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과 !/수미산이야기

[1]①외향적(물질적) 성취의 참된 원인

GraU 2007. 3. 14. 12:09

제1장   세상에 무거운 짐 삼독심

 

 

 

우리는 지금 엄청난 물질적 성공을 구가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그 성공에 매료되어 넋을 잃고 있다. 현대 산업의 생산성 덕분으로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급증하는 세계의 부(富)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으며, 실제로 그 부를 소유하고 싶어 한다. 지금 가진 것에 조금도 만족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마음은 항상 새로운 것을 쫓기에 급급하다. 이처럼 들뜬 마음은 한편으로는 끝없이 다양한 물건들을 발명해내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 물건들이 가져다 줄 즐거움을 혹시 못 누릴까봐 제 몫을 챙기고자 혈안들이 되어 있다.

이렇듯 현대 기술문명의 활력이 한없이 다양해 보이기에, 우리는 이것이 우리 시대만의 특유한 위업인 양 착각하게 된다. 그 결과 마치 우리시대가 인류 역사상의 지나간 어떤 시대보다, 과거 어떤 획기적 발전시기보다 윗자리를 점하고 있다는 당찮은 자부심마저 갖는 것 같다. 

지금 보는 이 놀랄만한 기술적 발전은 실은 서양의 외향적 발명활동의 산물이며, 그 활동 덕분에 그들은 여타 세계에 비해 물리적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통째로 집어삼키었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국민들을 오랫동안 강제로 지배했었다.

이제 이 두 대륙의 나라들은 거의 모두 자유롭게 되었고, 각자 그들의 운명을 자기네 소망대로 개척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 점에도 불구하고 그들마저 기술문명의 마력에 사로잡혀 헤어나질 못하는 것같이 보인다. 더구나 그들은 서양에서 기술적 성과를 도입하면서 일부 이데올로기마저 수입하고 있고, 심지어는 가치성마저 심히 의문스러운 사이비 문화양상까지 수입하느라고 자기네 고유의 정신적 유산은 갈수록 천시하고 있어, 그 정도가 매우 심각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과연 오늘날 우리가, 향락거리로 제공되고 있는 이 다양한 물건들에 매료되는 것이 내용이나 가치면에서 타당한 일일까? 지금 우리가 항상 새로운 형태의 물질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태도가 이전에 다른 시대나 문화에서 사람들이 취했던 태도와 비교하여 본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양상인가? 우리의 욕구 이면에는 특별히 더 고상하고 가치 있는 무엇인가가 숨어 있다는 말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1. 외향적 (물질적) 성취의 참된 원인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의 생을 온통 채우고 있는 이 끊일 줄 모르는 물질추구는 그 근저에,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근저 자체가 바로 갈애(渴愛)이다. 우리가 여섯 감각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끝없이 분투하는 동안 그것은 갖가지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지만 기실은 갈애 그 단 한 가지의 변용일 뿐이다. 

이렇게 말하면 과장된 억설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 이 시대 문화가 성취한, 일견 놀랄만한 그 모든 장관도 기실은  즐거운 느낌에 대한 갈망의 결과이며, 이 갈망을 충족시키려는 맹목적 충동이 빚어낸 소산일 뿐, 다른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한 개의 특정한 갈애를 충족시켜 주면 잇달아 새로운 갈애가 생겨난다. 이렇듯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를 몰아치는 새로운 요구들을 무턱대고 쫓아가고 있지만, 가도 가도 언제나 또 새로운 감각이 나타나 충족시켜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 모든 요구들을 주의깊게 분석해 본다면 이들의 대개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며, 부자연스럽게 빚어진 것들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꼭 충족되어야 하는 불가피한 요구도 더러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과연 누가 기본욕구만 충족시켜 가면서 단지 생존을 유지하는 데 만족하려 들 것인가?

물론 우리는 먹어야 산다. 그러나 배가 고파서 위장을 채우려 드는 야생동물의 본능적 충동 단계는 오래 전에 지났지만 그러나 우리 일상 식생활의 양과 내용물에 대해 합리적인 고찰을 해 보는 경우는 아직도 드문 것 같다. 게다가 우리는 동물적 본능의 건전성마저도 상실해 버렸다. 공복을 채울 때 느끼는 만족감을 필요 이상으로 연장하고 또 자주 되풀이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먹는 데서 느끼는 즐거운 미감 자체가 중요하게 되었고,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그 음식의 적합성 여부를 검사하는 애당초 목적과 미감과는 무관하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생존에 필요한 정도 이상을 먹게 되었고, 게다가 더 고약한 것은 우리 몸과 마음을 건강하고 싱싱하게 유지하는 데는 전혀 불필요한, 아니 해롭기마저 한 음식물을 먹고 마시고 있는 점이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흡연 습관은 말할 것도 없고) 의복 역시 우리의 기본적 요구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한 일이다. 우리는 의복으로 추위와 더위를 견뎌낼 수 있고, 변덕스러운 날씨와 기후에 적응할 수 있다.

또 지역적, 시대적 관습에 따라 조절되기도 해야 하며, 어느 정도까지는 품위 유지에마저 기여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저 걷잡을 수 없는 유행의 변덕을 일일이 쫓아가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특히 부녀자들의 패션 유행에서(물론 남성의 경우도 꽤 되겠지만) 매우 두드러지게 갈애가 드러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이들 유행병자들은 그래 봐야 기껏 새 유형
을 만들어내어 한몫 단단히 재미보는 유행계의 '입법자'들의 제물이 되는 것뿐인 것을…

이렇듯 우리는 인간의 참 요구와 그것이 갈애 때문에 과장되어 나타나는 다양한 모습들을 계속 관찰해 나갈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과장하게 되는 원인이 「소망-충족」의 되풀이되는 만족감과, 그 만족감과 연관된 즐거운 느낌을 맛보기 위해 애쓰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표출되는 것이 다름 아닌 감관적 갈애, 즉 형태, 소리, 냄세, 맛, 감촉 그리고 생각의 즐거움을 쫓는 갈애인 것이다. 이와 같은 갈애는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 우리는 보통 자신의 행복을 어떤 특정한 감각대상을 획득하는 것과 동일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대상을 얻자마자 우리는 그것에 대한 흥미를 상실하고, 다른 대상을 소망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분명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대상을 획득 또는 사용하는 것과 관련된 느낌이다.

이런 느낌은 잠시 동안만 지속될 뿐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거듭 맛보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대상을 다시 차지하기 위해서 분투 노력해야 한다. 만약 그런 대상이 우리 마음에 감흥을 일으킬 수 없게 되어 버렸을 경우에는 감흥을 줄 만한 새로운 종류의 대상을 찾아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과정이 끝없이 지속된다. 

우리가 감관적 갈애의 충동에 기꺼이 순종하는 진정한 이유는, 흔히 사람들이 상상하고 있는 것처럼 거기서 실질적이고 적극적인 행복감을 얻기 때문이 아니다. 「소망-충족」의 순간에 느끼는 즐거운 느낌을 행복으로 가장하는 것뿐이다. 실제는 갈애로 야기된 긴장이 순간적으로 완화되는 것에 불과하다.

사실 이같은 긴장은 평소에도 늘 우리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다. 대개는 자신의 모든 존재 조건이 못마땅하거나, 자기 인생 전반을 나름대로 상정하는 가운데, 그 진로나 가능성에 대해 막연하게 느끼는 불안감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그런 긴장이 미미한 세력이어서 별 것이 아니지만, 어떤 때는 견뎌내기 힘들 정도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소위 정상적인 마음상태를 벗어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럴 때 사람들은 보통 이것을 정신병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소위 정상적인 마음이란 것도 알고보면 순간순간 긴장완화를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찾아야 하는 강박적 충동에 쫓기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의 갖가지 활동이란 것도 대부분은 여기에 연원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는 고문틀에 매달린 죄수마냥 고통 가운데서 살고 있다. 팽팽하게 죄어든 고문틀이 느슨히 풀어지는 동안, 잠시 편안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긴 하지만 이내 고문 같은 긴장을 다시 맛보아야만 한다.

 

 

이 후 추가 스크랩 :  수미산 메일 글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