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과 !/수미산이야기

[1]③고통의 주된 원인

GraU 2007. 3. 16. 14:12



3. 고통의 주된 원인

 

 

 

무지는 이처럼, 일체 행동, 말, 생각을 통한 행위[삼업(三業; 身곋쥈意)]가 갈애나 증오와 관계될 때 나타나는 모든 고통의, 일차적인 원인이다.

무언가 갈망하는 대상을 추구할 때 우리는 그것을 손에 넣거나 가지게 되면 지속적 행복을 당연히 누리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잘못이라는 것이 곧 드러난다. 그래도 우리는 대상을 바꾸어 가면서까지 다시금 노력한다. 마찬가지로 원하는 대상을 획득하는 데 방해되는 얄미운 장애물을 제거해 나가면서 우리는 항구적 행복이라는 목표에 좀더 접근한 양 생각하지만, 이 역시 그릇된 견해였다는 것이 판명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같은 짓을 되풀이하면서 고작해야 지금껏 써 오던 방식만 바꿀 뿐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단순한 육욕의 쾌락에 머무는 대신 예술에서 만족을 구하려 든다든가, 더 나아가서는 예술 대신 철학적 사변에서 만족을 구하려 드는 등, 보다 섬세한 대상을 추구하는 쪽으로 방향전환을 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증오도, 적을 살해한다거나 반대자의 출세길을 망가뜨린다든가 등등의 강한 증오의 발로를 누그러뜨려, 다만 그들을 외면하거나 무시해 버리는 방식을 취하는 식으로 상당한 변형을 가져올 수가 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갈애와 증오 그리고 미망의 그물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렇듯 보다 섬세한 형태의 갈애와 증오를 우리는 예의 주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것들을 적절히 대응해 나가고자 진심으로 원한다면, 우리는 항상 그런 마음이 일어날 때 바로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때때로 이 섬세한 갈애나 증오는 매우 세련된 방식으로 위장을 하고 나타나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더 노골적인 형태를 취하고 나타나서, 오히려 외견상 아무 해로움도 없는 것처럼 보이거나 고상해 보이기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실은 이런 경우들이 우리에게는 더 치명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거의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잠재의식 속으로 숨어들기 때문이다. 가령 가장 평가받는 예술작품조차 면밀히 분석해 보면 대개 성(性)과 연관된 경우가 많으며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성에서 영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설령 그 작품들과 성과의 관계가 교묘히 감추어져 있거나 또 작품 속에서 성이 대단히 승화되어 그려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이런 유의 작품들이 우리 마음 속 무의식층에 심어 놓은 자극의 씨는 언제든지 적절한 조건만 갖춰지면 즉각 반응을 나타내어, 자극대로 행동하고 싶은 충동을 강화시켜 준다.

그래서, 오늘날 흔해빠진 외설적 영화나 잡지들처럼 보다 드러나게 노골적인 유혹은 무가치하거나 해가 된다고 해서 애써 회피하는 데도 불구하고 세련되게 위장한 성적 충동은 눈치챌 틈도 없이 쉽게 발판을 마련해 버린다. 

증오 역시 눈에 띄지 않게 변장을 하고 우리 마음 속에 숨어들어온다. 모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 특정 종교나 이데올로기에 대한 열광 같은 것은 애초에는 전혀 무해하게 여겨지며, 오히려 나름대로 이해한 진리에 충실하려는 지각있는 행동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태도들이 급기야 적에 대한 공공연한 증오로, 또 종교적 열광이 반대자에 대한 박해로 발전하는 것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설령 어떤 이념이나 철학에 대한 그 같은 열광이 지적(知的) 수준에서 멈춘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이념이나 철학과 대립하여 그 체계가 정립되어야 할 필요성을 주장하고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자기 주장의 중요성을 착각한 나머지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공연한 논쟁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 보면 다른 동료와 분열하게 되는데 이 분열이야 말로 증오의 또 하나의 변장한 모습인 것이다.

증오는 보통, 증오인 줄 깨닫지 못하거나 전혀 눈치조차 챌 수 없을 수도 있다. 이 모든 증오가 있게 되는 것은, 관련된 사항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뿌리 깊이 박힌 환상 탓인데, 막상 이런 사항들은 중요하지도 않을 뿐더러 실체 또한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무지는 영원히 지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