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과 !/나누기 :

집 에 ㄱ ㅏ 고 싶 ㄷ ㅏ

GraU 2015. 7. 7. 14:52

 

 

 

 

이제 당신은 두 가지 것을 본다.

 

하나는 욕망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 왜냐하면, 모든 것은 구하지 않아도 이미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선물로 주어져 있다. 그것을 얻으려고 거지가 될 필요는 없다. 그대는 제왕이다. 신의 왕국이 그대 자신의 왕국이다. 모든 것이 이미 다 주어져있다. 그런데도 그것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대가 그것을 즐길만한 용기와 의식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욕망은 아무 쓸데도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욕망은 전혀 필요치 않다. 그대는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을 욕구하고 있었다.

 

그대가 두번째로 보게 되는 것은 고통을 받고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이 악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된 것도 그들 자신이 선택한 때문이다. 고통은 우리가 선택한 결과이다. 반면에 은총과 축복은 하나의 선물이다. 축복이 우리의 본질인 것이다.

 

괴로워하고 고통을 만든 것은 우리자신이 빚어낸 결과이다. 고통 속에는  인간의 흔적이 있고 축복 속에는 신의 흔적이 있다. 고통은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대는 이 사실을 발견하고 놀랄 것이다. 고통은 훨씬 더 많은 노력과 땀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고통받는 것은 그대 자신의 본질이 아니다. 그러나 그대는 아직도 고통을 만들어내고 있다. 본질에 어긋나게 가는 일은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날이면 날마다. 해가 바뀌면 해가 바뀔 때마다. 그리고 이 한 생을 마치면 또 다른 생에서 계속해서 더 많은 고통을 만드느라 애를 쓰고 있다.

 

그대가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면, 기억하라.

 

그대는 그것을 그대 스스로 만들고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만일 그대가 축복받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 그것은 그대가 한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저편 너머에서 부터 쏟아져 내리는 것이다. 고통은 인간이 만든 것인 반면 환희는 신이 만든 것이며 그대 자신의 본성, 그대가 존재하고 있는 바탕이다. 이것을 발견할 때 그대는 집에 도착한 것이다.

 

 

 

 

 

 

<고통은 우리가 선택한 결과이다 축복은 우리의 본질이다>

 B.S.오쇼 라즈니쉬, 삶은 가장 큰 웃음이다, 김춘수 역, 도서출판 백암, 1991, p.60

 

 

 

 

 

 

 

 

 

 

괴로와  -> 괴로워 로 바꿔씀.

조 때에는 아마도  ㅗ +ㅏ ,  ㅜ + ㅓ  이렇게 맞춰 쓰는 게 정답이었었던 것 같다.

모음조화? 참 열심히도 외웠는데.

국어 교육이 아직 그런가 보던데  조카 보니까.

 

 

 

 

힘이 깔린

국어 맞춤법 통일안, 개정안 들.

 

요새 애들 말로  ㄱ ㅐ ㅉ ㅏ ~!

이런거 볼 때마다. 

 

 

 

 

'강요'의 코드 라는 말 자체를 만들어 '   ' 을 상정하여 공격하고 있는 '나' 의 근간에 도사리고 있는 '싫음' 즉, '가고 싶은, 갖고 싶은, 되고 싶은, 받고 싶은'  좋은 쪽 (이상향, 질서 : 아상)의 그림자 이리라. 감안하고서 생각나는 바를 몇 자 적으면,

 

 

 

정답을 정해놓고 맞추기 좋아라 하는, 통칭 '지적 유희'에 대한 본능적 갈구는 차치하고서라도, 이 도(度, 법도, 그릇, 잣대)1를 좌지우지 하는 '힘'에 대한 갈구가 어느 수준에서 비롯되는지를

 

소위 '지성인'이라는 무리 들조차도, '도량형'을, 나아가 권좌에서 '군림'하며  제멋대로 휘두르는 칼처럼 쓰던 옛 폭력의 시대와 다름 없이,  끼칠 영향에 대한 배려 없이, 또한 그것이 마치 '공기'가 그러하듯이 사회 와 단체, 가족 그리고 각각의 개개인에게까지 스물스물 번져서 스며듦에 대한 고려없이 그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는 '문제' 의 근본에 대한 접근을 할 줄 모르는 수준의 학생을 가르쳐야 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님에, 더우기 일단 답부터 내놓아라 하는 '힘의 그물망', '착취의 구도' 를 소위 '교육'의 현장에서 그 스키머 로서 그들 속에,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서로서로 모른 채로 들어 앉혀 놓고 있음에, 더욱이 당장 눈 앞의 문제를 대할 때는 '내가 안그랬는데?' 그러면서 서로를 죽일 듯이 찢어 놓지.

 

당한 사람도 이 쪽에 와서 또 다른 스펙트럼으로 누군가에게 횡포를 부리게 되고.

불만들은 켜켜히 쌓여 가고.

풀어주는 이는 '약자'들이 되고.

올라 앉은 자리는 점점 공고화되어,

그 구도는 점점 강화되고.

 

한바탕 큰 난리가 나서 뒤집어 지면

몇디케이드는 잠잠하다가

또 역시 구체화 되어버리는.

 

 

 

.

.

.

 

 

도대체가  '수평적'인 것을 겪어 본 적이 없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 인 것 처럼 보인다.

또 한편 내려서서 보면, 팽배한 불신 자체가 모든 현상적 '사건, 사고'의 기본임을 보기 싫어 하는 것이고, 그 근저에 있는 이 '강요의 코드'에 의한 폭적적 횡포 - ; 마음; 이 있슴을  소위 '솔직하게', 마음을 속이지 마라는 말의 의미에서 처럼,  대의명분이나 내세워지는 페르소나, 또는 아상에 기대어서 스스로들 숨겨놓고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겠제. 

 

네거티브를 경험하여, 다친 상처들이 많음은, "힐링 힐링, 개나 소나 힐링이여" 하는 부정적 푸념이 공공연화 될만큼 지금 우리 주변 천지에 '보편성'2의 그것처럼 여전히 존재한다.

 

개개인의 입에서 편하게 이런 말들이 나온 것이 '개선' 이라 본다면

 

 

 

 

 

 

 

잘~ , 조금 깊이 보면. 약간의 '시간' 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소위 '인류' : 인간 이  이러지 않았던 적이 있을까 하고 단순화 시켜버릴 수도 있겠지만, 일반화 라는 개념을 감안하고서, 그 것은 언제든 그렇게 말해버릴 수 있는 거. 일단은

 

약간은 큰 줄기에서

신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그 후대에 권력, 또는 국가:동양적 에 그리하고

또 그 이후에는 돈 에 그리하는 경향성, 패턴은 존재한다고 볼 때.

 

 

이 종교의 시대, 폭력의 시대 또 자본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우리 몸에 아직도 남아 있는 것과

변해 온 것들을 잘 살펴보면

 

단순히 시작에서 처럼   짜증으로 ,  화로 끝날 일인지,  그 연장선상에서 

소위 '바로 잡아야 겠다'는 구도로 이어갈 것인지 는 재고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디자인에 있어서 처럼

가볍게 다루지 못하는 것이

 

어느 순간엔가

모든 '일'이 디자인으로 여겨지게 된 것을 몸으로 느끼건, 누군가의 '알림'으로 알아채건간에 큰 수레바퀴의 한 사이클에서의  변화는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않으면,

사이클의 주인공들이 바뀌게 된 '지구의 기억'이 증명되지 않는 한  몰라 : 없는 것. 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비인부전.

 

구르는 것이 어쩔 수 없슴은

뜻을 전할 이를 고르지 못함과 같은 이치인가 싶어도.

 

그또한

나잘났다와 다르지 않겠지

 

 

'알아봐 다오'의 한 없는 확장이 어디까지 일지 는

'진정으로 원하는 바'와의 힘겨루기? 에서 결판날까

 

알 ㄱ ㅔ  ㅁ ㅓ ㅇ ㅑ

 

배고프다.

 

 

 

 

 

 

 

 

 

 

 

비가 많이 오려나. 무릎 아프니 짜증. 짜증에 글도 폭력적.

 

아마도 그도 그랬을 듯.

그래서 구른다고 하나보다

 

 

 

 

 

 

 

 

 

 

 

  1. 보통 '정도를 가야지', 정도를 지켜야지 하는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정도는 이 의미에 가깝다. 실제 道는 '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을 주로 하는 것 또한 그만한 말을 할 자리에 내가 있슴을 보이고 싶은 것일 뿐. 자신이 말하는 바 정도에 대해 잘 안다면, 실제 떠들 필요가 없다. 그 자리에서 그 '일'을 하고 있으면 되니까. 이사무애. '이'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사'로 바로 보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2. 신화적 보편성에서 과학적(합리적)보편성으로 갈아타기. 근저에 깔린 '힘, 무리짓기'는 그대로 이므로 그나물에 그밥이 된 것.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