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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우파니샤드 ( 이샤 / 마이뜨리 )

GraU 2017. 5. 2.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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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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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와 증오

 

 

 

 =바즈라사트바

 로카나

(마이트레야 라샤·푸쉬파). 



 아미타바

(阿彌陀佛)


 서:

수카바티 

 지각

(想)

연꽃

분석

정욕

 

 

 

 =無量光佛.

 판다라바시니

(아발로키테스바라). 



라트나삼바바

(寶生佛)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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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낌

(受)

寶石 

 평정 초월

아집과 자만

 

 

 

 

 마마키.

 

아모가싯디

(不空成就佛)


 북:

 푸라쿠타

의지

(行) 

成就 

 성취

시기심

 

 

 

 =카르마삼파트

 타라. 














이샤 우파니샤드

 

 



 

 

 

변하는 것들의 세상에서

모든 것은 신으로 덮여 있도다.

그러니 인간들이여

내버림의 지혜를 가져

어느 누구의 재물도 탐내지 말지어다.


인간이여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여 백 년 살아갈 소망을 가질지어다.

그대에게 이 길 말고

업보에 얽매이지 않을 다른 길이 없으리니.


아수라들의 악명높은 세계가 있다.

그곳은 깜깜한 어둠으로 덮힌 곳.

누구든 아뜨만을 알지 못하는 자는

죽을 때마다 이 어두운 세계로 계속해서 떨어질지어다.


아뜨만은

움직임을 알아챌 수 없는 마음의 속도보다도 더 빠르다.

(눈·귀 등) 감각기관들조차 아뜨만을 잡지 못했으니

그것은 아뜨만이 그들 모두보다 늘 그 가고자 하는 자리에

먼저 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뜨만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가장 빠른 속도를 가진 것보다도 더 빠르며

떠다니는 공기도 바로 그에게 의지하여

물에게 물의 역할을 내주도다.


아뜨만은

움직이기도 움직이지 않기도 하며

멀리 있기도 아주 가까이 있기도 하며

이 세상 안에 그리고 이 세상 밖에도 존재하도다.


아뜨만을 아는 사람은

아뜨만 안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본다.

모든 것들 속에서 그 아뜨만을 발견하니

그는 어느 누구도 증오하지 않으리라.


아뜨만을 아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곧 아뜨만이다.

모두가 같은 아뜨만임을 잘 알고 있는 그에게

욕심이나 슬픔이 어찌 생겨나겠는가.


광휘로 빛나는 자

영혼의 몸조차 가지고 있지 않으며

조금도 흠이 없는

감각을 느끼는 신경도

오점도

죄악도 가지지 않은 자

혁명의 눈을 가진 자

그리고 모든 것을 알며

사방 어디든 존재하며

스스로 존재하는 자

그 아뜨만은 사방 어디든 이미 가 있도다.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한 존재인 그는

창조주들을 위해 각각의 의무를 적절히 나누어 알려주었도다.

 

 

 


무지를 숭배하는 자는

어둠 속으로 빠져든다.

그러나 지혜만을 숭배하는 자는

그보다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지어다.


지혜와 무지

이처럼 각기 다른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가르쳐 준 현인들에게서 들었도다.



무지지혜를 같이 아는 자는


무지로써 죽음을 건너고

지혜로써 해탈을 얻으리로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숭배하는 자는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오로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 빠져 있는 자는

그보다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되리라.


눈에 보이는 것만을 숭배하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만을 숭배하는 것


이들이 각기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우리는 현인들에게서도 들었도다.

 

 

 


금빛으로 빛나는 그대 태양으로

진리의 얼굴이 가려져 있으니

오! 태양이여

참된 진리의 길을 가려는 내가

그를 볼 수 있도록 그대의 빛을 거두어주오.


오, 세상의 모든 것을 자라게 하는 이여

오로지 옳은 한 길만을 가는 태양이여

세상으로 통제하며 다스리는 태양이여

최초의 창조주에서 태어난 그의 아들이여


오, 태양이여

그대의 눈부신 햇살을 걷어

그 진정한 진리의 찬란한 빛을 보게 해주오.

내 그대의 은혜로 그를 볼 수 있도록



(아, 이제 그 진리를 깨달았도다)

모든 생명체 속에 존재하는 그 뿌루샤는 바로 ‘나’요.


언젠가는 죽을 내 육신이

헛되이 죽지 않고 불멸함을 얻을 수 있도록

그리고 나서야 이 내 육신이 불에 타 재가 되도록

오움- 의지를 가진 마음이여!

네가 한 일을 기억하라.

네가 한 일을 기억하라.


오 불의 신 아그니여

우리가 좋은 업보를 쌓을 수 있도록 훌륭한 길로 이끌어주오.

오, 신이여 우리의 모든 행위를 아는 그대여

사악한 죄를 우리에게서 멀리 가져가주오.

그대에게 수없이 경배하오.

 

 

 

 

 

 

 

 

 

 

 

 


http://blog.aladin.co.kr/797865117/4119690  중에서

 



산스크리트어인 우파니샤드는 세 말이 합성된 단어로 


upa 우파는 가까이란 뜻이고, 

ni 니는 아래란 뜻이며, 

shad 샤드는 앉다란 뜻이다.   1


신비주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제자가 스승에게 가까이 가서 그분의 발 아래에 앉는다는 뜻이다. 스승들의 가르침이 구전으로 전해오다 문헌으로 남아 경전이 되었고 이것들을 통칭하여 <우파니샤드>라 한다. 


스승들의 가르침에 대한 탐구가 후세에 있었고 이런 기록들을 <베다>라 하는데 네 가지 종류의 베다가 있다.


< 리그베다   Rig-Veda>,
< 야유르베다  Yajur-Veda>,
< 사마베다  Sama-Veda>,
< 아타르바베다  Atharva-Veda>이다.   


베다가 쓰여진 연대에 관해서는 분명하지 않고 그 내용을 보아 기원전 2400년과 1200년 사이의 신비주의자들의 가르침으로 어림한다. 


< 베다><우파니샤드>에 대한 또 다른 명칭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 우파니샤드>는 오랫동안 구전으로 전해왔으며 문자화된 것은 기원전 8세기와 5세기 사이이고 현재 108개가 남아 있다. 이것들 가운데 13개를 묶어서 <우파니샤드>의 정수라고 말하기도 한다. 



고대 인도사람들은 일찍이 인생에 관해 사유했으며 


나중에는 

아트만 Atman  과   브라만 Brahman 이란 말로 함축된 

자아 self  와   참 존재 True Being 와의 관계에 관해 사유했다. 


아트만과 브라만의 관계를 깨달은 사람은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해탈은 산스크리트어 모크사 moksha의 중국어 번역으로 

그 뜻은 혼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평온을 위한 낭독'  (처음과 끝)

 


오움 -

 


저것이 완전하고 이것도 또한 완전하도다.

 

완전함으로부터 완전함이 생겨나왔도다.

 

완전함의 완전함을 빼내었으나 완전함이 남은 것이었도다.

 


오움 - 


평온. 평온. 평온.

 

 

 

 

 

 

 

 

 

 

 

비교종교학 이명권, 아쉬람의 메세지 중, 원문 찾아볼 것

 

http://blog.daum.net/imkkorea/13378356

 

 

 

불자광장

 

http://cafe.daum.net/BLDM/I9uu/239     :  샹카라

 

 

http://cafe.daum.net/BLDM/I9uu/226  : 우파니샤드

 

 

 -아래옮김




 

4. 우파니샤드의 세계

1) 우파니샤드의 뜻과 기원



우파니샤드(Upanisad), 즉 '가까이에 앉는다.'라는 뜻을 지닌 용어의 어근(語根)을 고찰해 볼 때, 거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무지(無知)를 없애는 것과 브라만에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중적 의미 속에는 일찍이 비밀스런 가르침의 특징이 내포되어 있었다. 예컨대 교사가 되기 위하여 스승에게서 1년을 배우지 않는 학생에게는 그 가장 높은 비밀이 전해질 수 없었다. 가르침이 비밀스럽다는 이유는 우파니샤드의 어근을 분석해 보면 알 수 있다. 우파니(Upa-ni)와 샤드(sad)의 합성어를 분석해 보면, 샤드라는 '앉다' 앞에 접두사인 '우파니'가 '가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의 가까이에 앉아 있는 다는 것은 일정 정도의 학습기간에 스승의 가까이에 앉아서 가르침을 비밀스럽게 전수받는다는 의미를 생각 할 수 있게 한다. 이것은 인도의 전통적인 가르침의 방식과 관련이 있다.


이들의 전통적인 가르침의 방식은 숲에서 은밀하게 진행 되었다. 그런 점에서 우파니샤드는 숲속에서의 가르침을 담은 ‘밀림서(密林書)’ 즉 ‘아라냐카(Āranyaka)’의 사상과 맥을 계승하고 있다. 『아라냐카』는 원래 베다의 제의 해설서인 『브라흐마나』의 보충적 문서였지만, 『리그베다』의 본집인 『상히타』의 부록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숲에 속한다”라는 문자적인 의미를 지닌 『아라냐카』는 숲속의 은둔자들에게 제사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인간과 우주에 대한 신비적 사색을 하게 해 줌으로써 우파니샤드로의 길을 열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아랴냐카』에서 설명되고 있는 제의적 진술은 성스러운 것으로 여겨지고 있고, 적절한 자격 없이 어설프게 진행되는 부적절한 제의는 인간에게 위험을 초래 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마을에서 공공연히 배우는 것이 아니라, 숲속에서 은밀히 홀로 배워야 했다.


제의 문서인『브라흐마나』의 보충적 주석서로 출발한 『아라냐카』는 점차 제의를 비유와 상징으로서의 알레고리적인 방식으로 해석하게 됨으로써, 제의의 실제적인 해석을 제시하고자 했던 『브라흐마나』와는 점차 결별을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둘 사이가 완전히 절연된 관계는 물론 아니고 제사에 관해 『아라냐카』는 더욱 명상적이고 사색적인 경향으로 흘러갔다는 뜻이다.


특히 베다의 교훈에 따라 


브라만을 학습하는 학습기(學習期, brahmacharya)와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는 가주기(家住期, grihashta)를 거쳐서 

숲 속에 은둔하면서 철학적 사색과 경전 연구를 위해 은둔기(隱遁期, vānaprastha)에 


접어든 사람들 곧 ‘바나프라스타(Vānaprastha)’는 초기 우파니샤드보다 분명 시대적으로 앞선 개념이다. 바나프라스타는 문자적으로 “숲에 거주한다”는 뜻으로 힌두인의 일생의 4단계(Āshrama, 아쉬람) 가운데 3단계에 해당한다. 


마지막 4번째 단계는 이 은둔기를 지나 방랑걸식하며 

브라만의 지식을 가르치는 ‘유랑기(流浪期, sannyāsa)’다.


밀림서인 『아라냐카』가 제의문서인『브라흐마나』보다 베다의 해석에 있어서 더 사색적이었던 것처럼, 이제는 『아라냐카』보다 한결 더 깊은 심오한 사색의 단계로 들어선 작품의 결실이 베다의 끝을 차지하는 베단타 철학 곧 우파니샤드로 탄생하게 되었다. 


우파니샤드에게 주어지는 최대 공약수로서의 집약적 표현은 바로 우주와 인간의 근원적 자아인 아트만(Ātman) 혹은 브라만(Brahman)의 본성에 대한 진술이다. 


이 본성을 언급하는 우파니샤드의 표현은 종종 ‘비밀스런 단어(密語)’, ‘금언(金言)’, ‘비밀스런 본문(密本)’, 또는 ‘비밀스런 의미(密意)’로 제시된다. 그리하여 우주와 인간의 본성을 말함에 있어서 비밀스런 가르침의 형태는 다양한 비유를 통하여 나타난다.


그 가운데 부정적(否定的) 방식의 가르침인 ‘무엇도 아니고 무엇도 아니다’라는 뜻의 ‘네티 네티(neti neti)’의 양식은 아주 독특하다. 어떤 명제에 대한 진술을 함에 있어서 그 어느 것도 단정적으로 혹은 긍정적 형식으로 설명 되어질 수 없고, 오직 부정의 형식을 거쳐야 지고(至高)의 뜻이 드러날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마치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제 1장에서 “도를 도라고 하면 영원한 도가 아니고 이름 지어 붙인 것은 영원한 이름일수 없다(道可道非常道名可名非常名)”는 것과도 통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부정의 접근형식 외에도 


존재의 ‘숨’ ‘죽음’ ‘탄생’의 뜻과 관련되는 ‘잘란(jalān)’이라든지, 

“진리 가운데 진리”를 뜻하는 “사티야스야 사티얌(satyasya satyam)” 

또는 “궁극적 목적”으로서의 “타드바남(tadvanam)" 


같은 단어가 비밀스런 가르침을 이루는 주요 표현 양식이다. 


물론 ‘옴(Om)’과 같이 우주의 비밀을 드러낸다는 독특한 신비적 표현도 사용되고 있다.


이 같은 우주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비밀스런 가르침을 전수하기 위해 베다의 스승이 제자에게 숲속에서 신비한 가르침을 전수했고 그것이 우파니샤드의 형태로 드러나게 되었다. 


『아라냐카』가 ‘밀림서’라는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숲속에서의 교육’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면 『우파니샤드』는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보다 깊은 신비적 사색의 결과물인 ‘텍스트로서의 가치’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깊은 철학적 사색의 결과는 제사 중심적 바라문 계급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제의 계급을 어느 정도 부정하고 나선 왕족이나 무사(武士) 출신인 크샤트리아 계급이 주종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우파니샤드의 등장인물을 보더라도 전사(戰士)나 지혜로운 임금, 왕자, 그리고 귀족들이 지혜로운 가르침을 전수하고 있다.

예컨대 『찬도기아 우파니샤드』에서는 웃달라카 아루니(Uddālaka Āruni)가 5명의 학식 있는 바라문들에게 “깨어있는 상태의 아트만”(Ātman Vaishvānara)의 본성에 대하여 가르침을 주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깨어 있는 상태”라 함은 인간 의식의 4단계 중의 첫 단계로서 지능을 가지고 외계 사물을 판단하는 단계를 말한다. 그런데 웃달라카 자신도 아트만의 본성에 대해 참된 가르침을 줄 수 없는 한계를 깨닫게 되자 이들 6명은 모두 아쉬바파티 카이케야(Ashvapati Kaikeya) 왕에게 가서 참된 가르침을 받는다. 이처럼 『우파니샤드』는 기존의 제사 중심의 해설서인 『브라흐마나』를 중심으로 한 바라문의 전문적 권위가 지혜로운 왕이나 현자들의 수중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바라문적 사고에서 크샤트리아의 사고체계로의 이동은 제사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특히 윤회(輪廻)의 이론은 바라문의 사고이기보다 왕들 중심의 크샤트리아들이 제기한 사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바라문 계열에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도인들도 잘 수긍하려고 들지 않는다. 오히려 크샤트리아 계급의 한가한 자랑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기본적인 사상적 기초는 바라문에게 있지 크샤트리아 계급일 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파니샤드 본문이 지시하고 있듯이 왕과 전사 계급의 지적이고 철학적인 사색의 역할과 그 영향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아트만-브라만의 교리는 이미 『브라흐마나』에서 그 사상적 맹아를 보였고, 『리그베다』의 사상에 대한 논리적 발전을 보여줌으로써 베다 사상의 전체적인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우파니샤드』의 철학은 아리아인(Aryan)들의 것이라기보다는 인도의 원주민이었던 드라비다인(Dravidian)의 영향이 더욱 컸으리라는 주장도 종종 제기되고 있다. 그 이유로는 시간이 점차 경과하면서 드라비다인의 혈통이 아리아인들에게 더욱 확산되어 갔고, 아리아인들의 전투적인 기질보다는 드라비다족의 사색적 분위기가 『우파니샤드』의 내용과 더 일치된다는 주장이다. 뿐만 아니라 언어의 변화과정도 드라비다인들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아직 입증 된바가 없기에 다만 상호 영향을 미친 정도로 밖에 이해 할 수 없다. 『우파니샤드』의 범신론(汎神論, pantheism)적 경향은 고대의 물활성(物活性)적인 정령론(精靈論)적 견해에서 출발하여 아리아인들의 신인동형론(神人同形論, anthropomorphic)적 자연신들과 대조를 보이면서 점차 하나의 철학적 결과물로 발전해 갔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우파니샤드』는 『베다』의 사상의 끝을 이루는 것이지만 인도의 초기 사상에서 그 맹아를 보였던 것이고, 아리아인들과 드라비다인들(Aryo-Dravidian) 사이의 문화적 종교적 혼합 형태의 사상적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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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파니샤드의 철학적 중요성

 


『리그베다』나『사마베다』혹은『야주르베다』와 같이 초기나 중기의 『베다』가 신들에 대한 찬양이 중심 내용을 이루었다면, 베다의 최종적 결론을 구성하는 베단타 사상의 핵심은 변전하는 만물의 근저에 놓여있는 근원적 실재에 대한 탐구라는 점에서 우파니샤드의 지고한 가치가 있다. [문다카 우파니샤드]의 다음 대화 내용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훌륭한 집안의 사람, 사우나카(Śaunaka)가

앙기라스(Angiras)에게 예의를 갖추며 다가와 물었다.


"존경하는 선생님이시여,

무엇을 먼저 알아야 

다른 모든 것을 알게 되겠습니까?"


 

이 말은 세계의 모든 다양한 현상 속에서 그 모든 변화의 배후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한 가지 근원을 알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잡다한 지식의 이면에 흐르는 근원적이고 통일적인 지식의 추구 그것이, 제의 중심의 [브라흐마나]에서 출발하여 은자들이 숲속에서 탐구하던 숲의 서(書) [아라냐카]를 거친 결과 얻어지는 심오한 철학적 오의서(奧義書)인 [우파니샤드]의 탄생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파니샤드에 와서는 베다의 여러 신들이 우주의 창조 속에 드러나는 '하나의 빛(One Light)'을 증거 해 주는 메신저일 뿐이다. 베다의 찬송에서 우파니샤드의 철학적 관심의 이동은 객관적 대상의 세계에 대한 탐구에서 주관적 내면세계로의 이동이라는 사고의 대전환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마치 탈레스와 같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서양의 자연 철학이 물질적 혹은 우주적 대상 세계의 탐구였다면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자신과 그 내면 세계로 철학적 관심의 방향을 전환시킨 것과도 유사한 혁명적 의식의 전환이다. 그것은 바로 자아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아, 그것이야말로 역으로 우주의 혹은 자연의 본질을 해석하는 실마리가 된다고 본 것이다. 우주의 심장으로서의 '실재'(Real)는 영혼의 무한한 깊이 속에서 반영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우파니샤드는 그러한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에 이르는 내면세계로의 영적 탐구에 대하여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말해주고 있고, 진리야말로 내면에 도사리고 있다고 여러 곳에서 다양한 비유를 들어 강조한다. 이러한 사상적 맹아(萌芽)의 씨앗은 후기 베다인 [아타르바베다]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최초의 운명적 인간(purusa)을 만들 때 신들은 그들 가운데 거하였다." 


육체의 죽음을 피 할 수 없는 인간 속에도 신들이 거주 한다는 이 사상에서 신인(神人)의 합류 또는 '하나 됨'이 예고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최초의 인간'으로서의 '푸루사(purusa)'는 샹키야(Sānkhya) 철학체계에서 최초의 원인(原人)이지만 동시에 영원한 인간이다. 또한 푸루샤는 인간의 참 자아(the Self)이며, 절대자요 순수의식이다. 그리고 물질세계(prakriti)의 변화를 관찰하는 '증인'이기도 하며, 푸루샤(순수의식)와 프라크리티(물질세계)의 결합을 통해 우주가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푸루샤는 [우파니샤드]의 베단타 철학에서 아트만(ātman)과 동일시되고 따라서 동시에 브라만(brahman)과도 동일시되고 있다. 



[카타 우파니샤드]에서 푸루샤와 브라만을 동일시하는 예를 한군데 살펴보자.

 



"손가락만한 크기의 푸루샤는 

몸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그가 과거와 미래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그(푸루샤)에게서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진실로 이것(푸루샤)이야말로 그것(브라만)이다."


 

여기서 "손가락만한 크기의 푸루샤"(angustha-mātrah puruso)는 다른 [우파니샤드]에서도 발견되는데, 그 크기의 작음을 비유한 것일 뿐이다. 


앞서 본 라마누자(제한적 불이론자)와 림바르카(不一不異論)는 푸루샤를 '손가락만한 크기'라고 [우파니샤드]가 말하고 있는 점에 대하여, 예배하는 자의 마음에 푸루샤는 작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주장한다. 


그러나 동시에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의 경우에서 푸루샤로서의 '자아'는 "쌀이나 보리알처럼 작지만 모든 것의 통치자요 모든 것의 주인이다." 이렇게 볼 때 마음은 '손가락'이나 '곡물' 혹은 '원자(原子)'처럼 지극히 작은 것 같으나 영혼에 대한 명상을 통하여 지고의 상태에 도달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역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푸루샤가 몸 중앙에 있다는 것은 내면의 깊은 영혼의 중심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포함한 모든 시간의 주인이다. 


2


그러한 푸루샤를 [카타 우파니샤드]의 이어지는 본문에서 계속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손가락만한 크기의 푸루샤는 

몸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마치 연기 없는 불꽃과 같이.

그는 과거와 미래의 주인이다.

오늘도 내일도 동일하다.


진실로 이것(푸루샤)이 그것(브라만)이다."


 


여기서 푸루샤의 속성을 연기 없는 불꽃에 비유하고 있다. 연기 없는 불꽃은 투명하다. 내면의 영혼이 그 무엇에 가려져 있지 않다. 순수한 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그 순수 의식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영원한 시간의 주인이 된다. 


여기서 시간의 주인이라는 문제에 대해 라다크리쉬난3은 독특한 해석을 내린다. 예컨대 "과거와 미래의 주인"이라는 것은 "무시간적인(timeless) 절대자라는 뜻이 아니라 시간적 질서와 흐름의 통제자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푸루샤의 기능은 무시간적인 절대자의 역할에서 다소 축소된 단순한 시간적 통제자의 역할이라는 차별이 생긴다. 푸루샤가 순수 의식의 차원에서는 브라만과 동일하지만 시간성의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차별성을 보이는 듯하다. 그러면서 동시에 라다크리쉬난은 이러한 신성(神性)이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Idea)와 다르지 않다고 판단한다.

 


주지하다시피 우파니샤드에서는 희생제의를 강조하던 그 이전의 종교적 풍속은 열등한 것으로 배격된다. 그 대신 지혜의 우선성을 강조한다.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 본문은 이러한 내용을 잘 보여주고 있다. 희생제의를 강조하던 그 이전의 [베다]의 문헌들과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자.

 



"이제 실로 세 개의 세계가 있다.

인간의 세계, 조상의 세계, 신들의 세계가 그것이다.


인간의 세계는 자식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지 

다른 수단을 통하여 되는 것이 아니다.


조상들의 세계는 의례와 같은 행위로 구제되는 것이고


신들의 세계는 지혜로 획득된다.


실로 신들의 세계는 최상의 세계다.

그러므로 지혜를 찬양하라."

 


현실적 인간의 세계와 죽은 조상들의 세계 그리고 죽음이 없는 영원한 신들의 세계라는 세 개의 세계를 상정해 놓고, 가장 중요한 세계는 바로 신들의 세계임을 밝힌다. 이러한 신들의 세계는 과거와 같이 동물의 희생제의를 바치는 행위로서가 아니라 지혜(vidyā)를 통해 획득 되는 세계다. 그러므로 우파니샤드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은 지혜다. 산스크리트어의 "비드야(vidyā)"는 엄격한 의미에서 "지식(knowledge)"이다. 그런데 이것은 세속적인 지식이라기보다는 궁극적 실재를 아는 지식이다. 그런 점에서 이성의 감각에 기초한 지식이라기보다는 직관적 혹은 계시적 통찰력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성서에서도 "너희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할 때의 지식과 상통한다. [찬도기야 우파니샤드]에서도 제의의 수행 그 자체는 '신에 이르는 길'에 있어서 지혜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등하게 묘사된다.

 



"이 (다섯 아그니에 대한) 지혜를 아는 자,

그리고 숲에서 신념을 가지고 엄격히 수행하는 자들은


빛에 이르고 

다시 낮 (날)에 이르며,

다시 빛나는 달빛의 밝은 보름 동안 (날)에 이르고,

다시 태양이 북반구로 향하는 동안의 여섯 달에 이른다.


이 여섯 달에서 일 년으로, 

일 년에서 태양으로,

태양에서 달로, 

달에서 번개로 간다.


거기 그곳에서 인간이 아닌 인간 (초인)이 그들을 브라만에게로 데려간다.

이것이 신에 이르는 길이다."




 

이처럼 신에게 이르는 길은 먼저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혜가 없이 그저 제의의 희생제례나 보시(布施)를 행하는 사람은 신에게 이르는 길이 참으로 아득하다. 계속 이어지는 [찬도기야 우파니샤드]의 본문을 살펴보자.

 



"그러나 속세에 살면서 희생제의를 수행하고 공적인 일과 자선을 행하는 자들은 


(죽어서 불에 태워진 다음) 

연기로 가고, 

또 연기에서 밤으로, 

밤에서 (달빛 없는)보름동안의 어두움으로, 

또 어두운 보름 동안에서 태양이 남반구로 향하는 여섯 달로 나아간다. 


그러나 그들은 일 년의 그해(그 시간 내)에 도달하지 못한다."



 

제의 중심의 수행자와 지혜 중심의 수행자의 차이를 선명하게 비교시켜 주고 있다. 우파니샤드의 수행자의 처소는 숲이다. 반면에 일반 세속인들은 세상 속에서 희생 제의와 보시를 행하는 정도로 수행을 한다. 그러나 이들의 차이는 너무나 크다. 신들에 이르는 길이 그 만큼 아득하게 차이가 날 뿐 아니라 지혜의 수행자가 아니고서는 오히려 죽어서도 신에게 이르지 못하고 윤회를 거듭 할 뿐이다. 더구나 악행을 하는 자는 인간으로 태어나지도 못하고 개나 짐승 또는 천민으로 태어난다. 계속되는 [찬도기야 우파니샤드]의 본문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業報를 마친 사람) 중에 선한 행위를 한 자들은

곧 좋은 탄생을 보게 되는데,

바라문(사제)으로 태어나거나 크샤트리아(武士계층) 혹은 바이샤(평민)로 태어난다.


그러나 악(惡)을 행한 자들은 곧 나쁜 탄생을 보게 된다.

개나 돼지나 천민으로 태어난다."

 


이같이 제의수행 보다는 지혜를 강조하는 것이 [우파니샤드]의 일반적인 특징이지만 동시에 [찬도기야 우파니샤드]에서는 인간의 일생 자체가 곧 제사행위와 같다고도 말한다. 


태어나서 24년 동안의 청년기는 아침의 제례와 같고, 

그 다음의 44년의 중년기는 중천(中天)의 제례요, 

그 이후 48년간의 노년은 마지막 저녁의 제례와 같다. 


각 제례 때 마다 해당되는 숭배의 신이 있는데, 


아침은 바수(Vasus) 신으로서 모든 생명을 지탱하는 호흡을 상징한다. 


중천의 제례에는 루드라(Rudra) 신이 관계된다. 루드라 또한 생명의 호흡을 의미하지만 '울게 하는 자'라는 뜻이 있다. 44년 동안의 중년기에 질병으로 괴로움을 당할 때 이 루드라를 부름으로써 치유함을 얻는다. 


그리고 남은 48년 동안 질병으로 괴로움을 당하면 역시 생명의 호흡인 아디티야(Adityas)를 부른다. 


이와 같이 지혜를 얻어 질병을 극복하고 건강하게 116년을 산다. 이 모든 일생이 곧 제사의 삶과 같다는 것이다. 결국 제사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혜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이 제사라는 지혜다. 


그 제사의 중심에는 "호흡"이 있다. 


그러나 제사의 의미를 더욱 깊이 생각해 보면 그 가운데 자기-희생이라는 철학적 함의가 있다. 자기희생은 곧 자기-부인(否認)이다. 이를 잘 설명해 주는 사례로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파니샤드]의 서두에서는 말의 희생제사(aśva-medha)와 관련하여 우주의 각 부분을 말의 각 몸체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옴(aum),

새벽(usā)은 실로 희생제물인 말의 머리(śirah)이며

태양(sūryas)은 말의 눈(caksuh)이다.

바람(vātah)은 그의 호흡(prānah)이며


바이쉬바나라(Vaiśvānara)라는 불(agnir)은 말의 벌린 입(vyāttam)이다.

일 년(samvatsara)은 희생되는 말의 몸(ātmā)이며

하늘(dyauh)은 말의 등짝(prstham)이다.

대기(antariksam)는 그의 배(udaram)요

땅(pritivī)은 그의 발굽(pājasyam)이다. ..."

 


여기서 희생제사에 사용되는 말은 우주의 각 주요 구성 부분을 이루는 몸체로서 하나의 유기적 통일성을 이루는 우주를 상징하여 나타내고 있다. 말은 특히 전시에 사용되는 중요한 도구였던 것을 감안하면 말의 전진은 힘찬 우주의 전진과 비교 된다. 말이 전쟁에 나가 승리를 거두고 영광스런 귀환을 하게 될 때 도시의 한 복판에서 제사의 희생물이 된다. 그리고 제의를 집행한 왕은 황제라는 칭호를 얻는다. 


이 같은 말의 희생제사와 관련하여 [사타파타 브라흐마나]에서는 우주적 해석을 길게 하고 있다. 말 희생제사의 우주적 해석은 "자기-부정"이라는 각도에서 종교적 진리를 해석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설명되고 있다. 


말이 전시에서 승리했지만 자기를 희생해야 했듯이, 인간의 삶의 방식도 태양과 땅이 그러하듯이 우주의 한 구성요소로서 자기를 희생하며 살아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주가 존재하는 양식은 각자의 희생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주 자체가 희생이며 제물이듯이, 인간의 삶 자체도 희생이며 제사다. 말이 희생되어 우주의 일부를 구성하듯이 인간은 자기-희생 즉, 비움(renunciation)을 통하여 지상의 권력이나 부귀 대신에 영적인 해방을 얻게 된다. 특히 우파니샤드에서 욕망과 무지는 영원한 해탈을 얻지 못하게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기도와 희생제의는 영적 삶의 수단은 되지만 참된 희생제의는 에고(ego)의 포기, 곧 비움에 있다는 것이다.

 


우파니샤드의 현자들은 인도 전통 풍속이 담지하고 있는 카스트(caste)의 굴레에 매어있지 않다. 오히려 영적 우주의 세계로 인간의 영역을 확대시키고 있다.


 "그것이 바로 너다"  

라는 "타트 트밤 아시(tat tvam asi)"의 선언에서처럼, 


인간은 더 이상 어떤 제도와 풍습에 얽매이는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본질인 브라만, 그것(Tat)과 다름 아니라는 혁명적인 선언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다시 묻고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인간이 도달하게 되는 최종의 목적은 다음 세상에 더 좋은 하늘에서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카르마(karma, 業)의 우주적 법칙에서 벗어나 참된 영혼의 자유를 얻는 것이다. 


『우파니샤드』가 『베다』의 내용을 중시하고 그것을 깊이 연구 계승 하지만 그 중심된 내용의 가르침은 오히려 훌륭한 스승들의 개인적인 경험과 가르침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스승들 가운데 야즈나발키야(Yājnavalkya)샨딜리야(Śāndilya)와 같은 이들이 있다. 이들 스승이 전개하는 제자들과의 대화의 내용들이 우파니샤드의 전체 중심 내용을 이루며 그 중심주제는 바로 "내가 곧 브라만"이라는 생각의 결론을 얻는 것이다. 과거의 신들에 대한 제의적 풍속과 사회적 온갖 구속의 억압에서 벗어나 내면의 근원적 자유를 얻는 것, 이것이 우파니샤드의 최고(最高), 최종(最終)적 가르침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와 중요성이 있다. 이제 다음에서 우파니샤드의 중심 개념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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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뜨리 우파니샤드


성자 마이뜨리의 이름을 따서 ‘마이뜨리 우파니샤드’, 혹은 ‘마이뜨리 성자의 가르침이 들어있는 우파니샤드’라는 의미에서 ‘마이뜨라야니야 우파니샤드’라고 부르기도 한다. 계보는 까타 우파니샤드, 쉬베따쉬바따라 우파니샤드, 따이뜨리야 우파니샤드 등과 같은 야쥬르 베다계열에 속한다. 


전체 일곱 장(adhy ya)으로 되어있는데, 어떤 본에는 2 장에서 끝을 맺는 것도 있다. 사실 이 우파니샤드의 1, 2 장은 5 장 이후의 부분보다 상대적으로 오래 전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후반부는 후에 덧붙여진 것으로 결론짓고 1, 2 장 부분 만을 정통본의 범위로 인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본격적인 산문체로 문장이 매우 길며, 내용은 절대적인 ‘하나’와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다양성’의 관계, 우주의 원리를 설명하는 브라흐마, 비슈누, 쉬바의 상징성, 지고(至高)의 존재에게로 다가가는 지름길인 ‘오움’ 소리 등이다.








제 1 장


옛부터 내려오는 모든 제화(際火)를 사용하는 제례는 브라흐만에 올리는 제례이니, 

(제례를 올릴때) 제사장은 제화(祭火)를 만들고 나면, 이제 아뜨만에 명상을 해야한다. 그래야 그 제례가 진정 완성되고 부족함이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 명상의 대상이 되는 자 ‘아뜨만’이 누구인가.


 ‘숨(息)’이라 불리는 그는 누구인가. ( 1. 1. )




‘브리하드라타’라는 왕이 있었다. 

그는 이 육신(肉身)내버림의 지혜에 대하여 고민하다가, 아들을 왕좌(王座)에 앉히고 스스로 숲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서서 팔을 들고 태양을 응시하는 심한 고행을 하였다. 천 일이 지나자, 연기없는 불처럼 스스로의 광휘로 타오르는, 아뜨만을 깨달은 자, 훌륭한 ‘샤까얀야’라는 성자가 나타났다. 


그가 왕에게 말했다. ( 1. 2. ) 


“일어나시오, 일어나시오. 

소원이 무엇이오.” 


왕은 그에게 경배하고 말하기를


“존경하는 분이여, 저는 아뜨만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당신께서 그 아뜨만, 진리를 알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저에게 그것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하였다. 


그러자 샤까야나 성자가 대답했다.

“그대는 가장 어려운 문제를 묻고 있소. 

그 소원은 들어주기에 매우 어려운 것이니 다른 소원을 말해보시오.4

그러자 왕은 그의 발에 엎드리며 이렇게 말했다. 



“존경하는 분이여, 


뼈, 살껍질, 근육, 골수, 살, 정액, 피, 점액, 눈물, 콧물, 똥, 오줌, 바람, 담석, 가래 이런 것들로 만들어진 이 냄새나는, 기반도 없는 육신을 가지고 욕망을 즐기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욕망, 분노, 탐욕, 미혹(迷惑), 두려움, 낙담, 시기(猜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것을 얻는 고통, 허기, 목마름, 노령(老齡), 죽음, 질병, 슬픔과 같은 것들이 지배하는 이 육신을 가지고 욕망을 즐기는 것이 무슨 소용 있는 일이겠습니까. ( 1. 3. )


빈대, 모기와 같은 미물조차 수 없이 죽어 없어지고, 

풀과 나무들도 계속 생겨나고 죽습니다. 


훌륭한 자, 훌륭한 장수, 세상에 이름 높은 수듐나, 부리듐나, 인드라듐나, 꾸발라야쉬바, 야우나바쉬바, 바드르야쉬바, 아쉬바빠띠, 샤사빈두, 하리쉬짠드라, 암바리샤, 나후샤, 샤르야띠, 야야띠, 아나란야, 욱샤세나 등 왕들과 (가장 용맹스럽다는) ‘마르타’나 ‘바라따’족의 왕들이면 다 무엇합니까. 


그들도 많은 친족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그 많은 재산을 놔두고, 이 세상을 버리고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훌륭한 자들, 반인반신(半人半神)간다르바, 악마, 신들의 하인 약샤, 괴물, 귀신, 떼를 지어 다니는 영(零들), 악령, 뱀, 흡혈귀 그 무엇이든 다 무엇합니까.

큰 바다도 마르고, 산봉우리도 무너지고, 별자리도 바뀌고, 바람도 끊어지고, 땅도 가라앉고, 신들의 머무는 자리도 바뀝니다. 

아무리 젊은이가 선녀와 술로 지새도 허망하고, 사람이 애써 육신을 살찌워도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와야함을 이제 제가 아는데, 육신을 가지고 욕망을 즐기는 것이 제게 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당신 만이 저를 구원해주실 수 있습니다. 

이 속세에서 저는 물 없는 우물 속에 든 개구리입니다. 

당신이 저의 유일한 길입니다. 당신이 저의 유일한 길입니다.” ( 1. 4. )




제 1 장 끝























제 2 장



그러자 훌륭한 성자 샤까얀야가 기뻐하면서 왕에게 말했다.

“훌륭한 왕 브리하드라타여, 이슈바꾸 왕조의 이름을 드높이는 왕이여, 

바람 중에도 가장 빠른 마루뜨 신으로 알려진 왕이여, 


이제 곧 그대가 소원한 것을 얻을 것이니, 

그대는 아뜨만을 아는 자가 될 것이오. 


(자, 들어보시오.)


이것이 바로 그 아뜨만이오.”


“그 아뜨만은 어떤 것입니까.” 라고 왕이 다시 묻자,
성자 샤까얀야가 대답했다. ( 2. 1. )



“마이뜨리 성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멈추지 않고 저 높이 올라가는 숨(息),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어디든 다니며, 

어둠을 밀어내는 그 존재가 바로 아뜨만이라 하셨소. 


평온의 상태에 있는 사람, 5 

그의 육신에서 부터 상승하여 지고의 빛에 도달하고 

그 자신의 형태로 나타나는 그가 아뜨만이오. 


바로 그 불멸하며, 두려움 없는 자가 브라흐만이오. ( 2. 2. )



왕이여, 이것이 바로 브라흐만의 지혜이며, 

훌륭한 성자 마이뜨리가 가르친 것이니, 


모든 우파니샤드에 담긴 것도 바로 이 지혜라오. 

내 그것을 이제 설명하리다......






발리킬리야 사람들은 그 어떤 죄악도 없게하고, 

훌륭한 지혜를 가지고, 독신을 지켜 정력을 낭비하지 않으며6 살고 있었다. 

그들이 쁘라자빠띠에게 말하였다. 


“존경하는 분이여, 

이 육신은 의식(意識)이 없는 수레와 같습니다. 


이처럼 의식 없는 것이 그 어떤 초월적인 힘으로 인해 

의식을 가진 것처럼 서 있게 되는 것입니까. 


움직이게 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당신께서 알고 계시는 그것을 저희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

그러자 쁘라자빠띠가 말하였다. ( 2. 3. )




“독신을 지켜 정력을 낭비하지 않는 훌륭한 자여, 

그는 저 높이 서 있는 자로서, 어떤 속성과도 관련이 없는 자이다. 

그는 순수하고, 성스럽고, 비어있으며, 평온하고, 숨조차 쉬지 않도다. 


그에게는 아뜨만도 없고, 끝도 없고, 또 그는 파멸치 않으며, 안정되어있고, 영원한, 태어난 적이 없고, 스스로의 힘으로 서는 자이다. 


그는 그 자신의 위대한 힘으로 산다. 바로 그에 의지하여 (이 육신이)의식을 가진 것처럼 서 있는 것이다. 그가 바로 육신을 움직이게 하는 자이다.” 


그러자 그들이 다시 물었다. 


“스승님, 그처럼 아무런 기반이 없는 자가 어떻게 의식(意識)을 가진 것처럼 서 있는 것입니까? 그 움직이게 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쁘라자빠띠가 대답했다. ( 2. 4. )



“그 세밀하고,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며, 보이지도 않는 존재는

 ‘뿌루샤’라는 이름으로 불리도다. 


그의 한 부분이 육신 안에, 마치 사람이 잠에서 깰때 잠들어 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않듯, 그 이전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않고 머물러 있도다. 


그 뿌루샤가 모든 개개인의 안에, 지성(知性)으로 뭉쳐져 들어가 있는 그것은 

이름하여 ‘흙을 아는 자’7 이다. 


생각, 결단력, 자만심이 모두 그의 존재를 나타내는 징표이며, 

그는 또 세상 모든 개개인인 창조주 쁘라자빠띠이기도 하다. 


그에 의지해서 이 육신이 의식(意識)을 가진 것 처럼 서 있는 것이다. 

그가 바로 움직이는 자이다.“ 


그러자 또 다시 그들이 물었다. 


“스승님, 그처럼 아무런 기반이 없는 자가 어떻게 의식(意識)을 가진 것처럼 서 있는 것입니까? 그 움직이게 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 2. 5. )





“처음에는 쁘라자빠띠 만이 홀로 있었다. 그는 아무런 즐거움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 자신에 대해 명상하여, 자식들을 만들어 냈다. 그가 보니 자식들이 돌과 같이 지혜도 없고, 숨도 없이, 그저 기둥처럼 서 있기만 하였다. 그는 즐겁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생각했다. ‘이들을 지혜롭게 하기 위해서 내가 이들 안으로 들어가야 겠다.’ 그는 스스로를 바람처럼 만들어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하나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스스로를 다섯으로 나누었다. 


내쉬는 숨, 

들이쉬는 숨, 

브야나 숨, 

하강숨, 

평숨이 


그들이다. 


그 

내쉬는 숨을 ‘쁘라나’라고 했고, 

들이쉬는 숨을 ‘아빠나’라 불렀으며,


이 두 숨을 떠 받치고 있는 숨을 ‘브야나’라 부르고, 

아빠나 처럼 들이 쉬면서 먹은 음식을 세밀하게 조각 조각으로 나누고 그 세밀한 조각들을 육신의 모든 부분에 나누어 주는 숨은 ‘사마나’라 했다. 


브야나 숨 보다 높이, 그 대공(大空) 중에 있는 숨이 우다나 숨이다. 그래서 먹고 마신 것을 올리고 내리는 일을 하는 것은 우다나 숨이다.

(제례에서) ‘우빤슈’라고 불리는 그룻은 저 ‘안따르야마’라 불리는 그릇과 반대쪽에 놓는다. 안따르야마 그릇은 우빤슈 그릇의 저 반대쪽에 놓는다. 이 두 그릇 사이에 신이 불을 피우니 그 불이 뿌루샤요, 이 뿌루샤는 불이었도다. 현자(賢者)들이 말했나니,


이것이 우주의 불이로다.
그것은 뿌루샤와 함께 있는 것이며,
그것에 의지하여 먹는 음식이 소화되는 것이다.
그는 바로 사람들이 귀를 덮고도 듣는 소리이니,
그가 떠날 때가 되면,
더 이상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는 스스로를 다섯 등분하여 깊숙히 두었다. 


그는 마음으로 되어있고, 

그 몸은 숨이며, 

그 모습은 빛이며, 

생각은 진리이며, 

그 아뜨만은 대공(大空)인 자였다. 


그러나 그는 아직 즐겁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즐겨볼까.’ 


그는 구멍들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 다섯 감각들로 대상들을 즐겼다. 


그의 말(馬)들은 행위하는 기관이요, 

육신은 마차, 마부(馬夫)는 마음이요, 채찍은 그 본성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바로 그에 의지하여 마부가 말을 모는 것처럼 이 육신이 도공(陶工)의 회전판처럼 돌고 또 돈다. 그렇게 해서 이 육신이 의식을 가진 것처럼 서는 것이오, 그러므로 그가 움직이게 하는 자이다. ( 2. 6. )



현자(賢者)들이 말하기를,


이 아뜨만이 

스스로는 (육신에) 닿지 않으면서

업의 밝고 어두움에 따라, 

한 육신에서 다른 육신으로 옮겨 다닌다. 



그는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세밀하며, 인지될 수 없고, 만질 수 없으며, 자각의식이 없기 때문에 나타나 행하지도 않는다. 드러나 행하는 자가 아니라면 ‘행하는 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는 순수하고, 늘 한결같고, 흔들림이 없고, 오점이 없고, 노여움이 없고, 욕심도 없고, 방관자와 같이 가만히 스스로 서 있는 자이다. 


그는 그 자신을 속성들로 만든 장막으로 덮고 있다. 

그는 진리만을 먹는 자이다. 진리만을 먹는 자이다. ( 2. 7. )“




제 2 장 끝










제 3 장



그들이 또 물었다. 


“스승님, 스승님께서 설명하신대로, 그 아뜨만의 훌륭함이 그러함을 알겠습니다만, 그와 다른 아뜨만이 있습니다. 


업(業)의 밝고 어두움에 따라 이러 저러한 자궁으로 들어가고, 8


그로 인해 위로 다니기도 하고, 아래로 돌아다니기도 하고, 


즐거움과 괴로움을 겪기도 하는 아뜨만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존재입니까 ?” ( 3. 1. )




그러자 쁘라자빠띠가 말했다. 


“물질적인 아뜨만이라 불리는 것이 있으니, 

그가 업(業)의 밝고 어두움에 따라, 이러 저러한 자궁으로 들어가고, 


그가 위로 다니기도 하고, 아래로 돌아다니기도 하고, 


즐거움과 괴로움을 겪기도 하는 것이다. 



다섯 근원요소들이 가진 세밀한 성질들이 ‘물질’이며, 그 다섯 근원요소들 자체도 ‘물질’이다. 이것들이 결합한 것이 육신이다. 그러므로 육신 안에 그것이 있다고 할때 그것은 물질적인 아뜨만을 말하는 것이다. 


그 물질적인 아뜨만 안에 있는 불멸하는 아뜨만은 (물에 피었으나) 물이 닿지 않는 수련 꽃과 같다. 그러므로 자연의 속성에 영향받는 것은 (불멸의 아뜨만이 아니라) 이 물질적 아뜨만이다. 


그 영향으로 인해 그는 미혹(迷惑)의 단계로 간다. 이 미혹으로 인하여 그 사람은 그 자신 안에 있는 신(神)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 신(神)이 그의 안에서 행위를 하게 하는 자이다. 


속성의 흐름에 영향을 받아 그에 따라 태어나고 죽으며, (두려움에) 떨며, 당황하며, 욕망을 품으며, 괴로와하며, ‘이것은 나, 이것은 나의 것’이라 하며 자만한다. 이렇게 사람은, 새가 덪에 걸린 것처럼, 스스로 이 (물질적)아뜨만에 얽매이는 것이다. ( 3. 2. )

9


다른 많은 스승들도 말하기를,

하는 자는 이 물질적 아뜨만이다.



라고 하였으니, 감각기관들을 통해 ‘행하게 하는 자’는 (몸)안에 있는 뿌루샤이다. 


쇠 덩어리가 불에 달구어져, 대장장이가 두들기는 대로 여러 형태로 굳어지듯, 그 물질적 아뜨만은 안에 있는 뿌루샤에 달구어져 여러 속성들이 두들기는 대로 여러형태로 굳어진다. 그 형태는 네 겹으로 된 덮개10이기도 하며, 열 네개11, 여든 네 가지12나 되기도 하니, 그는 다양성의 주인이다. 이들 다양한 존재들은 도공의 회전판처럼 그 뿌루샤의 주위를 돈다. 쇠 덩어리가 두들겨 질때 (쇠를 달군 뜨거운) 불이 영향을 받지 않듯, 이 뿌루샤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 다만 그 물질적 아뜨만이 물질에 대한 집착으로 인하여 영향을 받는 것이다. ( 3. 3. )






네 가지 덮개 :   물질,   숨(息),   의식(意識),   지혜

열 네 가지 : 신적인 존재 8 종류(창조자 브라흐마, 창조주 쁘라자빠띠, 인드라, 조상 신, 반인반신 간다르바, 약샤, 악마, 귀신)와 인간 이외의 모든 생물 5 종류(집짐승, 야생짐승, 날개로 하늘을 나는 새 종류, 뱀이나 곤충 등 기어다니는 것, 풀, 나무 등 움직이지 않는 것 ), 인간 1 종류 이다.

여든 네 가지 : 수 없이 많이. 






현자(賢者)들이 말하기를,

이 육신은 성적(性的) 결합에서 생겨난 것이다.
어둠 속에서 자라나
요도를 통하여 밖으로 나온 것이다.
그것에 뼈가 만들어지고, 살이 덧붙여지고
피부가 그 위에 씌워지고
그 안에 똥, 오줌, 담즙, 가래, 골수, 지방질 등이 든 것이다.
보물창고가 보물을 보관하고 있는 것처럼
여러 질병들을 담고 있는 것이 육신이다.

라고 하였다. ( 3. 4. )



또 현자(賢者)들이 말하기를,


암성(暗性)이 가진 성질은 


미혹, 두려움, 낙담, 잠, 게으름, 무심함, 노령(老齡)
슬픔, 배고픔, 목마름, 비참함, 분노, 불신, 무지(無智), 동경
잔인함, 어리석음, 수치, 정신적 지혜에 대한 무관심
자만, 고르지 못함 등이다. 



동성(動性)이 가진 성질은 


내적 목마름, 애정, 열정, 탐욕, 사악함, 광채, 증오
숨김, 질투, 끝없는 욕심, 불안정함, 변덕, 괴로움, 야망
욕심,   주변사람들에 대한 호의,   환경에 대한 의존
감각을 즐겁지 않게 하는 것에 대한 증오
감각을 즐겁게 하는 것에 대한 몰두

독설, 식탐(食貪) 등이다. 




이러한 성질들을 가진 것이 

물질적 아뜨만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여러가지 모습을 취한다. 여러가지 모습을 취한다.

라고 하였다. ( 3. 5. )




제 3 장 끝










제 4 장




마음을 가라앉힌 발라킬리야들은 경이로워하며,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성자시여, 당신께 깊이 머리숙여 존경을 표합니다. 

당신께서는 진정 가르침을 주는 분이십니다. 당신은 길입니다. 

우리에게는 당신 이외의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물질적 아뜨만이 이 육신을 떠나 진정한 아뜨만과 하나가 된다고 들었습니다. 물질적 아뜨만이 어떻게 그리되는 것입니까 ?“ 


창조주 쁘라자빠띠가 이에 대답했다. ( 4. 1. )


현자(賢者)들이 말하기를,


큰 강에 이는 물결처럼
바다에 이는 파도처럼
죽음이 밀려오는 것은 막기 어렵다.

불구자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듯
모든 사람은
업(業)의 선 악에 따라 업보에 매어있고
감옥에 갖힌 사람처럼 아무런 자유가 없으며
죽음의 신 야마 앞에 선 사람처럼 두려움으로 낙담하고
술에 취한 듯 미혹에 취하며
귀신에 사로잡힌 것처럼 갈피를 못잡고
뱀에게 물리듯 마술처럼 환영(幻影)이며 꿈처럼 사실이 아니며
바나나 나무 줄기 처럼 속이 텅 빈 세상에게 물리고
밤처럼 어두운 욕망으로 어둠 속에 머물며
배우처럼 매 순간 옷을 갈아입으며
색칠한 벽처럼 겉치장의 모습을 하고 있다. 


고 하였다.

또 다른 곳에 현자(賢者)들이 말하기를, 



소리, 촉감, 그리고 모든 것 들은 헛되다.
물질적 아뜨만이 이러한 것들이 의지하여 있는 한
그는 지고(至高)의 자리를 기억하지 못한다. 



고 하였다. ( 4. 2. )




그러한 물질적 아뜨만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베다를 학습하고 매일 마땅히 해야 할 규칙적인 예배를 해야 한다. 각자의 인생의 단계에서 규칙적인 예배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이다. (그에 비하면) 다른 규칙들은 그저 풀 더미와 같다. 이것으로서, 사람은 위로 올라가기도, 아래로 내려가기도 하는 것이다. 베다에서 가르치는 것도 바로 이 규칙이다. 자신의 처한 인생의 단계에서 마땅히 해야 할 규칙적인 예배를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어느 인생의 단계에도 속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인생의 그 어느 단계에도 속하지 않으며, 단지 고행만으로 수행한다고 하면, 전혀 그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다. 고행을 하지 않는다면 아뜨만의 지혜를 얻지 못하며, 업(業)의 완성도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옛 부터 현자(賢者)들이 말하기를, 




고행으로 진성(眞性)을 얻으리라.
진성으로 ‘마음’을 얻으리라.
‘마음’으로 아뜨만을 얻으리라.
그리하여 아뜨만을 얻으면
누구도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고 하였다.( 4. 3. )



브라흐만의 지혜를 아는 자는 

‘브라흐만은 있다’고 한다. 


고행을 통해 죄악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자들은

 ‘고행이 브라흐만에게로 이르는 문’이라고 한다. 


또한 브라흐만에 몰두하여 지속적으로 명상을 하는 자들은 

‘오움’이 브라흐만의 위대함의 상징‘ 이라고 한다. 


이처럼 지혜와 고행과 명상으로 브라흐만을 알 수 있다. 


깨달은 자는 신들보다 높은, 지고의 위치에 있는 브라흐만 조차 초월한다. 

이 세 가지 방법으로서 브라흐만을 구한 자는 스러지지 않는 환희를 가지리오, 영원함을 얻으리오, 질병에서 자유롭게 되리라. 


그러므로 이 ‘수레에 탄 자’는 그 안에 앉아있으면서, 그를 지배했던 것들로 부터 자유로와 지고 그렇게 해서 저 아뜨만과 결합하는 것이다. “( 4. 4. )



그들이 또 말했다. 


“성자시여, 당신은 진정한 스승입니다. 진정한 스승입니다. 

당신께서 설명하신 것을 저희의 가슴 속에 잘 새겼습니다. 


이제 한 가지 더 말씀해 주십시오. 


아그니, 와유, 아디띠야, 시간, 숨, 음식, 브라흐마, 루드라, 비슈누...... 어떤 사람은 이 신에 대해, 또 다른 사람은 다른 신에 대해 명상합니다. 


과연 어떤 신에 대해 명상하는 것이 가장 훌륭합니까 ? “

쁘라자빠띠가 대답했다. ( 4. 5. )



“그 신들은 가장 높고, 불멸하며, 

형체가 없는 브라흐만의 드러난 표상들이다. 


그 신들에 대해 믿음을 갖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희열을 즐기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현자(賢者)들도 , 


이 모든 세상이 브라흐만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 신들에 대해 명상하고 찬양하더라도, 

(잊지 말라) 

결국은 그 신들을 부정해야 한다. 


이 신들을 통해 

사람이 저 높은 곳으로 갈 수 있으나, 

거기 도달하면 더 이상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그는 

(그 어느 신도 아닌) 뿌루샤와 결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 6.)




제 4 장 끝















제 5 장



꾸뜨스야나 성자는 다음과 같이 찬양하였다.

그대는 창조자 브라흐마, 그대는 편재(偏在)의 신 비슈누
그대는 무시무시한 루드라, 그대는 창조주 쁘라자빠띠
그대는 불의 신 아그니, 그대는 바람의 신 와유
그대는 비의 신 인드라, 그대는 달의 신 소마
그대는 우리가 먹는 음식, 그대는 죽음의 신 야마
그대는 흙, 그대는 모든 것이로다.
그대는 ‘흔들리지 않는 자’로다.
그대 안에 모든 자연과 그 속성들이 의지하고 있도다.

세상의 주인이여
그대를 경배하오.
그대는 모두의 아뜨만이며, 모든 것을 즐기며
모든 것의 숨이요, 모든 기쁨과 환희의 주인이라.
그대를 경배하오.
평온의 아뜨만이여,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그대를 경배하도다.
그대는 생각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조차 없으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도다. ( 5. 1. )




처음에 이 세상에는 오로지 암성(暗性)만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지고(至高)의 존재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었고, 

그 지고의 존재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었으며,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것이 동성(動性)이 되었다. 


동성(動性)은 움직여서 다른 모습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것이 진성(眞性)이 되었다. 


진성(眞性)이 움직이면 여기에서 짜여진 즙이 나온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 안에 ‘지성(知性)’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있는 것이다. 


그것은 개체 아뜨만 안에서 생각할 수 있게 하고, 자아의식(自我意識)을 가지게 하며, 창조주 쁘라자빠띠라고도 불리는 그것이다. 


이것은 이미 여러 번 설명한 것이다. 


이 암성(暗性)의 모습은 성(聖)스런 (브라흐만의) 지혜를 구하는 루드라이다. 

동성(動性)의 모습은 성스런 지혜를 구하는 창조자 브라흐마이다.

진성(眞性)의 모습은 성스런 지혜를 구하는 비슈누이다.

이처럼 그 하나가 셋이 되는 것이다. 


그는 여덟이 되고, 열 하나가 되고, 열 둘이,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것이 되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여럿이 됨으로서 모든 생물이 생겨났다. 그가 각각의 생물체 안으로 들어가고 그 안에 다닌다. 그가 그 만들어진 존재들의 주인이다. 그것이 바로 안에 있고, 밖에도 있는 아뜨만이다. ( 5. 2. )




제 5 장 끝





















제 6 장



그는 두 가지 모습을 가졌으니, 하나는 숨(息)이요, 다른 하나는 태양이다. 또 그의 길도 두 갈래이다. 하나는 안으로, 다른 하나는 밖으로 가는 길이다. 이 둘은 밤과 낮에 각각 그에게 돌아온다. 저 태양은 바깥쪽 길을 가는 아뜨만이다. 안쪽 길을 가는 것은 숨이다. 그러므로 안쪽 길을 가는 아뜨만은 바깥 쪽으로 가는 아뜨만을 봄으로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자들이 말하기를,

누구든 ‘아는 자’
죄악에 묶이지 않은 자
자신의 감각을 넘어 (그 이상을)볼 수 있는 자
순수한 마음을 가진 자
그 존재에 의지하여 선 자
늘 성찰하는 자는
그가 곧 아뜨만이다.

라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바깥 쪽으로 다니는 아뜨만은 안으로 다니는 아뜨만을 보고 짐작할 수 있다. 현자들도 말하기를,

태양 안에 있는 황금으로 된 뿌루샤
황금으로 된 그의 자리에서 아래를 굽어보는 그는
심장의 가운데에도 머물고 있으며
그는 또한 음식을 먹는 자이다.

라고 하였다. (6. 1. )



심장 안 연꽃에 들어간, 또 그 안에서 음식을 먹는 그는, 모든 만물을 그의 음식으로 하는 ‘시간’, ‘보이지 않는 존재’로 불리며, 하늘에 들어간 태앙의 불과도 같다. 그 연꽃은 무엇이며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 그 연꽃은 대공(大空)과 같은 것이다. 사방(四方)과 그 사이의 방향들은 그 꽃의 잎이다. 이들 태양과 숨은 서로 가까이 움직인다. 오움과 가이뜨라 만뜨라의 후렴구 부후, 부워허, 스워허 그리고 사비뜨리 찬가로서 그 존재를 숭배하라. ( 6. 2. )



브라흐만의 두 모습이 있으니, 하나는 형상이 있는 것이오, 또 다른 하나는 형상이 없는 것이다. 형상이 있는 것은 진정하지 않은 브라흐만이요, 형체가 없는 것은 진정한 브라흐만이다. 그것이 브라흐만이요, 그것이 빛이다. 그 빛은 태양이다. 그것이 ‘오움’을 아뜨만으로 가지는 것이다. 그는 그 스스로를 세 부분, 아, 우, 머,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이것들로 이 모든 세상이 서로 엮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현자들도 말하기를,

‘오움’을 통하여 태양에 대해 명상하여 그와 결합하라.

고 하였다.( 6. 3. )



현자(賢者)들도 말했나니,

사마베다의 찬양 ‘우드기타’는 ‘오움’이며
‘오움’은 사마베다의 찬양 ‘우드기타’이다.
또한 태양이 우드기타요, 태양이 오움이다.

라고 하였다. 또 다른 곳에서도,

‘오움’이라 불리는 우드기타는
가장 앞에 선 자이며
이름과 형태, 잠, 노령(老齡)과 죽음이 없으며
발이 셋이요, 세 글자로 된 것이며
동굴 속에 있는 다섯 가지 (숨)이로다.

라고 하였다. 또 다른 곳에서는,

그 세 발을 가진 브라흐만은 그 뿌리가 위로 향해 있으며
대공(大空), 바람, 불, 물, 흙 등이 그 가지이다.
‘무화과’ 나무는 그 세상의 이름이요, 세상은 또한 브라흐만이다.
그리고 태양이라 불리는 것이 그 세상의 빛이요
그 빛은 또한 오움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오움으로 경배하라.

고 하였다. 이것(오움)이 바로 우리를 깨닫게 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현자(賢者)들도 말하기를,

이 ‘오움’이야 말로 순수한 글자
이것이 가장 훌륭한 글자이다.
이 글자를 아는 자는 그가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지리라.

고 한 것이다. ( 6. 4. )


(까타 2.16)



또 다른 곳에서는,

이 ‘오움’은 그의 ‘소리로 된 육신’이다.
여성, 남성, 중성은 그의 ‘성(性)으로 된 육신’이요
아그니, 와유, 아디띠야는 그의 ‘빛으로 된 육신’,
가장(家長)의 불, 남쪽의 불, 신을 부르는 불, 이 세 제화(際火)는 그의 ‘입(口)으로 된 육신’
리그베다, 야쥬르베다, 사마베다는 그의 ‘지혜로 된 육신’
부후(地上), 부워허(大空), 스워허(天上) 는 그의 ‘세 세상으로 된 육신’
과거, 현재, 미래는 그의 ‘시간으로 된 육신’
숨, 불, 태양은 그의 ‘열기로 된 육신’
음식, 물, 달은 그의 ‘자라나는 것으로 된 육신’
내 쉬는 숨, 들이쉬는 숨, 그리고 그 사이의 브야나 숨은 그의 ‘숨으로 된 육신’이다.
그러므로 그 ‘오움’은 여기 찬양하는 모든 육신이며
숨(息)이며, 태양인 바로 그것이다.
그러하니 오, 사뜨야까마여,
‘오움’이라는 글자는 위에 있고
그리고 아래에도 있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 6. 5. )



처음에 이것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마부(馬夫) 쁘라자빠띠가 고행을 하여, 이것을 ‘부후, 부워허, 스워허’라는 소리로 말하였다. 이것은 세 가지 세상으로 만들어진 쁘라자빠띠의 가장 물질적인 육신이다. ‘스워허’는 그 육신의 머리요, ‘부워허’는 배꼽, ‘부후’는 발, 그리고 태양은 눈이 되었다.
눈이 바로 사람의 태양이요, 그것은 눈으로 모든 것을 측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눈이 진리이니, 뿌루샤는 바로 그 눈 속에 머물고 있다. 사람이 모든 것을 눈으로 보아 확실히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후, 부워허, 스워허’로서 쁘라자빠띠를 경배하라. 모두의 눈을 모두의 아뜨만으로 경배하라.
현자(賢者)들도 말하기를,

이것(태양)을
모든 것을 지탱하는 쁘라자빠띠의 육신이라 부르니
바로 이(태양) 안에 모든 것이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쁘라자빠띠) 안에 그 (태양의) 빛이 숨어 있으므로
쁘라자빠띠를 경배하도다.

라고 하였다.( 6. 6.)



따뜨 사비뚜르 바렌니얌
(그 찬란한 사비뜨리에)

‘사비뜨리’는 태양을 말하는 것이다. 브라흐만의 지혜를 가르치는 스승들이 이 구절을 통해, 아뜨만을 귀히 여기는 자라면 사비뜨리를 택하여 경배하라고 가르친다.

바하르고 데바스야 디마히
(우리는 그 신(神)의 광휘에 명상합니다.)

신(神)이란 ‘태양 신 사비뜨리’를 말하는 것이요, 그러므로 브라흐만의 지혜를 가르치는 스승들이 이 구절을 통해 그의 광휘로 불리는 것에 명상하라고 가르친다.

디히요 요 나하 쁘라쬬다야뜨
(우리의 지혜에 활력을 불어넣었도다,)

브라흐만의 지혜를 가르치는 스승들이 이 구절을 통해 그 신(神)이, 우리가 (밝은)지혜를 얻도록 우리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를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앞의 찬가의 구절 중에)

 ‘바하르가(광휘)’는 저 태양 안에 머물고 있는 자, 눈동자 속에 머물고 있는 자를 지칭하는 것이다. (태양의)광선(‘바하’)들이 그에 따라 움직이기(‘가’) 때문에 ‘바하르가’라고 불린다. 혹은 뜨겁게 달구어서(‘바하르가야띠’- 달구다) 세상을 오그라들게 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 (우리로 하여금 두렵게 (바하-두려워하다) 하는 루드라도 또한 ‘바하르가’로 불린다. 


‘바하(bh - 빛내다)’는 그가 이 세상에 빛을 켜는 존재임을, ‘라(ra-기뻐하다)’는 그를 이 세상 만물이 기뻐함을, ‘가(ga- 가다)’는 이 세상 만물이 그에게로 가고 그로부터 옴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바하르가’ 라고 불리는 것이다. 


수리야(태양)는 그로부터 소마가 계속해서 짜여져 나오기 (su) 때문에 ‘수리야’로 불린다. 사비뜨리(태양)는 그가 앞으로 나아가기 (su) 때문에 ‘사비뜨리’로 불린다. 아디띠야(태양)는 (수분 등을)먹기(ada) 때문에, 쁘라나(숨)는 그가 정화(pu)하기 때문에, 아빠(물 apa)는 영양을 주므로(py ) 각각 그러한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므로 현자(賢者)들이 말하기를

‘불멸(不滅)’이라 불리는 그 아뜨만은
생각하는 자, 인지하는 자, (움직여)가는 자, 배설하는 자
즐기는 자, 행위하는 자, 말하는 자, 맛 보는 자, 냄새맛는 자
보는 자, 듣는 자, 만지는 자이다.
그는 편재하는 자요, 육신에 든 자이다.

라고 하였다. 또 다른 곳에서도 현자(賢者)들이 말하기를, 


세상에 두 가지가 있을 때 

그가 듣고, 보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니,
그것은 그 모든 것을 아는 자가 바로 아뜨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 하나만이 있을 때
원인도, 결과도, 행위도 없고
이름고 없고, 비교할 것도, 예측할 것도 없도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니
말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 6. 7. )



역주

앞 구절에 부흐, 부워허, 스워허에 이어, 사비뜨리 찬가(혹은 가이뜨리 찬가)를 풀이하고 있다. 사비뜨리 찬가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오움. 


부후, 부워허, 스워허.
따뜨 사비뜨리 바렌니얌
바하르고 데바스야 디히마히
디히요 요 너허 쁘러쬬다야뜨 


우리의 지혜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자
우리가 택하는 그 찬란한 사비뜨리 신(神).
우리는 그 신의 광휘에 명상합니다. 






그 아뜨만이 이샤나(통치하는 자), 삼부후(복되게 하는 자), 바하바(존재하는 자), 루드라(공포를 심는 자), 쁘라자빠띠(창조주), 비슈와스리그(세상의 창조자), 히란야가르바(황금알), 사뜨야마(진리), 쁘라나(息), 한사(r gasa), 샤스뜨리(학자), 비슈누(편재자), ‘나라야나’(인간의 머무는 자리), 아르까(빛나는 자), 사비뜨리(태양의 여신), 다뜨리(만드는 자), 비디뜨리(임명하는 자), 삼라즈(왕), 인드라, 인두(달) 이다.
그는 따뜻하게 덥히는 열기요, 일천 개 눈을 가진 황금알로 가려진 태양이다. 그가 바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알아야 할 대상이로다. 그대들은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과 이별하고 숲으로 떠나, 모든 감각적인 대상을 포기하고 그 육신 안에 든 아뜨만을 발견하라.

모든 형태를 취하는 자
모든 것을 아는 자
황금으로 이루어진 자
최고의 목표
유일한 빛
열기의 원천
천 개의 광선을 가진 자
수 백 곳에 퍼지는 자
그 태양이 숨(息)으로 떠오른다. ( 6. 8. )



그러므로 이것을 아는 자는 숨과 태양을 모두 그의 아뜨만으로 갖게 되리라. 그리하여 그 자신 ‘아뜨만’에 대해 제례를 올리고 그 자신 ‘아뜨만’에 대해 명상하리라. 바로 그와 같은 명상, 그와 같은 제례의 행위를 현자(賢者)들이 칭송했도다.
다음의 ‘우치슈토 빠하땀(남긴 음식으로 인해 상한 음식)만뜨라’로 마음의 오염을 정화하라.

(물의 신)바수여, (불의 신)아그니여, (태양의 신)사비뜨리의 광선이여
남은 음식
남은 음식이 닿아 상한 것
죄인이 준 음식, 죽은 자로 부터 나온 음식, 방금 아이를 낳은 여자에게서 구한 음식
나의 이 (부정한)음식과 죄악이 되는 모든 것을 정화해 주오.
그리고 음식을 먹을 때는 먼저 (먹기 전) 물로 입을 헹군다.
‘내 쉬는 숨에게 경배합니다. 들이 쉬는 숨에게 경배합니다. 브야나 숨에게 경배합니다. 평숨에게 경배합니다. 하강 숨에게 경배합니다.’
라고 하면서 이 다섯 숨에게 공물을 올린다.
그리고 목소리를 누르고 이제 음식을 먹는다. 음식을 먹은 다음에는 물로 입을 다시 헹구고, 아뜨만에 대한 다음의 두 만뜨라로서 아뜨만에 대해 명상한다.
‘숨이며, 불이며. 다섯 바람으로 몸 안에 든 아뜨만.
그가 흡족하여 그가 보호하는 모두를 흡족하게 하기를’

‘그대는 모든 세상이며, 그 세상을 (위로) 나르는 자로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대에게 의지하여 지탱하도다.
또한 모든 공물들이 그대 안으로 들어가니
그대가 있는 곳에 생물체들이 살고 있도다.
불멸의 존재여 !’

음식을 먹을 때, 이와 같이 먹는 자는 다시 먹히는 자로 태어나지 않으리라. ( 6. 9. )



그대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또 있으니 그것은, 음식이면서 그와 동시에 그 음식을 먹는 자인 ‘아뜨만’에 대한 제례의 확장에 관한 것이다. 그것을 설명하리라. 


의식(意識)을 가진 뿌루샤는 ‘쁘라끄리띠’가 대주는 음식을 먹는 자이므로 ‘먹는 자’로서, 음식들 가운데 서는 (주인 된) 자이다. 결국 그의 음식은 물질로 드러나는 아뜨만이다. (음식인)물질은 물질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 가지 속성으로 된 것’은 음식이요, 그것을 먹는 자는 그 안에 든 자이다.
흔히 세상에서 보듯, 생물들은 각기 그 씨에서 난다. 바로 그 씨가 음식이 되기도 하니 그러한 음식은 곧 ‘자연(自然)’이다.
그러므로 뿌루샤는 ‘먹는 자’, 자연은 그 ‘먹히는 대상’이로다. 그가 음식 안에 있으면서도 음식을 먹는 것이다.
세 가지 속성들의 분할에서 여러 변형을 거쳐 나온 ‘음식’은 지성(知性)(智性)으로 부터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까지를 가지는 존재이며. 이것은 열 네가지로 설명하기도 한다.
현자(賢者)들이 말하기를,

즐거움, 고통, 미혹으로 불리는 이 모든 세상이
음식으로 존재하도다.
아직 씨의 단계에서 변화하지 않은 한, 

씨의 맛은 없도다.

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사람의 변화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소년기, 청년기, 노년기는 각각 다르며, 각각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 변화를 따라 특성이 달라지듯, ‘음식’의 ‘맛’이 달라진다. 


물질은 밖으로 드러날 때 드디어 인식의 대상이 된다. 그때 음식의 ‘맛’처럼 지성(知性)(知性), 판단력, 인식, 자아의식과 같은 것들이 일어난다. 그처럼 감각의 대상과 그것의 맛이 생기면 다섯 감각이 일어난다. 이것이 감각기관들의 작용이 일어나게 되는 원리이다.
그러므로 드러난 것은 음식이오, 드러나지 않은 것도 음식이다. 그것을 먹는 자는 음식의 맛과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그가 먹는 것을 보고 ‘먹는 자’가 의식(意識)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뿐.
신들 중에는 아그니가 공물을 ‘먹는 자’이며, 소마가 그 ‘음식’이다. 이것을 아는 자는 불로서 음식을 먹으리라.
현자(賢者)의 말에,

뿌루샤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입을 가진 세 가지 속성을 즐긴다.

고 하였으니, ‘소마’라 불리는 것은 물질적 아뜨만이며, 그는 또한 아직 드러나지 않은 입을 가진 아그니이다. 이것을 아는 자는 진정한 산야신이오, 요기이며, 아뜨만에 제례를 올리는 자이다. 그러한 자는 아무도 공연히 빈 집에 들어가 여자를 손대지 않듯, 그에게로 들어간 감각들의 대상에 개의치 않는 자이니, 그러한 자가 진정 산야신이요, 요기요, 아뜨만에 제례를 올리는 자이다. ( 6. 10. )



역주

열 네 가지 : 


1  지성(知-智性 buddhi), 

2  자각의식(ahamk ra), 

3  마음(manas), 


4   눈,

5   귀, 

6   코, 

7   혀, 

8   피부 등    다섯 감각기관, 

9   목청, 

10  손,

11  발, 

12  배설기관, 

13  성기(性器)     다섯 행위기관, 


14  이들 열 감각 기관들이 투영되는 반응기관으로서의 

마음(manas) 



13



‘음식’은 아뜨만의 가장 훌륭한 모습이니, 숨(息)이 음식으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자(賢者)들도 말하기를,

먹지 않는 자는
생각하지 못하는 자, 듣지 못하는 자, 만지지 못하는 자
보지 못하는 자, 말하지 못하는 자, 냄새맡지 못하는 자
맛 보지 못하는 자가 될지니
그는 숨이 그 몸을 떠나게 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 다른 곳에서는,

먹는다는 것은
숨이 그 안에 차게 함으로서
생각하는 자, 듣는 자, 만지는 자, 말하는 자
맛 보는 자, 냄새맡는 자, 보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 다른 곳에서는,

음식으로 부터 생물체가 나왔으니
모든 생물체가 땅 위에 살고.
모두 음식에 의존하여 살아있도다.
또한 마지막 순간에 그들이 들어가는 곳도 음식이다.

라고 하였다. ( 6. 11. )



현자(賢者)가 말하기를,

모든 생명체는
하루하루, 먹을 것을 구하고자 내달리는 법.
태양은 그의 광선으로 자신의 먹을 것을 거두노라.
그러므로 이때문에 태양도 빛을 내도다.
음식이 주어지면 생명체는 그것을 먹어 소화시킨다.
불이 음식을 태운다.

고 하였다.
그러므로 불은 음식을 먹어야 타오른다. 또 이 세상은 브라흐마가 ‘음식’을 원하여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음식을 아뜨만으로 숭배하라. 현자(賢者)들이 말하기를,

음식에서 만물이 생겨났으니
무엇이든 생겨나고 나면 음식으로 그 몸이 자라노라.
모든 것이 먹히고 먹는 자이므로 ‘음식(annam-먹음)’이라 불리도다. ( 6. 12. )



현자(賢者)들이 말하기를,

음식은 모든 것을 받쳐주는 자, 비슈누의 육신이다.
숨(息)은 음식에서 나온 즙이요, 마음은 숨에서 나온 즙이며
지혜는 마음에서 나온 즙, 환희는 그 지혜에서 나온 즙이로다.

라고 하였다. 이것을 아는 자는 음식, 숨, 마음, 지혜, 환희를 가진 자 되리라. 이 세상에 모든 생물체는 음식에 의지하여 사노니, 이것을 아는 자는 그의 마땅한 음식을 먹으리라. 그래서 현자(賢者)들이 말하기를,

음식은 진정 파멸을 막으며
음식은 불안을 가라앉히는 자이다.
음식은 짐승들의 숨(息)이요
또한 가장 훌륭한 치료약이다.

라고 하였다. ( 6. 13. )



현자(賢者)들이 말하기를,

음식은 이 모든 세상의 원천이요
음식의 원천은 시간이요
시간의 원천은 태양이다.

라고 하였다. 태양은 한 해(年)요 한 해란 순간들과 모든 시간의 단위가 이룬, 열 두달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의 절반은 아그니에게 속하고, 반은 바루나에게 속한다. 해가 가는 길 중에 ‘마가 자리(6 月)’에서 슈라비슈타 자리(12 月)까지가 아그니에게 속하는 때이고 그 북쪽으로 사라바 자리(6 月)에서 슈라비슈타 자리의 절반(12 月)까지가 소마’에게 속한다. 일 년을 이루는 열 두 달의 각 달은 태양의 스물 일곱 자리 중의 2 1over4 (2. 25) 자리 씩을 나누어 가지고 그 태양이 가는 길을 따라간다. 시간은 감각으로 알 수 없는 것, 오로지 태양이 나아가고 있는 길, 태양의 자리를 봄으로서 알 수 있다. 이것 말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증명할 그 어떤 방법도 있지 않다. 이처럼 시간은 그 안에 담긴 부분들을 통해 알 수 있으며, 이와 같은 방법으로 전체를 알게 된다. 그러므로 현자(賢者)가 말하기를,

시간의 수 많은 부분을 통하여
모든 만물이 저곳(태양)으로 달려간다.

고 하였다. 그러므로 시간을 브라흐만으로 (잘못) 숭배하는 사람은, 그로부터 시간이 저 멀리 멀어져 가 버릴 것이다. 현자(賢者)들도 말하기를,

시간으로 부터 만물이 창조되어 흘러나왔다.
시간 안에서, 창조된 만물이 자라나고
또한 시간 안에서 그들이 모두 사라지노라.
시간은 형태가 있는 것과, 형태가 없는 것
모든 것이다.

라고 하였다.( 6. 14 )



역주

태양이 도는 한 바퀴(1년의 시간)를 27 부분으로 나누어, 태양이 정확히 그 한 바퀴 중에 어느 곳에 있는 가를 알아보기 쉽게 하였다. 이것을 열 두 달을 기준으로 나누면 각 달이 2 1over4 (2.25) 태양 자리 씩 나누어 갖게 된다. 





브라흐만은 두 면을 가졌으니, 그는 시간이기도, 시간이 아니기도 하다. 태양 보다 이전에 있던 것은 그 안에 아무런 구분이 없는 시간이 아닌 모습이다. 태양과 함께 시작되는 것은 부분을 가지는 시간의 브라흐만이다. 이 중 시간의 브라흐만은 한 해(年) 이기도 하다. 그 한 해를 통해, 생물이 생겨나서 자라나고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일 년은 쁘라자빠띠, 시간, 음식, 브라흐만이 머무는 자리, 그리고 아뜨만이다. 그러므로 현자(賢者)들이 이렇게 말했다.

위대한 아뜨만 안에서 시간이 그 모든 창조물들을 익히지만
시간은 그 무엇 안에서 익혀지는가.
이것을 아는 자
베다를 아는 자이다. ( 6. 15. )



시간은 만물이 들어있는 커다란 바다이다. 그 안에 사비뜨리라 불리는 자가 있고, 그로 부터 달, 별, 더 작은 별들과 일 년, 이것들 말고도 더 많은 것들이 생겨났다.
다시 그들로 부터 이 세상이 생겨나고, 선(善)이나 악(惡)이라고 불리는 세상의 모든 것도 보이게 되었다. 그러므로 브라흐마는 태양의 아뜨만이로다. 태양을 시간이라는 이름으로 경배하라. 현자(賢者)들이 말하기를,

브라흐만은 태양이다.

라고 하였으며, 다른 곳에서는 또 이렇게 말했다.

제주(祭主), 제례를 받는 신(神), 공물, 제례, 만뜨라
비슈누, 쁘라자빠띠 이 모두가 신(神)이요,
저 태양 속에 빛나는 증인(證人)이로다. ( 6. 16. )



처음에는 이 모든 것이 브라흐만 뿐이었다. 그는 하나였으며, 무한한 존재였다. 그는 동쪽으로 무한하고 남쪽으로 무한하며, 서쪽으로, 북쪽으로, 위, 아래 모든 방향으로 무한한 브라흐만이었다. 그에게 동쪽과 그것과 반대 방향이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한 곳에서 다른 곳을 건너는 것도, 아래라는 것도 위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 생각해 볼 수 조차 없는 자가 지고(至高)의 아뜨만, 끝이 없고, 태어난 적이 없고, 논리로 설명될 수 없고, 상상해 볼 수 없는 자이니, 그의 아뜨만은 대공(大空)이라 해야 할 것이다.
세상의 파멸의 때에 그 만이 깨어있도다. 대공(大空)으로 부터 그가 생각의 덩어리일 뿐인 이 세상을 깨운다. 그 생각은 바로 그에 의한 것이며, 그의 안으로 다시 사라지게 될 것들이다.
저 태양에 열기를 주는 빛나는 모습이 바로 그요, 연기없는 불에서 발하고 있는 빛이 바로 그이다. 또한 음식을 소화시키는 위 안에 든 불도 바로 그이다. 그러므로 현자(賢者)들이 말하기를,

불 속에 든 자, 심장 속에 들어있는 자
저 태양 속에 있는 자, 모두가 하나의 그이다.

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아는 자는 그 ‘하나’로 가리라. ( 6. 17. )



그 하나에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음과 같다. 


숨을 조절하고, 

감각들을 그 대상으로부터 거두어들이며, 

정신을 집중하고 

명상의 단계로 들어가,

숙고의 과정을 통해 

삼매에 든다. 


이것은 요가의 6 단계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자들이 말하기를,

그 빛나는 자, (만물을)만드는 자, (만물의) 주인 된 자, 뿌루샤,
브라흐마의 근원을 보라.
그를 보는 사람은 드디어 ‘아는 자’가 되어
선(善)과 악(惡)을 모두 초월하고
가장 높고 불멸하는 존재 안에서
‘하나’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줄인다.

고 한 것이다. 또 현자(賢者)들이 말하기를,

불이 난 산에 사슴과 새들이 기대어 쉴 곳이 없듯
마찬가지로 브라흐만을 아는 자에 있어
죄악이란 그 어느 곳 기대어 쉴 곳이 없도다.

라고 하였다.( 6. 18. )



현자(賢者)들이 말하기를,

‘아는 자’는 그의 마음을 외부로 부터 안으로 거두어들이고
그리고 감각들을 그 대상들로 부터 멀리있게하며
마음을 비워낸다.
‘숨쉬는 자’로 불리는 개체 아뜨만은
워낙 ‘숨이 아닌 것’으로 부터 생겨난 것이니
그러므로 그는 ‘뚜리야(네 번째 단계)’로 불리는 존재 안으로
그의 숨을 모아 가라앉게 한다.

고 하였다. 또 현자(賢者)들이,

그는 의식(意識)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의식(意識) 가운데 서 있는 자이니
생각해 볼 수도 없는, 최고의 신비
바로 그 존재에 의식을 집중하라.
그는 또한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는, 세밀한 육신의 주체로다.

라고 하였다.( 6. 19. )


현자(賢者)들이 말하기를,

보다 높은 단계의 명상이 있나니
혀 끝을 입천장에 대고 누르고
목소리 마음, 숨(息)자제함으로서
깊은 명상의 단계에 이르리라.

고 하였다. 마음을 누름으로서, 스스로 세밀한 것보다 더 세밀한 그 광휘의 아뜨만을 본다. 그 아뜨만을 자신의 안에서 보고 그는 ‘자기 자신’을 잊는다. 그가 이처럼 자기 자신을 잊으면, 그는 세어볼 수 없고, 그 근원이 없는 자로 여겨지리니, 그것은 해탈의 징조이다. 이것이 바로 비밀스러운 원리로다. 현자(賢者)들도 말했나니,

성찰(省察)을 통하여 선과 악의 업을 부수도다.
그는 고요한 아뜨만이 되어, 아뜨만에 머무니
영원한 그 존재는 환희에 휩싸이도다.

라고 하였다. (6. 20.)


또 현자(賢者)들이 말했다,

수슘나’라 불리는 기도(氣道)가 있으니
그것은 숨을 위로 실어나르는 길이며
그 길은 입천장을 관통해 간다.
그 (수슘나)기도를 통해
숨과 ‘오움’이라는 글자, 그리고 마음이 하나가 되면
그는 저 높이 올라가도다.
혀 끝을 들어 혀 아랫쪽 부분이 입 천장에 닿도록 대고 누르며
감각들을 모두 한 곳에 모아 통제하는 자
그는 그 자신의 훌륭함으로서 저 훌륭함을 갖게 되리라.

고 하였다. 그가 ‘자기 자신’을 없애는 단계로 가면, ‘자기 자신’이 없음으로 인하여 기쁨이나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되며, 오로지 ‘유알함’이라는 절대적인 (‘하나’의) 단계에 도달한다. 그러므로 현자(賢者)들이 말하기를,

먼저 숨을 흔들리지 않게 하고
입천장에 숨을 통제한 뒤
그는 ‘끝’을 넘어서리니
드디어 머리 끝에서 ‘끝이 없는 것’에 합쳐지리라.

고 하였다. (6. 21. )



현자(賢者)들이 말하였다.

명상의 대상은 두 브라흐만이니
‘소리로 된 브라흐만’과 ‘소리로 되지 않은 브라흐만’이다.
소리로 되지 않은 브라흐만이, 소리를 통해 드러나도다.


그 소리로 된 브라흐만이 ‘오움’이다. 그것을 넘어서야 드디어 소리로 표현할 수 없는 브라흐만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자(賢者)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진정한 길(道)이다.
이것은 불멸이다.
이것이 ‘결합’이요, ‘환희’이다.

라고 한 것이다. 거미가 그 자신에게서 나온 거미줄로 빈 공간을 채워나가듯, 명상하는 자는 이 ‘오움’으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스스로 서는 상태에 도달하리라. 


또 ‘소리’를 달리 설명하는 사람들은, 엄지로 귀를 막고 듣는 심장 속의 소리를 말한다. 그 안에서 일곱 가지 소리가 난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강(江)소리, 황소 소리, 놋쇠그릇 소리, 수레바퀴 소리, 개구리 소리, 비(雨)소리, 한적한 장소에서의 말하는 소리이다. 


이러한 소리로 된 브라흐만의 여러 모습을 초월하여야, 지고(至高)의, 소리로 되어있지 않으며, 드러나지 않는 그 브라흐만에 가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곳에 도달한 자들은 아무런 특성도 없게 되고, 여러 꽂들의 즙이 모여 같은 꿀이 되는 것 처럼 그들 사이에도 아무런 구분도 없게 된다. 그러므로 현자(賢者)들도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알아야 할 두 브라흐만이 있으니
하나는 소리의 브라흐만이요
또 하나는 그 보다 높은 브라흐만이다.
소리의 브라흐만을 아는 자들은
그를 통하여 그 보다 높은 브라흐만에 도달하리라. (6. 22. )



현자(賢者)들이 말하기를,

‘오움’은 그 존재를 말(言)로 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 소리가 끝나면 드디어 아주 평온한, 소리가 없고, 두려움도 없으며, 슬픔도 없고, 환희도 없으며, 그러면서도 충만하며, 변함이 없이 일정하며, 움직이지 않고, 죽지 않는, 또 흔들리지도 않고, 견고한 ‘비슈누(편재자)’의 이름으로 불리는 자가 있다. 그러므로 진정 정상에 도달하고자 하는 자는 ‘둘’에 모두 명상해야 한다. 현자(賢者)들도 말했나니,

높고 낮은 두 모습의 그 신(神)은
‘오움’의 이름으로 알아지리라.
소리가 없고, 존재로서도 텅 비인
그 존재를 정수리에 두고 명상하라.

고 하였다. ( 6. 23. )



현자(賢者)들이 또 말하기를,

육신은 활이며, 화살은 오움이다.
마음은 과녘이다. 어둠은 과녘의 표시
그 어둠을 뚫어야 어둠으로 덮히지 않은 그것에 도달하리니
그처럼 무지(無智)로 된 어둠을 꿰뚫고 나면
불의 수레바퀴와도 같이, 태양과 같은 빛으로 힘차게 타오르는
그를 보리라.
그 브라흐만은 어둠 너머에 있으니
저 태양 속에 빛나는 자이며
달 속에, 불 속에, 번개 속에 있는 자이다.
그 존재를 보면 불멸을 얻으리라.

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명상은 지고의 존재를 깨닫는 길(道)이니
외부의 대상은 명상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명상을 통해
그 특징지울 수 없고, 이해될 수 없는 존재를
특징지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음의 업(業)이 모두 녹으면
그 때 거기에는 그 대상이 필요없는 ‘환희’가 있을 것이니
그것이 브라흐만이요, 불멸이요, 순수요, 그것이 길(道)이라.
그것이 (진리의) 세상이로다.

고 하였다. ( 6. 24. )



또 다른 현자(賢者)들이 말하기를

수면(睡眠)상태에서 그러하듯
감각들을 안으로 모은 사람
감각을 가지고 있으나
감각들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람은
‘오움’이라 불리는 그 존재
이끄는 자이며, 광휘를 가진 자, 잠(睡眠)이 없는 자
나이 없는 자, 죽음 없는 자, 슬픔 없는 자
그를 보게 된다.

고 하였다. 또 다른 현자(賢者)들도 말하기를,

이처럼 그(수도자)가
숨과 ‘오움’, 그리고 이 다양한 세상과 결합하므로
또 세상들이 그와 결합하므로
이것을 ‘요가(결합)’라고 하도다.

숨과 마음의 하나 됨
감각들의 하나 됨
그 어떤 상태의 존재도 모두 사라지는
이 과정을 ‘요가’라고 부른다. (6. 25. )



현자(賢者)들이 말하기를,

어부(漁夫)가 그물로 물 속에서 물고기를 건져내어
자신의 위 속에 든 불(火)에 제례 올리듯
숨들을 ‘오움’으로 건져내어
그들을 ‘가장 훌륭한 불(火)’에 제례 올리라.

고 하였다.
그는 뜨겁게 달구어진 그릇 안의 버터기름과 같도다. 달구어진 버터기름이, 풀이나 나무가 와서 닿으면 불을 피워내듯 그 ‘숨이 아닌 것’이라 불리는 자(者) 또한 숨들이 와 닿음으로 해서 (숨들을)피워낸다. 타오르는 불은 이제 밖으로 보인 브라흐만의 모습이니, 그것이 비슈누의 지고(至高)의 자리요, 루드라의 핵심이다. 바로 그가 자신을 여러갈래로 나누어 이 세상을 모두 채운다. 그러므로 현자(賢者)들이 말하기를,

불로 부터 불똥이 나오듯
태양에서 광선들이 나오듯
이것으로 부터 모든 숨쉬는 자들이
이 세상 각기 제 자리에 나오게 되었도다.

라고 하였다. ( 6. 26. )



현자(賢者)들이 말하기를,

이 육신의 열기(熱氣)가 곧 브라흐만
지고(至高)의 존재, 불멸의, 육신 없는 브라흐만이라.

고 하였다. 이 열기는 버터기름이라 부르노니, 그 열기가 (불이 되어) 밖으로 드러나더라도 (진정한 그는) 그 열기 안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주 깊은 명상을 통해서만이 그 존재가 숨은 심장 속 빈 공간을 없앨 수 있으며, 그때 빈 공간에 숨어있던 ‘빛’이 스스로의 모습을 그에게 드러낸다.
이렇게 되면 그는 곧 그 ‘빛’과 하나가 된다. 그러면 마치 쇠 덩어리가 흙에 묻히고, 그리하여 그것이 흙덩이로 보이면 대장장이가 그 쇠를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불로 달구지 않듯, 마찬가지로 (그가 빛과 하나가 되면 쓸모 없어진) 그의 의식(意識)은 그에 의지하는 대상들과 함께 사라진다. 그러므로 현자(賢者)들이 말하기를,

심장 속 빈 공간으로 이루어진 곳은
‘환희’ 그 자체인 지고(至高)의 존재가 머무는 곳
그는 바로 우리 자신이며
우리가 ‘요가’로서 가고자 하는 목적지이다.
이것은 또한 불과 태양의 열기이다.

라고 하였다. ( 6. 27. )



현자(賢者)들이 또 말하기를,

물질, 감각, 감각의 대상을 뛰어넘어
수행자 자신의 인생을 활 시위
꾸준함을 그 활대로 삼고
자만(自慢)을 없앨 결의를 화살로 삼아 활 시위에 꼽아서

브라흐만으로 가는 문(門)의 첫번째 문지기
자만(自慢)을 쓰러뜨리라.

하였다. 


그 첫번째 문지기는 미혹(迷惑)을 관(冠)으로 머리에 쓰고, 욕심과 시기(猜忌)를 귀거리 삼아 양쪽에 걸고, 게으름과 (술 등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것에) 취함, 죄악 등을 그의 하인들로 삼은 자만의 주인이다. 


그가 가진 활은 활시위가 분노로 되어있고, 활대는 광휘로 되어있으니, 그는 욕망을 화살 삼아 그 활로 모든 존재들을 해하는 자이다. 


그를 죽이고 나서, ‘오움’을 나룻배 삼아 저 다른 편 심장 속 공간으로 건너, 광물을 캐고자 하는 자가 광산으로 들어가듯 브라흐만의 공간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나면 스승의 가르침으로 브라흐만의 열 네 껍질을 벗길 수 있으리라. 


그리하면 순수하고, 깨끗하고, 그 안이 비어있으며, 평온한, 숨도 없으며, ‘그 자신’도 없고, 끝이 없고, 쇠퇴하지 않고, 일정하며, 영원하며, 태어난 적 없는, 스스로 서는 존재가 되어, 스스로의 위대함 안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스스로의 위대함 안에 머무는 그 아뜨만을 보고 나면, 그는 구르는 수레바퀴를 내려다 보듯, 이 모든 변화무쌍한 존재들을 내려다 보리라. 그러므로 현자(賢者)가 말하기를,


사람이 여섯 달 동안 ‘요가 수행’을 하여
감각들로 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면
그는 무한하고, 지고(至高)의, 신비스러운 존재에 대한 ‘요가’를
훌륭히 소화해 낸 것이로다.
그러나 그에게 어떤 깨달음이 있었다 해도
아들에게, 부인에게, 가족에게 매이듯
동성(動性)과 암성(暗性)에 매인다면
그는 ‘요가’를 이루지 못한 것이로다.

라고 하였다. ( 6. 28. )




성자 샤까얀야는 브리하드라타 왕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명상에 잠겼다가, 왕 앞에 고개숙여 말했다. 


“왕이여, 쁘라자빠띠의 아들(발라킬리야)들은 이 브라흐만의 지혜로 브라흐만의 길로 갔습니다. 이처럼 브라흐만에 대한 요가의 수행은 기쁨을 얻고, 선과 악을 견디어내는 힘을 얻고 평온함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혜는 마음이 안정된 아들이나 제자가 아닌 그외의 누구에게도 가르쳐서는 안됩니다. 스승에게 믿음을 가진 자, 모든 필요한 조건을 갖춘 자에게만 가르쳐야 합니다. (6. 29. )


오움, 


그 제자로 하여금, 


정(淨)한 장소에 앉아 

정(淨)한 마음으로 


진성(眞性)에 의지하여 

진리를 학습하고,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생각하고, 

진리에 제례를 올리게 합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그는 다른 사람이 됩니다. 


브라흐만의 은총으로 그의 족쇄들은 풀려나가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그 자신에게 그러하듯이 다른 존재에 대한 두려움도 가지지 않으며, 아무런 욕망도 가지지 않게 됩니다. 


그가 드디어 파멸하지 않는 상태, 무한한 행복의 상태에 도달하면, 진리의 그 브라흐만 안에 확고히 서는 은총을 받게 됩니다. 욕망으로 부터 풀려나는 것은, 최고의 보물(브라흐만)로 부터 받는 가장 훌륭한 선물입니다. 온통 욕망에 가득찬 사람은 의지(意志)의식(意識), 믿음을 가졌더라도 아직 ‘묶인 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훌륭한 자는 ‘풀려난 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변화하는 자연의 여러 힘에 속박되어 의지(意志), 의식(意識)등을 갖게 하는 것은 바로 ‘속성’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해탈’이라는 것은 그 의지(意志)의 부족함이 없어질때 일어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보는 것은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듣는 것도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욕망, 상상, 의심, 믿음, 불신, 확신, 불확신, 수치, 생각, 두려움이라 부르는 이 모든 것은 사실 ‘마음’이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속성들의 물결을 따라 움직이고, 그마음이 움직임으로서 어둠에 물들고, 이리저리 흔들리며, 변하고, 절뚝거리며, 욕망으로 가득 차며, 주저하게 됩니다.


 그가, ‘내가 바로 그이다’, ‘이것은 내 것이다’하고 착각하며, 덪에 걸린 새와 같이 그 착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의지(意志 sa kalpa), 자각의식(意識 abhim na)을 가졌다는 것은 그 사람이 ‘묶인 자’린 표시입니다. 그러나 그와 반대인 사람은 ‘풀려난 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의지, 의식, 믿음으로 부터 자유롭게 서야 합니다. 이것이 해탈의 징표입니다. 이것이 브라흐만에 이르는 길이요, 이것이 그 문(門)을 여는 것이요, 그가 어둠의 저 편으로 건너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곳에서는 모든 욕망들이 저절로 해결됩니다. 그러므로 현자(賢者)들도 말하기를,

지혜의 다섯 도구들이 함께 마음에 견고히 설 때
그리고 지혜(智慧 buddhi)가 움직이지 않을 때
그것을 가장 높은 상태라 부르도다.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성자 샤까얀야는 명상에 잠겼다. 


마루따(왕)는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진정으로 그를 (스승으로)경배하고 나서 스스로 기쁨에 차 북쪽의 길을 따라 갔다. 그 길은 작은 사잇길들도 없는 아주 곧은 질이었다. 그는 태양의 문을 열어젖히고 높이 떠올라 사라졌다. 현자(賢者)들이 말하기를,

등불과 같으며, 심장 속에 머물고 있는 아뜨만에는
끝도 없이, 수 많은 광선들이 있도다.
그는 희고, 검고, 황토색이고, 푸르며, 황갈색, 붉은 자라.

고 하였다. 


그들 중 태양의 궤도를 뚫고 위로 향하는 것(슈슘나)이 하나 있으니, 그 길은 브라흐만의 세계에 발을 딛게 함으로서, 가장 높은 길에 가게 한다. 또 다른 일 백 개의 광선들도 역시 위로 향하여, 그 광선을 타고 수행자들이 여러 신(神)들의 육신이 속하는 근거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흐릿한 빛의 아래로 향하는, 밖으로 보이는 광선들이 있다. 그 광선들을 통해서도 사람이 다니니, 그 길의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업보를 겪는다. 그러므로 신성한 태양 아디띠야는 새로운 탄생의 근원, 천상(天上)의 근원, 해탈의 근원이라고 하도다. ( 6. 30. )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것을 묻는다. 


‘감각기관들은 그 어느 힘에 의해서 나아가는가 ? 

누가 그 감각기관들을 나아가게 하며, 누가 그것을 막는가 ?’ 


대답은 이러하다. 그 힘은 아뜨만이다. 아뜨만이 그들을 밖으로 보내고 또 그것을 막기도 한다. 또한 그 감각들의 대상 또한 아뜨만이요, 태양 등 감각들의 힘 또한 아뜨만이다.
아뜨만이 그 광선(감각)으로 대상을 즐긴다면 그 아뜨만이란 어떤 존재인가 ? 순수함, 맑음, 변화하지 않으며, 평온한 자로 통하는 그는 그 자신의 독특한 표상으로 독립적으로 인지되는 존재이다. 그 표상 없는 자의 표상은, 불의 퍼지는 열기와도 같으며, 물의 순수한 맛과도 같다고도 한다. 그것은 말이요, 듣는 것이요, 보는 것이요, 마음이요, 숨(息)이라고도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성(理性)이며, 암기력, 기억력, 지식이라고도 한다. ‘내뿜는 것’이라는 말이 정액(精液), 연기, 빛, 불똥 등 이 모든 것을 말하는 것처럼, 이성, 암기력, 기억력, 지식등 이러한 것들이 아뜨만을 나타내는 표상이다. 현자(賢者)들도 말하기를,

불에서 불똥이 일듯, 태양에서 광선이 나오듯,
그것으로부터 모든 숨쉬는 생물체들의 숨(息)이 나와
이 세상에 숨을 가진 자들이
각각 제 자리에 나오게 되었다.

고 하였다. ( 6. 31. )


이 아뜨만으로 부터 모든 숨 쉬는 자들과 모든 세상과, 모든 베다, 모든 신(神), 모든 존재들이 나왔다. 이것은 비밀스런 가르침, 진리 중의 진리이다.
축축한 장작이 불에 타면 연기가 여러방향으로 흩어져 나오듯, 이 위대한 존재로 부터 리그베다, 야쥬르베다, 사마베다, 아타르반과 앙기라사들의 찬송(讚頌)과 역사, 신화, 예술, 우파니샤드, 경구(經口), 경(經), 주석서, 복주석서(復註釋書) 등이 나와 흩어졌다. 또 거기에서 모든 존재들이 생겨나왔다. ( 6. 32. )



장작을 다섯 개 가진 제화(際火), ‘가장(家長)의 불(g rhapatya)’은 곧 일 년이다. 그 불이 가진 장작들은 봄, 여름, 우기, 가을, 겨울이다. 또 이 불은 머리, 두 날개, 등, 꼬리를 가진 자이다. 뿌루샤를 아는 자에게 이 제화(際火)는 곧 지상(地上)이요, 쁘라자빠띠가 올리는 첫 번째 공물이다. 이 제화(際火)는 그 손으로 제주(際主)를 대공(大空)으로 올려보내, 바람의 신 와유에게 건네준다. 와유는 곧 숨(息)이다.
숨은 제화(際火), ‘남쪽의 불(dak in gni)' 이니, 그에게는 내쉬는 숨, 브야나 숨, 들이쉬는 숨, 평숨, 하강숨이 장작이다. 또 이 불은 머리와 두 날개, 등, 꼬리를 가진 자이다. 뿌루샤를 아는 자에게 이 제화(際火)는 곧 대공(大空)이오, 쁘라자빠띠가 올리는 두 번째 공물이다. 이 제화(際火)는 그 손으로 제주(際主)를 대공(大空) 너머로 올려보내, 인드라에게 건네준다. 이 인드라는 곧 저 태양이다.
인드라는 또 다른 제화(際火), ‘신들을 부르는 불( havan ya)'이다. 이 제화(際火)의 장작은 리그베다, 야쥬르베다, 사마베다, 아타르반과 앙기라사의 찬송(讚頌), 역사와 신화이다. 또한 이 불은 머리, 두 날개, 등, 꼬리를 가진 자이다. 뿌루샤를 아는 자에게 이 제화(際火)는 곧 천상(天上)이요, 쁘라자빠띠가 올리는 세 번째 공물이다. 이 제화(際火)는 그 손으로, 제주(際主)에게 ‘아뜨만을 아는 자’가 되는 선물을 만들어 주고, 그리하면 이 아뜨만을 아는 자는 스스로를 더 위로 올려 브라흐만에게 바친다. 그곳에서 그는 환희와 기쁨에 휩싸인다. ( 6. 33. )



‘가장(家長)의 불’은 그 자리가 지상(地上)이다. ‘남쪽의 불’은 대공(大空), ‘신들을 부르는 불’은 천상(天上)이 그 자리이다. 그러므로 이들을 각각 빠와마나(정화하는 자), 빠와까(정화하는 자), 슈찌(신성한 자)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이들에 의하여 제례(祭禮)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소화시키는 (배 속의)불 또한 이 빠와마나, 빠와까, 슈찌가 결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니, 이 불에 공물을 올려 숭배하라. 제례에 맞게 제화(際火)의 단(檀)에 이 불을 세우라. 이 불을 찬양하라. 이 불에 명상하라.
제주(際主)는 제례에 올릴 공물을 손에 들고, 신(神)에 대한 숭배를 이렇게 한다. ‘심장 속에, 태양 속에 머무는 황금 빛의 새, 자맥질 새, 백조, 광휘에 빛나는 그 신에게, 이 불의 신 아그니를 통해 예배드립니다.’ 이 만뜨라를 암송하고 그 의미를 새기며 태양신 사비뜨리에 대해 명상을 한다. 이것으로 그는 이 세상에서 마음의 평온을 얻을 것이요, 그 자신의 아뜨만 안에서 평온을 누리는 자가 되리라.
현자(賢者)들도 말하였다.

장작이 떨어지면
불이 제 자리로 조용히 잦아들듯
갖 가지 상념들 또한 그 활동이 그치게 되면
제 자리로 조용히 잦아든다.

진리를 구하는 마음이라도
상념들이 일어났다가 조용히 잦아든 마음에서도
감각의 대상들이 유혹하면
다시 감각은 빗나간 활동을 하게 된다.

윤회(輪廻 sa s ra)는 그 자신의 상념들로 인한 것이니
그 자신이 힘써 상념들을 지우라.
그가 생각하는 대로 그가 만들어지도다.
이것은 영원한 신비이다.

상념들이 잦아들면
선업이든 악업이든 모두 부수어지고,
평온한 마음으로 아뜨만 안에 머물게 되니
그는 영원한 환희를 얻으리라.

감각의 세상 안에 집착하는 것 만큼
브라흐만 안에 서고자 한다면
어느 누가 얽매임에게 풀려나지 않으리오 ?

마음은 두 가지이니
하나는 순수하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불순한 것은 욕망과 결합한 마음이오
순수한 것은 욕망에서 완전히 풀려난 마음이다.

마음에 아무런 동요도 없게 하고,
게으름, 방심, 주저함에서 빠져나와
마음 그 자체에만 머물게 하는 것
그것이 가장 높은 단계이다.
마음이 통제되어 심장 속 그 끝에 도달하는 것
그것이 지혜요, 해탈이요
그외의 것들은 모두 말로 된 매듭에 불과하도다.

마음의 때가 명상을 통해 모두 씻겨 나면
그는 아뜨만 안에 들어가는 기쁨을 얻으리니
그것은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오로지 내면의 도구로서만이 알게 될 것이다.

물속에 물, 불 속의 불, 공기 속의 공기를 구분해 낼 수 없듯,
아뜨만 속에 들어간 그는 아뜨만과 구분해 낼 수 없으며
그것이 해탈이다.

마음이 사람의 속박과 해탈의 원인이니
세상에 집착하면 속박이요
세상에서 풀려나면 해탈이라.
그러므로 제화(際火)로서 제례를 올리지 않는 자
제화(際火)를 세우지 않는 자
제화(際火)를 알지 못하는 자
제화(際火)에 명상하지 않는 자는
브라흐만의 그 높은 자리를 기억해 낼 수가 없다.
그러니 이 불에 공물(供物)을 올려 숭배하라.
제례에 맞게 제화(際火)의 단(檀)에 불을 세우라.
이 불을 찬양하라. 이 불에 명상하라. ( 6. 34. )



지상(地上)에 머무는 아그니
땅 위의 세상을 지키는 아그니를 숭배하라.
아그니여! 당신을 숭배하는 자에게 그 세상을 주오.
대공(大空)에 있는 와유
대공의 세상을 지키는 와유를 숭배하라.
와유여 ! 당신을 숭배하는 자에게 그 세상을 주오.
천상(天上)에 있는 태양
천상을 보호하는 태양을 숭배하라.
태양이여 ! 당신을 숭배하는 자에게 그 세상을 주오.
모든 곳에 든 브라흐만
모든 세상을 보호하는 브라흐만을 숭배하라.
브라흐만이여 ! 당신을 숭배하는 자에게 모든 세상을 주오.

황금 빛 덮개로 그 진리의 얼굴이 가려져 있으니,
오, 태양이여
우리가 진리의 존재, 그 비슈누(편재자)에게로 갈 수 있도록
덮개를 거두어주오.
태양 속에 있는 뿌루샤, 내가 바로 그요.

진리의 그 존재는 곧 태양의 핵심이요, 빛이요, 개별적이며, 성(性)이 없는 것이다. 대공(大空) 중에 퍼져 있는 빛은 진리의 존재인 그 빛의 한 부분이요, 태양 가운데, 눈에, 불 가운데에도 있는 그것이다. 그 눈이 불멸의 브라흐만이요, 광휘 그 자체요, 영원한 자리로다.
대공(大空)에 퍼져있는 빛은 진리의 존재인 그 빛의 한 부분이요, 그것은 태양 가운데 있는 핵심이요, 불멸의 달 소마와 숨이 밖으로 내 뿜는 것, 그것이 브라흐만이요, 그것이 불멸이요, 그것이 광휘 그 자체, 그것이 영원한 진리이다.
대공(大空)에 퍼져있는 빛은, 태양 가운데 야쥬르 베다와 같이 빛나는, 진리의 존재인 그 빛의 한 부분이요, 그것은 ‘오움’이요, 물이요, 빛이요, 즙이요, 불멸의 브라흐만이다.


부후, 부워허, 스워허 오움.


그 빛은 발이 여덟이며, 몸이 빛나는 백조
줄이 세 개요, 세밀하고, 설명할 수도 없는
선과 악을 구별하지 않는 것
그것을 보면 모든 것을 보는 것이다.
대공(大空)에 퍼져있는 빛은
태양 가운데 일어서는 두 갈래 광선으로
진리의 존재인 그 빛의 한 부분이다.
그것은 ‘아는 자’이며, 진리의 존재이다.
그것은 야쥬이며, 그것은 와유
그것은 숨, 그것은 물, 그것은 달
그것은 빛, 그것은 불멸, 그것은 브라흐만의 진리요
그것이 빛의 바다이다.
그 바다에 제례가 와서 소금 처럼 그 안에 잠긴다.
그것이 브라흐만과 하나되는 것이요
모든 욕망들이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다.

현자(賢者)들도 말하기를,

가벼운 바람에 (여러모습으로)흔들리는 등불처럼
모든 신(神)들 안에 그가 (여러모습으로)빛을 내고 있도다.
이것을 아는 자는 진정 아는 자이며, 그 둘의 차이를 아는 자이니,
그 둘의 차이를 아는 자는 하나됨을 얻어 그 하나가 되리라.

끝없이 일어서는 수 많은 그들은 파도로 생긴 물방울들과 같나니,
그들이 브라흐만의 광휘의 빛으로 들어가면
높은 하늘의 저 구름 안에 든 빛으로 부터 번개가 나오듯이
그 빛으로부터 여러모습의 불길로 나타나도다.

고 하였다.( 6. 35. )



그 빛의 브라흐만은 두 모습을 가지고 있으니, 하나는 평온한 모습이요, 다른 하나는 활발한 모습이다.
그 평온한 모습은 대공(大空)에 기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뜨라와 약초, 버터기름, 고기, 단 것, 밥 등을 ‘가장(家長)의 불’에 올린다. 활발한 모습의 브라흐만에게는 고기와 술을 그 ‘입’인 불에 올려야 하느니, 그 입은 ‘신을 부르는 불’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힘이 나게 하며, 그리하여 순수함의 세상을 얻게 하고, 불멸을 얻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자(賢者)들도 말하기를,

천상에 도달하기를 소망한 자들은
제화(際火)로 제례를 올려야 하느니
제화(際火)의 제례로서 죽음의 신 야마의 세상을 얻으리오.
‘욱타’로서 소마의 세계를 얻을 것이오
쇼다신(16 일의 제례)으로 태양의 세계를
아띠 라뜨라(밤을 새워 지내는 제례)로 스스로 서는 세계를
12일 밤 동안 지내는 제례로 시작해서 일천 년의 끝까지 계속하는 제례로 창조주의 세계를 얻으리라.

고 하였다. 등불이 기름이 듬뿍 묻은 심지가 남아있는 한 계속 타오르듯, 이 아뜨만과 환한 태양 또한 그들 내부의 ‘하나’와 (창조의)알 하나로 결합해 있는 한 계속 있을 것이다. (6. 36. )



그러므로 모든 제례를 ‘오움’으로 하라. 오움의 광휘는 끝이 없으며, 세 가지- 불, 태양, 숨-으로 나타나 있다.
또한 이것이 먹을 것을 늘리는 통로이니, 이것은 불에 올린 공물들을 태양으로 가게 한다. 이어 공물들에서 나온 즙은 만뜨라의 소리와 함께 비로 내린다. 그것으로 인해 숨이 있게 되었고, 그로부터 만물이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현자(賢者)들이 말하기를,

불에 올린 공물들은 태양으로 가고
태양은 그것을 광선과 함께 비로 내려 보낸다.
그리하여 먹을 것이 일어나고
먹을 것으로 부터 생물체들이 생겨나도다

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불에 제대로 넣어진 공물은 태양으로 가고
태양에서는 비가 내리니
비에서 먹을 것이 생기며
먹을 것으로 부터 모든 살아있는 생물들이 생기도다.

고 하였다.( 6. 37. )



제화(際火)로 제례를 올리는 자는 욕망의 그물을 거두는 자이다. 그는 미혹(迷惑)을 잘라내고, 분노를 일으키지 않으며, 욕망 중에 오로지 해탈의 욕망만 남겨 놓은 자이다. 그는 네 겹으로 된 브라흐만의 진리를 꿰뚫는다. 그는 저 높은 대공(大空)의 세계로 가며, 거기에서 태양, 달, 불, 진성(眞性)으로 된 세계를 뚫고, 스스로 신성한 존재가 되어 ‘의식(意識)의 존재’를 보니, 그 의식으로 된 존재는 진성(眞性) 에 머무는 자이며, 움직이지 않고, 불멸하며, 흔들리지 않고, 일정하며, 비슈누라 불리는 가장 높은 자리를 가지며, 진리와 가깝고, 모든 것을 알며, 그 자신의 위대함 위에 서 있는 그런 존재이다. 현자(賢者)들도 말하기를,


태양 가운데 달이 서 있다.
달 가운데 불이 서 있다.
불 가운데 진성(眞性)의 존재,
진성(眞性)의 존재 가운데 흔들리지 않는 자가 서 있도다.


라고 하였다. 손 가락 만하며, 또는 육신 안에 그 만한 크기로 있으며, 미세한 것보다 미세한 그 존재에 명상하는 자는 가장 높은 자리에 도달하리라. 그곳은 모든 욕망들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곳이다. 현자(賢者)들도 말하기를,


손가락 만한, 육신만한,
두 갈래 혹은 세 갈레 빛으로 된,
모두가 숭배하는 그는 브라흐만.
그 위대한 신(神) 그가 모든 존재들 안에 들어갔도다.
오움. 그를 숭배하라, 그를 숭배하라. ( 6. 38. )

고 하였다.





제 6 장 끝












제 7 장



아그니, 가야뜨라 율격, 뜨리브리뜨 찬양, 라탄따라 찬가, 계절 중에 봄, 숨(息) 중에 내 쉬는 숨, 별(星), 물의 신 바수, 이들이 동쪽에서 떠오르는 자들이요, 열기를 내 뿜는 자들이요, 비로 내리며, 찬양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그들이 나온) 그에게로 다시 들어가며, 들어가서 그 안에서 밖을 내다본다. 


(이들이 나온 근원인)그는 생각해 볼 수 없고, 형태가 없고, 매우 깊고, 가려져 있으며, 흠이 없으며, 단단하고, 꿰뚫을 수 없으며, 아무런 특성이 없고, 순수하며, 빛을 내며, (세 가지) 특성들을 즐기며, 무시무시하고, (무엇으로 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요가의 신(神)이며, 모든 것을 알고, 힘이 세고, 인지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훌륭함 그 자체이며, (누구로 부터도) 태어나지 않았으며, 대단히 현명하고, 설명해낼 수 없으며, 모든 것을 창조한 자이면서, 창조한 모든 것의 아뜨만, 또 모든 것을 먹는 자, 모든 것의 통치자, 모든 것의 내부에 있는 자이다. ( 7. 1. )



인드라, 뜨리슈뚭 율격, 빤짜다샤 찬양, 브리하드 찬가, 계절 중에 여름, 숨 중에 브야나 숨, 달 루드라 신 이들이 남쪽에서 떠오르는 자들이다. 이들은 열기를 내 뿜으며, 비로 내려지고, 찬양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그들이 나온) 그에게로 다시 들어가며, 들어가서 그 안에서 밖을 내다본다. 


(이들이 나온 근원인 )그는 시작도 끝도 없으며, 인지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무한하며, 다른 존재에 의해 움직이지 않으며, 스스로 서는 자, 아무런 표시도 없고, 아무런 형태도 없고, 끝없는 힘의 소유자이며, 창조자, 깨달음을 얻게 하는 자이다. (7. 2. )



마루뜨, 자까띠 율격, 삽따다샤 찬양, 바이루빠 찬가, 계절 중에 우기, 들이 쉬는 숨, 비너스 별, 아디띠야 신은 서쪽에서 떠오르는 자들이다. 이들은 열기를 내 뿜으며, 비로 내리며, 찬송한다. 이들은 그들이 나온 그곳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밖을 내다본다. 


(이들이 나온 근원인) 그 존재는 평온하며, 소리가 없고, 두려움이 없으며, 슬픔이 없고, 환희에 가득찼으며, 흡족해하며, 일정하며, 움직이지 않고, 죽지 않고, 매우 오래가는, 비슈누(편재자)로 불리는 가장 높은 자리이다. (7. 3. )



비슈바데바, 아누슈뚭 율격, 에까빙샤 찬양, 바이라자 찬가, 계절 중 가을, 평숨, 바루나, 사드야 들은 북쪽에서 떠오르는 자들이다. 이들은 열기를 내뿜으며, 비로 내리고, 찬양을 한다. 이들은 그들이 나온 그곳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밖을 내다 본다. 


(이들이 나온 근원인) 그는 순수한 내재자(內在者)이며, 그 안이 깨끗하고, 그 안이 비었으며, 평온하며, 숨도 없고, ‘자기 자신’도 없고, 끝도 없는 자이다. ( 7. 4. )



미뜨라, 바루나, 빵끄띠 율격, 뜨리나바, 뜨라야스뜨링샤 찬양, 샤끄와라와 라이바따 찬가, 계절 중 겨울과 안개가 많은 초겨울, 하강숨, 앙기라사와 달(月), 이들이 위에서 떠오르는 자들이다. 이들은 열기를 내 뿜으며, 비로 내리며, 찬양한다. 그리고 그들이 나온 그곳으로 다시 들어가 그 안에서 구멍을 통해 밖으로 내다본다. 


(이들이 나온 근원인)그는 ‘오움’으로 불리는 자이며, 이끄는 자, 빛이요, 잠이 없고, 나이도 없고,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는 자이다. ( 7. 5. )



사니(토성), 라후, 께뚜, 뱀, 악마, 약샤, 사람, 새, 사슴, 코끼리 같은 것들은 아래로 부터 솟아나오며, 열기를 내뿜고, 비로 내리고, 찬양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그들이 나온 그곳으로 다시 들어가, 그 안에서 구멍을 통해 밖을 내다본다. 


(이들이 나온 근원인)그는 지혜를 가진 자이며, 모두의 안에 존재하며, 파괴될 수 없고, 순수하고, 깨끗하며, 빛나는 견뎌내며, 평온한 자이다. ( 7. 6. )



그가 진정, 심장 속에 있는 아뜨만이다. 매우 세밀하며, 불처럼 켜져 있고, 모든 형태를 취하는 자이며, 이 모든 세상이 그의 먹을 것이다. 그에게 의지하며 이 모든 만물이 서로 맞물려 짜여져 있도다.. 그가 바로 죄악이 없고, 나이가 없으며, 죽음이 없고, 슬픔이 없으며, 불확실함이 없으며, 모든 속박에서 자유로우며, 진리이며, 그의 모든 욕망조차 진리인 아뜨만이다. 그는 가장 훌륭한 신이다. 그는 모든 존재들의 지배자요, 그가 모든 만물의 보호자요, 그가 바로 (건너게 해주는) ‘다리’이다. 


이 아뜨만은 진정 이샤나(신)이며, 샴부(복을 주는 자), 바하바(존재하는 자), 루드라(무시무시한 자), 쁘라자빠띠(창조주),비슈바스리그(모든 세상의 창조자), 히란야가르바(황금태), 사뜨야(진리), 숨(息), 한사, 샤스뜨리, 흔들리지 않는 자, 비슈누(편재자), ‘나라야나’(신이 머무는 자리 )이다. 


불 속에 있으며, 심장 속에 있으며, 태양 속에도 있는 그는 모두 하나의 그이다. 그는 이것이며, 모든 형태이며, 진정한 대공(大空)에 머무는 자이니, 그를 숭배하라. ( 7. 7. )



이제 지혜를 구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에 대해 말하노라. 


미혹(迷惑)이라는 그물에 걸려들게 되는 것은 

천상에 가고자 하는 자가 천상에 갈 자격이 없는 자들과 가까이하는 데에 이유가 있다. 바로 그것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그들(천상에 갈 자격이 없는 자들)은 앞에 숲이 있는 데도 작은 나무하나에 매달리는 자들이다. 또 종일 흥분해 있으며, 항상 떠들면서 구걸을 하며, 손으로 만든 물건을 팔아 살아가는 자들이다. 


제례 올릴 가치가 없는 대상에 제례를 올리며 마을에 사는 구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은 슈드라의 제자이거나, (금지되어 있음에도)베다 등을 학습한 슈드라이다.
또 더러운 언어를 사용하는 불량한 자, 머리에 매듭을 꼬아 묶은 자, 춤추고 다니는 자, 물건을 두고 싸우는 자, 떠돌아다니는 수도승, 분장한 자, 왕에게 불충한 사람들 모두 그러한 자들이다. 


또 신들의 하인 ‘약샤’, 악마, 귀신, 악귀, 독사, 도깨비 등의 악한 기운을 씌운다고 협박하여 돈을 뜯어내는 자, 자격이 없음에도 출가자라고 새프론 색 옷을 입고, 귀거리와 해골 등을 걸고 다니는 자, 거짓논리, 엉터리 같은 비교와 예증으로 베다에 믿음을 둔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자들과 가까이 하지 말라. 


그런 자들은 도둑이요, 천상에 도달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다. 현자들도 말하기를,


아뜨만을 부정하는 독설,
잘못된 비교와 논쟁으로 인하여,
세상은 베다와 학문이 어떻게 다른가를
구분하지 못하도다.


고 하였다. ( 7. 8. )




학문의 신 브리하스빠띠는 악마 아수라들의 스승 ‘슈끄라’가 되어 그들을 가르칠 때, 

인드라가 아수라들을 물리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무지(無智)를 만들었다. 


이 무지(無智)로 인하여 그들이 죄악을 선(善)으로, 선을 죄악으로 보게 되었다. 그들은 베다와 그 전통의 학문이 사라지는 새로운 다르마를 주시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르침에 귀기울여서는 안된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아무것도 나지 않는 불모지와 같고, 이것이 주는 결과는 순간적인 즐거움과 그사람의 계급이 추락하는 것 뿐이다. 이런 데에는 발을 들이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옛 부터 현자들도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는
두 가지의 아주 정 반대의 속성
지혜(知慧)와 무지(無智)가 있다.
나(야마)는 나찌께따 그대가 지혜를 갈구하는 자 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많은 유혹이 그대를 유혹해내지 못하였으므로.

완전치 못한 제례와 완전한 지혜
이 둘을 모두 알고 있는 자는
그 완전치 못한 제례로 죽음을 건너고
완전한 지혜로서 불멸을 얻으리라.

무지(無智) 속에 갖혀있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상당한 지식인이라고
대단한 학자라고 생각하면서
영영 삐뚤어진 길로 가게 된다.
마치 눈먼 장님들을 역시 눈 먼 다른 장님이 인도하여
영영 삐뚤어진 길로 가게 되는 것처럼. ( 7. 9. ) 






신들과 악마들이 아뜨만을 알고자 원하여 브라흐만(쁘라자빠띠)에게 갔다. 

그들이 그 앞에 머리 숙이며 말했다. 


“존경하는 분이여, 저희는 아뜨만을 알고자 합니다. 저희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그러자 그는 속으로 생각에 빠졌다.


 ‘이 악마들은 마음의 통제되지 않은 자들이로다.’ 

그는 악마들에게 (신들에게 가르친 아뜨만과) 다른 아뜨만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이 악마들은 그 다른 아뜨만에 집착하여 진정한 해탈의 길을 부수고,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로 찬양하고 다닌다. 그들은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로 보니 그들은 진정 미혹(迷惑) 속에 있도다.

베다에서 말하는 것, 그것이 진리이다. 

현자들은 베다에 말한 것을 취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베다에 속하지 않은 것을 공부하지 말라, 

그것은 허망한 결과를 낳으리라. ( 7. 10. )




심장 속 대공의 속성은 가장 높은 빛의 속성과 같은 것이라. 


그것은 불에, 태양에, 숨에 나타나는 바로 그것이다. 그 심장 속에 있는 대공의 속성은 ‘오움’의 속성과 같은 것. 이 ‘오움’으로서 저것(빛)이 시작되고, 일어서고, 숨을 쉬니, 이것은 브라흐만을 알아보는 영원한 상징이로다.
숨을 쉴때, (빛이며 ‘오움’인)그것이 그 숨쉬는 자의 몸 안에 열기로 자리한다. 이것은 연기의 움직임과도 같으니, 연기는 피어오를 때 하늘 높이 올라가, 모든 것, 모든 나무가지 하나 하나를 감싸 그 나무 가지 모습대로 된다. 이것은 또 소금을 물에 넣은 것과 같고, 뜨거운 버터기름 속의 열기와도 같다. 또 훌륭한 요기의 넓은 명상의 범위와 같다. 


왜 그것을 번개와 같다고 하는가 ? 

이것이 빛을 내는 바로 그 순간 온 육신을 빛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움’으로 그 무한한 빛의 힘을 숭배하라.




눈 속에 있는 자 중에 오른 쪽 눈에 있는 자
그는 인드라요
왼쪽에 있는 자는 그의 부인이라.

이 둘의 결합은 심장 속 공간에서 일어나니
그곳에 있는 피는
이들 둘에서 나온 생명력이라.

그 심장에서 부터 나와
눈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으니
그것은 하나이면서 둘로 나뉘어진 동맥이라.

마음은 육신의 불을 일게하고
그러면 불은 숨(息)을 일게하고
또 숨은 심장 속을 돌면서
자그마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불의 휘저음으로 인해 생겨나는 것
그것은 처음에는 아주 작은 것이나
그것이 목청에 이르러 두 개가 되고
혀끝에 소리로 얹혀지는 것이니
그것이 ‘발음되는 소리’이다.

이것을 보는 자는 죽음을 보지 않으며
그에게는 질병이 없고, 괴로움도 없도다.
그는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것에 있는 모든 것이 되도다.


눈으로 세상을 보는 자
꿈 속을 다니는 자
깊은 수면 속에 있는 자
깊은 수면 너머에 있는 자
이것은 네 자리에 있는 뿌루샤을 말함이니
이들 중에 네 번째 ‘뚜리야’가 가장 훌륭하도다.

한 발의 브라흐만은 그 세 자리 중에 다니고,
세 발을 가진 브라흐만은 마지막 자리에 있도다.

진리와 허상을 경험하기 위해
그 위대한 아뜨만이 

두 모습을 취했도다.
아뜨만이 두 모습을 취했도다. ( 7. 11. )



제 7 장 끝

 

 

 

 

 

 






  1. 親, 낮게, 머물다 [본문으로]
  2. rel. kundalini [본문으로]
  3. ? [본문으로]
  4. 역주- '다른 소원을 말해보시오' : 샤까야나 성자는 다른 물질적인 것을 소원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브리하드라 왕은 두 말 없이 그러한 물질적인 욕망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면서 자신의 소원을 바꾸지 않는다. [본문으로]
  5. 역주- 평온의 상태에 있는 사람 (sampras da ) : 직역은 ‘훌륭히, 흔들리지 않게 자리잡은 사람’이며, 주석에는 일반적으로 ‘깊은 숙면 단계에 있는 사람’이라고 되어있다. [본문으로]
  6. 독신을 지켜 정력을 낭비하지 않으며 ( rdhva retas ) : 직역은 ‘정자(精子)를 높은 곳에 두고. [본문으로]
  7. 흙을 아는 자 (k etraj a ) : 그 자신이 서 있는 흙, 땅을 아는 자, 육신을 아는 자. [본문으로]
  8. 역주 업(業)의 밝고 어두움에 따라 (s t s t ) 이러 저러한 자궁 (sat asat yoni) : 원문에는 sat asat 라고 되어있으며, 문맥상 ‘이러 저러한’으로 번역하였다. [본문으로]
  9. 계박 [본문으로]
  10. 네 가지 덮개 : 물질, 숨(息), 의식(意識), 지혜 [본문으로]
  11. 열 네 가지 : 신적인 존재 8 종류(창조자 브라흐마, 창조주 쁘라자빠띠, 인드라, 조상 신, 반인반신 간다르바, 약샤, 악마, 귀신)와 인간 이외의 모든 생물 5 종류(집짐승, 야생짐승, 날개로 하늘을 나는 새 종류, 뱀이나 곤충 등 기어다니는 것, 풀, 나무 등 움직이지 않는 것 ), 인간 1 종류 이다. [본문으로]
  12. 수 없이 많이 [본문으로]
  13. 1. 2. 3.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