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과 !/수미산이야기

불자의 참모습 :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

GraU 2007. 4. 17. 17:25

 

 

수미산 메일 글 중에서

 

 

 

② 균형 잡힌 인격

 

불법은 한 번 읽고 흘려버려도 되는 상상물이 아니다. 불법은 삶, 우리가 매일 매일 살고 있는 실질적인 삶을 문제 삼는다. 우리가 이 불법을 꾸준한 노력과 실천을 통해 행동으로 옮기고 그래서 우리 인격의 뼈대로 삼으면 삶의 의미와 가치는 크게 고양된다.

 

불법의 궁극적 목표는 열반, 즉 고로부터의 해방이다. 하지만 당장의 목적은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 부딪히고 있는 문제들을 이해하고 풀어나가는데 도움을 주고, 또 우리로 하여금 원만하고, 행복하고, 그리고 주변환경이나 그 환경을 함께 살아가야 하는 동류 중생들과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게끔 균형 잡힌 사람이 되게 하는 데 있다. 그런데 이 균형이란 것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가치가 있는 목표인 것은 틀림없지만, 요즘같이 허위의 이념이나 환상적 가치들이 범람하는 세상에선 좀처럼 이루어지기 힘들다.

 

우리 시대의 상대적이고, 때로는 허위에 찬 가치들에 비해 부처님의 가르침은 진실되고 절대적인 가치들을 드러내고 있다. 그 진실됨은 우리 자신의 경험을 통해 점검 확인해 볼 수 있다. 점검 확인하는 능력을 배양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불교는 명료한 사유, 자제력, 그리고 정신적 계발을 가르친다. 이와 같은 공부에 의해 적절한 지혜와 또렷한 이상을 견고한 기반으로 하루 하루의 삶을 구축해 나가는 사람은 비록 재가자일지라도 향상과 성취가 보장된다.

 

이렇게 보면 불법은 일상생활에 대한 지침이라 할 수 있고, 그 기본적 원칙들은 삶이라는 예술에서 위대한 실천적 가치를 이룬다. 따라서 재가 수행자는 한편으론 책임과 의무에 충실하면서도 열반이라는 궁극 목표를 겨냥해서 잠시도 쉬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 오히려 자신의 재가생활을 열반 실현을 위한 준비요 훈련장으로 여겨 마땅할 것이다.

 

『대길상경(Mah?-mangala sutta)』은 바른 서원을 지니는 것이 인생의 진정한 축복 중 하나라고 설하고 있다. 사람은 모름지기 적절한 몸둘 곳을 찾아서, 적절한 원을 세우고, 그 원을 이룰 적절한 길을 발견해야 한다는 뜻이다. 삶에서 가치 있는 목표, 분명한 행동노선, 그리고 소박하고 건전한 인생철학을 지침으로 지닌 사람이야말로 행복하고 균형잡힌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여기서 ‘철학’은 삼계라는 우주 속에서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알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이다. 철학이 없으면 삶은 김빠지고 활력을 잃고 소득이 없는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린다. 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지혜에 근거한 적응과정을 통해 이 세상과, 더불어 살아야 할 중생들과 조화롭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불교에서는 물질에 대해 마음이 우위를 점한다. 마음의 독특한 특징은 ‘의도’를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이 인생과 업의 상속을 최대한 유용하게 쓰자면, 삶의 실제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이런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그래야만 윌는 되고자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자기성찰과 자기분석을 통해 자신을 알게 될수록 자기향상의 가능성은 더 커질 것이다. 이에 더하여 자신이 어느 만큼 너그럽고 침착하고 꾸밈없고 친절하고 사려 깊고 정직하고 진지하고 참된지, 어느 정도 남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알고 공손하고 열심이고 활력이 넘치는지, 그리고 얼마나 조심성 있고 인내력 있고 아량 있으며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이러한 자질들은 공부가 된 불자라면 으레 갖추게 되는 덕성이다. 그렇다고 한꺼번에 이 모두를 다 갖추려 덤빌 필요는 없다. 그때그때 필요한 덕성을 계발하도록 노려하면서 조금씩이라도 매일 매일 실수행(實修行) 해나가는 것으로 족하다. 모든 행동이 그러하듯이 올바른 행동도 자주 할수록 쉽게 몸에 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습관의 힘에 의해서 결국 올바른 행위는 우리 인격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마음챙김 또는 ‘그대로 보기’는 중요한 마음가짐의 한 측면이다. ‘그대로 보기’라는 것은 대상에 대하여 좋다거나 싫다는 생각, 선입관이나 편견이 없이 객관적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이렇게 대상을 그냥 그대로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불자로 성숙했다 할 수 있다. 우리는 일상의 생각에 이러한 ‘있는 그대로 보기’의 원칙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그렇게 하면 생각이 더 명료해지고 생활이 더욱 건전해져서 대중매체의 선전이나 광고의 해악에서 크게 벗어날 수 있으며 대인관계도 한결 나아질 것이다.

 

따라서 균형 잡힌 불자는 살아가면서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불교원칙에 따라 심지를 바로 세우고, 굳건한 주견으로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비겁하게 처신해서는 안 되며, 남이야 무어라 하든 홀로 자신의 길을 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물론 충고는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좀더 경험 있고 지혜로운 사람에게 충고를 구한다 해서 자율성이 침해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결정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몫이다.

 

고(苦)가 갈애(渴愛)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세속사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해야하고, 이에 더하여 오계를 엄격히 지킴으로써 자기 생활을 다스려야 한다. 우리의 정신적, 도덕적 생활을 관장하는 보편법(출세간법)과 조화를 이루어 살기만 하면 금생에도 또 내생에서도 인격의 온전한 향상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계율을 잘 지켜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품성을 함양하는 것은 마음을 다스리고 또 열반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지혜를 얻는데 선행조건이 된다.

 

산다는 것은 본래 무상한 것이어서 실망스럽고 불행한 일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런 일이 닥쳐도 평정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정견을 가진다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즉 모든 일은 원인이 있어서 일어나고 그 원인에 상응하여 결과가 나타나며, 금생이 아니면 과거 어느 생에서라도 자신이 그 원인의 장본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안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조금씩 감정을 다스릴 수 있게 되고 그러면서 두려우뫄 걱정이란 워낙 근거 없고, 불합리하고, 과장된 것임을 바로 보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마주치는 불공평, 개인적 ㆍ 사회적 불만, 심리적 부적응 등도 업과 재생이라는 불가분의 두 원리에 의해 합리적으로 충분히 설명된다.

 

불자들이 자신의 철학에 충실하여 이러한 태도를 바꾸지 않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 동안 쌓아온 선업, 덕성을 갖춘 인격, 선정수행으로 얻은 행복 등 물질과는 무관하나, 보이지 않는 정신적 자산들로부터 얻어낸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힘을 가진 이상 그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자립자족한 마음의 주인이 될 수밖에 없다. 삶은 소박해지고, 바라는 것은 줄어든다. 물질적인 것은 이제 그에게는 한낱 종일 뿐 더 이상 상전이 아니다. 그는 바깥 경계라는 독재자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마침내 보이는 것은 한 때 덧없이 스쳐 지나가는 것일 뿐이며, 보이지 않는 것이 실상(實相)임을 깨달은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이제 그는 고요하고 잘 다스려진, 만족한 마음이 되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만족은 최상의 부(富)요 행복의 네 가지 원천 중의 하나이다.

건강은 최고의 이득이요
만족은 최대의 부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최선의 친지요
열반은 최상의 낙(樂)이다.

-법구경 ㆍ 204-



정견이 있으면 그는 어떤 새로운 상황이 닥치더라도 적의나 쓰라림 없이 적응할 수 있게 된다.

믿음(saddh?), 즉 지혜를 바탕으로 한 불법에의 확신이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확신에 찬 행동을 해야 한다. 모든 진실한 불자는 팔정도의 여섯 번째 항복인 정정진(正精進)의 다음 네 가지 노력을 꾸준히 실천해 나가야 한다. 이미 일어난 불건전한 마음 상태는 극복해내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건전한 마음 상태는 미리 막고, 이미 일어난 자애와 연민 같은 건전한 마음 상태는 잘 간직해 나가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건전한 마음 상태는 불러일으켜야 한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자기 자신을 지켜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돕는 일도 된다.

 

우리는 자기가 한 생각이나 행동이 올바른지 아닌지를 스스로 묻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자신에게 정직한 것이야말로 건전한 정신을 유지하는 확실한 길이기 때문이다. 이에 더하여, 매일 몇 분간이라도 할애하여 조용히 반성하거나 명상해야 한다. 이는 하루 일을 되돌아보고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원리에서 얼마나 벗어났는지 살펴서 앞으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한 것이다.
또한 우리는 부처님 법문을 한 줄이라도 매일 읽어야 한다. 이 좋은 습관을 통해 부질없는 근심 걱정을 잊고 마음을 닦아 우리의 삶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재가불자로서 온전한 인격을 갖추어 나가고 지성을 계발하고 감성을 다스리며 자리이타의 결의를 다짐으로써 우리는 모든 면에서 불법에 합당하게 향상할 수 있다.

 

 

 

 

 

 

③ 자기 자신을 아는 것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제일의적으로 진(眞)과 가(假)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게 되기 위해 자신의 내면 변화를 진실되게 충분히 이해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그럴 때 그는 매순간의 생각, 말, 행동 하나 하나를 빈틈없이 알아차리면서 한 생애를 살 수 있게 되나. 인생의 목적이 보다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재가불자들의 경우 그렇게까지 되기는 어렵지만, 팔정도에 입각하여 세간사의 개인적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존재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가장 긴요한 일이다.

 

 

 

불교적 의미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마음과 물질, 즉 무상하게 변천하는 다섯 구성 집단1 들이 역어내는 한낱 흐름이다. 그 어떤 지속 불변의 성질도 이 다섯 집단의 내부나 배후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이 개개의 합류는 갈애에 의해 활력을 띠게 되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할 수 있게 된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란 존재는 금생과 여러 전생에 행한 생각과 행동의 총화이다. 태어날 때 우리는 본능의 상속뿐만 아니라 지력, 기질, 태아적 인격, 그리고 몸과 같은 자질들도 역시 갖추고 태어난다. 그 후 자라는 과정에서 많은 요인들이 섞여 들어서 현재의 인격을 빚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업의 상속의 질이나 가정의 생육 및 학교의 교육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요인들을 우리가 어떻게 쓰는가 하는 것이다. 이를 결정하는 것은 인격이다.

인격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한다. 모든 의도적 행위는 좋게든 나쁘게든 인격에 영향을 끼치며 이 모든 행위에 대한 책임은 마음에 있다.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지력, 기질, 본능을 부리는 것이 인격이며 이러한 인격을 만들어 가는 가장 강력한 힘은 마음이 지니고 있는 이상(理想)이다. 불자의 경우 그 이상은 아라한이다. 아라한이 되고자 하는 이상은 우리들의 상충하는 충동을 조정하고 복잡한 정신을 조화 통합시키며 하릴없는 소모와 갈등을 제거한다. 따라서 이런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행위는 선업이고 그 반대는 불선업이다. 고귀한 수단에 위해서만 고귀한 목적은 성취 될 수 있다.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길은 타고난 업 중에서 좋은 점은 더욱 발전시키고 부족한 점은 잘 보완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우리가 당장 행복하고 안정되고 성공적으로 살아가려면, 우리는 자신을 신뢰하고 또 자신의 행의 내지 불행위(不行爲)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업의 법칙에 따르면, 자신이 행하고 있는 행동에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점뿐 아니라 과거에 지은 업의 결과(과보)마저도 현재 우리가 취하는 선하고 적극적인 행동에 의해 부분적으로 또는 전적으로 무효화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를 잊고, 지금 하고 있는 행위에 책임을 지면서 불법의 원칙에 따라 자기 인생을 만들어가려는 결심을 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자신 있게 미래를 대할 수 있다.

 

이 일을 실현시키자면 우리는 먼저 이 인생에는 도저히 바꿀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있다는 사실부터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우선 조건지어진 존재의 세 가지 기본적 표지인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는 바뀔 수 없다는 것. 병과 노쇠는 피할 길 없으며 죽음은 우리의 마지막 귀결지라 는 것. 이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이런 사실들을 흔연히 받아들이고 같이 살아갈 줄 아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의 제한된 시간과 정력을 우리가 바꾸고 개선시킬 수 있는 것들에 쏟아붓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성격적 결함이나 본능적 충동, 곧 물욕, 공격욕, 자기주장, 색욕 그리고 공표 등에 사로잡히는 성향 따위는 이해, 조절, 승화라는 일련의 과정에 의해 억제될 수 있고 심지어 뿌리째 뽑아버릴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요체는 오계를 지키는 일과 마음챙김을 체계적으로 실천하는 일이다.

 

 

마음챙김을 향상의 열쇠로 사용하자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 보기를 공정한 관찰자가 하듯이 하면서, ‘이런 성격이 나에게 있구나. 그것이 나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지만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이를 고치기 위해서 나는 “지금” 무얼 해야 하지?’ 하고 마음의 눈으로 주시해야 한다.

 

 

무엇이 바뀌어질 수 있는 일인지 알아내고 그리고 계율 준행과 정진 노력에 의해 불선한 성질과 습관을 고치는 일이야말로 참으로 지각있는 태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받아들이고 조절하는 이 두가지 일은, 하다보면 이전의 생각, 습관, 사는 방식들을 바꾸어야 할 필요에 부딪히게 될 수도 있는데, 기왕에 바꾸어야 할 일이라면 빨리 바꿀수록 더 효과적으로 안녕과 행복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가 지니고 있는 역량이나 가능성을 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꾸준히 자기를 관찰분석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자질과 기량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서를 작성할 필요가 있다. 이때 정서적 자질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니, 감정은 일반적으로 지성보다 더 강력한 힘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이성적인 동물은 아니다. 그는 왕왕 자신의 진정한 이익과는 정반대로 행동한다. 일껏 합리적 결정을 해놓고도 폭발하는 격정이나 감정 때문에, 지나가는 기분이나 변덕 때문에, 또 무관심이나 게으름 때문에 뒤집어버리는 일이 많다.

 

 

 

따라서 자신을 안다는 것은 변화의 여지가 있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다. 자기가 세운 이상을 바탕으로 숙업의 자질이라는 재료를 잘 쓰겠다는 마음으로 신중하게 행위를 함으로써 우리는 좋은 쪽으로 바뀔 수 있다. 이 말은 사람은 모름지기 하나의 삶의 철학을 일구어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철학이란 하나의 목적을 전제하는 것으로서, 불자에게 있어 이 목적은 ‘법에 따른 향상’이라 하겠다.

 

 

 

 

 

  1. 1)오온(五蘊):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 요소의 집합, 또는 집착 대상의 다섯 범주. 물질 또는 신체의 요소, 느낌이 요소, 느낌의 요소, 지각의 요소, 의지의 요소, 의식의 요소. 아라한의 경우는 오온에 대한 집착이 멸하여 오온이 단순한 객관적 현상으로 존재할 뿐이므로 그냥 오온이라 부르고 아직 집착이 남아있는 범부와 사향삼과(四向三果)의 경우는 오취온(五取蘊)이라 구분해서 부른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