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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에 대해서 '실제로 대비한다'는 것?

GraU 2021. 3. 4. 0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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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죽음의 순간 

(고엔카삶과 죽음의 기술

 

 

죽을 때 무엇이 일어날지를 알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죽음은 마치 바다에 이르기 위하여 계속 흘러가는 강의 굴곡 부분과 같다.

죽음은 마치 그 무엇이 되는 과정의 끝으로 보이나,

확실한 것은 아라한(arahant ,완벽히 자유로운 존재)이나 붓다(Buddha)의 경우에만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일반인이라면 그 무엇이 되기 위한 이러한 흐름은 죽음 이후에도 지속된다.

 

 

죽음은 한 생명의 활동을 종식시키고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새로운 삶을 펼치게 한다.

한 쪽에서 보면 이번 생의 마지막 순간이 되지만, 다른 쪽에서 보면 다음 생의 첫 시작이 되는 순간이다.

그것은 마치 태양이 지자말자, 그 사이에 어떠한 어둠의 간격도 없이 다시 태양이 뜨는 것과 같다.

다르게 표현하면, 죽음의 순간은 한 권의 책에 있어서 첫 단원의 끝이라고 한다면,

그 다음 생의 단원이 바로 다음 시작되는 것과도 같다.

 

그 어떠한 비유도 정확히 그 과정을 전달할 수는 없지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그 무엇이 되는 과정은 마치 철로 위를 달리는 기차와 같다는 것이다.

 

그 기차는 죽음이라는 역에 도착하고, 거기서 다소 순간적이나마 속도를 줄이나, 다시 똑 같은 속도로 계속 나아 간다.   그것은 역에서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아라한이 아닐 경우,

 

죽음의 역은 종착역이 아니고,

31가지 길로 서로 다르게 갈라지는 분기점이 된다.

그 기차는 역에 도착하자 말자, 그 선로들 중 하나로 이동하여 여정을 지속한다.

“그 무엇이 되기 위한 기차”의 속도는 과거의 업의 반응이라는 힘에 의해 추진되며,

이번 역에서 다음 역으로, 하나의 선로에서 다음 선로로, 쉼 없이 지속적인 여행을 계속한다.

 

선로의 변경은 자동적으로 일어난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 얼음이 녹아 물이 되고 차가운 물이 얼음이 되듯이,

이 번 생에서 다음 생으로의 변환은 자연의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

이 법칙에 따르면 그 기차는 스스로 선로를 바꿀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의 다음 선로를 놓는다는 것이다.

 

 

이 기차에 있어서 선로의 변화가 일어나는

죽음이라는 분기점은 아주 중요하다.

 

지금 현재의 생은 포기된다. 육체적인 소멸이 발생되고, 즉각적으로 다음 생이 시작된다.

이것을 빠티산디(patisandhi,다음 생을 얻는 것)라고 하는 데, 그것은 죽는 순간의 결과이다. 죽음의 순간 바로 수태(태어남)의 순간을 만드는 것이다.

 

 

매 죽음의 순간에

바로 다음의 태어남의 순간을 만들기에

 

죽음은 죽음일 뿐만이 아니라 태어남이기도 하다.

 

이러한 분기점에서 생은 죽음으로 변하고, 죽음은 다시 태어남으로 바뀐다.

따라서 매 번의 생은 다음의 죽음을 위한 준비과정이다.

만약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는 금번 생을 올바른 죽음을 맞기 위한 최선의 기회로 삼을 것이다.

 

최선의 죽음은 이번 죽음이 마지막이 되게 하는 것이다.

분기점이 아닌 종착역으로, 즉, 아라한으로서의 죽음을 말한다.

 

그러면 이제 거기에는 그 기차가 더 이상 갈 수 있는 선로가 없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종착역에 이르기 전까지는,

다가오는 죽음이 좋은 탄생을 낳고,

때가 되면 종착역에 도달할 것을 최소한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자신에 의해, 우리 자신의 노력에 좌우 된다.

 

 

우리 자신이 자신의 미래를 만들며,

자신의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한) 자유 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복과 불행을 만드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 자신이 전진하는 그 기차를 떠받치는 선로를 만드는 자가 되는가?

이것을 대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업(kamma)을 이해하여야 한다.

우리 마음의 선하거나 불선한 의도가 업이다.

 

 

정신적으로 또는 말이나 육체적인 행위를 하기 전에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선하거나 불선한 의도가 모든 행위의 시초가 된다.

 

여섯 곳의 감각의 문에서 접촉이 일어나면 의식이 일어나고, 그

러면 산냐(sanna,지각)가 경험을 평가한다.

 

그리고 거기에 따른 느낌(vedana)이 일어나고,

결국 업의 힘을 일으키는 반응(sankara)이 발생한다.

 

 

이러한 의도적인 행위는 그 종류가 다양하다.

그 의도들은 얼마나 강렬하고 약한가?

얼마나 느리고, 깊고, 얕고, 무겁고, 가벼운가?

이러함에 따라 그 반응들의 강도는 차이가 나게 된다.

 

그 어떤 것들은 마치 물위에 선을 긋는 것과 같을 것이고, 또 어떤 것들은 모래 위에, 또 다

른 어떤 것들은 바위에 새기는 선과 같을 것이다.

 

만약 그 의도가 선한 것이라면 그 행위는 똑 같이 선할 것이며 그 결과도 이로울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 의도가 불선한 것이라면 그 행위도 동일하게 불선할 것이고 그 결과는 참혹할 것이다.

업을 일으키는 이 모든 반응들이 새로운 탄생에서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

어떤 것들은 너무나 사소하여 그것들이 실재적인 결과를 낳지 않는다.

또 어떤 것들은 다소 무거우나, 금번 생에 소진될 수도 있기에 다음 생에 까지 지속되지 못한다.

다른 것들은 한층 무겁기에 금번 생에 지속되면서, 다음 생에 까지 연결된다.

 

하지만 그들 자신이 새롭게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이번 생과 다음 생애 동안 계속적으로 증대된다.

많은 업들이 바바-깜마(bhava-kammas) 또는 바바-상카라(bhavasankharas)이며,

이것들은 새로운 탄생과 생명을 낳는다.

 

이러한 각 각의 바바-깜마(나타나는 과정을 일으키는 행위들)는

특정한 존재의 영역의 진동과 일치하는 자력(당기는 힘)을 지닌다.

 

특정한 바바-깜마의 진동은

동일한 밀도를 지닌 세계(bhava-loka)의 진동과 결합한다.

 

그리고 그 두 개는 업력을 포함하는 이 우주의 법칙에 따라 서로를 끌어 당긴다.

 

 

이러한 바바-깜마(bhava-kammas) 중의 하나가 발생되면, 그 철로의 기차는 죽음의 역에 있는 31개중의 선로 중 하나에 이끌리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31개의 선로는 실제로는 31개 존재의 영역(태어나는 곳)을 뜻한다.

그것들은

11개의 욕계 영역     (4개의  저급한 존재의 영역,    7개의  사람과 천상의 영역),

16개의 색계 영역     (미세한 물질적인 육체가 여전히 남아 있는 곳),    그리고

4개의 무색계 영역   (마음만이 존재하는 비물질적인 영역)  이다.

 

 

이번 생의 마지막 순간에

특정한 바바-상카라가 일어날 것이다.

 

새로운 탄생을 줄 수 있는

이 상카라는

해당 존재의 영역과 연결된 진동을 지닐 것이다.

 

죽음의 순간에 31개의 전체 영역들이 열리게 된다.

이에 따라 그 열차가 다음에 어떤 선로에 달려 갈 것인가는

일어나는 상카라에 의해 좌우 된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그 열차는 새로운 선로로 방향을 바꾸고,

바바-깜마(bhava-kammas)

반응의 힘은 다음의 존재로 들어가는 의식의 흐름을 밀어준다.

 

예를 들어

화나 악한 의도의 바바 깜마(bhava-kammas)는 열과 진동의 성품을 지닌 것으로,

보다 저급한 존재의 영역들 중 하나와 결합하다.

 

유사하게 자애의 성품을 지닌 깜마는 평화롭고 상쾌한 진동을 지님에 따라,

오직 고귀한 존재의 영역(brahma-loka)과 결합할 수 있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며,

이러한 법칙들은 아주 완벽하게 일치되어

그 과정에 있어서 어떠한 결함도 없다.

 

(註: 여기서 선로를 변경하며 달리는 기차라고 유추한 해석은, 어떤 영혼의 환생으로 이해하여서는 안 된다. 어떠한 실체가 있어 이번 생에서 다음 생으로 옮아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축적된 깜마 상카라의 힘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다음 생으로 넘어가는 것은 없다.)

 

 

죽음의 시점에 일반적으로 강한 상카라가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선한 성품이거나 불선한 성품 중의 하나일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번 생에서 그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혹은 어떤 성현을 살해했다면,

이 사건의 기억은 죽음의 시점에 나타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어떤 사람이 아주 깊은 수행을 하였다면, 그러한 마음의 상태가 일어날 것이다.

 

그와 같이 강하게 일어날 수 있는 바바-깜마가 없다면, 비교적 덜한 깜마(kamma)가 나타날 것이다.

 

 

일어나는 어떠한 기억이든

깜마(kamma,업)로써 분명히 나타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성자에게 음식을 공양한 선한 업을 기억할 것이나, 또는 그가 다른 사람을 죽인 것을 기억할 수도 있다.

그와 같이 지난 업에 대한 회상들이 일어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특정한 업과 관련된 대상이 일어난다.

 

어떤 사람은 공양으로 올렸던 음식이 가득한 그릇이나 다른 사람을 죽이는 데 사용한 총이나 칼을 볼 수도 있다.

이것들을   

깜마-   니미타(표상, 나타나는 모습)  라고 부른다.

 

 

또 다른 경우는 다음 생의 표상이나 상징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을 가티 - 니미타 (gati-nimitta)라고 한다.

이러한 표상들은

어떠한 천상의 세계나 동물의 세계와 같은

어떠한 바바-로카(bhava-loka)라

 

그 흐름이 당겨져서 향하는 곳과 일치하게 된다.

 

죽어 가는 사람은 종종 일종의 경고로써,

마치 기차의 전조등이 그 선로의 전방을 비추어 주듯이 이러한 표상들의 일부를 경험할 수 있다.

 

이러한 니미타(표상)들의 진동은 그 존재의 다음 생의 영역(세상)의 진동과 일치한다.

 

 

훌륭한 위빠사나 수행자는 저급한 존재의 영역들로 이끄는 선로들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그는 명확히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며, 항상 자신을 죽음에 대비하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수행한다.

 

만약 그가 고령에 접어 들면,

매 순간 알아차림을 더욱 더 두어야 한다.

 

죽음에 대하여 어떠한 대비가 이루어져야 하는가?

 

그는 위빠사나 수행을 함으로써,

몸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감각에도 평정하게 남게 되며,

이에 따라 불쾌한 감각에 반응하는 형태의 습관을 부숴 버린다.

 

따라서 마음은,

전에는 대개     또 다시     불선한 반응(sankara)을 일으켰지만,

평정하게 남아있는 새로운 습관을 계발하게 된다.

 

만약 아주 무거운 상카라들이 없다면, 대부분 죽음의 시점에는 습관적인 반응들이 일어난다.

따라서 새로운 상카라가 만들어 짐에 따라, 마음 깊숙이 있던 오래된 상카라는 표면으로 부상할 수 있으나, 일어난 새로운 상카라가 힘을 얻는다.

 

 

죽음이 접근함에 따라, 아주 불쾌한 느낌을 경험할 것이다.

늙음과 병듦 그리고 죽음은 괴로움(dukkha)이다.

그것들은 아주 큰 형태의 불쾌한 감각들을 낳는다.

 

만약 이러한 감각들을 침착하게 바라보는 데 익숙하지 않으면,

성냄과 짜증 혹은 악한 감정으로 반응하게 될 것이며,

 

그럴 경우 새로운 탄생을 낳게 하는 바바-상카라(bhavasankhara)와 같은 진동(파장)이 일어날 기회를 주게 된다.

 

그러나 만약 충분한 수행을 하였다면,

죽음의 시점에 평정을 유지하면서 이러한 커다란 고통을 감각들에 반응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비록 일련의 재탄생을 낳는 업인    바방가(bhavanga)  내에     깊이 자리 잡은    관련된    바바-상카라일지라도   일어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다.

 

수행을 하지 않은 일반인들은

죽음의 시점에 불안한  채로 남아 있게 될 것이고,

공포에 짓눌리기도 할 것이며,

이에 따라 두려운 바바-상카라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동일하게 고뇌, 슬픔, 침울함과 그리고 다른 느낌들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진다는 생각의 시점에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와 관련하여 일어나는 반응인 상카라(sankhra)가 나타나서 마음을 지배할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평정심으로, 

일어나는 감각들을 지켜 봄으로써,

그와 같은 상카라를 약화시키고,

이에 따라 죽음의 시점에 그것들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치 않게 된다.

 

죽음에 실제로 대비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평온함과

무상함의 지혜를 지니고

몸과 마음 안에서의 감각들을 분명히 반복적으로 지켜 보는

 

습관을 계발하는 것이다.

 

 

죽음의 시점에 이러한 강력한 평정의 습관은 자동적으로 나타날 것이며,

생사를 끌고 가는 존재의 열차는 새로운 생에서 위빠사나를 수행할 수 있는 선로와 연결될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 자신은 자신을 낮은 영역에서 탄생을 막고, 보다 높은 영역에 태어나게 된다.

그렇게 함이 중요한 것은 낮은 영역에서는 결코 수행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죽는 시점에 수행자가,

한숨과 침울함으로부터 벗어나

좋은 담마(Dhamma, 진리)의 분위기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는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들이 옆에 있게 된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할 수 있고, 

메따(metta)의 진동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들은

평화로운 죽음을 맞는 데 있어 가장 큰 도움을 준다.

 

 

종종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이 죽음의 시점에 좋은 재탄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관대함과 도덕적인 순결함 그리고 다른 강력한 선한 자질들과 같은

선한 바바-상카라의 나타남에 기인한다.

 

하지만 위빠사나 수행을 통하여 특별한 성취를 이룬 자는

그 자신을 위빠사나 수행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곳에 태어나게 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의      의식의 흐름   내

바방가(bhavanga)  안에     축적되어  비축된     

바바-상카라  를      천천히 약화시킴으로써,

 

그는 그 무엇이 되는 긴 여정을 줄이고,

곧 목표에 이르게 된다.

 

 

이번 생에 담마(Dhamma, 부처님의 가르침,진리)를 접하게 되는 것은

과거에 많은 선업을 행했기 때문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사람으로서의 생을 성공적으로 보내라.

그러면 죽음이 언제든지 오더라도

평온한 마음으로 맞을 것이며,

미래를 위한 행복을 낳을 것이다.

 

 

 

[출처] 115. 죽음의 순간 (고엔카) 삶과 죽음의 기술|작성자 참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