두로 등장하면서 개념을 둘러싼 혼란이 초래되었다. 즉 뉴미디어가 몇 개의 특정 미디어 를 지칭하자 미디어 발전에 따른 미디어의 완성형인 것처럼 인식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결과는 그 동안 뉴미디어에 관한 논의가 뉴미디어라는 용어에 관해서 충분한 설명이나 이해 없이 새롭게 개발된 특정 미디어를 소개하는데 몰두했기 때문으로 본다.

따라서 이제는 뉴미디어에 관한 논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해야 한다. 즉 단순한 뉴미디어 소개에서 벗어나서 뉴미디어의 개념에 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우선 올드미디어의 상대적인 개념인 뉴미디어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커뮤니케이션 기술 분야에서 특별히 활발하게 논의된 연유와, 1980년대에 뉴미디어로 규정된 특정 미디어들을 여전히 뉴미디어로 취급해야 하는 가이다.


지금까지 이런 문제들에 대한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실 미국이나 일본, 그리고 유럽과 같은 선진국에서는 뉴미디어라는 용어를 더 이상 사용하고 있지 않다. 현재 우리가 뉴미디어라고 부르는 미디어들은 멀티미디어라는 개념으로서 규정된 지 이미 오래이다. 따라서 뉴미디어는 더 이상 '신(new)'이 아니고 '복합(multi)'으로서 정의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멀티미디어는 인간커뮤니케이션과 관련할 때 


1) 정보형식의 통합을 통한 오관의 동시사용,


2) 컴퓨터와 커뮤니케이션의 결합을 통한 두뇌와 감각기관의 결합, 


3) 네트워크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상호작용성에 도달하는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이다. 


따라서 인간커뮤니케이션이 오관의 동시사용, 두뇌와 감각기관의 통합, 상호작용성으로 특징 지워진다고 볼 때 멀티미디어는 인간커뮤니케이션을 가능토록 하는 미디어이고, 그리고 인간커뮤니케이션을 시간적으로, 또는 공간적으로 확대하는 미디어로서 정의할 수 있다.




1. 정보형식의 통합: 오관의 동시사용


멀티미디어 용어가 처음 출현했을 때는 주로 컴퓨터나 통신 전문가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전문용어로 여겨졌으나 1980년대 말부터 그 사용이 본격화되면서 최근에는 사회 각 분야에서 보편적인 용어로 자리잡고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 멀티미디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정의하지 않고 사용함으로써 개념상의 혼란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이는 '멀티(multi)'라는 단어가 의미하듯이 여러 미디어가 디지털과 같은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전으로 융합된 결과로서 관련 미디어에 따라 이에 대한 이해의 관점이 다르고, 게다가 계속되는 기술 발전으로 아직 최종 완결이 되지 않은 진행형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멀티미디어에 대한 정의는 관련 전문가마다 다르고, 또 관련 전문가라 할지라도 입장에 따라 다르다. 즉 '정보표현'를 강조하느냐, '정보입출력'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멀티미디어에 대한 정의는 달라질 수 있다.

'정보표현'을 강조하는 경우 문자, 음성, 데이타, 도형, 정지화, 동화상 등의 정보 표현 형태가 디지털로 통합, 저장되어서 이용자에게 전달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아널로그 메시지들이 디지털로 전환되면서 문자, 음성, 화상으로 이루어졌던 각각의 메시지들이 디지털 메시지 하나로 결합되어서 정보를 저장, 유통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정보입출력'을 강조하는 경우 지금까지 커뮤니케이션 양식에 따라 구별하던 단말기들이 하나로 통합되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즉 과거에는 문자는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서, 방송은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통해서, 음성은 전화를 통해서 각각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커뮤니케이션 양식에 따라 송수신하는 단말기가 구별되었으나 앞으로는 멀티미디어라는 하나의 통합된 미디어를 통해서 정보가 입출력된다.

이 같은 멀티미디어에 대한 개념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멀티미디어는 멀티커뮤니케이션(multi communication)을 가능토록 하는 미디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멀티커뮤니케이션이란 오관을 동시에 사용하는 커뮤니케이션을 의미하는데 결국 인간커뮤니케이션이 바로 멀티커뮤니케이션의 원형이다. 따라서 멀티미디어란 결국 인간커뮤니케이션 기능의 확장을 가능토록 하는 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인쇄기 발명 이후 최근까지 매스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대가로 인간은 오관을 동시에 사용하는 커뮤니케이션을 제한 받아 왔다. 즉 감각기관 중의 하나 만으로서 매스커뮤니케이션을 이루어 왔는데 책과 신문은 눈으로서, 라디오는 귀로서 매스커뮤니케이션을 행해 왔다. 이는 분명 인간커뮤니케이션의 원형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오관으로 동시에 사용하는 커뮤니케이션은 정보의 디지털화에 의해서 가능해졌다. 과거에는 문자나 음향, 영상, 데이터는 각기 상이한 신호방식을 취함으로써 단일 미디어를 통한 통합적 전달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멀티미디어는 신호방식이 상이한 이들 정보를 '0'과 '1'이라는 이진수로 구성되는 단일의 디지털 신호로 통합해서 전달한다.



2. 컴퓨터와 커뮤니케이션의 결합: 두뇌와 감각기관의 결합


인간커뮤니케이션의 원형 중의 하나로서 감각기관과 두뇌의 결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오관이라는 감각기관이 외부로부터 메시지를 받아서 이를 즉시 두뇌에 전달하면 두뇌는 메시지를 해독하고(decode), 또 부호화 하여(encode) 메시지를 외부로 보내는 것이 인간커뮤니케이션의 원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에 있어서 강조된 것은 메시지를 수용하고, 표현하는 테크놀로지이었지 메시지를 해독하고, 부호화 하는 테크놀로지가 아니었다. 즉 책,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과 같은 표현미디어는 인류의 긴 역사를 통해서 꾸준히 발전해 왔지만 메시지 해독과 부호의 테크놀로지는 오늘날 컴퓨터의 등장으로 비로소 가능해졌다. 

그리고 표현미디어 테크놀로지와 해독·부호의 테크놀로지는 독립적으로 발전해 오다가 최근 들어 컴퓨터와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의 연결(computer &communication, compunication)이 이루어짐으로써 감각기관과 두뇌의 접합이 기술적으로 가능해졌다.

이처럼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과 함께 주목받기 시작한 최근의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가 목표로 하는 것은 기존의 매스커뮤니케이션 기능의 확장이라기보다는 인간커뮤니케이션의 원형을 시공간적으로 확장하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을 목표로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즉 시간확장의 역할은 멀티미디어 내지는 컴퓨터가, 공간확장의 역할은 인터넷이나 인공위성이 각기 담당하고 있다.


3. 네트워크 커뮤니케이션: 상호작용성


전파미디어와 인쇄미디어가 주축이 된 매스커뮤니케이션은 기술적인 한계로 인해 송신자가 수신자에게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준이었다. 이 같은 제약 속에서 멀티미디어의 등장은 지금까지 매스미디어에 의해 주도되었던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극복하고 상호작용적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토록 한다. 인터넷, 쌍방향 케이블 텔레비전, 전자사서함과 전자게시판, 원격화상회의 등이 대표적인 예다.

상호작용적 커뮤니케이션은 일차적으로는 미디어 이용자들이 미디어가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정보만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선별적으로 접할 수 있다는 선택성을 제공한다. 그렇지만 긍극적으로 미디어 이용자와 이용자 상호간, 혹은 미디어 이용자와 미디어 시스템간에 즉각적이고도 상호작용적인 피드백이 가능하다. 이런 상호작용성은 단순히 1 대 1 커뮤니케이션뿐만 아니라 다수의 사람이 동시에 쌍방향 커뮤니케이션(mulitipoint-to-multipoint)을 할수 있는 다중적 상호작용(multiple interaction)을 포함한다.

결국 다중적 상호작용 하에서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은 송신자와 수신자의 구분을 사실상 무의미하게 만든다. 리얼타임으로 이루어지는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다중적 상호작용 하에서는 송신자이면서 동시에 수신자가 되는 송·수신 혼융의 상황이 전개된다. 따라서 컴퓨터와 매개·결합·융합된 커뮤니케이션은 커뮤니케이션의 네크워크화를 신속하게 이룬다. 

멀티미디어가 일반화되기 위해서는 방대한 양의 디지털 정보를 고속으로 전송해 줄 수 있는 전송망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데이터, 문자, 음성뿐만 아니라 동영상 정도도 리얼타임으로 전송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무선전파나 동축케이블, 전화케이블만으로는 전송용량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광케이블, 종합전송통신망과 같은 고속전송망을 기반으로 하는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이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다.

또한 고용량의 초고속정보통신망은 기존의 전화선과 케이블 텔레비전 망, 기업의 지역통신망 등과 상호 연결됨으로써 가정과, 기업, 정부기관이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망으로 연결된다. 현재 미국에서 국가프로젝트로 추진 중인 초고속정보통신망은 전송망 형태로서 대표적인 멀티미디어이다. 그리고 각국에서 경쟁적으로 추진 중인 망으로서의 멀티미디어가 완성되면 인텔리전트화 된 하나의 망에 의해서 사회 구석구석이 우리 몸 속의 혈관처럼 연결되어 쌍방향으로의 정보전송이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커뮤니케이션이 문제는 단순히 발신자/수신자, 생산자/소비자, 지배자/피지배자의 문제로 나타나지 않는다. 탈 중심화 된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는 발신자를 수신자로, 생산자를, 소비자로, 지배자를 피지배자로 만들며, 이렇게 함으로써 과거 커뮤니케이션을 지배했던 이해논리를 뒤엎는다. 그럼에도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에 의해서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새로운 담론이 과거의 매스미디어 효과론의 논리에 의해서 크게 제한 받고 있다.



Ⅲ. 미디어패러다임의 전개: 맥루한의 미디어론


맥루한(M. McLuhan)은 급속하게 변화하는 미디어 테크놀로지에 가장 민감하게 대응했던 학자이다. 그는 인간커뮤니케이션을 가장 왜곡시켰던 미디어로서 인쇄기를, 그리고 왜곡된 커뮤니케이션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킨 미디어로서 텔레비전을 들었다. 그의 이 같은 극단적인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맥루한은 텔레비전의 등장으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초래할 변화에 대해서 앞서서 예견한 사람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문화적 정체성의 근본적인 변화는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 이루어진다. 인쇄문화 지배하에 있었던 근대사회가 이성적이고, 자율적이며, 중심화 되고 안정된 개인을 길러냈다면 오늘날 사회는 근대적 주체와는 전혀 다른, 심지어 그것에 대립되는 정체성의 형태들을 길러내고 있다. 따라서 인간과 미디어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새로운 미디어에 대한 참신한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런 와중에 맥루한은 커뮤니케이션학 연구에 있어서 참신한 이해의 계기를 만들었다.

맥루한은 그가 생존하고 있을 당시에도 세인의 큰 관심을 끌었지만 그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측면이 많다. 더욱이 멀티미디어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기존 커뮤니케이션 학 연구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한 현 시점에서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오늘날 멀티미디어에 대한 이론적 근거가 맥루한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은 맥루한 이론의 탁월성을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따라서 "그가 주장한 내용의 대부분이 1964년 당시 보다 1994년의 현실을 설명하는 데 훨씬 더 적합하다"는 평가는 매우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이제까지 미디어에 대한 맥루한의 통찰은 신비한 종교의 교리처럼 이해되었다. 그를 믿는 사람에게는 불변의 진리로서, 그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한낱 궤변으로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1960년대 미국의 저항문화 속에서 잠시 피었다가 사라졌던 맥루한의 통찰력이 1990년대 멀티미디어의 디지털 문화 속에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본다.

울프(T. Wolf)는 "만약 맥루한의 주장이 옳다면 맥루한은 뉴턴, 다윈, 프로이드, 아인슈타인, 파블로프이래 가장 중요한 사상가일 것이다"고 주장하며, 디자드(W. Dizard)는 "맥루한은 멀티미디어를 실현시키는 원동력이라 할 수 있는 기술, 경제, 그리고 정치력의 융합에 의한 정보 및 지식혁명의 시대에 대한 예견을 30년이나 앞서 예견함으로서 오히려 인정받지 못한 학자이다"고 아쉬워한다.


1. 감각비율에 따른 미디어결정론


맥루한의 미디어론은 기본적으로 미디어가 인간, 사회 및 문화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설명이다. 특히 테크놀로지에 따른 인간감각의 변화라는 측면과, 이로 인한 사회변화라는 두 측면이 맥루한 미디어론의 요체이다. 예를 들어 원시시대의 인간은 언어와 도구와 같은 미디어를 발명하면서 지능이 낮았던 자신의 두뇌를 폭발적으로 발전시켰고, 그 결과 인간은 다른 포유류와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띠었다. 그 뿐 아니라 미디어는 우리의 사고와 행동 유형, 그리고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을 바꾸었다.

이것은 미디어가 사람의 오감 사이의 균형을 변화시키면서 어느 하나의 감각을 으뜸으로 만들면서 정보에 대한 사람의 감각과 사고와 행동을 바꿔 놓은 결과이다. 따라서 인간은 새로운 환경을 만들고, 공간관계도 새롭게 인식할 수밖에 없다. 즉 새로운 미디어가 새로운 감각 균형을 낳고, 새로운 감각균형은 새로운 환경을 낳는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오관을 동시에 사용하는 커뮤니케이션을 하는데 오관 중 감각기능하나가 확대되거나, 또는 손상을 입으면 감각기관 사이의 균형이 깨지면서 새로운 감각배분의 원칙이 발생한다. 시각장애자의 경우가 단적인 예인데 시각장애자가 어느 날 개안수술을 받아서 시각을 회복하는 경우 그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은 분명 과거와 달라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감각의 외부확장으로서 기능 하는 미디어의 등장은 인간 감각비율의 균형을 깨뜨리는 경우가 많다. 인쇄기와 같은 매스미디어의 등장은 인간커뮤니케이션을 시각 하나에 의존토록 함으로써 감각균형을 깨뜨렸다. 또 텔레비전의 등장은 시각이나 청각 하나에 의존토록 하는 단일감각 커뮤니케이션에 종지부를 찍음과 동시에 인간의 세상에 대한 인식을 엄청나게 바꾸었다.

이처럼 인류가 살아왔던 각각의 시대는 그 시대마다 인간이 미디어를 통해서 입수하는 정보형태에 따라서 다르게 형성되어 왔다. 따라서 맥루한에게는 미디어의 메시지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미디어가 인간의 감각형태를 변화시키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신문은 그 지면이 모자이크적, 불연속적이므로 그것을 수용하는 독자도 기사의 내용에 관계없이 모자이크적, 불연속적 인지방식으로 흐른다. 따라서 사고 형식이나 태도도 독립적으로 변한다. 즉 미디어가 갖는 특성은 그 내용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작용한다고 하는 '미디어결정론(media determinism)'이 등장한다.

사실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커뮤니케이션 내용에만 정신을 팔아왔는데 이 기간 동안 미디어는 인간과 사회에 심대한 영향을 미쳐 왔다. 즉 인간이 내용만 강조하고, 미디어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미디어가 인류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지각할 기회를 잃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미디어들이 일으키는 혁명적 변화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처할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미디어의 내용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것들은 인간관계에 틈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오히려 미디어의 내용은 우리가 미디어 자체의 본성을 이해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일반 연구자들은 미디어 메시지의 내용이라는 측면에 관심을 두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미디어를 통해서 방영된 내용에 어떤 반응을 행사하는 가에 대해서 골몰하고 있다.

오늘날 미디어는 의미의 중립적 전달자이기보다는 그 자체가 인간의 의식, 그리고 사고를 형성하는 중요한 의미생성 과정의 한 부분으로서 작용한다. 이는 미디어가 인간 정신의 구체적 표현이며, 그 자체가 의미 분석의 핵심적인 텍스트가 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디어가 인간 기능의 확장이더라도 미디어가 미디어 자체로서 기능하지 않고, 인간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기능한다. 미디어가 자신의 언어와 문법을 지니고 있다는 맥루한의 주장은 미디어가 의사소통 과정에 있어서 단순한 중립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2. 미디어발전에 따른 역사발전


미디어에 대한 이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맥루한은 '인쇄술적 인간의 형성(Making of Typographic Man)'이라는 부제가 붙은「구텐베르크 은하계(Gutenberg Gallaxy)」와 '인간의 확장(Extension of Man)'이라는 부제가 붙은「미디어의 이해(Understanding Media)」에서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변화에 따른 문화의 변천을 이야기했다. 그는 이 책들에서 세 가지 중요한 테크놀로지의 변화 - 음성자모(音聲字母)의 발명,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 마르코니의 전신발명 - 가 인류 사회의 형태와 문명·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맥루한은 인류의 역사를 1) 문자시대, 2) 구텐베르크, 혹은 개인주의의 시대, 그리고 현재의 3) 전기·전자시대로 크게 세 시대로 구분하고, 이 같은 시대 구분을 통해서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가 구어(口語) 형식에서, 인쇄(印刷) 형식을 거쳐 전자(電子) 형식으로 변천해 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형식의 변화는 인간집단을 부족화(部族化)에서, 탈부족화(脫部族化: detribalization)로, 다시 재부족화(再部族化: retribalization)로 바뀌도록 만들었다고 파악했다.

사실 음성언어가 등장하기 이전 시대는 귀가 지배적인 감각이었고, 사람들은 부족의 세계, 곧 열정과 신비와 공동참여의 청각적 공간에서 살았다. 이들의 기본적인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는 언술(speech)이었다. 언술과 귀의 연합이 부족사회로 하여금 구어문화를 이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구어문화에는 말을 못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부족민들은 모두 비슷한 지식을 향유하는 인간이었다. 따라서 구어문화에서는 개인주의나 전문화라는 것이 있을 수 없었다.

그 후 희랍시대에서 음성언어가 생겨나면서 귀는 눈에게 커뮤니케이션의 지배적 역할을 내주고, 감각의 균형은 비교적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눈의 세계로 옮아갔다. 음성언어는 읽고 쓰는 능력을 요구하는 테크놀로지이어서 오관 중에서 눈을 가장 중요한 위치에 올려놓았다. 즉 문자독해 능력은 인간에게 귀 대신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따라서 음성언어는 눈의 연장으로서 작용하게 되었다.

이처럼 시각적 인식을 중요시하는 미디어는 인간을 소리, 신체적 접촉, 즉각적 반응 등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내성적이고, 이성적이며, 개인적인 인간으로 변화시켰다. 사실 음성언어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글자들을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소리들에 결합시킨 조합에 불과하다. 즉 음성언어는 소리와 시각의 분리를 가져온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따라서 구어적 부족문화의 다양성과 복합성은 언어라는 단순한 시각적 형태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음성언어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기보다는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 부족사회가 와해하는 탈부족화 현상이 나타났다. 즉 사람들은 서로 떨어져 나가면서 소외되고, 그리고 정서적이고 감각적인 생활은 점차 사라졌다. 또 글을 읽으면서 지식이 증가하고, 이와 비례해서 이성도 자라났으며, 그 결과 문명이 자리잡았다.

또 음성언어로 쓰여진 글은 글줄을 따라서 내용을 이해하기 때문에 음성문화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동시적(同時的)이고, 통시적(統時的)인 사유보다는 순차적(順次的: sequential)이고, 선형적(線型的: linear)인 사고에 점차 익숙해졌다. 그 결과 사람들은 논리적(logical) 사고를 하며, 분류와 범주화를 선호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지식도 보편적이기보다는 국지화와 전문화의 길로 나아나고, 사회기능도 분업화되었다. 따라서 사회계층이 생겨나고, 국가주의(nationalism)가 생겨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처럼 인간이 언술에만 의존하던 구어문화 시대에는 시각과 청각을 함께 사용함으로써 감각의 균형을 이루었다. 이후 음성언어가 등장함으로써 커뮤니케이션 상에 있어서 시각과 청각의 분리가 이루어지고, 또 청각보다는 시각이 중심적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등장하면서 감각 균형은 깨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 시기만 해도 구어적 전통이 강했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감각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하자 구어문화는 급속히 몰락하고, 문자문화가 폭발적으로 연장·팽창되었다. 인간은 책을 통해서 처음으로 혼자서 읽고 생각하게 되고, 결국 개인주의가 싹텄다. 이것은 정치적으로는 각자의 '관점'을 만들어서 이데올로기의 탄생까지도 가능케 했다. 또 인쇄는 분석적, 순차적, 단계적 공정을 통해 무한정의 반복으로서 이루어지는데 이는 결국 기계화의 원리로서 온갖 기계화의 청사진 역할을 했다. 이것이 경제적으로는 조립라인과 산업사회의 탄생을 가능케 했다. 따라서 맥루한이 꺼리는 자본주의, 세속주의, 산업주의, 민족주의, 전문화 및 사회주의는 모두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소산이다.

구어문화 시대의 인간은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오관을 골고루 균형 있게 사용하는 온전한 전인(全人: the whole man)인데 반해 인쇄문화 시대의 인간은 시각에만 편향된 조각난 인간이다. 이 조각난 인간은 회화적 시각 공간에서조차도 선형적, 순차적, 일률적 단위들로 재해석되고, 재배열된 이성의 지시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

이 같은 삶의 방식이 매사를 정확히 측정해야 한다는 열정으로 가득 찬 문예부흥 시대의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이 때문에 데카르트와 뉴턴과 같은 인과관계에 입각한 세상의 이해, 원근법에 따른 그림 구성, 이야기체적 연대기로 구성된 문학의 글쓰기, 그리고 사고에 있어서 내관(內觀: introjection)이라는 심리적 양태들이 나타났다. 두뇌와 심장이, 권력과 도덕이, 예술과 과학이, 시와 음악이, 사고와 행동이 분열되었다.

그런데 인쇄기술은 인간이 심리적 파편화를 일으키면서도 동시에 사회적 구심점을 만들었다. 문예부흥기에 대량으로 생산된 책들과 인쇄물들이 퍼져감에 따라 인쇄기는 지방어들을 통합시켜 하나의 국어, 즉 모국어로 승격시킴으로써 내셔널리즘을 탄생시켰다. 즉 모국어는 사람들을 획일적으로 결속시키는 미디어 역할을 했고, 모국어를 중심으로 동질화되어 가면서 내셔널리즘이 싹텄다.

결국 인쇄술의 등장과, 그 결과 파생된 '읽기 문화'는 합리적이거나 이성적 행위로 특징 지워지는 서구적 삶의 방식을 사람들로 하여금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믿게 만들었다. 이에 대해 맥루한은 그것은 문자로 대표되는 시각의존형 미디어가 인간에게 강요하는 '시각적 공간' 속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라고 지적한다. 맥루한은 '무의미한 추상체로서 문자 발명과 함께 시각은 다른 감각들로부터 분리되었고, 이는 시각적 공간이 형성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인쇄문화 시대는 19세기 말 전신의 발명과 함께 그 막을 내렸다. 맥루한의 표현을 빌면 마르코니의 전신이 구텐베르크의 은하를 침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르코니의 전신은 최초의 전기·전자미디어로서 그 후 인간에게 소개된 전화,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 컴퓨터 등은 모두 전기·전자미디어이다. 

전자미디어의 등장은 전혀 새로운 사회의 출현을 의미한다. 그것은 통합된 지구촌 공동체로서 모자이크의 세계이다. 또 신부족주의(neo-tribalism)가 전자라는 테크놀로지의 '기(氣)'를 받고 일어나는 세계이기도 하다. 이 새로운 세계는 모든 것이 모든 것과 공명하는 옛날 부족사회의 공명함과 같아서 사람들은 전반적 인식을 한다. 이 때문에 지난날의 유물들 - 가치, 조건반응이나 태도와 같은 개념, 관점 같은 것들 - 은 의미를 잃는다. 이 같은 세계를 가리켜 '공명공간(共鳴空間: echo chamber),' 또는 '음향공간(acoustic space)'이라고 부르고 맥루한은 이를 '지구촌(a global village)'이라는 개념으로 재정의 했다.

물론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했다고 해서 기존의 미디어가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음성언어의 등장이 구어적 담론을, 전화가 편지를, 텔레비전이 읽기와 쓰기를 완전히 소멸시키지 못했다. 따라서 맥루한의 미디어 결정론적 입장을 문제삼지 않더라도 전자미디어가 전자적 인간을 창조하고, 나아가 지구촌을 형성한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성급한 판단일 수 있다. 따라서 맥루한이 지적하는 새로운 미디어에 의한 의식과 문화의 변화는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이 기존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파괴함으로써 초래되는 결과라기보다는 기존의 미디어가 가졌던 기능을 변화시킴으로써 귀결되는 효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포스터(M. Poster)도 비슷한 맥락에서 맥루한의 커뮤니케이션사 서술을 더욱 계승 발전시켰다. 그는 정보기술과 전자미디어 정보의 확산은 '사회적 관계의 연결망'을 변화시킴으로써 우리들의 생활방식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는 방식에 심대한 영향을 미쳐왔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에 기초해서 인류의 역사를 구술의 시대, 문자교환의 시대, 전자매개의 시대로 크게 세 시대로 구분했다.

구술(oralism)시대는 인간의 상호작용이 대면적이었다. 생활방식은 고정되어 불변하는 것이었으며, 자아는 대면적 관계에 둘러싸인 채 발화의 소재지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기호는 이러한 정착화된 생활방식에 상응하는(corresponded) 것이었으며, 상징적 교환은 공동체에 이미 알려져 있고, 수용된 것들을 강조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었다. 

문자교환(written exchange) 시대는 기호가 표상적(representational) 역할을 하고 있었고, 자아는 합리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개인적 책임이 강조되었다. 그렇지만 자아는 가상의 합리적 자율성을 중심 축으로 하기 때문에 주체로서 자처하지만 실은 주어진 기능을 담당할 뿐인 수행자(agent)로 구성된다.

전자매개(electronic mediation) 시대에서 기호는 정보적 시뮬라시옹의 문제로 확대되었다. 이 시대에 있어서 기호의 비표상적 특질이 중요하다. 따라서 자아는 끊임없이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탈중심화되고 분산되고 다중적이며, 다중적 자아형성의 지속적인 과정 속에서 소용돌이친다. 그 이유는 주어진 대상을 나타내는 기호가 아니라 기표의 흐름이 이 시기의 주된 특징이기 때문이다.

포스터의 이 같은 인식은 미디어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기표와 기의의 '자의적인' 관계를 생략한 맥루한의 입장과는 뚜렷이 구분되면서 기표와 기의의 '자의적인' 관계를 강조한 후기구조주의 이후의 인식과 상통한다. 이 같은 입장의 차이는 맥루한이 커뮤니케이션 주체로서 인간을 '해석하는 존재'가 아니라 '감각적인 존재'로 설정한데서 비롯된다. 즉 맥루한은 인간을 로크적 인식론의 전통에 따라서 감각에 의해서 지배되는 동물로 취급하고, 이 같은 입장에서 동물에서 일어나는 감각구성의 변동, 특히 텔레비전이 초래한 변동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포스터의 커뮤니케이션사 서술은 '상징적 교환'에 기초한 변화의 모형, 즉 '정보양식(mode of information)'에 입각해 있다면 맥루한의 커뮤니케이션사 서술은 인간커뮤니케이션의 '기능론적 확대'와 관련되어 있는 기술결정론에 입각해 있다. 따라서 포스터의 커뮤니케이션사 서술은 인간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맥루한의 기계론적 서술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 즉 상징적 교환패러다임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다.



Ⅳ. 상징적 교환패러다임의 등장


1. 탈 근대성 커뮤니케이션 이론


우리가 근대성(modernity)이라고 부르는 선형적 심리구조와 가치체계는 자연발생적이기보다는 음성언어를 사용해서 읽고 쓰는 과정에서 생겨난 지각관습의 산물로서 파악된다. 근대사회(modern society)가 이성적이고, 자율적이며, 중심화 되고, 안정된 개인을 길러냈다면 오늘날 현대사회는 근대적 주체와는 전혀 다른, 심지어 그것에 대립되는 정체성들을 길러내고 있다.

이 같은 변화는 상당 부분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행위 내지는 미디어 사용법으로부터 초래한다. 예를 들어 근대 사회의 시각적 공간은 획일적이고, 연속적이며, 분절된 음성언어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사람들이 특정 시대에 갖는 공간적 감각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미디어, 즉 인쇄미디어의 등장으로 인해서 생겨난 기술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쇄미디어는 '배타적(exclusive)' 미디어이므로 사람들을 조각 내고, 사회의 계층화, 일의 분업화 및 전문화와 같은 '외파적(explosive)' 효과를 가져온다. 또 인쇄미디어는 시각을 중요시하는 미디어이므로 인간을 소리, 신체적 접촉, 즉각적 반응 등에서 멀어지게 하고, 이는 결과적으로 인간을 내성적이고, 이성적이며, 개인적으로 변화시킨다.

그런데 오늘날 지배적 미디어로 자립잡고 있는 전자미디어는 인쇄미디어와는 정반대로 작용한다. 전자미디어는 '수용적(inclusive)' 미디어로서 이성적이고, 조각난 사람들을 퇴행시키고, 단편적인 것을 한군데로 통합시킴으로써 인간을 재부족화시키는 '내파적' 또는 '내부확산적(implosive)' 효과를 일으킨다. 특히 텔레비전으로 대표되는 전자미디어는 오감을 사용하는 방법과 사건에 반응하는 전체 방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서 결과적으로 인간의 전체 삶, 그리고 전체 사회를 변화시킨다. 맥루한에 따르면 텔레비전은 잊혀진 옛날의 청각·촉각 문화를 되살려내고, 세계를 누구나 서로 관련을 맺도록 하는 '지구촌'으로 만드는데 주역을 담당한다.

우리는 그 동안 출판문화 속에서 출판의 선형성으로 말미암아 연속적, 또는 연쇄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데 익숙했다. 그렇지만 전자미디어 시대에서는 전기가 지니는 순간적인 속도로 인해 연속적, 또는 연쇄적으로 사물을 파악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인식은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부분에서 전 분야를 주목하게 된다. 또 전기가 지닌 속도감으로 인해서 중심에서 주변을 향한 완만한 확산이 아니라 순간적인 내파가 이루어진다. 그 결과 중심-주변적 구조를 지닌 우리들의 세분화되고 전문적인 문명들의 부분들은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 속으로 순간적으로 재편성된다.

따라서 출판문화 시대의 '선형적 명료성'은 과거 인쇄매체의 등장으로 소멸되었던 '총체적 즉각성(feeling of all-at-onceness)'으로 대체되고 있으며, 이 같은 대체는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고, 시각적이기보다는 촉각적이고, 파편적이기보다는 통합적인 성격을 지닌 인쇄문화 이전의 인간형을 부활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처럼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는 오늘날 인간 및 사회 분석에 있어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럼에도 현대사회의 주요 이론가들은 언어와 커뮤니케이션보다는 행위(노동)와 구조(관료제)를 강조했다. 맑스와 베버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맑스는 계급투쟁을 통한 이성적 개인의 해방을 이론화했으며, 베버는 변하지 않는 사회조직들 안에서 도구적 합리성이 고착화되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커뮤니케이션 이론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런데 근대 이후 성립된 계몽주의 커뮤니케이션 이론의 이데올로기적 힘은 인쇄 테크놀로지를 근대성의 사회이론 속에 접합시키려는 움직임 속에서 나온다. 인쇄커뮤니케이션을 메시지가 끊임없이 생겨났다 없어지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데 구두커뮤니케이션과 비교할 때 책 안에 사용된 단어의 물질성을 통해 저자, 즉 지식인과 이론가의 권위를 조장한다. 그 결과 책을 읽는 사람을 비평가로, 책을 쓴 사람을 작가로 만든다. 인쇄의 이러한 특질들은 정치적·종교적 예속의 네트워크 바깥에서 홀로 읽고, 사유하는 비판적 개인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낸다. 따라서 언어 내지는 커뮤니케이션이 사회 자체보다 선행하는 경향은 명시적이든, 암시적이든 있기 마련이다. 

하버마스(J. Habermas)와 보드리야르(J. Boudrillard)는 서로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언어와 커뮤니케이션 문제를 비판이론에 종속시키거나 통합시키면서 나름대로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발전시켜 왔다. 하버마스의 경우 "의식철학의 패러다임은 완전히 고갈되었다"라고 선언하면서 그 대안으로 의사소통, 또는 상호이해의 패러다임을 주창했다. 

이에 따라 하버마스는 자신의 이론을 일상의 평등주의적 공간인 '생활세계' 속에 비판을 위치시키는 상징적 상호작용이론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의사소통'이 모든 발화상태들에 내재하는 '보편타당성 요청'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보고, '의사소통'은 민주주의적 공공영역을 만들어내는데 존재론적 보루의 역할을 한다고 파악했다. 또 글쓰기, 활자인쇄, 전자미디어와 같은 의미 있는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발전에서 보듯이 미디어는 이런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확장시킨다고 보았다.

한편 보드리야르는 미디어가 일상의 한복판에서, 즉 이성과 비이성의 계몽주의적 대립을 벗어나는 지점에서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짐으로써 근대 사회 및 근대적 주체의 개념이 해체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미디어는 재현의 논리, 자유/결정론의 이항대립, 그리고 무엇보다 자유로운 주체라는 개념에서 실재와 진리, 모든 역사적·정치적 진리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마법의 도구라는 개념으로 변화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미디어에 중독되는 것, 미디어 없이 살수 없는 것은 커뮤니케이션, 문화, 정보 등에 대한 욕망 때문이 아니라 진리와 허위의 전도, 미디어의 작용으로 야기된 의미 파괴의 결과로서 파악하고 있다.

하버마스와 보드리야르의 이 같은 분석은 미디어가 여전히 일방향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전개된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들의 삶 속에서 급속히 팽창하는 인터넷과 같은 쌍방향적이며, 탈중심화 된 미디어, 즉 주체구성의 메커니즘을 재구축할 수 있는 기회를 새롭게 제공하는 미디어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서 성립된 분석은 아니다. 만약 이 같은 점을 고려한다면 하버마스와 보드리야르의 의사소통 내지는 미디어중심의 사회분석은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다.

산업사회는 인간중심 사고가 극도로 확장된 사회이다. 삶의 편리와 복지를 위한다는 명분 하에 인간은 자연을 철저히 경제의 대상으로 삼고, 노동도 그 안에 예속시켰다. 이 때문에 산업사회에서 생산수단의 원천은 노동이고, 기계는 노동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 발명되었으며, 커뮤니케이션도 이 같은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다. 그렇지만 지식과 정보사회에서 생산수단은 노동에서 커뮤니케이션으로 바뀌고, 기계의 역할은 미디어가 대신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하에서 근대성에 입각한 커뮤니케이션론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2. 주체와 객체의 융합: 상호작용 공간 


오늘날 전자우편 서비스와 전자게시판에는 이야기들이 넘쳐흐르고 있다. 이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한번도 만난 적이 없으며, 아마도 만나지 않을 사람들과 서사들을 연관짓는 것을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서사들은 때때로 사람들의 삶에서 직접 생성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은 꾸며낸 것임에 틀림없다. 서사의 이 같은 폭발은 기존의 미디어 테크놀로지와는 전혀 다른 테크놀로지에 의존한다. 그것은 값싸고, 누구나 쉽게 변형할 수 있으며, 쉽게 이용할 수 있고, 메시지의 교환속도가 빠른 새로운 미디어 테크놀로지이다. 그것은 수많은 수신자라는 기존 미디어 모델의 특징을 탈중심화 된 전화모델과 결합시킨다.

이처럼 서사의 새로운 잠재력이 확장되면서 동시에 음성과 음성, 그리고 영상이 텍스트와 합쳐진다. 게다가 텍스트, 이미지, 음성을 동시에 전송할 수 있는 웹조차도 탄생했다. 웹의 등장과 함께 사진 파일들과 음성 파일들을 텍스트 속에 함께 포함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하이퍼텍스트의 링크들을 텍스트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같은 방식으로 웹과 관련되어 있는 다른 테크놀로지들도 탈 중심화가 이루어진다.

오늘날 전자미디어의 등장으로 생겨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양식이 주체형태를 문제삼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즉 주체가 객관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 그러한 세계에 대한 주체의 관점, 그 세계에서 주체의 위치 등이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양식이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따라서 서사의 위치 문제는 오늘날 커뮤니케이션 토론의 중심에 서 있다.

맥루한은 바로 이 점을 '지구촌'이라는 개념을 갖고서 일찍이 간파했다. 맥루한의 미디어와 현대문명에 대한 통찰력과 이론적 근간은 '지구촌'이라고 불리는 공명공간 내지는 음향공간이다. 오늘날 공명공간은 컴퓨터 등과 같은 미디어를 통해서 커뮤니케이션하기 위해서 들어가는 공간, 즉 사이버공간(cyber space)으로 변화하고 있다.

사이버공간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물리적 공간과는 분명히 다르다. 전자시대에 사는 오늘날 인간은 물리적인 한계 속에 존재하는 과거의 인간과는 다르게 자신의 전자대리인을 통해서 무한한 공간 속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음을 경험한다. 따라서 기존의 공간 개념은 하나의 통합된 장으로 바뀐다. 이렇게 볼 때 맥루한의 지구촌 개념은 단순히 '세계가 한 지붕 밑에'라는 인간상호 작용의 외형적 변화의 의미라기보다는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경험의 질적 변화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전자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은 어느 특정 시각에 어느 한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여러 곳에 부재(absence)하면서도 현존(presence)한다. 기존의 물리적 관점에서 보면 결코 존재할 수 없지만 가상현실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개별적 존재를 넘어 편재(omnipresent)할 수 있다. 즉 전자커뮤니케이션이 만들어내는 엄청난 거리와 시간적인 즉각성의 결합은 발화자와 수용자를 떼어놓기도 하고, 그들을 서로에게 데려가기도 한다.

그리고 이 같은 상황은 기존에 당연시되던 주체와 객체의 경계구분을 모호하게 만든다. 예컨대 오늘날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는 소수가 다수에게 정보를 전달한다는 전통적인 커뮤니케이션 개념을 붕괴시키고 있다. 즉 매스커뮤니케이션 시대에서는 소수의 메시지 생산자와 다수의 메시지 소비자라는 모델이 지배했다. 그렇지만 오늘날 전자미디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은 메시지 생산자와 메시지 소비자의 경계도 허물어짐으로써 다수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이 지배적 커뮤니케이션으로 변모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이버 공간에서는 어떤 화자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사이버 공간 뒤에 있는 가장 기본적인 생각은 다수가 다수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사이버 공간의 이야기들은 더욱 개성을 띠고, 상호작용적이고, 개인주의적이 된다. 또 서로 다른 포럼에서 다양한 청중들에게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가 이루어진다. 즉 커뮤니케이션의 주체는 쌍방형 커뮤니케이션을 가리키는 기술적 용어인 상호작용의 기제를 통해 새롭게 구성된다. 

그런데 전자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는 의미심장하게 이러한 가능성을 더욱 확장시키고 있다. 전자미디어 테크놀로지에 의해서 발현되는 전자문화는 근대성을 뛰어넘는 사회 형태의 문제, 그러니까 포스트 모던사회의 가능성 문제를 제기한다. 따라서 전자문화는 주체 구성의 과정에서 언어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는 이론들, 읽는 사람과 쓰는 사람을 비평가와 저자라는 안정된 지점에서 바라보는 관점을 해체하는 이론가들, 즉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을 조장한다. 

인쇄가 주체에 대한 이해를 매개할 때, 언어는 재현적인 것으로, 즉 대상을 지시하기 위해서 사유자들을 환기시키는 기호들의 자의적인 체계로 이해된다. 반면에 전자미디어가 주체에 대한 이해의 한 요소가 될 때 언어는 수행적이고 수사학적인 것으로, 즉 주체에 대한 능동적인 형상화와 자리잡기로 이해된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체제가 널리 퍼져나가면 주체는 단지 부분적으로 안정되며, 시공간의 다양한 지점들에서 반복적으로 재구성되며, 자기동일적이지 않고 항상 부분적으로 타자에게 이해된다. 맥루한은 이 같은 커뮤니케이션 현상을 재부족화의 길로서 표현했다.

그런데 맥루한이 재부족화의 개념은 리오타르에 의해서도 찾을 수 있다. 리오타르는 근대사회는 과학서사에서 그 정당성을 끌어온다고 주장하면서 부족사회, 또는 전근대적 사회의 비과학적 서사구조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첫째, 기존사회 제도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이야기들, 둘째, 서로 다른 많은 언어형태들을 포함하는 이야기들, 셋째, 서사의 한 부분이면서 동시에 이전에 서사를 들었던 발신자와 또 다른 발신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청자들에 의해 전수된 이야기들, 넷째, 이야기가 반복될 때마다 그것을 이상한 방식으로 동시 작용시킴으로서 과거와 현재를 단축하는 비선형적 시간성을 구축하는 이야기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다섯째, 모든 사람들에게 서술자의 권한을 주는 이야기들로서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리오타르는 오늘날 커뮤니케이션 시대의 작은 서사는 제한된 방식이긴 하지만 전 근대적 언어게임을 재기능화 한다고 주장한다. 부족신화와 마찬가지로 작은 서사는 차이를 유효화 하는 방식을 통해서 언어게임의 이질형태성을 보여준다. 근대서사의 형태들과 달리 현대의 작은 서사는 창조의 역할을 강조하며, 또 알려지지 않은 것과 예상하지 못한 것들이 출현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수용한다.

오늘날 이런 포스트모던 서사의 예로서 인터넷과 함께 발달하고 있는 버추얼 리얼리티 테크놀로지를 들수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 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터넷은 전체화하는 제스처 없이 이야기와 지방서사들의 증식을 북돋우며, 발신자와 수신자를 대칭관계 속에 위치 짓는다. 따라서 이런 이야기들과 그것의 수행은 전근대적 서사와 마찬가지로 인터넷 공동체의 사회적 연대를 강화한다. 이는 인쇄테크놀로지에서 볼 수 없었던 현상으로서 상호작용에 입각한 커뮤니케이션의 결과로서 발생하는 것이다.


3. 실재와 비실재의 구분소멸: 가상현실(virtual reality)


맥루한이 '미디어는 메시지다'고 주장했을 때 이것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미디어를 밖으로부터 보는 '메타시각(metaperspective)'으로서 이 시각은 미디어 자체를 조감하며, 미디어가 전달하는 내용과는 별도로 미디어 자체가 지닌 내용을 파악하는 시각이다. 따라서 맥루한은 커뮤니케이션의 내용을 나르는 미디어 자체가 일으키는 또 다른 층의 메시지를 보았다. 언어에도 메타언어가 있듯이 미디어 자체에도 그 자체의 메시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맥루한이 미디어 테크놀로지를 하나의 언어로 파악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데 언어가 그것의 문법을 갖고서 인간의 지각작용에 간섭하듯이 미디어 테크놀로지도 어떤 문법에 의해서 테크놀로지 사용자의 지각작용에 효과를 일으킨다. 즉 미디어 테크놀로지는 의미의 중립적 전달자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인간의 의식과 사고를 형성하는 중요한 의미생성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미디어 테크놀로지는 인간 정신의 구체적 표현이며, 그 자체가 의미분석의 핵심적 텍스트로서 자리잡는다.

예를 들어 우리가 근대적이라고 부르는 선형적 심리구조와 가치체계는 자연발생적이기보다는 음성언어를 통해서 읽고 쓰는 과정에서 생겨난 지각 관습의 산물이다. 음성언어는 사실상 무의미한 추상체로서 이것의 발명과 함께 시각은 다른 감각들로부터 분리되었고, 이는 '시각공간(visual space)'이 형성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시각공간'은 인쇄문화의 등장에 따라 더욱 극단적 형태인 '선형공간(linear space)'으로 바뀌고, '선형공간'은 분절성, 질서 등과 같은 개념에 의존한다.

그런데 맥루한은 전자미디어로 인해서 창조된 현실 속에서 겪게 될 지각변화로서 '공명공간'을 예견했다. 공명공간은 경계의 소멸, 총체적 즉각성 등에 기초한다. 이 같은 공간에서의 인식유형은 문자에 의해서 형성된 인식유형과는 전혀 다르다. 즉 우리가 특정한 시대에 갖는 공간적 감각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 매체의 등장으로 인한 기술적인 산물이다.

맥루한의 메타시각은 기의에 대한 기표의 우위를 내세우고 있는 기호학자들의 주장과 흡사하다. 기호학자 바르트(R. Barthes)에 따르면 이 시대를 기표(signifier)만이 존재하는 시대로 보았다. 그만큼 기의(signified)보다는 기표가 활개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미디어와 메시지의 관계도 기표와 기의의 관계와 흡사하다. 즉 미디어가 메시지를 담는 그릇이라면 기표도 기의를 담는 그릇이다.

이 경우 효용성과 예술성, 실용적인 형식과 미적인 행위 양식의 구분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오늘날 상품은 효용성보다는 미적 요소에 의해서 더 많이 지배되는데 이는 이해와 행위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취향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개별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는 정보전달이나 설득, 통치 등의 실질적 목적 달성의 잠재력과 관련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미적인 경험의 욕구를 자극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 변화에 따른 다양한 경험 표현양식의 존재가능성과 그에 따른 새로운 미학적 방향의 제시는 매스미디어 시대에서 장르 해체와 융합, 그리고 이미지 상품소비로 대변되는 포스트모던적 양태와 맞물려 있다. 이는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상품의 전체적인 가치가 '효용가치'가 아니라 '교환가치'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보드리야르의 지적과도 일맥상통한다. 

보드리야르는 소비사회로 규정되는 현대사회에서 문화상품은 상징적 기호와 이미지에 의해서 가치가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소비자가 소비하는 것은 상품이라기보다는 미디어에 의해서 생산된 상징적 기호와 이미지이다. 게다가 텔레비전에 의해 주도되는 대중문화는 진리를 정의하고 파악하는 주체 능력을 해체하는 또 다른 경험층위를 도입함으로써 이를 개인 사이의 상징교환으로 대체한다. 기호들을 객관세계에 있는 지시체들과 분리시키고, 그것들을 스크린 표면 위의 하이퍼리얼 한 것으로 재조직화 하는 새로운 의미화 양식을 도입함으로써 근대성의 표상체계를 무력화시킨다. 

이 같은 상황전개는 근대성 이론이 지지하는 본질적인 고착된 지점, 근거, 토대 등을 체계적으로 제거하는 전자미디어의 등장으로 더욱 촉진되었다. 전자미디어는 기표와 기의의 고리들을 통해서 작동하는데 이 같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리얼리티에 입각한 과거의 언어패러다임은 붕괴된다. 따라서 언어는 더 이상 리얼리티를 재현하지 않으며, 주체의 도구적 합리성을 강화시키는 중립적인 도구도 되지 못한다. 즉 언어는 리얼리티 자체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리얼리티를 보다 더 잘 구성하기도 한다.

이는 오늘날 사람들이 미디어를 통해서 자신의 상상력을 외화시켜 다른 사람의 상상력과 뒤섞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따라서 이 경우 미디어는 의미의 중립적 전달자이기보다는 그 자체가 인간의 의식, 그리고 사고를 형성하는 중요한 의미생성 과정의 한 부분으로서 작용한다. 이는 미디어가 인간정신의 구체적 표현이며, 그 자체가 의미분석의 핵심적인 텍스트가 됨을 의미한다.

이런 현상을 보드리야르는 포스트모던적 의사소통의 조건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하이퍼리얼리티(과잉현실: hyperreality)', '시뮬라크라(인공현실: simulacra)' 등으로 개념화했다. 하이퍼리얼리티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이미지의 과잉현실이라면 시뮬라크라는 존재하지 않는 인공현실이다. 이들은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테크놀로지 자체를 넘어 '한계 없는 버추얼리티(limitless virtuality)'가 되었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다. 

과거의 인쇄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는 나란히 놓여 있는 눈들에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을 알려준다. 그렇지만 버추얼 리얼리티는 인쇄미디어 방식은 물론이고, 텔레비전과 같은 입체경 방식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빛의 패턴들을 직접 눈에 전달하기 위해 대상에 반사되는 빛의 시스템, 즉 새로운 공생차원에서 기계를 신체 안에 통합시켜 온 지각프로세스에서 일어날 수 있는 변이 양상들을 무시한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감각을 인간 신체 내에 진짜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버추얼리얼리티는 인간 감각기관의 고정성과 자연스러움을 의문시하는 인간-기계라는 새로운 조합물을 만들어낸다. 

오늘날 미디어는 시뮬레이션만을 생산하며, 오직 시뮬레이션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미디어는 리얼리티를 강화하면서 동시에 리얼리티 없이 리얼리티를 대체한다. 미디어가 오늘날처럼 충분히 대중적으로 확산되면 오히려 리얼리티에 대한 갈망이 생겨난다. 따라서 리얼리티를 가짜 세팅으로 바꾸어 놓은 텔레비전 쇼들은 모두 '실재' 살인자, '실재' 소란꾼들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현상에 대한 이해는 전통적인 커뮤니케이션 연구분석 범주들에 의해서 제한 받아왔다. 예를 들어 '버추얼' 공동체의 성공을 '실재' 공동체의 쇠퇴로 해석되어 왔는데 인터넷이 '실재'에 대한 대안을 제공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버추얼' 공동체와 '실재' 공동체를 대립시키는 생각은 큰 난점을 포함하고 있다. 

인터넷과 '버추얼' 리얼리티는 새로운 상호작용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즉 '버추얼' 공동체와 '실재' 공동체는 교차 병행되면서 서로를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실재' 공동체와 가짜 공동체를 대립시키는 것은 공동체의 연대, 또는 결합양식의 차이를 특화 하는데 부적합하며, 오히려 공동체 형태가 역사적으로 구축된 모습을 모호하게 만든다. 이러한 대립 짓기는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들에 널리 퍼져 있는 정체성의 형태에 대한 문제 제기를 방해할 뿐이다. 



Ⅴ. 요약 및 맺는 말


커뮤니케이션 학은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이처럼 발전하지 않았더라면 커뮤니케이션 학, 특히 매스커뮤니케이션 학의 성립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쇄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가 커뮤니케이션 학의 토대를 형성했다면 방송커뮤니케이션 테크놀로지는 커뮤니케이션 학의 성립을 가능토록 했다. 그리고 금세기 전후해서 커뮤니케이션 학이 성립될 수 있었던 것도 이들 미디어의 등장과 사회적 파급효과에 따른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미디어발달사를 살펴보면 미디어 테크놀로지는 인간을 새롭게 구성할 뿐 아니라 인간에 의해서 새롭게 수용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전통적 커뮤니케이션 학은 전자의 입장을 강조하면서 미디어 효과론을 구성해 왔다. 탄환이론, 피하주사식 모델, 정보의 이단계 흐름론, 의제설정기능이론, 문화계발효과이론 등이 그것이다. 이 점은 비판커뮤니케이션학도 예외는 아니다. 미디어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을 처음으로 시도했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경우 텔레비전에 대한 반응은 독립적이고 반성적인 자유로운 주체의 행위가 아니라 무의식적이고 대량화된 주체의 행위로서 현대 대중문화의 반복성, 동일성, 편재성이 자동화된 반응들을 만들어 내며, 개인적인 저항력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전통커뮤니케이션 학과 비판커뮤니케이션 학파 사이에는 기본적인 입장의 차이가 있다. 비판커뮤니케이션 학파가 미디어가 생산하는 대중문화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전망한데 비해 전통적 커뮤니케이션 연구는 이 같은 비판을 유보하고, 미디어의 실용가능성에 분석의 초점을 맞추었다. 어쨌든 비판커뮤니케이션 학파든 전통적 커뮤니케이션 학이든 간에 미디어의 사회적 영향력이 매우 크다는 가정에서 벗어난 일이 없었다는 점에서 이들 연구 전통은 라스웰 식 효과패러다임을 신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라스웰 식 효과패러다임은 오늘날 지배적 현상, 즉 인간이 미디어 테크놀로지를 새롭게 수용한다는 현상을 설명하기 힘들다. 오늘날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는 재현내용을 전달할 뿐 아니라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간에 언설의 새로운 조립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것은 개인, 사회, 기계라는 범주를 상호중첩이 될 수 있는 방식으로 재기능화 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디어가 메시지이다'는 맥루한의 유명한 언설도 가능한 것도 이 때문이다.

맥루한은 특정 미디어로 인해서 발생하는 감각균형의 재조정으로 초래되는 의식변화에 대해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맥루한에 따르면 새로운 미디어가 발생시키는 개인적·사회적 결과들은 미디어의 새로운 감각비율 규모에서 비롯된다. 즉 미디어는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특정 감각의 상대적 의존도를 확대하거나, 또는 감소시킴으로서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미디어는 결국 인간 행위의 규모와 형식에 꼴을 주고, 그것을 제어할 수 있게 된다.

구체적으로 맥루한은 이를 '핫미디어'와 '쿨미디어'의 개념으로서 설명했다. 핫미디어는 높은 정세도(精細度: definition)를 지니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 수용자가 메시지를 재구성하는데 투입하는 상상력의 정도가 떨어지는 반면 쿨미디어는 정세도가 낮기 때문에 메시지를 재구성할 수 있는 여유가 많아져서 수용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따라서 인간은 핫미디어에 비해서 쿨미디어와 같은 테크놀로지를 새롭게 수용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질 수밖에 없다.

맥루한은 대표적인 쿨미디어로서 텔레비전을 꼽았다. 그것은 텔레비전이 과거 원시시대의 인간이 행했던 청·촉각적 커뮤니케이션 공간을 다시 만들어 내며, 음성언어와 인쇄술이 만들어 놓은 조각난 인간을 전인으로 복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맥루한은 텔레비전의 등장을 인간커뮤니케이션의 재부족화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매우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맥루한의 이 같은 낙관적 예언은 오늘날 점차 사실과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즉 인쇄술은 교양인을 만들었지만 텔레비전은 교양인을 더욱 탈교양화 하고 있다. 또 맥루한은 읽기문화가 인간을 조각냈다고 주장하지만 텔레비전은 인간을 더욱 파편화시키고 있다. 더욱이 사이버스페이스 상황하에서 맥루한이 말한 전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텔레비전은 오늘날 우리들의 담론을 조작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인간 체험을 더욱 표피화, 진부화시키고 있다. 

이는 맥루한 매체론의 한계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즉 맥루한은 인간이 미디어 테크놀로지를 새롭게 수용한다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라스웰식 효과패러다임을 극복한 것은 분명하지만 오늘날 새로운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언설의 새로운 조립품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을 설명하지 못했다. 이는 맥루한이 문화적 정체성의 근본적인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멀티미디어의 출현을 예견치 못한 결과라고 보아진다. 예를 들어 맥루한은 '지구촌'을 원칙적으로 기술상의 가능성으로 언급했지만 오늘날 '지구촌' 개념은 인터넷 등을 통해서 현실형으로 되어 가고 있다. 따라서 인터넷과 같은 원거리 커뮤니케이션은 실제적으로 새로운 담론구조를 잉태한다.

오늘날 전화, 라디오, 영화, 텔레비전, 컴퓨터를 비롯해서 그 모든 것의 통합체인 멀티미디어가 개체성의 새로운 구성체를 퍼뜨리기 위해 언어, 소리, 이미지들을 재구성하고 있다. 이것은 리얼리티의 언어패러다임을 무너뜨리고, 시뮬라르크, 꾸며낸 이야기, 상징적인 것들에 의해서 대체되고 있다. 따라서 멀티미디어에 의해 형성되고 있는 담론구조가 상징적 소통의 구조와 그 토대를 이루는 조건을 바꾸어 놓고 있다.

왜 이런 현상들이 오늘날 지구촌을 지배하고 있는가. 이는 역설적으로 '미디어는 메시지이다'는 맥루한의 인식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미디어가 메시지이다'는 아포리즘은 미디어가 매개하는 인간 인식의 대상이 갖는 의미가 자의적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이는 미디어 성격에 따라 메시지 의미가 달라진다는 맥루한식 해석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즉 미디어는 오늘날 주체가 배제된 시뮬레이션의 세계를 만들고, 수용자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정보과잉을 초래하고 있다. 이 시뮬레이션화한 리얼리티는 지시대상도, 근거도, 원천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 재현의 논리 바깥에서 작용하고 있다.

사실 맥루한의 기술결정론을 낙관적으로 계승한 사람이 토플러(A. Tofler)나 네그로폰테(P. Negroponte)라면 맥루한의 '미디어-메시지 일원론'을 비관적으로 계승한 사람이 보드리야르이다. 토플러는 새로운 전자미디어의 발전으로 미디어가 탈대중화, 탈표준화 되고, 내용도 동질성이 아니라 이질성을 증폭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로 인해 의사소통에 있어서 다양성, 평등성, 상호작용성이 강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오히려 '기술파시즘'에 대한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 "우리는 시뮬레이션에 들어가기 위해 역사를 탈출했다"는 보드리야르의 주장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 서 있다. 전자미디어가 일상화되는 사회에서는 맥루한의 주장처럼 메시지만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와 실재가 같이 함몰될 수 있다. 즉 미디어가 어떤 사회적 의미도 담지 못하고, 메시지와 함께 함몰 내지 소멸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디어가 만들어 낸 하이퍼리얼리티, 또는 버추얼리티 속에서 모든 커뮤니케이션 내용물 의미가 용해되는데 이 경우 비의사소통 시스템까지 생겨날 수 있다. 이는 사람들이 과잉정보와 의미의 범람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극단적 무관심과 침묵 속에 존재하는 무반응의 구조화에 기여할 뿐이다. 

이런 상황 인식 하에서 보드리야르는 포스트구조주의에 입각한 언어적 방향으로 분석의 전환을 시도한다. 즉 포스트구조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보드리야르는 언어적 방향전환을 통해서 현대적 주체에 대해 특권을 부여하지 않고, 주체가 사회적 공간 안에서 새롭게 구성되는 것으로서 취급한다. 이는 포스트구조주의적 주체가 해체되지 않고서 탈중심화 하거나 다층화 할 수 있는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커뮤니케이션 학 연구에 있어서 상징적 교환패러다임이 유효할 수 있음을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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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기술의 발전과 인간 커뮤니케이션: 마샬 맥루한의 기술결정론적 관점에서
Development of Media Technology and Human Communication: A View of Technologic Determinism by M. McLuhan




[뉴미디어_사상]_라스웰과_맥루한을_넘어서-효과_미디어패러다임에서_상징적_교환패러다임으로_20040406-trusaf.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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