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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천수경에 담긴 우주의 기운을 모으는 소리

GraU 2010. 9. 1. 15:54

 

천수경에 담긴 우주의 기운을 모으는 소리

                  지광스님 말씀

 

 

우주의 기운을 모으는 소리

정법계진언

  옴 남

  옴 남

  옴 남


법계를 청정케 하는 진언입니다.

호신진언

  옴 치림

  옴 치림

  옴 치림


우리는 항상 언제 어디를 가든 업장 탓으로 재난을 당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 때마다 천수경의 호신진언《護身眞言》인 `옴 치림’을 많이 외우면 모든 호법신장들이 여러분들을 가호하게 됩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천수경을 독경하거나 관세음보살님을 찾게 되면, 삿된 기운이 다 흘러나가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본심미묘육자대명왕진언

  옴 마니 반메 훔

  옴 마니 반메 훔

  옴 마니 반메 훔


관세음보살 본심미묘 육자대명왕진언《觀世音菩薩 本心微妙 六字大明王眞言》인 `옴 마니 반메 훔’《aum mani padme hum》은 정법계진언이나 호신진언과 다 연결되는 무척 중요한 진언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는 진언입니다. 이 `옴’이라는 것은 `옴 남’ `옴 치림’에도 나와 있듯이 진언마다 빠지는 곳이 없습니다.

이 `옴’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기에 이렇게 각 진언마다 들어가 있을까요? 그런데 이 `옴’을 온전하게 잘 설명해 놓은 책이 우리나라엔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이 뜻을 자세히 알아보려고 애를 썼는데 어느날 우연히 산스크리트어 원전을 영어로 번역해 놓은 영국 책을 보고 그 뜻을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티베트에서는 `옴’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옴’《aum=om, m, 唵》은 인도인들이 옛부터 신성시 해 온 소리입니다. 모든 것의 시작이며, 그 속에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고 사후《死後》에는 그것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시작할 때는 om으로, 끝에는 hum으로 표현하기도 했으나 본래는 같은 글자입니다.

옴《aum》의 세계

`A〓아

이것은 `아’ 발음으로 `아이우에오’ `아야 어여 오요 우유 으이’ `아베체데’ `에이비 시 디’ 하듯이 그 `아’란 것은 모든 만상의 시초음《始初音》으로 스타트《start》란의미입니다.


`U〓우

아이들에게 자동차가 어떻게 달리느냐고 물어보면 `붕’하고 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기계가 돌 때는 `웅-‘하는 소리가 납니다. 즉 바퀴가 돌아갈 때는 `웅-‘하고 소리가 나는데 이것을 과정【process】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우’음은 과정음《過程音》이라고 합니다.

`M〓ㅁ

우리나라 말을 포함해서 전세계 언어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데 전세계 모든 민족들의 언어가 하나의 오리지네이션《origination》, 즉 하나의 근원으로 부터 왔다는 것을 우리가 나름대로 터득할 수 있는 세계가 있습니다.


우리말 문법에 《단어》+ㅁ이나, 《단어》+기는 명사형 어미《語尾》라고 하는데 마침, 먹음, 멈춤, 달림, 잠자다 의 명사형인 `잠’ 등은 모두다 ㅁ을 씁니다. 이것은 영어도 마찬가지로 ㅁ【M】발음을 끝【end】이라고 해서 이것을 종음《終音》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옴《aum》’이란 처음과 중간과 끝이라고 하는 뜻으로써 이 우주 만유의 처음이자, 과정이자, 마지막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어에 나오는 Α《Alpha》과 Ω《Omega》도 다 `옴’에서 나온 것이며, 기독교의 아멘《Amen》도 바로 이 `옴’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멘에도 M자가 들어 있는데 이 M은 우리나라 말로는 ㅁ에 해당됩니다. ㅁ은 굴러갈 수 없으나 ㅇ은 굴러갑니다. ㅁ이 명사형 어미라거나 혹은 끝【end】, 종음《終音》이라고 형용이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공【空, ○】의 근원적인 성품이 이제 잠깐 형체로 머물러 있다 해서 명사형으로 ㅁ을 씁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서리가 진 것은 세월이 흐르면 점점 변해서 깨어지고, 깨어져서는 다시 둥글어지게 됩니다. 모든 것은 공으로부터 와서 머물러 있다가 다시 공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원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쓰는 문자에도 우주의 기운 자체가 들어 있습니다. 모든 만상을 형용하는 내용이 문자로 정착된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서양의 말에 현재진행형【~ing form】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도 역시 발음기호가 ` ‘으로 ㅇ입니다. 우리가 움직일 때, 노래부를 때도 마찬가지로 singing, riding, playing 등등 모두가 다 바퀴를 달고 있습니다. 바퀴를 단 것은 굴러간다는 것을 뜻하고 있지요.

문자라고 하는 것은 삶의 양상을 대변하는 것이며, 말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으로부터 나왔다고 했으니 그 말을 잡으면 바로 그 마음을 잡을 수 있게 됩니다.

분명한 사실은 자꾸만 말을 그렇게 하다 보면 마음에도 그러한 말의 뜻이 형성될 것이란 점입니다. 그러니까 아들 딸 이름 지을 때나 상호《商號》 지을 때도 이 같은 뜻을 꼭 유념해야만 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아들 딸 이름을 근사하게 짓는다고 생각하면서 정성 들여 지었겠지만, 지나다 보면 여러 가지 덜컥덜컥 걸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말의 뜻을 소홀히 한 결과라 하겠습니다. 살다 보면 때로는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직업을 바꾸든지 어떤 변화를 모색해야 될 때가 간혹 있습니다.

특징적인 사실은 이름자에 ㅁ이나 ㅂ이 들어간 사업체나 사람들은 뭔가 덜커덩거린다는 사실입니다. 당장 우리나라의 모든 기업들만 잘 살펴보아도 이런 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삼성, 금성, 우성, 선경, 쌍용,동양 등 대부분이 바퀴가 달린 글자를 가지고 있으며, 또 다들 잘 나가고 있는 기업들이죠.

이미 언급했듯이 말이라는 것은 마음에서 나왔으며, 또 마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원리를 모르고 말을 함부로 하거나 이름을 아무렇게나 만들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언학《眞言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아들 딸이나 남편을 가만히 분석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러한 흔적들이 없지 않아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창성할 창《昌》, 행동할 행《行》, 꽃 화《花》, 성품 성《性》, 영화 영《榮》, 꽃뿌리 영《英》자와 같은 글자는 굴러가는 바퀴를 가지고 있는 글자입니다. 아이들 이름을 지을 때도 그 아이의 생년월일《生年月日》과 생시《生時》을 타고난 기《氣》에 잘 맞춰가자고 굴러가는 바퀴를 달아주면 건강하고 무장무애《無障無碍》하게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상호《商號》들도 연구해 보면 여기에는 뭔가 무시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꼭 죽을 사람도 이름을 바꿔 놓으면 사는 수가 있다고 합니다. 말은 마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말 가운데에 마음의 기운이 흘러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굴러가는 기운이 그의 몸과 마음 가운데에 스며들어 그 곳에 좋은 기운이 입혀지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이름은 사람의 간판입니다. 그러기에 이름은 뭔가 아름답고, 뜻이 있고, 부르기 좋고, 듣기 쉽고, 모가 안 나고, 쓰기도 좋은 것이 좋습니다. 법명《法名》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리 중에는 터져나가는 소리가 있는데 화, 행, 수, 성과 같은 좋은 음이 있는 법명을 사용하면 좋을 것입니다. 우리 능인선원이 무장무애, 별 탈없이 잘 굴러가고 있는 것도 법명에 그렇게 좋은 음을 쓰고 있는 것이 한 원인이 되었다고 봅니다.

제가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계속 관찰해 본 결과 그 말이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음이 지니고 있는 기《氣》라는 것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음 자체가 마찰이 많으면 부서져야 되고, 깨져야 되고, 구설수에 오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크레셴도, 디크레셴도

굴러가고 터져가는 소리는 당장 음악에도 있습니다. 점점 가다가 막히는 것, 즉 `점점 약하게’의 디크레셴도《decrescendo》은 입이 오무라져 입의 기운이 약해지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크레셴도《crescendo》은 `와’하고 터져나가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함성을 지를 때는 `이’라고 하지 않고 `와’라고 합니다. 그리고 웃을 때도 `하하하’하고 웃습니다. 환하다, 밝다, 아름답다, 이러한 단어들은 `아’자로 나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ㄱ ㄴ ㄹ과 같은 글자는 느낌이 다릅니다. 이 글자들은 중성 음이라고 해서,자기의 주체적인 의지 보다는 외력《外力》에 의해 많이 좌우하게 됩니다.

하여간 음이란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뭔가 치명적으로, 결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라고 꼭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상황 전개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습니다.

매일같이 부르는 이름은 그래서 상당히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 이름이 본인이 들을 때도 막히고, 말하는 사람도 막히는 음이면 기운도 가다가 막혀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대체로 이름이 꽉 막혀있는 사람은 내성적인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활달하지 못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자꾸 그렇게 불러왔고, 그런 막힌 기운이 쌓이다 보니까, 뭔가 하려고 하다가도 그냥 주저앉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자들에게도 터지는 기운이 있어야 합니다. 옛날 중국에서는 여자 이름에 계집 희《姬》자를 많이 썼습니다. 여자 이름에 계집 희자를 붙여 놓으면 비교적 얌전하고, 안존《安存》하는 그런 뜻이 그 글자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음운《音韻》이라는 것이 사람의 성품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활달하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자기를 억제하는 힘이 강해 남편 말 잘 듣고 순종하지만 마음 가운데 맺히는 것이 많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제가 많은 분들을 관찰해보니까 능력이 100% 있는데도 발휘를 못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분들의 이름을 바꿔놓으면 사람이 달라지는 수가 있습니다. 이름이라는 세계는 그냥 웃고 넘겨버릴 세계가 아닙니다. 그리고 옴《aum》이란 음의 세계도 참으로 미묘 불가사의한 세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지금 너무나 많은 것을 모르고 무심하게 살고 있습니다.

일본 여자 이름을 보면 `~꼬’자를 많이 씁니다. 그런데 그 `~꼬’자는 동글동글한 양성모음의 `오’ 발음으로서 부드러운 기운을 가져 옵니다. 그래서 일본 여자들이 대체적으로 상냥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옛날 왕조의 왕명《王名》인 태종, 세종 등도 모두 굴러가는 발음이며 태조의 `오’ 발음도 모두 양성 발음을 썼습니다.

그러고 보면 옛날 중국인들은 참으로 무서운 지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글자 한자에도, 여자 이름 하나 지을 때도, 다 그 지혜를 바탕으로 지었던 것입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해서 여자들 이름에 막히는 글자를 넣어 기를 못쓰게 해 놓은 것도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중요한 지맥《地脈》마다 쇠파이프를 박아 놓은 것도 작은 일이 아닙니다. 풍수적으로 본다면 기가 흐르는 맥을 꽉꽉 막아 놓은 것입니다. 꾸불꾸불 흘러가는 산의 정기《精氣》을 강한 자성《磁性》을 띈 쇠로 그 자리에 꽉 묶어놓아 버렸으니 발전이 어려울 것입니다. 이 같은 대 우주의 기운은 옛날의 도인들도 다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논리에서 여자들 이름에 디크레셴도 음《音》을 달아 놓으니까 능력이 있으면서도 자꾸만 자기 스스로 억제하게 되고, 그러다 속병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이하게도 요즈음 여자들의 이름에는 희자 이름이 눈에 띄지 않습니다.

마니 반메 훔

마니《mani》

옴 마니《aum mani》의 `마니’는 원래 여의주라는 말입니다. 여의주란 문자 그대로 여의주에다 자기 소원을 정성 들여 빌면 만사길상 여의 원만하게 형통 된다는 뜻이 있습니다.


마니《mani》라고 하는 것은 또한 무진장《無盡藏》이란 뜻도 있습니다. 장《藏》이라고 하는 것은 많이 축적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영어에서도 많다는 말은 `many’이며,한국어에서는 `많이’입니다. 모두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언어 현상으로 미루어 보건대, 과거 이 지구상에 내려온 어떤 존재들의 언어 현상은 하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국어, 영어, 독일어, 일어, 산스크리트어, 희랍어 등을 망라해 보면 비슷한 단어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굴러가는 바퀴’는 전 세계가 공통입니다. 영어도 ~ing form이고, 우리나라 말도 `ㅇ’이며, 한문이나 산스크리트어도 다 마찬가지인 것을 보면 이건 뭔가 하나의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리지네이션《origination》, 즉 원류《源流》이 하나라는 얘기이지요.

반메《padme》

`반메’란 연꽃이란 말로 번역이 되지만, 여기서의 연꽃이란 거대한 우주의 소용돌이를 의미합니다. 화엄경에 나오는 대연화《大蓮花》은 대 우주를 뜻하는 것입니다.

훔《hum》

`훔’이라는 것은 `옴’의 마감으로 `옴’과 같은 뜻입니다. 모든 진언은 참으로 묘하게 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옴 치림’에서는 `림’으로 끝이 나고, `옴 남’에서는 `남’ `옴 마니 반메 훔’에서는 `훔’으로 모두가 다 ㅁ으로 마감되어 완결을 시킵니다. `옴 자례 주례 준제 사바하 부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언을 연구하다 보면 재미난 것이 많습니다. `옴 마니 반메 훔’이란 해석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추해서 생각해 보면 `우주의 처음이시자, 과정이시며, 모든 것이신 무진장의 존재, 대 우주의 주재자이신 부처님께 예경하나이다’하는 산스크리트어의 뜻으로써 문자 그대로 우주 그 자체의 어떤 근본 성품을 음성으로 묶어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옴 마니 반메 훔’을 여러 번 하게 되면 몸과 마음 가운데에 우주의 기운이흘러 들게 됩니다. 관세음보살님과 염불 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 같이 수행하던 한 도반이 `옴 마니 반메 훔’을 그렇게 열심히 할 수가 없었는데, 어느 단계가 되니까 신통이 열려오더군요. 물론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이 진언과 음성의 세계는 참으로 무서운 세계를 담고 있습니다. 오히려 치명적인 세계라고 말씀 드릴 수도 있지요.

부처님께서 성자즉실상《聲字卽實相》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말이 곧 실상의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에도 `태초에 말이 있었다’라는 말이 있듯이, 이 `옴 마니 반메 훔’이란 말을 계속함으로써 그 사람이 부처님으로, 관세음보살님으로 형성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너는 이 다음에 참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라고 계속해 말하면 그 아이는 그렇게 되어져 갑니다. 그리고「나쁜 놈 같으니라구」란 말을 계속하면 정말 나쁜 놈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가족에게도 함부로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은 그 자체에 어떤 성품을 지니고 있으니까 밝고 환한 소리를 쓰면 그 사람은 점점 밝고 환한 길을 가게 되고, 자꾸만 막히는 음을 쓰게 되면 음으로 양으로 자기의 능력을 펼쳐보이지 못하고 주저앉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니 법당에 나와서는 세속 이름을 부르기보다 법명《法名》에다 보살을 붙여 불러야 합니다. 그래야만 세속과는 다른 새로운 장《장》이 열리게 됩니다. 소리가 운명을 형성하고, 미래를 형성하며, 부처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공간 미학의 세계

진언을 연구하다 보면 음운에 어려있는 무한대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것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바로 독일 출신의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anstein》이란 구조주의 언어 철학자입니다. 그는 말을 쓸 때 정말로 말 하나하나의 음운조차도 아주 의미 있게 쓰라고 했습니다. 까숑 바슐라르라고 하는 불란서의 시인도 언어 미학에 매우 박통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에드워드 워홀이라는 미국의 미학자는 그가 연구하는 내용 중에 다음과 같은 얘기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간이 그 사람과 나 사이의 분위기를 양성한다는 것입니다. 서울에 있는 건물들 분위기가 시민들의 정신 세계를 그런 분위기로 양성합니다. 아파트 같은 것도 마찬가지이지요. 지금 미국에선 이런 부분에 관한 연구를 많이 합니다.

건물을 세우는 데에도 너무 건물을 떼어 놓으면 똑같은 동질의 건물일지라도 분위기가 틀려집니다. 공간 미학에서는 이 공간과 공간이 어떻게 배열되어 있는가에 따라서 그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변화되는가를 연구합니다. 건물을 세울 때도 각이 진 건물과 타원의 건물, 원형의 건물이 주는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모양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주는 무형의 언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거리감이 있습니다. 그런 거리감이 많이 있는 사람에게 가까이 가면, 뭔가 밀쳐내는 장벽이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반대로 거리감이 적은 친근한 사람에겐 가까이 가게 됩니다. 사람을 우연히 만나게 되는 것도 다 이 같은 원리가 작용된다고 하겠습니다.

대부분의 절에서 보면 스님들은 절에 왔다 가는 신도들을 그냥 보냅니다. 그래서 거리감이 많이 생기지만 목사들은 나갈 때 대부분 악수를 하고 보냅니다. 그것이 바로 거리감을 축소시키는 길입니다. 비록 남남이라 할지라도 부부는 일심동체인데 그 부부가 각방을 쓰는 부부가 있습니다. 그런 부부 사이는 이미 많은 거리감이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아이를 낳으면 어릴 적부터 다른 방에서 키웁니다. 따라서 그 아이가 자라도 부모를 가까이 하지 않고 잘 공경하지도 않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아이들이 커도 엄마들이 계속 끼고 지냈습니다. 석학 라이샤워교수 같이 동양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조차도 이러한 거리감이 주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 인간관계에 관해서는 확실히 터득한 것 같지가 않습니다.

이른바 공간 미학으로 보면 일본 사람들이 얼마나 아기자기 합니까? 생활 구조를 보아도 그 조그만 공간들은 정말 섬세하게 꾸며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거기 사는 인간들도 상냥하고 아기자기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요즈음 건축 미학에서도 사람의 마음을 양성하는 공간 감각을 크게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건물들은 이와 같은 감각을 전혀 백안시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미국의 초대형 건물들이 이러한 것을 고려하지 않다 보니 딱딱하게 되어 버렸지요. 여의도의 쌍둥이 빌딩을 설계한 사람은 이러한 공간 미학을 많이 연구한 사람입니다. 그 건물을 잘 살펴보면 사각형이 아니고 양쪽으로 보게 되어 있습니다. 둘이 마주 보고 있는 것 같기 때문에 그 회사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연적으로 화합의 분위기가 돌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그러한 분위기에 많은 관심을 써야 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현대사회가 너무 건조하고 차갑기 때문입니다. 집안에 가구를 배치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청와대에서 회의를 할 때 원탁회의를 하는 것도 다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사각으로 각이 져 있으면 뭔가 딱딱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죠. 건물도 가능한 한 원형과 타원형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곡선을 내려면 물론 돈은 많이 들어가겠지만, 정성을 들인 만큼 부드러워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 가운데에는 중요한 측면인 형태 미학의 세계, 건축 미학의 세계, 공간 미학의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일어의 음을 보면 흐, 크, 프, 트와 같은 강한 음이 많은데 그래서인지 다툼을 많이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일본도 역시 많은 전쟁을 일으켰는데 일본말의 음운이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강하고 모난 점이 많고 골이 들어가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나 부부간에 말을 나눌 때도 가능한 한 뭔가 그 말에다가 기운을 실어 보십시오. 단순한 사무적인 언어가 아니고 거기에 어떤 공간 미학적인, 뭔가 정감 어린 내용을 넣어 톤을 부드럽게 해서 보내 보십시오. 중국어를 연구하다 보면 평상거입《平上去入》의 사성《四聲》이 있는데 중국인들이 뭔가 응집력이 강한 이유도 그러한 연유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얘기들을 합니다.




아는 것 만큼 산다

서양의 어느 철학자가 `아는 것이 힘이다’라 했듯이, 사람은 자기가 아는 것 만큼 살아갑니다. 물론 사람들 가운데는 아는 것을 바탕으로 남들을 괴롭히는 사람들도 있어 `모르는 것이 약이다’란 말도 나왔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 인간들은 아는 것만큼 밖에 살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아는 세계가 그저 눈에 보이는 세계밖에 없다면 보이는 세계만을 마음에 두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가운데 보이지 않는 거대한 세계가 자리하고 있기에 그 세계는 우리에게 부처님의 거룩하심을 일깨우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허공을 몸으로 삼고 계시며 항상 우리를 응시하고 계시는 분이니까요. 이미말씀드린대로`천비장엄보호지《千비莊嚴保護持》’`천안광명변관조《千眼光明遍觀照》’, 일천 개의 팔로 고통 속의 모든 중생을 거두어 주시고 일천 개의 눈의 광명으로 온 세상을 살피신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만 우리가 꼭 잊지 않아야 할 사실은 부처님께서는 허공을 몸으로 삼고 계시는 분이란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마음으로 터득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되는데 입으로만 외우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엔지니어다’하면 그 방면밖에 모릅니다. 물론 그 방면 하나만 해도 새로운 기술이 자꾸 개발되니까 공부하려고 하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우리 중생들은 대부분 자기 분야밖에 모릅니다. 엔지니어도 그렇고 의사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기술이 쏟아지고 자기 공부하기 바쁘니까 시야가 넓질 못해요.

제 친구 하나가 종합병원에 취직해 있다가 어느날 직접 병원을 개업했는데 그 이후 부인의 행동이 크게 바뀌었다고 합니다. 제 친구는 진료하는 것밖에 모르고 병원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많고, 그래서 부인이 구청 세무서 경찰서 등 가리지 않고 외부 일까지 보다 보니 자연히 적극적이 되더라 는 것입니다. 자기 남편이 다른 병원에 취직해 있을 때는 몰랐는데 직접 병원을 개업하고 난 다음에는 구청과 세무서 일까지 보다 보니 정말 왈패가 다 되었다고 한탄하더군요.

사람들이 한 방면에만 몰두하여 오래 가다 보면 그것만이 전부인 줄 알게 되기 쉽습니다. 자기가 볼 수 없는 세계, 보이지 않는 넓디 넓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마음속의 보이지 않는 넓은 세계를 생각하면서 문을 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생을 그 만큼 폭 넓게 사는 것이며, 마음의 폭 또한 그 만큼 넓은 것입니다. 보이지않는 세계, 부처님의 세계를 마음 가운데 간직하고 살고 있으니까, 그의 마음은 항상 영원성을 머금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성을 머금고 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그만큼 진리에 입각해서 바르고 영원답게 산다는 뜻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등한시하고 보이는 세계에만 탐착하다 보면 금생의 삶이 끝인 줄 알고, 악도에 떨어질 수 밖에 없는 행동을 하는 수가 많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아는 것 만큼만 살고 있습니다.

소리의 세계, 색채의 세계, 공간의 세계 등 우리의 삶을 음으로 양으로 통제하는 그런 세계가 있습니다. 요즘은 옛날과 달라서 조그마한 아파트의 공간 속에 살다 보면여러 가지 답답한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럴수록 집에 가구를 배치하는 것이나 색채나 공간을 배려하는 슬기로운 가정 주부의 안목과 지혜가 필요하겠지요. 그 모두가 부처님세계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자기가 아는 것 만큼밖에 못 산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이 남을 미워하고 증오합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가지고 상대방을 대하면, 상대방이 괴로워지고 문제가 생기기에 앞서 나 자신이 먼저 괴로워집니다. 내가 상대방을 미워하는 말을 하게 되면, 그 말이 상대방의 귀에 가기 전에 나의 귀에 먼저 들어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귀는 내 귀니까요. 내가 어떤 사람을 미워하는 말을 한번 허공으로 날리면, 그 미움과 증오의 말이 내 귀를 타고 흘러와 내 마음 속에 먼저 새겨집니다. 그러면 다음 번에 그에 대한 상스럽고 격한 소리를 할 가능성이 그만큼 더 많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른바 세뇌가 되는 것이지요.

부처님께서도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좋은 세포를 만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상대방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면 내 몸의 세포들이 전부 다 상대를 미워하는 세포들로 형성되어 갑니다. 상대를 미워하면 세포들은 결과적으로 부정적인 기운을 품게 되어 내 얼굴이 먼저 밉상이 되어 갑니다. 내가 상대방을 미워하면 할 수록 내 얼굴이 그만큼 빨리 밉상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대를 미워함으로 인해서 자기를 밉상으로 창조해 가는 결과가 됩니다. 이 우주의 원리가 다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 몸 가운데 모가 난 세포들이 생겨나고 세포가 모가 나니까 인상도 모가 나고 날카로워지고 상대에 대한 증오심과 적개심이 얼굴에 배어 있게 마련입니다. 오랜 세월이 흐르게 되면 그와 같은 몸체와 마음체를 형성해 가서 상대방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뿜어내게 됩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들에게 증오심을 가지고 자라난 아이들은 몸에 그런 기운이 배어있습니다. 보살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어렸을 때 가족 가운데 뭔가 문제성이 있게 자란 사람들은 자꾸만 모든 일을 왜곡되게만 생각합니다. 콤플렉스가 많은 사람들일 수록 바르게 생각하지 못하고 비뚜러지게 생각하며 왜곡된 시각으로 보곤 합니다. 이런 생각이나 행동들은 다 어렸을 때 시작되어 오랜 세월 쌓여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말을 몇 마디 나눠 보면 그분의 커 난 배경에 뭔가 콤플렉스가 있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제가 마음 연구를 하면서 많은 사람을 대하며 살아가다 보니까, 정말 단 몇 마디에도 그 사람의 과거 생을 짐작할 수 있게 되고, 행동 양상 속에서 바르게 살아왔는가의 여부를 알 수 있게 되더군요.

관성의 법칙

우리 삶의 모든 면모들은 일조일석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동안 쌓이고 쌓여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사소한 하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비롯하여 그것이 또 다른 여파를 일으켜 세월이 흐르면 완전히 그렇게 굳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때 그때 사소한 행동 하나 하나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조그마한 악행이라도 그것이 네 마음 가운데 떠오른다고 생각될 때 빨리 밟아서 없애라」고 하셨습니다. 작은 일이라고 그냥 방치를 해 두면 그것이 새끼를 쳐서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사람들은 하느님이나 부처님이 우리를 심판하는 줄 생각하나 그런 것이 아니란 점입니다. 가장 무서운 일은 자기 자신이 자기를 심판하는 것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거짓말 한 마디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은 거짓말 하지 않은 사람보다 다음에 또 다시 거짓말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한두 번은 예사로 하다가 익숙해져서 습관이 되면 다음에 또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관성《慣性》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지요. 그 관성의 관《慣》자가 습관 관자입니다. 습관이 계속되면 습벽《習癖》이 됩니다.

제2의 천성이 습관이라 하지만 그 습관은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고쳐질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습벽에 이르면 떼기가 힘든 상태가 됩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이나 도벽이 있는 사람을 보세요. 무의식적으로 손이 남의 물건으로 가고, 입을 열었다 하면 거짓말 투성이입니다. 습벽이 쌓이면 업이 됩니다. 업이 되면 이것은 완전히 알라야식《Alaya識》에 새겨져서 도저히 어쩔 수가 없게 됩니다. 깊고 깊은 참회를 하지 않으면 그 업이 녹아져 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업장소멸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업장소멸이다, 선근《善根》의 증장이다 하지만, 한번 쌓인 업은 참으로 지워지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겁《劫》을 두고 윤회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둑질도 습관적으로 하다 보면 어느 날은 감방을 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내는 것도, 부처님이 보내는 것도 아닙니다. 자작자수《自作自受》, 결국은 자기가 자기를 감방에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만 파고 들면서 마음의 세계를 연구해 보면 전부가 자기가 지어 자기가 받는 것임을 알 수 있을 텐데, 어찌해서 사람들은 다 하느님 아버지가 판가름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은 다 자기가 자기를 판가름하고 결정 지우는 것이기에 우리가 부처님 전에 나와서 부처님 말씀 듣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작업이 쌓이고 쌓여서 좋은 미래를 형성해 가는 것입니다.

프로이드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프로이드가 아프리카에서 한 흑인을 데리고 와서 컵에 설탕을 타서 마시기 좋게 해서 주었더니 극구 안 마시려고 하더랍니다. 후에 알고 보니 그 흑인이 살던 나라에 설탕이 없었기 때문에 하얀 분말을 소금이라 생각했던 거지요. 프로이드는 그 사실을 목격한 다음부터「인간은 현재 이 순간에도 철저히 과거의 지배를 받는다. 현재를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과거의 인간이다」라고 얘기했습니다.

이러한 프로이드의 통찰과 같이 모든 사람들은 과거의 지배를 받으며 삶을 살아가고있습니다. 과거의 여러 가지 지견《知見》과 공부한 것들이 올바른 것이라면 문제가 될게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지견과 공부가 왜곡되고 편견에 치우치고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라면 그 좋지 못한 지견들이 마음 가운데 가득 차서, 그가 선택하는 카드도 왜곡되고 아집에 차서 전혀 볼품 없는 카드를 잡게 됩니다. 그래서 미래도 볼품 없이 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지금 이렇게 부처님 말씀을 자꾸 듣고 공부하면서 진리를 생활화해 나가면, 여러분들은 새로운 판단의 척도와 준거와 틀을 형성해 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어떤 일에 맞닥뜨렸을 때 바르게 형성된 여러분들의 판단과 척도는 여러분들의 미래를 밝고 바르게 열어갈 것입니다.

그 옛날 도인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사물을 관찰하고 통찰하는 정도가 예상 밖으로 놀랍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며칠 전 건축 일을 하는 어느 분께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옛집을 전통 양식 그대로 보수를 해 달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목조로 된 몇 백년 된 집을 자세히 살펴보니 당시 목공들의 기술이 굉장한 수준이더랍니다. 현재의 이름있는 건물을 찾아 옛날 기술과 비교해 보니 너무나 많은 차이가 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주인에게 옛 그대로 보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전했더니「어째 한국에 이렇게 쓸만한 목공이 없느냐?」고 한탄을 하더랍니다.

목공이라는 것도 어렸을 때부터 장인 정신을 가지고 하나 하나 기술을 쌓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대패로 나무 한 토막 밀더라도 정성스럽게 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옛날 선조들은 대단했던 거지요. 끌을 대고 대패로 밀 때 정성스러움을 바탕으로 하니까, 놀라운 작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요즘과 같은 경제성 위주의 목공들에게 맡기면 옛날 같은 집이 지어 질리가 있겠습니까? 장인 정신이 없고 정성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건물에는 여기저기서 문제점이 들어나 말썽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세상을 장인답게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보면 우리는 인생을 너무나 함부로 살아갑니다.

상학《相學》에 보면 얼굴 표정 짓는 것 하나도 조심하라고 합니다. 딱딱한 마음으로 얼굴 표정을 짓지 말라고 합니다. 마음이 굳어지면 표정도 굳어집니다. 무언가 남을 경멸하는 것 같은 인상으로 변해갑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얼굴에다 별난 그림을 다 그려갑니다. 통찰력이 깊은 사람은 상대방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금방 알아낼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머리가 조금 똑똑하거나 지혜가 많아 남에게 칭송을 받고 자란 사람들은 어딘가 공손하지 못합니다. 교만심과 아상에 차서 쌀쌀 맞고 냉정해 보이며, 상대방에게 썩 훌륭한 인상을 심어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가정교육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밝고 맑은 인상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느낌을 줄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 말과 생각과 행동을 도《道》답게, 진리답게 엮어나가는 길을 제시합니다. `너는 죄인이다, 너는 주의 종이다’라는 식의 위압적인 것이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宗敎》은 글자 그대로 `가장 으뜸되는 가르침’이듯이 우리의 말과 행동과 생각을 으뜸이 되게, 도답게 펼칠 수 있는 그런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우울하면 오장육부도 함께 우울해집니다. 따라서 우울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그 내장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습니다. 기계가 활력 있게 돌아가야 100% 기능 발휘가 되듯이, 우리 몸도 기능 발휘가 제대로 되지 못하면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삶을 살아가시면서 마음의 세계가 여러분들의 모든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바로미터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항상 마음을 밝고 맑고 깨끗하고 아름답게 가지도록 노력하십시오. 격렬한 마음,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면 자기가 자기에게 심판 당하는 날이 오게 됩니다. 자신의 심판은 외부에서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직접 자신을 심판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부처님 전에 나와서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우리의 의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교 공부는 먹고 살기 위한 공부지만, 부처님 말씀 공부는 영원으로 가기 위한 공부란 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출처 : 수미산
글쓴이 : 시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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