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과 !/수미산이야기

[1]⑦갈애의 한층 섬세한 모양들

GraU 2007. 3. 21. 09:59


7. 갈애의 한층 섬세한 모양들

 

 

 

그러나 한층 섬세한 형태의 갈애의 경우 당분간은 사정이 달라진다.

모든 욕구를 한꺼번에 다 버릴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욕구에도 비천한 욕구가 있으며, 어떤 조건을 달아 고상한 욕구라 부를 만한 것도 있다.

또 일부 개인적인 욕구는 이내 포기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 가족에 관한 것일 경우, 그 구성원의 안녕이 자기에게 달려 있는 한, 일정 수준의 생활을 확보하려는 욕구는 아마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감관적 욕구도 상당한 정도까지는 제어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음악이나 미술에 대한 심미적 즐거움마저 별안간에 다 버리고 싶은 마음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또 마냥 권할 일도 못된다.


예술 역시 감관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에 언젠가 때가 무르익으면 그 역시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에 앞서 보다 '세속적'인 즐거움들부터 먼저 버려야 한다. 가령 끽연자나 커피광과 더불어 구경의 진리를 깨치고 어쩌고 운운해 봐야 한갖 고담준론에 그칠 뿐,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깨달음은 먼저 일체의 세간적 취미나 애착부터 포기하는 실천적 노력을 선결문제로 삼으니까.


심미적 즐거움은, 성(性)과 무관한 것이라면, 공부길을 나아가는 우리 노력과 꽤 오랫동안 동반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특히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는 가운데 맛보는 즐거움일 경우, 도움마저 줄 수도 있다. 우리는 이 문제에서 다만 즐거움 그 자체에 집착하지 않으면 그만이며, 궁극에 가서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잊지만 않으면 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심미적 즐거움을 쫓아 공연히 헛수고를 하거나 지나친 열광에 빠져 자신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심미적 즐거움에 마음이 아주 강렬하게 쏠리고 있을 경우에 이를 우격다짐으로 누르려고 억지쓰는 무모한 짓은 않게 될 것이다.


공부가 향상되어 감에 따라서, 그리고 그 향상에서 때때로 맛보는 내면적 행복상태로 인해, 심미적 즐거움에 대한 관심은 점점 약해져서, 마침내는 저절로 떨어져 나가게 될 것이다.


미적 즐거움은 궁극에 가서는 포기해야 한다는 것, 좀더 정확히 말해서 심미적 즐거움은 근본적으로 쓸모가 없으며 무의미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은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지혜로우신 말씀을 새겨 볼수록 더 잘 이해가 될 것이다.


즉 적절한 때가 되어
최후의 해탈의 문턱에 서게 되면

부처님의 고귀하신 법마저
집착하지 말고 버려야 한다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가르치심이
아무리 고귀하고
아무리 완벽하며
또 아무리 우리들에게 소중한 것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뗏목과 같은 것이어서
강을 건너는 데 소용될 뿐이지
건너고 나서도
계속 짊어지고 다닐 성질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향상의 최종단계에 이르러 부처님의 가르치심마저 옆으로 제쳐두게 되는 일은 정념(正念)의 가장 높고 궁극적인 역할이다. 우리는 이 글에서 그 정념의 첫 단계를 서술해 본 데 불과하다.


이렇듯 우리가 지둔(遲鈍)한 상태에 떨어지는 일 없이 불굴의 정진을 계속하면

갈애의 거치른 형태들부터
하나하나 떨어져 나갈 것이며,

또 그럴수록 진정한 안도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짊어지고 다니던 짐이 훨씬 가벼워진 것 같은 느낌일 것이다.


또 증오와 악의에 찬 마음상태도 점차 약해지고 빈도도 떨어질 것이다.

그래서 모처럼
마음이 평온해지는 귀한 순간에

우리는 해탈한 마음상태의 행복감을 미리 맛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