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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가지 마음] 승부심은 자연스러운 것 : 없애다? 알아차리고, 인정하다! 그것 만으로도.

GraU 2014. 10. 17. 08:32

 

 

 

당 태종이 물었다.
“군주가 어찌하면 훌륭한 명군이 되고
어찌하면 어리석은 혼군이 되는 것이오?”

 

위징1은 간략히 답했다.

“겸청즉명(兼廳則明)이요, 편신즉음(偏信則暗)이라.

두루 들으면 명군이 되고, 한쪽 말만 믿으면 혼군이 됩니다.”

 

 

 

 


- 김성곤 저, ‘리더의 옥편’에서   (행경 오늘자)

 

 

 

 

 

 

두루 듣다?  

兼 : 겸하다, 다하다, 쌓다, 아울러

양 쪽을 다 듣다.

의견의 좌, 우를.

 

暗  암

어두울 암

도가에서의 '명과 암'

 

 

 

박학  심문  신사  명변   독행

널리 배우고, 꼬치꼬치 묻고, 신중히 생각하고, 분명히 말하며, 독실히 행하라.

 

- 중용, 성을 얻는 5가지 덕목 중에서.

 

 

 

cf.  다문 , 불교. 의심을 걷어내어 해탈에 이르게 하는.

 

 

 

 

이글을 명군과 혼군으로 옮긴 것은 의도에 의함이겠지만,

 

양쪽을 다 보면 곧 밝은 것이고,

한쪽에만 치우치면 곧 어두운 것이다.

로 읽힘은 위징이 도사이고, 그런 측면에서 양행 천균의 개념을 상정함이리라.

 

 

 

 

동아시아의 불교가 도교와 습합 되었다 라고 하는 교과서적이고, 방관자적 서술보다

두 가지 내용에 대해 조금씩 공부해가다 보면, 할배교수님 연구실에 있을 때 찾아오시던 노장 학자 분들의 "학문이 끝도 없다." 흘려지나치던 한마디 넋두리가 다시 떠오르곤 하여, 동양의 '공부'의 폭이, 깊이가, 그 상호연관성이 다시 보이며 고개가 숙여진다.

 

학문적인 부문에서 보았을 때도, 앎은 근본적으로, 분석을 통해 분류되어, 깊어지고, 세분화 되어 세밀하게 연구되어, 합쳐진다는 (rel. 통섭은 더나아가) 개념은 마음공부(특히 아비담마)와 서로 이어있다. 물론 내 생각이지만 '앎의 증거'는 '겸손'에 있다. 흔하게 벼는 익으면 고개 숙인다는 예절의 측면처럼 그리해야 된다는 경구가 아니라. 뉴톤인가 아인슈타인인가,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과학은(수학) 바다 가장자리의 작은 해변에 모래사장의 모래알을 몇개 들여다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또 아는 한계가 커질수록 접하게 되는 면적이 더 많아지는 풍선과 같아서 더 모르는 부분이 많아지는 이치와 같다고. 표현은 정확치 않겠지만, 실재 그 내용을 알아갈수록 더 깊어지고 넓어지고 배워야 할 것들이 많아지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때문. 그리고 이 뜻의 출발이 종교적이거나 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러나,

보는 사람이 자기 알음알이 한에서 읽게 될 수 밖에 없음은

예를 들어, 아무리 그것이 '진리'라도, 운 좋게도 내가 그것을 접할 수 있는 행운을 가졌다 할지라도, 내가 알아보리라는 기대가 전제되어 있음을 본다면,  단지 내가 그런 의미를 바라는 것일 뿐이었음을 알게 된다. 바라고 구하는 마음. 어느 순간에나 있다. 공부한답시고 이런 소위 '정보(기억)'을 다룰 때 특히.

 

주인공을 보고자 할 때,

차라리 고요한 것이 나은 이유이다.

 

 

위 글과 같은 많은 경구들을 대할 때, 아주 예전에 있었던 소위 '고전'적 전형으로, 오래되어 지킬만 하다라는 생각(선입견, 오관의 상, 육식 이전, 부지불식간에 작동하는)이 바탕에 깔려 있음이 곧 수자상의 가장 쉬운 예이다.

 

이 말은 누가 했지? 언제 했지? 오, 오래된 것이네, 옛 선현이 한 말이구나. 하는 거기.

 

그러고 있는 줄도 모르고, 부지불식간에 시간적 위계를 찾고 있는 나.

.

.

.

중간에 거치는 것이 더 있으되,

근본은

 

나보다 나은 놈인가?

 

 

 

 

 

승부심.

 

고결한 쪽이랍시고, 받들어 모실 만한 스승을 찾는데 이런 말을 하느냐 싶을 수록에 더욱.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이란 말을 입으로만 떠드는 셈.

다만 그 과정을 거쳐본 자라야만 옮길 수 있는 뜻.

 

 

 

 

 

 

 

 

 

 

 

 

 

 

 

 

 

  1. (병) Wei Zheng (웨) Wei Cheng. 580~ 643. 중국 당(唐)나라 초기의 정치가. 자는 현성(玄成). 거록군(鉅鹿郡) 곡양(曲陽:지금의 허베이 성[河北省] 진양[晉陽]의 서쪽) 사람이다. 위징은 어렸을 때 가족을 잃고 가난하여, 출가해서 도사(道士)가 되었다. 617년 이밀(李密)의 부하가 되었으며, 그와 함께 당나라에 항복했다. 621년 이건성(李建成)의 태자세마(太子洗馬)가 되어 이세민(李世民:나중에 太宗)을 죽이라고 간언했다. 그러나 이세민은 즉위 후 그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벌을 주지 않고 발탁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중용했다. 629년 비서감(祕書監)으로 조정에 들어가 비부도서(祕府圖書)를 교정하여 〈군서치요 群書治要〉의 편찬을 주도했다. 636년 양(梁)·진(陳)·북제(北齊)·북주(北周)·수(隋)의 5개 왕조에 대한 역사편찬을 주도한 공으로 광록대부(光綠大夫)에 임명되었고, 정국공(鄭國公)으로 봉해졌다. 태종은 항상 위징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원리에 대해 물었는데, 그는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 물은 배를 뜨게 해주지만 반대로 전복시킬 수도 있다"라는 비유로 대답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태종에게 수나라가 망한 것을 역사의 거울로 삼아 부역을 줄이고 세금을 가볍게 하며, 현명한 신하를 중용하고 간언을 받아들이도록 권했다. 위징의 간언은 준엄했으며, 때로는 태종을 정면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태종은 이에 대해 화를 내는 일도 간혹 있었으나 200여 차례에 걸친 그의 간언을 대부분 받아들였다. 위징의 간언은 태종이 훗날 동아시아의 모든 통치자들에게 모범이 된 '정관(貞觀:태종의 연호)의 치(治)'를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