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과 !/수미산이야기

죽음

GraU 2016. 3. 22. 09:18

카페 : 마음의 호숫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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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은 찬란해도 지고야 마는 것, 숫도다나왕의 임종

 


 부처님이 마흔 살 된 때 아버지인 숫도다나 왕의 임종이 가까운 줄 알고 까삘라 성으로 들어갔다. 가는 길에 로히니 강물을 두고 사꺄족와 꼴리야족 사이에 벌어진 분쟁을 해결해주었다.


천상천하에서 고귀하신 부처님이 인간의 도리인 효를 다하려고 부왕의 임종을 지켜본다.

부왕의 이마의 손을 얹으며


 “아버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덕은 청정하며 마음의 때도 없습니다. 근심하거나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들은 진리를 다시 생각하고, 지금까지 쌓아온 선행을 믿으십시오. 마음을 편히 가지십시오.”



임종의 문턱에 다다른 사람은 누구나 불안하다.

갈 곳을 모른 채 집(육신)밖으로 떠밀려지고 내쫓긴 상태가 된다. 막막하고 무섭고 불안하다.


정든 것들을 뒤에 두고 정처 없이 어디로 가야한단 말인가, 뒤에서는 세상에 대한 애착이 끌어당기고 앞에서는 업력이 잡아당긴다. 정신은 양쪽으로 찢어져 혼비백산한다.


이 순간 믿을 것은 생전에 누리던 부귀영화도, 처자권속도 아니다.

오직 자신이 쌓은 선업의 공덕만이 기댈 곳이 된다. 러기에 임종 때 생전에 쌓았던 선업의 공덕을 떠올려야 한다.


부처님은 부왕에게 당신이 닦았던 선업을 떠올리며 선업의 힘을 믿고 의지하라고 타이른다. 그리고 평소에 했던 기억을 떠올려 수행해서 얻은 경지를 회복하라고 말한다. 평소에 수행해서 닦아놓았던 경지는 임종 때 회상하기만 하면 그 경지를 회복할 수 있다. 이는 해탈의 문을 여는 일이다. 그래서 불자들이 임종을 맞게 되면 그의 도반들이 모여서 이렇게 말해주어야 한다.

“사랑하는 도반이여, 당신은 임종을 맞이하였습니다. 평소에 우리가 함께 닦았던 수행을 떠올리십시오. 그리하여 당신의 경지를 회복하십시오. 우리 도반들이 모두 함께 수행할 터이니 당신도 알아차림을 회복하세요.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모든 지어진 것은 소멸하고야 맙니다.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는 법. 이생을 끝낼 때가 온 것일 뿐입니다. 누구나 한 번은 가야할 길이니 당당히 가십시오. 당신은 한 평생 잘 사셨습니다. 우리는 당신과 함께 했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당신의 삶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더 아름다워졌고, 당신과 함께 했으므로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당신이 쌓은 선업이 당신의 앞길을 인도할 것입니다. 삼보에 의지 하십시오. 마음광명을 따라가십시오. 당신에게 해탈의 문이 열려올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당히 나아가십시오. 빛 속으로 녹아드십시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부처님은 망자의 의식 상태를 알아 마음을 편안케 해준다. 이것은 자신의 마음을 앎으로써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지혜에서 나온다.


일반적으로 망자의 의식은 정처 없는 나그네와 같다. 해 저물고 갈 길은 먼데 오라는 곳 하나 없이 찬바람 부는 허허벌판을 헤매고 있는 나그네의 심정을 헤아려 보라. 이것이 망자의 의식 상태이다. 한 점 따뜻한 불빛을 찾아 뭔가 기댈 곳을 둘러보지만 아무 것에도 아무 곳에도 정을 붙일 수 없다. 가을바람에 휩쓸려 뒹구는 가랑잎처럼 어디론가 쓸려간다. 다음 생을 향해 미친 듯이 질주하여 태중으로 빨려 들어가고 만다. 재생(再生rebirth)이다. 다시 생을 받는다. 전생에 겪었던 고통을 처음부터 그대로 되풀이 하게 된다. 이 생이나 다음 생이나 별다를 것이 없는 또 하나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진부한 삶, 입력된 대로 돌아가는 삶, 이것이 윤회전생(輪回轉生)이다.


탐진치 삼독심이 맑아지고 해체되는 데서 윤회의 사슬은 끊어진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윤회의 사슬을 끊는 묘약이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촉감을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알아차림’으로써 탐진치의 업력이 약화된다. 여기서 해탈의 가능성이 열린다.



부처님은 부왕의 다비식에서 울부짖는 사람들을 향해서 말한다.


“이 세상은 무상하고, 고통으로 가득합니다.

영원한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몸뚱이란 본래 덧없는 것입니다.

한세상을 산다는 것, 환상과 같고 타오르는 불꽃과 같고 물에 비친 달그림자와 같습니다.


모두가 잠시 그렇게 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무상한 몸으로 잠시 살다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여러분,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리는 저 사나운 불길을 보십시오.

이 불길을 뜨겁다 여길지 모르지만 욕심의 불길은 이보다 더 뜨겁습니다. 그러니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수행하여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해탈의 즐거움을 얻으십시오.”



 참으로 그러하다. 디가니까야, 대반열반경(Mahaparinibbana-sutta, Digha-nikaya)에 나오는 유명한 게송이 있다.



Anicca vata sankhara, uppadavaya dhammino; 아니짜 와따 상카라, 우빠다와야 담미노

uppajjitva nirujjhanti, tesam vupasamo sukho.웁빠짓뜨와 니루잔띠, 떼삼 우빠사모 수꼬

 

無常 是生滅法, 제행무상 시생멸법

生滅滅已 寂滅委樂. 생멸멸이 적멸위락

 

조건 지워진 모든 것들은 무상하니,

생겨난 것은 반드시 소멸하고야 만다,

더 이상 생겨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으면

그 고요한 소멸은 최상의 행복이다.

 

Impermanent truly are compounded things(conditionings),

They arise and cease, that is their nature;

No more to arise and pass away,

Their calming and cessation is bliss supreme.

 


 왕자(王者)도 용자(勇者)도 그렇게 가고, 선인도 악인도 그렇게 간다. 온 곳도 모르고 갈 곳도 모른 채 가는 것이다. 봄빛이 찬란한 날 실바람에 흩날리는 매화꽃잎이 눈처럼 떨어진다. 매화의 혼은 흩어지고 매화의 꽃다운 미소는 눈 속에 담긴다. 죽은 자는 산자의 가슴에 기억으로 남는다. 이 봄에 죽어가는 모든 생명과 죽은 생명을 위해 축원합니다.

한 번 갔으면 다시 오지 않기를.

한 번 왔으면 다시 가지 않기를.

오고 감에 자재하여 고통이 없기를.

찬란한 한 때, 원 없이 행복하기를.

오고 감이 없는 적멸의 경지에 들기를.




*죽을 때 중요한 마음가짐:


죽을 때는 결코 부정적인 감정을 갖지 말아야 한다.


① 만일 우리의 마음이 분노와 원한에 차있고, 무거운 죄책감이 있다면, 죽을 때 우리의 의식 위에 지옥에 태어날 징조들이 나타난다. 불에 타고 얼어붙으며, 고통과 슬픔, 억압과 공격성 이란 지옥계의 특징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인색하여 베풀지 않는 삶을 살았다면, 죽은 뒤에 우리는 가난한 환경에 태어나 밤낮으로 굶주림과 목마름과 궁핍으로 시달리게 될 것을 예감하게 된다. 이것은 아귀세계, 배고픈 귀신의 세계에 태어날 징조이다.


③ 만일 우리의 마음과 행동이 무지와 어리석음으로 가득 차있다면, 우리는 동물이나 곤충으로 태어나게 될 것을 감지하게 된다. 우리는 우둔해지고 매를 맞고, 부림을 당하거나 도살당하여 자기 몸의 살과 뼈를 빼앗기는 고통을 받게 될 것인데 이것은 동물세계의 특징이다. 현생 인간이 죽어서 다시 인간의 몸을 받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 왜냐?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인간으로 태어날 만한 공덕을 쌓지 못하고 오히려 공덕을 까먹으면서 동물의 의식수준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은 생 동안 악업을 짓지 말고 선업을 지으리라는 결심을 해야 한다. 오계를 지키며, 베풀고 도와주는 선행을 열심히 할 것이며, 알아차림의 수행을 해야 한다.




*품위 있게 잘 죽기(Well Dying웰다잉) 위한 마음의 정화:


죽을 때나 살아있을 때나 맑고 밝은 마음을 닦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선업을 닦고 알아차림이 분명하면 ‘한 없이 맑고 밝은 마음(妙明淸淨心묘명청정심)’이 된다. 이런 의식은 행복한 내생으로 이끈다. 마음속에 맑지 못하고 밝지 못한 것이 남아 있으면 행복한 내생을 기약하기 어렵다. 이기적인 삶에서 벗어나 세상과 이웃에 자애의 빛을 비추라. 밝음과 맑음, 지혜와 사랑이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게 해준다.

죽음이란 단지 육신의 죽음일 뿐이다. 나는 육신이 아니다.

내가 육신이 아닐진대 누가 죽는다는 말인가?

사실 죽어가는 실체는 없다. 다만 ‘죽음’이라는 우리의 고정관념이 있을 뿐.

평소에 알아차림 수행으로 꽤 뚫어 보는 마음의 힘이 강해졌으니 걱정할 일이 무엇인가.

내가 닦은 이생의 선업으로 다음 생을 받을 것이니 무엇을 근심하랴.

의미 있게 한 생을 살았던 내 자신에게 감사합니다.

내 삶에 동참했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내가 살았던 세상에 감사합니다.



[참고]



① 티베트 사자의 서(Tibetan book of the dead): 바르도 퇴돌(Bardo Thṏdol)1, ‘듣기만 해도 중음계에서 해탈할 수 있는 법문’이라는 뜻이다. 이 경전은 티베트불교권에서 오래전부터 전승되어오던 것을 CE8세기2 파드마삼바바(Padmasambhava)가 기록하여 비밀장소에 숨겨놓았는데 CE1350년에 발견되었다. 1927년 미국의 인류학자 에반스 웬쯔(Evans Wentz, 1878~1965)에 의해 서양에 알려지게 되었다. 죽음에서 환생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상세하게 말해주고 있다.


② 임종 시의 체험과 재생하는 과정: 상좌부불교에서는 죽는 마지막 순간 사몰심이 생겨났다 사라지면서 다음 생의 제일 첫 마음인 재생연결식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사몰심과 재생연결식 사이에 중음단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죽으면 그 즉시 다시 태어난다고 본다. 그러나 티베트불교에서는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과정에 세 가지의 중음단계를 말한다. 즉 임종중음, 법성중음, 재생중음이다. 중음계(바르도bardo라 한다)를 방황하는 중음신(中陰身)이 1주일 간격으로 7번 생사를 반복하는 가운데 업력에 따라 재생할 곳으로 날아가 태어난다. 중음신을 더 좋은 곳으로 태어나도록 인도해주기 위해 독경이나 법문을 해주고 공덕을 쌓아준다는 발상에서 49재와 천도재를 지낸다.


③ 사몰심(死沒心 cuti citta쭈띠 찌따): 임종 때 마지막 찰나의 의식이다. 다음 생의 제일 첫 마음은 재생연결식(再生連結識 patisandhi빠띠산디)으로 이어진다. 임종 시에 경험하게 되는 세 가지 현상은 다음과 같다. 재생연결식을 생산할 업(kamma), 살아생전에 제일 깊게 각인된 업의 표상(kamma-nimitta깜마니밋따), 다음 생에 경험하게 될 것이 나타나 보이는 표상(gati-nimitta가띠니밋따)이다. 이생에 큰 죄악을 저질렀다면 그 경험이 깊이 각인되었다가 임종 시 회한을 일으키며 큰 고통을 겪고, 다음 생으로 던져질(被投性Geworfenheit) 나쁜 존재의 영상이 떠오를 것이다.








죽는 법  - 무애스님  http://cafe.daum.net/4349285/A8C5/6



죽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것 같습니다.

그렇게 고통스럽다면 저도 죽는걸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죽음에대한 생각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육신이 내가 아니고 마음이 나인데 육신을 죽이려 한다는겁니다.

 



마치 운전수가 죽겠다고 하면서 자기는 안죽고 차를 부수려 하는 거지요.

그러면 운전수는 안죽고 차만 망가지고 운전수 성질만 나빠진다는 얘기지요.

육신을 죽여도 마음이 죽지 않기 때문에 죽어도 마음은 성질만 나빠지는 거지요.

어느 종교도 육신이 죽는것은 말하여도 마음이 없어진다고 하지 않습니다.

육신이 죽으면 마음이 천당을 가느니 지옥을 가느니 하지 않슴니까?

그래서 그 마음 때문에 자살하면 죽어서 그는 더욱 안좋다는 얘기 입니다.

 



육신은 4년만 되어도 모든 세포가 바뀐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4년마다 육신이 죽는거나 같다는 얘기지요.

그렇다면 어떤것이 진짜 죽는 것인가를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마음이 죽는것이지요.

마음이 진정 죽는다면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고통이 자기 생각 때문에 온다는 것을 밝게 알아 지는 것입니다.

그렇게되면 세상의 이치를 밝게 알아지고 행복한 앞날의 길도

밝게 알아지니 진정으로 죽는 길은 참으로 권장할 만한 일이지요.

 



이해를 돕기 위하여 원효대사님의 얘기를 곁들이 겠습니다.

어두운 저녁에 떡을 드시고 목이말라 물소리따라 내려가

물을 드시고 물맛이 좋아서 흡족한 마음으로 주무시고

아침에 어제드신 물생각이나서 그 자리에 찾아가보니

해골바가지가 있고 구더기가 우굴 우굴 한거예요.

그순간 구역질과 창자가 뒤틀리는 고통이 생기게 된거죠.

물은 똑같은 물이고 어제는 맛있었는데 지금은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해골 바가지는 옛부터 그자리에 그냥 있었고

스님를 괴롭히기 위해서 거기에 있었던것이 아니거든요.

해골바가지가 괴롭힌게 아니라 더럽다는 생각이 스님을 괴롭힌거예요.

그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속에서 모든것은 자세히 살펴보면

상대가 나를 괴롭히는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이 자신을 괴롭히는 거예요.

 

살아가면서 잘 적용이 안되는 것은 모든게 변화가 많아서 입니다.

그러나 찰라 찰라로 나누어서보면 해골바가지나 다름없지요.

우리가 원효대사님의 경험이 내경험이 되기 위해선 수행이 필요 합니다.

그러니 정신차려서 수행하는 길만이 자신을 자유롭게 만듬니다.



진정으로 죽읍시다.

진정으로 마음이 죽으면 참 자유와 행복한 앞날이 보여요.


 



  1. 책의 원제목 http://doorskim.blog.me/220547366836 [본문으로]
  2. 2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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