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과 !/수미산이야기

백장광록(百丈廣錄) 15 ~ 14

GraU 2021. 5. 20. 04:37

 

 

신묘장구대다라니 빠른 독송 :  https://youtu.be/QVGF-g7KvAg

 

 

 

 

 

 

 

[수미산 메일 :  210519 ~ ]

 

 

 

 

 

 

  누군가 물었다.

 

“무엇이 대승도에 들어가 

활짝 깨치는 요법입니까 ?  (  大乘 入 道  頓悟  法  ) ”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엇보다도 그대는 모든 인연을 쉬고 만사를 그만두라. 

 

 

선(善) · 불선(不善),   

세간 · 출세간,  

 

일체 모든 법을 다 놓아 버리고 

 

 

기억하거나 

생각하지 말라. 

 

몸과 마음을 놓아 버려 완전히 자유로와야 한다.  

 

 

마음을 목석같이 하여 

입 놀릴 곳 없고 

마음 갈 곳이 없어야 한다.

 

마음의 대지가 텅 비면 

구름장이 열리고 해가 나오듯 

 

지혜의 햇살이 저절로 나타날 것이다.

 

 

다만 모든 인연을 쉬어 

탐애와 성냄과 집착,  더럽다거나 깨끗하다는 망정이 다하면 

 

5욕 8풍 (五欲 八風)이 닥쳐도 꿈쩍하지 않는다. 

 

 

견문각지(見聞覺知)에 막히지 않고 

모든 법에 혹하지 않으면 

자연히 갖가지 공덕과 신통묘용(神通妙用)을 갖춘 해탈인이니, 

 

 

 

모든 경계를 대할 때

마음에 다툼과 혼란이 없다. 

 

 

거두지도 않고 

흩지도 않은 채 

 

성 · 색을 꿰뜷어 

아무 걸림이 없으니 

 

이런 사람을 도인(道人)이라 하는 것이다. 

 

 

선악 · 시비    그 어느것도 쓰지 않으며, 

한 법도 애착하지 않고, 한 법도 버리지 않으니 

 

이를 대승인(大乘人)이라 한다.

 

 

 

모든 선악,  공유(空有), 더럽고 깨끗함, 유위와 무위, 세간과 출세간,  

그리고 복이니 지혜니 하는 것에 매이지 않는 것을 

 

부처님의 지혜라 한다.

 

시비나 미추, 옳은 이치다, 그른 이치다 하는 

온갖 알음알이(知解)와 망정이 다하면 

 

얽어맬 수 없어서, 

 

어딜 가나 자유로우니, 

 

이를 초발심 보살이 그대로 

부처의 경지에 올랐다고 하는 것이다.“

 

 

 

 

삼조(三祖)께서는 ‘분명하게 인연을 잊는다’ 하셨고, 

조계(曹溪)스님께서는 ‘선이고 악이고 전혀 생각하지 말라’하셨으며, 

스승(先師:마조)께서는 ‘길 잃은 사람이 방향을 못가리는 것과도 같다’하셨다.

 

 

또한 조공(肇公)은 ‘지혜와 총명을 막아 버리고 홀로 깨달아 그윽하고 그윽한 자이라’하셨으며, 

문수는 ‘마음은 허공 같아서 예배․공경으로 볼 바가 아니며, 심오한 수다라(修多羅)는 듣지도 못하고 수지(受持)하지는 못한다’하셨다.

 

 

이제 있다 없다 하는 모든 법을 전혀 보지도 듣지도 말고 육근(六根)을 막아라. 

 

이렇게 공부하고 이렇게 경전을 지녀야 비로소 수행할 자격이 있다 하겠다. 

이 말은 귀에 거슬리고 입에 쓸 것이다. 

이 가운데서 이처럼 할 수만 있다면 다음 생 다음 다음 생에 나서는 부처없는 큰도량에 앉아서 평등하고 바른 깨달음 이루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악을 선으로 바꾸고 선을 악으로 바꿔 악법으로 10지보살을 교화하고 선법으로 지옥·아귀를 교화한다. 밝은 곳에서는 밝음의 결박을 풀고 어두운 곳에서는 어두움의 결박을 풀 것이다. 황금을 흙으로 만들고 흙을 황금으로 만들면서 모든 것으로 자유롭게 변화해 낼 수 있다.

 

항하사 세계 밖에서 구제해 주기를 바라는 자가 있으면 부처님께서는 즉시 30상을 그 사람 앞에 나타내 그 사람의 언어로 설법해 주신다. 근기 따라 교화하고 상대에 맞추어 다른 모습으로 모든 세계에 변화해 나타난다.

 

이렇게 아(我)와 아소(我所)를 떠났다 해도 저쪽 일에 속하며, 작은 작용이며, 불사를 짓는 법위에 포함된다. 

 

크게 작용하는 자는 

형체없는 데에 그 큰 몸을 숨기고, 

들릴락말락한 소리에 큰 음성을 숨긴다.  

 

마치 나무 속의 불과 같고 종소리 북소리와도 같아 인연이 닿지 않았을 때는 그것이 있다 없다 할수 없는 것이다. 축생이 천상에 태어날 과보를 침 뱉듯 버린다. 보살은 육도만행을 닦으며 마치 죽은 시체를 타고 강둑으로 건너듯, 감옥에 갇혔다가 변소간 구멍으로 빠져나오듯 한다. 부처님이 30상을 나타낸다 해도 그것을 ‘기름때 절은 옷’이 라고 한다.

 

 

또한 ‘부처님은 한결같이 오음(五陰)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틀린다’라고 말하기도 한다.부처님은 허공이 아닌데 어떻게 한결같이 받아들이지 않기만 하겠는가. 가고 머뭄이 자유로와 중생과는 다르다.  한 천계(天界)에서 한 천계에 이르며, 한 불국토에서 한 불국토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의 변함없는 법이다.

 

또 말하기를, ‘3승교(三乘敎)에 의거한다면 그들의 신심어린 공양을 받으면 그들은 지옥에 있으며, 보살은 자비를 행하여 동류가 되어 교화 인도하며 은혜에 보답해야지, 항상 열반에만 있어선 안된다’고 한다.

 

또 말하기를, ‘불이 불을 바라보둣이 만지지만 않으면 불이 사람을 태우지 못한다’라고 한다.

 

이제 다만 10구(十句)가 없으면 된다. 

 

· 탁한 마음

· 사랑하는 마음 

· 물든 마음 

· 성내는 마음 

· 고집하는 마음 

 

· 머무는 마음 

· 기대는 마음 

· 집착하는 마음 

· 가지려는 마음 

· 그리워하는 마음은 

 

하나에 각각 3구(三句)가 있다. 낱낱이 3구 밖으로 꿰뜷으면 일체 비추는 작용(照用)을 자유로이 내 맡기며 말하고 입 다물고 울고 웃는 모든 행위가 부처님의 지혜일 것이다. 

 

오래 서 있었다. 편히 쉬어라.“

 

 

 

 

백장광록(百丈廣錄)--14--④

 

 

세간법으로 드는 비유를 유사비유(順喩)라 하는데 방편교설이 그것이다. 

궁극적인 교설(了義敎)은 반대비유(逆喩)인데   머리 ·  · 골수 · 뇌를 버린다 한 것이 그것이다. 

 

지금 부처 · 보리 등의 법을 사랑하지 않는다 함은 반대비유로서 

버리기 어려움을 머리 ·  · 골수 · 뇌에 비유하였다. 

 

있다 없다 하는 모든 경계법을 관조함을    머리라 하고, 

있다 없다 하는 경계법의 모양에 꺾이게 됨을   손이라하며, 

목전에 경계를 전혀 관조하지 않을 때를   골수 · 뇌라 한다.

 

 

성지(聖地)에서 범인(凡)을 익혀 부처님은 중생 속에 들어가 동류로 이끌어 주시니, 그들 아귀와 함께 사지 마디마디를 불에 태우며 반야바라밀을 설명하여 발심하게 한다. 만일 오로지 수행하는 연(緣)을 빌어 부처가 되는 것을 인연성불이라 한다. 성인의 경지에 있기만 한다면 무엇을 의지하여 그들에게 가서 말해주겠는가.

 

부처님은 모든 부류에 들어가 중생들에게 배와 뗏목이 되어 주고 그들과 함께 무한한 수고로움을 받아들인다. 이렇게 부처님은 괴로운 곳에 들어가 중생과 함께 괴로움을 받지만, 가고 머뭄이 자유로와 중생과 같지는 않다.

 

부처님은 헛되게 괴로움을 받지 않는데 어떻게 괴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괴롭지 않다 한다면 이 말은 틀린 것이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말라. 부처님은 신통이 자재하다느니, 자재하지 못하다느니 하고 잘못 말들 한다.

 

부끄러운 줄 아는 사람이라면 감히 부처님은 유위다, 무위다하지 못하며, 감히 부처님은 자유롭다, 자유롭지 않다 하지 못한다. 찬탄하는 약방문(藥方文)을 제외하고는 추한 양 갈래를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다.

 

경에서는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불보리를 한 쪽에 봉안하려 한다면 그 사람은 큰 죄를 짓는 것이다’ 하였고, 

또 ‘부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 준다면 허물이 없다’라고도 하였다.

 

무루(無漏)우유가 유루(有漏)병을 치료하는 것과도 같으니 그 소는 고원에 있지도 않고 하습지에 있지도 않아서 이 우유로 약을 만들 만하다. 여기서 고원은 부처를 비유한 것이고 하습지는 중생을 비유한 것이다.

 

‘여래실지법신(如來實智法身)에게는 이 병이 없다’한 것과도 같다.

 

막힘없는 말솜씨로 자유롭게 날면서 나지도 없어지지도 않으면 그것을 쓰라린 생로병사의 아픔이라 한다.  이것이 버섯국을 가만히 마시고 설사병을 앓다가 돌아가신 것이며, 가만히 밝은 자취를 숨긴 것이다. 

 

밝음과 어둠을 모두 버리고, 갖느니 갖지 않느니 하지를 말라. 

또한 갖지 않다는 것마저 없애라. 그는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다.

 

왕궁에서 태어나 야소다라를 받아들이고 여덟가지 모습으로 성도하였다(八相成道)한 것은 성문외도가 망상으로 헤아린 것이니, ‘잡다하게 먹는 몸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순타(純陀:부처님께 마지막 공양을 올린 사람)가 말하기를, ‘나는 여래께서 결코 받지 않고 먹지도 않았다는 것을 압니다’라고 하였다.

 

무엇보다도 두 눈을 갖추고 양쪽 일을 관조해내야(照破)하며, 한 쪽 눈만 가지고 한 쪽으로만 가서는 안되니, 그러면 저쪽 어디에 가게 될 것이다. 공덕천(功德天)과 흑암녀(黑暗女)는 늘 같이 다니는데 지혜있는 주인은 둘 다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음을 허공같이 하고 배워야만 비로소 이룰 것이 있다.

 

인도의 첫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 ‘설산(雪山)은 큰 열반에 비유된다’하셨고,

이 땅의 초조(初祖)께서는 ‘마음마다 목석같이 하라’ 하셨다.

 

 

 

 

백장광록(百丈廣錄)--14--③

 

 

 

삼조(三祖)께서 말씀하시기를, 

‘시비득실을 동시에 놓아 버리라’ 하셨다. 

 

있다 없다 하는 등의 모든 법에 집착하여 머물지 않으면 그것을 유연(有緣)에 머물지 않는다 하고, 머물지 않는 

거기에도 머물지 않으면 그것을 공인(空忍:忍은 바른 앎, 지혜라는 뜻)에 머물지 않는다고 한다.

 

자기 그대로가 부처이며 선도(禪道)를 깨달았다고 고집하는 자를 내견(內見)이라 하며, 

인연과 닦아 얻음을 통해 이룬다고 집착하는 자를 외견(外見)이라 한다.

 

 

지공(誌公)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견과 외견 모두가 착각이다’라고 하셨다. 

 

 ·  ·  · 혀가 각각  유 · 무 모든 법에 집착하여 물들지 않으면 이를 4구게(四句偈)를 수지(受持)한다고 하며, 사과(四果)라고도 한다.  6입(六入)에 자취가 없는 것을 육신통(六通)이라 한다. 유 · 무 모든법에 막히지 않고, 막히지 않음에 머물지도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없다면 이를 신통(神通)이라 한다. 나아가 이 신통을 지키지 않으면 신통이 없다고 한다. 

 

‘신통이 없는 보살은 자취를 찾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니, 가장 불가사의한 향상 부처님(佛向上人)이시다. 또한 자기천(自己天)이며, 지혜로 관조함이다. 찬탄은 기쁨이며 기쁨은 경계에 속한다. 이렇게 기뻐할 경계는 하늘이며 찬탄하는 것은 사람이어서 사람과 하늘이 만나니 이것을  ‘청정한 지혜(淨智)는  하늘,   바른 지혜(正智)는 사람’이라 하기도 한다.

 

본래 부처가 아닌데 부처라 하면 그것은 체결(體)이며, 

부처라는 생각을 내지 않고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없다는 것마저도 없으면 이를 매임을 없앴다(滅結), 또는 진여(眞如), 체여(體如)라 한다.

 

 

부처를 구하고 보리를 구하는 것을 현신의(現身)라 하니, 

조금이라도 구하는 마음이 있다면 모조리 현신의라 한다. 

그러므로 ‘보리를 구함이 훌륭한 구함이긴 하나 티끌(塵累)을 더할 뿐이다’하였다.  

 

부처를 구하면 부처 대중이며, 유 · 무 등 모든 법을 구하면 중생 대중인데 이제 비추어 깨달음으로 유 · 무등 모든 법에 머물지 않으면 대중의 테두리에 들어가지 않는다.

 

소리 · 냄새 ·  · 촉감 · 법 등을 낱낱이 좋아하지 않고, 

그 모든 경계를 탐착하지 않아서 십구(十句)탁한 마음이 없기만 하면 요인성불(了因成佛) 이며, 

글(文句)을 배워 깨닫고자 하는 자는 인연성불(因緣成佛)이라 한다.

 

 

 

 

 

부처님을 보고 부처님을 알면 부처님을 설명할 수 있지만 

안다 본다 하면 되려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 

부처가 알고 부처가 보고 부처가 설명한다 해야 맞을 것이다. 

 

이것은 불(火)을 본다 하면 옳겠지만 

불이 본다 할 수는 없고, 

 

칼로 물건을 벤다 하면 옳겠지만 

물건이 칼을 벤다 할 수는 없는 것과 같다. 

 

부처를 안다는 사람, 부처를 보았다는 사람, 부처를 설명하는 사람은 항하수 모래알 같으나, 

부처의 앎, 부처의 봄, 부처의 들음, 부처의 말씀은 만에 하나도 없다.

 

 이들은 자신에게 눈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의지하여 눈을 삼을 뿐이다. 

 

경전에서는 이를 추론(比量智이라고 부르는데, 지금 부처의 지해(知解)를 탐하는 것도 역시 비량지이다.

 

 

 

 

 

백장광록(百丈廣錄)--14--②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하여 중생을 제도하면

 앞 생각(前念)이 나지 않고

  뒷 생각(後念)이 이어지지 않는다. 

 

앞 생각의 활동(業)이 없어지는 것을 중생을 제도했다고 한다. 

앞 생각에 성을 내면 기쁨이라는 약으로 치료하니, 그것을 부처님이 계셔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모든 말씀은 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니 병이 같지 않으므로 약도 다르다. 

 

그러므로 어떤 때는 부처님이 있다 하고 어떤 때는 부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실다운 말로 병을 다스려 차도가 있으면 낱낱이 실다운 말이지만 차도가 없으면 그 모두가 허망한 말이다. 그러나 실다운 말이 견해를 내면 망령된 말이되고, 망령된 말이 중생의 전도를 끊으면 실다운 말이 되니 병 또한 허망하여 허망과 약이 서로 다스리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하여 중생을 제도하신 9부교(九部敎)의 말씀은 방편교설(不了義敎)이다. 성냄과 기쁨, 병과약이 그대로 자기라서 다시는 두 사람이 없는데, 어느 곳에 세간에 출현하는 부처가 있으며 어느 곳에 제도할 중생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경(經)에서도 

 

‘멸도(滅度)를 얻은 중생은 사실 없다’고 하였다.  

또는 

‘부처와 보리를 좋아하지 않고, 유 · 무 모든 법에 집착하거나 물들지 않음남을 제도한다(度他)하고, 

자기를 고집하여 머물지 않음을  자기를 제도한다(自度)’고 하였다.

 

 

병이 같지 않기 때문에 약도 다르고 처방도 다르니 한 쪽으로만 고집해서는 안된다. 부처와 보리 등의 법에 의지하면 모조리 일정한 방향에 의지함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에 있어서는 한결같지 않다’고 하였던 것이다.

 

경전에서는 그것을 노란 잎사귀를 돈이라고 속이고 빈주먹 속에 있다고 속여 어린 아이를 달래는 비유를 들어하고 있다. 그러나 사라음은 이 이치를 모르니 그것을 무명(無明)과 같다고 한다. ‘반야를 행하는 보살은 내 말에 집착하거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는다’하였다.

 

성내는 마음은 돌덩이 같고 애욕은 강물과 같다.  

지금 성내는 마음과 애욕만 없다면 산하 석벽을 꿰뚫고 당장 귀머거리 속인병을 다스리며 다문변설(多聞辯說)로 눈병을 다스릴 것이다.

 

사람이 부처가 되면 얻었다(得)하고 사람이 지옥으로 떨어지면 잃었다(失)한다. 

옳다(是) 그르다(非)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백장광록(百丈廣錄)--14--①

 

 

 

누군가 스님께 물었다.

 

“보십니까?”

 

  스님께서 대답하셨다.

 

“본다.”

 

  다시 물었다.

 

“본 뒤에 어떻습니까?”

 

  그러자 스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보는 것이 둘이 아니다. 

 

이제 

보는 것이 둘이 아니라면 

보는 것으로 볼 것보지 않는다

 

만일 

보는 것을 다시 본다면 

앞에 보는 것이 보는 것이냐, 

뒤에 보는 것이 보는 것이겠냐.

 

마치  

 

‘볼 것을 볼 때엔 보는 것이 아니며, 

보는 것은, 오히려 보는 것을 떠나 보는 것이 미치지 못한다’

 

고 말한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법을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실행되지 않으면 

모든 부처님께서 빨리 기약을 주신다(授記)고 하였다.”

 

 

  그러자 이렇게 따져 물었다.

 

“보는 것이 이미 보는 것이 아니라 한다면 

기약을 주신다는 말이    어떻게 기약을 주신다는 말이 되겠습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먼저 종지(宗)부터 깨달은 사람은 빨아놓은 옷처럼 있다 없다 하는 모든 법상(法相)에 구애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습 떠난 것을 ‘부처’라 하는 것이다. 

 

허와 실을 둘 다 간직하지 않고 중도만이 오롯하고 묘하다. 

한 가닥 같은 이 길을 통달하여 후진들이 그 단계에 계합하므로 ‘기약을 준다’고 할 뿐이다.

 

무명(無明)은 아버지이고, 탐애(貪愛)는 어머니이며, 

자기는 병이고,  다시 자기를 치료함은 약이다. 

 

자기라는 칼로 다시 자기 무명과 탐애라는 부모를 죽이므로

‘부모를 살해한다’고 했던 것이다. 

 

한 마디 말로 일체법을 견주어 타파하니, 

때 아닌 때에 밥을 먹는 것도 마찬가지다.

 

있다 없다 하는 등의 모든 법은 

 

때 아닌 밥이며, 

나쁜 음식이며 

보배 그릇에 담긴 더러운 음식이다. 

 

또한 파계이며, 

망령된 말이며, 

잡스러운 음식이다.

 

 

부처님은 구함이 없는 사람이니 있다 없다는 등의 모든 법을 탐하여 소유하거나 조작하면 모두가 위배되는 것으로 도리어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 이렇게 탐하고 물들면 그것을 모조리 ‘수수(授手)’라고 이름한다.

 

탐내거나 물들지 않고, 

탐내거나 물들지 않음에도 머물지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조차도 없으면 

 

반야화(般若火)라 한다. 

 

이것은 손가락을 태우고 신명을 아끼지 않으며, 사지를 마디 마디 찢고, 

세간을 벗어나며 저 세계에서 이 세계를 다스리는 것이다.

 

오장육부에 12분교와 유·무등  모든 법을 털끝 만큼이라도 남겨두었다면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구하고 얻을 것이 있어 마음을 내고 생각을 움직였다 하면 여우라고 한다. 

 

이제 오장육부에 아무 구할 것도 얻을 것도 없다면 대시주(大施主)이며 사자후이다.

이 사람은 또한 얻을 것이 없는 거기에 머물지도 않고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마저도 없으니 육절사자(六絶獅子)라고 부른다.

 

너다 나다 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모든 악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겨자씨에 수미산을 받아들이면서 일체 탐․진․팔풍(八風) 등을 일으키지 않는 것과 같다. 

 

또한 입 속에 큰 바위의 물을 머금으면서, 일체 허망한 말은 귀에 받아들이지 않으며, 몸으로 남에게 전혀 나쁜 짓을 하지 않아서  모든 불을 뱃속에 넣은 듯이 한다.

 

이렇게 

낱낱의 경계에 혹하지 않고 

성내지도 기뻐하지도 않으며 

 

자기 육근문두(六根門頭)에서 깎아내고 정화하면 

일 삼을 것 없는 사람(無事人)으로서 

 

모든 알음알이(知解)를 극복하고 두타행(頭陀行)정진한다 하겠다. 

 

이를 천안(天眼), 또는 분명히 관조함으로써 눈을 삼는다(了爲眼) 고 한다. 

또한 법계성(法界性)이라 하니, 수레를 만들어 인과를 싣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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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학스님 무문관 일기 중에서 ㅡ 기연 11   : 254 ㅡ 투자산 대동선사 819 ~914

 

 

 

한 스님이 물었다.

 

佛佛授手,  祖祖相傳,   傳箇什麽法 ?

 

선사가 대답하였다.

 

老僧 不解 謾語 如何 炭堆裹 藏

 

我道汝黑似漆

 

的的 不明時 如何 明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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