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제 : Consent/생태적 사고의 기본전제: 알아차림에서 Advocacy까지

2 . '의도된 합리' 의 인식

GraU 2007. 10. 11. 19:57

 

 

마비의 알아차림 에 이은

'의도된 합리(화)' 의 인식

 

진리? 에 대한 관점의 변화

 

 의도된 합리’ ;

의도에 의해 왜곡된 합리 ; 진리라고 믿고 있었으나 사실은 의도되었던.

 

 

 

e.g. 칸트 구성주의 ;  오성에 의해 재구성된 지식

(근대 미학의 초석)

 

우리는 항상 불변의 진리, 특히 과학이 밝혀낸, 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e.g.  근대물리학이 시간성의 개념으로  와해 : 상대성 이론의 등장

 

e.g.  연관하여 '시간'이 철학의 영역으로 뛰어들어 고전적 의미에서의 절대적이고, 고정된 불변의 진리가 부정? 되기 시작한 것.

 

이 모든 것은 그 이전의 인식틀 = schemer 에서는 부정할 수 없는 준거, 진리, 표본, 모방의 실체 였지만,  실제로는 절대적으로 불변하는 '무엇'이 아니었다는 것.

 

그것은 진리? 로서 강요된 측면이 있다는 것. 여기서는 보다 건축디자인의 영역에 국한하여

자발적 다양성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부여된 다양성' = 강요된 다양성 = 즉 다양성이란 이름으로 의도적으로 합리화 되었음을 인지하고 비판해보는 것이 목적.

 

cf. 참조 :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 디페랑스 / 시뮬라크르 /  창발 ...

 

cf. 철학과 과학의 상호 연관성 예

 

우리가 혹시나 과학은 과학의 틀 안에서만, 철학은 철학의 틀 안에서만 발전(?) 되어 온 것이라고 여기기도 하는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의 변화하는 시간의 개념이 절대성을 부정하게 되는 철학적 원류를 낳게 되었다는 예(cf. 베르그송, 창조적진화, 1907, '지속'의 개념, cf.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인식의 경계는 무의미하다(? 좀 비약적이긴 하지만)는 것. 이 아저씨들이 다른 경계 내의 인식의 영역에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지 않았다면, '진보'는 없었겠지. 그런 의미에서 한 이야기. 즉 "틀을 인식하고 스스로 비판할 수 있다는 것" = "알아차림" 은 철학의 영역에서도 이미 그러하였다는 것이며, 이는 건축디자인에 있어서도 유효하다.? 

 

 

 

-> '의도된 합리'에 마비되어 있었음을 인식하는가?

->  실제로 강요될 수 있는 '진리'가 존재하는가?

 

앞의 '마비' 에서의 사례를 돌아보자.

국가주의 의 의도는?  세계화의 의도는? 내가 정해놓은 습관(자발적 마비=자기합리화 = 의도적 합리)의 의도는?

 

 

 

여기서는  ref. 백남준의 "예술은 '高等詐欺'이다." 

 

디자인 의도 + 합리적 과정

상당히 이상한 디자인이지만 합리(논리)적 과정을 통해서 완성된다면 인정

à 의도의 다양성

 

모더니즘이건 칼라트라바의 내재된 의미가 어떻건

의도된 합리 임을 인식, 알아차려야 한다.

 

"진리의 중심은 어디에나 있으며, 그 주변은 어디에도 없다." 

 

: 의도된 합리임을 알아차리고 인정한다는 것은,

그 디자인 자체를 수용함을 인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한진이의 "취향"(아비투스와도 연관된)에 맞는 깔라뜨라바의 설계 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취향으로서 '마음'에 든다 = 따르고 싶다 = 스키머 유입 = 마비  : 그리고 그걸 모르고 있슴... 이를 스스로 자각하는 것이 알아차림.   

그런 의미로,  그것이 의도된 합리임을 인정한다는 것은, 예를 들어 한진 입장에서 따르고 싶다(취향) 할 지라도,  의도된 합리로서의 칼라뜨라바의 디자인 형태를 자신의 스키머로 이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의도"에 따른 합리화 과정을 파악하여 전체적 구조를 알아차리고, 그 스키머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바로 "의도된 합리의 인정"이라 할 수 있다.

 

즉  수없이 많은 가능성 중에 그는 왜 그 것을 선택("의도")하였고, 어떠한 과정으로 풀어나갔는가 하는 것을 명확하게 이해한다면 이 이야기의 의미는 보다 분명해진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건축가의 디자인 해설은 시적이면서도 형이상학적이므로 '애매모호성'을 동반한다. 우리가 마비되는 이유 중 큰 것 중 하나이다. 뭔지 잘 모르겠지만 멋있어 보이니까. 하지만,  대개의 경우 이 애매모호성은 이해하는 사람의 소양 부족인 경우가 많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근대 이후 이 애매모호성은 '물성'의 강조에 뒤 이은, 소위 메타포적 어휘사용의 근거로서 의도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또 반대로 명확하게 이해함으로서 거기에 마비되는 경우도 흔하다.

 

다시 의도적 합리 이야기로 돌아가서,

앞서서  스스로 스키머를 가지고자 하는 "의도"의 소산으로서의 본능이라고 비유했던 것을 상기하면서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의도"를 구체화 시켜놓은 '무언가'가 존재해야만 그것을 인지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앞선 수업에서 언급해 본 적 있는 "삶을 아름답게 담는" 건축과 "아름다운 건축에 담긴 삶"이라는 말을 상기해보자. "삶을 아름답게 담자"라는 의도로 설계된 건물은 그렇지 않은 의도로 설계된 건물과 공간적, 시각적 어휘가 비슷하더라도 그 속에 삶이 채워졌을 때는 전혀 다른 건물이 된다.

 

즉, "의도적 합리"에서의 원래 가리키고자 했던 뜻은 '의도 : 가장 근원적인 수준의 마음, 욕구'를 '합리' 즉 '이성'의 존재에 기대어 포장하였다는 뜻이지만,

 

* 의도 : 형의상학적 의미들이 해체되고 보다 실재적 근원적인 '무엇'을 찾고자 하는,  또는 그것이 없음을 공공연히 천명하는 인식의 변화 속 -  "마음" "개인적인 욕구" 의 실재화? 표면화를 총체적으로 지칭하고자 사용...  cf.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 의도적 합리 라는 개념의 전제는 이러한 맥락에서 기존에 우리가 '마비'되어 있던 합리주의의 그늘- 이성에 의해 밝혀진 것 = 고정불변의 진리 라는 등식 - 에 대한 인식을 촉구하기 위한 데서 출발한 것. 보편성의 추구라는 본능?에 의해, 신화적 보편성이 그러하였듯이, 이성을 교조주의적으로 맹신하여, 예를 들어 당대의 과학의 수준으로 밝혀진 것이 당대의 진리인 것으로 '강요되는 현상'을 지칭하고자 한 것.

 

따라서 우리가 '마비'된 현실을 알아차리고자 한. 앞 수업과정의 연장에서 보면,  우리가 친환경, 또는 생태적 디자인이라고 부르는 것들도 모두 근본적으로는 '그렇게 하고 싶은' 데서 출발하는 의도의 소산이며, 그것을 합리적 과정, 수법, 논리로 진행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출발하자는 것이 이 의도적 합리에 대한 인지의 목적이다. 이는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 등등이 그 이름과 형태, 사고의 틀을 바꾸어오면서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알아차림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것은 더욱이 교육의 현장에서 일정한 형식을 갖추고 전달해야하는 특성 상, 생태적 건축이란, 친환경 디자인이란 이러이러해야한다는 식의  절대적 '스키머'인양 강요되기에 충분한 소지를 고려한 것이며 뒤 이어질 생태적 건축의 개념 자체가 가지는 특성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만듦, 있음(being)을 창조하는(?) 디자인의 영역에 환원하여 본다면,

그 과정 전체 즉 '건축하는 것' 자체가 의도적 합리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보다 작은 영역으로 다시 축소해서 설명될 수 도 있겠지만, 우리가 건축한다는 것(시홍이 표현대로) 은 의도를 합리적으로 구축해 가는 과정임에는 명백한 것이다. 매우 당연한 소리 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연원으로 이 "의도"는 형태 근거로서 자유로워졌다. 유희적 건축 - 그 다양성 중의 하나 - : 건축외관의 변화 추이 참조

 

자. 여기서 강조할 것은, 앞서 이야기한대로 "의도"임을 알자는 것이 목적이다. 그 의도를 구축하는 과정이나 그 결과로 나오는 형태에 마비되지 말자. 물론 멋지긴 하지만.

 

 

 

 4분 33초

세계적인 전위음악가 존케이지의 공연이 있었다.

그는 무대에 나타나 인사를 하고 피아노 앞에 앉았으나
좀체로 건반을 두드리지 않는 것이다.
관객들은 숨을 죽이고 지켜보다가 1분이 지나고 2분이 지나자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시간이 더 흐르자 관객의 기대감은
불안감으로 변했다가 마침내 노여움으로 바뀌어 갔다.
4분 33초가 지나자 존케이지는 서서히 일어나
객석에 인사를 하고는 무대 뒤로 사라졌다.

그가 소리 없이 연주한 곡명은 “4분 33초”로서
꼭 악기를 통하지 않고도 긴장과 흥분을 느끼게 할수 있다면
곧 음악이라는 그의 의도이며 작품인 것이다.

다소 황당하지만 사고와 발상전환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는
독특한 공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