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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과 삶 / 인각스님(범어사)

GraU 2020. 11. 5. 02:43

201104ㅡ 무진장메일

선(禪)과 삶 / 인각스님(범어사)

 


선(禪)이라고 하는 것을,

참선, 참선 하는데
선(禪)이라는 것은 누구도 가리켜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남이 가르쳐 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음식을 먹어야 내가 배부르듯이
옆에 사람이 대신해서 먹어 줄 수 없는 것이 음식입니다.

이 공부도 자기가 열심히 해서 이루어야 합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살이도 혼자오고 혼자 가지 누구도 동행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애지중지 키워주고 아무리 닦아주고
아무리 잘 보살펴줘도 같이 갈 수는 없습니다.

오직 혼자입니다.

혼자 가는 이 길목에서 스스로 꿈을 깨지 않고는
그저 외롭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른 이치의 꿈을 깰 때
시방세계의 모든 우주가 나요,
내 몸과 둘이 아닌 진리를 발견할 것입니다.


부처님이 성도하셔가지고 하신 말씀이 일체 중생이 개유불성이다.
내가 진리를 깨닫고 보니 일체 중생이 불성을 갖지 않은 중생이 하나도 없더라.
단지 이 불성을 깨닫지 못해서 너희 중생은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고,
나는 깨달은 부처일 뿐이지 본래 그 불성은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불성은,
그 주인공은 절대 어지럽지 않고 항상 한가(閑暇)합니다.

그렇게 참된 자기 모습이란 발견하고 보면 
어떠한 것에도 피해를 입지 않는 존재인데
미혹한 중생은 스스로 고통을 일으키고

고통 속에 살아갑니다.

 

일체 경계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를 발견해서
사는 것이 해탈의 세계입니다.

 

 

참선을 잘하면 모든 경계에 흔들림이 없고
자기 인생을 살아 갈 수 있는 많은 힘이 생깁니다.

우리의 마음은
빛깔도 없고 모양도 없어 일체가 끊어진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해치고 파괴할 수 없는,  또한 취하고 버릴 수도 없더라.
마치 허공과 같이 끝도 한계도 모양도 없고
칼로 베어도 상처가 없고 불로 태워도 끄슬리지 않으며,
한계가 없으니 그릇에 담겨질 수도 없습니다.
물이 있기 때문에 파도가 일어나는 것처럼
마음이 있기 때문에 온갖 기멸심(起滅心)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참선이라는 것은

희노애락의 파도가 치지 않도록
고요하고 평정하게 안정된 마음 즉,
마음의 기멸(起滅) 없는 터를 닦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명에 가려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착각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본래청정한 우리 마음에
천하대지가 벌어지고 육도만행이 있는 것이지,


그 마음자리란 분명하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지 누구나 열심히 참구한다면

만법을 포용하는
자기 생명을 회복해서 참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즘 웰빙, 웰빙 하는데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웰빙을 해봐도

참선을 해서  자기 마음, 자기 주인공을 깨달아

꿈을 깨는
이것이 웰빙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불교는 원래 모든 종교를 초월해서 인간 존재의 참모습을 구경적으로 밝혀 인생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깊은 불교의 근원을 역사상 가장 철저하게 실천해 온 것이 바로 이 선(禪)불교입니다. 그래서 선은 불교의 종교적 생명체라고 할 수 있고 교를 초월하여 그 근원에서 자유자재한 진인의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禪)의 큰 뜻은
망식을 탈박하고 참된 자아를 스스로 깨닫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자아'는
참나가 아닌    망식으로 볼 수 있는   고통스럽고 허망한 분열과 불안을 가져오는 '아집'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정된 자아의 문명을 깨트리고 참다운 인간상을 구현해야 할 것입니다.

가끔 참선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내가 올바르게 참선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참선, 이 참선 공부만큼 분명한 것도 세상에 없음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참선, 참선 하니까 모두 어렵고 특별한 종교수행으로 알고 있는데
욕망과 아집으로 뭉쳐진 삶을 근원적으로 비판하고 진실하고 자비롭게 살자는 그러한 법입니다.



가령 쉽게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주관적인 틀에 맞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 현실은 지식이나 분별 작용이  자기 주관으로 뭉쳐 있어서

삼라만상을 하나의 근본 생명체로 보는 전인간적인 입장이 아니라
그때 그때의 필요에 의해서 파악되는  지극히 협소한 개인의 주관적인 분별의 투영입니다.

또한 서양의 철학은 이성이 아니면 욕망이라는 단면을 가지고 인생문제를 해결해 나가려 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항상 다툼이 끝날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선법은 인간을 일면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보아서

이성과 감성을 초월하면서  이성적 감성적으로 작용하는 전인간적인 것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은 주관적인 분별이 끊어진 경지가 선(禪)의 구경이냐고 묻기도 합니다.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의식 분별이 끊어진 심층에서 작용하는 아뢰야식 역시
우리의 현생의식으로 축적되어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진실에 그대로 인식하는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보통 학문이나 사상은
이러한 현생의식이나 아뢰야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아무리 철학체계가 이뤄진 진리라 하더라도 범위가 넓어지고 길어지면 그 체계가 깨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늘 새로운 학문이나 철학체계가 생겨나지만 인간의 근본 문제인 본래면목을 탐구하는 바른 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본래의 참모습은 의식과 무의식을 초월한 하나의 우주적인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참선은

모든 분별적인 지성, 사고, 무의식마저 철저하게 탈박해버린

무위진인  깨닫는 것입니다.

 


선과 악,  존재와 비존재,  이성과 반이성,  물질과 마음 등

상대적인 이율배반을 근원적으로 비판하며
모든 가치와 사유의 밑바탕에는
절대 이율배반이 놓여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성적 입장에 있는 현대적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이 무위진인의 본래 모습은
모든 이율배반적 한정을 초월한 진인이며
마침내 새로 갖췄다는 것도 없이 본래로 깨달은 사람입니다.
이 진인은 본래로 불생불멸하며,
시간과 공간이 한정됨이 없으며,
본래로 청정 무형하여 자유자재하며,
형상이 없으면서 일체 형상을 창조합니다.

이 선법은 이율배반적인 인간이  진실한 자기진인으로 돌연히 전환함으로써  무명번뇌를 일단 일체 처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은 과학적, 지성과 생의 충돌까지도 보편적이고 자주적인 정의를 지시해서 적극적인 대기대요의 역사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임제스님 같은 이는 경전을 탐구하다가 문자와 언어는 약방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길로 참선을 하셨는데 이것은 어떤 것이 객관적이고 보편타당성있게 인생의 문제를 실제로 해결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되묻고 있는 것입니다.

참선은 맹목적으로 따르라는 교주주의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이 실제로 해봐서 확철히 깨달아야 합니다.


이 참선 공부를 바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화두를 간절히 참구해야 하는데
화두를 참구한다는 것은
자신의 전 생명체가 지적인 의식을 초월해야 합니다.
화두를 참구하는 의단에 자신의 전 존재가 통일되고
또 긴장되어서 몸과 마음이 한 생명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순일하게 된다면
의식분멸이 끊어진 은산철벽의 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화두가 분명하면서도
더욱 명백히 드러나면 의식의 기멸(起滅)이 없어져 버립니다.


의식의 기멸(起滅)이 없어진 상태지만 혼침에 떨어지지 않고
소오영영하게 화두와 의단이 일체가 돼 무의식의 차원까지도 뚫고 나가게됩니다.



허철영통구주인 虛徹靈通舊主人하고
고금천지일진인 古今天地一眞人이라.
다경해악풍운변 多經海岳風雲變하니
락락외외불노인 落落巍巍不老人이라.



텅 비고 신령스러운 통철한 옛 주인이여,
예나 지금이나 하늘에서나 땅에서도 참된 한 사람
강산이 온갖 풍운의 변화 다 거쳐도
우뚝하여 늙지 않는 사람이라네.



한번 확철히 깨달음을 얻자
고금(古今) 천지(天地)에 변하지 않는 참된 자아(自我) 즉,
임제(臨濟)가 말한 무위진인(無眞人)을 깨달았다는 것을 말하는 게송입니다.

또한 참된 자아는 새로이 생긴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옛 부터 있었던 것인데, 다만 스스로 깨닫지 못했을 뿐입니다.  해악(海岳), 바다와 산이 아무리 바뀌어도 간화선 수행을 통해 얻은 참된 자아는 변하지 않는 무위진인 또는 무입진인(無入 - 無立 - 眞人)이라는 내용의 시입니다.

 



우리는 이 늙지도 않고 죽지도 병들지도 않는 불로인(不老人),
다시 말해 무위진인을 찾기 위해 참된 삶의  주인공을 찾기 위해 참선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이 불로인(不老人)을 찾지 못하거나 찾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며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진정한 삶을 살기위해 모든 선원(禪院)의 납자들은
누더기 한 벌로 평생을 화두(話頭)에  생명을 삼고 수행 정진하는 것입니다.
화두에 생명을 걸고 수행해본다면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행복해지는 참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불교 또는 여타 종교에서 말하는 기도는 바라는 것이 있어서 소원을 빌게 되고, 소원이 성취됨으로써 기쁨을 느끼겠지만,    간화선 수행은 이와는 다릅니다.

누군가에게

나의 행복을 빌고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바로 지금 여기에서 꿈을 깨
행복한 삶을 영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학 문명의 발달과 게놈프로젝트에 의해  언젠가는 사람의 수명이 연장되리라 생각합니다.
수명이 연장되고 생활여건은 더욱 더 편해질 것이고, 껍데기적인 삶은 더욱 윤택해 질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 속에는 항상 공허한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 참된 삶은 무엇인가?

참된 가치, 참된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
이 법이 곧 간화선법입니다.
그래서 최상승법이라고 했습니다.

 

참선은 자기에 대한 물음이고, 또한 인생에 대한 물음표입니다.
참된 나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물음부호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커다란 의심을 가지고 참구하는 것이 간화선입니다.


어떻게 해야만 자기의 자성(自性)을 올바로 알 것인가?
무엇이 과연 내 참마음인가?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와 같음을 항상 궁구(窮究)하는 것이 간화선 수행의 시작입니다.
저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는 인간은 두 번을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처음의 태어남은 부모로부터 육체적인 탄생이고
두 번째 태어남은 정신적인 태어남이라.
그러면 불교를 신행(信行) 하는 것은  종교적인 거듭남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불교신행 중에서도 거듭남이란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모이신 불자 여러분,  
참으로 꿈을 깨고 참된 삶을 살기 위해서
오늘 이 시간부터 언제 어디서든지 간절한 마음으로
그야말로 간절한 마음으로 수행하는데
좀 더 투자를 해서 참 삶을 사는 불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홀연활개정문안   忽然豁開頂門眼하니,
영출광겁생사해   永出曠劫生死海이다.

홀연히 깨달아 정안문이 활짝 열리면
무량광겁 생사해를 영원히 뛰어나리라.

홀연히 깨달아서 정문이 활짝 열려서
무량광겁 생사를 영원히 해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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