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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 朱子의 心性論

GraU 2015. 2. 9.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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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子의 心性論

 

李 相 勳*

 


Ⅰ. 序 言
Ⅱ. 朱子心性論 理解의 前提
          -- 宋儒의 心性에 대한 體認

Ⅲ. 朱子心性論의 發端과 展開
        1. 發端 --中和舊說속의 心性義理
        2. 展開 --中和新說속의 心性義理
Ⅳ. 朱子心性論의 完成
       1. 心性情三分의 義理構造
             1) 性
             2) 心과 情
       2. 心統性情
Ⅴ. 結 論

 

 

 

Ⅰ. 序 言

儒家의 心性之學은 한마디로 學聖希賢에 그 宗旨를 두고 있다. 그러기에 儒學者들은 특히 道德實踐의 문제를 重視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이러한 道德實踐을 可能하게 하는 根據問題들에 대해서 不斷히 關心을 가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儒家는 道德의 根源인 仁心과 仁體의 感通無外를 통하여, 이 仁心과 仁體가 곧 다름아닌 天命이 流行하는 實體(道體)임을 洞察해냄으로서, 心性에 대한 論議를 形而上學의 問題와 相互關聯시켜 論하기도 하였다. 이런 緣由로, 宋代의 儒學者들은 대체로 客觀的인 側面의 天道의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다시금 主觀的 側面인 心性問題로 그 관심을 歸結시키는 傾向을 가졌었고, 終局에는 이 둘을 하나로 統合함으로서 先秦儒家의 聖學精神에 呼應하고자 하였다.
朱子 心性論의 本旨 또한 이러한 宋代 儒家들의 思想的 進路에 外形的으로 共感하면서 完成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性卽理'에 依據한 心性義理는 비록 獨創的인 側面이 있기는 하지만, 哲學史의 觀點에서 嚴格히 그 內面을 살펴보면 北宋의 周濂溪, 張載, 程明道의 心性義理 및 南宋의 胡五峯, 李延平의 心性思路와도 실로 다른 體系的 傾向을 나타내고 있으며, 오히려 程伊川 한 사람만의 觀點에 接近해 있는 듯 보인다. 예를 들어, 朱子가 말하는 性卽理에서의 性은 단지 理로서 直接的인 活動性이 排除되어 있다든지, 또 心, 情과 性을 三分하고 經驗的이고 外在的인 敬을 중시하는 것과 先涵養後察識 및 格物致知의 工夫를 重視하고 있는 것 등은 바로 이러한 根據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事實들로 미루어볼 때, 朱子가 儒家의 心性思想을 綜合, 大成시켰다는 平價는 妥當하지 않은 것 같으며, 오히려 그 자신은 伊川 한 사람만의 觀點을 不知不識간에 쫓아서 자신의 心性論 義理를 정립해낸 것이라 봄이 타당할 것 같다.
이러한 觀點에 着眼해서, 본 論文은 먼저 朱子의 心性論 義理의 前提로서 朱子以前 宋儒들의 心性에 대한 體認에 대해 알아보고, 나아가 心性論의 發端과 展開라고 할 수 있는 中和問題의 參究와 論定에 대해서 中和舊說과 中和新說속의 心性義理를 中心으로 살펴본 다음, 다시 心性論의 完成이라고 할 수 있는 心性情三分의 心性義理에 대해서 性, 心, 情의 意義 및 心統性情으로 나누어 分析해보고자 한다. 또한 本文 結論은 주자의 心性論의 大綱을 要約함으로서 그의 心性論이 含有하고 있는 眞正한 意味를 整理하고자 한다.


Ⅱ. 朱子心性論 理解의 前提
-宋儒의 心性에 대한 體認-

朱子 心性論의 形成過程을 살펴봄에 있어, 우리는 우선 哲學史적인 관점에서 '北宋의 周濂溪, 張橫渠 및 程明道의 心性에 대한 理解'와 '伊川의 義理轉向 및 心性義에 대한 異解' 그리고 '五峯 및 延平의 心性思想'에 대하여 簡略히 整理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곧 朱子心性論의 獨創性을 알 수 있는 前提가 되며, 또한 그의 心性思路에 대한 명확한 糾明을 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北宋儒의 心性義理는 周濂溪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精微해 졌다고 말해진다. 濂溪는 中庸의 '誠'과 易傳의 '乾元'으로서 天道(誠體) 및 이 道體의 流行變化의 과정을 설명하였는바,이 때 그가 말하는 天道誠體의 流行變化의 始終過程은 바로 "爲物不貳, 生物不測" 및 "大哉乾元, 萬物資始"로 설명된다. 즉 "爲物不貳"의 '不貳'는 곧 誠이며 天道를 가르키고, 이는 또한 "自誠明謂之性"의 道德創造의 眞幾를 뜻한다. 뿐만 아니라, "乾元"은 곧 '性의 根源'이며 '만물이 이로부터 비롯되는"것으로 不斷히 繼續되는 創造性 그 自體를 말한다. 이로서 周濂溪에 있어서 客觀的으로 말하는 乾元, 天道와 主觀的으로 이야기하는 性體는 모두 하나로서의 같은 의미를 띄게 된다.
그러나, 濂溪의 이러한 宇宙論的 體認은 비록 宇宙의 無窮한 神用을 말하고는 있으나, 道德心性에 대한 理解에 있어서는 性을 단지 剛柔善惡의 氣質之性으로 보았으며, 또 心을 思聖을 위한 心으로만 생각함으로서, 自覺的으로 이 性이 곧 天道가 內在化되어 人性이 된 것이며 또한 心은 곧 道德實踐의 根據가 되는 道德本心임을 충분히 說明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곧 濂溪에 思路에서는 心性이 곧 天道와 서로 相通하여 하나가 됨을 충분히 自覺하는데는 未盡함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濂溪의 이러한 心性觀에 대해 張載(橫渠)는 天道가 內在化된 것을 性이라 보고, 이 性은 또한 超越하여 天道에 通達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濂溪가 剛柔로서 性을 말하는 것과는 分明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橫渠에 있어서 이러한 性은 한편으로는 사람의 性이 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天地萬物의 性이 되기도 한다. 이는 곧 사람과 萬物의 性은 모두 天道(太和)에서 나온 것임을 뜻하며, 이 天道는 萬物에 貫運해서 萬物의 體(性)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張載에 있어 性은 곧 天道이며, 天道는 또한 性을 의미한다. 또 張載는 太虛(淸通之神)의 寂感으로 性體의 神用을 설명한다. 이것은 그가 말하는 性이 하나의 死體나 추상적 死理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能히 創生의 쓰임(用)이 되는 活理임을 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太虛의 寂感으로 말하는 性에서의 '感'은 곧 性體의 神用을 말하는 것이고, 性體는 바로 이러한 神用을 발하는 體가 되는 것이다. 이로서 體는 곧 神이요, 神은 곧 體로서 이러한 寂感眞幾가 바로 性이 되는 것이다.
張載가 性을 보는 또 하나의 特徵은 天地之性과 氣質之性으로 性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天地之性'이란『正蒙』誠明篇에서 말하는 "性이란 萬物의 根源이다(性者,萬物之一源)"에서의 道德과 宇宙를 創造하는 근원으로의 絶對普遍과 超越形上的인 性을 뜻하는 것이다. 반면에 '氣質之性'이란 氣質의 特殊性, 즉 사람의 氣質的 偏差로부터 이야기되는 性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道德實踐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러한 氣質之性은 늘 天地之性을 구속 제한하거나 은폐하는 경향을 가지게 된다. 이 결과 橫渠는 '變化氣質'과 '繼善成性'의 工夫를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橫渠가 보는 性이 이러함에 대해, 그는 心을 性體寂感의 神의 虛明照鑑으로 설명한다. 이로서 性의 내용은 전부 心에 內在하게 되고, 心 또한 전부 性속에 融攝되게 된다. 이는 곧 橫渠가 心과 性을 合一하여 보았음(心性合一)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국 이러한 心性의 合一은 바로 心性天의 合一, 즉 天道와 性命이 서로 貫通되어 하나가 됨(心性天合一) 뜻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서 볼 때, 橫渠는 客觀面의 天道와 主觀面의 心性을 잘 統合하여, 이를 圓滿하게 合一시키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程明道가 말하는 性은 道體의 全內容이 사람들 속에 內在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 그가 體認하고 있는 道體의 내용이란 곧 易이요 道, 神, 性이며 이러한 '於穆不已'의 易體와 '純亦不已'의 性體는 모두 하나의 活動的 實體로서 天命의 理(天理)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렇게 道體의 全內容이 우리들 속에 內在되어 있는 것은 곧 '天命之謂性'(天地之性)을 뜻하며, 사람들은 이렇게 內在的으로 具備된 性으로 말미암아 天의 모든 內容을 把握해 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明道는 '生之謂性'의 측면에서 性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러한 生之謂性은 본래 告子로부터 이야기되어진 것으로, 個體 生命의 自然質的인 側面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明道가 말하는 '生之謂性'의 本旨는 告子와는 좀 다른 側面을 띄고 있다. 즉 明道가 말하는 '生'은 곧 개체의 形成으로부터 말해지는 것으로, 個體가 각기 이루어질 때 生道와 生理가 個體속으로 具備되어 들어간 상태를 性이라고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性은 個體生命의 自然的인 資質로부터 말해지는 告子적인 性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於穆不已'의 天命이 직접 貫通해 내려가서 이루어진 性, 즉 道德創生(造)의 性이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性이란 個體의 이루어짐(成)에서 이야기되는 것이고, 이러한 個體의 이루어짐은 天命流行의 體가 가지는 妙運生生으로서 그러하다는 뜻이다.
한편, 心에 대해서 明道는 모든 德의 根源으로서의 心을 이야기한다. 이는 곧 明道가 仁의 進路를 따라서 心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明道는 특히 孟子의 惻隱의 마음과 仁義가 本心에 내재되어 있다는 道德本心으로서, 先天的이면서도 內在的인 道德仁心을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痲木不仁'의 예를 들어서, 仁心의 感通과 創生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으며, 또 이때의 心은 곧 理이며 바로 道體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이로서, 心은 理 및 道體와 더불어 形而上層에 속하게 되어 絶對的인 의미도 아울러 가지게 되고, 또한 天地萬物과의 一體를 論 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보면, 明道가 이해했던 心性의 문제는 卽心卽性卽天(心性天은 곧 하나)의 의미를 가지는 道德의 創造와 宇宙의 生化를 동시에 말하고자 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內容을 綜合해보면, 北宋의 濂溪, 橫渠, 明道는 中庸, 易傳의 宇宙論的 問題(天, 天道 等)에서 漸進的으로 되돌아와 論孟의 仁과 心性의 문제를 논함으로서 終局에는 이들을 同等한 層次로 合一시키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北宋의 濂溪, 橫渠, 明道가 普遍的으로 理解하고 體認하였던 心性義理는 程伊川에 이르러서 前儒들과는 좀 다른 傾向을 보이기 시작한다. 즉, 본래 濂溪가 말하고자 했던 誠體와 心體 및 橫渠가 이야기했던 太虛神體 및 心性의 理解, 그리고 明道가 天命實體의 理로서 論하는 道體性體는 모두 단지 存在하는 것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道德을 창조하고 宇宙生化의 원리를 설명할 수 있는 創造의 實體(道,理)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動態的인 理가 伊川에 이르러서는 하나의 靜態的인 存在의 理로만 固定되어 버리고 만다. 그는 道體와 性體를 簡化시켜 性理라 규정짓고, 誠體와 神體등에 대해서도 언급치 아니 함으로서 前儒들이 普遍的으로 重視했던 道體, 性體의 寂感義를 喪失시켜버리는 결과를 招來하였으며, 또 이로서 道德과 生化의 實體를 단지 靜態的인 "只是理"로만 限定짓고 만 것이다.
이 결과, 伊川의 思路에 있어서는 性의 중점도 '性卽理'이라는 前提下에서 說明되며, 이 때 그가 말하는 性도 역시 '단지 理일 뿐(性只是理)'인 性을 의미하게 되었다. 즉, 伊川은 陰陽氣化의 '然'으로 推證해 나아가 '所以然'의 理를 설명하였고, 또 이러한 理(道)의 感과 未感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理는 '단지 理(只是理)일 뿐'이며, 또 性은 바로 이러한 理가 각각의 個體속에서 이야기된 것이라고 보았다. 이 결과, 伊川이 말하는 性 또한 단지 靜態的으로 存在만 할 뿐이지, 직접 道德과 宇宙의 創造와 生化를 이끌어내는 動態的적인 性格을 갖지는 못하게 되었다. 이 점을 伊川은 "性으로부터 形(형태)이 있게 되는 것을 일러 心이라 하며, 性으로부터 動(움직임)이 있게 되는 것을 일러 情이라 한다"라는 句節에서 더욱 명백히 말하고 있다. 즉, 伊川에 의하면, 性은 단지 理일 뿐이고 본래 形態(形)도 없으며, 움직임(動)도 없다. 그러나 性의 有形은 心의 覺識活動을 통해서 現實의 具體的인 理를 드러내게 될 때 有形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情은 性에 의해 움직여서 性에 統制, 拘束되는 바가 된다. 이는 곧 性 그 자체에 진정으로 形과 움직임(動)이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性은 단지 心의 覺識, 認知로 인하여 그러할 뿐이며, 아울러 이러한 覺識과 認知가 있는 곳이야말로 眞正으로 性의 形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句節속의 實際意味는 '心에 진정한 形態가 있는 것이고, 性 自體에는 形態가 있을 수 없다'는 뜻으로, 心이 性을 覺識하고 또한 心이 性에 관련되어, 마침내 心의 有形으로서 性의 有形을 드러낸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고, 이러한 이치는 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움직이는 것은 진정 性이 아니라 情인 것이다. 다만, 이 情의 움직임은 性을 그 準則을 삼기 때문에, 性의 움직임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본다면, 伊川이 理解하고 있는 性(理,道)은 靜態的인 準則으로서의 意味만 가지는 것이며, 直接 스스로 道德의 創造와 宇宙의 生化를 이루어내지는 못한다는 것이 明白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觀點들을 보다 具體的으로 보여주는 또 다른 實例는, 伊川에 있어서 性과 情사이에는 形而上과 形而下라는 서로 異質的인 層次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즉 "仁은 性이며, 愛는 情이다"라는 관점에서, 사랑(愛)은 情으로서 形而下에 속하는 것이며, 또 그렇게 사랑(愛)하게 되는 理가 곧 性이며 形而上者라는 것이다. 이 결과, 心이 發動한 四端은 모두 仁性이 主宰하는 具體的인 情變의 한 단면이 될 뿐이어서 仁心, 仁體가 지니고 있는 본래의 超越的 意味는 喪失되어 버렸다.
또한 이렇게 仁心에 이미 초월적인 의미가 상실되고 단지 情變의 한 단면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은, 伊川이 생각했던 心도 필시 孟子가 중시했던 本心的 요소를 排除시켜 버리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伊川은 "心이란 穀種과 같은 것"이라고 理解한 바 있으며, 이 때 그가 규정짓고 있는 心은 결코 性이나 理가 아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한 心은 '그러한 生이 있게 하는 理를 갗춘', 또한 '實質的으로 情을 發動하는' 心일 뿐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心은 단지 '氣之靈'일 뿐이므로 반드시 이를 道(理)에 合致되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함으로서 有限한 心氣의 心이 하나의 無限한 意義를 얻게되어 비로소 "心卽'道(理)' "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伊川의 思路속에서 心은 본래 道(理)와 性과 같은 層次가 아니며, 오히려 '心과 性이 둘로 나누어져 있고(心性爲二)', '心과 理도 둘로 나누어져 있는(心理爲二)' 그러한 心氣의 心일 뿐이다. 이 결과 心은 자연히 그 形과 氣 그리고 妙用이 모두 有限한 形而下者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伊川이 이해하였던 '性'은 비록 '天命之性'을 뜻하고 道德創造와 宇宙生化의 準則으로 存在하는 것이기는 하나, 이 性은 단지 理일 뿐이므로 스스로 動態的인 측면을 가지지는 못하며, 그러기에 반드시 心氣의 覺識활동을 통해야만 비로소 현실상의 구체적인 理를 드러내게 된다. 또한 心은 실제로 그러한 心氣의 心으로 이 心이 發한 四端 역시 구체적인 情變의 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仁心이나 道德本心의 의미를 가지지는 못한다. 이 결과 心과 性은 相對的으로 서로 다른 層次에 속하게 되고(心性爲二) 工夫의 형태도 자연히 "居敬"과 "格物窮理"로 귀결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러한 점들은 모두 伊川 자신도 自覺치 못한 와중에 그 心性義理에 轉向이 이루어진 것으로, 北宋의 前儒들과는 명백한 差異를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와 같은 北宋諸儒들의 心性思路는 南宋에 이르러서 胡五峯(胡宏)과 李延平(李 )의 心性義理에 影響을 미치게 된다. 먼저 五峯은 北宋諸儒들의 天道性命相貫通의 관점을 잘 順承, 消化시켜 於穆不已의 道德實體로서의 道體의 槪念을 이야기하고, 여기에서 한 段階 더 나아가 '心으로서 性을 드러낸다(以心著性)'는 心性義理를 피력하고 있다. 즉, 五峯은 超越無限과 生生不已라는 槪念으로 道體를 說明하고, 아울러 이러한 道體는 於穆不已의 道德을 창출해내는 實體로서 비록 超越的이고 無形狀이기는 하지만 氣化의 生生不息을 이끌어낸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道體는 곧 道德法則이므로 이로 인한 生化와 變動이 비록 萬變萬動일지라도 道體 自體가 가지고 있는 創生의 眞幾는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五峯은 心性의 對揚關係를 통해 心으로서 性을 드러낸다는 '以心著性'의 心性義理를 論하고 있다. 이때 그가 말하는 心이란 능히 萬物을 主宰하고 創生하며, 또 萬物이 그렇게 存在할 수 있도록 하는 性體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반면에, 天地萬物이 存在하게 되는 根據이기도한 性은 한편으로는 超越, 普遍的인 所以然으로 萬物存在의 主가 되는 것이지만, 그 自身은 潛隱自存하며 無形狀이다. 이런 까닭에 性은 반드시 心의 形著를 통해야만 비로소 具體化되고 客觀化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곧 五峯의 思路에 있어서 以心著性과 盡心成性을 통한 性體(道體)의 內在化로 인하여 心의 主觀的 意義가 드러나게 되면, 心도 동시에 性의 客觀的이고 超越的인 意義를 顯示하게 된다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결과, 心과 性의 對揚關係는 결국 心性의 合一이라는 측면으로 발전하게 되고, 心性工夫의 역점도 자연히 警覺(逆覺)을 통한 體證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한편, 二程의 河洛之學이 南宋으로 전해져 心性에 대해 또 다른 特出한 見解를 보인 사람은 李延平이다. 그는 默坐澄心의 방법을 통해서 人欲의 桎梏으로부터 벗어나 곧 바로 天命性體(中,性,天理)를 體證하고자 하였고, 이 體證은 곧 靜중에서 天命性體가 스스로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延平은 이러한 超越的인 體證을 꾸준히 지속해 나감으로서 자연스럽게 '性體와 天理(中)'를 명확히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靜的인 방법을 통해 이루어진 體證은 곧 現實生活과는 격리된 超越的, 抽象的 道體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延平은 여기에다 반드시 구체적인 現實生活의 灌注를 통해서 抽象的인 道體를 具體化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즉, 延平의 생각에 의하면, 道體가 진정 道體로서 존재하는 까닭은 우리의 喜怒哀樂이 發動하여 中節되는 곳에 있는 것이고, 또한 天命의 性體(中體)란 具體的인 것이지 抽象的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超越的 體證을 통해서 드러난 抽象的 中體는 반드시 구체적인 現實生活속에서 發用되어 나옴으로서 有體有用의 관계를 가지게 되고, 또 이로서 道德實踐의 根據를 提供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延平은 또 中體大本(天理,性體)이 반드시 우리들의 生命속에서 體現되어 나오는 것이며 外在的인 知識이나 문장의 解讀을 통해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는 곧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性體가 現實生活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남으로서 진정한 道德行爲가 成就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南宋의 胡五峯과 李延平의 心性에 대한 體得은 대체로 北宋諸儒들이 普遍的으로 가졌던 天道와 性命의 相互貫通이라는 側面을 잘 順承, 維持하면서도 특히 道德實踐的 측면에서 內在와 超越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天心仁體 및 天命流行之體를 파악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고, 이는 또한 先儒들의 心性本意를 올바르게 體認하려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Ⅲ. 朱子心性論의 發端과 展開
1. 發端 -- 中和舊說속의 心性義理

二程의 河洛學은 楊龜山에 이르러서 이른바「道南心訣」이라는 中和問題의 탐구가 思想의 重心으로 자리잡게 되고, 이는 또 持續的으로 그의 門下弟子들인 羅豫章, 李延平, 그리고 朱子로 相傳되어 가면서 그들의 중대한 課題로 대두되게 되었다. 龜山의 이른바 '喜怒哀樂이 發하지 않았을 때, 心體로서 이를 보면, 中의 뜻이 드러난다'는 '驗中(體驗未發)'의 心訣은『中庸』에 그 근거를 두고 이야기된 것으로, 이 때 그가 體驗하고자 했던 中은 바로 情의 未發時에 體驗한 天下의 大本, 人性의 大本으로서 곧 性體요 道體를 뜻하는 것이며, 바로 '靜復以見體'를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宗旨는 龜山의 뒤를 이은 羅豫章과, 李延平도 '默坐澄心'을 통한 '中'과 '天理의 體認'을 이야기함으로서 더욱 중요한 治學的 과제가 되었다. 특히 延平은 龜山과 豫章의 學脈을 承續하여 喜怒哀樂의 大本氣象을 '中의 體' 라 하고, 또 이렇게 파악한 大本은 一切의 理를 貫通한다고 함으로서 伊川의 格物窮理說과는 다른 觀點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中庸의 '致中和'의 내용에 順承하여 나온 道南學派의 '驗中心訣'에는 '義理상 어떻게 未發의「中」인 天下의 大本을 드러낼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명백히 설명되지 않고 있었으므로, 延平에게서 '默坐澄心을 통한 天理의 體認'을 사사받은 朱子는 始終 이 '中'이 가르키는 意味를 완전히 把握해 내지 못하고 있었으며, 또한 伊川과 龜山이 말하는 '中和'상의 觀點이 서로 다른 것에 대해서도 疑問을 가지고 있었다. 즉, 龜山學脈에서의 '未發의 氣象을 體驗한다'는 것은 '未發'에 注重을 두고 있고, 伊川은 이른바 "잘 본다는 것은 도리어 已發의 시기에 그것을 보는 것(善觀者却於已發之際觀之)"이라고 하여 '已發'에 중점을 두고 있었으므로 兩者사이의 觀點은 서로 一致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한 여기에다 湖湘學脈에서의 중점은 察識의 先行을 말하고 있는 반면에, 伊川은 未發前의 存養을 우선적으로 重視하는 것도 서로 견해가 다른 것으로 朱子에게는 困惑스러운 점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種種의 의혹들에 대해 朱子는 延平의 生前과 死後에 지속적으로 그 해답을 찿아내고자 노력하였으나 당시에는 이것에 대한 진정한 意味를 찿아내지 못하였다.
사실상,『中庸』에서 말하는 '致中和'는 '天命之謂性'으로부터 이야기되는 것으로, 性體로부터 말하는 愼獨의 내용을 보다 具體的으로 표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天下의 大本인 '中'이 무엇을 가르키는 것인가'라 할 때, 이 '中'은 곧 天命과 相通할 수 있는 그러한 性體를 뜻하며, 이는 곧 明道와 濂溪가 언급한 바 있는 誠體, 誠體와 같은 宇宙生化와 道德創生의 實體를 가르키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러한 中體로서 우리들의 情을 主宰하고 調節해 나감으로서, 情이 發動했을 때 이를 모두 節度에 들어맞게 되는 것이 곧 '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致中和'란 바로 中體가 呈現되면 아울러 和用도 자연히 暢達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곧『中庸』에서의 이른바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잘 생육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시 朱子 自身은 道南 및 湖湘의 學者들이 論孟의 仁, 本心을 근거로 이를 다시 中庸과 會通시킨 가운데 中和를 말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였고, 여기에 또 '中'이 '天命之謂性'의 性體를 가르킴을 전혀 自覺치 못한채 지속적으로 中和에 대한 苦思와 參究를 시도하다가 마침내 張南軒과의 往復討論을 통하여『中和舊說』이라는 자신의 첫번째 見解를 이끌어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丙戌之悟로 이야기되는 朱子의 中和舊說은 五峯의 門人인 張南軒( )과의 사이에 中和問題를 토론하면서 오갔던 네 편의 朱子 書信속의 내용을 가르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舊說 속의 義理가 어떻게 전개되고 그 發展過程이 어떠했는가를 간략히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舊說 第一書의 내용속에서, 朱子는 '未發의 中과 寂然不動함이 있다'라는 내용과 '잠시라도 그침이 없어서 시시각각으로 끊임없이 변해나간다'라는 句節을 對比시키면서, 사람이 生을 가진 후에 생겨난 知識이란 實然의 心氣이며, 이는 끊임없이 변해나가는 것으로 已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日用의 流行이 잠시동안 멈추어 事物과 접촉치 않더라도 이때는 단지 暗鬱한 無覺의 상태이므로 事物에 接應할 수 없게되어, 결국 이것도 진정한 未發로 규정지울 수는 없다.
문제는, 朱子가 이해한 聖賢의 말속에는 분명 寂然不動한 未發의 中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朱子는 이에 다시 感通과 觸覺을 통해서 未發을 설명하게 된다. 즉, 感으로 인한 通과 觸으로부터의 覺은 비록 日用의 流行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日用流行에는 반드시 이렇게 感에서 通에, 또 觸에서 覺에 이르도록 하는 根本이 있으며, 이러한 根本은 곧 구별없이 전체가 應事接物되도록 하는 하나의 無窮한 寂然의 本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本體로 인하여 日用의 流行은 단지 日用流行에만 머무르지 않고 바로 天命의 流行이 된다는 것이다. 또 이 天命의 流行은 感으로 인한 通과 觸으로 인한 覺이 끊임없이 應物하면서 보여주는 生生不已의 機이기도 하며, 이것이 곧 未發이라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朱子가 이해한 未發은 곧 實然으로서 그 所以然을 推證해 나가는 방법으로 導出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이렇게 天命의 流行이며 生生不已의 機인 未發로부터 이야기되는 未發의 中(天理本眞)은 특정의 때와 장소에 限定되거나 拘碍받지 않을 뿐더러, 已發과는 확연히 다른 한 物로도 구분되지도 않는, 끊임없이 感하면 通하고, 觸하면 覺하는 그런 寂然의 本體이기도 하다. 이로서 朱子의 이른바 '中'은 中體라 할 수 있고, 또 이 中體는 生生不已의 機이며 天命流行의 體가 된다. 다만, 주자가 이렇게 中體를 규정한데에는 形而上學적인 것에 興趣가 있어서가 아니고, 中和參究時에 가졌던 實踐的 要求가 있었기에 그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주자가 말하는 未發의 中體인 天理本眞은 때와 장소에 限定, 拘碍받지 않고 어느 곳이든지 隨時로 發現되어 나오므로, 物慾의 사사로움으로 인해 막히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 이러한 未發의 中은 實然으로부터 推證되어 나온 것이므로, 未發과 已發의 體用關係로 말미암아 '양심의 싹(萌蘖)도 또한 事로 인하여 發現될 수 있음'을 保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이러한 體用의 관계는 양심의 싹을 잘 致察하고 持存함으로서 大本達道 전체를 貫通하게 할 수도 있다 는 것이다.
이상의 舊說 第一書속에서의 朱子의 思理는 먼저 사람이 生을 가진 이래 知識과 念覺의 生生으로서 寂然不動의 天命流行本體를 推證해냄으로서 體用의 關係를 성립시키고, 또 이로부터 事로서 良心의 싹(萌蘖)을 致察함으로서 大本達道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朱子의 이러한 생각에 問題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朱子가 어떻게 寂然不動의 本體가 良心의 操存으로 到達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가' 하는 것으로 '實然의 心氣인 感, 通, 觸, 覺과 良心의 發現은 同質的이냐 혹은 異質的인가' 하는점이 문제가 되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만약 寂然의 本體가 未發이고 感, 通, 觸, 覺등이 모두 已發에 속하게 된다면, 良心이 어떻게 能히 未發의 本體와 貫通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舊說의 나머지 書信을 살펴 볼 필요가 있게 된다.
朱子는 張南軒에게 보낸 第二書에서 體用의 관계를 整體的으로 말하는 '天下를 貫通하는 天機活物'로서의 寂然한 本體, 天理本眞을 이야기한다. 이 때 朱子가 생각하고 있는 이 本體는 靜態的인 實體가 아니라, 능히 生生不已, 流行發用을 이끌어내는 動態的인 活體를 뜻한다. 또 주자는 "已發에 根據해서 未發을 말하게 된다면, 已發은 人心이며, 未發은 모두 性"이라고 말한다. 이는 곧 體用의 整體인 天機活物에는 已發도 있고 未發도 있다는 것으로, 朱子가 然으로서 그 所以然을 推證해 나가는 思路를 잘 보여주는 한 實例라 할 수 있다. 또한 "已發은 人心이며, 未發은 모두 性이다"에서는 性이 곧 寂然不動의 本體라고 명확히 규정짓고 있는 것이며, 아울러 그가 心과 性의 관계를 곧 已發과 未發, 體와 用, 然과 所以然의 관계로 이해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또한 舊說 第一書에서의 내용과 서로 矛盾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朱子가 이 書信에서 體用의 관계로부터 導出되는 良心의 發現을 잘 存養함으로서 大本達道에 通達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여전히 第一書에서와 같은 見解를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朱子는 앞의 第一書와 二書에서 '未發의 中인 天理本眞은 특정의 때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또한 已發과 다른 物로서도 있는 것도 아니다'는 未發已發의 體用關係를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第三書에서는 이러한 관점에 입각해서, 已發과 未發은 확연히 둘로 나누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一念사이에 이미 이러한 體用이 갖추어져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더 나아가 이러한 已發과 未發의 관계란 "發한 것이 가게 됨과 동시에, 發하지 않은 것은 곧 오게되어, 그 사이에는 끊어지고 단절됨이 없음이 분명하다"라고 하였고, 동시에 "이것이 어찌 잠시라도 정지할 때가 있겠는가? 단지 오는 것이 무궁한 것은 항상 未發에서 그럴 뿐이다"라 함으로서, 已發未發인 用과 體, 然과 所以然이 확연히 둘로 나누어진 관계에 있지 않음을 분명히 하고자 하였다. 다시 말하면, 朱子가 舊說의 一書와 二書에서 말한 已發未發은 일관되게 已發과 未發이 兩物이냐 아니냐, 또 이 둘이 나누어져 있느냐, 나누어져 있지 아니 하냐 하는 점에 중점을 두고, 萬起萬滅로서 하나의 寂然不動한 未發의 中을 설명하려한 形式的인 측면에 注重하였다면, 이제 이곳 第三書에서는 보다 具體的이고 內容的인 측면에서 已發未發의 관계를 설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곳 第三書에서와 같이 만약 未發의 아래에서는 늘 오는 것이 無窮하고, 已發과 未發은 또 서로 오고 가는(方往方來)것으로 규정되고 있다면, 朱子가 말하는 方往의 已發은 곧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心氣의 流行이므로, 方來의 未發 또한 반드시 氣化의 流行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보면, 朱子에 있어 所以然인 寂然本體는 단지 이러한 流行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庫藏이 될 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朱子는 이미 第二書에서 未發의 中은 모두 性이라고 規定한 바 있으므로, 이에 心과 性은 하나의 同質的인 것이 된다. 이 결과, 이른바 性體, 中體는 超越的인 意味를 상실하게 되며, 단지 實然的인 氣化의 無窮無盡한 寶庫로서만 그 宇宙論的 生生不已를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未發이 오는 것의 無窮한 것에 의해 규정되고, 已發未發이 또 오고가는 것으로서 이야기된다면, 朱子가 생각하고 있는 바의 '體用이 하나로서 서로 나눌 수 없는 관계'는 한낱 氣化流行의 源源不絶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朱子는 實踐上의 문제에 있어서는 먼저 이러한 體用關係를 인정하고, 이에 依據해서 良心의 萌蘖(싹,幾微)과 致察操存이 大本達道에 도달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中體가 단지 이러한 氣化의 끊임없는 庫藏이라면, 致察操存을 통해 도달되는 大本도 氣化의 끊임없는 庫藏이 될 뿐인 것이다. 이는 곧 朱子가 中體, 性體의 超越的 意味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며, 또한 宋諸儒들이 體認했던 心體, 誠體, 神體의 超越的 意義도 아울러 이해하지 못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人心, 仁體와 天命流行의 體, 性體와의 관계는, 마치 朱子가 말한 것처럼 氣化의 迹위에서 用을 말하는 것과 , 이 氣化의 迹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러한 體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朱子가 第三書속에서 論하고 있는 이러한 理路는 朱子와 宋諸儒사이에 나타나는 義理規模속의 여러 問題點들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內在的으로는 사실상 많은 問題를 안고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舊說의 第四書에는 이러한 점들에 대해서 朱子가 나름대로 察覺을 한 痕迹이 엿보이며, 이는 곧 實踐工夫의 문제에 관해 自覺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는 南軒에게 보낸 글에서 이르기를, "무릇 目前에 보고 여러 서신에서 밝힌 것들은, 어렴풋이 大本達道의 그림자를 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을 옳다고 생각하였으나, 도리어 致中和 한 구절은 전혀 이해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번 가르침을 받으면서 仁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하셨으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별 다른 工夫處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단지 근원을 잃어버리고, 어딘가 깊은 수렁에 빠져든 듯한 기상쯤은 얻기는 하였으나, 근간에는 다만 크게 변화하여 치닫는 바가 마치 크나큰 물결이 이는 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어디라도 잠시 머무를 곳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대체로 느꼈던 것이 늘 이와 같아서 사물에 접응해서 앞으로 나아가려 힘써 노력해보았지만, 그 관대하고도 부드러운 기운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朱子는 致中和가 實踐의 問題로서 喜怒哀樂의 未發로부터 드러나는 超越的인 性體(中體)의 體得으로 日常에서 이를 실천함으로서 中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 이러한 性體가 發하여 能히 節度에 맞게되는 것은 이 性體가 곧 道德實踐을 可能되게 하는 超越的인 根據요, 天命의 於穆不已한 流行之體임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性體, 中體는 곧 體상에서 말한 것이므로 반드시 用을 통해서만 바야흐로 體를 볼 수가 있다. 朱子에 의하면, 이 때 用은 日用流行의 機위의 良心萌蘖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있는 것이다. 즉 일반적으로 性은 客觀的으로 이야기된 것이고, 心은 主觀的으로 말해진 것으로 바로 性體(中體)의 發用과 呈現이 있는 곳에서 이야기된 것이다. 그러므로 心과 性 兩者는 하나가 된다. 다만 이렇게 區分짓는 것은, 心과 性의 서로 다른 면모로 인한 분별로서 이렇게 이야기된 것일 뿐이다. 이로서 心에는 超越的인 의미가 있게되고, 性과 中에는 內在의 뜻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때 이러한 心은 實然의 心氣는 아니며, 도리어 진정한 道德實踐을 끌어낼 수 있는 良心(本心)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性體, 中體의 體得(體認)으로 發動하여 節度에 맞게된다는 것은, 곧 性體, 中體의 內容意義 때문에 그러한 것이며, 또한 道德實踐의 動力으로서 그렇게 規定되는 것이다. 그러나, 朱子의 思路(思理)는 이와같지 않다. 그러므로, 朱子 自身은 힘써 中體를 구할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中體는 發動해서 節度에 맞게되는 것에는 오히려 문제가 생기게 된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未發의 中은 단지 心氣의 流行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庫藏일 뿐이기 때문에, 性體(中體), 心體에는 超越的 의미가 缺乏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緣由로, 朱子가 말하고 있는 天機活物의 生生은 단지 實然의 生生不已로만 이야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朱子는 性을 未發의 中, 寂然의 本體라고 하여, 心으로 하여금 感通觸覺을 不斷하게 呈現해내도록 하는 動力을 갖추고 있기는 하였지만, 이 때 呈現된 心은 단지 實然의 心氣로서 日用流行의 感通觸角일 뿐 道德本心은 아닌 것이다. 아울러 朱子는 日用流行의 感通觸覺을 의미하는 已發과 喜怒哀樂의 已發과도 區別치 않음으로서 마침내 "다만 내달려서 크게 변화하는 바가 마치 크나큰 파도가 일어나는 가운데 있는 것처럼, 어디라도 잠시 머무를 곳이 없는 듯 느껴집니다"라는 말을 하기에 이르렀으며, 이 결과 日常工夫를 實踐해야 하는 곳에서도 자연히 "대체로 느꼈던 것이 늘 이와 같아서, 사물에 접해서 앞으로 나아가려 노력해보았지만, 그 관대하고도 부드러운 기운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습니다"라는 단지 自然生命의 絪蘊, 氣魄을 鼓蕩하는 이야기만을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實踐上의 문제는 朱子로 하여금 다시 良心萌蘖의 意義와 天地之心의 意義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었으며, 이러한 反省을 통해 朱子는 점차적으로 앞의 세 書信에서 堅持했던 體用關係의 建立으로 良心萌蘖을 保證하고, 또 이로서 大本達道에 到達한다는 思路을 버리게 되는 것이다. 바꿔말하면, 朱子가 良心萌蘖로서 大本達道에 도달할 수 있다는 觀點(心으로서 性을 말하고, 中을 말하는 관점)을 가졌던 第三書에서는 方往方來의 體用關係를 이용하여 이를 理論的으로 뒷받침하였으나, 이러한 '오고 감(方往方來)'은 마치 이미 '깊은 바다에 빠져드는 듯한 기상(傾湫倒海 氣象)'일 뿐이며, "크나큰 파도가 이는 듯한 가운데 있는 것(在洪水巨浪之中)"과 같아서 손과 발이 혼란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들은 마침내 朱子로 하여금 "크나큰 변화속에서의 安居(浩浩大化之中有一個安宅)"인 良心大本이 편안히 居할 곳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만든 것이다. 그러기에 朱子는 "天地는 物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서 心을 삼는다"고 하였고, 또 "비록 氣에는 闔闢(열리고 닫힘)이 있고, 물에는 비록 盈과 虛가 있으나, 天地가 物을 만들어 내는 心은 영구히 존재하여 조금이라도 간격이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로서, 혼연히 應物하는 무궁한 寂然의 本體(未發之性)는 이미 物을 生하는 心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 때 天地의 心은 一陽으로 所以然을 회복시키는 것이며, 또 一陽이 움직이게 되는 所以이기도 하다. 이로서 舊說의 앞 세 書信에서의 然으로서 所以然을 推證해 나갔던 것은, 여기에 이르러서는 天地之心으로 이야기되고, 또한 渾然히 應物하며 無窮한 寂然의 本體(未發之中)도 心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어, 마치 心이 곧 性인 듯한 경향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朱子가 實踐問題에서의 困境을 벗어나기 위해 '安宅'을 말하게 되고, 이에 대한 實踐상의 工夫를 論하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天地生物과 然에 대한 所以然을 說明하고는 있으나, 문제는 바로 然으로서 所以然을 推證하는것과 良心萌蘖로 發見된 安宅으로서 天地之心을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히 別個의 思考構造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직접적으로는 天地之心이 氣之復의 所以然이나, 이는 마치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朱子의 舊說속에는 이렇게 思理상 많은 문제를 內包하고 있었으므로, 朱子는 이 문제에 대해 다시금 깊히 思索함으로서 모든 槪念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 후 몇 번의 議論을 거친 뒤 完成된 이른바 '中和新說'은 바로 이러한 朱子 自身의 糾結을 해결코자한 關鍵的인 試圖였다고 할 수 있다.

2. 展開 -- 中和新說속의 心性義理
乾道 5년 봄, 朱子는 門人 蔡季通(元定)과 未發의 뜻에 대해 討論하다가 문득 자신이 지난 날에(舊說) 가졌던 견해에 대해 강한 疑問을 가지게 되고, 이로서 伊川의 생각을 따라 中和問題에 대한 새로운 觀點을 도출해 내게되었는 바, 훗날 '己丑之悟' 혹은 '中和新說'이라고 命名된 '已發未發說'과 '與湖南諸公論中和第一書' 및 '答張欽夫書'가 바로 이것이다.
『朱文公(朱子)文集』 卷 67에 記載되어 있는 '已發未發說'은 '與湖南諸公論中和第一書'(卷 64)와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字句와 文意또한 거의 같다. 여기에서 朱子는 먼저 세 가지 論點을 이야기한다. 즉, 앞서 舊說에서 이야기했던 心性의 意義는 不當하지 아니하며, 단지 已發未發로서 心性을 말한 것에만 조금의 문제가 있을 뿐이고, 또한 舊說에서는 本領의 一段工夫에 대해서 欠缺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朱子는 이 세 가지 論點이 곧 心으로 인해 惹起되고 있다고 보고, 여기에 대해서 伊川이 論한 '中', '性', '和' 三者의 관계를 통해 이를 설명하려고 하였다. 즉, 주자는 이 三者의 規定을 통하여 寂然不動의 心體流行을 설명해내려고 하였으며, 또 이렇게 心의 提煉을 통한 中, 性, 發而中節之和에 대한 설명은 모두 實踐工夫의 문제와 關聯되어 展開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는 마치 舊說의 第四書속에서의 實踐問題에 대한 關懷와 '浩浩大化' 중의 主宰, 知覺에 注重했던 것으로부터 發展해 나온 것처럼 보인다. 다만, 舊說은 天命流行의 體와 氣化의 迹의 體用關係로서 實踐問題를 論했으므로 糾葛되는 곳이 심히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곳 已發未發說에서는 伊川의 관점을 통해서 새로운 綱領을 이야기하고 있는바, 이는 곧 提煉된 心을 통하여 性을 論하고, 發을 論하고, 中節의 和를 論하고 있으므로, 그 규모나 형식으로 볼 때 舊說 第四書와는 다른 理路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朱子가 이곳 '已發未發說'에 引用하고 있는 伊川의 여러 견해들은, 사실 엄격히 볼 때 直接的으로 心을 論한 것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朱子는 이것을 도리어 心에 關聯시켜 자신의 문제를 해결코자 하였으므로, 이는 곧 그가 心에 대해서 상당한 糾結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아래의 여러 文句의 詮釋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즉, 朱子는 "思慮가 싹트지 않았을 때와 事物이 아직 이르러지 아니하였을 때를, 喜怒哀樂의 未發이라 한다"라고 함으로서 未發과 已發을 곧 喜怒哀樂의 發과 不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는 직접적으로 心과 性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喜怒哀樂이 未發일 때가 "바로 心體가 流行하고, 寂然不動한 곳"이라고 말함으로서, 喜怒哀樂의 發과 心體의 流行을 확연히 다른 것으로 區別시켜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다만 喜怒哀樂이 未發일 때의 心體의 流行이란 寂然不動한 것으로, 事物이 이르러지 아니했을 때(未至)의 드러나는 것일 뿐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곧 情에 變動이 생겨나지 않고 人事에 있어 어지러움(不擾)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의 實然的인 隔離의 情이며 心氣의 實然的인 것으로, 事物에 의해 혼란을 겪지 않는 寂然不動을 말한다. 또 心이 이미 이렇게 實然的이므로 이러한 心은 超越的인 本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때의 心은 이미 感性의 情變도 아니고, 또 超越的인 本心도 아닌 認知心인 것이 분명해진다. 이러한 思理를 만약 舊說과 對照시켜 본다면, 이곳 已發未發說에서 朱子는 장차 實然의 心氣속에 하나로 묶어져 있는 認知心과 喜怒哀樂의 情을 區分해 내었다고 할 수 있으며, 또 이렇게 함으로서 實踐工夫에 있어서 사람들이 傾湫到海의 氣象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뿐아니라, 아울러 사람들의 몸속에는 이를 主宰하는 바가 있게 되어 결국 洪水急流의 感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의 사실들은 단지 思慮가 싹트지 아니했을 때와 事物이 이르러지 아니하였을 때에만 그러하다. 왜냐하면 이 思慮未萌, 事物未至의 時期의 心體는 寂然不動의 상태이기 때문에 어떠한 人事에도 참여할 수가 없으므로, 이러한 心體는 道德의 問題와 서로 相干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朱子가 心氣의 心과 喜怒哀樂의 情을 구별하여 一時的으로는 氣魄의 鼓蕩과 情變의 干擾를 면할 수 있을지언정 窮極的인 問題를 해결하는데는 별로 소용이 없게 되며, 또 思慮가 이미 발동하고(已萌), 事物이 서로 交至하더라도 여전히 操迫함을 免할 수 없게 된다.
이런 緣由로, 우리는 朱子 스스로가 생각했던 心이 가리키는 特異한 性格에 대해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앞에서 살펴본 해석과는 달리, 朱子 自身은 이러한 心을 始終 認知心이 아니고, 또 私慾과 情緖로서 引導된 認知心의 發用이 아닌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도리어 心의 道, 心이 天命之性에 관련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기에 주자는, "이 때 곧 心體가 流行하는 것이고 寂然不動한 곳이며, 天命의 體段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지나침과 미치치 못함도 없으며, 치우침도 없으므로 中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心體가 流行하는 곳에 드러나 보이므로, 이를 곧바로 性이라고 말하여도 틀린 것은 아니다" 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朱子는 자신이 論하고 있는 心이 天命의 體段을 갖춘 心體이지, 普遍的으로 이야기되는 그러한 認知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朱子가 말하는 天命의 體段은 '天下大本의 體'라는 의미가 喪失된 것이다. 이는 朱子가 伊川의 이른바 "中이란 지나침도 미치지 못함도 없는 것"이라는 말과, 또 "中이란 性의 體段을 모양짓는 바이며, 마치 하늘이 둥글고 땅이 네모져 있는 것과 같다"라는 思理를 踏襲하므로서 惹起된 것이다. 즉, 伊川의 見解를 따른다면, 中이 바로 性일 수는 없고, 中은 단지 性의 體段을 描述하는 것에 불과하게 된다. 이 결과, 伊川의 思路를 따르고 있는 朱子의 所謂 '天命之性의 體段'도 결국 中이 아니므로, 天下大本의 體라는 의미를 상실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곧 中이 바로 天下의 大本이며, 또한 性體라는 점을 간과해 버린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朱子는 心이 天命의 體段을 갖추고 있다고 하였는 바, 이 때 '갖추고 있다(具)'는 의미는 심이 '본래부터 性을 가지고 있는 것이냐(本具), 아니면 가히 갖출 수 있는 것이냐(當具)' 하는 점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만약 心이 性의 體段을 본래 원천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라면, 이는 곧 '心卽性'이요, 또 '心卽理'를 의미하게 되어, 日常倫用사이에 良心發現의 端緖를 致察하고 또 이를 잘 操存하여 大本達道에 到達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가 있다. 그러나, 朱子는 良心이 發現되는 곳에서 致察하는 것이 곧 道德實踐의 本質工夫요, 또 가장 緊要한 關鍵이라고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 그에게 있어 心과 性의 관계는 결코 하나로 이해될 수 없는, 平行의 관계를 이루게 되었다.
朱子는 未發의 中을 중시하였고, 이것은 發動하면 반드시 節度에 맞게된다고 생각하였다. 아울러 이렇게 未發之中이 發하여 和가 되는 것을 日用의 本領工夫라 하였다. 그러므로 "未發의 中은 本體의 자연스러움이므로, 반드시 궁구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 때에는 敬으로서 이를 지켜서, 이러한 기상을 늘 保存하고 잃어버리지 않도록 한다면, 이는 發하여 반드시 節度에 맞게될 것이다. 이것이 日用時의 本領工夫이다" 라고 한 바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朱子가 말하는 日用工夫에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만약 喜怒哀樂의 未發時의 心體가 바로 超越的 本心이고, 우리의 自律,自主的인 道德活動의 大本이라면, 여기에는 敬으로서 이 心體를 지켜 그 發動시에 中節이되도록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朱子의 心은 단지 認知的으로 性에 關聯되어 있는 것이고, 自律自主的 意志를 가진 것도 아니기 때문에, 心이 天命之性의 體段을 갖추고 있기에는 부족한 바가 있으며, 그러기에 '敬으로서 이를 잘 保存(敬以持之)'해야만 비로소 本體自然의 氣象을 喪失치 않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敬'도 朱子에 있어서는 理가 아니기 때문에(朱子에 의하면, 心이 비로소 具理한다고 한다) 역시 超越的 本心과는 相關이 없는 것이며, 다만 後天的, 經驗的으로 이 未發의 中을 凝聚시켜서, 情의 變動이 일어날 때 그 本來의 氣象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을 日用時의 工夫라고 한다면, 이는 분명 舊說 第四書에서 '傾湫倒海의 氣象', '浩浩大化속에서 하나의 安宅을 구하려고 했던 것'과 같은 背景아래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朱子의 已發未發說속에는 이러한 문제점들이 있기도 하나, 朱子自身은 이 學說를 통하여 그간 자신이 고민해왔던 實踐工夫의 問題에대해서 나름대로 방향을 設定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주자는 "伊川이 말하는 '도리어 已發일 때에 그것(中)을 본다'는 것은 그 처음과 끝(端倪)의 움직임을 살피고, 이를 擴充시켜 나가는 功(工夫)인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서, 한편으로는 已發의 喜怒哀樂등의 端倪의 움직임을 살피고, 다른 한편으로는 心이 갖춘 바의 天命之性의 體段을 따라서 擴充시켜 나가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 때 이러한 擴充에 이르도록 하는 것은, 곧 敬으로서 夾持된 心이 擴充되도록 하는 工夫이며, 喜怒哀樂(情)이 中이 되느냐, 不中節이 되느냐하는 것도 모두 여기에 依存하게 된다. 주자에 있어서는, 이런 방식의 實踐工夫가 바로 '靜養動察(未發시에 涵養을 하고, 已發時에는 察識하는 工夫)', '敬貫動靜(未發已發을 모두 敬으로 保持하는 工夫)'의 工夫이며, 또 이를 통해서 파악된 義理는 곧 心統性情이다. 그러기에 이 心統性情으로 말미암아 未發의 中은 中節의 和를 이끌어낼 수 가 있는 것이다.
또한, 靜養動察과 敬貫動靜함으로서 未發의 中은 그 氣象을 보전하여 잃어버리지 않게 되는 것이고, 已發의 動이 어느 때라도 心이 드러내는 理로서 修正되어 中節에 이르러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敬은 凝聚의 의미를 가지면서 心이 認知한 性理가 意志를 가지도록 하고, 또 日常倫用사이에 이것이 잘 實現되어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한편, 이런 內容들을 舊說속의 浩浩大化와 對照해 본다면, 已發未發說에서는 心統性情, 敬貫動靜이 安宅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舊說중의 知覺主宰處로서의 良心萌蘖은 이곳 新說속의 확정된 理路로 볼 때, 단지 하나의 情感 혹은 心體가 理를 認知하여, 情에 작용하는 결과로 把握될 수 있다.
以上의 내용은「已發未發說」의 重點이다. 朱子는 이 說을 완성한 후, 또「與湖南諸公論中和第一書」,「答張欽夫書」를 쓴 바 있다. 이 중「與湖南諸公論中和第一書」는 已發未發說을 修訂한 것으로, 여기에는 伊川의 말들을 抄錄하지않아 비교적 簡明하나, 그 義理의 綱脈은 已發未發說과 大同小異하다. 또「答張欽夫書」는 앞의 一說一書(이 둘은 내용적으로 사실상 하나의 文章이다)의 내용을 다시 消化시켜 整理한 것으로, 이 둘보다 더욱 完整한 內容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答張欽夫書」의 重點을 살펴보면, 대략 '以心爲主而論之'와 '靜養動察,敬貫動靜'이라는 두 核心的 내용으로 要約될 수 있다.
우선 이곳에서 朱子가 말하고 있는 "心을 主로 해서 말한다"는 것은 이미 已發未發說에서 이야기한 바 있는 "心으로 인해서 發한다(因心而發)"는 뜻과 같은 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서 心, 性情이 나누어지는 때를 분명히 하고, 나아가 靜養動察을 말하게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以心爲主而論之'는 動靜語默을 兼貫해서 종합적으로 中和問題를 논하는 關鍵的인 것이 된다. 즉, 中과 和는 각각 心의 體와 用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렇게 心이 體가되는 까닭은 情變이 未發일 때 寂然不動한 가운데 心의 寂然으로서 性의 渾然을 본다는 것이며, 이는 곧 心과 性이 확연히 둘로 나누어져 있음(心性爲二,心性平行)을 뜻하는 것이다. 한편 心이 用이되는 까닭은 情變이 已發일 때는 感이 遂通해서 心의 感發로서 情의 中節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中과 和는 모두 직접적으로는 心을 가리키게 되며, 性과 情도 모두 이 心으로서 貫通된다.
그러나, 心이 비록 이렇게 性과 情을 貫通한다고는 하지만, 朱子가 말하는 心 自體는 實然的인 心氣의 心일 뿐, 孟子가 말하는 本心은 아니다. 이런 까닭에, 이 心을 超越的 實體라고 할 수 없으며 도리어 진정한 超越實體는 性이되는 것이다. 이로서 "心이 身의 主가 된다(心主乎身)" 에서의 '主'字는 사실상 管攝의 의미로서 사용된 것이다.
한편, 朱子에 있어 心과 仁은 同一하지 않으며, 또 같은 範疇에 속하지도 않는다. 즉 心은 곧 仁이 아니며, 오히려 心의 道(心之道)가 바로 仁이다. 이런 까닭에, 비록 모든 사람들에게 心이 있더라도 혹은 不仁하여 心의 寂然不動과 感而遂通으로 두루 貫徹되는 妙를 呈現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때에는 반드시 仁道를 드러냄으로서 靜일 때의 心의 寂然不動과 動일 때의 心의 感而遂通을 통한 周流貫徹의 妙味가 드러나도록 해야한다. 또 이 때, 仁道의 실현은 반드시 心氣의 貞定이고 凝聚인 後天的인 '敬'의 持之에 의해서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사람이 비록 仁하고자 하나 혹 不敬하여, 仁을 구하데 이르는 功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 하는 것이다. 이로서 보면, 朱子는 후천적인 敬의 工夫을 통해 仁道룰 실현함으로서 心의 妙를 드러내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心과 性의 관계를 釐淸하고, 敬의 공부를 통한 心의 妙를 드러낸다는 사실을 설명한 후, 朱子는 다시 靜養動察과 敬貫動靜에 관해 申述한다. 이미 言及한 바와 같이, 朱子에 있어서는 未發과 已發은 모두 이 敬으로서 維持해야 하며, 또 이 때에는 敬이 이미 存養의 實에 있으면서, 또 省察間에 行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敬의 工夫란 存養과 察識을 동시에 貫通하는 것으로 곧 '靜養動察, 敬貫動靜'을 뜻한다.
靜일 때에 事物은 交應하지 않으나 心體는 묵묵히 流行한다. 그러기에 動中의 靜인 것이다. 또 動일 때는 비록 事物이 이미 交應하였으나 喜怒哀樂은 모두 發動하여 中節이 되어 理를 따라서 움직이게 된다. 그러므로 비록 動이나 역시 靜인 것이다. 이로서 보면, 靜中의 動과 動中의 靜은 모두 存養察識의 敬의 工夫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다. 敬으로서의 存養과 敬으로서 察識의 功(工夫)을 통해서 中으로 和를 이끌어내고(寂而常感), 和로서 中을 보존(感而常寂)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朱子는 "이것이 바로 心이 周流貫徹하여 잠시라도 멈추는 不仁이 없는 까닭이다"라 한 것이다.
以上의「答張欽夫書」의 전반부에서 살펴본 中和新說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朱子는 新說에서 喜怒哀樂의 情으로서 已發未發을 論하고 이로서 다시는 舊說에서와 같이 良心發現의 發과 已發을 混沌치 않고 있으며, 喜怒哀樂이 未發일 때가 바로 寂然不動의 心體이며 또 이 때 天命之性의 體段이 모두 心속에 갖추어져 있다고 보았다. 다만, 이러한 '具'는 心이 本來, 源泉的으로 이 性을 갖춘 것은 아니며, 도리어 心이 認知的으로 性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로서 心과 性은 서로 같은 層次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확연히 다른 두 層次에 서로 존재하게 된다(心性爲二). 뿐만 아니라, 이 때 心의 渾然之性에 대한 認知는 心體가 情變의 干擾를 免하기에는 不足하므로, 반드시 敬으로서 이를 維持保全함으로서 그 氣象을 保存하게 되는 것이다. 이 결과, 情變의 端倪가 나타날 때 心이 性理를 知覺할 수 있는 力量으로서 이 情變들이 각기 그 마땅한 바를 얻도록 하는 것이 바로 發而中節의 和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理論的 前提아래, 朱子는 이 글(張欽夫書)의 後半部에서 涵養과 '察識'공부의 先後關係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즉, 張南軒이 先察識後涵養을 주장하는데 반해, 朱子는 先涵養後察識을 주장하게 되는바, 南軒이 말하는 "察識端倪"는 곧 超越的 本心을 가리키는 것이며, 이 때 '察識'한다는 것은 바로 良心이 事와 時에 따라서 그 端倪를 드러내는 것(良心發現)을 體證하고 肯認함으로서, 그 體(良心, 心體)를 정립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察識端倪의 發"은 곧 本心發現의 發을 뜻하는 것이며, 또 이렇게 發現된 本心이 私欲氣質등의 外在的 影響으로부터 벗어나 그 本然의 모습을 잃지 않도록 收斂凝聚시키는 것이 바로 涵養이다. 그러기에 이런 思理로 南軒은 先涵養後察識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주자는 이미 자신이 앞서 確立한 '靜養動察'의 思理을 따라서, 察識은 단지 已發의 動일 때만 可能하고, 그러기에 已發時에 나타난 情變을 살펴서 이것이 理(性)를 따라 發하여 中節의 和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바로 '察識'이라 하였고, 또 涵養은 靜時에 心體本然의 氣象을 敬으로서 잘 지켜서 늘 이를 保存하고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緣由로, 朱子는 先涵養 후에 察識을 主張하게된 것이다.
前述한 내용들을 綜合해보면, 中和新說속에서 나타난 實踐問題에 대한 思考와, 또 이로부터 釐定된 心性義理의 형태는 朱子의 成熟된 思想의 發端이 된다. 中和新說이전 朱子의 思理는 反復的으로   한 것이었으며 그 결과, 자연 心性에 대해 確定된 내용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中和新說에서는 實踐工夫의 進路에 대한 確定으로 인하여 心, 性, 情에 대한 關係를 분명히 하였고, 아울러 敬의 實踐上의 意義에 대해서도 確定지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新說이후 朱子의 心性義理는 漸進的으로 累積되고  富해져 心性情三分이라는 獨特한 體系를 確立하게 되는 것이다.

Ⅴ. 朱子心性論의 完成
1. 心性情三分의 義理構造

心性問題에 대한 思考에 있어, 中和新說의 완성은 朱子 心性論의 대체적인 綱脈이 이미 드러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朱子는 以後 이러한 綱脈을 基礎로하여 이를 더욱 體系化시켜, 마침내 心性情三分과 心統性情이라는 特殊한 心性義理의 體系를 確立하게 되었다. 朱子의 心性情三分 義理構造에 의하면, 性은 곧 '다만 理'이고, 心은 氣의 靈이며, 情은 氣의 發, 氣의 變이다'. 또 이 心, 性, 情사이에는 心이 性情을 統攝한다는 心統性情의 關係를 이루게 된다.
1) 性
朱子의 性에 대한 諸說중에서 '性이 곧 理'며 '단지 理이다'는 것은 朱子가 伊川의 轉向된 思路을 따라서 完成시킨 하나의 一貫된 주장이다. 앞서 本文Ⅰ章에서 言及한바와 같이, 伊川은 北宋諸儒와는 달리 道體와 性體을 '다만 理'라고 體認한 바 있다. 이에 朱子는 中和論定이후, 伊川의 이 '性卽理'의 思路를 따라서 "性은 단지 이 理이다"라 하고, 또 "道는 곧 性이며, 性은 곧 道로서 단지 하나의 物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朱子가 '性은 단지 이 理이다'라고 할 때, 이 속에 內包된 의미는 性(道)은 단지 하나의 靜態的인 實體이고 그러기에 그 自體에는 直接的으로 活動하는 動態性이 없으며, 오히려 이러한 動態性은 心에서 이야기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까닭에, 朱子가 伊川의 이른바 "道와 性이 하나이다"는 생각을 順承해서 '道와 性이 하나의 物'이라고 하는 점은 비록 그 語義上으로만 볼 때는 별 문제가 없으나, 이 말속의 眞正한 의미는 '道와 性만이 靜態的 實體인 理로서, 이 둘은 곧 하나이다'는 것이다.
朱子가 말하는 '性卽理'는 理로서 性을 말하는 것으로, 性은 理의 內在化이며, 또 先天的으로 生成된 수 많은 道理들이 各各의 個體에 흩어져 들어가 있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言及한 바와 같이 性은 '다만 리(只是 理)', 즉 性(道)만이 理이므로, 心氣인 心이나 또 이 心의 發動, 變動이라고 할 수 있는 情은 性과 다른 層次에 속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자의 思路에 있어 性은 心이 아니며, 또 情도 아니다라는 뜻이다.
한편, 朱子에 있어서 理는 善하지 아니함이 없는 至善之體이므로, '性卽理'에서의 性 또한 純善의 至善體가 되며, 仁義禮智는 바로 이 性 속의 理가 된다. 그러므로 朱子는 "性은 理의 총체적인 이름이며, 仁義禮智는 모두 性속 一理의 명칭이다"라 하고, 또 "性은 實理이며 仁義禮智를 모두 갖추고 있다"고 한다. 또한, 性은 단지 理이므로 이 性自體에는 氣의 挾雜이 있을 수 없으며, 이에 性은 超越的인 意義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性理의 超越的意義란 곧 性理가 無形狀이며 無方體임을 뜻하는 것이므로 이를 直接적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朱子는 여기에 事를 통한 窮理를 가하여야만 비로소 이 超越的 性理를 드러나게 할 수 있다고 한다. 또 朱子에 있어서 理는 事를 떠날 수 없으며, 無形이며 超越的인 性理는 이 事를 통해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父子(一種의 事)에게는 父子의 理(性理)가 있고, 君臣에게는 君臣의 理가 있다"는 등의 實例가 바로 朱子의 이러한 '事로서 드러난(卽事而見)' 性理이다. 다만, 이렇게 드러난 性理自體는 靜態的인 까닭에 스스로 發用하지 못하므로, 여기에는 반드시 格物窮理의 工夫를 통해 心知(心의 虛靈不昧)와 物理가 서로 關聯, 貫通된 뒤에야, 비로소 心氣의 활동이 性을 따라서 理와 같이 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朱子는 "性이란 탁월한 하나의 物로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궁리, 격물하는 가운데 性이 그 속에 있게 되므로, 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주자는 性은 已發이며, 善은 已發이라고 한다. 이는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性이 곧 理이고, 또 이 性(理)은 靜態的인 實體이므로, 朱子에 있어 이 性理은 곧 未發이 되며, 또한 이로부터 發動되어 나온 惻隱의 仁, 羞惡의 義등은 自然 모두 善(理)이 된다는 것이다. 다만, 宇宙論的 順序로 볼 때, 이 性은 個體의 形成으로서부터 얻어진 名稱이므로 善(理)이 앞이고 性은 그 뒤가 된다. 또 사람으로부터 이야기되는 性은 後天的 修養을 통해서 얻어진 德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이 때는 性이 앞이고 善(理)는 그 뒤가 된다. 이로서 본다면, 朱子의 이른바 "性卽是理"는 純善이고 動態的인 實體이며, 또 先天的이고 超越的이지만, 한편으로는 靜態的인 實體이므로 動態的인 活動의 의미는 가지고 있지 않다. 이는 곧 朱子에 있어 性理의 動態的인 活動은 心에 의해 表現되기 때문에 그러하며, 性理는 다만 心氣의 活動이 遵依해야하는 標準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朱子의 所謂 '性卽理'속의 性은 곧 心이 아니다(心性爲二). 이 결과, (道德)實踐의 動力(힘) 또한 後天的인 修養工夫에 依存할 수밖에 없게된다.
한편, 이렇게 '性卽理, 只是理'의 의미를 가지는 朱子의 性은 두 層次의 意義를 가지고 있는 바, 하나는 義理之性이며, 다른 하나는 氣質之性이다. 이 때 그가 말하는 義理之性은 바로 '性卽理'의 性을 의미하며, 또한 곧바로 性理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주자는 "天地의 性을 논하자면, 이는 오로지 理를 가리키는 것이다"라 하고, 또 "性은 단지 理이며, 모든 理의 총체적인 이름이다"라고 한다. 理는 先天的이고 超越的인 實體이므로 至善이며 完美無缺하며, 이로서 全的으로 理를 가리키는 義理之性 또한 至善하며 完全無缺한 것이다. 또, 이렇게 純粹至善한 義理之性에는 氣의 挾雜이 있을 수 없으므로 偏과 全의 문제도 있을 수 없는 것이며, 이 性의 具體的인 내용은 仁義禮智가 된다. 그러므로 朱子는 "天地의 性은 본디 치우침이 없다. 다만 氣質을 稟受받게 되면 도리어 치우침이 있게된다"고 하고, "性은 단지 仁義禮智이다", 또 "性은 太極渾然의 體이므로 본래 이를 이름짓는 것은 不可하다. 다만 이 속에는 萬理를 갖추고 있고 그 벼리가 되는 理의 큰 것으로는 네 가지가 있다. 그러므로 이를 命名하여 仁義禮智라고 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種種의 내용으로 보면, 朱子가 말하는 義理之性은 全的으로 理를 가리키는 것이며, 또한 純粹至善하고 어느 한 곳에도 치우침이 없는 性의 本體를 가리키는 것으로 性善의 理論根據가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義理之性(天地之性, 本然之性)이 내용이 이러함에 반해, 朱子의 所謂 "氣質之性"의 뜻은 좀 特異한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 즉 그가 論하는 氣質之性은 義理之性이 氣質속에 떨어졌을 때의 性을 말하는 것으로, 氣質之性은 곧 氣質속에서의 性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朱子는 "性은 단지 理이며, 氣質之性은 다만 이(義理之性)로부터 나온 것이다. 만약 이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면, 어디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라 하고, 또 "氣質은 陰陽五行이 그렇게 된 것으로, 性은 바로 太極의 全體이다. 다만 氣質之性을 論한다면, 이는 (太極의) 全體가 氣質중에 떨어진 것일 뿐이다. 또 다른 性이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이로서 보면, 朱子가 생각하고 있는 氣質之性은 本然之性이외의 또 다른 性을 意味하는 것이 아니라, 同一한 性의 다른 한 側面을 이야기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氣質之性은 義理之性(天地之性,本然之性)이 氣質속에서 氣의 制限으로서 생겨난 것에 불과하지만, 그 層次上으로는 엄연히 義理之性과 다른 位置에 있는 것이다.
또한 朱子의 이러한 氣質之性에 대한 이해는, 張橫渠가 '사람들이 가진 氣質의 特殊性'으로부터 말하는 氣質之性의 뜻과 다를 뿐 아니라, 程伊川이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진 性의 氣稟, 氣質의 차이로서'의 氣質之性과도 다른 것이다. 이는 곧 朱子가 일반 儒家들이 氣質, 才質의 特異함과 사람들의 自然之性으로부터 각각 말하는 이러한 氣質之性이 義理之性과는 확연히 다른 한 性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을 認定치 않고, 性은 오직 하나이며 氣質之性은 本然之性이 墜落한 상태로서만 보려 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바로 然으로부터 所以然을 推證해 나가는 朱子의 基本思路를 잘 드러내고 한 단면이기도 하다.
朱子의 이러한 義理之性과 氣質之性에 대한 觀點은 그의 晩年에 이르러서 더욱 確固지며, 이는 곧 그의 '理同氣異'와 '枯槁有性'에 대한 見解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먼저 '理同氣異'에 대한 觀點을 살펴보면, 주자는 "萬物이 한 根源이라는 것으로 말하면, 理(性)는 같고 氣는 다르다. 萬物이 서로 다른 體라고 하는 점으로 보면, 氣가 오직 서로 가깝고 理는 절대로 같지 않다. 氣의 다름은 純粹함과 雜駁됨이 서로 같지 않다. 理의 다름은 치우침과 온전함이 간혹 다르다"라 하여 理同氣異의 문제에 대해서 두 方面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선 '萬物이 한 根源'이라는 관점에서 말하면, 이른바 '理同'은 사람과 사물은 普遍的으로 모두 性을 가지고 있으며, 이렇게 갖춰진 性은 하나이고 서로 같다는 것이며, 또 '氣異'는 모든 個體가 稟受받은 氣는 혹은 純粹하고 혹은 雜駁하여 서로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理同氣異'는 바로 普遍的인 性인 義理之性에 대한 것과 特殊的인 性이라고 할 수 있는 氣質之性에 대한 朱子의 생각을 이렇게 理와 氣의 同異문제로 變換시켜 서 表現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朱子는 이러한 理同의 意味에 중점을 두고 枯槁有性의 觀點을 論하면서, "하늘이 (萬)物을 냄에 있어, 血氣와 知覺이 있는 것은 사람과 禽獸가 이것이며, 血氣와 知覺이 없으면서 다만 生氣만 있는 것은 풀과 나무가 바로 이것이다. 生氣는 이미 끊어졌으면서 다만 形質과 惡臭가 있는 것은 말라버린 草木이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비록 그 나뉨에 차이는 있지만, 그 理에는 같지 아니함이 없다. 다만 그 나뉨의 다름으로서 그 理가 있는 곳은 다를 수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가장 뛰어나서 五常의 性을 갖추고 있으며, 禽獸는 昏迷하여 능히 (五常의 性을) 갖출 수 없으며, 草木枯槁는 또 (五常의 性과) 더불어 知覺을 잃어버린 것이다. 다만 이렇게 物이 되는 理를 갖추고 있지 않음이 없다. 만약 生氣가 없다하여 이 理가 없다고 한다면, 天下에는 이에 性이 없는 物이 있게 될 것이니, 理가 天下에 있음에, 비어서 꽉 차지 않은 곳도 있음이 가능한 것인가"라고 하였다. 이는 곧 朱子에 있어서 性은 곧 理이며, 이 理는 天地萬物에 內在되어 있다는 점으로부터 枯槁有性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렇게 理가 天地間에 內在되어 있으므로, 血氣와 知覺의 有無나, 혹은 生氣가 이미 끊어지고 단지 形質만 있는 것이든지에 관계없이 一切의 것들은 모두 그렇게 物이 될 수 있는 理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理가 바로 性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朱子가 存在論的 觀點에서 性을 해석한 것이고, 또한 '然'으로서 그 '所以然'을 推證하여 그 所以然을 性이라고 規定한 前提하에서, 다시금 現象界의 事物에는 모두 그 所以然인 性이 있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말라버린 草木에도 本然의 性은 있으며 이 性은 無差別한 것으로서 어느 物에도 例外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枯槁之物에 本然之性은 없고, 다만 氣質之性만이 存在하게 된다면, 이는 곧 物에는 단지 하나의 性이 있을 뿐이고, 사람들에게는 도리어 本然과 氣質이라는 두 개의 性이 존재하게되는 結果를 초래하므로, 朱子는 氣質之性이란 本然之性이 氣質속으로 떨어져 생겨난 것이며, 本然之性이 없다면 氣質之性도 그 根源을 설명하기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朱子는 "附子는 뜨거운 속성을 가지고 있고, 大黃은 차가운 속성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大黃이 附子가 될 수 없고, 附子가 大黃이 될 수 없는 것이다"라는 大黃과 附子의 例를 들어 설명하면서, 이 둘은 반드시 서로 다른 理(分殊之理)를 가지고 있고, 또 이렇게 相異한 理가 바로 附子와 大黃의 性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때 이렇게 이야기되는 性은 氣稟의 영향을 받아서 이루어진 附子와 大黃의 氣質之性이며, 이 (氣質之)性의 根源處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附子와 大黃의 性과 사람 및 其他物의 性은 서로 다르지 않으므로, 이 모두의 所以然의 理인 本然之性도 또한 서로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以上의 性의 諸說에 대해서 綜合해보면, 먼저 中和新說에서 朱子가 말하는 性은 그 주요한 觀點이 道德實踐의 문제와 관련되어 論해진 바 있고, 이를 통해 확정된 性은 仁義禮智의 性으로 道德實踐을 함에 그 標準이 되는 理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만 이 性理는 超越的인 本心이 아니고, 사람들의 意志와도 관련이 없는 性이며, 다만 認知心으로 認知한 靜態的인 道德法則(性理)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道德法則(性理)은 비록 道德活動의 本質은 결정할 수는 있으나, 사람들로 하여금 직접 道德行爲를 하도록 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단지 우리들이 遵守해야할 하나의 標準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中和新說以後 朱子는 이에 더 나아가 性理의 存在論的 意味에 대해서 解釋을 내리게 되는 바, 여기에서의 性은 個體의 成으로서 性을 규정짓게 된다. 즉 性 以上은 無極이 太極으로 不容言, 不容說의 生生之理이며, 이러한 生生의 理는 만물에 偏在해서 그들이 모두 이 性理를 갖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生生의 性理는 心이 아니며 또한 神도 아니다. 萬物의 生과 個體의 成은 이로서 모두 이러한 生生의 性理가 직접 創造한 것은 아니다. 즉, 이러한 生生의 性理에는 動態的인 活動의 의미가 喪失되어 있으므로, 이는 모두 一切의 然에 대한 所以然으로서만 설명된다. 다시 말하면, 이 때의 性理는 靜態的인 것으로 一切의 存在物이 存在하는 理가 된다. 또 이러한 存在의 理 自體는 바로 義理之性(本然之性, 天地之性)을 의미하며, 이 性이 氣에 관련되고, 또 氣質중에 떨어지게 되면 이는 곧 氣質之性이 된다. 氣에는 밝음과 어두움, 바름과 치우침, 순수함과 駁雜함의 다름이 있게 되므로, 性도 이렇게 서로 다른 氣위에서 서로 다른 表現을 드러내게 된다. 즉 사람이 가장 뛰어나서 五常의 性을 갖추게 되고, 禽獸는 氣가 昏迷하여 그 전부를 갖추지 못하며, 草木은 그 다음으로 그러하며, 枯槁之物은 더욱 더 五常의 性을 갖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天地之性과 氣質之性의 區別은 곧 性 그 自體와 또 이 性이 氣와 關聯되어 있는 것으로서 區分하여 論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2) 心 과 情
朱子에 의하면, 性은 다만 理로서 形而上의 存在이며, 心은 形而下에 속하는 氣이다. 그러므로 心은 性이 아니며 또한 理도 아니다. 그러나, 心에는 氣의 가장 虛靈함과 精爽의 특성이 갖춰져 있으며, 이러한 虛靈不昧의 靈妙한 특성으로 心은 능히 性理를 知覺하고 表現해낼 수 있게 된다. 이런 緣由로, 朱子는 "心이란 氣의 가장 精妙한 것"이며, "가장 虛靈한 곳은 다만 心일 뿐, 性이 아니다"라 하고, 또한 "깨닫는 바는 心의 理이며, 깨닫도록 하는 것은 氣의 虛靈함"이라고 한다. 아울러, "性은 바로 心이 갖춘 理이며, 心은 바로 理가 모이는 곳"으로 "心이 이 理를 갖추게 되는 까닭은 性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이로서, 心이 能히 知覺하는데에는 반드시 知覺의 (性)理가 있어야 하고, 또 이 理와 心氣가 合해진 후에야 비로소 知覺의 機能이 表現되어 나올 수 있으며, 心도 自身의 虛靈不昧한 능력으로 性理를 갖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理解한다면, 朱子가 體認하고 있는 心은 孟子의 所謂 '本心卽性'으로서의 道德本心은 아니며, 오히려 '氣의 神靈함, 氣의 精妙함(氣之靈, 氣之精爽)'으로부터 이야기된, 단지 實然的이고도 形而下的인 心氣之心으로 一種의 認知心을 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결과, 形而上學的 側面에서 보면, 理(性)는 氣(心)에 의해서 呈現되며, 다시 實踐工夫의 側面에서 볼 때는, 性(理)은 心(氣)에 의해서 드러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朱子는 또 "理는 心이 없으면 머무를 곳이 없게 되며", 또 "知覺하는 것은 理이며, 理는 知覺을 떠날 수 없다. 理는 知覺을 떠나지 않고, 知覺은 理를 떠나지 않는 것이다"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朱子가 비록 이렇게 性을 體로 보고 心을 用으로 보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一般的으로 이야기하는 卽體卽用의 關係를 뜻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然으로서 所以然을 推證하는 存在論的 觀點下에서 性은 心이 없으면 安頓과 掛搭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며, 또 心은 性理를 知覺하여 이 心이 理에 의해서 行해질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朱子는 "性이란 道의 形體이다. 仁義禮智는 性이며 理이다. 그리고 이러한 性을 갖춘 것은 心이다. 그러기에 心을 性의  郭이라고 하는 것이다"라 하고 "대개 道는 形體가 없으나, 단 性이 바로 道의 形體가 된다. 그러나 만약 心이 없다면, 性이 장차 어디에 있을 수 있는가? 반드시 이 心이 있어야만 이 性을 收拾해서 發用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한편, 심에 動靜(陰陽)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 朱子는 心의 官能은 지극히 虛靈하여 가는것을 감추고 오는 것을 안다고 하며, 또 이 心은 擴大流行하는 속에 動靜의 意味를 兼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生의 意味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는 곧 朱子에 있어 心의 動靜은 陰陽으로 바로 氣이며, 그러기에 心은 '生'으로서 表現된다는 뜻이다. 다만 주자가 이렇게 心氣의 虛靈한 氣化不
息을 말하더라도, 이는 분명 本心仁體의 道德創生實體나 天命의 流行實體로서 이야기되는 '於穆不已'와는 다른 것이다.
朱子는 心이 그 虛靈明覺함으로 能히 理를 밝혀낼 수 있고, 또 理를 갖출 수 있으므로 心의 主宰的 의미 또한 이로부터 論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우리의 몸을 主宰하고 運用하는 것은 心이며 그러기에 動靜語默사이의 모든 것을 主宰한다. 반면 性은 이러한 主宰運用이 가능하도록 하는 根據가 될 뿐 직접 主宰하고 運用하지는 않는다. 이는 前述한 바와 같이, 性은 단지 理로서 存在의 超越的인 根據가 될 뿐 性理自身이 직접 動態的인 活動을 할 수 없어서 그러한 것이며, 반면에 心은 自體에 부여되어 있는 知覺作用을 통해 이러한 性理를 現象界에 드러낼 수 있고 아울러 情을 統奴하여 理에 合致되도록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서 朱子는 心에는 主宰性이 있다는 것이며, 또한 心이 이렇게 能히 主宰할 수 있는 能力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心에는 虛靈明覺으로 인한 知覺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릇 道理는 모두 내가 스스로 가지고 있는 物이며, 밖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이른바 知라는 것은 단지 내 속의 道理를 알아서 얻어내는 것이지, 내가 아는 것으로서 저 道理를 아는 것은 아니다. 道理는 진실로 본래부터 있는 것이니, 知를 이용하면 바로 얻어 낼 수 있다. 만약 知가 없다면 道理가 어디에서 나와 보이겠는가? 그러므로 衆理를 玄妙하게 한다는 것은 능히 衆理를 運用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라 하고, 또 "知覺하는 바가 없으면, 萬物을 宰制하기에 부족하다. 萬物을 宰制하려면 반드시 知覺이 있어야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곧 心은 반드시 知를 이용하여야만 道理를 드러낼 수 있게되고, 또 이 道理를 運用할 수 있게 되어 能히 萬物을 宰制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朱子는 이렇게 心에 이 知(覺)가 있는 것이 곧 心의 主宰義라는 것이다. 다만 朱子가 이해하고 있는 心은 實然의 心氣之心이므로, 이 心은 간혹 그 主宰의 機能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이런 까닭에 朱子는 또 心에는 善惡이 있고, 人心과 道心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心이란 움직이는 가운데에서의 物과 事이므로 자연히 善惡이 있다. 惻隱과 같은 것이 善이며, 아이가 우물에 빠질 때 惻隱한 마음이 없는 것이 곧 惡이며, 善을 떠나있는 것이 惡이다. 그러나 心의 本體는 善하지 아니함이 없으나, 惡을 말하지 않는 것도 온전한 心은 아니다. 만약 心이 아니라면, 무엇을 해낼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이는 곧 朱子에 있어 善하지 못한 것(惡)은 곧 心이 主宰하지 못함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며, 이는 또 心이 善惡을 超越해 있는 至善體로서의 性理와 다른 側面이기도 하다.
그러나, 心의 本體가 이렇게 虛靈不昧하여 衆理를 갖추고 萬事에 應할 수 있지만, 敬이 없으면 이 心 또한 能히 主宰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까닭에, 心의 主宰에는 반드시 敬이 그 속에 含有되어 있는 것이다. 다만, 敬과 心이 理를 아는 것은 단지 綜合關係이며 分析關係가 아니다. 이로서, 心의 宰와 不宰는 心이 스스로 決定하는 것이 아니며, 心은 반드시 理(性)위에서 能히 主宰할 수 있는 것이므로 사실상 心이 반드시 主宰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前述한 바와 같이, 朱子에 있어 心의 不宰는 惡을 발생시킨다. 그러나 이 惡과 人欲의 根源이 性理와 心의 本體에 있는 것은 아니며, 다만 心에 있지 아니하다고 말하지 못할 따름이다. 이로서 朱子는 人心과 道心의 見解를 말하게 된다. 즉, "이 心의 虛靈함이 理에 의해 知覺되면 道心이며, 欲에 의해 知覺되면 人心이다", 또 "단지 이 心이 귀와 눈의 慾望을 쫓아가 知覺하면 이는 바로 人心이며, 義理를 쫓아가 知覺하게 되면 곧 道心이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朱子에 있어 心의 이러한 知覺은 理에 의해 知覺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欲에 의해서도 知覺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때 理에 의해 知覺되는 것이 곧 道心이요, 欲에 의해 知覺되는 것은 人心이다. 바꿔 말하면, 理에 合致되는 心이 곧 道心이며, 感性과 慾望의 영향을 받은 心은 人心이 된다. 그러나 이 道心은 道에 合致되는 心일 뿐 本心의 의미를 가진 心은 아니며, 人心도 비록 感性慾望으로 因해 결정된 心이나, 사람의 感性과 嗜好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또 변화하는 것이므로 이 人心은 전혀 없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朱子는 人心의 消滅을 주장하지는 않으며 단지 이 人心이 心의 標準이 될 수는 없고, 반드시 道心으로서 準則을 삼아야한다고 한다. 또한 사람들은 쉽게 慾望에 빠져 天理의 바름(正)을 잃어버리기 쉬우므로 求放心을 통하여 이를 지켜야된다고 한다.
그러나, 朱子의 이러한 道心, 人心의 관점은 곧 心이 實然的인 認知心임을 완전히 드러내는 것이고, 또 敬이 이 心의 宰物과 不宰物의 여부에 關鍵的인 地位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朱子에 있어서는 心이 物을 主宰하는 것은 본디 知覺에 依賴되는 것이며, 心이 物을 主宰하지 못하는 것도 또한 이 知覺에 依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知覺은 理와 欲에 따라 다 가능하므로, 이러한 知覺의 여부가 곧 宰物의 여부를 결정할 수는 없게된다. 이런 까닭에, 朱子에 있어서 心의 宰와 不宰의 관건은 결국 敬으로 歸結되게 되는 것이다.
한편, 朱子는 心의 虛靈不昧로 인한 知覺으로 理를 갖출 수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心具衆理'와 '心包衆理'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心은 萬理를 包括하고 있으며, 萬理는 一心에 갖춰져 있다. 이러한 心을 保存하지 못한다면 理를 窮究해 얻을 수 없다. 窮理를 하지 못하면 心을 保存하지 못한다"라 하고, 또한 "虛靈不昧하여 衆理를 갖추고 있으므로 萬事에 應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具'와 '包'는 心知의 明, 즉 心의 虛靈明覺으로 能히 知覺할 수 있는 能力으로 認知하여 갖춰진(具) 것이다. 다시 말하면, 心知의 明(覺)으로 理를 認知한 후에야 비로소 이 理가 心속에 갖춰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朱子의 이른바 '心具衆理'에서의 '具'는 사실상 後天的인 工夫를 통해서 얻어진 '具'이며, 先天的으로 갖추어진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以上에서 살펴본 心의 諸說들을 綜合해 보면 대략 아래의 네 가지로 歸結된다. 우선, 朱子에 있서 心은 氣의 靈이며, 또 이 虛靈知覺의 心은 認知心으로서 道德本心이 아니며, 이는 곧 朱子가 心을 이해하는 基本前提이기도 하다. 둘째는, 心은 能히 知覺할 수 있고 動靜도 있으며, 認知的으로 理를 밝힐 수 있고 또한 이 理를 갖추고(具)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朱子는 心에 대한 涵養工夫를 특히 강조한다. 단 이 때의 心에 대한 涵養은 心知의 虛靈明覺에 그 중점이 있으며, 超越的 本心에 대한 涵養(存養)은 아니다. 끝으로, 朱子는 心의 主宰義를 강조한다. 이는 바로 心이 理를 밝힘으로서 萬物을 主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다만 이 때 心의 主宰는 단지 理위에서 이야기되는 것이나, 事實上으로는 敬에 의해서 더욱 夾持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이 곧 朱子가 敬貫動靜과 涵養察識을 重視하게된 緣由이기도 한 것이다. 아울러 朱子는 道德實踐上에 있어서도 이 心의 宰와 不宰로서 惡의 起源을 설명한다. 즉 心이 性理를 知覺하면 性은 心의 發動으로 말미암아 善하지 아니함이 없게되고, 반면에 心이 理를 知覺하지 못하게 되면 心은 그 主宰의 機能을 잃어버려 惡이 發生되게 되는 것이다.
앞서 言及한 바와 같이, 朱子에 있어 心이 理를 呈現하는 것은 두 가지 측면으로 이야기된다. 즉, 하나는 事物과 接應하지 아니하고 思慮가 未萌일 때 心體은 寂然不動한 狀態로 性理의 體段을 이 心의 虛靈不昧로서 전부 갖추게되는(具) 것이고, 다른 하나는 事物과 接應하고 思慮가 이미 생겨났을 때 心이 感應하고 發動하여 情이 節度에 들어맞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朱子는 "心이란 본디 身體의 主(宰하는 것)가 되며 動靜語默 가운데 있는 것 아니다. 그러나 바야흐로 그 靜일 때, 事物이 이르러지 아니하고 思慮가 나타나지 아니했을 때, 性은 渾然하며 道義가 전부 갖춰져 있다. 이른바 中이란 이에 心이 體가 되는 까닭이며, 寂然不動한 것이다. (또) 그 動에 이르러서는, 事物이 서로 應接하고 思慮가 이미 생겨났을 때는 七情이 번갈아 가며 쓰여서 각기 主(宰) 되는 바가 있게 된다. 이른바 和라고 하는 것은 이에 心이 用이 되는 까닭이며, 感應해서 通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性의 靜은 움직이지 않을 수 없으며, 情의 動은 반드시 節度가 있게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로서 보면, 주자는 心으로서 理를 呈現을 설명하는 가운데 心은 動靜과 知覺을 가지고 있고, 또 性은 이렇게 心이 知覺하고 動靜이 있도록 하는 理이며, 情은 心의 發動내지는 心의 變動이라고 하는 心과 性그리고 情의 關係를 잘 드러내고 있으며, 특히 心과 性의 관계를 명확히 糾明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性과 情의 關係에 대한 朱子의 見解는, 性이란 未發이며 無形이어서 具體的으로 把握해낼 수 없으므로 반드시 已發의 然인 情으로서 이것의 所以然인 性을 推證해야만 비로소 性의 本然을 드러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朱子는 "이러한 性이 있어야 이 情을 드러낼 수 있으며, 이 情으로 因하여 이 性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이 情이 있음으로 因해서 본래 이러한 性이 있었음을 보게되는 것이다"라 하였고, 또한 "性은 말할 수 없다. 性이 善하다고 하는 까닭은, 단지 惻隱과 辭遜의 四端의 善을 보고서 그 性이 善하다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흐르는 물이 맑으면 그 原流도 반드시 맑은 것과 같은 것이다. 四端은 情이며 性은 곧 理이고, 發動한 것은 情이나 그 근본은 性이다"라 하는 것이다. 朱子의 이러한 性과 情의 關係는 곧 그의 性은 心의 體이며, 情은 心의 用이며, 그러기에 性은 곧 뿌리(根)요, 情은 바로 싹(芽)이라는 見解아래에서 이야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性과 情의 관계가 根과 芽子로 표현되더라도 이는 情이 性과 같은 體로부터 發用이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즉 朱子의 心性情三分의 思理에 의하면, 위의 引用文에서의 '이러한 性이 있어야 이 情을 드러낼 수 있다(有此性便發出這情)'는 內容속에는 반드시 一段의 心知之明이 있어야 하고, 또 敬貫動靜의 曲折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朱子에 있어 性은 形而上에 屬하고 情은 形而下에 속하므로, 만약 心의 主宰로 因하지 아니하면 情 또한 반드시 中節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不中節에는 不中節의 理가 있으나, 情은 직접 性으로부터 發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朱子가 비록 '흐르는 물이 맑으면, 그 原流도 반드시 맑다(水流之淸,則知源頭必淸矣)'고 말하고는 있으나, 만약 흐르는 물이 濁할 때는 그 源流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러므로 이는 곧 實踐工夫上에서 性과 情의 관계를 말한 것이며, 情이 직접 性으로부터 發動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편, 朱子가 말하는 '性은 뿌리(根)이며 情은 싹(芽子)'라는 觀點에서 보면, 이는 곧 '이러한 性이 있으므로서, 이 情이 發動되어 나온다는 것'으로 性과 情사이에 하나의 存在論的 '所以然'과 '然'의 관계로 表現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또한 性과 情의 관계를 體用의 關係로 볼 수는 없으며, 도리어 嚴格히 말해서 心의 實然的인 呈現과 發動으로서의 情과 또 이렇게 呈現되도록 하고 發動되도록 하는 理로서의 性을 뜻하는 것이므로, 性과 情은 직접적으로 體用關係에 있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朱子가 비록 '情은 性이 發動한 것'이라고 말한 바가 있지만, 이 性 自體에 서 직접 發과 不發을 論할 수 없으므로, 性은 단지 情의 發動의 靜態的이고도 超越的인 所以然의 理일 뿐인 것이다.
朱子에 있어서는 이렇게 性과 情은 體用關係에 있지 않으며, 진정한 體用의 關係는 心과 情사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性이란 心의 理이며, 情은 心의 움직임이다. 情은 物을 만나서 發動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情은 心의 움직임'이라고 할 때, 이는 곧 實然的인 측면에 著眼해서 心이 能히 活動할 수 있으며 이 心과 情은 모두 氣에 속하고, 또 心은 能히 理를 알 수 있음으로서 情이 節度에 들어맞게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또 '情은 心의 움직임이다'라 하는 것은 超越的인 측면에 著眼해서, 情이 존재하는 까닭은 性이 그 超越的 根據가 되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곧 情과 性사이에 然과 所以然의 관계를 갖고서 이야기하는 것이 된다. 이런 까닭에, '性의 發(動)'은 단지 一種의 虛說이며, 그 眞正한 '發'은 心에 있는 것이지, 性에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前提하에 朱子는 또 '情은 心의 發動'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性은 心의 理이다. 情은 性의 움직임이다. 心은 性情의 主(宰)이다"라 하고, 또 "性은 情에 對(比)하여 말한 것이고, 心은 性情에 對(比)하여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合한 것은 性이고, 움직이는 곳은 情이며, 主宰하는 것은 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種種의 內容은 앞서 言及한 바와 같이 朱子의 思路중 性은 '心의 理(心之理)'이고 또한 靜態的인 단지 理(只是理)이며, 情은 氣의 結聚후의 實際로 그렇게 움직이는 곳의 氣迹이다. 그리고 心은 認知的으로 이 理를 갖추어서 情을 統奴하고, 이로서 情이 理에 合致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情은 心에서 發動되어 나온 것이며, 性은 직접 心으로부터 發動되어 나온 것은 아니지만, 心知의 攝貫으로서 彰顯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또한 朱子가 伊川의 '心은 穀種(곡식의 씨앗)의 전부에 해당되고, 情은 이 穀種의 生長이며, 또 이렇게 生長토록 하는 理는 바로 性이다'라는 見解을 자신의 心性情三分의 義理속에서도 굳건히 順承, 維持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以上에서 살펴본 情의 내용을 綜合해 보면, 情은 心의 發이고, 心의 變이다. 또한 性은 그 自體에 發과 不發을 論할 수 없으므로, 朱子의 所謂 '情은 性이 發動한 것(情是性之所發)'이라는 內容은 단지 情과 性사이의 實然的인 '然'과 '所以然'의 관계를 말한 虛說일 뿐이며, 情의 眞正한 發動處는 心에 있다. 이로서 心과 情사이에 비로소 卽體卽用의 體用關係가 成立되는 것이다.

2. 心統性情

朱子의 心性情三分의 義理構造에 있어서 主要한 核心은 "心統性情"이다. 朱子가 말하는 情은 단지 實然의 氣가 結聚되어 發用된 形迹으로 그 自體는 主動的으로 知覺을 呈現해낼 수 없으며, 性 또한 超越的 存在하며 情의 存在論的 根據가 된다. 그러므로, 이 性과 情 兩者사이에는 반드시 心의 作用이 있어야만 情이 비로소 理와 같이 道에 合致될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朱子의 思路에 있어서 心은 樞紐의 地位에 놓이게 되며, 朱子는 이를 특별히 "心統性情"이라고 命名하였다. 본래 "心統性情"이라는 句節은 張橫渠가 처음 이야기한 것으로 朱子는 이것에 대해서 상당한 好感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橫渠가 말한 것이 가장 좋다. 이르기를 '心은 性情을 거느린다(統)'고 한다"라 하고, 또한 "伊川의 '性이 곧 理이다'와 橫渠의 '心은 性情을 거느린다'는 두 句節은 깨트릴 수가 없다"고 한 바 있다. 그러나 橫渠의 이른바 "心統性情"은 본래 하나의 獨立된 孤立語이며, 그 意義의 內容도 또한 쉽게 確定지을 수 없다. 그렇지만, 朱子는 이 句節을 자신의 '心性情三分'의 構造속에다 引用하여 이를 理解하려고 하였다.
朱子의 思路에 의하면, 性은 未發이고 情은 已發이며, 心은 未發의 性과 已發의 情을 統攝한다. 바꿔 말하면, 心과 性, 그리고 情은 비록 셋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情일 때의 未發의 性과 動일 때의 已發의 情은 모두 이 心에 의해 統攝되는 바(거느려지는 바)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朱子는, "性은 움직이지 아니한 것이고, 情은 이미 움직인 것이다. 心은 이미 움직인 것과 움직이지 아니한 것을 包括하여 가진 것이다. 대개 心이 움직이지 아니하면 性이 되고, 이미 움직였으면 情이 되는 것이니, 이른바 '心統性情'이다"라 하고, 또 "性은 理로서 말한 것이며, 情은 이에 發用된 곳이다. 心은 곧 性情을 主管하고 거느리는(管攝)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곧 朱子가 心은 비록 形氣이지만 한편으로는 能히 理를 知覺할 수 있으며, 또한 이 理에 의해 情을 다스려서(統馭) 情이 理와 같이 행해지도록 하는 것으로, 이 모두는 바로 心의 主宰와 貫通으로서 그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意味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朱子는 "心은 主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動靜 모두를 主宰한다. 靜일 때에도 主宰하지 않음이 없으며, 動일 때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主宰한다. 主宰를 말하자면 뒤섞여 있는 가운데에서도 體를 거느림이 그 속에 있는 것이다. 心이 性情을 거느린다는 것은 불분명하게 性情과 더불어 하나의 物이 되어 分別할 수 없게되는 것이 아니다"라 하고, 또 "性은 心의 理이며, 情은 性의 움직임이며, 心은 性情의 主(宰)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朱子의 思理를 따라서 살펴볼 때, 心의 主宰는 사실상으로는 단지 대신 맡아서 관리한다는 의미를 띤 主宰이며, 心 스스로가 當然하고도 必然的으로 主宰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朱子의 心性情三分의 義理에 있어서 眞正한 主宰는 性에 있으며, 心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心이 依賴하고 있는 理는 性이 提供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朱子가 心으로서 말하는 '主' 혹은 '主宰'는 사실상으로는 단지 거느린다는 管攝의 意味를 가질 뿐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心氣가 存在하는 이유는 性理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다만 이 性理는 그 스스로가 計度할 수 없고 造作할 수도 없으므로, 心(氣)이 자신의 明覺으로서 이 性理를 드러내고, 아울러 이 理에의해서 發動되어 實然의 情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朱子가 이미 言及한 바 있는 '性은 理로서 말한 것이며, 情은 이에 發用된 것으로, 心은 性情을 거느린다'는 뜻인 것이다. 한편, 이렇게 '心으로서 性과 情을 統攝한다'는 朱子의 '心統性情'은 엄격히는 '心統性'과 '心統情'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이 둘은 서로 다른 意義를 띠고 있기도 하다. 즉, 朱子는 "仁은 性이고, 惻隱은 情이나, 반드시 心에서 發動되어 나온 것이다. 心은 性情을 거느린다"라고 한 바 있다. 그러나, 주자가 이렇게 性과 情이 心으로부터 發動되어 나온다고 할 때, 이 '發'의 의미는 性으로부터 '發'을 말하는 것과, 情으로부터 '發'을 論하는 것은 그 의미상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먼저 '情'으로 말하면, 이 情은 心으로부터 發動되어 나왔다고 보는 것은 별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心과 情은 모두 같이 實然의 心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性으로부터 發動되어 나왔다고 할 때에 있다. 즉, 이 性은 心에서 發動되어 나왔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하며, 이 때의 性은 단지 心의 虛靈明覺한 知에 統攝되고 含具되어 드러난 것일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情이 반드시 心으로부터(心字로부터) 發動되어 나온다'고 할 때의 發은, 一種의 同質的인 發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 속에서는 體用의 關係를 말할 수 있다. 반면에, '性이 반드시 이 心으로부터 發動되어 나온다'고 할 때의 '發'은 하나의 虛說的인 發이다. 왜냐하면 性은 心의 虛靈明覺을 빌려서 發動되는 것이기에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性이 心을 빌려서 發動하는 것이지, 性이 心으로 말미암아 發動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런 까닭에, 여기에는 體用을 말할 수 없게된다. 이상의 이러한 種種의 이유로 말미암아 朱子의 心統性情은 心統性과 心統情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心이 性을 거느린다는 '心統性'은 心이 性을 認知하고 統攝하여(거느려서) 心속에 갖추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朱子는 涵養을 이야기하게 되고, 또 未發時의 涵養을 重視한 것이다. 즉, 이는 心을 마치 거울과 같이 잔잔한 물의 경지에 이르도록 涵養하여, 心이 가진 本來의 虛靈明覺을 회복하고 또 이로서 理를 攝具하여 드러내는 것이다. 이 때 心은 자연히 未發의 性을 通貫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朱子의 所謂 未發時의 涵養工夫와 心統性은 바로 이러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음으로, 心이 情을 거느린다는 '心統情'은 心이 實際로 情을 統攝하고 이를 發用하는 것이다. 情은 心에서 發動되어 나온 것이다. 이 때 心은 곧 已發의 情을 通貫한다. 또한 情은 事로 인하여 發動되므로 朱子는 이로서 已發時의 察識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이러한 察識을 통하여 情의 發用이 각기 그 마땅한 바를 얻어서 節度에 맞고(中節) 리에 합치되도록(合理) 하려는 것이다.
Ⅴ. 結 論
以上의 分析을 통하여 朱子의 心性義理를 다음과 같이 要約해 볼 수 있다. 먼저, 宋儒들이 體認하였던 道(體)와 性(體)은 能히 宇宙生化를 일으키고 道德을 만들어 내는 實體로서, 動態的이며 活動性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北宋의 濂溪, 橫渠, 明道도 이러한 道體와 性體를 하나의 靜態的인 存在로서 體認하지 않고, 오히려 誠이나 (淸通之) 神, 그리고 易(道,神,性) 등을 통하여 宇宙의 於穆不已와 사람들 속의 純亦不已를 설명하므로서, 이 들이(道體와 性體) 하나의 固定된 準則이나 理想的인 標準으로만 存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存在함과 동시에 끊임없이 生化하고 또 道德行爲를 이끌어내는 動態的인 實體로 이해하였던 것이고, 아울러 그들은 宇宙와 道德, 天道와 性命을 서로 하나로 貫通시킴으로서 先秦 孔孟의 踐仁知天, 盡心知性知天의 精神과 서로 呼應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즉 先秦의 孔孟精神이 內在的인 面(仁,本心)에서 超越的인 面(天,道,)으로 漸進的으로 발전해 나간 것이라면, 宋代의 儒家들은 超越的인 側面(天,道)에서부터 서서히 內在的인 面(心性)으로 追求해 들어가 窮極에는 이 둘을 하나로 貫通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貫通은 心性의 問題를 天道의 問題와 동등한 위치에 끌어올리는 役割을 한 것이고, 또한 心性이란 다름아닌 天道의 問題임을 再確認시키는 契機가 되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北宋儒(특히 周濂溪, 張橫渠, 程明道)의 이러한 心性에 대한 體認은 程伊川에 이르러서 서서히 그 義理에 있어 轉換을 가져오게 된다. 즉, 伊川은 道體와 性體를 단지 性理로 簡化시켜버리고 또 誠과 神, 寂感등을 말하지 않으므로서 道體와 性體를 靜態的인 '단지 理(只是理)'로 規定지워버리고 말았다. 이 결과, 宇宙生化와 道德創造의 道體 性體는 그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었고, 또 道體와 性體를 性理로 簡化시켜버림으로서, 個體로부터 이야기되는 이 性體와 個體로부터 發動된 一切의 現象사이에는 區分이 없어지게 되어, 결국 性體의 의미에 混亂이 일어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性體義의 混亂은 人과 物의 구별이 性에서 결정되지 않고 도리어 心氣上에서 결정되는 結果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것 이외에도, 伊川은 道體와 性體를 存在의 然으로부터 推證한 所以然으로서의 理와 性으로 규정함으로서 心과 神이 性으로부터 脫落되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어 결국은 性體의 道德力量도 減殺시켜 버렸다. 그러므로 이러한 種種의 內容으로 볼 때, 伊川은 道體와 性體에 대해 北宋의 儒家들과는 좀 색다른 見解와 體認을 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또 이러한 義理構造는 훗날 朱子에 의해 順承되어 더욱 發展되었다.
南宋의 胡五峯은 北宋儒의 天道性命의 相互貫通의 觀點을 잘 消化시켜 於穆不已로서의 道體槪念과 以心著性의 心性義理를 論하였고, 또 延平은 道南學派의 宗旨인 靜坐로서 喜怒哀樂 未發時의 氣象이 어떠한가를 고찰하고자 하였으며, 이는 곧 '靜復以見體'의 修養工夫로서 情의 未發時에 天下의 大本, 人性의 大本인 道體와 性體를 體認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朱子는 延平에게서 從學하면서 힘써 '靜時의 未發之中'의 의미를 參究하였으나 始終 이에 대한 解答을 얻지 못하였고, 자신의 內心上의 體認에 있어서도 많은 疑問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情況下에서 그는 張南軒과의 一段의 交往으로 이른바 中和舊說을 확립하게 되며, 이 說의 初步的 結論은 天命流行의 體가 바로 中이며, 이 中은 곧 生命活動중에 虛靈不昧의 心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때 朱子가 中和問題에 대해서 體認했던 것은 外觀上으로는 마치 孟子의 義理와 비슷해 보이며, 道體에 대해서도 마치 動態的인 측면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엄격히 살펴보면, 이 中和舊說에서 朱子가 이해했던 心은 결코 孟子가 말하는 本心은 아니며, 道體 또한 단지 氣化의 迹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아울러 朱子는 이 舊說에서 良心의 發動과 喜怒哀樂의 發動을 동일한 것으로 混沌해 보고 이를 엄격히 구별하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이 舊說을 통한 內容들은 어딘가   한 점들이 많았으며, 朱子自身 또한 이에 대해서 滿足을 느끼지 못하게되어 마침내 朱子는 이 舊說을 放棄해 버리고 새로운 觀點인 新說을 이야기하게 된 것이다.
中和新說에서 朱子는 喜怒哀樂의 情으로서 已發과 未發을 말하므로서, 다시는 心의 發動과 情의 發動을 混沌하지 않게 되었다. 즉 喜怒哀樂이 未發일 때가 곧 寂然不動한 心의 體이며, 이 때 心속에는 天命之性의 體段이 갖춰져 있고, 또 이러한 갖춤(具)은 心이 本來부터 이 性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心이 後天的인 工夫를 통하여 性을 갖추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朱子의 이른바 '中'은 두 방면으로 이야기된다. 즉 하나는 心을 가리키며, 다른 하나는 性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로서 朱子에 있어 心性은 하나가 아니라 둘로 나누어지게 되어(心性爲二) 결국에는 敬으로서 心의 明覺을 涵養하고, 또 格物窮理하여야만 능히 性理를 知覺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朱子가 中和新說에서 論하고 있는 心은 '心卽理'의 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認識, 認知의 心이 되는 것이다. 주자가 평소에 莊敬涵養의 工夫를 가장 重視하고, 또 先涵養後察識의 工夫를 통해서 情의 發動時에 비로소 中節의 和에 到達할 수 있다고 하는 것도 바로 이 心이 認知心인 까닭인 것이다.
朱子에 있어 이러한 中和新說의 完成은 곧 心性情三分 및 理氣二分의 義理構造가 大略的으로 形成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에 의하면 性은 곧 단지 理이며, 그러기에 性은 心이 아니며 情도 아니다. 즉 心과 情은 모두 氣에 속하며, 단지 性만이 理일 뿐인 것이다. 또한 朱子의 이른바 '義理之性'은 직접 性理를 말한 것으로, 이 性이 氣質속으로 墜落한 것이 곧 氣質之性이 된다. 이런 까닭에, 이 氣質之性은 本然之性이외의 또 다른 性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本然之性이 氣質의 影響을 받은 것이므로 이는 곧 同一한 性의 또 다른 側面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氣質之性에 대한 朱子의 解釋은 그만의 獨特한 것으로 張載나 程伊川이 論하는 氣質之性의 의미와는 다른 것이기도 하다.
아울러 朱子는 人과 物이 모두 理를 얻어서 된 性으로서 '理同'을 말하고, 人과 物이 받은 氣稟의 차이로서 '氣異'를 말하기도 하였고, 또 '性卽理'의 觀點下에서 理는 天下에 遍在해 있으므로 天下의 物에도 모두 性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枯槁有性의 見解를 主張하기도 하였다.
朱子의 思路중 心은 氣의 靈妙함이며, 또 이 心은 能히 知覺할 수 있고 動靜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知覺動靜하도록 하는 理는 곧 性이다. 그러기에 心은 性이 아니며 또한 理도 아니다. 이로서 朱子의 이른바 '心이 性(理)을 갖추고(具) 있다는 것'은 바로 心이 가진 虛靈不昧한 明覺으로서 性을 認知하고 涵攝해서 이를 心속에 갖춘다는 것이지, 先天的으로 이 心이 性을 갖추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아울러 朱子에 있어 情은 心氣의 發動이다. 그러므로 朱子가 '情은 性의 움직임이다'라고 할 때, 그 本義는 情이란 性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이며, 情이 性에 繫屬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性이 스스로 움직여서 情이 된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性은 다만 理로서 靜態的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朱子의 心性情三分의 義理構造속에는 理氣二分의 構造도 함께 드러나고 있다. 즉, 性은 理이고 情은 氣로서 心의 發動이며 心은 氣의 靈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心性情三分의 義理構造에 있어서 朱子의 主要한 觀點은 '心統性情'이다. 性은 未發이고 情은 已發이며, 心은 이 未發의 性과 已發의 情을 統攝한다(거느린다). 또 心이 이렇게 性과 情을 거느리는데는 心統性과 心統情의 두 方面으로 나누어 이야기될 수 있다. 우선 心이 性를 統攝한다는 것은 心이 性을 認知하고 統攝하여 心속에 이 性을 具備하는 것이며, 또 心이 情을 統攝한다는 것은 心이 實際로 情을 거느리고 또 이를 發用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朱子의 心性論 전체의 내용을 살펴볼 때, 朱子의 性理義는 '단지 理'의 性理이며, 그러기에 心, 神, 寂感과 하나로 통합될 수 없다. 이는 朱子가 말하는 太極의 理가 비록 超越的인 所以然으로서 存在의 理를 설명하고는 있으나, 이 理는 단지 하나의 靜態的인 것으로 직접能히 生化의 妙用을 일으키지는 못하고, 오히려 이러한 生化動靜의 妙用은 氣에 있기 때문이다. 이 결과, 心과 神은 氣에 속하게 되어 理와 氣는 둘로 나누어지며, 心과 性 역시 각각 서로 다른 두 층차(形上과 形下)에 屬하게되며, 道德實踐 活動中의 性理의 역할도 心으로 轉換되게 되어 결국에는 靜養動察과 卽物窮理의 工夫에 힘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로서 朱子의 心性義理는 비록 하나의 새로운 系統을 確立하기는 했으나, 이는 단지 伊川 한 사람만의 思路를 順承해서 완성된 獨特한 型式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곧 宋儒의 心性義理大流와는 상당한 差異가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출처] 朱子의 心性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