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이 '여자의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많나보다.
특히 다른 성에 대한 공격할 '꺼리'를 찾는 와중에.
남성성, 여성성 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이 후로
그 전사와도 같은 공격성을 겪어 본 사람이라면 깊이 알고 싶지 않아 되려 한걸음 물러서버리게 되는 자신을 다독이기 까지 하여 그 안을 들여다 보아야 하는. 그리하여 그 '전사'들이 사실은 타의에 의해 그렇게 '강인한 살결'을 가지게 되었슴을 알기까지,
또한 그 연후에라야
그것이 '인류: ' 의 문제이며,
실재하는 차별이라는 보이는 사건에 기대어 자신의 의도를 적든 크든 포장하지 않은 채로 "왜"의 영역으로 조용히 집중할 수 있는 공감을 이끌어 내는 출발이 되지 싶다.
이성에 대한 서로의 칼을 거두지 않는 한
왜 남자는? 왜 여자들은?
하는 이유 자체에 대해, 내 안에서 왜 그러한 방향성을 가지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기 어려운 것이 당연.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사건'이 직접적인 줄로만 알고, 그 근저가 무엇인지, 되려 그리 보려하는 이를 다른 눈으로 보게 되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주 우습게도,
세포가 원하는 그 말초적 이끌림 을 '대상화'하는 사람을 소위 '수행자' 수준처럼 여기는, 나의, 우리의 사고 저변에 어디에나 깔려있는 그 중심성- '잣대'의 갈구 : 존재를 "바라봄"과 그리 다르지 않게 여겨진다. 물론, 그 '여기는'의 순간의 다양성:한계에 대한 이해를 기본으로 하고.
간단하고 명료함을 앎의 한 줄기로 '잣대'화 한 사고로는, 즉, '이해가능한', 하버마스.
논의 되어 보지 않던 '깊은'? 곳은 새로이 '판'을 펼치지 않는 한 설명되지 않는다.
우습다고 표현한 것은
이 '판'의 펼침을 위한 논리의 전개와 공고화 의 과정이 또한 그 자체로
또다른 하나의 중심이 되어 버리는 것.
"앎음알이의 적층" 이 굳이 한계를 가진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이해하기 쉬운 수준에서
이러한 딜레마가 늘 있기 때문이라 여기며, 이는 어디에나 어느 순간에나 '의도'의 발현과 그 시작하기와 함께 따른다.
.
논리적 합리적 이라는 허울을 벗어버리지 않는 한
원래 바라는 바대로
실재 의도를 비출 수 없다.
진실한 것은,
이 단어 자체에서 '진실'의 구도와 큰 그림을 떠올리는 사람이라면
왜 진실해야 하냐 하는, 그리고, 보이는 이면에 또는 제대로 본다는 의미로서의 '진정한 것이 존재한다'는 자신의 필터의 존재부터 다독거리고 난 후,
마음 을 속이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이라는 오래된 계륵 같은 말을 되씹어 볼 만 하다.
강요와 그에 의한 힘, 그리고 그 'ㅇㅇ' 에 대한 반발.
난 '그것'이 싫다.
하지만 보다 더 싫은 것은
그 어리숙하지만 솔직한 마음을 이용하는 마음이 있는 자리이다.
ㅍㅎ 이 ㅍㄹ적이긴 해도.
그게 '자연 : ' 인걸. 무 ㅓ.
'하고 싶음 과 하기 싫음' 이 어디에나 있고, 모든 행위( 작, 위, 업)의 근저에 있다는 이야기.
또한 이 것은 예를 들어 '너의 것'이라고 시작한 이 글의 출발을 이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되돌아 볼 수 있느냐는 것.
시간적 위계로서 '내', '너'가 항상 동일한 상태로 유지할 수 없음 = 무상 과 공간적 위계로서, 이해쉬운 예로 처해진 '상황'에 따라 동일하다 여기는 '자신'일지라도, 자신의 '의지' 아닌 '행동'을 바라볼 때에라야 비로소 보이는 그때 그때 다름 = 무아 라는 '실상'에 대한 '동의' 하에서,1
내가 그리 여기는 것, 그렇다고 여기는 것을 나인 줄, 나의 실체인 줄 안다는, 다시 말해 그것이 곧,
내가 고집하는 것임을 알아차리는 것
말을 한 이, 글을 쓴 이가 그러할 것이다 하는 그 자리 와 다르지 않다는 의미.
말에서,
글에서
한 걸음 떨어져 그 의미를 대할 수 있느냐는 의미.
(cf. 말의 눈부신 빛. 할렐루야)
어떠한 형태의 표현이든 그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슴이 곧.
그리하여, 관계만 존재할 뿐, 실체가 있을 수 없는 것.
일반론이 의미없슴을 말하고 있는 순간에 오히려 그리하는 그 기전.
ㅈ ㄹ 도 고상하게 한다 참.
180319
솔직하게 원하는 것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스스로 그걸 잘 모르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다친 마음을 위로해 줌이 먼저라고 실제로 이야기를 전한다 해도
듣는 이의 '자리'가 어디인지가 우선이듯이,
흐르는 물결은 거스를수 없는 이유는 차치하고,
다만, 전체를 보려는 의지 없이, 소위 찔린 칼, 그 상처만을 가리키려 한다면,
무리짓기 에 의지하여
오히려 당하던 사람이 그 받고 싶어하던 '배려'를
또 다른 폭력으로 보이지 않게 강요해버리게 되면
실제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자리를 보이는 단초가 될 뿐.
겉으로 어떻게 보여왔는지 - 어떻게 보이려고 노력해왔는지 - 는 중요하지 않게된다.
이는 아마도, 반대편의 힘, 늘 '타파'하고자 하던 소위 '현재ㅡ문제'들이 가지는
구조적 '있슴'의 메커니즘이 그 기전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슴이리라.
그리하여, 이 문제에 있어서의 혁명은
실제 물질계에서의 개념 - 기전 - 구름 과 다를 수 밖에 없슴을.
인식의 변화.
마음 바꾸기.
이를 솔직히 스스로의 바꿈으로 겪어보지 않았다면
(눈으로 보고, 글로 읽고, 말로 들어 "아는 것(所知)"이 아닌)
이 과정에 필요한 '시간의 길이' (積層)가
저마다 다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눈치채기 어렵다.
거의 모든 '강요'의 기전 하에서,
당장 내 감정이 후련해지도록 하는 소위 되갚음은
전혀 본질이 아니듯이.
- 실제로는, 무상 무아 모두 시공간적 개념 포함으로 이해. 무상도 마찬가지지만, 무아를 이해한다면, 저 사람, 타인 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이해가 같이할 것이라는 것. 대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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