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 음/다시보기

[Link : 소통 ; 교감 ; 나누기] lion & Kevin Richardson

GraU 2015. 6. 15. 12:01

 

 

 

https://www.youtube.com/watch?v=MNCzSfv4hX8&feature=player_embedded

 

 

 

 

 

 

오른쪽 리스트 동물과 사람들

 

교감.

 

 

내 생각에,

'소통' 이라는 우리 내부의 '바람'의 기원을 여실히 보여주는 지점.

 

 

 

공감.

관계하려는 욕구.

관계맺어지려는 욕구.

 

힘의 그물을 짜기 전.

무리짓기 가 어떻게 진화될지 이전의,

+,- 급부로의 방향성 이전의.

 

[다섯가지 마음]의 근원으로 갈수록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옅어지는게 아닐까.

 

그 진위와는 상관없이

항상 기억에만 떠올리면 나를 울컥하게 만드는

침팬치 전기 자극 실험

 

 

 

단순하게 봐도,

승부심의 단계에서 소통을 하고자 함은

희구심의 단계에서 일어나는 관계하고자, 인정받고자 하는, 나를 바라봐 다오 하는 출발과 여실히 다를 수 밖에 없다.

 

나의 힘을 구가하기 위해,

내말을 들어라, 내 의도대로 하라 가 깔려있는 (그를 알던 모르던, 또는 인정하건 않건간에)  소통의 욕구 발현은  소위 '심지'가 다른 것.

 

출발이 나에게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더라도, (자발성의 인정 하에서)

바라보는 곳이  나의 상, 부지불식간의 나의 기대 인지, 

꺼내어져 내어놓아 어울리게 되면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사건'에 내맡김인지는

이 '심지'의 차이.

 

 

이 다름을 높낮이나 장단으로 보지 않으면

곧 '평등' 을 이해하는 자그마한 한걸음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생각을 앞에 꺼내어 쓰윽 내밀어 놓고

자기의 위계를, 의도를, 그 기대와 바램을  소위 '일부러 숨기는' 태도를 보는 것.

 

순간 순간

사람은 누구나 잠깐씩, 또는 공간적으로 어떤 곳,  인, 과, 식

빛나게 반짝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 와 - 의  존재를 인지함과 동시에

그 발현의 여부에 간여되는 ,  소위  '감정'의 존재 (전혀 별개의 것이라 여겨오던)를  스스로 보기 시작하면,

마음의 문제에 있어서,

원인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그러한 기대일 뿐임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

 

물론 실제의 문제에 있어서도, 이러한 구도와 크게 다르지 않게 되는 것.

 

동의 할지 말지는 개인의 문제이지만,

 

사회적 문제 에 있어서도,

그 '해결'은 동의된 결과일 뿐이지,  대개의 경우, 실제 근원적 '해결'은 아닌 것.

동의되고 함께 무리짓기의 구도에서 '받아들여' 지면

소위 '그때부터' 그것은 문제가 아닌 것으로 되는.

 

혹자는

스스로를 지칭하는 줄 모르고

[냄비근성] 이라는 말로 그 겉모습을  비판하지만,

인간은 그 근원에서부터 이런 기전을 가지고 있슴일 뿐인 것.

이것은 비판해야할 부분이 아니라는 것.

 

어느 순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판의 상정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해야만

 

소위 함께 사는 출발인 것.

 

 

 

공감

교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그 말의 의미.

 

 

근본을 보아 함께 가는 것에 대한 동의.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 할 껄?

하다보면 화딱지 나서 뛰쳐나가버릴테니.

 

스스로를 바꿈.

자기의 생각대로 받아들이는 것과  그 진의를 아는 것,

그 첨예한 '다름'을 구별하는 것.

 

그것이 작은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