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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 '보이지 않던 것 :사랑'을 알아차린 후에야 보이는 '자연스러움: 질서'

GraU 2015. 8. 25. 13:26

http://blog.daum.net/tokimm416/2712463   :  마라나타     ㅠㅠ

 

 

Maranatha   http://www.holybible.or.kr/cgi/biblesrch.php?VR=99&QR=maranatha&OD=

 

"주님이 오신다"는 뜻으로 초대교회성도들의 인사였습니다. (고전 16:22) 1

 

성경에서 "마라나타(Maran ata)"라고 하는 용어는 고린도전서 16:22에 단 한번 쓰였습니다. 이것은 본래는 아람어로 기도문에 쓰인 것으로 헬라어로 표기한 것입니다. 이 용어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디다케(가르침이라는 뜻)"의 예식문에서도 발견되며, "우리 주여 오소서(Our Lord come 혹은 Our Lord has come)"라고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2

 

 

 

 

 

 

 

 

 

 

 

 

 

 

천 길 벼랑 끝

100미터 전, 하나님이 날 밀어내신다.

 

"나를 긴장시키려고 그러시나?"

 

 

 

10미터 전까지 계속 밀어내신다.

 

"이제 곧 그만 두시겠지"

 

 

 

1미터 전.

 

" 더 나아갈 데가 없는데 설마 더 미시진 않을거야."

 

 

 

그러자 하나님은

벼랑 끝자락에 간신히 서 있는 나를 

아래로 밀어내셨다.

 

 

 

 

 

 

 

 

 

그때야 알았다.

나에게 날개가 있다는 것을.

 

 

 

http://blog.daum.net/tokimm416/2712451  :   나에게 날개가 있다는 것을

 

 

 

 

 

 

 

 

 

 

 

 

사랑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 분께서 나를

소위3 진정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굳이 나를 밀지 않으셨을테고,

나는 내가 날개가 있슴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분의 사랑이 먼저이지

내가 그 사랑을 깨달음이 먼저가 아닙니다.

 

 

 

 

 

 

많은 경우,

 

역경과 어둠 속에 있는 자와

믿는 자를 구분합니다.

 

 

어린 제 생각에는

모두가 하나님의 자손입니다.

 

빛나는 하나 하나 모두에게

누구나 다 날개가 있슴을 알려주시기 위해,

제 스스로 어둠을 밝힐 눈부신 빛을 이미 가지고 있슴을 알게 하기 위해

 

그 분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있어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순간들에는

내 속에서는 사랑이 아닌

원망과 고통만이 있게 되는 것처럼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이성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게 됩니다.

 

느끼고, 알아채려고 함이 스스로에게서 기인되지 않으면

먼저가  어디인지,  나의 알아차림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그 순서를 알기 어렵습니다.

 

스스로의 안에서, 그 분의 사랑을 깨우쳐 안 사람이 아닌 자는

역경과 어둠에 놓인 자를  다르게 볼 수 밖에 없는 것이

이런 자연스러운 이유일 것입니다.

 

 

 

 

 

 

당장 벼랑에 떨어지는, 어둠에 있는 자를

사랑하는 어린 양을 '쇠'와 '돌'  같은  반석으로  키워내기 위해

자연스럽게 그런 길을 거치도록 '시험에 들게' 하는 것이라고,

 

굳이,

반드시 그리해야함을 강요하고,

믿는 자라면 반드시 그리 여겨야 한다, 이 '무조건' 하지 않거나, 이를 믿지 않는 자는

불경하다 치부해버리는 것.

 

이 억지로 끌고감 : 보이지 않는 폭력 이 오히려 스스로 알아차리는 일을 더욱 더디게 함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면 오히려 그냥 지나치라는, 굳이 신을 거부하였지만 그가 살아가는 동안 항상 갈구했던 사랑을 보려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한 철학자의 말처럼

 

 

강요하거나, "억지로 그리 여기게 만드는" 것이

그 이 스스로가 여기는 자신만의 사랑인 것을 눈치채야 하는 것은,

믿지 않는 자가 어둠에 있는 이유가 그러하리라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안에 아직 믿음이 없거나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온전히 전해주는 "    " 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옳은 길로 인도하려하지만, 저지르는 일만을 경멸하여 이르는 듯 보이도록

야단 만 치게 되는 이유와 다르지 않습니다.

온전히 제대로 전해지는 '것', 그를 바라는 진심의 자리와, 그를  이루기 위한 도구, 방편, 노력 등에 대한 반추 : 나를 되돌아 봄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경험 없이는, 더욱이  그것을 전함 : 쉽게 이해하기는 대화의 기술 을 보태어 이르지 않더라도,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의문을 가지고, 의심을 만들어 반감을 가지게 되는 것은

'모를 때' 에는 당연한 것임을.  그 기전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반대편과의 어울림 또한 보태져서 이루어져서 쌓이는 자연스러운 것임을.

 

사랑의 눈으로 헤아리려 한다면 보이게 되는 것. 

이 또한 자연스러운 것임을.

 

 

 

 

4

 

 

 

 

 

저 벼랑 끝에 이르러서야,

그 고통의 바다를 온전히 겪어 보고서야,

고통의 실체를 뚜렷이 알아채고 나서야,

 

자신이 원래 그걸 겪어낼 힘이

스스로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그 사랑의 진실을

작게나마 눈치 챌 수 있습니다.

 

 

 

 

 

 

사랑의 크나큰 진실, 그 전체 구도를 스스로 볼 수 있는 눈을 뜨기 시작한다는 의미는,

 

나도 모른채 이쪽과 저쪽, 믿는 자로, 믿지 않는 자로 가르는 그 자리

저 속에, 내 속에의 사랑이 아닌, 내가 원하고 바라는 자리 반대편으로의, 버리고 싶고, 떼어놓고 싶고 싫은 : 부정적 의미지음과 감정들이 원래 "내 것"이 아님을,

 

오히려 그렇게 보이는 대상 : 일 이나 사람 을  밖으로 내몰아 화를 내고 밀어내는,

굳이 더 분명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 확실한 경계를 지어버리는,

 

무더기 지어  선을 그어  이쪽 저쪽을 구별하여

더욱이,  강요를 하게 되는 :

내가 생각하는 옮음을 '힘'으로 휘둘러 스스로 느끼지 못한 채  나의 만족을 구하는

 

내 마음 속 소리를 한걸음 떨어져서 쳐다보아, 거기에 휘둘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소위 '의미 개념 특성을 정의하고 추종함(다를 수 있음이 아닌, 맞고 틀림의 잣대로서)에 '보이지 않는 폭력'을 행사하는 자신을 보지 못하는, 아닌 것을 싫어하고 배척하여, 따르라고 강요의 힘을 휘두르게 되는' 자리 는 원래의 그 진의 를 벗어난 것일 공산이 큰 이유로서 말입니다.

 

 

온유한 마음, 충만함이 있는 자리, 성령이 임한 것으로

굳이 이름 붙여, 말씀 하신.

 

눈을 뜬다는 의미.

그 시작.

 

 

 

. . .

 

 

 

 

 

 

 

이는 우리가 가진 진정한 힘이

중세 천년 동안 되풀이 되어 반추되고 또 다시 공고화 된 '앎 자체와 알아내는 능력 : 이성의 빛'을 이야기한 그 자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나에게 날개가 있는 것 자체를 적절한 시기에 자연스럽게 알지 못하게 되면

 

누군가 의식적으로 일부러 엄청난 노력을 들여 도움을 주기 전까지는, 슬프지만 거의 확실히  '끝'까지 모르게 됩니다. 적기에 말을 배우지 못하면 평생 하지 못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말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스럽게 말을 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 있게 됨은, 함께 하는 누군가가 가르쳐 주었던 '기억'에 근간하는 것처럼, 믿음과 앎 : 뒤따르는 이해, 온전히 받아들임, 자연스럽게 행함  의 위계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 머물러 주는 누군가" 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끝까지, 즉  사망에 이르기까지 골짜기에 헤매게 된다는 이 사실은 가엽게 여길 일이지, 봐라 내말이 맞제 할 일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벼랑 끝에서 밀어 주는 것을 사랑으로 느끼지 못함은,

 

닥친 두려움에 사로잡혀  결과적으로는 '스스로 펼치려' 하지 않아서 '추락'의 고통 속에서 계속 머무르면서 나에게 이 '날개 있슴'을 모르게 됨으로, 자기 안의 스스로 만든 벽을, 장애를 보지 못하는, 아니 굳이 보려하지 않는 것으로서, 

 

이는 '날개가 있는 줄 알게 된' 입장에서 보면 다그쳐야 할 문제가 아니라,  '날개있슴'을 알게 된 자신의 기전-자발성-5을 비추어 보아 밝게 안다면, 사랑으로 그를 다독여 일깨워야 할 문제 이리라 봅니다.

 

 

 

 

날개를 펼쳐 내어, 벼랑에서 빠져나옴의 순간 까지도 그것이 오로지 자신만의 능력 이지 '있슴을 알게 해 준 그 사랑의 자리'를 보려고 하지 않음은,

 

원래 기름부음 의 자리가  일방적으로 주는 자리가 아닌, 받는 자의  '' 이 함께 있어야 하는 자리임을 여실히 보이는 반증이라고 봅니다.

진정한 자기자신의 존재를, '나의 자리 : 진정한 실존,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알아차림' 를 스스로 알아차리면, 자연스럽게 내가 벼랑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나에게 날개가 있었슴을 알지 못하게 되었을 것임을 알게 되듯이 말입니다.

 

마찬가지 맥락으로,  평온하고, 아무 일 없는, 오히려 무료하기까지 하다고 느끼는 '현재'에도 나를 사랑으로 보살펴주는 그 분이 계시기에 해를 입지 않고 있다는, 나의 현전 반대편에 있는 '있으면서도 없는 진실 實際 : 범사에 감사하라' 는 그 의미와도 같다고 봅니다.

 

 

 

 

또한,  이 '날개'에 관한 그 분의 크신 사랑 을   온전히 알아차리도록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일 은

 

그리스도의 피, 위대하고 이루기 힘든 의미가 그러하듯이 주고자 하는 이의 진심,

즉 나의 희생으로만 가능할 것입니다.

 

굳이 비장한 느낌의 전장을 앞 둔 결의와도 같은 그것이 아니라

엄청나게 특별하고 신통하여 가까이 할 수 없는 그것이 아니라,

 

실제에 맞추어

진정을 갖추고

가까이 머무는

 

특별할 것 없는 그 자리.

 

우리 모두가 받아 지녀 왔지만, 모르고 있었던 그 자리, 가장 가까이에 , 하나님을 믿고 믿지 않음의 구분지음을 떠나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진정한 사랑의 사역을 묵묵히 하고 계시던 '엄마'의 자리와도 같은,  깨달아 알아차리는 기회가 아니라면 자신이 그 자리에 이르러 보고서야 이해되는,   

 

그 돌봄과 보살핌의 자리

 

되려 이 '어머니'의 상을 나만의 그림으로 그려놓고, 그 평범함으로 무시해 버려온 것과 같은 기전으로,  내미는 손을 왜 보지를 못하니, 내 손 잡아라의 안달이 아닌,

 

자연스럽게 곁에 머물며

내 속에 내가 찾은 "빛"을 비춰주기만 하면 되는 것.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밝은 의 의미이며,

 

 

혼자 이루어 내는 자연스러운 깨달음과

함께 하는 사랑의 힘을 전함으로 스스로 알게 함이

다르면서도 같은 점 또한

 

바로 이것이 아닐까 합니다.

 

 

 

 

 

 

또한

이 알아차림의 순서가

곧 사랑의 질서 : 순서 있슴  로서 바뀌어 읽혀질 수 있슴도.

 

이 근본적인 순서 : 선후 를 알아차림 이 있은 연 후에라야

 

 

내가 제일 사랑하는 이는 하나님 이라는 의미가,

내 사랑의 제일 첫번째 자리는 누구 : 무엇 : 어떠한 상태 이다 하는 의미가,

제대로 전달 되리라 고,

 

다시말해서,  하나님의 사랑은 순서를 매기는 자리가 아닌, 그 것 없이는

내가 순서매기는 자리에 있을 수 조차 없는 그런 것이라고

 

 

감히 여겨봅니다.

 

 

 

그 사랑이 없이는,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끼고 있다 조차 느끼게 되지 못하게 됨을, 그래서 또 누군가의 말을 굳이 빌지 않더라도

 

 

 

"온누리에 사랑이 있슴을."

 

 

 

 

 

 

 

 

 

 

 

 

 

 


 

 

 

 

 

http://blog.daum.net/tokimm416/2712458

 

사랑의 질서를 말하는 글을 굳이 비판적으로6 보게 되는 것은,

 

이해 못할 만큼 그것이 논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안의 기전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인 듯합니다. 오히려,  그것이 무슨 뜻인지 나를 발목잡는 곤란함을 떨쳐내고 용기 내어 한번 물어보게 되는 자리가, 차라리 자신을 사랑하는 자리이며, 논리 보다 훨씬 '실제'에 가까운 자리라고 봅니다. 함께 나오는 찬송의 가사 글귀 들에 언뜻언뜻 비춰지는 + , - 의 자리를 굳이 따질 필요가 없슴이 또한 그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항상 글들 마다 사족으로 붙인 말 처럼

 

니가 뭔데 그런 말을 하노

하는 그 자리. 

 

 

그 소리를 떠들어 대는 것은

그가 아니라

나 입니다.

 

 

 

이는

위에 적힌 '하나님의 사랑' 이라는 단어를

다른 무엇으로 바꾸게 되면

 

그 의미가 바뀐 것으로 이해하게 되는 자리

되려 신성을 더럽히는 자리가 되어버리는 것으로

 

바뀌게 될 것이 아니며,

 

이러한 그 자리를 지칭함의 문제가 아님을 아는 것이

곧  '실제 ㅣ 그 자리' 에 있는 것입니다.

 

 

.

 


 

 

 

그대의 지병은 무엇인가? 당신의 결핍은 무엇인가?
그것을 겸손함으로 감싸 안아라.
그때 비로소 당신의 지병과 약점은
장수와 성공의 장해가 아닌 비결이 된다.


 

나는 오늘도 마음에 쓴다.
‘병이 있는 사람이 장수하고,
약점이 많은 사람이 성공한다’고.

 

- 김난도,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에서

 

 

 

 


 

http://cafe.daum.net/lover3000/Lkzz/2001  :  어려운 일 당할 때

맹꽁이 할배 블로그 : 21세기 찬송가 해설 카테고리 참조 : http://blog.daum.net/osowny/15971046

 

어려운 일 당할 때 나의 믿음 적으나 의지하는 내 주는 더욱 의지 합니다.

세월 지나갈수록 의지 할 것 뿐일세 무슨 일을 당해도 예수 의지 합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 밝게 비춰 주시니 인도하심 따라서 주만 의지 합니다.

세월 지나갈수록 의지 할 것 뿐일세 무슨 일을 당해도 예수 의지 합니다.

 

밝을 때의 노래와 어두울 때의 기도로 위태할 때 도움을 주께 간구합니다.

세월 지나갈수록 의지 할 것 뿐일세 무슨일을 당해도 예수 의지 합니다.

 

생명 있을 동안에 예수 의지 합니다. 천국 올라 가도록 의지 할 것 뿐일세

세월 지나갈수록 의지 할 것 뿐일세 무슨 일을 당해도 예수 의지 합니다.

 

 

 

 

 https://youtu.be/lNdZy4ewG2s

 

 

 

 

 

바람소리 스산해서 그런가

왠지 생각나는 말들이 많...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 의 의미

 

"하느님의 말씀이 싫은게 아니라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싫은거야."

 

심장삽입관 넣기 직전 찾아와서 말씀하시던, 그 노 수녀님

" 하나님과 친구 하시면 편안합니다."

 

http://blog.daum.net/tathata33/17206844

http://blog.daum.net/hyunsan25/539

 

 

바라는 마음을 떠나는 자리는

그 마음이 생기는 자리를 바라 볼 때에라야

시작 되나 보다.

 

 

 

 

  1. http://cafe.daum.net/sanwoolsp/6S2o/37?q=%B8%B6%B3%AA%B6%F3%C5%B8%20%B6%E6&re=1 [본문으로]
  2. (http://tip.daum.net/question/49888015): [본문으로]
  3. 진정을 판단할 자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진정'이란 말을 쓰게 됨은, 굳이 높낮이로 이르게 되는 현재를 스스로에게 일깨움이며, 동시에 [본문으로]
  4. 오히려 이 순간 '니는 그래 잘 아나?' 하는 마음이 올라옴을 쳐다 볼수 있는 것 만으로도 [본문으로]
  5. 자유 의지 [본문으로]
  6. 분석: '비판적 사고'와 '창의력' 의 맥락 :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