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인과와 도덕적 책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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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육체 및 정신의 작용을 정신물리적 에너지의 역학적 흐름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는 유일한 지식체계라는 점부터 먼저 말해 두어야겠습니다. 부처님이 설명하시는 정신물리적 역학의 세세한 의미를 여기선 깊이 파고들 필요도 없고 또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불교에 의하면, 흔히 ‘삶’이라고 불리우는 현상의 정체는 단지 인과관계의 진행일 따름이고, 그것은 정신적 에너지와 육체적 에너지간의 부단한 상호작용과 관련된 것입니다.
생겨남 때문에 사라짐이 있고 사라짐은 또한 생겨남의 전제조건 입니다. 그럼으로써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변화란 인과관계가 진행되어 가는 모든 과정에 있어서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상대성의 세계는 큰 변화의 세계일 뿐입니다. 인과관계가 계속적으로 지속되는 것은 바로 이 변화에 의해서 입니다. 과거의 순간은 현재 순간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을 지어주고, 현재 순간은 미래 순간의 발생을 조건지워 줍니다. (물론 바로 직전의 순간만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작용하는 유일한 조건은 아니겠지만.)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는 달라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다르지만은 않은 인과의 연속작용을 이어 나가게 됩니다. 정신물리적 에너지 단위들이 이 몸뚱이라고 하는 신체적 구조 안에서 찰나로 생멸하면서, 인과관계의 과정을 지속하고 있는 동안 생명은 지속하여 인간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번뇌에 찬 마음은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지속성이 끊어지지 않고 유지되도록 강요하는 어떤 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번뇌가 인과율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고 계속 작용한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자연히 업의 교리에 입각하여 도덕적인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자각을 하게 됩니다.
사후존속(死後存續)이나 업에 대한 언급이 베다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고 다만 브라흐마나(Braahma.na) 에 암시 정도로 나타나 있을 뿐이며, 초기 우파니샤드에 약간의 견해가 나타나고 있지만 그 중 몇 가지는 윤회론을 분명히 거부하고 있습니다.
불교사상에서 빠알리어의 ‘kamma’ 산스끄리뜨어의 ‘karma’가 가지는 전문적인 의미는 의지적 행위 또는 의도적 행위란 뜻입니다. 행동을 야기시키는 것은 바로 이 바라는 생각입니다. 즉 의지가 행동을 조건지운다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연기법 을 발견하시고, 존재의 지속을 인과적 요소와 연관시켜 이를 업의 이론으로 설명하셨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오로지 인류에 대한 자비심에서 였습니다. 인간의 행위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의 상태와 연관되기 마련이므로 우리가 지어 나가야 할 일은 행위에 유익한 조건이 될 수 있는, 윤리적 면에서 고양된 정신적 상태를 만드는 일입니다. 행동을 결정짓는 생각 자체가 자기향상에 알맞도록 도덕적으로 고양되려면 윤리적인 면에서 성격이랄까, 인간성이랄까 하는 것의 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사람의 윤리적 쇄신을 특히 강조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인식을 끊임없이 휘어잡는 번뇌들을 약화시켜 마침내 근절시켜 버리는 윤리적 노력의 순서를 수행 방법론 속에 잘 엮어 놓으셨습니다.
업 또는 의지[行]는 감각적 접촉[受] 인식[想] 그리고 의식[識]과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서 인과의 지속적 흐름에 필요한 힘을 취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각 존재가 좋게든 나쁘게든 제나름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새로운 상황의 유형을 조건지우기도 합니다. 부처님께서 “지금 우리의 모든 것은 우리가 생각해온 바의 결과이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 위에 세워져 있다… 수레바퀴가 소의 뒷발굽을 따르듯 악은 그것을 행한 사람의 뒤를 따른다… 그림자가 사람을 떠나지 않듯이 선은 그것을 행한 사람과 같이 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같은 인간이면서도 사람 사이에 불평등이 존재하는 까닭은, 주로 윤리적인 의미에서 선하거나,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거나 또는 악하게 마음낸 그 의지적 생각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의도적으로 행한 경험내용은, 그것이 선이든, 악이든, 선도 악도 아니든, 현재의 생각의 찰나[心刹那]를 조건지우고, 또 바로 다음 찰나는 현 찰나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지금 미래를 향해 방출하는 에너지의 흐름은 당연히 우리의 나아갈 궤도를 조건짓게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도, 운명이나 숙명에 의해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생각의 성향과 관계있을 뿐입니다. 즉 계속 이어질 존재의 유형을 형태지어 주는 데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마음 속에 선 또는 악이 어느 정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유의사에 따른 모든 행동은 그렇게 행동하도록 밀고 있는 생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행동은 개인 각자가 그렇게 행동하려는 의도를 스스로 만들어 낸 탓으로 취해지는 것이니까 결코 우연히 일어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감관 또는 느낌[受]과 상호 작용되는 의지작용[行]은 말을 하도록 만들거나 행동을 하도록 만들며 때로는 두 가지를 동시에 유발시키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겉으로 분명히 드러난 행위들은 윤리적으로 판단해 보아 건전한 마음 상태나, 건전하지 못한 마음상태, 또는 건전하지도 불건전하지도 않은 마음상태 중 어느 것에건 연관시킬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윤리적인 측면으로 보아 이로운 행위를 지을 수 있는 업인(業因)을 내게끔 우리의 생각을 윤리적으로 순화시키도록 강조하고 있으므로, 우선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계행(戒行)면에서 건전치 못한 마음상태를 아예 일어나지 못하게 막는 일입니다. 그러자면 쉼없는 경계와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한 순간일지라도 경계하지 않고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믿었던 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감각을 재료로 하여 생각을 구상화시키며, 인식은 마음이 만들어낸 관념을 인지합니다.
그 경에 의하면 동물을 해치거나 골려주거나 잔인한 짓을 한 사람은 병약하기가 쉽고, 반면에 동물들을 잘 돌봐준 사람들은 건강하다고 합니다. 마음이 불안정하고 화를 잘 내고, 불쾌한 성격에, 남을 혹사시키기를 예사로 하는 사람은 못생긴 외모를 타고 나기 쉬우며, 그 반대인 사람은 단정한 용모를 갖게 된다고 했습니다.
또 남의 재산이나 성공을 시샘하고 질투하는 사람은 존경을 받지 못하게 되고, 반대인 경우에는 존경과 명예를 얻게 됩니다. 또한 남에게 보시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재산이 없기 쉽고, 허영에 가득 차고 거만해서 마땅히 존경해야 할 사람을 존경할 줄 모르는 사람은 비천한 가문에 태어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평등한 인간이지만 이러한 요소들이 모두에게 고루 똑같이 퍼져 있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 불교적인 견해로 보아, 사람은 자신이 일으킨 생각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자의로 하는 행동은 어떤 특정 순간에 있어서 건전한 마음, 불건전한 마음, 혹은 건전하지도 불건전하지도 않은 마음의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일 뿐입니다. 착하든지, 악하든지, 착하지도 악하지도 않든지 하는 것은 행동 자체가 아니라 그 행동을 취하게 하는 마음상태인 것입니다.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원소들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변화생성해 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생각도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생성과정 속에서 생겼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다시 생겨나는 생멸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악한 상태의 마음을 착한 마음이 극복해 버릴 수도 있고, 반대로 지속적인 수행이 없을 때는 착한 상태가 악한 마음으로 더럽혀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복을 재는 표준은 생각에 대해 가장 영향력을 미치는 도덕적 요소인 것입니다.
이 비유는 업의 결과를 일반화시켜서 요지부동의 결론을 끌어내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옳지 못한 추리는 그릇된 견해를 낳습니다. 악한 마음의 소유자라도 후에 덕스러움을 되찾아서 자신의 생각의 흐름을 윤리적 향상 쪽으로 흐르게 조건지울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에너지 흐름을 어느 정도는 건전하게 유도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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