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제 : Consent/생태적 사고의 기본전제: 알아차림에서 Advocacy까지

3 . Tolerance적 인지 - 자발적 다양성

GraU 2007. 10. 12. 15:54

 

Tolerance적 인지

 

마비의 알아차림 = 의도된 합리의 인식 에 이어

실제로 생태적(정확히 구분하자면, 생태주의적인) 사고의 시작을 위하여

가장 기초적인 단계이다.

 

내가 나의 스킴(의견이든 이상이든)이 인정받길 원한다면, 남의 스킴도 인정해라.

이런 정신은 프랑스에서 나온 것으로, 좌익과 우익이 극하게 대립하던 때에 발전된 것이다.  카페 문화라고도 할 수 있는 프랑스의 토론문화는 단계단계 발전된 것이다===> 이건 'tolerance' 자체의 개념

 

똘레랑스적 인지 라는 개념은  똘레랑스의 개념을, 앞서 이야기 했던, 그동안 소외되었던 타자들에게까지 연장하자는 뜻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는 직접적으로 advocacy architecture의 개념과 연결된다.

 

소외된 '타자'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뭘까.

이는 이 수업이 앎에 대한 탐구.. 소위 '알아차림'에서 출발한 이유이기도 하다.

 

타자라는 개념은, 모더니즘 건축에서의 예를 들면, '보편화'를 위해서 무시되었던, 지역주의 건축, 역사성, 개별성 등을 말하고, 세계화의 예를 들면 세계화의 이익을 함께 나누지 못하는 국가들. 주류에서 소외된 어떤 것이라는 뉘앙스로 이해하면 좋겠다. 그리고 이 타자라는 것은 "차이"라는 것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안다'라고 하는 것은 여러가지로 이야기 될 수 있는데, 그 중에 이런 구분을 예로들면,  하나는 과학에서 가장 널리 발전한 것으로 분석화·공간화·개념화하여 사물을 고정적·불연속적인 것으로 보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공감(sympathy)을 통해 사물의 중심부까지 이르는 총체적·직접적인 직관이다.(이건 내말이 아니고 베르그송이라는 철학자의 구분)

 

여기서 분석화, 공간화, 개념화 라는 말이 나오지. '과학적 방법론'으로 대치될 수 있을 이 방법. 이 근원에는 나와 대상, 또는 하나의 대상과 또 다른 대상의 구분, 즉 '차이'의 인지가 있다. 즉 이 맥락에서 볼 때 앎이라는 것은 차이를 아는 것이고, 그 차이에 의해 범주화되고 구분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앎'이라는 인간의 행위(?)에 의해 차이로서 구별된, 그리고 우리 인간의 관점에 의해 구분되고 범주화된 대상들이, 어떤 것들은 인간에게 가까이로 다가서고, 또 어떤 것은 소외되기 시작 한 것이다. 다음 시간 부터 이야기될 '자연'과 '환경' 등등도 이러한 소외된 "타자"의 큰 예이다.

 

이러한 앎에 대한 인간의 갈구로 인하여 어쩔 수 없는 수순으로  타자들이 발생하였고, 우리는 이제 그 들을 인지하고, 존재함을 인지해야한다는 것. 같은 흐름에서, 여러분들도 나도 타자일 수 있다. 즉, 우리가 수업시간에 이야기 했던 강요된 schemer의 인지 노력을 생각해보라.

 

 

수업에서 나의 스킴을 전달할 뿐, 다양한 스킴이 있다는 것을 알고, 비판적 사고를 가지고 받아들였으면 좋겠다.여러가지 유형으로 존재하는 스킴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내가 나의 실체를 느끼는 순간, 내가 존재하고 (나의 영역) 동시에 세계와 분리된다. -> 지각, 자각 (존재론적인 틀)

 

      ,

지음  ────> 있음  ────>  받아들임

(image)          (being)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à      苦 

 

'나'의 인식  à  대상의 인지  à 나의 판단   

 

Design과정 à   건물  à  환경으로서 작용

 

└─── 존재 ────┘└─── 인식 ──┘

 

두 가지 다 고려한 디자인을 해야 한다그러려면 그동안의 디자인 경향에서 소외되었던 타자들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합리적 방법으로 소통해야 알 수 있다.

 

존재론, 인식론적? 건물의 생산/인식 과정으로의 디자인의 고려단계 확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제까지의 대부분의 경향에서 건물을 디자인하는 것은 건물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즉 건물을 존재시키기까지의 단계, 건물자체의 아이덴티티를 부여하는 과정에 치중해왔다고 할 수 있으며,   P.O.E 등의 개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디자인 과정에 적극적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따라서, 미리 디자인단계에서, 건물이 존재하기 시작하여 현상으로, 환경으로 '지속'되는 단계에 대한 적극적 고려로 확대하자는 개념이고, 이를 위해  디자인을 위한 디자인 이 아닌, 그동안 디자인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그 건물'의 존재/지속(인식)의 단계 모두에 걸쳐 관련된 요소1에 대한 전방위적 수렴(Hollism, total field image, Advocacy A-Design)에 의한 디자인을 지향하자는 것이고, 그 인식의 출발로서 똘레랑스적 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는 지금도 여러 분야에서 점차적으로 고려되고는 있지만 형이상학적 영역이 아닌 보다 실재하는 요소, 실체있는 것들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e.g. 표토의 보호 = 지렁이, 미생물에 대한 고려,  사용자, 사이트 자체, 기후, 에너지문제, 기타 등등

 

예를 들어, 건축물의 디자인에 있어서 지렁이를 고려할 것이냐 말것이냐 라는 문제의식을 최초 제기하는 것 자체가 똘레랑스적 인지에 해당된다. 지렁이를 대하는 생태주의적 자세 - 지렁이에 대한 생태학적 지식들은 "상황에 따라  Advocacy 하게"(? 표현을 다듬을 필요는 있지만, 이것이 생태적 디자인 고유의 전문성professionality의 출발이라고 생각된다 *주) 적용될 필요가 있다.

 

 

인지한 것을 행동하지 않는 것은 인지한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인지한 것을 인정하고, 사고가 바뀌었으면 행동도 바꿔야 한다.”

 

 

* 주 : 뒤이어 진행되겠지만, 기존의 건축디자인과 구별되는 생태적 디자인(환경론의 구분 참조, 여기서 '생태적'이란 '지속가능한'의 개념과 구별) 핵심을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바로 '생태주의적 사고가 가능하고, 생태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생태(환경)윤리에 입각하여 디자인 하는 것으로, 그 바탕에 '마비' 의 인지 - '의도적 합리'의 인정 - '똘레랑스적 인지' - '자발적 다양성의 표현'이라는 일련의 과정으로 억지로 개념지어 설명을 이어가고 있는 전방위적 고려의 디자인-Advocacy Architectural design 이 있다. 

 

이는 단순히 지식을 알고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고,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건축디자인의 특성과도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그러나, 여기서의 "상황에 따라"(II.생태적? 해당꼭지 참조)의 개념은, 이즘-주의:합리주의 허울에 기대어 형태구성의 내적논리성 확보에 치중한 디자인만을 위한 건축디자인 현실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생태주의적 시각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건축물과 건축행위와 연관된 타자들에 대한 고려를, 생태학적 지식을 방편으로 활용하여 구현해보자는 의미이다.

 

 

 

자발적 다양성 ?

 

 

똘레랑스적 인지 -  관계를 인지한다는 것

고전적 의미에서 관계는 나를 중심으로 한 일방적인 것 (일편향적인 사고의 줄기)

똘레랑스적인 인지에 의하면 관계는 상호작용으로 일어나는 것

나의 이미지가 되돌아와서 나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 관계는) 실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에게 실제로 영향을 미치니까.

 

다양성의 인지

관계는 상호작용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또한 그 속에 의도라는 게 있고 때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계속 변화한다.   똘레랑스적 인지 ---> 객체의 다양성 인식

 

(1)       (2)

↑______│

      (3)

 

이 구조에 대해 인지하려고 노력하자

앞으로 나올 얘기들이 여기서 출발하니까

 

내가 부여하는 다양성 (Formal Architect) / 자발적 다양성 (Advocacy Architect)

 

앞서 수업에서 이야기 한 "내가 부여한 다양성"과 "자발적 다양성"의 개념을 다시 떠올려라. 부여된 다양성이든 자발적 다양성이든 그 두 가지는 모두 일종의 "의도"라고 본다면,

 

근/현대 건축의 '디자인' 의도는 모두 부여된 다양성으로서의 의도이다. 우리 주변의 건물들을 보면 극명하다. 즉 주체로서 '나'(예술로서의 건축? 즉 자신의 자의성, 철학을 표현하는 작품으로 건축을 대하는 건축가-작가주의, 경제적 목적에 치중한 건축주, 뽐내는 건축외관.....) 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한, 나 중심적인 일편향적 사고의 소산이라는 것.

 

그 반대로 자발적 다양성의 개념은 그 "의도"의 지음을 나에 의해서가 아닌 타자에 의해서 하자라는 것이 골자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 둘은 같은 다양성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근본적으로 부여된 다양성이건, 자발적 다양성이건 건축가에 의해 표현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렇지만, 디자인할 건물과 연관된 여러가지 객체의 다양성을 인정하느냐에 따라 두가지는 극명하게 차이난다. 중요한 것은 그 객체들 = 타자(건축주-미생물까지)에게서 요구된 다양한 것들을 우리가 catch 할 수 있느냐 , 그리고 그것을 적절한 방법으로 디자인에 적용할 수 있느냐이다.

 

 

 

자연관의 설정과 관련지어 얘기해보면,  

 

내가 가진 자연관에 의한 환경(주어진 대지 연관)해석  

 

vs   환경(주어진 대지)에 맞는 자연관의 상정

 

으로 이해하면 쉬울까?

 

즉 나의 자연관은 내가 디자인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사이트 등의 디자인 시에 분석되어지는 많은 대상들을 가름하는 잣대가 된다. 그러나, 후자의 개념으로 보면, 그 상황에 맞는 자연관을 대입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이해하면 좋겠다.

 

다시말하면, 

"내가 설정하고 있는 스키머=나의 고정불변의 자연관"으로 파악한 대지해석에 의해 "부여되는" 다양성이 아닌, 대지의 상황자체를 똘레랑스적으로 인지하여(=내가 미리 정해놓은 고정불변의 자연관에 의해 놓쳐버리는 타자가 없는)디자인의 다양성으로 파악하는 태도, 그것이 '자발적 다양성의 인지' 이고, 그 인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이러한 맥락에서 똘레랑스적 인지 - 자발적 다양성의 인정 - Advocacy (architectural) design 은 상호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1) '마비의 알아차림' 에서

 

(2) '그동안 마비되어 있었던 스키머들이 의도된 합리였음을 인지하는 것'

 

(3) 그리고, 그 일방향적 스키머에 가려져 인식하지 못했던 타자들을 인지하는 '똘레랑스적 인지'

 

(4) 그를 통한 이 '자발적 다양성' 의 인식

 

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고의 과정들이 

바로 위에서 '나'라고 한 것을 '인간'으로, '타자'라고 한 것을 '환경, 특히 생태환경(자연)'으로 치환해서 생각해보는 자세의 기본이 되는 생태주의적인 사고의 기본전제이다 . 

 

 

 

 

 

  1. cf. 환경심리학적 관점, 건물이 존재하는 시간과정에서 끼치게 되는 시각환경으로서의 영향,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 실제 많은 사회문제의 근원 중 하나가 심리적 투명성의 부재라는 잘 알려진 사실은 이미 지난 세기에 연구되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고려나 중요성의 인식은, '현대병'의 부각을 통한 시선끌기 정도에서 그쳐온 실정.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