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과 !/수미산이야기

"흐르다 닿은" 곳에서 : 結跏趺坐 ~ rel. 바른 선정

GraU 2020. 10. 24. 10:10

 

 

abc.dongguk.edu/ebti/c2/sub1.jsp

 

동국대학교 한글대장경

 

abc.dongguk.edu

 

그대로 옮김 : 

 

 

 

결가부좌(結跏趺坐)는 

먼저 왼쪽 발을 오른쪽 넓적다리 위에 두고, 오른쪽 발을 왼쪽 넓적다리 위에 둔다. 

혹시 반가부좌를 한다면 왼쪽 발로 오른쪽 발을 누르는 것도 다 좋다. 

 

다음은 왼손바닥을 오른손바닥 위에 두고, 양쪽의 엄지손가락을 서로 맞대어 버티게 하고, 서서히 몸을 펴면서 오래도록 다시 좌우로 흔들어 준다. 

그리고 몸을 바로하고 단정히 앉아서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기울지 않게 하고 앞으로 구부리거나 뒤로 치켜지지 않도록  한다. 

허리와 척추와 머리와 목의 골절을 서로 버티게 해서 마치 그 모습이 탑[浮圖]과 같게 한다. 

 

귀와 어깨가 서로 대응되게 하고, 

코와 배꼽이 서로 대응되게 하며, 

혀는 위 입천장에 붙인다. 

이빨과 입술을 서로 붙이고, 

눈은 약간만 떠서 혼침에 빠지는 것을 피해야 한다.

 



몸의 모습이 이미 안정되고 기식(氣息)이 이미 조절됐다면,

배와 배꼽을 느긋하게 놓아서 일체의 선악을 모두 사량(思量)하지 말아야 한다.

 

생각이 일어나면 곧 깨닫고, 깨달으면 곧 없는 것이니,

오래오래 연(緣)을 잊다 보면 저절로 한 덩어리를 이룬다.

 

만약 이 뜻을 얻었다면, 자연히 4대(大)가 가볍고 상쾌해지니, 이른바 안락(安樂) 법문이다.

만약 이미 발명(發明)한 자라면 마치 용이 물을 얻은 것과 같고,

아직 발명하지 못한 자라면 다만 긍정적인 마음을 갖출 뿐 결코 기만을 해서는 안 된다.

 

 

선정[定]에서 나올 때는 서서히 몸을 움직이면서 차분하게 일어난다.

일체의 시간 속에서

정(定)의 힘을 보호해 지녀야 하니,

마치 아이를 보호하듯이 하면 선정의 힘을 쉽게 성취하리라.

 

그런 까닭에 구슬을 찾을 때는 마땅히 파도가 가라앉아야지

출렁거리며 움직이는 물에서는 취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선정의 물이 맑고 청정하면 마음의 구슬은 저절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원각경(圓覺經)』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걸림없는 청정한 지혜는 모두 선정으로 인해 생긴다. 

 

이로써 범부를 벗어나고 성현을 초월하는 것이 

반드시 고요한 연[靜緣]을 빌린다는 걸 알겠다. 

 

앉아서 해탈하거나 서서 죽는 것도 

반드시 선정의 힘을 빌리는 것이니, 

 

가장 급선무라 하겠다.' ”

 

 


『선법요해(禪法要解)』 상권에서 말하였다.



“청정한 관(觀)에 3품(品)이 있다.

 

혹은 초습행(初習行:처음 관행을 익히는 자)이고, 

혹은 이습행(已習行:이미 관행을 익힌 자)이고, 

혹은 구습행(久習行:오래 관행을 익혀온 자)이다. 

 

만약 초습행이라면 마땅히 백골(白骨)을 관해서 

의식[意]을 관(觀)에다 묶어 놓고는 외적인 의식[外意]이 되지 않게 한다. 

여러 가지 연(緣)을 외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그것을 섭수해서 환원시켜야 한다. 

 

만약 이습행이라면 두골(頭骨)을 갖추어 관해서

외적인 생각[外念]이 되지 않게 한다.

여러 연(緣)을 외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그것을 섭수해서 환원토록 해야 한다. 

 

만약 구습행이라면 의식을 심처(心處)에 두어서 외적인 생각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온갖 연을 외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그것을 섭수해서 환원시키고서 반드시 다시 마음을 관해야 한다. 

 

 

만약 마음이 극도로 피로하면, 

모든 외적인 상념을 버리고 생각이 연(緣)에 있도록 주시해야 한다. 

 

비유하면 마치 원숭이가 사로잡혀서 기둥에 묶여 있을 때는 종일토록 달려도 사슬에 걸려 항상 돌아오게 되는 것과 같으니, 끝내는 휴식하게 되니 반연한 바가 기둥에 있기 때문이다. 생각은 사슬과 같고, 마음은 원숭이에 비유한 것이다. 수행자가 마음을 관하는 것도 또한 이와 마찬가지다. 

 

점차 마음을 다스려서 연처(緣處)에 머물게 하여 마음이 오래 머물러 있게 되면 

이것이 선법(禪法)에 상응하는 것이다.' ”

 

 

 

[도자함(圖字函)]


마음을 전일하게 하면 

선정은 깊이 이를 수 있어서

5백 대의 수레 소리도 결코 들리지 않는다.

 


『니원경(泥洹經)』에서 말하였다.



“대신 복계(福罽)가 멀리서    세존의 모든 감관[根]이 고요한 것을 보았다.   그는 환희하면서 앞에 나아가 예를 드리고는 한쪽에 머물렀다. 부처님께서 물으셨다.

'복계는 어떤 법을 얻었길래 기뻐하는가?'

복계가 대답했다.

'비구 역람(力藍)이 나무 아래에 앉아 있을 때 5백 대의 수레가 줄지어 지나갔습니다. 비구에게 이르자 수레에서 내려 물었습니다.

『수레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는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럼 수레 소리는 들었는가?』

『듣지 못했습니다.』

『그 때 누워 있었는가?』

『나는 누워 있지 않고 오히려 길에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찬탄하며 말했습니다.

『수레 소리가 덜컹거리는데, 깨어 있으면서도 듣지 못했다니 어찌 마음을 그렇게 한결같이 쓸 수 있는가? 그렇게 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 뜻이 매우 가상하여 마침내 법의 기쁨을 얻었습니다.'

부처님께서 복계에게 물으셨다.

'그대는 뇌성벽력과 5백 대의 수레 소리를 견줄 수 있다고 여기는가?'

복계가 대답했다.

'설사 천 대의 수레가 질주하면서 똑같은 소리를 낸다 해도 미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옛날 내가 아침(阿沈)에 유행했을 때 벼락이 쳐서 소 네 마리가 연이어 죽었으며, 밭을 갈던 두 사람도 동시에 공포로 죽었는데도, 세존은 홀로 듣지 못하였다. 선정에서 깨어나 경행을 하는데, 한 사람이 예를 드리고는 나를 따라서 걸었다. 내가 물었다.

『어찌 그리 바쁜가?』

그 사람이 대답했다.

『아까 벼락이 쳐서 소 네 마리와 두 사람이 죽었는데, 세존께서는 듣지 못하셨습니까?』

『듣지 못했노라.』

『그 때 누워 계셨습니까?』

『눕지 않고 스스로 삼매에 들었을 뿐이다.』

그 사람도 찬탄하기를 선정이 부처님과 같은 자를 들어본 일 드물다며 역시 법의 기쁨을 얻었다.' ”

 

 

[징자함(澄字函) 제4권]



선정 속에 우뚝 앉은 모습 진실로 고목과 같아

정수리에 둥지를 허용하고 부화되길 기다리다.


『지도론(智度論)』에서 말하였다.

“석가께서 옛날 나계(螺罽) 선인이셨을 때 상자리(尙闍梨)라고 이름하였다. 

 

항상 제4선(禪)을 행하였는데, 

들이쉬고 내쉬는 숨을 끊고 

한 그루의 나무 아래 우뚝하게 앉아서 움직이지 않았다. 

 

새가 나무로 여겨서 즉시 상투 속에 알을 낳았다. 보살은 선정에서 깨어나 정수리에 새알이 있는 걸 알고서는 곧 이렇게 생각했다.

'만약 내가 일어나서 움직이면, 새가 다시는 오지 못할 것이고 반드시 알은 모두 깨질 것이다.'

그리고는 즉시 선정에 들어가서 새가 새끼를 부화하고 날아간 뒤에야 비로소 일어났다.”

 

 

 

 

[덕자함(德字函) 제7권]



어떤 게송에서 말하였다.


만약 사람이 잠깐이라도 정좌(靜坐)를 한다면

항하의 모래처럼 많은 칠보탑을 지음보다 낫다.

칠보탑은 결국 티끌로 변하지만

일념의 고요한 마음은 정각을 성취한다.


사람이 만약 어떤 이의 선정[靜慮]을 한 번 흔들면

죄를 초래하여 5백 겁 동안 편안하지 못하다.




『불설처처경(佛說處處經)』에서 말하였다.



“어떤 비구 하나가 좌선에서 선정의 뜻을 얻었다. 다시 어떤 우바새 하나가 그가 앉은 곳이 평평하지 않은 걸 보고는 끌어 일으켜서 그에게 편안한 곳을 제시했다. 우바새는 나중에 5백 겁 동안 안온함을 얻지 못했다. 왜냐 하면 도의 염(念)을 끊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모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경전을 설할 때는 신중하되 중단하지 말라. 그 죄가 엄중해서 헤아릴 수가 없다.' ”

 

 

 

 

[무자함(無字函) 제4권]


장난하는 말로 속였는데도 

그에게 법이 전해졌으니

정좌(靜坐)하여 능히 감당할 수 있으면 이런 공을 증득한다.




『잡보장경』에서 말하였다.



“옛날에 비구가 있었는데 나이가 많아서 혼미하고 꽉 막혔다. 젊은 비구들이 4과법(果法)을 설하자, 마음에 부러움이 생겨서 젊은 비구들에게 말했다.

'부디 4과를 내게 주게나.'

젊은 비구들은 그를 비웃으면서 말했다.

'우리에게 4과가 있는데, 모름지기 좋은 음식을 얻은 뒤에라야 줄 것이오.'

이 때 늙은 비구는 기뻐하면서 즉시 음식을 갖추어 대접하였다. 대접이 끝나자 젊은 비구들이 늙은 비구를 희롱하며 말했다.

'대덕이여, 당신은 이 방의 한쪽 모퉁이에 앉으십시오. 마땅히 당신에게 과(果)를 주겠습니다.'

이 때 늙은 비구는 기뻐하면서 그들의 말대로 했다. 젊은 비구들은 즉시 가죽 공으로 머리 위를 때리면서 말했다.

'이것이 수다원과(須陀洹果)입니다.'

늙은 비구가 들은 후 생각이 흩어지지 않도록 집중하자 즉시 초과(初果)를 얻었다. 젊은 비구들이 다시 그를 희롱하면서 말했다.

'당신은 지금 비록 수다원과를 얻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일곱 번 태어나고 일곱 번 죽으면 그만입니다. 다시 한쪽 모퉁이로 옮기십시오.'

젊은 비구들은 다시 공으로 때리면서 말했다.

'당신에게 사다함과(斯陀含果)를 줍니다.'

그 때 늙은 비구가 더욱더 전념하자 곧 두 번째 과를 증득했다. 젊은 비구들이 다시 그를 희롱하며 말했다.

'당신은 지금 이미 사다함과를 얻었지만, 여전히 생사를 왕래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당신은 다시 자리를 옮기십시오.'

젊은 비구들은 다시 공으로 그를 때리면서 말했다.

'당신에게 아나함과(阿那含果)를 줍니다.'

그 때 늙은 비구가 지극한 마음을 배가하자, 다시 세 번째 과를 증득했다. 젊은 비구들은 다시 그를 희롱하면서 말했다.

'당신은 지금 이미 불환과(不還果)를 얻었기 때문에 색계와 무색계에서 유루신(有漏身)을 받는데, 그 몸은 무상(無常)하게 변천하니 생각 생각마다 고통입니다. 당신은 다시 자리를 옮기십시오.'

젊은 비구들이 다시 공으로 그를 때리면서 말했다.

'당신에게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줍니다.'

그 때 늙은 비구는 네 번째 과를 증득했다. 마음이 크게 기뻐서 온갖 음식과 갖가지 향기로운 꽃을 마련해 젊은 비구들을 청해서 그 은덕에 보답했다. 젊은 비구와 함께 도품(道品)을 논하는데, 젊은 비구들의 발언은 걸리고 막혔다. 그 때 늙은 비구가 바야흐로 말했다.

'나는 이미 아라한과를 증득했네.'

젊은 비구들은 모두 다 희롱한 죄를 참회하였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사람이 만약 지극한 마음을 갖고 있다면, 구해서 얻지 못할 것이 없다.”

또 말하였다.

“옛날에 어떤 여인이 깊이 3보(寶)를 믿었는데, 한 비구에게 공양을 청하였다. 

공양이 끝나자, 여인은 지극한 마음으로 눈을 감고 정좌(靜坐)하고서 설법해 주길 간하였다. 

비구는 이해하지 못하고 몸이 드러나니 몸을 숨겨서 절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여인은 유위법(有爲法)은 무상하고 고(苦)이고 공(空)해서 자재로움을 얻지 못한다는 걸 염(念)하면서 깊은 마음으로 관찰한 끝에 수다원과를 얻었다. 이미 수다원과를 얻고 나자,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절에 가서 그 비구를 찾았다. 비구는 부끄러워서 한결같이 숨고 피해 다녔지만, 계속 찾아다니자 결국 나왔다. 이 여인이 도과(道果)의 인연을 갖추어 사례하자, 비구는 매우 부끄러워했다.”

 

 

 

[장자함(帳字函) 제2권]



중생은 어찌하여 부처를 보지 못하는가?

고경(古)에 티끌이 덮였는데 어찌 그 모습을 보겠는가?




 

『기신론』에서 말하였다.



“[문] 모든 부처님께서는 가없는 방편으로 능히 시방의 중생을 이익되게 하시는데, 어째서 중생은 항상 부처를 보지 못하고, 신변(神變)을 보거나 설법을 듣는 것입니까?

[답] 여래에게는 실로 이 같은 방편이 있다. 다만 중생이 그 마음을 청정히 하면 곧 몸을 나타낸다. 마치 거울에 때가 있으면 색상(色像)이 나타나지 않다가도 때를 없애면 나타나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그러해서 마음이 더러움을 여의지 못하면 법신(法身)이 나타나지 않고 더러움을 여의면 나타난다.”

 

 

 

 

[명자함(命字函) 제2권]

 



이미 마음이 청정하다면 

여래가 나타나니

마치 물이 허명(虛明)할 때 

해와 달이 나타나는 것과 같네.

 


『입인법문경(入法門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문수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염부제에서 해와 달의 바퀴가 뜰 때는 일체 그릇의 물이 청정해서 탁하지 않고 장애를 여의면 모두에 다 나타나지만, 해와 달의 바퀴는 본래의 처소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 

여래·응공·정변지(正遍知)가 시방 세계에서 장애도 없고 막힘도 없는 것이 이와 같고 이와 같다.

교화를 받는 중생이 스스로 마음이 청정하면 모두 여래를 보지만,
모든 여래는 도솔천에서 본래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처럼 시방의 일체 세계는 일체 중생이 일으킨 마음 속에 모두 다 나타난다.' ”

 

 

[복자함(伏字函) 제4권]

 



좌선만을 익힌다고 어찌 성불할 수 있겠는가.

수레를   나아가게 하려면    소를 몰아야 한다.

 



『전등록』에서 말하였다.

“남악양(南嶽讓) 선사가 마조(馬祖)가 좌선하는 걸 보고는 

마조를 가르쳐 인도하고자 

벽돌 조각을 가지고 암자 앞에 있는 돌 위에서 갈고 또 갈았다.




마조가 말했다.

'무엇을 하십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드네.'

마조가 말했다.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 수 있단 말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 수 없다면, 어찌 좌선해서 성불할 수 있겠는가?'

마조가 말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옳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가령 수레에다 소를 매어서 가는데, 수레가 가지 않으면 소를 때리는 것이 옳은가, 수레를 때리는 것이 옳은가?'

마조가 대답하지 못하자, 선사가 다시 물었다.

'그대는 좌선을 배우는 것인가, 좌불(坐佛)을 배우는 것인가? 

 

만약 좌선을 배운다면 선은 앉거나 눕는 것이 아니고, 

만약 좌불을 배운다면 부처는 정해진 상(相)이 아니니, 

머묾이 없는 법[無住法]에서 마땅히 취하거나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대가 만약 앉아 있는 부처라면 이는 곧 부처를 죽이는 것이다. 

만약 앉아 있는 모습에 집착한다면, 그 이치를 요달하지 못할 것이다.' ”

 

 



『영가(永嘉)』에서 말하였다.




행하는 것도 선이요,    앉는 것도 선이니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고요해도      체(體)는 편안하다.

설사 칼날을 만나더라도     항상 평탄하고

가령 독약을 마시더라도     덤덤할 뿐이다.

 

 

[증도가(證道歌)]


25) 반야품(般若品)    [34칙. 아직 6도(度)가 끝나지 않았다.]





명명백백하게 5온(蘊)이 공함을 비추어 보고

요달하고 요달해서 일체의 고통을 능히 건넌다.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에서 말하였다.


“관자재(觀自在)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5온이 모두 공(空)함을 비추어 보고 일체의 고통을 건넜다.

사리자여,
색(色)은 공(空)과 다르지 않고 공도 색과 다르지 않으니,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
수(受)·상(想)·행(行)·식(識)도 이와 마찬가지다.

사리자여,
이 모든 법의 공(空)한 모습은 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공(空) 가운데는 색도 없고, 수·상·행·식도 없으며, 눈·귀·코·혀·몸·뜻도 없으며, 빛깔·소리·냄새·맛·촉감·법도 없으며, 안계(眼界)도 없고 나아가 의식계(意識界)도 없으며, 무명(無明)도 없고 또한 무명의 다함도 없으며,



나아가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의 다함도 없으며,



고(苦)·집(集)·멸(滅)·도(道)도 없고,



지혜도 없고 또한 얻음도 없다.
얻을 바가 없기 때문에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니,

그러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공포도 없어서 전도몽상(顚倒夢想)을 멀리 여의어

구경(究竟)에는 열반에 든다.



3세(世)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提)를 얻었다.



그러므로 알지어다. 반야바라밀다는 대신주(大神呪)요 대명주(大明呪)요 무상주(無上呪)요 무등등주(無等等呪)이니, 능히 일체의 고통을 없애서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설하니, 곧 주문을 설하기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디 사바하'라고 하였다.”

 

 

 

 

 

[형자함(荊字函) 『인왕경(仁王經)』 말미]


우리 부처님은 몸소 반야(般若)로부터 태어난 것인데

어느 누가 마야 부인의 아들이라 하는가?

 

 


『도신족경(道神足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월천자(月天子)에게 말씀하셨다.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의 모태(母胎)이니,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곧 32상(相)과 10력(力)과 4무외(無畏) 등을 얻어서 모두 다 귀의해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야 부인으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니로다.' ”

 

 

 

 

[피자함(被字函) 제2권]

 

어찌하여 법신에 덕용(德用)이 없다고 말하는가?

마땅히 금은보화가 진흙에 싸인 것과 같다.




『대승법계론(大乘法界論)』에서 말하였다.

“중생의 법신은 이미 공덕과 상응하는데, 어째서 여래의 덕용(德用)이 없겠는가?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는 마치 연꽃이 아직 피지 않은 것과 같으니 
온갖 악한 소견의 잎사귀가 빙 둘러싸기 때문이며, 

또한 마치 금산(金山)과 같으니 
분노의 진흙에 의해 싸여 있기 때문이며, 

또한 마치 허공과 같으니 
어리석음의 구름에 의해 가려 있기 때문이다. 

 

총체적으로 게송으로 설한다.


연꽃이나 금산 등이 아직 드러나지 않는 것과 같으니

부처의   체(體)에    객진(客塵)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도 그러하다.

이 때에     공덕은   스스로 이익되게 하지 못하니

이를 뒤집으면 능히 커다란 이익이 될 수 있다.”

 

 

 

[임자함(臨字函) 제8권]


마음의 악한 티끌은 선으로 깨끗이 할 수 있다.

코끼리가 물을 흐려 놓아도 구슬로써 맑힐 수 있듯이.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만약 오직 마음만 있고 마음의 법은 없다면, 마땅히 더러움이 있고 청정함이 있다고 해서는 안 된다. 

비유하면 마치 청정한 연못의 물에 미친 코끼리가 들어가서 물을 혼탁하게 했을 때 물을 맑히는 구슬을 넣으면 물은 곧 맑아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 이외에 코끼리도 없고 구슬도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마음도 이와 같아서 

번뇌가 들어가기 때문에 

능히 마음을 혼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