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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쉬기] 어느 큰스님(사야도)의 법문 모음 : 50 가지 법어 : u tejaniya : 위빠사나, 사띠

GraU 2015. 8. 16. 16:38

 

 

http://sayadawutejaniya.org/

http://www.dharmaseed.org/teacher/246/

http://blog.daum.net/vipa4na/5188489

 

 

http://sayadawutejaniya.org/lineage/

Shwe Oo Min Sayadaw

 

https://www.youtube.com/watch?v=cHddzw9ZH74

 

http://www.buddhanet.net/medburma.htm

 

 

 

http://cafe.daum.net/mybulove/6gOA/1497?q=%BD%A6%BF%EC%B9%CE%20%C0%C7%20%B6%E6&re=1

 

 

빨리어 관련 단어 : 용어 참조 

http://blog.naver.com/fromme7866/220204860146

http://blog.naver.com/fromme7866/220204858433

 

 / 번뇌를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카테고리 읽어볼 것. * "생각의 양식 1-11"

 

깜마[kamma] : 의도적 행위. (). , ()()()짓는 업()

꾸살라[kusala] : (). 건전한. 유익한. 능숙한. 이로운   (참조: 아꾸살라)

낄레사[kilesa]: 번뇌(煩惱). 마음의 불선한 기질. 치의 나타남 (참조: 로바도사모하)


나마[nāma]: 정신. 마음(웨다나산냐상카라윈냐나의 집합). (). 정신적 과정


나마 루빠[nāma-rūpa]: 정신(마음)물질. 명색(名色). 정신적 물리적 과정


냐나[ñāṇa]: 지혜(智慧). 앎  (유의어: 빤냐)


    니밋따 ?


다나[dāna]: 보시(布施). 기부. 관대


담마[dhamma]:

(, 불교의 교리)

자연적 법칙, 본성 그대로의 모습

대상, 사물, 현상


도마낫사[domanassa]:  불만족.  어떤 종류의 불만족한 정신의 느낌.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


도사[dosa]: 성냄. 진심(嗔心). 어떤 종류의 혐오감이나 싫어함 (슬픔, 공포, 저항 등을 포함)

 

둑카[dukkha]:

(). 고통. 괴로움. 불만족. 아픔

변하는 것(항상 하지 않은 것)이 괴로움(출세간의 고통)

모든 존재, 모든 조건 지워진 현상의 불만족스러운 성품

존재의 3가지 보편적 특성의 하나 (참조: 아닛짜아낫따)

둑카를 깨닫는 것은 자유를 얻게 하는 통찰지혜(paññā)

 

딧티[diṭṭhi]: 견해


딴하[taṇhā]: 갈애(渴愛) (유의어: 로바)


로바[lobha]: 탐욕(). 좋아하거나 탐하는 것 (유의어: 딴하)


루빠[rūpa]: 물질. 형상. , (), 물질적 현상. 물리적 과정.

메따[mettā]: 자애(慈愛). 이기심 없는 사랑. 조건 없는 사랑


모하[moha]: 어리석음. 무지. (). 진실을 보지 못함 (유의어: 아윗자)


밋차 딧티[micchā diṭṭhi]: 잘못된 견해


바와나[bhāvanā]: 수행. 수행의 향상. 명상. 정신적 발전


바와나마야 빤냐[bhāvanāmaya paññā]: 직접적 체험을 통해 얻어진 지혜 또는 앎. 수혜(修慧)

바왕가


비쿠[bhikkhu]: 비구. 스님. 사문(沙門). 완전히 출가한 성직자. 승가의 일원


빠띠짜 사뭇빠다[paticca samuppāda]: 연기(緣起). 조건 지워진 생성


빠라마타[paramattha]: 구경법(究竟法).  궁극적 실재


빠라미[pāramī]: 완성(완벽). 바라밀(波羅密)


빤냐[paññā]: 지혜. (). 통찰지(洞察智)  (유의어: 냐나)


빤냐띠[paññatti]: 상대적(개념적) 진리, 개념(槪念). 명칭


빨리[Pāli]: 불교성전(Pāli Canon)이 처음 기록될 때 사용된 언어


삐띠[pīti]: (). 환희. 기쁨. 희열

 

사띠[sati]: 알아차림. 마음챙김. (). 마음(주의) 기울임. 주시. 기억. 관찰


사마디[samādhi]:   삼매(三昧).   ().    조용함,   고요하고 안정된 마음


사마타[samatha]:  집중.  평온.  고요. ()


산냐[saññā]: 인식. (). 지각. 표상작용


삼마[sammā]: 바른

삼마 딧티[sammā diṭṭhi]: 바른 견해. 정견(正見)


삿다[saddhā]: 신심(信心). 확신. 믿음


상카라[sankhāra]: (). 반응. 의도. 정신적 의도의 형성


소마낫사[somanassa]:  기쁨.  어떤 종류의 기쁜 정신적 느낌


수따[sutta]: 세존의 가르침, 경전


수따마야 빤야[sutamayā paññā]:  읽고 들어서 얻은 지혜  또는 앎. 문혜(聞慧)


수카[sukha]: 즐거움. (). 행복감

실라[sīla]: (), 도덕, 윤리적 행동강령, 고결한 마음가짐


아꾸살라[akusala]: 불선(不善), 불건전한, 능숙하지 못한, 해로운

 

아낫따[anatta]:

무아(無我).

가 없음. 개체 없음. 영원한 존재 없음. 자아(自我)가 존재하는 독립된 개체가 없음

어떠한 것도 원인 없이 스스로의 의지로 일어나거나 한 가지 원인으로부터 일어나지 않음. 어떠한 것도 독립적으로 홀로 존재하거나 변화하지 않음

존재의 3가지 보편적 특성의 하나 (참조: 두카아니짜)

아낫따를 깨닫는 것은 자유를  얻게 하는 통찰지혜(paññā)

 

아닛짜[anicca]:

무상(無常).

모든 조건 지워진 현상은 영원하지 않음. 존재로 생겨나는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져 감

존재의 3가지 보편적 특성의 하나 (참조: 둑카아낫따)

아닛짜를 깨닫는 것은 자유를 얻게 하는 통찰지혜(paññā)

 

아비담마[abhidhamma]: 논장(論藏). 승법(勝法). 마음의 전개과정과 특성들에 관한 불교의 경전으로 인정된 서술로 남방에서 전승된 불교 교학체계, 빨리어로 전승 됨


아윗자[avijjā]: 무명(無明) (유의어: 모하)


앗따[attā]:  자아(自我).  에고.  개인


요니소 마나시까라[yoniso manasikāra]:

①  바른 마음.  바른 마음가짐.  바른 마음 기울임

②  지혜로운 숙고. 이치에 맞게 마음을 일으킴


우뻭카[upekkhā]:

①  중립적 느낌과 감각(웨다나),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과 감각

②  평온.  평등심.  평정심.  ().  선한 정신적 상태


웨다나[vedanā]: (). 느낌. 감각. 감수 작용 (참조: 소마낫사도마낫사우뻭카)


위나야[vinaya]: (). 출가자의 행위규칙과 원칙

위리야[viriya]: 정진(精進). 노력. . 지혜롭게 노력함


위빳사나[vipassanā]:  ().  통찰.  통찰 명상


윈냐나[viññāna]: (). 의식. 아는 마음


인드리야[indriya]: 감각기능. (). 다섯가지 정신적 기능 (삿다위리야사띠사마디빤냐)

쟈나[jhāna]: (). 명상적 몰입. 선정(禪定)


쩨따시까[cetasika]: 마음의 요소,  심소(心所 : 아비담마에서 분류한 52가지 심소, 어떤 것은 업의 측면에서 중립적이고 어떤 것은 선하고 어떤 것은 불선함)


찐따마야 빤냐[cintāmaya paññā]: 생각하고 사유(思惟)함으로써, 지적 분석을 통해서 얻어진 지혜와 앎. 사혜(思慧)


찟따[citta]: 마음. ()


찬다[chanda]: 소원(所願). 선한 의지. 열의. (). 대망. 원력

칸다[khandha]: 더미. 무더기. 집합. () (오온(五蘊): 루빠웨다나산냐상카라윈냐나)

[출처] 부록 #2. 빨리어 용어 해설-1|작성자 봄봄좋은날

 

 

+ 내마음대로

 

초기불전연구원 자료실에서 훔쳐옴.

http://cafe.daum.net/chobul/19wJ/828  : 한글, 피디엪 파일

 

 

 



 

 

오늘의 사야도 말씀  1~50
[쉐우민 우 떼자니야 사야도 법어]

 

 

 

 

자근 청현(慈根 淸玄) 번역

 

 

 

 





1.[수행이란]


수행이란 오직 마음이 하는 일입니다.

몸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몸의 힘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마음 속에

사띠 · 사마디 · 지혜가 1

있도록 하는 일입니다.

 

마음가짐이 바르다면 사띠·사마디·지혜가 이미 있습니다.


 

수행에서 바른 생각은 아주 중요합니다. 생각이 바르다면 나머지 요소 들 역시 바르게 될 것입니다. 선법의 원인은 요니소마나시카라(올바른 마음가짐, 지혜로운 고찰)이고, 불선법의 원인은 아요니소마나시카라(잘못된 마음가짐, 지혜롭지 못한 고찰)입니다.

몸과 마음을 ‘나’라고 생각하며 수행한다면 번뇌의 힘만 더 강해질 뿐입니다. 원하는 마음, 못마땅한 마음이 더 강해질 뿐입니다.

 

모든 것이 다 법의 자연적인 이치라는 것을 이해해야 번뇌의 힘이 약해집니다.

 

 

 

 

 

 

 

 

 

2. [매순간 수행하십시오]


 

삶 속에 법이 없다면 비법이 있게 됩니다. 알아차림이 지속되도록 노력하십시오. 지속하다 보면 스스로 알게 될 것입니다. 법의 맛을 아직 모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알고 지낸다면 법이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만족스럽고 자연스럽게 될 것입니다.
모른다면 불안하고 들뜨게 될 것입니다. 항상 알고 지내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지혜로써 반조하십시오. “이익이 있는가? 없는가?” “적당한가? 적당하지 아니한가?” 수행할 줄 아는 지혜없이 이해하는 지혜는 생기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화장실에서도 수행하라고 하셨습니다.
매순간 수행하십시오.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다 자연적인 이치입니다.
사람이나 중생이 아닙니다.

 

 

 

 

 

 

 

 

 

 

 

 

 

 

 

 

3. [마음가짐]


수행하는 마음이 법다운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중요하기 때문에 반복해서 주의를 주는 것입니다. 법의 마음, 선법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법의 마음, 선법의 마음은 편안합니다. 긴장되지 않고 거칠지 않습니다.

 

선법은 허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평온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래야만 법입니다. 수행은 마음상태를 가장 먼저 점검해야 합니다. 마음가짐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법을 원한다면 힘들어 질것입니다.


법은 무엇을 원하는 욕심(로바)과 정반대입니다. 관찰하는 마음 속에 욕심(로바2)이나 싫어하는 마음(도사3)이 포함되면 법이 아닙니다. 로바·도사가 포함되면 힘이 많이 들어갑니다. 피곤해집니다.


그러므로 불필요한 힘을 빼야 합니다.

 

 

그러므로 ‘일어나는 모든 것은 다 법의 자연적인 이치이다. 일어나고 싶은 대로 일어나라’하는 마음가짐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면 됩니다.

 

 

 

 

 

 

 

 

 

 

 

 

 

 

 

 

 


4. [관심을 가지세요]


관심을 가지세요. 정말 최선을 다해서 수행할 때 법이 발전을 합니다.

다른 이를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수행하는 것입니다.

 

걸을 때, 앉아 있을 때, 일상 속에서 바깥 쪽에 주의를 두지 마십시오.

자신의 마음 속에 주의를 두십시오.

 

오래도록 지속하다 보면 자연적인 성품이 될 것입니다.

 

수행자의 할 일은 오직 세가지 뿐입니다.

 

첫째, 일어나는 것들에 대해서 견해를 바르게 하고,
둘째, 일어나는 것들에 대해서 알고 있도록 하고,

셋째, 이미 있는 사띠(알아차림)를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띠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바로 위리야(노력)입니다.
느슨해지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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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생각]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생각하는 줄 알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 생각을 대상으로 관찰하지 못할 때는 생각하는 줄 알면 몸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렇지만 자주 자주 생각을 인식해 줘야 합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알고, 생각하는 줄 알게 되면 몸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생각에 대한 관찰을 많이 해서 생각을 대상으로 이해하게 되면

생각 속으로 빠져들지 않습니다.

 

생각하는 것은 대상이고,

생각하는 줄 아는 것은 마음입니다.

 

 

 

 

 

 

 

 

 

 

 

 

 

 

 

 

 


6. [마음]

 

마음에 대해서 모른다면 의미 있고, 평온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왜 괴로운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평온해질 원인이 없습니다.

 

평온하고 싶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왜 괴롭고 왜 평온하지를 모르고서는 평온해 질 수 없습니다.


 

모든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신의 마음에 대해 아는 일입니다.

 

 

 

 

 

 

 

 

 

 

 

 

 

7. [일어나고 싶은 대로 일어나라]

 


한 번 알 때마다 모르는 것을 없앱니다. 아는 것을 확장시킵니다.

 

아는 것에 대해 가치를 두십시오.

일어나게도 하지 말고, 사라지게도 하지 마십시오.

단지 알도록 하십시오.

 

‘일어나고 싶은대로 일어나라’하는 마음가짐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할 때 수행하는 것이 편안해집니다.

 

 

 

 

 

 

 

 

 

 

 


8. [대상과 아는 마음]

 


자신이 알아차리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습니까?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대상과 아는 마음은 항상 만나고 있습니다.

 

대상을 알고 계십니까?

대상만을 알고 계십니까?

대상을 아는 마음을 알고 계십니까?

대상 하나만을 알고 계십니까?

대상을 알고 있는 마음을 아십니까?


사띠가 있다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알 수 있습니다.

대상과 아는 마음을 구분해야 합니다.


 

 

 

대상은 알아차려지는 성품이고, 아는 마음은 알 줄 아는 성품입니다.

두 가지의 성질이 다릅니다.

 

 

 

 

 

 

 

 

 

 

 

 

 


9. [아는 마음]

 

 


아는 마음은 보아야 하거나 만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아는 것은 지혜의 일입니다.

지혜가 있어야 마음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집니다.

 

몸은 지혜가 없어도 알 수 있습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것은 관념적인 차원에서 알기 때문에 쉽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상태나 마음이 작용하는 것을 아는 것은 지혜의 일입니다.

 

 

생각하고, 느끼고, 의도하는 것들 을 알아차린다면

점점 마음을 볼 줄 알게 될 것입니다.

 

 

 

 

 

 

 

 

 

 

 

 

 


10. [새 것]

 


지금 현재 알고, 알고 하는 것이 다 ‘새로운 것’입니다.

알아차려지는 것도 ‘새 것’이고,

아는 것도 ‘새 것’입니다.

 

관념적인 차원에서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연적인 이치의 차원에서는 드시 변합니다.

 

알아차려지는 것도 자연적인 이치이고, 아는 것도 자연적인 이치입니다.

 

자연적인 이치를 자연적인 이치로 이해한다면

‘새 것’이 ‘옛 것’으로 변해간다는 사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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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자신이 가야 할 길]

 

 

자신의 자리에 머물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가야 합니다.

 

 

대상과 마음,

대상과 아는 마음,

대상과 사띠(알아차림) 중에서

 

자신이 머물러야 할 자리는

 

아는 것을 다시 아는 것입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란

 

견해를 바르게 하고,

사띠가 있도록 하고,

이미 있는 사띠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길이란 ‘중도의 길’을 의미합니다.

 

자연적인 성품을 자연적인 성품으로 이해했을 때

도의 길을 걷게 됩니다.

 

 

 

 

 

 

 

 

 

 

 

 

 

 

 

 

 

 


12. [법을 보호해야 법이 보호합니다.]

 


법을 보호해야 법이 보호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법은 정직합니다. 법을 아끼고 보호할 때 법이 보호해 줍니다.

법을 중요시 여기지 않는다면 법도 다가오지 않습니다.


사띠, 사마디, 지혜가 지속 되어질 때 마음 속에 사띠, 사마디, 지혜가 가득할 것입니다.

이것을 법이 보호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법이 없다면 비법(非法)이 있을 것입니다.

법과 비법, 이것뿐입니다.

 

정(正)과 사(邪), 바른 것과 그른 것,

 

이 것 뿐입니다.

 

 

 

 

 

 

 

 

 

 

 

 

 

 

 

 

 


13. [법의 자연적인 이치]


법의 이치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끊임없이 지속되게 해야 합니다.

수행이 자연적인 성품이 되었을 때 법에 대해서 이해를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의도적으로 수행을 하고 있다면 법의 이치를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자연적인 성품이 수행을 하고 있다면

법의 이치를 조금씩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14. [이해하기 위해 수행합니다.]

 

주목적은 고요함이 아닙니다.

 

 

 


수행자들이 평온함이나 고요함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목적은 고요함이 아닙니다. 

 

지혜가 생기도록 하는 것이 주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알기 위해, 이해하기 위해 관찰해야 합니다.

지혜로써 알아차린다는 것은 분명하게 깨어있는 것을 말합니다.

 

관심이 있습니다.

 

원하는 대로 일어나게 하지도 말고,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지게 하지도 말고,

 

일어나는 대로 내버려두십시오.

 

 


일어나는 모든 것이 다 법의 자연적인 이치입니다.

좋은 것도 법이고, 안 좋은 것도 법입니다.


평온함도 법이고, 괴로움도 법입니다.

꾸살라(선법)도 법이고, 아꾸살라(불선법)도 법입니다.

 

음이라면 다 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마음이든지

 

마음은 마음일 뿐입니다.

 

 

 

 

 

 

 

 

 

 

 

 

 

 

 

 

 

 

 

 


15. [대상은 이미 있습니다]

 

 

대상은 이미 있습니다. 생겨나고 있습니다. 덥고, 춥고, 부드럽고, 딱딱하고, 보이고, 들리고, 생각하는 것 등이 다 대상입니다.

 

사띠가 있도록 노력하고, 아는 힘이 좋아지도록 노력하고, 아는 것이 지속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자신이 노력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자신이 노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려 마음이 방황하곤 합니다. 왜냐하면 번뇌가 들어오게 되면 대상 쪽을 향해 쫓아다니기 때문입니다. 로바(탐심)가 대상을 쫓아다니고, 도사(진심)가 대상을 쫓아다닙니다. 모든 번뇌는 반드시 대상을 쫓아다닙니다. 번뇌로써 즐기게 됩니다. 로바, 도사, 모하(어리석음)로써 즐기게 됩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알고 있는가?

느끼고(즐기고) 있는가?

 

 

 

 

 

 

 

 

 

 

 

 

 

 

 

 

 

 

 

 

 

 

 


16. [대상 쪽과 마음 쪽]

 


수행을 하는 데 있어서 대상 쪽과 마음 쪽,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대상 쪽은 자연적으로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눈에서 일어나고 있고, 들리는 것은 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눈과 귀의 기능이 좋다면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냄새, 맛, 촉감, 마음상태는 항상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연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럽게 내버려 두십시오.

 

그것들에 관여해서 억제하지 마십시오.

 

통제하지(Control) 마십시오.

 

일어나게도 하지 말고 사라지게도 하지 말라는 말은 대상 쪽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대상 쪽을 일어나게 하고 싶은 대로 일어나도록 노력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원하지 않는 상태라 하여 사라지도록 애쓰지 마십시오. 그것의 성질대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잊지 않도록만 하십시오.

 

알기만 해야 합니다.

 


대상 쪽은 내버려 두십시오.

관여해야 할 쪽은 마음 쪽입니다.

 

견해나 생각,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일에만 관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쪽의 마음은 견해를 바르게 하고, 자연적인 것을 자연적인 것으로만 생각해야 합니다.

 

 

 

 

 

 

 

 

 

 

 

 

 

 

 

 

 


17. [견해]

 

 


보이는 것, 들리는 것을 원인으로 사띠, 사마디가 생기도록 한다면 바른 수행자입니다.

 

보이고, 들리고, (몸에) 부딪히고, 알아지는 대상을 원인으로 로바(탐심), 도사(진심)등이 생긴다면 사띠를 놓치게 될 것입니다. 지혜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경험하는 대상들에 대해서 견해를 바르게 하고, 사띠가 있도록 하는 것은 자신의 책임입니다. 마음이 동요하고 고요하지 않다면 이것을 대상으로 받아들여 관찰해야 합니다. 왜 마음이 고요하지 않습니까? 마음의 자연적인 성품에 대해서 조사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음이 동요하는 것을 바깥 대상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바깥 대상이 주 원인은 아닙니다. 그 사이에 어떤 견해가 있습니다. 그 견해가 잘못되어 있다면 번뇌가 일어납니다.


선법의 마음이 일어나는 원인은 요니소마나시카라(올바른 마음가짐, 지혜로운 고찰)이고, 불선법의 마음이 일어나는 원인은 아요니소마나시카라(잘못된 마음가짐, 지혜롭지 못한 고찰)입니다.


요니소마나시카라는 바르게 생각할 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아요니소마나시카라는 잘못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견, 마나(아만심), 모하(어리석음)로 생각한다면 잘못 된 것입니다. 생각 속에 지혜가 포함되어야 번뇌로부터 벗어납니다. 생각 속에 도사나 사견이 포함되어 있다면 그 생각이 일어날 때마 다 번뇌가 일어날 것입니다.

 

 

 

 

어떤 요기가 말했습니다.

지난 20여년 동안 사람, 중생, 짐승 등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보면 도사(진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인지하고 조사를 했습니다. 도사가 일어날 때의 생각에 유의했습니다. 그리고 그 도사의 원인은 ‘윤회는 나쁘다’라는 견해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잘못된 생각을 지난 20여년 동안 움켜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요기는 ‘윤회’에 대해서 이해를 한 것이 아니라 도사로써 ‘나쁘다’고 규정지었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써 이해한 것이 아니라 도사로써 ‘윤회는 나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도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견해가 잘못 되면 보일 때마다 들릴 때마다 도사가 일어나게 되니 얼마나 피곤한 일입니까? 조사를 했을 때 답이 떠오릅니다. 한가지 견해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의 잘못된 견해에 집착하게 되면 그 견해를 바탕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경험하는 것마다 번뇌가 일어나게 됩니다.


좋은 것이라고 규정(고정관념)지었을 땐 경험하는 것마다 좋다고 여기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렸을 때 모힝가(미얀마 생선국물 국수)를 먹고 좋다고 생각을 해버리면 모힝가를 볼 때마다 로바(탐심)가 일어나게 됩니다. 좋은 것이라고 규정짓게 되면 로바가 일어나고 나쁜 것이라고 규정짓게 되면 도사(진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모하(어리석음)로써 고정관념 지은 것입니다.

 

 

 

자신을 괴롭게 만드는 것은 그 어느 누구도 아닙니다.

자신의 견해, 생각 때문입니다.

 

 

 

 

 

 

 

 

 

 

 

 

 

 

 

 

 


18. [자신을 바꾸세요]

 

 


수행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안을 보고, 자신을 바꾸는 일입니다. 

다른 이를 바꾸기 위해 노력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이를 바꾸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충분한 힘이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다른 이를 바꾸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다른 이를 변화시키려면 여러 가지 원인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바꾸는 것이 가장 쉬운 일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바뀌어지는 것 역시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지혜가 없다면 힘듭니다.

자신의 마음 속에 사띠를 두고 자신의 책임을 진다면 일이 해결됩니다.

 

자신의 마음이 평온한 것도 자신에게 책임이 있고, 마음이 괴로운 것도 자신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마음을 평온하도록 하는 것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마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마음이 괴로워지는 것도 마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마음을 괴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원인이든지, 그 누구이든지 이 마음을 괴롭게 만들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 마음은 자유롭지 못한 마음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에게 와서 마음을 괴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자신의 마음을 괴롭게 만드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마음입니다. 평온하게 만드는 것도 이 마음입니다.

 

자신의 생각, 견해와 아주 많은 상관이 있습니다.

 

 

 

 

 

 

 

 

 

 

 

 

 

 

 

 

 

 

 

 

 

 

 


19. [안다고 여기는 것과 실제로 아는 것]

 

 

안다고 여기고 있습니까? 

분명하게 실제로 알고 있습니까?



안다고 여기고 있다면 모하(어리석음)입니다.

 

 

알고 있다면 분명합니다.

 

 

 

안다고 여기고 있는 것과 

알고 있는 것은 

정반대입니다. 


신의 짐작대로 추측하는 것은 모하(어리석음)입니다. 

사실대로 바르게 아는 것은 지혜입니다.

 

 


어느 외국인 수행자가 말했습니다.

“자신은 옳은 것 같고, 다른 이는 잘못된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제거하십시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믿지 마십시오. 자신의 마음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십시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순간 이미 끝났습니다.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자신이 옳다면 다른 사람은 잘못 된 것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 옳을까요?

 

자신의 마음을 믿지 마십시오.

 

번뇌의 마음은 믿을 수 없습니다. 모하로써 판단한 것은 믿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짐작은 자신의 짐작일 뿐입니다. 모하입니다. 사실대로 바르게 알았을때 잘못된 견해(추측)으로부터 벗어날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짐작, 자신의 마음을 믿고 있습니다.

번뇌의 힘이 강할 때는 자신의 마음을 믿어서는 안됩니다.

사띠, 사마디, 지혜의 힘이 강할 때만 믿으십시오.

 

선법의 마음은 믿고, 불선법의 마음은 믿지 마십시오.

 

 

 

러므로 자신의 마음을 반복해서 점검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대할 때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자신의 견해를 항상 살펴봐야 합니다. 그래야 견해가 점점 바르게 될 것입니다.

 

 

 

 

 

 

 

 

 

 

 

 

 

 

 

 

 

 

 

 

 

 

 

 

 

 

 

 


20. [안의 원인과 바깥의 원인]

 

 


법은 안에 있습니다. 안의 원인이 더 중요합니다. 바깥의 원인은 먼 원인입니다. 바깥의 원인은 가까운 원인이 아닙니다. 정말 가까운 원인은 자신의 안에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으로 인해 일어난 것입니다. 바깥의 원인도 원인이지만 거리가 멉니다.

 

보는 것마다 듣는 것마다 로바(탐심), 도사(진심)가 일어난다면 어떻게 마음이 고요해질 수 있겠습니까?

 

보는 것마다, 듣는 것마다, 먹을 때마다, 냄새 맡는 것마다, 아는 것마다 사띠, 사마디(마음의 고요 혹은 안정됨), 지혜가 생겨난다면 마음이 자유로워 질 것입니다. 고요할 것입니다. 그 고요한 마음으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 무엇을 하면 좋은가? 이렇게 한다면 지혜가 앞선 마음이 됩니다. 처음에 번뇌가 앞섰던 마음이 차츰 지혜가 앞선 마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이 마음이 바뀌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안 좋은 마음들에서 좋은 마음들이 점점 생겨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질이 좋은 마음들이 일어날 기회를 만드는 것이 수행입니다.

 

 

 

 

 

 

 

 

 

 

 

 

 

 

 

 

 


21. [지켜보기]

 


처음에는 몸에 대한 알아차림이 지속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몸에 대한 알아차림을 할 때는 마음이 조금 긴장됩니다.

 

왜냐하면 대상 쪽을 향해 장소를 따라 다니면서 알아차리기 때문입니다.
대상 쪽 을 향해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는 쪽 을 대상으로 알게 되면 대상이 마음 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것들의 자연적인 이치대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대상 쪽을 쫓아다닐 필요가 없게 됩니다. 단지 지켜보면서 대상들이 하나씩 생겨나는 것을 알기만 하면 됩니다. 대상을 쫓아다니면서 알아차리는 것과 지켜보는 것은 다릅니다. 대상은 쫓아 갈 필요가 없습니다.

 

 

편안하게 지켜보면 됩니다.

 

 

 

 

 

 

 

 

 

 

 

 

 

 

 

 

22.[둑카 dukkha 苦]

 


둑카(苦)를 이해하게 될 때

 

처음에는 생겨나는 성품을 압니다. 생겨나는 성품을 ‘자띠 jati(생성)’라고 합니다.

생겨나는 둑카가 보이도록 하십시오. 보이도록 하라는 것이 억지로 보려고 노력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보일 수 있는 지혜가 생기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생겨날 때마다 ‘좋다’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생겨나는 것에 대해 집착하지 않습니다. 집착하지도 않고 좋은 것이라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사람·중생이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에 잘못된 견해가 사라집니다. 생겨나는 것을 둑카라고 이해하십시오. 사마디, 삐띠(희열), 빠사디(편안함) 등의 행복한 느낌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생겨나는 것이 둑카입니다.

 

이렇게 평온한 느낌들을 어떻게 둑카라고 이해하시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둑카는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이해할 수만 있는 것입니다.

괴롭다고 느끼 둑카는 아직 둑카의 특징을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생겨나는 것을 둑카라고 이해한 이만이

겨나는 것에 대해 집착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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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아는 것을 기뻐하십시오]

 

 


견해를 바르게 하고 알기만 하면 됩니다.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어나게 하고 사라지게 하고자 한다면 어렵습니다.

그것들이 일어나는 대로 인식하기만 하면 됩니다.

사실은 인식하기만 하는 것이 쉽지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원하는 대로 일어나게 하는 것이 더 피곤합니다. 

그것들이 일어나는 대로 잊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알고 알고......

 

 

 

눈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보이기만 하면 되지 일부러 가서 필요가 없습니다.

 

 

보인다면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모든 것은 다 법의 자연적인 이치입니다.

좋은 것도 법이고 나쁜 것도 법입니다. 선법도 법이고 불선법도 법입니다. 모든 것이 다 자연적인 성품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좋은 것은 원하고, 나쁜 것은 조금도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과연 법일까요? 


좋다고 여기는 것은 자꾸 원하고, 나쁘다고 여기는 것은 즉시 없애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법일까요? 


일어나는 모든 것이 다 법의 자연적인 이치입니다. 자연적인 성품이지 사람이나 중생이 아니라고 받아들인다면 법의 이치가 된 것입니다. 사람도 없고, 중생도 없습니다. 오직 자연적인 이치만이 존재합니다.

 

자연적인 성품이라고 생각해 준다면 어떻게 되게 하고 싶거나, 사라지게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일어나는 모든 것은 다 원인이 있어서 생겨납니다. 원인과 결과, 무아 등의 이치들이 다 포함됩니다. ‘일어나는 모든 것은 다 자연적인 이치이다.’라고 바르게 생각해 주었을 때 비로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받아들일 수 있어야 관찰할 수 있습니다.

 

 

 

괴로움도 느낌이고, 평온함도 느낌입니다.
자연적인 이치로써 똑 같습니다. 대상으로써 똑 같습니다. 괴로움도 알아차려야 할 것이고, 평온함도 알아차려야 할 것입니다. 생각이 많은 것도 알아차려야 할 것이고 생각이 적은 것도 알아차려야 할 것입니다. 일어나는 쪽은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아는 쪽이 중요합니다. 알면 좋고 모르면 나쁜 것입니다. 아무리 나쁜 마음일지라도 알고 있다면 기뻐해야 합니다. 만족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고 있는 것이 법입니다. 불선법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알고 있다면 법입니다. 


알고 있는  속에 팔정도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바른 견해바른 생각이 작용하고 있고, 

계와 관련된 요소들도 바르게 작용하고 있고, 

바른 사마디 역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번 알고, 한번 알 때마다 팔정도의 힘을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아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24. [나]

 


사람들이 마음을 ‘나’라고 여기는 잘못된 견해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합니다.


알아차림도 ‘내’가 하고, 

아는 것도 ‘내’가 알고, 

느끼는 것도 ‘내’가 느끼고, 

기억하는 것도 ‘내’가 기억한다고 여깁니다.

 

 

알아차림도, 아는 것도, 

모두 자연적인 성품일 뿐입니다.

 

이것이 ‘무아’의 기본입니다.

 

 

 

 

 

 

 

 

 

 

 

 

 

 

 

 

 

 

 

 

 

 

 

 

 

 

 

 

 

 

 

 

 

 

 


25. [사마디]


사마디(마음의 고요 혹은 안정됨)의 원인은 요니소마나시키라(올바른 마음가짐, 지혜로운 고찰)입니다. 견해가 바를 때 사마디가 있습니다.

 

 

집중해서 생긴 사마디는 위험합니다.

 

 

지혜가 없고, 바른 정보가 없을 때 무조건 집중을 한다면 잘못된 사마디가 됩니다. 

견해가 바를 때 바른 사마디가 생깁니다.

 

 

 

 

 

 

 

 

 

 

 

 

 

 

 

 


26. [원인과 결과]


 

원인과 결과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절대로 무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내’가 없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연적인 성품을 자연적인 성품으로 이해했을때, 그리고 원인과 결과의 진행과정을 이해했을 때 비로소 무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혜는 어느 날 갑자기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27. [올바른 마음가짐]


 

생각하는 것이 바르다면 하는 것도 바르게 될 것입니다.

생각이나 견해를 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각이나 견해가 바를 때 정사유가 될 것입니다. 

바른 생각이 바른 대상과 바른 견해 쪽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마음가짐이 바를 때 선법이 됩니다. 

사마디 역시, 마음가짐이 바를 때 생깁니다.

 

집중한다고 해서 사마디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집중하는 마음 속에 탐진치가 포함되어 있다면 사마디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피곤해 지기만 할 것입니다.

 

 

견해가 바를 때 사마디가 생깁니다. 

견해가 바르고,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고, 불만족스러운 것도 없을때 사마디가 생깁니다. 

이것이 위빳사나 사마디 입니다.

 

 

 

 

 

 

 

 

 

 

 

 

 

 


28. [대상 쪽은 내버려 두세요]

 


일어나게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게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대상 쪽을 향해서는 어떤 노력도 하지 마세요. 

대상 쪽은 그냥 자연스럽게 내버려 두세요. 


‘일어나고 싶은대로 일어나라’하는 마음가짐이 되어야 합니다. 

일어나는 쪽은 일어나는 대로 내버려 두세요.

 

알고 있는가 모르고 있는가?

알고 있는 마음 속에 관심이 있는가?

지혜가 함께 하고 있는가?

알고 있는 마음 쪽이 고요한가? 

견해가 바른가?

 

이러한 것을 반복해서 점검해야 합니다. 


알고 있는 쪽이 더 중요합니다. 알아차려지는 대상 쪽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상 쪽은 모르고 있어도 생겨나고, 알고 있어도 생겨납니다. 

대상쪽 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대상 쪽은 자신과 상관이 없습니다.

 

 

대상쪽은 그 것의 이치대로 원인이 있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일어날 일이 있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대상 쪽은 원인이 갖추어져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대상 쪽은 아무것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도 안됩니다.

 

어떻게 할 수 있는 쪽은 마음 쪽입니다. 

마음 속에 바른 견해가 있어야 합니다. 일어나는 대상에 대해서 생각과 견해가 바르게 되어야 합니다. 바른 견해가 있어야 합니다.

관찰하는 마음 속에 바른 마음가짐과 신심, 위리야(노력), 사띠(알아차림), 사마디, 지혜의 다섯가지 힘(五力, bala)7이 함께 작용해야 합니다.

 

사띠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띠가 지속되도록 유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자의 일입니다.

 

 

 


깨달음을 돕는 7가지 요소(칠각지) 중에서 사띠, 위리야(노력), 법에 대한 조사, 이 세 가지를 키워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세가지 원인입니다. 사띠, 위리야, 지혜, 이 세 가지가 계발해야 하는 쪽의 일입니다. 사마디(고요함), 희열, 편안함, 평정심은 결과로써 오는 법입니다. 할 수 있는 쪽은 원인 쪽이지 결과 쪽이 아닙니다. 그래서 칠각지 중 앞의 세 가지는 원인이고 뒤의 네가지는 결과입니다. 원인 세가지를 계발해야 합니다. 


사띠가 있어야 하고, 

위리야(노력)가 있어야 하고,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은 이 세 가지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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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법이란]


법은 그렇게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속적으로 해 나간다면 법이 말을 할 것입니다.
단지 지속적으로 해 나가고, 관심을 가지는 것만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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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마음의 습관]

 


마음의 자연적인 이치는 사용을 하게 되면 힘이 더 강해집니다.

허용을 많이 하면 할수록 영향력이 강해집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도사(진심, 화)가 왜 이렇게 강한가? 로바(탐심)가 왜 이렇게 강한가?

많이 허용을 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강한가 하면 틈만 보이면 이미 일어났습니다.

 

 

 

리지 않던 것이 들리면 이미 일어났습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면 이미 일어났습니다.

 

번뇌가 마음 속에서 생겨나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가 하면 이미 자연적인 성품이 되어 있습니다.

 

 

따로 연습을 해 줄 필요가 없습니다.

오랜 세월 연습을 해 왔기 때문입니다.

 

 

화를 잘 내는 이들은 화내는 연습을 자주 했기 때문에 도사가 강할 수 밖에 없습니다. 로바(탐욕)가 강한 이들은 로바가 생겨날 때마다 내버려 둔다면 가속도가 강해져서 로바의 힘은 점점 더 강해지게 될 것입니다. 


와 마찬가지로 번뇌의 반대가 되는 사띠, 사마디, 지혜가 일어날 기회를 자꾸 허용한다면 사띠·사마디·지혜의 힘이 점점 강해질 것입니다. 일어나면 이미 알고 있고, 일어나면 이미 이해하고 있도록 수행해야 합니다.

 

 

 

 

 

 

 

 

 

 

 

 

 

 

 

 

 

 

 

 


31. [일해야 하는 쪽]

 


수행을 한다는 것은 마음이 작용하는 쪽에서 일하는 것입니다.

현상이 일어나는 쪽은 그것들의 가속도대로 생겨날 것입니다.

현상 쪽은 일어나는 대로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자신이 수행해야 하는 쪽은 지금 현재 생겨나는 마음 쪽입니다. 


알아차림이 있도록 하고, 

지혜가 함께 하도록 노력을 하고, 

바른 견해를 적용하는 일만이 


지금 현재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지금 현재 일해야 하는 마음 들입니다.

 

 

일어나는 것은 과거의 원인들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법의 자연적인 이치대로 그것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보이도록 하려면 일하는 마음 쪽의 힘이 강해져야 합니다. 보일 수 있을 때 보이고, 이해할 수 있을 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는 이해할 수도 없고,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는 보고자 할 수도 없습니다. 이해할 수 있을 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면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는 마음 쪽의 힘이 강해지도록 수행해야 합니다.

 

 

 

보는 마음 쪽의 지혜의 힘이 강하면 강한 만큼 일어나는 마음들도 청정합니다. 보는 마음 쪽 에 지혜가 포함되는 만큼 일어나는 마음들도 청정합니다. 원인과 결과입니다. 마음이 깨끗할수록 앎의 지혜가 생겨날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원인과 결과가 서로 상관이 있습니다.

 

 

 

 

 

 

 

 

 

 

 

 

 

 

 

 

 

 

 


32. [번뇌와 지혜]

 


앎의 지혜를 원하는 위빠싸나 수행자는 마음상태를 늘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안정되고, 고요한 상태를 늘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조금씩 앎의 지혜가 생겨날 기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마음이 왜 고요하지 않고, 왜 안정되지 않은가? 

번뇌가 생겨날 기회를 허용했기 때문입니다.


사띠(알아차림)가 없고, 견해가 잘못 되었기 때문에 번뇌가 생겨날 기회를 허용한 것입니다. 견해가 잘못 되면 번뇌가 생겨나게 됩니다. 생각하는 것이 잘못 되고, 견해가 잘못되면 번뇌가 생겨납니다. 


견해가 바르고, 사띠가 지속된다면 번뇌가 줄어들게 됩니다. 번뇌가 생겨날 때마다 알아차린다면 번뇌가 생길 원인이 없어지기 때문에 번뇌가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번뇌가 줄어든다면 앎의 지혜가 생길 기회가 더 많아집니다. 

처음에는 번뇌가 생겨나면 거칠고 가속도도 강합니다. 번뇌에 대해서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면 그것이 생겨날 기회가 없습니다. 번뇌에 대한 견해가 바르다면 번뇌를 더 이상 키우지 않게 됩니다.

 

 

일어나는 번뇌에 대해 견해가 바르지 않기 때문에 지금 현재 또 다시 번뇌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번뇌의 힘이 점점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과거의 원인으로 인해) 과보로서 일어나는 번뇌에 대해 지금 현재 지혜가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번뇌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과보로써 일어날 원인이 있어서 일어나는 번뇌에 대해, 지금 현재의 견해가 바르다면 그것이 생겨날 기회가 없어지게 됩니다.

 

 

 

이것만이 지금 현재 할 수 있는 일 입니다.

 

 

 

더 이상 커지지 않도록 멈추는 일만이 지금 현재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지혜가 있을 때 멈출 수 있습니다. 

번뇌를 더 이상 키우지 않게 됩니다. 


사띠, 사마디, 지혜의 힘을 키워야 합니다. 

사띠, 사마디, 지혜의 힘이 강해진다면 

이전에 생겨났던 번뇌들이 점점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수행하는 것입니다.


몸, 마음, 웨다나(느끼는 것) 중 무엇을 관찰하든지 중요한 것은 번뇌가 줄어들고, 사띠와 지혜가 생겨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몸, 마음, 웨다나를 모두 볼 수 있어야 능숙해지게 됩니다. 지혜가 충분해지게 됩니다. 





삶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합니까? 

자신의 마음 속에 번뇌가 줄어들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2011. 2. 15. 법문 중에서

 

 

 

 

 

 

 

 

 

 

 

 

 

 


33. [사람]

 

 

짐승은 자신의 마음을 다시 아는 마음 의 자질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질이 더 좋아지도록 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자신의 마음을 다시 아는 아모하(어리석음이 없음, 즉 지혜를 의미함)라는 마음부수가 있습니다. 이 아모하의 힘이 강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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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양극단]


양극단이란 좋아해서 집착하고, 싫어해서 집착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로바(탐심)와 도사(진심)의 양극단입니다. 


중도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중도의 길이란 바른 견해로써 지켜보는 것을 말합니다. 

관찰하는 마음 속에 지혜가 있어야 중도의 길이 됩니다. 

지혜로써 지켜볼 때 중도의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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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사띠의 가치]

 


한 번 알 때마다 얼마나 이익이 있는가를 이해하는 이는 

수행을 하지 못하게 막을 수 없습니다.


사띠로써 한번 알아차릴 때마다 얼마나 편안해지는가를 이해할 정도가 되려면 제법 지혜의 힘이 좋아져야 합니다. 알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이익이 있고 가치가 있는 일이며, 알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물이 큰가에 대해 분명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사띠의 가치와 이익에 대해 제대로 이해했을 때 정말로 수행이 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번뇌의 과보,

 

업의 과보,

 

과보의 과보가

 

있습니다. 

과보가 반복적으로 순환되고 있습니다. 


그 중 번뇌의 과보가 가장 나쁩니다. 

번뇌의 과보가 생겨날 때마다 빼버린다면 업의 과보와 과보의 과보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모르면 돌고, 알면 끊어지는 것이 바로 윤회입니다.

 

한번 안다는 것은 윤회가 끊어질 때까지 아는 것입니다. 

한번 알 때 마다 윤회가 끊어진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매순간 수행해야 합니다. 

좋은 과보 속에서 돌고, 좋지 않은 과보 속에서는 돌지 않아야 합니다.

 

 

 

 

 

 

 

 

 

 

 

 

 

 

 

 


36. [있어야 할 법]


 

 

집중하지 말고,

억제하지 말고,

억누르지 말고,

만들어서 관찰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은 로써 수행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원하게 되면 힘이 많이 들어가고, 불만족스러워도 힘이 많이 들어갑니다. 

좋지 않은 힘이 많아지면 마음도 피곤하고, 몸도 피곤해 집니다. 


법은 균형이 이루어졌을 때 법이 됩니다. 

넘쳐도 안 되고, 부족해도 안 됩니다. 법은 참으로 진실하기 때문에 법입니다. 있어야 할 법은 있어야 합니다. 있어야 할 법이 없다면 법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원하는 대로 만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불만족스럽다고 해서 사라지게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잊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알고 있도록 수행해야 합니다.

 

생겨나는 대로 알아차리다 보면 마음이 느끼고 있지 않습니다.

 

 

바른 견해로써 알아차리다 보면 로바(탐심), 도사(진심) 등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른 견해도 중요하고, 알고 있는 것도 중요합니다. 바른 견해가 있어야 하고, 알고 있어야 하고, 아는 것이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것만이 수행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37. [편안하게, 그러나 쉬지 않고]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스스로 점검을 해 보십시오. 

자신이 무슨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경험 되어지는 쪽, 즉 일어나는 쪽에 대해서 

어떻게 일어나도록 노력한다면 그것은 로바입니다.

 

이렇게 되게 하고 싶고, 저렇게 되게 하고 싶고, 이렇게 되면 좋을 것 같은 마음이 작용하기 쉽습니다.

 

‘마음이 고요하면 좋고, 마음이 고요하지 않으면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고요해지도록 만들게 됩니다. 고요해지도록 힘을 써서 집중하고 있다면 그 속에는 로바(탐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요하지 않은 것이 싫어서 억지로 집중을 합니다.

 

위빳사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일어나고 있는 것을 일어나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 주기만 하면 됩니다.

 

아주 쉽습니다. 단순합니다. 그러나 이 단순하게 하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복잡하게 하는 것은 오히려 하기가 쉽습니다. 번뇌는 복잡하게 합니다. 번뇌로써 수행하는 것은 누구나 할 줄 압니다. 왜냐하면 삶 속에서 항상 번뇌로써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원하면 억지로 집중을 해서 되도록 만듭니다. 원하지 않을 때는 힘을 써서 없애려고 합니다. 아무것도 모를 때도 무조건 집중을 합니다.

 

무조건 애를 쓰려고 하지 말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지혜로써 조금 생각을 해가면서 수행을 하십시오.

 

성급해 하지 마십시오.

 

수행에 대해서 너무 조급해 하지 마십시오.


편안하게, 쉬지않고, 

평생 해야 하는 일입니다.

 

 

 

 

 

 

 

 

 

 

 

 

 

 

 

 

 

 

 

 

 

 

 

 


38. [법을 얻기 위한 조건 1]


자신이 어떻게 수행하는가에 대해서 스스로 관심을 가지십시오.

결과에 대해서는 기대하지 마십시오.

기대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원인이 되는 업에 대해서 주의해야 합니다. 

법을 얻기 위한 조건 8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로바(탐심)가 적어야 합니다.

 

로바로써 수행해서는 안됩니다. 

로바가 조금만 포함되어도 수행상태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법은) 갈애와 정반대입니다. 로바의 갈애가 있다면 지혜가 생기지 않습니다. 


로바는 원인과 결과를 모릅니다. 

로바는 원하는 것만 알고, 되게 하고자 하는 것만 압니다.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두 번째 조건은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과에 대해서 받아들일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인이 되는 업에 대해서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원인이 되는 업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만큼 해야 합니다. 

주어지는 결과에 대해서는 받아들일줄 알아야 합니다. 


할 줄 아는 만큼 얻습니다.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만큼, 할 줄 아는 만큼 이미 얻었습니다. 더 이상 원해서는 안 됩니다


이 이치를 이해하는 이는 받아들이게 됩니다. 

로바가 커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해야 합니다. 능숙해지는 것에 대해서만 연구해야 합니다. 일하는 쪽에 대해서만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결과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마십시오. 그것에 합당한 결과가 올 것입니다.

 

 


세 번째는 몸과 마음이 고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몸과 마음이 홀로 되어야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번뇌라는 친구와 함께 하지 않아야 하고, 몸은 주변의 잡다한 어울림과 함께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일이 적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을 제외하고는 관계하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어울림이 별로 없어야 합니다. 말이 적어야 합니다. 말을 하더라도 지혜로써 중요하면 하고 중요하지 않으면 말하지 않습니다. 몸과 마음이 고요해야 합니다. 마음 속에 로바·도사가 없다면 고요합니다.

 

육체적으로 번다함이 없어야 하고, 정신적으로도 번뇌가 없어야
진정한 홀로 있음입니다.

 

 


네 번째는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리야(노력)가 있어야 합니다. 매 순간 순간 노력해야 합니다.

 

힘을 써서 보이도록 애를 쓰라는 것이 아닙니다. 

미세한 대상을 보기 위해 힘을 써서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반복해서 노력하는 것이 바른 노력(삼마 위리야)입니다.

 

정직하게 쉬지 않고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바른 노력이라고 합니다. 느슨해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힘을 써서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힘들고, 마음이 피곤해지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다섯 번째는 매 순간 사띠(알아차림)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사띠가 있어야 합니다.


 

두는 사띠가   있는 사띠가 될 때 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사띠를 두어야 합니다. 

사람이 반복적으로 노력하고, 계속해서 주의를 주고, 사띠가 있도록 의도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속도가 붙어서 법이 자연스럽게 일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 이상 힘을 써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위리야(노력)의 힘이 있기 때문에 가속도에 의해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애를 써서 아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대로 저절로 알아지는 상태가 됩니다.

 

사띠를 두는 것을 잊어버린다 해도 마음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할 일을 이미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띠의 가속도가 붙을 때까지 일을 해야 합니다. 

사띠가 있는 것도 중요하고 지속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여섯 번째는 항상 사마디(고요함)가 있어야 합니다.

 

원하는 것, 되게 하고자 하는 것이 없다면 사마디는 이미 있습니다.

 

근심 걱정, 두려움, 슬픔 등이 없다면 바로 이것이 사마디입니다.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서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고, 아직 다가오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알고 알고 한다면 저절로 사마디가 있게 됩니다.

 

 


일곱 번째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수행자들에게 이 지혜의 힘이 약합니다. 지혜가 있어도 있는 줄 모릅니다. 수행을 하기는 합니다. 사띠가 있으면 있는 줄 알고, 사마디가 있으면 있는 줄 압니다. 위리야(노력)가 좋은지 나쁜지도 압니다. 그러나 지혜가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릅니다. 무엇을 지혜라고 하는 줄도 모릅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원인과 결과를 이해하는 것도 지혜입니다.

조사하는 것도 지혜입니다.
바른 견해가 지혜입니다. 바른 견해와 바른 생각이 바로 지혜에 해당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필요합니다.



[ 이상 일곱가지는 아누룻다 존자의 사유 ]

 



마지막 여덟 번째는 부처님께서 덧붙여 하신 말씀입니다.

 

과장(확대)하지 않고, 단순하고 분명해야 합니다.

 

원하는 것이 많으면  갈애,  마나(아만심),  사견(잘못된 견해)이  과장하게 됩니다.

 

순하지 않고, 이렇게 저렇게 되게 하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과장하는 것입니다. 


로바가 있는 이는 항상 과장을 합니다. 도사(진심) 역시 과장합니다. 

무슨 번뇌이든지 번뇌는 과장합니다. 


단순하고 분명해야 한다는 것은 일이 적고 복잡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갈애, 아만심, 사견(잘못된 견해)이 적은 것을 말합니다.

 

 

 


 

위의 여덟가지가 갖추어질 때 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원인이 되는 조건들이 충족된다면 결과가 오게 됩니다.

 

 


[ 역자 주 : 앙굿따라니까야(a 8:30) 아누룻다경, 초기불전연구원 번역본 에서 '부처님께서 첨가하신 말씀'은 "사량분별이 없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사량분별 없음에 대한 주석이 갈애, 아만심(마나), 사견이 없는 것을 뜻한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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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법을 얻기 위한 조건 2]


 

자신이 어떻게 수행을 하는가를 자주 점검해야 합니다.

 

항상 사띠가 있는가? 지혜가 있는가?
점검하십시오. 


로바(탐욕) 역시 자주 일어납니다. 

법에 대해서 욕심이 있다면 법을 얻지 못합니다.

 

 

수행자들이 법에 대해서 욕심이 있습니다.



 

로바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법도 로바로써 받아들입니다. 무엇이든지 로바는 원하기만 합니다. 

법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원하게 됩니다. 범부는 로바가 강합니다. 


수행도 로바로써 합니다. 로바는 원하기만 합니다. 안 좋은 상태에서 상태가 좋아지면 당장 원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점점 줄어들어야 합니다. 일어날 때마다 알아차려 그것에 대해서 이해해야만 로바가 줄어듭니다. 


지혜가 좋아져야만 받아들이게 되고, 견해가 바르게 됩니다. 지혜의 부분이 중요합니다. 지혜를 적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수행할 때 집중해서 무조건 수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혜를 사용해야 합니다. 조사하십시오. 그냥 봐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사하는 마음으로,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지켜봐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되고, 저렇게 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조사하며 봐야 합니다. 한면만 봐서는 안되고 여러 각도에서 살펴봐야 합니다. 한가지 두가지 정도를 봐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원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과 관계한 모든 것을 다 이해해야만 이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번뇌의 힘이 좀 약해져야 지혜가 생기게 됩니다. 원하는 것이 줄어들면 지혜가 생기게 됩니다.

 


하는 것이 많은 이는 불만족도 강합니다. 

근심걱정이 많습니다. 이렇게 되면 마음이 흐려집니다.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모르게 됩니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헐떡이게 됩니다. 

사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면 마음이 헐떡이고 성급해지게 됩니다.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게 되면 마음이 잊어버리게 됩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만큼은 중요하지만 별로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한계점을 찾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경험이 말해 줄 것입니다.



수행도 그렇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자주 점검을 해 봐야 합니다.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넘치는 가에 대해 항상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한가지 일이 끝나고 나면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과했던가에 대해 점검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그것으로부터 교훈을 얻게 되어 점점 더 질이 좋아지게 됩니다. 


점점 더 고요해지고 평온해지게 됩니다.

 

말을 하고 나서든지, 

떤 일을 하고 나서든지, 

생각을 하고 나서든지, 

무엇을 하고 나서는 


반드시 마음상태가 어떠한가를 점검해 보십시오.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하며 허물이 없다면 선법(꾸살라)이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고요하지 않고, 복잡하고, 더 키워나가고 있다면 선법이 아닙니다. 뭔가 한가지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조사해 보고, 살펴봐야 합니다.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바깥이 중요한 것처럼 안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바깥보다는 안이 더 중요합니다. 자신의 마음상태를 알고서 말하고, 움직이고, 행동한다면 모든 것의 질이 점점 더 좋아지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스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 익숙해지고, 자연적인 성품이 되어야 합니다. 


스스로 아는 것이 습관이 되어 지속되게 된다면 

다른 것은 삶 속에 저절로 스며들게 될 것입니다. 


매 순간이 수행해야 할 시간입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40. [사띠의 ]


처음 수행을 시작할 때는 사띠(알아차림)를 두지 않고 지내는 것이 더 편안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띠를 두고 지내려면 피곤하다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번뇌의 힘은 강하고, 사띠·사마디·지혜의 힘은 약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습관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수행을 오래도록 하다 보면 사띠 없이 지내게 되면 힘들고, 사띠와 함께 지내게 되면 편안합니다. 상황이 정반대가 됩니다.

 

마음이 어떠하다라고 고정관념을 갖게 되면 그렇게 여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어리석음이 뒤덮고 있기 때문입니다. 번뇌와 함께 지낸지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번뇌가 그의 가속도대로 생겨나고 싶어합니다. 선법(꾸살라)에게 자리를 내 주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거칠기 때문에 사띠없이 지내는 것이 더 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래 수행을 하다 보면 사띠와 함께 지낼 때 편안하고, 고요합니다. 마음이 힘도 있게 됩니다. 마음의 힘이 가득하기 때문에 청정하고 맑습니다.

 

 

 

사띠를 놓치고 지내게 되면 마음이 복잡해지고 흐려집니다.

깨끗하지 않고 고요하지 않습니다.

 

 


모하(어리석음)의 힘이 강할 때와 지혜의 힘이 강할 때는 정반대가 되기 때문에 보이는 것도 정반대가 됩니다. 마음상태가 바뀌게 되면 보이는 것도 바뀌게 된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말합니다. 보이는 대상들이 바뀌게 됩니다. 마음상태에 따라 경험되어지는 것도 바뀌게 됩니다.

 

이렇게 오래도록 지내다 보면 삶 속에 법이 있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법으로써만 지내고 싶어집니다. 사띠·사마디·지혜가 없게 되면 마음이 위험한 상태에 처한 것처럼 안전하지 않습니다. 조그마한 일에도 마음이 걱정하게 되고 들끓게 됩니다. 근심 걱정이 많고, 원하는 것이 많아지게 됩니다. 사띠·사마디·지혜의 힘이 강해지면 번뇌 쪽의 힘이 약해지기 때문에 견고하고 고요합니다. 안전함이 가득하게 됩니다. 집에 있게 되면 안전하고, 바깥에 나가게 되면 여러 가지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처럼 사띠도 집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띠·사마디·지혜를 집으로 삼아야 합니다. 집안에 있게 되면 안전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지켜야 합니다. 질이 좋은 마음들이 생겨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미 얻은 좋은 마음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잘 유지해야 합니다.

 

 

행은 절대 끝이 없습니다.

수행의 끝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가야할 일이 있으면 가고, 해야 할 일이 있으면 하되 법은 항상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항상 수행을 할 때 마음에 대해서 잘 알게 됩니다. 마음이 평온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왜 괴로운 가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평온해질 원인이 없습니다. 괴로운 마음상태가 자주 일어나서는 끝이 없게 됩니다.

 

왜 마음이 괴롭고 왜 마음이 평온한가?

 

이것을 알기 위해 항상 마음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음이 생겨날 때마다 어떤 마음부수, 어떤 이치가 함께 하는가? 선법의 마음이 생겨날때는 어떻게 느끼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불선법의 마음이 생겨날때는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이렇게 항상 조사를 하며 지내다 보면 불선법의 마음을 일으키고 싶지 않게 됩니다. 지혜가 점점 성숙해지게 됩니다. 아는 것이 많아지다 보면 지혜가 점점 적당한지 적당하지 않은지 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일으키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고요한 쪽을 선택하게 됩니다. 모르면 어렵습니다. 모르는 것은 나쁩니다. 알 때 편안합니다.

 

 

 

 

 

 

 

 


 

 

 

 

 

 

 

 

 

 

 

 

 

 

 

 

 

41. [마음 2]


 

마음이라는 것은 형상도 없고, 색깔도 없고, 크기도 없고, 장소도 없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자연적인 성품의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음이 작용하는 것으로써 알 수 있습니다.

특징으로써 알 수 있습니다.

 

생겨나는 것이라고 알 수 있습니다.     14

 

마음의 자연적인 성품이 생겨나서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생겨나는 것으로서 있고, 사라지고 없는 것으로서만 있습니다. 그러나 알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작용하는 것으로써 알 수 있습니다. 대상에 집중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들이 모두 마음이 하는 일입니다. 집중을 하고, 집중을 하지 않고, 힘을 들어가고,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다 마음이 하는 일입니다. 마음이 일하는 것으로써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적인 성품의 특징으로써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이란 생각할 줄 알고, 알 줄 알고, 느낄 줄 알고, 주의를 기울일 줄 압니다. 음을 마음으로 알지 못하고, 마음의 자연적인 특징을 알지 못하게 되면 개념을 대상으로 하게 되기 때문에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마음이란 알면 사라지고 없습니다.

생겨나면 사라지고 없습니다. 이것뿐입니다.  15

 

 

전혀 복잡할 것이 없습니다. 분명합니다.

 

내용이나 개념을 대상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처음 수행을 시작하는 이들은 생각의 내용 만을 대상으로 하게 됩니다. 마음이 말하는 것으로써 알고, 마음 속의 소리로써 압니다. 문장, 이미지 즉 형상으로써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이란 생각하는 속에 소리, 냄새, 맛, 형상이 있습니다. 마음은 그려내고 싶은 대로 그려낼 수 있습니다. 실재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개념을 개념으로 알아야 합니다. 자연적인 이치를 자연적인 이치대로 알아야 합니다. 생각하는 마음이 생겨났다라고 알면 됩니다. 생겨나고 있고, 사라지고 없다라는 것을 안다면 자연적인 이치를 안 것입니다.

 

알 줄 아는 성품을 압니다. 생각이 생겨났다라는 정도로만 알면 됩니다.


생겨나는 줄 알고,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압니다. 이 정도로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모두 개념입니다.

 

 

 

 

 

 

 

 

 

 

 

 

 

 

 

 

 

 

 

 

 

 


42. 실재하는 법(빠라맛타)과 개념(빤냣띠)

 

 


대상을 그냥 알아서는 안됩니다. 앎은 있어야 합니다. 생겨나는 모든 것은 다 법의 자연적인 이치입니다. 근본 이치이지 사람이나 중생이 아니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더운 것은 더운 것일 뿐입니다. 더운 것이 사람은 아닙니다. 더운 것은 더운 이치일 뿐이지 더운 것이 사람은 아닙니다. 중생이 아닙니다. 근본 이치입니다. 열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알아차려지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대상으로 알아차려지는 자연적인 법일 뿐입니다. 왜 자연의 이치라고 말하는가 하면 항상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잠시동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반지나 팔찌처럼 보여줄 수 없습니다. 잠시 존재하고 나서 사라집니다. 견고한 것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의 이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실재하는 법(빠라맛타)의 이치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더운 것뿐만이 아니라 부드럽고, 딱딱하고, 알고, 뭔가를 하는 것 등이 다 그것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치만이 있고, 이치만으로 사라집니다. 이것을 염두에 둔다면 수행하기가 편안합니다.

 

소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리는 붙잡을 수도 없고, 만질수도 없습니다. 듣고 나면 없습니다. 모든 빠라맛타의 이치가 다 이와 같습니다. 그것의 특징이 있습니다. 변해가는 특징이 있습니다. 새것이 옛것으로 항상 변해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의 이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의 원인과 결과로 인해 생겨나야 할 것이 있어서 생겨나는 진행과정을 자연의 이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연의 이치라는 것은 그것의 원인과 그것의 결과로써 생겨나야 할 것들이 생겨나는 것들을 말합니다.

자연의 이치라고 이해하든지 근본 법칙이라고 이해하든지 사람이 아니고 중생이 아닙니다.

 

이치를 이해해야 수행하는 것이 편안해집니다.

 

이 자연적인 법칙의 진행과정을 산냐(想)가 의미를 부여해서 관념화 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이 없고 중생이 없다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근본이치는 있습니다. 자연적인 법칙 즉 자연의 이치는 있습니다. 이것을 관념화 하는 것입니다. 사람, 중생, 남자, 여자라고 하는 고정관념등이 다 개념(빤냣띠)입니다.

 


없는 것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 알아서,

잘못된 견해(사견)가 사라지도록 해야 합니다.


-쉐우민 큰 사야도 말씀-


 

실제로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 알 때 관념화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마음이 작용하는 것, 즉 마음이 일하는 것을 알게 될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관념이라는 것은 마음이 만드는 것 입니다.

실재하는 법(빠라맛타)의 이치를 이해하는 방법은 특징, 작용하는 것, 결과, 가까운 원인으로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알 때 빠라맛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빠라맛타 라는 것, 근본 이치라는 것은 이해할 수 만 있습니다. 보이도록 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가 미칠 때 빠라맛타를 알 수 있습니다.

 

빠라맛타는 지혜의 대상입니다. 빤냣띠(개념)는 번뇌의 대상입니다. 모든 번뇌는 개념(빤냣띠)을 대상으로 합니다. 지혜가 없을 때 개념을 대상으로 해서 번뇌가 생깁니다. 그러나 위빠싸나 지혜가 있고, 마음이 작용하는 것을 알게 되면 개념을 대상으로 하더라도 번뇌를 일으키고 싶은 마음이 작용할 때만 번뇌가 생기게 됩니다.

 

 

 

 

 

 

 

 

 

 

 

 

 

 

 

 

 

 


43. [지혜로써 수행하십시오]


 

수행자들이 지혜로서 수행하는 것을 어려워 합니다.

왜냐하면 지혜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행자들이 지혜를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묻곤 합니다. 왜냐하면 지혜로써 수행하는 것이 낯설기 때문입니다.

 

위리야(노력)로써 수행하는 것에는 능숙합니다.

힘을 쓰고, 집중하는 것은 잘 합니다. 오랫동안 집중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지혜를 적용해라’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릅니다. 힘을 쓰는 대신 지혜를 적용하는 것이 바로 지혜의 힘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혜의 힘이 좋고, 지혜로써 수행하는 이들에게는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수행자들이 오랫동안 수행을 해왔지만 힘을 써서 집중하는 습관 때문에 지혜를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잊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수행자들이 ‘수행 할 때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라고 알고 있습니다.

 

쉐우민에서는 생각을 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하겠습니까? 생각을 할 수 없다고 말하곤 합니다.
어떻게 생각을 해 줘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무조건 집중을 해서는 안됩니다. 앎의 지혜가 생기지 않습니다.

 

집중하는 일만으로도 마음의 일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써 수행하라는 것은 생각을 해 가면서 수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 가면서 수행해야 합니다. 보고 들은 정보를 생각해 줘야 합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태에 대해 정보를 적용해야 하고, 점검을 해 줘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지혜의 일입니다.


사띠는 있는가?
사띠의 힘이 좋은가?
관심이 있는가?

지루한가?

 

 

 

 

 

 

 

 

 

 

 

 

 

 

 

 

 

 

 

 

 

 

 

 


44. 감각기능의 단속에 관한 계

 

 


다섯가지 기능(五根: 신심, 위리야, 사띠, 사마디, 지혜16)으로써 육문(안이비설신의)을 잘 지켜야 합니다.

 

눈의 문, 귀의 문, 코의 문, 혀의 문, 몸의 문, 마음의 문에 대해 사띠(알아차림)로 써 잘 지키는 것을 ‘감각기능의 단속에 관한 계’라고 합니다.


다섯가지 힘(五力: 신심, 위리야, 사띠, 사마디, 지혜)로써

육문을 잘 보호하는 것을 말합니다.

 

 

 

육문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사띠, 사마디, 지혜가 일어날 기회를 항상 허용해야 합니다. 사띠, 사마디, 지혜로써 육문을 잘 보호할 때 ‘감각기능의 단속에 관한 계’가 구족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몸 만을 관찰하는 사람은 불가능합니다.

 

몸만을 관찰하게 되면 보이면 이미 번뇌가 일어나게 되고, 들리면 이미 번뇌가 일어나게 됩니다. 보일 때마다 들릴 때마다 수행을 할 수 있어야 능숙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섯가지 대상이 항상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항상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몸의 대상에 대해서는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생각 속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마음 속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보이는 곳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들리는 곳에서 번뇌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육문을 다 지켜야 합니다. 하나의 문만 지켜서는 안됩니다.

 

 

 

 

 

 

 

 

 

 

 

 


 

 

 

 

 

 

 

 

 

 

 

 

 

 

 

 

 

45. 아는 마음을 놓치지 않는 사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수행합니다.

 

자신을 위해서이지 다른 이를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하십시오.

 

매순간이 수행해야 할 시간입니다. 새벽에 잠에서 깨는 순간부터 밤에 잠이 드는 순간까지, 이것 다음에 저것, 이것 다음에는 무엇이 일어날 것인가,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아는가 모르는가? 하는 것들을 늘 점검해야 합니다. 해야 할 일이 있으면 하고, 생겨날 일이 있으면 생겨나게 두십시오. 단지 앎을 놓치지 않도록만 하십시오.

 

 


대상을 놓치지 않는 사띠와 아는 마음을 놓치지 않는 사띠는 다릅니다.

 

 

사람들이 대상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기 때문에 피곤합니다. 하루 종일 대상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애를 쓰기 때문에 피곤합니다. 아는 마음을 놓치지 않는 사띠는 편안합니다. 마음 쪽에서 머물고, 마음을 관찰할 수 있게 되면 수행이 수월해집니다. 아는 마음을 놓치지 않게 되면 대상은 이것 다음에 저것을 저절로 알게 됩니다. 대상이 무엇이든지 간에 사띠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사띠가 있는가를 알고, 사띠의 힘이 좋은지 나쁜지도 압니다. 사띠가 있으면 있는 줄 알고, 없으면 없는 줄 알고, 사띠가 들어오면 들어오는줄 알고, 놓치면 놓치는 줄 압니다.


마음 쪽에 머물게 되면 마음이 많이 가벼워집니다. 대상 쪽을 따라다니게 되면 피곤합니다. 대상을 놓치지 않는 사띠와, 아는 마음을 놓치지 않는 사띠는 다릅니다. 해야 할 일은 아는 마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앉고 싶으면 앉고, 서고 싶으면 서고, 가고 싶으면 가십시오.


아는 마음 만은 놓치지 마십시오. 사띠만은 놓치지 마십시오.

 

 

 

 

 

 

 

 

 

 

 

 

 

 

 

 


 

 

 

 

46. 중도의 길

 

 

 

바른 마음가짐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마음이 괴로우면 마음이 괴로운 것입니다. 괴로우면 어떻습니까?

괴로운 것은 괴로운 것일 뿐입니다. 그것 역시 사실인 것입니다.

 

사실 그대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편안하면 편안한 그대로 알면 됩니다. 단지 인지하기만 해야 합니다. 그 감정을 느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아는 동시에 느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번뇌의 힘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편안해도 그 속에 젖어들고, 괴로워도 빠져 듭니다. 젖어 들지도 않고, 빠져들지도 않도록 알고 있기만 해야 합니다. 이것은 견해가 바를 때 가능합니다. 지혜가 있을 때 가능합니다.

 

‘대상은 대상일 뿐이다’라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알고 있지 못하다면 바른 마음가짐으로

스스로에게 바른 견해를 일깨워 주어야 합니다.

 

자연의 이치는 자연의 이치일 뿐입니다.

대상은 대상일 뿐입니다.

알아차려야 할 것은 알아차려야 할 것일 뿐입니다.

편안한 것도 알아차려야 할 것이고, 괴로운 것도 알아차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할 줄 아는 지혜로써 마음가짐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젖어들지도 않고 빠져들지도 않습니다.

 

이 지혜가 없다면 당연히 빠져 듭니다.

편안해도 로바(좋아하는 마음)로써 즐기게 되고, 괴로워도 도사(싫어하는 마음)로써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스스로에게 물어 보십시오.
알고 있습니까? 느끼고 있습니까?
느끼렵니까? 알아차리렵니까?

알기만 하는 데는 아무 것도 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바른 견해는 있어야 합니다.
대상이라고 알아야 하고, 대상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대상이기 때문에 알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대상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좋아서 즐기게 되고,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싫어서 거부하게 됩니다.

 

 


큰 사야도께서는 집착하지도 말고 없애려고 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아는 것으로는 집착하든지 아니면 없애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집착하지도 않고 없애지도 않아야 한다면 그 사이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머물러야 하겠습니까?


 

양극단의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중도의 길을 걸으라

 

– 쉐우민 큰 사야도

 

 

중도의 길이 떠올라야 됩니다. 중도의 길이란 바로 지혜의 길입니다. 

자신에게 있는 지혜가 중도의 길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일어나고 있는 것은 양극단에 가까운 일 뿐입니다. 들리는 순간 좋다 싫다가 생겨납니다. 보이는 순간 좋다 싫다가 생겨납니다. 마음이 이렇게 양극단에 가깝게 생겨나는 것은 이미 자연적인 성품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중도의 길을 걸어야 할까요?

 

지혜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중도의 길은 바로 지혜의 길입니다. 지혜 없이는 절대 중도의 길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출현하신 후 떠오른 길입니다.

바로 팔정도의 길입니다. 팔정도가 바로 중도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견해가 있어야 합니다. 이 지혜는 보고 들은 지혜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지혜가 있는 만큼 중도의 길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지혜의 힘이 좋은 만큼 중도의 힘이 좋아질 것입니다.

 

보고 들은 지혜,

생각할 줄 아는 지혜,

수행을 통한 지혜가

 

있어야 중도의 길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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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사념처


 

사념처라는 것은 네 가지 대상, 즉 대상 쪽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띠를 두는 마음, 일하는 마음, 수행하는 마음입니다. 


몸 만을 관찰하게 되면 신념처(身念處)입니다. 

느끼는 것(웨다나)만을 보게 되면 수념처(受念處), 

마음만을 보게 되면 심념처(心念處), 

법의 이치만을 보게 되면 법념처(法念處)입니다.


관찰되어지는 대상이 네 곳으로 구분되므로 네 가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법념처에는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몸도 마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수행하는 마음입니다. 

수행하는 마음이 팔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가 있어야 합니다. 


른 알아차림(正念), 

바른 사마디(正定), 

바른 노력(正精進)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바른(正, 삼마)’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번뇌가 포함되면 잘못되게 됩니다. 

잘못된 견해, 잘못된 사유가 됩니다. 

잘못된 견해로 인해 잘못된 알아차림, 잘못된 사마디가 됩니다. 

그래서 바른 견해와 바른 사유가 중요합니다. 

늘 바른 마음가짐에 대해 법문을 하는 이유입니다. 


견해가 바르고 생각이 바를 때 알아차림도 바르고, 노력하는 것(위리야)도 바르게 될 것입니다. 지혜가 포함된 알아차림, 지혜가 포함된 사마디, 지혜가 포함된 노력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흔히 문제가 되는 것은 노력(위리야)입니다.

 

노력하는 것이 바르지 못하면 무엇인가를 원해서 하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되게 하고 싶고, 

사라지게 하고 싶고, 

무엇이 일어나기를 원하는 노력이 힘을 많이 쓰게 됩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게 하고 싶은 것이 잘못된 노력입니다. 

원하지 않는 대상은 사라지게끔 노력하는 것도 잘못된 노력입니다. 

무엇이 바른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무조건 노력하는 것은 잘못된 수행입니다. 


어리석음(모하)이 우두머리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마음 쪽을 자주 점검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대상 쪽에만 빠져 있지 마십시오. 수행하는 마음이 바른가, 그른가를 알아야 합니다. 


생겨나는 모든 것은 법의 자연적인 이치입니다. 

알아차려야 할 대상이라는 것으로 이해하면 바른 견해(正見)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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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적인 것은 자연적인 것일 뿐입니다.

사람도 아니고 중생도 아닙니다. 


바른 것을 바른 것으로,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때 

바른 견해가 됩니다. 


‘자연적인 성품이자 대상이다’라고 이해하고 

이 마음 쪽으로 주의를 기울인다면 

바른 사유(正思惟)가 됩니다.

 

 

 

 

 

 

 

 

 

 

 

 

 


 

 

 

 

 

 

 

 

 

48. 문혜(聞慧)·사혜(思慧)·수혜(修慧)

 


지혜로써 수행하십시오. 

바른 견해의 지혜, 바른 생각의 지혜를 사용하십시오. 


수행에 관한 바른 정보를 문혜(聞慧)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문혜에서 비롯해 

스스로 사유하는 사혜(思慧)를 거쳐 

수행체험을 통한 수혜(修慧)가 생기게 됩니다. 


수행에서 첫번째로 중요한 것은 수행에 대한 문혜와 사혜입니다. 

수행을 통해 이해하는 지혜는 나중에 원인이 충분히 갖추어 졌을 때 생기게 됩니다.



- 2011. 2. 11. 아침법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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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법의 자연적인 이치 2


 

사람이나 중생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자연적인 것을 자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해 주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법이라는 것은 사람이나 중생 등의 어느 누구에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법은 자연적인 법일 뿐입니다. 


대상의 정의는 마음으로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알아차려지는 이치를 대상이라고 합니다. 알아차려지는 이치가 있고, 변화하는 이치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법의 자연적인 이치라고 알아야 합니다.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면 먼저 생각을 해 주어야 합니다. 


정신이라는 법도 자연적인 이치일 뿐이고, 물질이라는 법도 자연적인 이치일 뿐입니다. 몸과 마음은 사람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라는 것을 먼저 생각해 주십시오. 생각을 통해 이해했다면 적용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 더운 이치가 있고, 추운 이치가 있습니다. 

더운 것이 사람입니까? 더운 것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더운 것은 더운 것일 뿐 입니다. 

더운 성품이라는 법의 이치가 있습니다. 


아프고 저린 법의 이치가 있습니다. 

변화하는 법의 이치가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입니까? 그입니까? 나입니까? 

사람이나 중생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단지 법의 이치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리고 항상 변화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프고 저린 느낌이 사라지면 다리가 사라집니까? 

아픈 것과 다리는 서로 다른 것입니다. 


아픈 것은 아픈 것이고, 다리는 다리일 뿐입니다. 

아픈 것은 법의 이치이고, 다리는 개념입니다. 


법의 이치를 법의 이치로 이해해야 사람이나 중생이라고 보지 않게 됩니다. 

실제로 있는 법을 이해해야 존재하지 않는 없는 법20 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 2011. 2. 11. 아침법문 중에서

 

 

 

 

 

 

 

 

 

 

 

 

 

 


50. 바른 견해와 잘못된 견해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과

마음에서 생겨나는 모든 것을

다 자연적인 이치라고 생각하십시오.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해하게 되면 견해가 바르게 됩니다. 

이렇게 이해하게 되는 순간 잠시 잘못된 견해가 사라지게 됩니다.

 

 



모곡 큰사야도께서는 잘못된 견해를 먼저 제거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잘못된 견해를 먼저 제거하라는 것은 

바른 생각을 해서 지혜가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견해를 움켜쥐듯이 잡아서 없애라는 것이 아닙니다. 


른 견해를 적용함으로 인해서 잘못된 견해를 허용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견해를 억지로 없애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견해가 바르게 되면 잘못된 견해가 일어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첫 번째로 중요한 것입니다.

 

 



견해가 바르게 되었을 때 수행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사띠도 바른 사띠가 됩니다.

사마디(마음의 고요함 혹은 안정된 상태)도 바른 사마디가 됩니다.
위리야(노력)도 바른 노력이 됩니다.

 

왜냐하면 바른 견해와 바른 생각21이 앞장을 섰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견해를 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띠를 두지만 잘못된 견해로써 사띠를 두게 되면 더 복잡해집니다. 


예를 들어 잘못된 견해로써 번뇌를 관찰하게 되면 번뇌가 더 강해지게 됩니다. 

바른 견해로써 보게 되면 번뇌가 줄어들게 됩니다.

 




- 2011. 2. 11. 아침법문 중에서

 

 

 

 

 

 

 

 

 

 

 

 

 

 

 

 

 

 

 

 

 

 

 

 

  1. 사띠sati, 사마디samadhi, 빤냐panna 염정혜 [본문으로]
  2. lobha ; 貪 // http://blog.daum.net/sarangcho/13742695 [본문으로]
  3. dosa ; 瞋 [본문으로]
  4. cf. 방일 하지 말라 // 항상 깨어 있어라 / + 절실함 ㅜㅜ : 나는 나름 쌔빠지게 하는데, 땡중이 부족하다, 간절함이 없다 이르셨던 이유가 이거였나 보다. / 누군가가 하라해서 하는 거 외에 하고 난 뒤 갖추게 될 위의 - 이 만큼 했네. 이젠 되었겠지. 하는 그 자리. 진정한 내가 아닌 내가 가지게 될, 즉 我 가 아닌 我所. 진정한 자기 사랑이 아닌 남의 눈에, 다른 '거울'에 비춰지는 나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본문으로]
  5. cf. 낡은 것만이 존재하는(인식되는) 이유 [본문으로]
  6. 유 무 : 생 [본문으로]
  7. = 5根 : 신, 진, 염, 정, 혜 [본문으로]
  8. 염, 정진, 택법 희 제 사 정 [본문으로]
  9. 그냥 [본문으로]
  10. cf. rel. 반추/ 아비담마 : 마음(心), 마음부수(心所), 마음이 일어났슴을 알게 해주는 증거, 본질 과 현상, 심왕 -왕과 신하의 비유, http://blog.naver.com/hersuk77/220414802194 [본문으로]
  11. 승부심 [본문으로]
  12. 아나룻다 : 아나율 존자, 7가지 바른 사유의 방법, http://blog.daum.net/thdyrwlwhr/6780773 ////// http://blog.daum.net/gikoship/15781552 [본문으로]
  13. cf. authenticity [본문으로]
  14. .cf. 生 : 있슴 : 공견에 비해 유견이 더 수승하다는 이유? [본문으로]
  15. 생겨나는 곳을 바로 보아 알면 그 즉시 사라진다. 공. 공견? [본문으로]
  16. 信 믿음, 進 정진,노력, 念 알아차림, 정념, 定 , 慧 // = 5力 [본문으로]
  17. 聞 思 修 / fur. all. 들어 알고, 생각하여, 익히다. [본문으로]
  18. 생겨나는 모든 것은 알아차려야 할 '대상' 일 뿐 [본문으로]
  19. 다문 - 문 [본문으로]
  20. th: 법 vs. 비법 ~ fur., cf. 空, 空見 vs. 유견 : 생유작위 [본문으로]
  21. 正見, 正思惟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