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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부처님과 초기불교사상
각묵 스님 (초기불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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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 위로
소납(小衲)에게 주어진 강의 주제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초기불교사상이다. 소납은 이 주제를 ①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와 ② 초기불교와 ③ 초기불교사상과 ④ 초기불교의 목적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서 소화하려한다.
① 인도 역사가 배출한 가장 탁월한 한 분을 들라면 역시 석가모니 부처님을 들 수밖에 없다. 먼저 석가모니 부처님 편에서는 그분의 생애를 초기불교의 자료들을 토대로 간략하게 살펴본다.
② 그분은 45년간 가르침을 펴셨다. 그분의 가르침을 담마/다르마(Dhamma/Dharma)라 하고 중국에서는 법(法)으로 옮겼으며 達摩(달마), 達磨(달마), 曇摩(담마), 曇磨(담마) 등으로 음역이 되었다. 이 가운데 達摩(달마)와 達磨(달마)는 산스끄리뜨 Dharma를 음역한 것이고 曇摩(담마)와 曇磨(담마)는 빠알리어 Dhamma를 음역한 것으로 보인다. 산스끄리뜨 혹은 불교 산스끄리뜨는 대승불교를 포함한 북방불교(Northern Buddhism)에서 사용한 표준어이며 부처님이 직접 사용하신 언어이거나 적어도 그 언어에 가장 가까운 것임에 분명한 빠알리어는 남방불교(Southern Buddhism, 상좌부불교, Theravāda Buddhism)의 표준어이다. 이렇게 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도 법이라는 술어로 정착이 되었고 달마(達磨)로도 통용되고 있다. 그분의 가르침을 원형 그대로 혹은 가장 원형에 가깝게 보존하고 있는 불교를 불교학자들은 초기불교라 한다. 초기불교 편에서는 초기불교가 무엇인지를 정리해 보았다.
③ 그러면 역사적으로 실존하셨던 석가모니 부처님은 무엇을 가르치셨는가? 모든 학문과 사상과 철학과 종교의 체계는 이론과 실천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교도 역시 그러하다. 불교에서는 이론을 교학(pariyatti)이라 부르고 실천을 수행(paṭipāda, bhāvanā)이라 부른다. 초기불교사상 편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교학과 수행으로 나누어서 살펴보았다. 전통적으로 초기불교 교학의 주제는 온처계근제연의 여섯으로 정리가 되고 수행의 주제는 37보리분법의 일곱 가지 주제와 계․정․혜 삼학으로 설명된다.
④ 교학과 수행으로 정리되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당연히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그분의 가르침의 목적은 무엇인가? 괴로움을 여의고 행복을 실현하는 것[離苦得樂]이다. 초기불교의 목적 편에서는 초기불교의 소의 경전인 니까야를 토대로 이 문제를 살펴보았다.
2.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 ▲ 위로
<주해1>
부처님[佛]으로 옮겨지는 붓다(Buddha)라는 술어는 문법적으로는 √budh(깨닫다, to be enlightened)의 과거분사에 해당하는데, 이것이 남성명사로 쓰여서 ‘깨달은 분[覺者]’이라는 뜻이 된다. 중국에서 붓다(Buddha)는 佛陀, 勃陀, 勃馱, 步他, 沒度, 沒馱, 浮圖, 浮屠(불타, 발타, 발타, 보타, 몰도, 몰타, 부도, 부도) 등으로 다양하게 음역되다가 불(佛)이나 불타(佛陀)로 정착이 되었으며, 한국에서는 부처님으로 정착이 되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성도(成道) 이전의 부처님은 아직 깨달은 분이 아니기 때문에 붓다라 부를 수 없다. 그래서 초기불전은 이런 상태의 부처님을 보디삿따(bodhisatta)라 칭하고 있다. 보디삿따(bodhisatta)혹은 산스끄리뜨 보디삿뜨와(bodhisattva)는 중국에서 보리살타(菩提薩埵)로 음역되고 각유정(覺有情)으로 옮겨졌으며 줄여서보살(菩薩)이라고 통용된다. 보리살타(보디삿따)는 깨달음(보리, bodhi)을 추구하는 중생(살타, satta)이란 뜻이다.
초기불전에서는 깨달음을 실현하시기 이전의 부처님을 보살이라 부르고 있으며 이것이 더 확장되어 대승불교에서는 위로 보리를 구하고(上求菩提) 아래로 중생을 제도하는(下化衆生) 대승불교의 이상적 수행자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엄격히 말하면 세존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시기 이전의 삶은 보살이라 불러야하고 깨달은 뒤의 삶은 부처님이라 불러야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런 구분 없이 모두 부처님으로 표기하고 있다.
⑴ 불은상기게(佛恩想起偈) ▲ 위로
부처님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출가와 수행과 성도와 전법의 네 가지일 것이다. 이 넷은 각각 버리기, 길 찾기, 깨닫기, 함께 나누기로 표현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부처님의 생애는 한국불교 승가에 발우공양을 할 때 외우는 불은상기게(佛恩想起偈, 부처님 은혜를 생각하는 게송)로 설명된다. 불은상기게는 다음과 같다.
佛生迦毘羅(불생가비라) - 부처님은 가비라에서 태어나셨고
成道摩竭陀(성도마갈타) - 마갈타에서 깨달으셨으며
說法婆羅奈(설법바라나) - 바라나에서 설법을 하셨고
入滅拘尸羅(입멸구시라) - 구시라에서 열반에 드셨다.
여기서 가비라(迦毘羅)는 까삘라왓투(Kapilavatthu)의 음역이고 마갈타(摩竭陀)는 마가다(Magadha)를 바라나(婆羅奈)는 바라나시(Bārāṇasi/Vārāṇasi)를 구시라(拘尸羅)는 꾸시나라(Kusinārā)를 음역한 것이다. 이 불은상기게는 부처님의 마지막 발자취를 담고 있는「대반열반경」(D16)의 세존의 말씀과 일치한다.
“아난다여, 믿음을 가진 선남자가 친견해야 하고 절박함을 일으켜야 하는 네 가지 장소가 있다. ‘여기서 여래가 태어나셨다.’ … ‘여기서 여래가 위없는 정등각을 깨달으셨다.’ … ‘여기서 여래가 위없는 법의 바퀴를 굴리셨다.’ … ‘여기서 여래가 무여열반의 요소로 반열반하셨다.’ ― 이곳이 믿음을 가진 선남자가 친견해야 하고 절박함을 일으켜야 하는 장소이다. 아난다여, 이것이 믿음을 가진 선남자가 친견해야 하고 절박함을 일으켜야 하는 네 가지 장소이다.”(D16 §5.8)
이 네 가지 장소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부처님의 탄생지 룸비니(Lumbinī)와 성도지 보드가야(Bodhgaya)와 초전법륜지 바라나시의 녹야원(Migadāya)과 입멸지 꾸시나라이다. 지금도 이 네 곳은 세계의 불자들이 성지순례를 위해서 모여드는 곳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렇게 역사적인 삶을 사셨던 분이시다.
불교 2600년사의 흐름은 모두 이처럼 역사적으로 실존하셨던 석가모니 부처님 즉 고따마 싯닷타(Gotama Siddhatta, Sk. Gautama Siddhartha) 그분으로부터 출발한다. 후대의 모든 불교는 그분이 깨달으시고 45년간 설법하셨던 그 가르침을 뿌리로 해서 전개된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대한불교 조계종 종헌 제1장 종명 및 종지 제2조도 “본종은 석가세존의 자각각타 각행원만한 근본교리를 봉체하며 직지인심 견성성불 전법도생함을 그 종지로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종헌 제2장 본종, 기원 및 사법 제4조에 “본종은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처럼 대한불교 조계종의 종헌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체득하여(교학) 이를 바탕으로 수행과 전법에 전념하는 것을 종지로 밝히고 있다.
⑵ 부처님은 역사적으로 실존하셨던 분이다 ▲ 위로
①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釋迦牟尼佛)으로 불리는데 석가모니(釋迦牟尼)는 사꺄무니(Sakyamuni)를 음역한 것이며 ‘사꺄족(Sakya)의 성자(muni)’로 직역된다. 사꺄(Sakya)는 히말라야산 기슭에 살던 종족의 이름이고 까삘라왓투(Kapilavatthu)가 수도였다.(D14)
『숫따니빠따』에서 부처님께서는 스스로를 “족성으로는 태양의 후예라 하며 태생으로는 사꺄라 부릅니다. 나는그 가문으로부터 출가했습니다. 대왕이여, 감각적 욕망을 동경해서가 아닙니다.”(Sn {423})라고 읊고 계신다.『디가니까야』「암밧타경」(D3)에 의하면 사꺄족(석가족,釋迦族)은사까(sāka) 나무에서 유래하였다. 사까(sāka)는 학명으로는 Tectona grandis인데 요즘 최고의 목재로 인기 있는 티크(Teak) 나무를 말한다.
출가이전의 부처님의 성함은 고따마 싯닷타(Gotama Siddhattha, Sk. Gotama Siddhārtha)인데 고따마는 성(族姓)이고 싯닷타(싯다르타)는 이름이다. 초기불전에서 부처님의 제자들은 부처님을 주로 세존(Bhagavan)으로 칭하고 있으며 불교 외의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이나 일반인들은 부처님을 주로 사문 고따마(samaṇa Gotama, D3 등)나 고따마 존자(bhavanta Gotama, M4 등)라는 족성으로 부르고 있다.
싯닷타(싯다르타, Siddhattha, 근본(attha)을 성취함(siddha))이라는 세속의 함자는 니까야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세속의 함자인 싯닷타는 주석서 문헌에서 나타나는데(MA.ii.333; AA.i.239) 그것도 드물게 언급되고 있다. 세속의 함자로 부처님을 칭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싯닷타라는 이름은 초기불전에는 나타나지 않고 주석서 문헌에서도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것으로 여겨진다.
부처님은 까삘라왓투(Kapilavatthu)를 수도로 하여 히말라야산 기슭에 살던 사꺄(Sakya) 족의 왕이었던 숫도다나 왕(Suddhodana rājā)을 부친으로 마야 왕비(Māyā devī)를 모친으로 하여(D14) 지금 네팔의 룸비니(Lumbinī)에서 태어나셨다.
② 부처님은 정말 실존하셨던 분인가
부처님은 정말 실존하셨던 분인가? 19세기 말에 서구 학자들 사이에는 의견이 분분했다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탄생지로 알려진 룸비니(Lumbinī)에서 아쇼카 대왕(Asoka-mahārājā, DAṬ.ii.245, 서기전 268년 즉위, 233년 몰)의 석주가 발견되고 여기에 적힌 문장을 읽으면서 이런 논란은 사라져버렸다.
<주해2>
룸비니의 아쇼카 석주(The Ashokan Pillar)는 BC245년(?)에 아소카 왕이 부처님 탄생지를 참배하고 세웠다. 전체 높이 7.2m(땅속 3m), 지름 70cm, 지상높이 4.11m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Devana Piyena Piyadasina lajina vīsativasābhisitena (1)
atana āgāca mahīyite hida Budhe jāte Sakyamunī ti (2)
silāvigad*ābhīcā kālāpita silāthabhe ca usapāpite (3)
hida Bhagavam* jāte ti Lum*mininigāme ubalike kat*e (4)
at*habhāgiye ca (5)”(A.C. Woolner의 『Asoka Text and Glossary』 참조)
한글로 직역을 해보면 다음과 같다.
“신들의 사랑을 받는 삐야다시 왕(아소카 왕의 다른 이름)은 (1)
즉위 20년이 지나 몸소 여기에 와서 참배하였다. (2)
여기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탄생하셨기 때문이다. (2)
그래서 돌로 말의 형상을 만들고 돌기둥을 세우도록 하였다. (3)
여기서 세존께서 탄생하셨다라고 경배하기 위한 것이다.(4)
룸비니 마을은 세금을 면제하고 생산물의 1/8만 거둔다.(4-5)"
인도 역사를 판단하는 부동의 준거는 아쇼카 대왕이다. 실증자료가 희박한 인도에서 그는 많은 석주와 비문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쇼카 대왕의 석주들은 부처님의 탄생년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특히 룸비니에서 발견된 아쇼카 석주는 더욱 그러하다. 네팔에 있는 룸비니는 부처님의 탄생지로 이름 높다. 이곳에 아쇼카 대왕은 부처님이 태어나신 성지임을 표시하는 거대한 석주를 세웠다. 석주에는 아쇼카 문자 93자로 된 다섯줄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데 그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석가족의 성자, 부처님, 여기서 탄생하셨도다(hida budhe jāte Sākyamuni).’
이 석주는 지금도 네팔의 룸비니에서 그대로 볼 수 있다. 인터넷에서 ‘룸비니 아쇼카 석주’로 검색해보면 생생한 사진들을 볼 수 있다. 서기 7세기 중엽 중국의 구법승 현장 스님이 여기에 왔을 때는 석주는 이미 벼락으로 부러져 있었지만 ‘어제 깎은 듯 생생하다.’고 했다. 그 후 오랫동안 잊혀 져 오던 룸비니 동산은 1896년 발굴, 확인됨으로써 룸비니의 전설이 역사적 사실로 입증되었다.
BC 3세기에 각인된 아쇼카 석주에 새겨진 이 명문이야말로 부처님이 실존인물이었음을 밝혀주는 가장 명백한 사료가 될 뿐만 아니라 역사의식과 역사에 관계된 자료가 희박한 인도에서 모든 역사적 판단을 하는 기본 자료가 된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입멸시기를 결정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③ 부처님은 언제 태어나셨는가?
아쇼카 대왕의 즉위년도는 서기전(BC) 268년으로 보는 것이 불교의 정설이다. 세계불교도우의회(WFB)에서는 부처님의 입멸을 서기전(BC) 543년으로 보는 것을 정설로 삼고 있다. 세존의 마지막 행적을 담고 있는「대반열반경」(D16)에서 부처님께서는 임종하시기 직전에 부처님을 뵙고 당신의 마지막 출가제자가 된 수밧다 유행승에게 “수밧다여, 29세가 되어 나는 무엇이 유익함인지를 구하여 출가하였노라. 수밧다여, 이제 51년동안 출가생활을 하면서 바른 방법과 법을 위해서 [여러] 지방에 머물렀나니 이밖에는 사문이 없다.”(D16§5.27)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29세에 출가하셨고, 6년간의 고행과 깨달음을 증득하신 뒤 45년간의 전법을 포함한 51년간 출가생활을 하셨으며, 그래서 80세에 반열반하셨다. 이렇게 본다면 세존께서는 서기전(BC) 623년에 룸비니에서 탄생하신 것이 된다.
대한 불교 조계종 종헌 제1장 제5조는 “본종은 석가모니불의 기원을 단기 1789년(서기 기원전 544년)으로써 기산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세계불교도우의회(WFB)가 공인하는 기원전 543년 설과도 같다.
⑶ 부처님의 출가 – 버리고 떠나기 ▲ 위로
부처님의 출가는 늙고 병들어 죽는 괴로운 현실의 자각에 토대하고 있다. 이러한 자각은 팔상성도에서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것은 부처님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는『디가 니까야』의「대전기경」(D14)에 그 원형이 잘 나타나고 있다.
<주해3>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를 여덟 기간으로 나누어 보는 전통적인 방식을 대승불교에서는 팔상성도(八相成道)라 한다.(『화엄경소』 등) 그것은 다음과 같다.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 도솔천에서 인간으로 태어나신 모습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 룸비니에서 태어나신 모습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 사대문을 통해서 각각 노인/병자/죽은 사람/출가자를 보신 모습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 성을 나와 출가하신 모습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 설산에서 수행을 하신 모습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 보드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실현하신 모습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 바라나시의 녹야원에서 최초설법을 하신 모습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아래서 반열반에 드신 모습
세존께서는 사대문을 통해서 늙은 자와 병든 자와 죽은 자와 출가자를 보고 출가를 결심하셨다.
부처님이 왕자로서 누렸던 영화로운 삶은『앙굿따라니까야』「편안함경」(A3:38)에 묘사되어 나타난다. 부처님은 이러한 영화로운 삶을 사시면서도 늙음과 병듦과 죽음의 불가피성을 통찰하셨고 그래서 젊음과 건강과 장수에 대한 자부심이 다 사라져버렸다고 토로하고 계신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영화를 누렸고 이와 같이 지극히 편안했던 나에게 이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배우지 못한 범부는 자기 스스로도 늙기 마련이고 … 병들기 마련이고 … 죽기 마련이고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죽은 사람을 보고는 자신도 죽기 마련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죽음을 싫어하고 혐오스러워한다. 나도 또한 늙기 마련이고 … 병들기 마련이고 … 죽기 마련이고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다. 만약 내가 죽기 마련이고 죽음을 극복하지 못한 채 다른 죽은 사람을 보고는 싫어하고 부끄러워하고 혐오스러워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적절치 않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내가 숙고했을 때 젊음에 대한 … 건강에 대한 … 장수에 대한 나의 자부심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A3:38)
생노병사는 괴로움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괴로움을 자각하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저 해탈열반과 그에 도달하는 길을 찾는 것이 출가이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왓차여, 재가자의 삶의 족쇄를 버리지 않고도 몸이 무너진 뒤에 괴로움을 끝낸 재가자는 아무도 없다.”라고 단언하신다.(M71)
그리고 부처님은 사유하신다.
“재가의 삶이란 번잡하고 때가 낀 길이지만 출가의 삶은 열린 허공과 같다. 재가에 살면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지극히 청정한 소라고둥처럼 빛나는 청정범행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나는 이제 머리와 수염을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집을 떠나 출가하리라.”(D2; M27 등)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의 탄생과 출가는 중생에 대한 대비원력(大悲願力)때문이라고 강조한다.(華嚴經 등) 죽음으로 대표되는 괴로움은 나 하나에게만 닥쳐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중생이 대면해야만 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죽음으로 대표되는 괴로움은 죽어야만 하는 나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일체 중생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죽어야만 하는 괴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중생에 대한 연민의 마음(大悲心)이 출가의 근본이다. 초기불전의 도처에서도 중생에 대한 자애․연민․같이 기뻐함․평온의 사무량심은 강조되고 있다.
⑷ 부처님의 수행과정 – 길 찾기 ▲ 위로
니까야 가운데 부처님이 깨달으신 과정 즉 성도과정을 담은 경으로는「성스러운 구함 경」(M26)과「삿짜까 긴 경」(M36)을 들 수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부처님은 출가하여 당대 선정의 대가였던 알라라 깔라마(Aaḷāra Kālāma)와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aamaputta) 문하에 들어가서 그들이 가르치는 각각 무소유처 삼매와 비상비비상처 삼매를 아주 빨리 체득하신다. 그렇지만 세존께서는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여 버리고 떠나신다. 왜?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에서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법은 염오로 인도하지 못하고, 탐욕의 빛바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소멸로 인도하지 못하고, 고요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최상의 지혜로 인도하지 못하고,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한다.”(M26; M36)
당대에 삼매 혹은 선정수행으로는 최고의 경지라 할 수 있는 비상비비상처에까지 오른 세존이 더 닦으실 삼매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삼매의 경지가 부처님이 추구하시는 궁극적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이제는 삼매수행과는 저 반대편에 있다 할 수 있는 고행을 떠나신다. 6년간 혹독한 고행을 했지만 역시 세존께서 원하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하시지 못한다. 이렇게 사지가 메마르고 문드러져 죽음의 문턱에 다다라서 부처님께서는 고행에 대한 반성을 하시면서 다른 수행법이 없을까 깊은 사유를 하신다.
‘그러나 나는 이런 극심한 고행으로도 인간의 법을 초월하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특별함을 증득하지 못했다. 깨달음을 얻을 다른 길이 없을까?’(M36 §30)
이렇게 깊은 사유와 반성의 끝에 세존의 사유는 어릴 적 농경제 때 체험한 삼매의 경지에 다다른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고찰하신다.
‘아버지가 삭까족의 농경제 의식을 거행하실 때 나는 시원한 잠부 나무 그늘에 앉아서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물렀던 적이 있었는데, 혹시 그것이 깨달음을 위한 길이 되지 않을까?’
세존께서는 말씀하신다. “그 기억을 따라서 이런 알음알이가 [즉시에] 일어났다. ‘이것이 깨달음을 위한 길이다.’”(M36 §31)
이것은 세존의 삶에 있어서, 아니 인도뿐 아니라 인류의 수행전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발상의 대전환이라고 역자는 파악한다. 세존의 이러한 발상의 대전환이 없었더라면 불교는 존재하지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석서는 이 중요한 발상의 전환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깨달음을 위한 길’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길[道, magga]’이란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한 초선(ānāpāna-ssati-paṭhama-jjhāna)이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길이라는 말씀이다.”(MA.ii.291)
그리고 세존께서는 계속해서 사유하신다. ‘이 행복은 감각적 욕망들과도 상관없고 해로운 법들과도 상관없는데, 그것을 내가 왜 두려워하는가?’(§32)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결론지으신다. ‘나는 감각적 욕망들과도 상관없고 해로운 법들과도 상관없는 그런 행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32) 그리고 이제 드디어 음식을 드시리라고 대결단을 하신다. ‘이렇게 극도로 야윈 몸으로 그런 행복을 얻기란 쉽지 않다. 나는 쌀밥과 보리죽 같은 덩어리진 음식을 먹으리라.’(§33)라고.
여기서 인용한 이 구절들은 고행에 대한 부처님의 반성이 깊이 담겨 있는 사유이면서 부처님의 발상의 대전환을 볼 수 있는 말씀이기도 하다.
⑸ 아니면 버려라 – 버리기 ▲ 위로
깨달으시기 전 부처님의 수행과정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아니면 버려라.’라고 말하고 싶다. 부처님은 순차적으로 크게 세 가지를 버리셨다.
첫째, 부처님께서는 세속의 삶이 궁극적 행복을 위한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셔서 왕자의 삶을 버리고 떠나셨다. 감각적 욕망을 버리신 것이다.(A3:38)
둘째, 출가를 하신 뒤 부처님께서는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를 만나서 각각 무소유처 삼매와 비상비비상처 삼매를 체득했지만 그것이 깨달음을 위한 길이 아니라고 판단하셔서 버리고 떠나셨다. 수정주의(修定主義 = 선정 제일주의)를 버리신 것이다.(M26, M36)
셋째, 그 후 우루웰라의 장군촌(Senānigama)에서 6년에 걸친 혹독한 고행을 하셨지만 이 고행도 깨달음을 위한 길이 아니라고 판단하셔서 그것도 버리고 떠나셨다. 고행주의를 버리신 것이다.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이 셋을 버리고 나서 무엇을 ‘깨달음의 길’로 받아들이셨는가? ‘감각적 욕망들과도 상관없고 해로운 법들과도 상관없는 행복’이요, 어릴 때 체험한 초선으로 표현되는 행복이 그것이다.(M36)
⑹ 부처님의 성도(成道)과정 - 깨닫기 ▲ 위로
① 깨달음의 새로운 길: 네 가지 禪(初禪/2禪/3禪/4禪)
아마 오비구(五比丘)뿐만 아니라 당대의 모든 고행자들도 고행을 포기하고 세나니의 딸 수자따(SujātāSenānidhītā)가 올린 우유죽을 드신(AA.i.401)세존을 타락자라고 엄청나게 비난했을 것이다. 세존께서는 그러한 수행자들의 비난을 뒤로하고 어릴 때 체험하신 초선의 경지에 들기 위해서 수행에 들어가신다. 이때 세존께서는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해서 초선에 드신 것으로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다. (MA.ii.291)그래서 부처님께는 초선에 드시고 거기에 머물지 않고 더욱더 깊은 경지의 삼매인 제2선, 제3선, 제4선을 차례대로 증득하셨다.
이 네 가지 禪은 부처님이 새로 터득하신 禪이요 ‘감각적 욕망들과도 상관없고 해로운 법들과도 상관없는 행복’이요, ‘깨달음의 길’이다. 초선부터 제4선까지는 불교의 경전에만 나타나는 불교의 삼매이다. 이 새로운 삼매를 바탕으로 하여 부처님께서는 제4선의 경지에 드셔서는 평온을 통해서 마음챙김을 완성하시고(upekkhā-sati-pārisuddhi) 이를 토대로 밤의 초경에 숙명통(宿命通, pubbenivāsa-anussati-ñāṇa, 전생의 삶들을 기억하는 지혜)을 증득하시고, 밤의 이경에는 천안통(天眼通, dibba-cakkhu-ñāṇa, 신성한 눈의 지혜)을 증득하신 뒤, 마침내 밤의 삼경에는 누진통(漏盡通, āsavakkhaya-ñāṇa, 번뇌를 소멸한 지혜)을 체득하셔서 사성제를 꿰뚫으시고 모든 번뇌를 소멸하여 위없는 깨달음을 실현하셨다. 경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누진통을 정형화하여 말씀하신다.
“그런 나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았다. ‘이것이 번뇌다.’라고 … ‘이것이 번뇌의 일어남이다.’라고 …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 ‘이것이 번뇌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았다.
내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볼 때 나는 감각적 욕망에 기인한 번뇌[欲漏]에서 마음이 해탈했다. 존재에 기인한 번뇌[有漏]에서도 마음이 해탈했다. 무명에 기인한 번뇌[無明漏]에서도 마음이 해탈했다.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지혜가 생겼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알았다.”(M36 등)
부처님이 이러한 누진통으로 표현되는 깨달음을 실현하셨기 때문에 드디어 불교가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② 무엇을 깨달으셨는가?
여기서 보듯이 부처님은 사성제(四聖諦) 즉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깨달으셨다.그리고 모든 번뇌를 다 제거하셨다. 부처님의 성도과정을 담고 있는 경들뿐만 아니라 초기불전의 도처에서 부처님께서는 사성제를 깨달으신 것으로 정리되어 나타난다.(Sn. {558}; D2; M91; S56:23; A8:11 등)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는 네 가지로 집약이 되는데 그것이 바로 사성제(四聖諦) 즉 네 가지[四] 성스러운[聖] 진리[諦]이다. 사성제는 괴로움[苦]에 사무치고 괴로움의 원인[集]을 밝히고 괴로움이 소멸된 궁극적 행복인 열반[滅]을 천명하고 열반에 이르는 길[道]을 드러내는 가르침이다. 이처럼 깨달음은 사성제로 정의되고 바른 견해도 사성제에 대한 이해로 설명된다.(M9 등)
⑺ 부처님의 전법과정 – 함께 나누기 ▲ 위로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실현하시고 반열반에 드시기까지의 45년간을 전법의 삶을 사셨다. 『디가 니까야 주석서』에 의하면 세존께서는 웨사카 달(우리의 음력 4월)의 보름날 새벽에 반열반에 드셨다. 깨달음을 성취하신 뒤에 80세에 반열반에 드실 때까지 45년간 부처님은 무엇을 가르치셨는가? 한마디로 표현하면 법(法, dhamma)이다. 부처님의 삶은 온통 법을 가르치신 것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초기불전의 여러 곳에서 부처님은 법을 가르치시는 분으로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그분은 법을 설합니다. 그분은 시작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하며, 의미와 표현을 구족하여 법을 설하여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지극히 청정한 범행을 설합니다.”(A3:65 등)
이처럼 불교는 법(法, dhamma)을 중심으로 하는 체계이다. 그래서 불법(佛法, Buddha-dhamma)이라는 말은 우리에게도 아주 익숙하며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은 불자들의 두 번째 귀의의 대상이 되어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 합니다.(dhammaṁ sāranaṁ gacchāmi)로 모든 불자들이 낭송하고 호지한다.
⑻ 법으로 부처님을 봐야한다 ▲ 위로
① “아무도 존중할 사람이 없고 의지할 사람이 없이 머문다는 것은 괴로움이다. 참으로 나는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러야 하는가? … 참으로 나는 내가 바르게 깨달은 바로 이 법을 존경하고 존중하고 의지하여 머물리라.”(A4:21)
② 이것은 세존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신 뒤 아직 아무에게도 자신의 깨달음을 드러내지 않으신 다섯 번째 칠일에 우루웰라의 네란자라 강둑에 있는 염소치기의 니그로다 나무 아래에 앉아서 내리신 결론이다.(AA.iii.24)
③「법의 상속자 경」(M3)에서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내 법의 상속자가 되어야지 재물의 상속자가 되지 마라.”(M3 §3)라고 고구정녕하게 말씀하셨는데 특히 출가자들이 가슴에 사무쳐야할 말씀이다.
④ 임종에 다다른 왁깔리 비구에게 세존께서는 “왁깔리여, 그만 하여라. 그대가 이 썩어문드러질 이 몸을 봐서 무엇을 하겠는가? 왁깔리여,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S22:87)라고 말씀하셨으며 그런 뒤에 오온의 무상․고․무아를 설하시고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를 설하셨다.
⑤ 이것은 대한불교 조계종의 소의경전인『금강경』에 그대로 계승되어 다음과 같이 강조되고 있다.
“형색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으면[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삿된 길을 걸을 뿐 여래 볼 수 없으리.[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법으로 부처님들을 보아야 한다.(dharmato Buddhā draṣṭavyā)
참으로 스승들은 법을 몸으로[法身] 하기 때문이다.”
⑥ 세존께서 반열반하시기 직전에 남기신 첫 번째 유훈도 바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이다. 세존께서는 간곡하게 말씀하신다. “아난다여, 아마 그대들에게 ‘스승의 가르침은 이제 끝나버렸다. 이제 스승은 계시지 않는다.’라는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아난다여,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선 안 된다. 아난다여, 내가 가고 난 후에는 내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천명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D16)
⑦ 그래서 아난다 존자도 세존께서 반열반하신 지 얼마 뒤에 고빠까 목갈라나 바라문과 나눈 대화에서, “바라문이여, 우리들은 귀의처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문이여, 우리는 법을 귀의처로 합니다.(dhamma-paṭisaraṇa)” (M108 §9)라고 바라문에게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⑧ 부처님께서는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D16 §6.1)라고 유훈을 하셨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후 두 달 뒤에 열린 일차결집일차결집(一次結集, Paṭhama-mahāsaṅgīti)에 참석한 500명의 아라한들은 법을 합송하여 경장(經藏, Sutta-Pitaka)을 결집하고 율을 합송하여 율장(律藏, Vinaya-Pitaka)을 결집하였다.
이처럼 세존께서는 깨달음을 성취하신 직후에도 스스로 깨달은 법을 의지해서 머물리라고 하셨고(A4:21), 45년간 제자들에게 설법하실 때에도 법을 강조하셨으며, 사바세계에서 자취를 감추시는 반열반의 마지막 자리에서도 법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라 유훈하셨으며 부처님이 반열반하신 뒤에 제자들이 제일먼저 행한 것도 법과 율의 결집이다.
3. 초기불교
⑴ 초기불교란 무엇인가? ▲ 위로
초기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직계제자들의 가르침을 말한다. 그러면 왜 직계제자들의 가르침을 초기불교에 넣는가? 초기불교의 직접적인 전거(典據)가 되는 니까야와 아함에 직계제자들의 가르침이 적지 않게 실려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디가 니까야』의 34개 경들 가운데 D10, D33 등 6개의 경들은 사리뿟따 존자와 아난다 존자 같은 직계제자들의 가르침이고『맛지마 니까야』의 152개 경들 가운데서 M3을 위시한 30개의 경들도 여러 직계제자들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상윳따 니까야』와『앙굿따라 니까야』에도 적지 않은 직계제자들의 가르침이 담겨있다. 그러므로 직계제자들의 가르침도 당연히 초기불교의 내용에 포함되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대반열반경」(D22)에서 “법(法)과 율(律)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D16 §6.1)라는 유훈을 남기셨다. 그래서 부처님의 직계제자들은 부처님 입멸 후 2개월 만에 일차합송(一次合誦, 一次結集, Paṭhama-saṅgīti)을 가졌다. 이 일차합송에서 부처님이 제정하신 교단의 규범인 율(律, vinaya)은 우빨리(Upāli) 존자가 읊어서 율장(律藏, Vinaya-Piṭaka)으로 결집되었다. 법(法, dhamma)은 부처님과 직계제자들의 가르침을 모은 것인데 이것은 약24년가량 부처님의 시자 소임을 보았으며 부처님의 사촌동생인 아난다(Ānanda) 존자가 외워서 경장(經藏, Sutta-Piṭaka)으로 결집되었다. 이처럼 빠알리 율장과 경장에 나타나는 부처님과 직계제자들의 가르침을 초기불교라 한다.
⑵ 초기불교의 소의경전은 무엇인가? ▲ 위로
부처님과 직계제자들의 가르침을 초기불교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부처님과 직계제자들의 가르침은 어디에 전승되어 오는가? ① 좁혀서 말하면 니까야와 아함으로 정리할 수 있고 ② 넓혀서 말하면 경장과 율장의 가르침으로 ③ 더 넓혀서 말하면 빠알리 삼장으로 전승되어 오는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① 니까야란 무엇인가?
‘니까야(nikāya)’는 남방 상좌부(上座部, Theravāda) 불교에 전승되어 오는 경장(經藏, Sutta-pitaka)을 말하며 5부 니까야로 구성되어 있다. 니까야(nikāya)는 ni(아래로) + √ci(to gather)에서 파생된 명사로 ‘모음’이란 뜻을 가지며 그래서 서양에서는 collection으로 옮기고 일본에서는 부(部)로 옮겼다.
5부 니까야 가운데『디가 니까야』(Dīgha Nikāya, 長部, 긴 모음, 길게 설하신 경),『맛지마 니까야』(Majjhima Nikāya, 中部, 중간 길이로 설하신 경),『상윳따 니까야』(Saṁyutta Nikāya, 相應部, 주제별로 모은 경),『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 Nikāya, 增支部, 숫자별로 모은 경)은 모두 부처님과 직계제자들의 가르침이 부처님이 직접 사용하신 언어로 알려진 빠알리(Pāli)어로 전승되어온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초기불교의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에다『쿳다까 니까야』(Khuddaka Nikāya, 小部)의 7가지 경들, 즉『숫따니빠따』(經集, Suttanipāta),『법구경』(法句經, Dhammapāda),『자설경』(自說經, Udāna),『여시어경』(如是語經, Itivuttaka),『장로게』(長老偈, Theragāthā),『장로니게』(長老尼偈, Therīgāthā),『본생담』(本生譚, Jātaka)은 당연히 부처님과 직계제자들의 가르침인 초기불교의 영역에 포함되어야 한다. 특히 ‘말씀을 모은 것(經集)’으로 직역되는『숫따니빠따』는 부처님과 직계제자들의 가르침을 모은 가장 권위 있는 경이다.
② 베다의 결집과 니까야의 결집
부처님 말년에 이를수록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방대해졌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많은 가르침을 어떻게 모아서 노래하고 기억하여 후대로 전승해 줄 것인가는 직계제자들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방대한 부처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모아서 전승시킬 것인가? 그것은 기존의 인도 종교계의 전통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불교가 생기기 이전에 이미 인도의 여러 바라문 가문들은 각 가문이 속하는 문파에 따라서『베다 본집』(本集, Saṁhitā)과『제의서』(祭儀書, Brāhmaṇa, 브라흐마나)와『삼림서』(森林書, Āraṇyaka, 아라냐까,)와『비의서』(秘義書, Upaniṣad, 우빠니샤드)를 모아서 노래의 형태로 전승해 오는 전통이 튼튼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예를 들면 전체 10장(만달라, Maṇḍala)으로 구성되어 있는『리그베다』(Ṛgveda의 2장부터 7장까지는『리그베다』파에 속하는 바라문 가문들에서 전승되어 오던 찬미가(sūkta)들을 각각 가문별로 모은 것이다. 예를 들면『디가 니까야』제1권「암밧타 경」(D3 §2.8)에서 언급되고 있는 유명한 바라문 가문들 가운데 하나인 웻사미따(Sk. Viśvāmitra)는『리그베다』3장을 암송(합송)으로 전승해 온 가문의 이름이며, 와마데와(Vāmadeva)는 4장을, 바라드와자(Bharadvāja)는 6장을, 와셋타(Sk. Vasiṣṭha)는 7장을 암송하여 전승해 온 가문의 이름이다. 그리고 8장은 깐와(Sk. Kaṇva)와 앙기라스(Sk. Aṅgiras) 두 가문의 전승을 모은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디가 니까야』를 아난다 존자의 제자들이 합송하여 전승하고,『맛지마 니까야』는 사리뿟따 존자의 제자들이,『상윳따 니까야』는 깟삿빠 존자의 제자들이,『앙굿따라 니까야』는 아누룻다 존자의 제자들이 암송하여 전승해온(DA.i.15) 초기불교교단의 니까야 전승 방법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리그베다』9장은 제사에서 아주 중요한 소마(Soma) 즙에 관계된 찬미가들을 모은 것이다. 1장과 10장은 일종의 잡장(雜藏)인데 가문과 관계없는 시대적으로 조금 더 늦은 찬미가들을 모아서 구성한 만달라이다.
그리고『리그베다』의 각 장은 모두 다시 주제별로 모아져 있는데, 먼저 바라문들의 신인 아그니(Agni, 불의 신)에 관계된 찬미가를 모으고, 다음은 인드라, 그다음은 다른 여러 신들의 순서로 모았다. 이처럼 이미 불교가 생기기 이전부터 바라문들은 주제를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그들의 찬미가를 모아서 노래로 전승하고 있었다. 이러한 베다의 모음은 자연스럽게 부처님 가르침을 주제별로 모은『상윳따 니까야』와 주제의 숫자별로 모은『앙굿따라 니까야』의 결집 방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인도 종교계의 사정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불교교단도 부처님 말씀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이러한 방법론을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특히 부처님의 상수제자였던 사리뿟따 존자와 목갈라나 존자와 마하깟사빠 존자 같은 바라문 가문 출신들에게는 자연스런 추세였을 것이다.
③ 아함이란 무엇인가?
‘아함(阿含, Āgama)’은 북방불교에 전승되어오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이다. 아함(阿含)은 아가마(āgama)의 음역이다. 아가마(āgama)는 ā + √gam(to go)에서 파생된 명사이며 ‘이 쪽으로 전해 온 것’이라는 문자적인 뜻에서 ‘전승된 가르침’을 뜻한다. 아함은『장아함』(長阿含),『중아함』(中阿含),『잡아함』(雜阿含),『증일아함』(增一阿含)의 4아함이 전승되어 온다. 이들은 각각 남방불교의『디가 니까야』(長部),『맛지마 니까야』(中部),『상윳따 니까야』(相應部),『앙굿따라 니까야』(增支部)에 상응한다.
이들은 한문 번역본인 아함(阿含)만 남아있다. 한문 번역본의 저본이 되었을 범본 아가마(Āgama)는 극히 일부 단편만 발견되었을 뿐 지금은 소실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들은 한문으로 축약되어 번역되었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는 초기불교의 일차자료가 되기에는 불충분하다 할 수 있다. 물론 니까야와 비교 가능하기 때문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한편『청정도론』과 여러 주석서와 복주서 문헌들에서는 니까야와 아가마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4부 니까야를 4가지 아가마(catu Āgama)로 부르고 있으며(DA.i.2 등)『디가 니까야』를 ‘디가 아가마’로(DA.i.2)『맛지마 니까야』를 ‘맛지마 아가마’로(MA.i.1)『상윳따 니까야』를 ‘상윳따 아가마’로(SAṬ.i.6)『앙굿따라 니까야』를 ‘앙굿따라 아가마’로(AA.i.3) 부르기도 한다.
초기불교 – 아비담마(아비달마) – 반야․중관 – 유식 – 여래장 – 정토 – 밀교 – 선불교로 전개되어온 불교 2600년 역사에서 남방불교와 북방불교에 공히 같은 형태로 남아있는 불교체계는 초기불교 뿐이다. 그리고 남방․북방으로 다른 경로로 전승되어 전혀 다른 언어와 문자로 지금까지 전승되어온 니까야와 아함이 서로 같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 하겠다.
⑶ 왜 초기불교가 중요한가? ▲ 위로
① 초기불교는 불교의 시작점이요 뿌리이다.
모든 나무에 뿌리가 있듯이 불교 2600년의 전개에도 그 뿌리가 있다. 뿌리를 거부하고 나무가 살아남을 수 없듯이 뿌리를 모르는 불교는 역사를 아는 이 시대의 외면을 받게 될 것이다.
② 초기불교는 불교 만대의 기준이요 표준이며 잣대다.
무엇이 불교고 무엇이 불교가 아니냐는 판단을 위해서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 기준은 불교의 뿌리인 초기불교가 될 수밖에 없다.
③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합리성과 체계성에 바탕하고 있으며 분석적이다. 이는 수학을 토대로 하여 전개되는 과학이라는 현대의 방법론과 일치한다.
5온․12처․18계․22근․4제․12연기와 37보리분법으로 잘 조직되어 있는 초기불교의 교학과 수행체계는 과학적 접근 방법이다. 그리고 나와 세상을 신․수․심․법(身․受․心․法)으로 해체해서 살피는 수행태도는 과학자나 의사가 데이터나 환자를 객관화시켜서 잘 살펴보는 태도와 일치한다.
④ 초기불전의 매개 언어인 빠알리어를 비롯한 범어는 격변화와 동사곡용을 기본으로 하며, 이는 한글과 같은 언어체계이다. 그러므로 한문 경전과 달리 문법적 구조가 정확하다. 따라서 문장을 곡해하거나 왜곡하거나 잘못 이해할 소지가 현저히 줄어든다.
⑤ 초기불교의 이해는 자주적인 진정한 한국불교를 구현할 수 있다.
부처님의 원음을 통해서 중국불교를 비판적인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원효 스님 등이 추구했던 자주불교의 전통을 오늘에 구현할 수 있다.
4. 초기불교의 사상
⑴ 부처님의 가르침[法]은 교학과 수행으로 구성된다 ▲ 위로
부처님의 가르침 즉 초기불교의 법은 니까야와 아함에서 동일하게 전승되어오는 ① 교학(pariyatti)과 ② 수행(paṭipāda, bhāvanā)으로 정리된다.
① 초기불교의 교학은 온․처․계․근․제․연(5蘊․12處․18界․22根․4諦․12緣)의 6가지 주제로 집약된다.
『청정도론』에서 붓다고사 스님은 “여기서 무더기[蘊, khandha], 감각장소[處, āyatana], 요소[界, dhātu], 기능[根, indriya], 진리[諦, sacca],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 등으로 구분되는 법들이 이 통찰지의 토양(paññā-bhūmi)이다.”(Vis. XIV.32)라고 정의하여 불교교학의 근간을 온․처․계․근․제․연의 여섯으로 설명하고 있다. 논장의 두 번째인『위방가』(분석론, Vbh)에도 제1장부터 제6장까지의 주제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불교에서 조석으로 독송되는『반야심경』에도 기본교학은 온․처․계․제․연의 다섯으로 언급되고 있기도 하다.
② 초기불교의 수행은 사념처․사정근․사여의족․오근․오력․칠각지․팔정도의 7가지 주제로 구성된 37보리분법(조도품, 助道品)으로 정리되고 이것은 다시 계․정․혜(戒․定․慧, 계행․삼매․지혜) 삼학과 사마타․위빳사나[止觀] 등으로 체계화되기도 한다.
정리해 보면, 불교의 목적은 행복의 실현이며 특히 궁극적 행복으로 불리는 열반의 실현이다. 이러한 열반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부처님께서는 법을 강조하셨으며 법은 이론적 측면과 실천적 측면을 갖추고 있다. 이론적 측면을 교학이라 부르고 실천적 측면을 수행이라 일컫는다. 교학의 주제는 온․처․계․근․제․연의 여섯 가지로 정리된다. 수행의 주제는 37보리분법을 구성하는 일곱 가지이요 이는 계․정․혜 삼학으로 귀결되며 정은 사마타 수행을 통해서 성취되고 혜는 위빳사나 수행으로 완성된다.(A2:3:10)
온․처․계․근․제․연으로 정리되는 교학은 다시 제(사성제)로 축약되고 37보리분법으로 정리되는 수행은 8정도로 귀결된다. 그리고 사성제의 도성제는 8정도를 뜻하고 8정도의 첫 번째인 정견(바른 견해)은 사성제를 아는 것으로 정의된다.(S45:8) 그러므로 사성제와 팔정도는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는 구조이다. 즉 교학(이론)에는 수행(실천)이, 수행에는 교학이 포함되어 이론과 실천이 함께한다. 부처님의 최초설법인「초전법륜경」(S56:11)은 바로 이 사성제와 팔정도를 천명하시는 가르침이다.
⑵ 초기불교 교학의 주제, 온․처․계․근․제․연(蘊․處․界․根․諦․緣) ▲ 위로
인류가 있어온 이래로 인간이 자신에게 던진 가장 많은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와 ‘세상이란 무엇인가?’와 ‘나와 세상은 어떻게 존재하는가?’와 ‘진리란 무엇일까?’일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불교교학의 출발도 이 세 가지 의문에 바탕을 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답은 오온이요 두 번째에 대한 답은 12처와 18계요 세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12연기요 네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사성제이다.
부처님께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해서는 ① 오온(五蘊, panca-kkhandha)이라 말씀하셨다. 나라는 존재는 물질(몸뚱이, 色), 느낌[受], 인식[想], 심리현상들[行], 알음알이[識]의 다섯 가지 무더기[蘊]의 적집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가진 능력을 ② 22가지 기능[根]으로 정리하여 말씀하셨다.
‘세상 혹은 일체(존재하는 모든 것)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③ 12처(혹은 6내처와 6외처)와 ④ 18계로 말씀하셨다.
나와 세상은 그냥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조물주니 절대자니 신이니 하는 어떤 힘센 존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불교이다. 나와 세상은 조건발생이요 여러 조건[緣, paccaya]들이 얽히고설키어서 많은 종류의 괴로움을 일으킨다. 이러한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를 구명(究明)하여 그 괴로움을 없애야 해탈․열반은 실현된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나와 세상에서 진행되는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를 철저하게 밝히시는데 이것이 바로 ⑤ 12연기로 정리되는 연기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나와 세상과 여기에 존재하는 괴로움의 발생구조과 소멸구조에 대한 연기적 관찰은 궁극적으로 진리[諦, sacca]라는 이름으로 체계화 되는데 그것을 ⑥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저 사성제(四聖諦)라 부른다.
⑶ 5온․12처․18계․22근․4제․12연의 개관 ▲ 위로
나(오온, 22근)와 세상(12처, 18계)과 진리(4성제)와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12연기)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르치고 있는 부처님 말씀을 우리는 부처님의 교학(pariyatti) 혹은 교법이라 부른다. 이것을 한자로 정리하면 온․처․계․근․제․연(蘊․處․界․根․諦․緣)이 되고 숫자를 넣어서 표기하면 5蘊․12處․18界․22根․4諦․12緣이다. 이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 온(蘊, 무더기, khandha): 5온 = ① 물질[色, rūpa] ② 느낌[受, vedanā] ③ 인식[想, saññā] ④ 심리현상들[行, saṅkhārā] ⑤ 알음알이[識, viññāṇa]
㉯ 처(處, 감각장소, āyatana): 12처 = 눈․귀․코․혀․몸․마음[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가지 감각장소[六內處]와 형색․소리․냄새․맛․감촉․법[色․聲․香․味․觸․法]의 여섯 가지 대상[六外處]
㉰ 계(界, 요소, dhātu): 18계 = 12처의 마음[意, 마노, mano]에서 여섯 가지 알음알이를 독립시켜서 모두 18가지가 된다. 즉 눈․귀․코․혀․몸․마음[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가지와 형색․소리․냄새․맛․감촉․법[色․聲․香․味․觸․法]의 여섯 가지와 눈의 알음알이[眼識], 귀의 알음알이[耳識], 코의 알음알이[鼻識], 혀의 알음알이[舌識], 몸의 알음알이[身識], 마노의 알음알이[意識]의 여섯 가지.
㉱ 근(根, 기능, indriya): 22근 = ① 눈의 기능[眼根] ② 귀의 기능[耳根] ③ 코의 기능[鼻根] ④ 혀의 기능[舌根] ⑤ 몸의 기능[身根] ⑥ 여자의 기능[女根] ⑦ 남자의 기능[男根] ⑧ 생명기능[命根] ⑨ 마노의 기능[意根] ⑩ 육체적 즐거움의 기능[樂根] ⑪ 육체적 괴로움의 기능[苦根] ⑫ 정신적 즐거움의 기능[喜根] ⑬ 정신적 괴로움의 기능[憂根] ⑭ 평온의 기능[捨根] ⑮ 믿음의 기능[信根] ⑯ 정진의 기능[精進根] ⑰ 마음챙김의 기능[念根] ⑱ 삼매의 기능[定根] ⑲ 통찰지의 기능[慧根] ⑳ 구경의 지혜를 가지려는 기능[未知當知根] 구경의 지혜의 기능[已知根] 구경의 지혜를 구족한 기능[具知根]
㉲ 제(諦, 진리, sacca): 4제 = ①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 ②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 ③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 ④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
㉳ 연(緣, 조건발생, paccaya, paṭiccasamuppāda): 12연기 = 괴로움의 발생구조와 소멸구조를 나타낸다. ① 무명(無明) ② 의도적 행위들[行] ③ 알음알이[識] ④ 정신․물질[名色] ⑤ 여섯 감각장소[六入] ⑥ 감각접촉[觸] ⑦ 느낌[受] ⑧ 갈애[愛] ⑨ 취착[取] ⑩ 존재[有] ⑪ 태어남[生] ⑫ 늙음․죽음[老死]과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憂悲苦惱]
⑷ 초기불교 수행의 주제 ▲ 위로
불교의 목적은 괴로움을 여의고 행복을 실현하는 것[離苦得樂]이요 이것은 사성제로 정리되고 이것을 체득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러나 괴로움은 그냥 없어지지 않고 깨달음은 문득 실현되지 않는다. 괴로움은 수행을 통해서 없어진다.(S22:101) 초기불전에서 수행의 의미로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술어는 바와나(bhāvanā)이다. 이 단어는 √bhū(to become)의 사역동사 bhāveti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다. ‘되게 하다’라는 문자적인 뜻에서 개발, 수행을 뜻하고 특히 불교의 수행을 통칭하는 전문술어로 정착되었다.
초기불전에서 바와나(bhāvanā)는 다양한 문맥에서 나타난다. 37보리분법을 닦는 것으로도 나타나고(D27 §30) 감각기능을 닦는 것(indriya-bhāvanā)으로도 나타나며(M152)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을 닦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M118) 그 외 여러 문맥에서 등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석서도 다양한 설명을 하고 있다. 37보리분법을 수행이라고 설명하기도 하고(AA.i.81)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닦는 것을 수행이라고 하기도 하며(AA.i.82)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citta-vūpasama) 즉 삼매수행을 지칭하기도 하고(SA.i.106) 자․비․희․사의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을 닦는 것도 수행이라고 한다. 그리고 주석서의 여러 군데서는 향상(vaḍḍhi, vaḍḍhana)을 수행이라고 설명하고 있다.(MA.iii.243 등) 그러므로 향상하는 모든 노력이나 행위를 수행(bhāvanā)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상식적이면서도 적합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⑸ 37가지 깨달음의 편에 있는 법들[菩提分法] ▲ 위로
초기불교 수행의 주제로는 초기불전의 도처에, 특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주제별로 정리한 『상윳따 니까야』「도 상윳따」(S45)부터 시작해서「성취수단 상윳따」(S51)까지의 일곱 가지 주제로 정리되어 있는 37보리분법(菩提分法, bodhi-pakkhiyā dhammā)을 먼저 들 수 있다. 이 37보리분법은 사념처, 사정근, 사여의족,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의 7가지 주제로 정리되어 있는 37가지를 말하며 이것을 초기불전에서부터 ‘깨달음의 편에 있는 법들’ 즉 보리분법이라 부르고 있다.(D27; A5:56; A6:17) 보리분법(菩提分法)은 보디빡키야 담마(bodhi-pakkhiyā dhammā)를 중국에서 보디(bodhi, 菩提, 깨달음) + 빡키야(pakkhiyā, 分, 편) 담마(dhammā, 法)로 옮긴 것이다.(『雜阿含經』,『大般若波羅蜜多經』등) 한글로는 ‘깨달음의 편에 있는 법들’로 직역된다.
초기불교의 수행은 바로 이 37보리분법으로 집약된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이렇게 강조하신다.
“비구들이여, 수행에 몰두하지 않고 머무는 비구에게 ‘오, 참으로 나의 마음은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하기를.’이라는 이러한 소망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결코 취착 없이 번뇌들로부터 해탈하지 못한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대답이다. 무엇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 네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 네 가지 성취수단[四如意足], 다섯 가지 기능[五根], 다섯 가지 힘[五力],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七覺支],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이다.”(「까뀌 자루 경」(S22:101) §4)
5. 초기불교의 목적
⑴ 불교의 목적은 행복의 실현이다 ▲ 위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법이라 한다. 그리고 그 법은 교학과 수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면 부처님은 왜 법을 가르치셨는가?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신 목적이 무엇인가? 이제 불교의 목적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불교의 목적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행복의 실현이다. 부처님은 행복과 행복의 실현을 가르치셨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 경제행위, 정치행위, 문화행위, 철학행위, 의술행위, 종교행위 등 인간의 모든 행위는 행복해지기 위해서이다. 불교도 행복을 추구한다. 그래서 중국에서 한역된 많은 경론에서도 불교의 목적은 이고득락(離苦得樂) 즉 괴로움을 여의고 행복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나타나고 있고(『大般若波羅蜜多經』『大方廣佛華嚴經』『大智度論』등) 성철스님을 비롯한 한국의 많은 스님들도 불교의 목적을 이렇게 표현하여 왔다.(『백일법문』성철스님, 장경각, 1992 참조) 초기불전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양한 행복을 말씀하셨다. 그것을 간추려보면 ① 금생의 행복 ② 내생의 행복 ③ 궁극적 행복이 된다.(혹은 인간의 행복, 천상의 행복, 궁극적 행복, SA.i.328 등)
⑵ 금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 ▲ 위로
① 금생의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봉사하는 삶(보시)과 도덕적인 삶(지계)과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숫따니빠따』「큰 행복 경」(Sn2:4),『디가 니까야』「사문과경」(D2 §14) 등)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많이 배우고 기술을 익히며 계행을 철저히 지니고
고운 말을 하는 것, 이것이 으뜸가는 행복이라네. (Sn {261})
베풀고 여법하게 행하며 친척들을 보호하고
비난받을 일이 없는 행위를 하는 것, 이것이 으뜸가는 행복이라네.”(Sn. {263})
② 내생의 행복을 실현하는 토대로는 봉사하는 삶과 도덕적인 삶 즉 보시와 지계가 대표적으로 강조되고 있다.(『앙굿따라 니까야』「보시로 인한 태어남 경」(A8:35) 등)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자는 사문이나 바라문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과 탈것과 화환과 향수와 화장품과 침상과 숙소와 등불을 보시한다. … 그의 마음은 낮은 곳으로 기울고 높은 [도과를 위해] 닦지 않아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부유한 끄샤뜨리야들이나 바라문들이나 장자들의 일원으로 … 삼십삼천의 천신들의 일원으로 … 야마천의 천신들의 일원으로 … 도솔천의 천신들의 일원으로 … 화락천의 천신들의 일원으로 … 타화자재천의 천신들의 일원으로 … 범중천의 천신들의 일원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이런 것은 계를 가진 자에게 해당하는 것이지 계행이 나쁜 자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계를 지닌 자는 청정하기 때문에 마음의 소원을 성취한다.”(A8:35)
⑶ 열반의 실현이 궁극적 행복이다 ▲ 위로
열반(涅槃, nibbāna)의 실현이 바로 궁극적 행복[至福, parama-sukkha]이다.(paramasukhaṁ nibbānaṁ sacchikaroti, Mil.324; DhpA.iii.261 등) 초기불교의 주된 관심은 바로 이 열반으로 대표되는 궁극적 행복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래서『숫따니빠따』「큰 행복 경」(Sn2:4)에서 세존께서는 강조하신다.
“엄격한 삶을 살고 청정범행을 닦고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보고
열반을 실현하는 것 —
이것이 으뜸가는 행복이로다.”(Sn. {267})
초기불교뿐만 아니라 한국불교에서 조석으로 독송하는『반야심경』의 목적도 ‘구경열반을 증득하는 것([得]究竟涅槃, niṣṭhā-nirvāṇa-prāptaḥ)’이요, 통합종단인 대한불교 조계종의 소의경전인『금강경』도 보살의 근본서원을 “뭇 삶을 모두 무여열반에 들게 하는 것(일체중생 … 아개영입 무여열반 이멸도지 – 제3품)”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 행복인 열반은 문득 실현되지 않는다.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나와 세상과 진리와 조건발생에 대한 교학적인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하고 이를 토대로 한 바른 수행이 필요하다. 초기불전의 도처에서 교학(pariyatti)과 수행(paṭipāda, bhāvanā)은 강조되고 있다. 초기불교의 교학은 온․처․계․근․제․연의 여섯 가지 주제로 정리되고 수행은 37보리분법의 7가지 주제와 계․정․혜 삼학으로 요약된다.
⑷ 깨달음과 이고득락(離苦得樂)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 위로
불교의 목적은 괴로움을 여의고 행복을 실현하는 것[離苦得樂, 이고득락]이다. 물론 열반의 실현이 으뜸가는 행복이다. 그리고 불교는 깨달은 분[佛, Buddha]의 가르침[敎, sāsana]이요 깨달음을 실현하는 가르침이다. 무엇을 깨닫는가? 사성제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면 궁극적 행복인 열반의 실현과 깨달음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둘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괴로움[苦]에 사무치고 괴로움의 원인[集]을 밝히고 괴로움이 소멸된 궁극적 행복인 열반[滅]을 천명하고 열반에 이르는 길[道]을 드러내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사성제) 가운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진리는 괴로움을 여의기 위한 것[離苦]이고 세 번째와 네 번째는 궁극적 행복인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得樂]이다. 그러므로 이고득락이라는 불교의 목적은 깨달음의 구체적인 내용이요 불교의 진리인 사성제와 같은 내용이 된다.
한편 생․노사로 대표되는 괴로움의 발생구조를 밝히는 12연기의 유전문은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원인[集]을 드러내는 고성제와 집성제에 배대가 되며, 생․노사로 대표되는 괴로움의 소멸구조를 밝히는 12연기의 환멸문은 괴로움이 소멸된 경지인 열반[滅]과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道]을 천명하는 멸성제와 도성제에 배대가 된다. 그러므로 12연기의 가르침도 사성제로 귀결된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사성제를 깨닫는 것이며 이것은 12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에 배대(配對)가 되고 동시에 이것은 괴로움을 여의고 행복(열반)을 실현하는 것[離苦得樂]이라는 불교의 목적과도 같은 내용이 된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강조하여 말하면 사성제를 깨닫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고 행복을 강조하여 말하면 이고득락이요 궁극적 행복인 열반의 실현이 불교의 목적이 되며 이 둘은 결국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⑸ 초기불교의 특징은 해체해서 보기이다 ▲ 위로
이상으로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과 불교의 목적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초기불교 즉 부처님의 가르침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초기불교의 핵심을 한 마디로 말해보라면 주저 없이 ‘해체해서 보기’라고 정리할 수 있다. ‘해체(vibhajja)’라는 용어는 이미 초기불전 가운데서 나타나고 있으며(S8:8) 주석서는 “부분(koṭṭhāsa)으로 존재를 해체하는 것(vibhajanta)”(SA.i.279)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해체는 vibhajja(vi+√bhaj, to divide)를 옮긴 것인데 이 위밧자(vibhajja)라는 술어는 빠알리 삼장을 2600년 동안 고스란히 전승해온 상좌부 불교를 특징짓는 말이기도 하다. 그들은 스스로를 ‘위밧자와딘(Vibhajja-vādin, 해체를 설하는 자들)’이라고 불렀다.(VinA.i.61; Vis.XVII.25 등)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고유성질(sabhāva)을 가진 법들로 해체해서 보는 것이야말로 아비담마의 방법론이기도 하다.
그러면 무엇을 해체하는가? 개념[施設, paññatti]을 해체한다. 인간은 실로 개념의 동물이다. 인간은 수많은 대상을 대하면서 무수한 인식이나 관념들을 만들어내고 이러한 여러 관념 속에서 공통 요소를 뽑아내어 종합하여 특정한 개념들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이런 개념을 만들어내면 우리는 즉시 그것에 의미부여를 하게 되고 그것을 실체화하여 그것에 속아버리게 된다. 개념들에 묶여있는 한 진정한 자유, 진정한 해탈이란 없다.
이처럼 해체의 궁극적 지향점은 개념[施設, 假名, paññatti]의 해체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명칭이나 개념에 속게 되면 죽음의 굴레에 매이게 된다고 부처님께서는 초기경의 도처에서 강조하신다. 나라는 개념적 존재는 오온으로 해체해서 보고, 일체 존재는 12처로 해체해서 보고, 세계는 18계로 해체해서 보고, 생사문제는 12연기로 해체해서 보면, 형성된 모든 존재들[有爲法, saṅkhata-dhammā]의 무상․고․무아가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통찰함으로 해서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離欲] 그래서 해탈․열반․깨달음을 실현한다는 것이 초기불전의 도처에서 강조되고 있다. 특히『상윳따 니까야』의「무더기 상윳따」(S22)나「감각장소 상윳따」(S35)나「인연 상윳따」(S12) 등의 많은 경들은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
『상윳따 니까야』「와지라 경」(S5:10)에서 와지라(Vajirā) 비구니 스님은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읊고 있다.
“왜 그대는 ‘중생’이라고 상상하는가?
마라여, 그대는 견해에 빠졌는가?
단지 형성된 것들[行]의 더미일 뿐
여기서 중생이라고 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도다.
마치 부품들을 조립한 것이 있을 때
‘마차’라는 명칭이 있는 것처럼
무더기들[蘊]이 있을 때 ‘중생’이라는
인습적 표현이 있을 뿐이로다.”(S5:10)
여기서 ‘중생’은 개념적 존재[施設, paññatti]이고 ‘형성된 것들[行]’과 무더기들[蘊]은 법들(dhammā)이다. ‘마차’는 개념적 존재의 보기이고 ‘부품들’은 법들의 보기이다. 불교에서 ‘나’라는 개념적 존재[施設, paññatti]를 오온이라는 ‘법(dhamma)’들로 해체해서 보는 것은 이처럼 오온무상(五蘊無常)과 오온개고(五蘊皆苦)와 오온무아(五蘊無我)를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나와 세상 등을 온․처․계․연 등의 법들로 해체해서 보지 못하면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를 통해서 깨달음을 실현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법으로 해체해서 보지 못하면 그는 불교적 수행을 하는 자가 아니다. 개념적 존재로 뭉쳐두면 속는다. 법들로 해체해야 깨닫는다. 뭉쳐두면 속고 해체하면 깨닫는다.
해체해서 보기의 가장 좋은 비유로는「대념처경」(D22)에 나타나는 백정의 비유를 들 수 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마치 솜씨 좋은 백정이나 그 조수가 소를 잡아서 각을 뜬 다음 큰길 네 거리에 이를 벌려놓고 앉아있는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이 몸을 처해진 대로 놓여진 대로 요소(界)별로 고찰한다. ‘이 몸에는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가 있다’고.”(D22 §6; M10 §12)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무슨 뜻인가? 백정이 소를 키울 때도 도살장으로 끌고 올 때도, 끌고 온 뒤에 묶어서 둘 때도, 잡을 때도, 잡혀 죽은 것을 볼 때도, 그것을 베어서 부분마다 나누지 않고서는 그에게 ‘소’라는 인식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뼈로부터 살을 발라내어 앉아있을 때 ‘소’라는 인식은 사라지고 ‘고기’라는 인식이 일어난다. 그는 ‘나는 소를 팔고, 그들은 소를 사가져 간다.’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고기를 팔고, 그들은 고기를 사가져 간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이 비구가 이전의 재가자이었거나 출가를 하였어도[명상주제를 들지 않는] 어리석은 범부일 때는 이 몸을 처해진 대로, 놓여진 대로 덩어리를 분해(해체)하여 요소별로 따로따로 반조하지 않는 이상 그것에 대해 중생이라거나 사람이라거나 인간이라는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다.”(DA.iii.770; MA.i.272)
예를 들면 땅에 떨어진 머리칼을 보고 아무도 아름답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머리라는 특정한 곳에서 특정한 색깔과 특정한 형태로 여인이라는 전체상과 얼굴이라는 부분상에 묶여 있을 때 머리칼을 아름답다 하고 그것에서 애욕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머리칼을 ‘단지 머리칼’로만 보면 그것은 애욕의 대상이 아니다. 양귀비의 눈과 입술이 아무리 예쁘다할지라도 그것은 전체상을 이루고 있을 때 이야기다. 눈을 빼고 코를 분리하고 입술을 도려내어 알코올에 담가두었다면 아무도 그것에서 애욕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만일 애욕을 일으킨다면 그야말로 성도착증환자일 것이다. 그리고 머리칼, 눈, 입술 등은 땅, 물, 불, 바람이라는 네 가지 근본물질들의 조합으로 구성된 것일 뿐이다. 이들을 아름답다 여기는 것은 우리가 관념적으로 취하는 전체상과 부분상에 기인한 것이다. 이처럼 해체해서 보면 무상․고․무아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⑹ 열반을 실현하는 세 가지 교학적인 단계 ▲ 위로
그러면 해체가 왜 중요한가? 궁극적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불교가 제시하는 궁극적 행복은 열반의 실현이다. 그러면 열반은 어떻게 해서 실현되는가? 이제 열반을 실현하는 세 가지 교학적인 단계를 다시 한 번 정리해보는 것으로 본 강좌를 마무리 하고자 한다.
첫째, 해체해서 보기
부처님께서는 나라는 존재나 세상이라는 존재 등의 존재일반을 법(dhamma)이라는 기준으로 해체해서 설하신다. 그것은 초기불전의 도처에 나타나며, 구체적으로는 본 강의에서 정리하여 설명한 5온, 12처, 18계, 12연기 등의 교학체계이다.
둘째, 무상․고․무아
이렇게 존재일반을 법들로 해체해서 보면 드디어 무상(無常, anicca)이 보이고 괴로움[苦, dukkha]이 보이고 무아(無我, anatta)가 보인다.(Dhp. {277}~{279}) 이 무상․고․무아의 가르침은『상윳따 니까야』에만 해도 400여 군데에 나타난다.『청정도론』을 위시한 주석서 문헌들은 ‘무상․고․무아를 삼특상(三特相, ti-lakkhaṇa, tīṇi lakkhaṇāni)’이라고 강조하고 있다.(Vis.XXI.2 등) 북방에서는 무상․무아․열반을 삼법인(三法印)이라 하여 불교냐 아니냐를 구분짓는 잣대로 삼았고,(『大智度論』,『俱舍論記』등) 무상․고․무아․열반의 넷을 사법인(四法印)이라 부르기도 한다.(『大乘莊嚴經論』,『佛說法集名數經』등)
그리고『청정도론』을 위시한 주석서 문헌에서 무상․고․무아는 ‘세 가지 해탈의 관문(tividha vimokkha-mukha)’이라 불리고 있다.(Vis.XXI.67) 무상을 꿰뚫어 알아서 체득한 해탈을 ‘표상 없는 해탈[無相解脫, animitta-vimokkha]’이라 하고, 고를 꿰뚫어 알아 증득한 해탈을 ‘원함 없는 해탈[無願解脫, appaṇihita-vimokkha]’이라 하고, 무아를 꿰뚫어 알아 요달한 해탈을 ‘공한 해탈[空解脫, suññata-vimokkha]’이라 한다.(Vis.XXI.70)
셋째, 염오의 지혜-이욕-해탈-구경해탈지
이렇게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봄으로 해서 존재일반에 대한 염오의 지혜가 생기게 되고, 존재일반에 대한 탐욕이 빛바래게 되고, 그래서 해탈하게 되고, 해탈하게 되면 태어남은 다했다는 해탈의 지혜 즉 구경해탈지가 생긴다.(S22:87 등) 혹은 염오의 지혜가 생기고 탐욕이 빛바래면 소멸로 정의되는 열반을 실현하게 된다.(S12:16 등) 경들에서는 주로 염오의 지혜-이욕-해탈-구경해탈지로 나타난다. 소멸은 열반과 동의어이고(S38:1 등) 해탈은 과의 실현을 뜻한다고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다.(SA.ii.268) 그러므로 해탈과 소멸은 과의 증득이라는 같은 현상을 나타내며 과의 증득은 열반의 체험을 의미한다.
이것이 초기불전의 도처 특히『상윳따 니까야』에서 중점적으로 설해지고 있는 해탈․열반을 실현하는 세 가지 교학적인 단계이다. 본서의 제2장 초기불교 교학에 실린 5온․12처․18계의 가르침은 이 세 단계가 그 핵심이 됨을 강조하고 싶다.
6. 맺는 말 ▲ 위로
이상으로 ‘석가모니 부처님과 초기불교사상’이라는 주제를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와 초기불교와 초기불교사상과 초기불교의 목적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서 설명해 보았다.
소납은 인도에서 10년 유학을 하면서 베다와 제사학(미맘사, Mimāṁsā)을 전공하였다. 학교 수업 외에는 10년 동안 은퇴하신 노교수님들을 방문하여 개인교수를 받으면서 리그베다와 초기 우빠니샤드들과 자이나교의 교전들을 범어로 읽었다. 특히 3년에 걸쳐서 인도 제사학의 기본이 되는『샤따빠타 브라흐마나』(Satapatha Brāhmaṇa)를 산스끄리뜨 원전으로 다 읽었는데 초기불교의 중요 술어들이 아주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래서 인도사상 특히 제사학과 초기 우빠니샤드와 초기불교를 비교해서 하고 싶은 말들이 적지 않다.
불교와 자이나교를 포함한 인도 종교와 사상 전반에서 기본적으로 공유하는 주제는 ① 신 혹은 절대신 혹은 신들(brahma, devatā)의 문제 ② 윤회(saṁsāra)의 문제 ③ 해탈(mokṣa)의 문제의 셋으로 압축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불교에서도 이 세 가지는 중요한 주제이다. 그러나 이 문제가 절대 신의 문제와 윤회의 주체 문제와 진정한 해탈의 문제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① 초기불교에 의하면 절대 신은 없다. 신들은 인간들보다 뛰어난 존재이지만 이들도 윤회한다. 그리고 윤회의 주체(ātman)는 없다. 범아일여가 되는 것 혹은 아뜨만에 계합하는 것은 진정한 해탈이 아니라고 여긴다. 자아가 있다는 인식이나 해탈했다는 인식에 사로잡힌 것일 뿐이다. 그리고 절대 신의 문제는 인도철학 안에서도 달라진다. 신은 인간에게 감응을 하는가? 인간에게 복을 주는가? 복을 준다면 어떻게 주는가? 인간은 신 혹은 신들이 될 수 있는가? 될 수 있다면 어떻게 해서 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육파철학과 자이나교와 불교에서 다 다르다.
예를 들면 8세기에 베단따의 거장 상카라(Saṅkara)는 절대적 신성이라 할 수 있는 브라흐만을 니르구나 브라흐만(nirguṇa brahman)으로 설명한다. 절대적 신성은 이법이나 진리이지 어떤 공덕이나 공능을 상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11세기에 라마누자(Rāmanuja)는 브라흐마는 복덕을 구족하였고(saguṇa brahman) 그래서 인간에게 감응을 한다고 주장한다. 14세기에 마다와(Madhava)는 완전한 이원론으로 브라흐마를 설명하였는데 브라흐마는 인간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단독자로 이해하였다 한다. 그의 사상은 인도를 정복한 이슬람교도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② 그러면 윤회의 주체가 없는데 어떻게 윤회하는가? 14세기에 마다와(Madhava)가 인도철학을 베단따 철학의 입장에서 정리한 사르와다르샤나 상그라하(전철학강요, Sarvadharśana-saṅgraha)에서도 이것을 들어서 불교를 공박하고 있다. 심지어 요즘의 불교학자들 조차도 이 문제를 두고 고민을 하기도 한다. 초기불교의 주석서들은 한결같게 오온의 흐름으로 윤회를 설명한다.
<주해4>
“5온․12처․18계(蘊․處․界)가 연속하고 끊임없이 전개되는 것을 윤회라 한다(khandhānañca paṭipāṭi dhātuāyatanāna ca abbhocchinnaṁ vattamānā saṁsāro ti pavuccati).”(DA. ii.496; SA.ii.97)
“윤회란 오온 등이 끊임없이 전개되어가는 연속이다.(khandhādīnaṁ avicchinna-ppavattā paṭipāṭi)”(SA.ii.156)
상호의존적인 흐름[相續, santati]을 강조하는 이러한 초기불교의 입장은 오히려 문자적으로 함께 흘러감을 뜻하는 삼사라(saṁ+√sṛ, to flow)의 언어적 의미에 더 가까운 설명이라 할 수 있다.
③ 인도의 모든 철학 혹은 종교체계는 해탈(mokṣa)을 설한다. 이것은 인도철학의 가장 큰 특징으로 모든 학자들이 인정하는 주제이다. 그러면 해탈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불교의 가장 진지한 성찰을 담고 있는 주제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해탈은 착각일 뿐이고 견해일 뿐이라는 것이 불교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탐․진․치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해체해서 봐야 하고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꿰뚫어 봐야 하며 그래서 염오가 일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해탈(vimutti)이라고 강조한다.
인도사상과 불교사상을 비교하기 위한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본 강의를 마무리하게 되어 개인적으로는 아쉽게 생각한다. 미진한 소납의 강의를 들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이 인연으로 금생에 진정한 해탈을 실현하는 튼튼한 토대를 만드시기를 기원한다.
약어:
A. Aṅguttara Nikāya(앙굿따라 니까야, 增支部)
AA. Aṅguttara Nikāya Aṭṭhakathā = Manorathapūraṇī(앙굿따라 니까야 주석서)
D. Dīgha Nikāya(디가 니까야, 長部)
DA. Dīgha Nikāya Aṭṭhakathā = Sumaṅgalavilāsinī(디가 니까야 주석서)
Dhp. Dhammapada(법구경)
Jā. Jātaka(本生譚, 자따까)
M. Majjhima Nikāya(맛지마 니까야, 中部)
MA. Majjhima Nikāya Aṭṭhakathā(맛지마 니까야 주석서)
S. Saṁyutta Nikāya(상윳따 니까야, 相應部)
SA. Saṁyutta Nikāya Aṭṭhakathā = Sāratthappakāsinī(상윳따 니까야 주석서)
Sn. Suttanipāta(숫따 니빠따, 經集)
Thag. Theragāthā(장로게)
Vin. Vinaya Piṭaka(율장)
Vis. Visuddhimagga(청정도론, 위숫디막가)
『디가 니까야』 각묵 스님 옮김, 초기불전연구원, 2006
『맛지마 니까야』 대림 스님 옮김, 초기불전연구원, 2012
『상윳따 니까야』 각묵 스님 옮김, 초기불전연구원, 2009
『앙굿따라 니까야』 대림 스님 옮김, 초기불전연구원, 2006~2007
『청정도론』 대림 스님 옮김, 초기불전연구원, 2004.
[출처 : 초기불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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