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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가지 마음] + 소통 의 문제에서 승부심의 존재

GraU 2014. 10. 23. 10:25

 

http://club.cyworld.com/ClubV1/Home.cy/53086332 : 소원 - 이노주사, 나를 받으옵소서 - 알케미스트

 

 

 

 

 

 

조용한 침묵보단 시끄러운 소통이 낫다.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물길을 막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물결이 막혔다가 터지면 사람을 많이 해치게 되나니
백성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물길을 관리하는 자는
그것을 터서 잘 흘러가게 해야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 역시 그들로 하여금
소통하게 하여 말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國語 (김성곤 저, 리더의 옥편에서 재인용)

촌철활인 : 한치의 혀로 사람을 살린다!

 

 

 

 

화합을 내세워 좋지 않은 내용(bad news)에 대해
침묵을 강요하는 조직과 리더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화합을 위한 화합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더 나은 성과를 창출하기 위한 화합,
팀웍, 협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무덤 속의 침묵보단 시끄럽게 떠들면서
해답을 모색해가는 것이 더 나은 선택입니다

 

 

 

 

 

 

 

나의 단점을 이야기 하기 쉽지 않다. 페르소나로서 나를 내세우는 부분에 대한, 즉 장점으로서의 나의 상을 공고히 하는 것은 누구나가 부지불식간에 무의식적으로 항상 하고 있지만, 네거티브한 쪽, 그림자를 공유하거나 소통하기는 너무나도 어렵다. 



힘의 논리.

내 몸 세포에 녹아있는, 내가 살면서 받아들인 이 세상이 나에게 강요한 무언의 압력에 내가 마비되어 있는 탓이다. 이럴 경우, 또한 자신의 장점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많은 경우 남을 낮추는 경우가 생기고, 그 정도가 정해짐은, 나는 아닐꺼야 하는  이 '힘'에 대한 갈구가 어느 정도임을 스스로가 알아차릴 수 있게 해준다.



약해지면 먹힌다.

그렇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기게 되는 복잡한 공간적 구조 (중생상)을 일일이 따져들어가지 않더라도, 이는 많은 부분 서로서로 소위 '두려움'으로 허상을 만든 것이고, 그 것을 실제한다고 여겨서 사랑하는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무의식적으로 강요해 온 것이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도 당연하게도, 남을 이겨야 하는 것이다.





대문글 '성유심문' 에서처럼 남의 단점을 지적하고, 드러내 옮기기 쉬워 경계하라고 한 것처럼, 나의 본능적 판단하려는 욕구(분별심) 때문에 다른 이의 행동과 모습을 항상 스캔한다. 다만, 장점을 보고 그를 우선적으로 드러내는 쪽과 그 반대 단점을 나누려하는 쪽이 있으되.



만약 내가 살면서 커오면서 겪은 세상에서 받은 압력이, 밝은 쪽, 장점을 드러내는 위주의 서로 칭찬하는,  그리하여, 지금 내가 겪어 온 것과 반대의 경우 였다면 어떠했을까 상상해 본 적있다.   

굳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승부심에 대한 나 자신의 스키머 구도를 키워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인데,

 

만약 실제 그러한 과정을 겪어 왔다 하여도, + 극단에 경우에도 마찬가지 강요가 일어난다면 그리 다를 바 없는 현재가 되리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와 남이 다르다 구별하는 근본적 기준(장,단점)이 옳고 그름, 맞고 틀림 수준이 아니고, 좋고 싫음 수준 (즉각적 전오식의 발동, 근본식, 7식 자리에서 비롯된)이 더 근간이 된다라는 것. 다시말해,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자리에서 지칭하는 대상(옷차림 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상황자체를 주도하는 자리에 있는 자신, 즉 힘을 느끼고 구가하는 자기 모습, 승부심의 그 자리가 더.

 

꺼꾸로 남이 자신을 판단하게 되는 자리에서도 그 자리를 주도하게 되는 것이 너무도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러한 구도를 '상'으로서 가지고 있으며, 실재한다고 여긴다. 실재하고, 세상인 것이다. 세상이 원래 그러한 것으로 되는 것이다.

 

세상이 원래 그러했던 적은 없다. 당연이란 없다. 자연만 있을 뿐.

뭐래, 난 나 자신이 스스로 한다 하고, 내가 그리 여기는 것도, 내 스스로 그리하고 있다 라고 여기는 것일 뿐인데, 실제로는 많은 부분  스스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내 힘으로 스스로 그 곳으로 가야한다고 고집하는 것일수록, 세상이 만들어 놓은 포지티브한 상에, 소위 마비되어, 자신의 것인줄 알고, 스스로에게 강요하고,  또 남에게 강요하여 만드는 '자기도 모르고 짓게 되는' 업이다.  알건 말건 지은 죄에 오는 과보는 변지하천멸려차1로 떨어지리니.

 

 

 

 

기억하기론, 승부심이란 말은 금강경오가해 육조,본 의 거의 마지막 분(分, 후대에 금강경을 나눈 단위, 33분으로 이루어짐)에 나오는데

 

다섯가지 마음 전부가 그러하지만, 이 부분이 특히

나에게는, 아상, 인상에서 이어지는(동시다발적) 중생상과 수자상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 아상의, 인상의 그것과 많은 부분 다르며(얽힘의 정도, 마비의 정도, 알아차릴 수 있는 수준, 알음알이로 어느정도 이해가능한), 이것을 느끼는 순간 오히려 아상이란 말이 더 깊은 곳에 있어 붙잡기 어려워 지기 시작.

 

 

 

지금 이런 순간, 바로 윗글 '내 생각에 대한 설명' 을 적게 되는 이유.

금강경에서 그 경 자체의 공덕을 굳이 설명해야 하는 이유.

설명을 할 수는 있으되 그게 쉬운 길(설명을 통하여 보다 빠르게 이해하는)이 아니라, 설명을 들음으로서 오히려 자신 안에 자발적 앎의 시기가 더 늦어지는 이유.

 

 

 

거기가 희구심.

아지까지 아리까리.

 

차라리 알송달송

판떼기에 털이 나드냐 젠쟝.

 

 

 

 

 

 

  1. 지옥이나 그런데가 아닌, 자신이 스스로 겪게되는 지옥과 같은 고통. 자신의 상이 너무도 굳건하여 움직일 수 없을 수록, 네거티브한 부분, 즉 그림자는 더욱 커지게 되므로.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