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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和의 禪敎一元에 대한 小考 / 姜 慧 謜

GraU 2020. 3. 8.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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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和의 禪敎一元에 대한 小考

 

 

 

姜 慧 謜 *

己和의 禪敎一元에 대한 小考 , 강혜원.hwp


 

 

․목 차․


_ 序 言 

_Ⅰ. 禪․敎의 관계 結 語

_Ⅱ. 圓覺의 의미

_Ⅲ. 圓覺에의 修證行法

_ 結 語

 

 

 

序 言

 

朝鮮初期, 이 시대의 불교의 중심과제는 교학의 발달이나 선풍의 진작이 아니라 외부의 도전에 대한 그 대응방안을 궁구하는 것이었고 또한 儒․佛 二敎는 一致임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었다. 이 같은 他宗과의 타협하려는 경향은 불교자체의 禪敎觀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 왔으며 결국 禪宗과 敎宗의 개성적 宗旨를 볼 수 없게 되어 禪․敎의 명백한 限界마져 없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대응하여 歪曲된 禪․敎觀에 대하여 理論的으로나 修行的으로 그 是正을 積極的으로 나타내야 했는데 그 선두에 섰던 분이 己和이다.


기화(1376-1433)는 臨濟系의 禪僧이었지만 많은 著述을 通하여 當時 禪․敎宗의 代置的 狀況을 克服하는데 主導的 役割을 할뿐만 아니라 禪敎一元임을 强調하기도 했다. 물론 禪敎一元의 思想은 高麗의 知訥과 普愚에 의해 提唱된 바도 있었지만 禪師가 스스로 經에 「說誼」를 달아 이를 나타낸 바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이것은 禪․敎宗사이에 새로운 傾向으로 나타났다.


그는, ?金剛經五家解序說?에서 ‘三乘十二分敎의 理致를 체득하고 妙理를 깨달으면 다시 어느 곳에서 祖師西來意를 찾겠는가, 그렇다면 別傳의 旨는 역시 經밖에 있지 않다’라고 하였듯이 결국 禪이 敎밖에 있는 것이 아님을 示唆하면서 敎를 禪의 立場으로 끌어들여 解釋하였다.

이러한 기화의 교학의 핵심이 된 것은 唯一眞心 圓覺妙心 靈知不昧의 一心인데 이를 修證하여 徹見하는 것이 그의 禪敎一元의 行으로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화의 이러한 수행상에는 당시 禪者들 가운데 敎를 부정하고 깨달음을 여는 것만에 狂奔하는 미혹한 禪者가 있는 것을 개탄하고 敎의 중요성을 지적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는 當時 불교를 ‘虛無寂滅之道’라고 非難하는 儒臣들에게 禪的般若觀이 ‘現實的’인 것임을 보이고, 이러한 般若의 現實性은 圓覺의 禪修를 통해서만 實證될 수 있음을 主唱하였다.

기화의 이러한 禪敎觀을 그의 ‘說誼’를 통하여 고찰해 보도록 한다. 특히 ?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說誼?(以下 ?圓覺經說誼?라고 稱함)는 ?圓覺經?의 修證에 대해 그의 修禪을 근거로 說誼하였음을 살필 수 있으므로 본 論文에서는 이를 中心으로 살피고자 한다.

 

 

Ⅰ. 禪․ 敎의 관계

 

「金剛經五家解序說」에서 기화는 ?金剛經?의 大義를 나타낸 曹溪大師의 序를 ‘說誼’하면서 經의 要諦를 밝힌다.


“般若靈源은 廓然하여 諸相이 없으며 曠然해서 住하는 바 없으며 空하여 있지 않고 깊어서 알 수 없다. 지금 이 경은 이로써 宗體를 삼는다. … 제불이 깨달으신 바 모두 이를 증명한 것이고 모든 조사들이 깨달은 것도 이를 증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열어 보이고 있는 것도 역시 이것이다.”


經의 宗과 体는 ‘般若’이며 諸佛도 諸祖도 이 般若를 傳한 것임을 이처럼 明示한다. 이와 같이 諸佛․諸祖가 傳한 般若는 敎를 通하여 理解하고 敎는 禪을 通해야만 窮極의 意味를 알 수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또한 기화는 진리와 언어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한다.


“眞實(理)은 말을 떠나 있지 않는, 말이 바로 眞實’이며 ‘敎海의 가운데서 大解脫을 얻고 知解上에서 大法幢을 建立하는 者가 大人”이라고 말했다.


또한 “문자는 道를 나타내는 도구이며 사람을 이끄는 방편이다. 문자와 그 뜻이 서로 이어져야 한다. 그래서 혈맥관통과도 같아서 세밀히 살피고 상세하고 친밀히 갖추어져야 한다.” 聖人의 말을 後世에 傳함에 있어서는 반듯이 文義가 相資해야 함을 主唱하는 것이다. 文과 義의 관계를 또한 佛의 說法을 典據로 밝힌다.


“佛의 說法은 眞이고 俗이다. 俗하므로 해탈 즉 文字, 四十九年간 東說西說하셨으며, 眞하므로 文字卽解脫, 三百餘會를 (설하셨지만) 一字도 일찍이 설한바가 없다,”

佛法의 世界도 解脫(禪)과 文字(敎)를 통해 顯現된다는 것을 明示한다. 이와 같이 기화는 禪과 敎는 相互補完的인 關係임을 밝히고 敎는 般若(禪)의 世界를 直指하는 方便이며 般若의 世界는 敎를 통해 知見함을 說誼한 것이다.


기화는 ?金剛般若波羅蜜經五家解?에서 ?金剛經?의 本文과 冶父의 注, 宗鏡의 提綱에 대해서 說誼를 붙이는데 禪敎一元的 精神이 잘 나타나 있다고 본다.


?금강경?의 ‘金剛般若’를 開演함에 있어서 五家는 각각 그 特質的인 思想으로 對照를 이룬다. 圭峯은 敎義的이고 論理的 立場이고 六祖와 傅翕은 般若妙用을 밝히면서 敎學的이며 이에 대해 冶父와 宗鏡은 敎義的인 眼目을 一掃하고 日常現實에서 그 妙用을 나타내고 있다. 一例로, ?金剛經?에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이라는 說을 圭峯 六祖 傅翕은 약간의 表現의 差는 있지만 “過去己滅故 未來未有故 現在第一義故”라는 敎理的 說明을 붙인다. 그러나 冶父와 宗鏡은 各各 ‘雪月風花常面見’ ‘明月蘆花一樣秋’이라고 한다. 現實의 日常事에서 般若의 妙用임을 簡潔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기화가 五家中에서 冶父와 宗鏡에 대해 集中的으로 說誼한 것은 그들이 日常의 無常性에서 無住的禪旨를 나타내기 때문일 것이다.


?金剛經?의 思想的 本質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諸法皆空의 無住이다. ?金剛經?의 大義인 無住에 대해 기화는,


“然此固不外乎衆生日用 亦乃該通過現未來 … 

無相是虛玄妙道 無住是無着眞宗 若是眞宗妙道 直是法身向上”


이라고 說誼하였다. 


즉 無住는 衆生의 日用事밖에 있지 않으며 過去 現在 未來를 該通하고 無相은 妙道이고 無住는 無着眞宗(根本)이므로 이것이 바로 法身向上이라는 것이다. 


經說에 無住를 또한 ‘離一切相’(第十四節)이라고도 하는데, 이를 기화는 ‘能所不生卽名爲離’이라 하고, 또한 “菩薩爲利益一切衆生 應如是布施”를 ‘離一切相’의 ‘無住生心是眞菩薩住處’이라고 說誼하였다. 이처럼 기화의 ‘能所不生’ ‘無住生心’은 그의 禪이 離念과 無念을 体로 한 無住의 禪임을 如實히 보여준다.


이러한 無住思想은 ?金剛經?에서 ‘卽非’의 論理로 說明된다. 


經의 第十三節에 “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과 역시 同節의 “如來說三十二相 卽是非相 是名三十二相”에서이다. 


이는 般若系사상의 根幹을 이루는 論理로서 般若妙用은 無住임을 明瞭히 한 句이다. 


또한 無相을 기화는 “相이든 相이 아니든 이는 전부 부처가 아니다. 相이 즉 相이 아닐 때 참된(眞)것이다. 이와 같이 단적으로 알면 (그대로가)天眞面目인데 어찌 다시 의심하랴.”라고 하였다. 즉 諸法實相은 無相의 相으로서 이는 그대로 般若實相이므로 ‘天眞面目’이라고 한 것이다.


이처럼 法界實相이 無住 無相이며 그래서 本來空寂하다면 어떻게 演說해야 法界에 相應한 說일 수 있을까. 


佛說에 의하면 ‘不取於相 如如不動’(第三十二節)으로 流布함을 咐囑하신다. 


이에 대한 기화의 說誼는 

三相安住實際一如會不動搖”이라고 하였다. 


즉 三相(有․無․中)을 여읜 (그 자리에)實際로 安住해서 一如하게 앉아 動搖하지 않음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法界에 相應하는 演說이라는 것이다. ‘不取於相 如如不動’으로서의 開演은 ‘설하는 나’도 없고 ‘설할 법’도 없으므로 如來는 “始鹿野苑 終至跋提河 於是二中間 未曾說一字”라고 하였으며 이는 “舌頭無骨 語下無迹 終日說示 未曾說示”라는 禪語로서 설의하고 있다. 또한 이를 “雖彌天敎海滿地葛藤 如紅爐上一點殘雪”이라고 하였다.


 ‘하늘을 덮을 듯한 가르침과 大地에 가득 넘치는 (葛藤)이라고 해도 그것은 붉은 화로 위에 떨어지는 한 점의 눈발과도 같다’는 譬喩를 들어 無相 無着의 無所說의 說이 法界에 相應한 眞實한 說임을 主唱하는 것이다. 이처럼 金剛般若의 行은 ‘離一切相’의 無住禪이며 이에 대한 開說 역시 如如不動의 禪이라야 함을 밝힌 것이다.

 

 


Ⅱ. 圓覺의 의미

 

기화는 현실의 日常事에서 여실히 나타나는 반야의 법계실상은 실제적 修證을 통해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또한 ?圓覺經?의 설의에서 밝히는 것이다. 


즉 반야지혜는 선수행에서만이 妙用되는 것이고 이러한 선실천의 모든 것은 修證의 行法임을 밝히고 있다. 한마디로 선불교는 ?원각경?의 실천이 됨을 認知한 기화는 스스로 ?금강경?을 통하여 반야묘용을 이해하고 ?원각경?을 근거로 선을 체득했음을 살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기화의 선은 空華의 실천, 如幻三昧의 實證이었으며 이에 대한 原理를 ?금강경?에서 体認한 것이다. 기화의 ‘설의’의 의도는 그의 禪․敎의 이해에서 형성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圓覺經?의 ‘圓覺’에 대해 圭峯宗密은 ?원각경? 序에서心寂而知 目之圓覺”이라 하였다. 


또한 “(원각은) 청정하여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고 德用이 가이없어 모두 한가지 성품”이라고 하였으며 


“성품이 일어나 相이 되니 경계와 지혜가 분명하고 相이 性品을 얻어 원융하므로 身心이 확실하게 드러난 것, 이를 비유하면 海印과 같다”고 하여 


“漸敎는 五時가 달라 空과 有가 서로 나타나고 頓敎는 眞諦 俗諦의 다름이 없이 幽靈絶待하다. 지금 이 경은 頓敎에 속한다.”고 하여 스스로 경에 대한 판석을 하기도 한다. 


즉 원각의 세계는 돈교에 의해 直入되는 것이고 ‘원각’은 그대로 점교로서 체득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특히 종밀은 ?圓覺經?을 근거로 禪敎一致論을 형성하였음은 周知의 사실이다. 


종밀이 “禪은 南宗을 만나고 敎는 이 경(?원각경?)을 만나 一言之下에 心地가 開通하니 一軸之中한 경 가운데서 뜻이 하늘에 비치었다”고 하여 


남종 荷澤禪과 ?원각경?의 敎를 兩軸으로 한 佛道를 얻었음을 천명하고 


이에 대한 敎와 禪의 一致點을 ?都序?를 통하여 밝힌 것이다. 


이처럼 교와 선의 該通을 종밀이 ?원각경?에서 찾은 것처럼 기화 역시 禪․敎의 상충적인 문제 해결의 관건을 ?원각경?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즉 ?금강경?에서 般若妙用의 實相을 드러냄을 이해하고 ?원각경?에서는 점차적 修禪의 行路와 교외별전의 活路를 찾았던 것이다.


또한 宗密의 ‘圓覺’에 대한 見解를 살핀 裴休는 宗密의 ?圓覺經略疏?의 序文에서 종밀의 佛道를 이렇게 말한다. 


“禪師는 南宗密印을 이어 圓覺懸記를 받고 經律을 열람, 唯識 起信등 論에 통하였고 화엄법계의 고삐를 잡고 저 원각의 妙場에 편히 안주”하였다고 讚한다. 


종밀의 ?원각경?에 대한 이해와 그 주석의 내용에 대해 

“그 가르침이 원만하고 본 法이 철저하여 뜻을 해석하는데는 나무를 쪼개는 것 같고 觀에 들어서는 밝은 빛이 어두운 방에 촛불을 밝힌 것 같다”고 하였다. 


이 같은 ‘원각’은 大藏經 모두가 이를 설한 것이라고 주창한다. 

즉 “중국에 전해진 것이 오천여권, 論하고 보면 모두가 戒 定 慧에 지나지 않고 계 정 혜를 닦아 구한다는 것은 오직 원각일뿐이다. … 그러므로 대장경이 모두 원각경이고 이 疏는 대장경의 疏가 된다.”는 것이다. 


종밀이 ?원각경?의 를 붙인 것에 대한 意義를 裴休는 이렇게 설한 것이라고 본다. 원각의 의미에 대해서 배휴는 이와 같이 간명하게 밝힌다.


“眞淨明妙하고 虛徹靈通하여 卓然히 홀로 있는 것, 

이것이 衆生의 本源이며 이것이 心地, 諸佛이 證得한 菩提”


라고 한다. 


“… 친히 구한다면 止觀과 定慧가 되고 그것을 넓혀 중생을 구한다면 六度萬行이 된다. 원각으로서 지혜를 삼으면 正智가 되고 그것으로 因을 삼으면 正因이 된다. 실은 모두 一法이다.” 


이와 같이 원각의 修證이 그대로 대승의 行이 됨을 설한 것이다.

 


 


Ⅲ. 圓覺에의 修證行法

 

이와 같은 ‘圓覺’의 世界를 먼저 기화는 ?圓覺經說誼?에서 「大方廣圓」이라는 經題名의 意味를 밝히고 頌을 짓는다. 


기화는 解序에서 ?원각경?의 十二章을 분류하여 


“문수장은 門으로서 大를 밝히고 


普賢부터 淨諸業障菩薩까지의 여덟 장은 自利門으로써 方을 밝히고 


보각보살장은 利他門으로써 廣을 밝히고 


원각보살장은 證化究竟門으로써 圓을 밝히고 있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經의 구성이 모두 원각을 향한 修行路임을 밝히고 그것은 자리이타의 信行으로써 성립됨을 이 題名을 빌어 설하는 것이다. 


또한 ?원각경?의 大旨를 ‘悟, 修, 證, 化’라고 하며, 


원각의 의미는 ‘佛을 覺이라고 할 때는 自他의 覺이 원만한 것을 의미’하므로 

覺이 圓滿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화엄경?과 ?원각경?은 내용이 크게 같다고 한다. 




이와 같이 ‘圓覺’은 信解門(大)이며 自利利他의 門(方廣)이며 證化門(圓)임을 明示하고 이를 各 十二菩薩의 質問과 如來의 答辯을 通해 크게 三門의 漸次로 判釋한다.


기화는 十二菩薩의 各各의 質疑와 그 意味를 살펴 上根․中根․下根으로 나누어 各 根機에 따라 圓覺에의 行入을 說誼하였다. 


上根에 該當되는 修行門으로서 文殊章 普賢章 普眼章을 들고 있다. 


“일체의 여래는 모두 圓照의 청정한 깨달음으로써 영원히 무명을 끊어야만 佛道을 이룬다.”도 하였으니 이른바 圓照는 信解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문수보살장이 信解門으로서 그 大를 밝힌다는 것이다.


第一의 文殊章은 ‘圓覺’에 대한 信解부터 說한다. 


無念․無住가 体인 ‘圓覺’은 如來의 ‘本起因地’이며 ‘陀羅尼門’이라고 한다. 


즉 “因地法行은 곧 信解를 말한다. 그러므로 먼저 믿고 이해한 연후에 수행을 하여 證果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하여 


이 圓覺은 無明이 영원히 끊어진 것이며, 이같이 信解서부터 시작되는 經說은 


圓覺의 顯現을 위한 行門을 들어 修行의 漸次를 提示하고 修行의 必要性을 일깨우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修證門의 점차적 단계를 설한 것이 된다. 


이처럼 文殊章에서는 幻을 아는 것이 主眼이고 普賢章에서는 幻을 여읠 것을 强調하는 內容이다. 


즉 ‘문수는 信門을 대표하고 보현은 行門을 대표’한다고 하였으며 


‘원각을 알고 하는 수행은 불빛을 환하게 하는 기름과 같고 

수행을 통한 원각의 이해는 갈 길을 알려주는 눈의 역할과 같다’고 하여 


그러므로 


문수보살은 

‘먼저 청정한 원각(淨圓覺)을 깨우치도록 하고, 


보현보살은 

이 깨달음에 의지하여 다음 수행을 일으키도록 한다.’ 


다시 말해서 원각의 信을 根底로 한 수행의 漸次를 밝히는 것이다. 


普賢菩薩이 修行의 實際를 물었을 때, 如來는 


卽離 不方便 離幻卽覺 亦無漸次


(幻을 알면 곧 여이어지니 방편을 지을 필요가 없고 幻을 여의면 곧 깨달아 漸次도 없다)”라고 하였다. 


이를 기화는 說誼에서 “離幻拂到無所離 不可離者是眞常”이라고 한 것이다. 

즉 離幻이었을 때가 그대로 眞常인 것, 말하자면 覺인 것이다.


그러나 기화는 離幻의 修行에도 ‘漸修와 頓修의 差異가 있다’고 說한다. 


菩薩三昧는 行行이 청정하여 무념무착해서 

그 行이 幻化와 같아, 修習인데 


상근기의 입장에서 보면 無漸次이나 

근기에는 利鈍이 있으므로 方便漸次를 보인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側如火因木出 木因火滅 木火俱盡 畢竟空鈍根之人. 

能離幻 更不生情 側不勞心力 覺自現前

… 所以謂之也 此當利根者也” 


즉 火와 木은 因緣에 의해 서로 없어지는 것(空)과 같은 것을 漸修라고 하고,

 離幻되어 다시는 情이 생기지 않는 것이 頓修라는 것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자는 利根人이라고 한다. 


이처럼 수행의 漸頓을 根機에 差를 두고 분리하면서 모든 수행은 離幻三昧임을 밝힌다.



普眼章에서는 수행의 방법에 대해서인데 

正觀의 行法으로서 ‘如幻三昧’의 修習을 의미한다. 


正觀은 正念을 뜻하는데 ‘遠離諸幻’이다. 

이러한 수행의 구체적인 방법은 ‘사마타행’임을 제시한다. 


이 행은 ‘굳게 계율을 지니며 편안하게 대중과 함께 생활하고 한적한 처소에서 단정히 앉아 좌선하는 것’이다. 



이를 기화는 三學을 근거로 한 ‘坐’라고 설의한다.


上根의 行者는 이러한 修行으로 體得되지만 


아직 未盡한 疑心을 하고 있는 

中根의 行者들을 위해 金剛章以後 淨除業章에서는 具體的인 行法을 밝히고 있다.


金剛章에서는 

‘믿음을 增長하는 것은 五蓋가 중심, 

五蓋는 모두 망념의 근본이며 觀行의 障이다.’ 


‘道는 본래 無念인데 妄念으로 참된 道와 어긋났으며 … 원각을 증득하고자 하면 마음을 了知해야 하니 마음은 본래 無心으로서 無心이 道이다.’ 


먼저 迷惑의 本質을 알고 輪廻의 根本을 理解하고나서 漸次的 觀行法을 遂行한다는 內容이다. 


行의 障碍는 망념이며 

無念이 正觀의 道가 됨을 밝힌다. 


이와 같이 금강장에서는 의심을 믿음으로 바꾸어 지혜로서 자기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게 했고 다음 미륵보살장에서는 발심수행의 行에 대해 설한다. 


이를 기화는 


不解脫 皆三毒 若斷三毒 根無大小 皆成佛道

(중생이 해탈하지 못하는 것은 三毒때문이니 삼독을 끊으면 根(機)에 大小가 없이 佛道를 이룬다.)”라고 說誼한다.

 즉 三毒心이라는 妄念을 끊는 것이 成佛이라고 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善知識을 찾고 正知見을 얻어 發願에 의지하여 修行해야한다는 것이다.


특히 威德自在章에서 正知見을 위한 漸次的 修行德目으로 세 가지 觀法을 밝히고 있다. 


첫째 奢摩他觀 은 산란한 마음을 거두고 고요함을 취하여 수행하는 것, 

즉 이를 기화는 

‘色이 곧 空임을 觀하여 허망한 것을 버리고 眞如에 돌아가는 것

(則色卽空 眞)’이라고 하고 


둘째 三摩鉢提는 ‘모두 幻인 방편을 사용하여 幻같은 중생을 깨우치는 것

(唯變化諸幻 而開幻)’이 이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하여 

‘空이 곧 色임을 觀하여 자비를 일으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라는 것

(則觀空卽色 起悲化物)’이다. 


마지막 禪那妙覺이 隨順하는 적멸의 경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와 같은 三觀法을 원만 증득할 수 있다면 원각을 이루는 것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를 기화는 靜․幻․禪 三觀으로 解釋하고 

이 모두는 圓覺覺性에 隨順하는 圓證되며 大涅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三觀은 四相(生住壞空)을 타파하기 위해서이기도 함을 淨除業障章에서도 설하고 있다. 즉, 


‘마음에 증득한 바가 있으나 증득한 마음을 잊지 못하는 것

(心有所證 證心未忘)을 我相, 


증득한 마음을 잊지 못하고 이미 그 잘못을 깨달았으나 

깨달은 마음을 잊지 못하는 것

(未忘於證 旣悟其非 悟心未忘)을 人相이라 하고, 


증득한 마음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음에 我相이 미치지 못하고 

이를 깨달은 마음도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了知하여 人相이 미치지 못하나 

이를 了知했다는 마음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

(悟證爲非 而我不及 了悟爲非 而人不及 了心猶存)을 衆生相이라고 한다. 


壽命相은 

‘마음의 비춤이 청정하여 了知했다는 마음이 사실이 아님을 깨달았으나 

이 覺한 마음을 잊지 못하는 것

(心照淸淨 覺了爲非 於覺未忘 名壽命相)’을 말한다. 


그래서 ‘“我가 아니라는 사실을 覺함에 따로 我가 있어 我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 또한 이와 같다”라는 것은 최후의 사상에 대한 결문이 된다(覺我爲非 無別有我 亦復如是 此乃四相結文)’고 기화는 말한다.



이처럼 ?원각경?에서의 四相은 ?금강경?에서 설하는 四相과 그 의미를 달리 함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금강경?에서의 相은 일체에 대한 집착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면 ?원각경?에서는 ‘증득하는 마음(證), 깨달은 마음(悟), 요지하는 마음(了)이 동일한 것이 아니어서 業과 지혜의 차별로 이루어진(言一切者 證悟了非一 而業智成差故也)’것을 말한다.


前者가 般若에 대한 理解라고 한다면 

後者는 반야조차 幻임을 여실히 아는 如幻三昧行 그 자체를 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普覺章 圓覺章에서는 業障을 抑制하기 어려운 下根의 行者를 위한 行法을 提示한다. 


普覺章은 淨除業章와 함께 구체적 수행방법을 보이는데 있어서 선지식의 만남과 수행에 있어서 四觀을 지양한 正知見할 것을 주창한다.


“선지식은 開遮를 알아 正과 邪에 미혹하지 않는 자이고 


正知見은 狐疑가 淨盡하여 宗眼이 明白하여, 斷常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며 


不住相은 有․無爲․凡聖등 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여 


이 같은 선지식을 구하여 이 같은 行을 하면 미혹에 빠지지 않고 覺性에 따라 반드시 성취할 것이라고 한다. 


또한 마음에서 二乘을 멀리하고 바르지 않는 行은 범하지 않으니 戒行이 淸淨하여 

네 가지 病 (作․ 止․ 任 ․滅) 을 제거하는 것이 이 正知見임을 말한다.


이 四病에 대해서 기화는 이렇게 說誼한다. 


“作은 作이니 一切善法을 짓는 것이고, 

止는 止息이니 一切邪念을 쉬는 것이고, 

任은 任從이니 마음에 맡겨 止作에 구애되지 않는 것이고, 

滅은 寂滅이니 번뇌를 끊어서 心․境 을 잊지 않는 것이지만 


다만 마음에 取(집착심)하는 바가 있으면 覺에 장애가 되므로 病이라 한다.” 


그러나 원각의 성품가운데는 네 가지 모두가 이 없으며 이같이 (병에) 걸림이 없으면 正觀이며 그렇지 않으면 邪觀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憎愛로 인한 怨親을 평등이 관하고 自他를 모두 잊고 心에 둘이 없으면 모든 病을 없애는 일이다.”라고 설의한다. 


그래서 四心을 내면 자연히 四觀의 병을 없애는 것이 된다고 한다. 

그 四心이란 “중생을 모두 제도하려는 廣大心, 覺에 들게 하는 第一心, 覺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으면 常心, 我(人)등을 없애면 不顚倒心”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선지식에 의한 가르침四觀을 止揚하고 正觀으로 수행할 것을 세밀히 설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행법은 圓覺章에서도 마찬가지로 설한다. 

기화는 먼저 圓과 覺에 대해서 설의한다. 


“모든 덕을 갖추고 있어 중생을 두루 교화하는 것을 圓이고, 

지혜가 밝고 밝아서 어떤 법이라도 아는 것을 覺이라 한다.” 


말하자면 圓覺이란 自覺과 他覺이 원만하여 本覺과 같아지므로 지극하지 않는 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중생들이 圓覺에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三期를 정하여 업장을 참회하고 

奢摩他 

三摩鉢提 

禪那을 닦도록 권한다. 


이는 ‘사마발제을 닦으면 靜에 이르고 靜이 極에 이르면 覺’이므로 이러한 修行은 “始終 靜淨二字을 떠나지 떠나지 않고, 靜이 極에 달하면 淨이고 淨이 極에 달하면 光이 통달한다. 覺은 離念의 智이므로 光이다.”라고 기화는 說誼한다.


(涵虛는 

功夫始終 不離 靜淨 二字  靜極便淨  淨極達  所謂者  離念之智) 


즉 이 三觀의 功夫를 精이라 하고 精의 漸次的 修行에 의해 淨을 이루고 이 淨은 그대로 光이며 覺이라고 한 것이다. 이는 證化門을 意味하는 것이다. 


이같이 이 章에서는 중생교화는 결국 圓覺을 향한 행법임을 밝히는 것으로서, 


이와 같이 圓覺은 


無念 無住 無相의 体로서

 觀法의 隨順이 바로 圓證이며 

大涅槃임을 주창하는 것이 


기화의 說誼이다.


이처럼 기화는 敎外別傳의 원각의 證悟를 ?원각경?에서 살핀 것이다. 

空華의 실천 如幻三昧의 行法이 잘 나타나 있으며, ‘一切有爲法 如露亦如電’이라는 ?금강경?의 詩句조차 如幻三昧의 뜻이 됨을 설하는 것이다.

 

 


結 語



己和는 이상의 大乘經典상에서 나타난 的般若觀은 日常性에서 나타나며, 諸佛․諸祖가 傳한 般若는 禪과 敎를 통해 實證되므로 禪과 敎는 相互 補完的이어야 함을 밝힌다. 


?金剛經?의 「說誼」에서는 


無住․無念․無相인 空性은

 ‘一切有爲法’을 ‘不取於相 如如不動’으로서 

‘應作如是觀’의 禪行이 없으면 体證될 수 없음과, 


이를 ?圓覺經?의 說誼에서는 

‘圓覺’은 ‘離幻의 眞常’을 正知見의 觀法으로 隨順하면 證化된다는 것을 보인다. 


이처럼 기화는 空性 즉 覺性을 나타낸 敎修에 의해成就되는 것임을 主唱한 것이다.


또한 ‘隨順覺性’의 방법에도 根機에 따른 頓․漸修의 差를 둔다. 

그러나 修行의 根本은 三學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고 三毒을 끊고 取捨의 分別이 없이 奢摩他 三摩鉢提 禪那로서 ‘宴坐’함이 證果를 얻는 것이라고 하여 圓覺에의 修證의 禪修는 根幹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진적 수행을 강조하는 기화의 선을 어느 선학자는 ‘六師外道’적인 성격이 지니고 있다고 하지만, 당시 조선초기의 교종에서 선종에 대한 왜곡된 修觀에 대해 그는 大乘經을 근거로 禪修를 구체적으로 밝혀 禪과 敎의 一元論임을 나타내 보이고자 한 의도도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當時   禪敎兩宗 의 代置的 狀況을 禪․敎宗의 融化와 統合을 위해 積極的으로 禪敎一元의 當爲性과 妥當性을 明示해 보이려는 기화의 意圖는, 圭峯宗密의 ‘禪敎一致’를 주창한 의미와는 그 뜻을 달리한다고 볼 수 있다. 

종밀은 그가 三敎義에 三宗(禪)이 부합됨을 밝힌 것이라고 한다면 기화는 修證을 위한 행법은 대승경전상에서 교설로 나타남을 밝힌 것이다. 말하자면 대승경을 근저로 ‘大乘禪’을 주창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敎外別傳 直指人心’의 禪의 宗旨를 대승경에서 찾았던 것이다.


이처럼 기화의 대승경전상에서의 禪․敎一元의 주창은 當時의 宗敎的으로 混亂된 견해와 直心을 향한 행법의 道程을 바로 세우는데 커다란 意味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己和의 禪敎一元에 대한 小考 , 강혜원.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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