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과 !/수미산이야기

[2]②불교인의 새 시대관

GraU 2007. 3. 28. 08:04



② 불교인의 새 시대관

 

 

 

이 문제에 있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과 훗날의 논사(論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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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말씀과는 신중하게 구별해야 하리라고 봅니다. 부처님께서 인간의 일반적 성향과 수명이 큰 폭으로 변하는 방대한 시간의 주기를 언급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장수하고 근심 걱정이 적었던 시절, 부처님이 출현하시어 진리수행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 갖추어졌던 그런 시절에 관해 언급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장수를 누리는 것이 언제나 좋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도리어 깨달음을 향한 공부에 장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장수를 누리다 보면 불교 진리의 가장 핵심인 무상(無常)의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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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깨닫기가 어려워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반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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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드신 후 약 천 년 뒤에 스리랑카에서 논장을 펴낸 논사들은, 그 당시에 이미 극히 암담한 미래를 전망한 일이 있습니다. 즉, 사람들의 깨칠 수 있는 능력이 오백 년을 단위로 하여 점차적으로 퇴조해 가리라는 것입니다. 그들 말대로라면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수행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경지는 기껏해야 열반에 대한 최초의 통찰, 즉 예류향과 예류과 밖에 될 수 없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나마 앞으로는 사람들의 근기가 너무 둔해진 탓으로 이만한 정도의 증과(證果)조차도 얻기가 어렵게 될 시대가 올 것이라 합니다.

중국, 티베트 및 일본 등지의 일부 대승불교적 전통에 의하면, 그 전망은 더 한층 암울해져 현대를 아예 ‘말법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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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규정하고, 이 시대에는 어떤 향상도 불가능해서 오로지 미래불인 미륵불의 시대에 다시 태어나도록 염원하거나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라고 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전통의 논서 해석에 의하면 현 불법의 수명은 오 천 년인데, 그 절반 시점까지는 계속 정법이 쇠미해지다가 그 시점을 넘기면서부터는 다시 힘차게 일어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불기(佛紀)로 헤아려 이천 오 백 년하고도 조금 더 지났으니까(집필 년인 1977년이 남방전통으로는 불기 2521년이 됨) 오 천 년 존속설의 절반 시점을 약간 넘긴 때가 됩니다.

 

사실 불교를 신봉하는 국가들의 사정을 살펴보면 여러 모로 희망적인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선정수행에 대한 관심이 전보다 훨씬 고조되고 있는가 하면 불법을 더욱 근본적인 각도에서 수행해 보고자 하는 열의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반면에 이같은 불교중흥이 일고 있는 것과 때를 같이 하여, 공산주의 침략과 혁명 그리고 서구문명의 물질주의 풍조가, 전통적인 불교 신봉국가들 속으로 잠식해 들어가 불교세의 위축현상이 겹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따라서 최근 몇 년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불교전반의 중흥기로 보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누구도 단정지울 수 없는 문제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한편, 논사들과 일부 대승불교 전통에서 오백 년 단위로 불교가 쇠미해 간다고 주장하는 것은 분명히 지나친 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관점은 불법의 수행이 마치 시간이라는 존재에 의해 조정되고, 시간은 마치 인간의 행위마저 지배하는 세계외적 우주법칙인 듯한 관념을 불교의 교리 속으로 끌어들인 셈이 됩니다.

 

이런 이론은 부처님 생존 당시에, 시간이 최고원리라고 주장하던 사람들을 부처님께서 직접 논파함으로써 이미 그 잘못이 밝혀진 바 있습니다. 그와 같은 견해는 분명 사람들을 숙명론으로 몰고 갑니다. 이를테면 그런 유형의 힌두교도라면 스스로 현상타개의 노력을 포기한 채 “지금은 깔리 유가의 시대인 걸. 내가 어찌 한단 말인가?” 하면서 현실회피의 구실을 삼으려 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유념해야 할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불법이 오 천 년 간 지속되며, 일정 단계까지는 쇠미해 질 것”이라고 하셨다는 해석을 접할 때, 이것은 어디까지나 논사들의 입장일 뿐이지 결코 부처님의 말씀 그대로가 아님을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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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태국이나 미얀마와 같은 불교국가들에서 깨치신 분들이 여전히 출현하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이들 논사들이 분명히 잘못 이해했다는 것을 산 증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바는, 수행이 시간에 달린 것이 아니라 노력에 달렸다는 것이며, 노력은 언제라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특정의 시간이나 장소가 정진에 더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런 조건만 기다리고 앉았다가는 설령 그런 시간과 장소를 만난다 해도 자신의 업장을 이겨내는 정진력이 없다면 모처럼의 기회를 유효적절하게 살리지 못하고 허송하게 되기 쉽상일 것입니다. 훌륭한 결과를 가져오려면 다음으로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길뿐입니다. 마치 부처님이 나오셨을 때 사람들이 탁월한 스승의 지도를 받을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열심히 애써서 좋은 결실을 맺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정진의 성과는 결코 시간에 좌우될 성질의 문제는 아닙니다.

이제 최종적으로 생각해 볼 문제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과연 무엇이 부처님 법을 쇠미하게 만들며 무엇이 정법을 오래 지탱해 주는 것일까요? 이 문제를 풀려면 반드시 다음 사항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은 계(戒) 정(定) 혜(慧)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들 세 가지 공부[三學]가 널리 행해진다면 바로 ‘새 시대’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 되지만, 이 삼학이 쇠미할 경우엔, 믿고 의지하는 가르침이 무엇이든 간에 새 시대의 도래는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부처님을 다년간 시봉한 아난 존자가 바로 이 문제를 질문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정념을 수행하면 부처님 열반 후에도 정법은 오래 갈 것이다. 그러나 만일 정념을 닦지 않으면 그땐 정법이 쇠미해지고 말 것이다.”

정념 또는 정지(正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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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어떤 법(Dhamma)이든 법을 공부하고자 할 경우엔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오계(五戒)를 잘 지켜 원만한 인품을 닦아보고 싶은 경우에도 정념은 반드시 견지돼야 합니다. 그리고 오계를 지키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선정공부를 일상화하고 싶을 경우엔 정념은 그야말로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됩니다.

그럼 정념은 무엇일까요? 일상생활 속에서 정념이란 자신의 몸을, 그리고 그 몸으로 하는 일체의 행동을, 물론 말도 마찬가지로, 항상 염(念)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듯 행동과 말을 염할 때 자기 자신이나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실제로 정념은 마음으로부터 건전한 자질을 이끌어내어, 지혜에 비추어 이를 발전시켜 나갑니다. 또 자신이나 남에게 더 많은 고통과 갈등을 초래할 뿐인 행위들을 잘 가려낼 수 있게 만들어 주고, 그래서 그런 행위를 그만두도록 만드는 것도 정념의 역할입니다.

정념의 범위는 몸으로 짓는 행동과 말로 짓는 행동에 국한하지 않고 마음에도 역시 적용됩니다. 우리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삼독심(三毒心)이 머리를 들 때 그것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게 되며, 그렇게 되면 이들 불건전한 정신활동으로부터 헤어날 길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처음 단계에는 ‘내 마음’을 염하는 ‘내’가 거기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부가 익어가면 오로지 ‘정념’만이 거기 있게 되고 따라서 ‘나’나 ‘내 마음’의 잔재는 모두 사라져 버린 채 오직 깊은 평화와 꿰뚫어 보는 통찰만 남습니다. 이야말로 선정인의 목표인 고요[止]와 통찰[觀]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상태[法]야 말로 선정이란 말은 한번도 들어본 적조차 없지만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갈등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그 모든 사람들이 절실히 갈구하여 마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정념수행과 ‘새 시대’의 도래와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정념은 바로 ‘새 시대’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돼야 할 것인지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새 시대’란 결코 우주에 있는 별자리의 움직임에서 오는 것도 아니요, 인간이 상상하는 그 어떤 위계질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훨씬 더 상상의 산물인 창조주에 의해 도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삼독심을 걷어낸 맑은 마음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이 세계가 인간의 삼독심으로 물들어갈 수록, 가공할 권력투쟁의 새 시대라면 모를까, 참다운 의미의 ‘새 시대’가 동터올 가능성은 그만큼 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새 시대’를 오게끔 만드는 일은 바로 우리 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탐욕과 사리사욕이 없는 ‘새 시대’, 성냄과 증오가 사라진 ‘새 시대’ 그러한 시대의 출현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는 시대입니다.

다음과 같은 방법만이 곧 ‘새 시대’를 이 땅 위에 오게 할 수 있는 바른 길인 것입니다. 우선 무엇보다 오계(五戒, 산 것을 죽이지 않고, 주어진 것이 아니면 가지지 않고, 사음(邪淫)하지 않고, 거짓된 말을 하지 않고, 마음을 혼란시키는 일체의 취하게 하는 음식을 먹지 않는 것)부터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능한 대로 일상생활 가운데 정념수행을 하여서 마음을 불건전한 정신활동으로부터 끌어내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매일같이 한두 번이라도 가능한 한 오래도록 선정수행을 해 보십시오.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언제든 법문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의문점을 자꾸 묻는 가운데 법에 대해 지적 흥미를 갖도록 하십시오. 왜냐하면 불법은 모두가 현재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바로 이 삶에 관한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연후에 시간이 나는 대로 훌륭한 지도로 수행의 난관을 극복하게끔 도와줄 수 있는 조용한 도량으로 1~2주쯤 선정을 닦으러 가십시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어찌 ‘새 시대’가 밝아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좌우간에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 지혜의 빛과 광명이 동틀 것은 확실하다 하겠습니다. ‘새 시대’를 위해 그보다 더 알맞는 터전이 또 어디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