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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과 윤회 : 실체/실재하는 것 없이 다시 삶 : 재생으로서의 윤회 - 무주, 무상

GraU 2007. 3. 13. 11:36

 

9. 질문(9)

 

 

 

 질문
사후의 생명에 대한 믿음은 불교도에게만 국한된 것입니까? 그러한 믿음은 불교가 출현하기 이전에도 있었습니까?

 대답 
사후의 생명을 믿는 사람은 결코 불교도들만이 아닙니다. 이 믿음은 상고적부터 있던 것 중의 하나이며, 불교가 출현하기 훨씬 이전에 이집트인에게도 존재하였고 나중에 그리스인, 로마인 그리고 인도 브라만들 중에도 존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한 비불교도의 믿음과 불교도의 믿음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비불교도들의 믿음은 사람 안에 한 생으로부터 다른 생으로 옮겨가거나 전이될 수 있는 영혼이 존재한다는 가정에 기반을 두고, 이와 관련하여 사용되는 단어는 재생(rebirth)이 아니고 재육화(reincarnation)입니다.

 

불교적 원리에 의하면 한 생으로부터 다른 생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영혼과 같이 변함없고 안정적이며 머물러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재생을 표시하는 빠알리어는 `뿌납바와(punabbhava)', 글자 그대로 `다시 있는 존재'입니다. 만일 영혼의 존재가 용인된다면, 재생을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만, 불교는 영혼을 시인하지 않고 한 생으로부터 다른 것으로 옮겨가는 것이 결코 있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불교의 재생이론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여러 다양한 종교 체계와 신조의 신봉자들이 사후의 생에 관한 믿음을 공유했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이 죽은 시체를 미이라로 만들고 그것에 음식과 죽은 사람이 생시에 좋아하던 옷을 놓은 이유는 그의 `카(Ka)', 즉 영혼이 다른 육체를 취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분명히 터무니없지만, 그러한 관습은 사후의 생명에 대한 믿음이 보편적이었음을 나타냅니다. B. C. 6세기에 이르러 이 믿음은 그리스의 페레시데스, 엠페도클레스 그리고 피타고라스의 글 속에 나타납니다. 나중에 플라톤은 그의 「공화국(De Republica)」에서 같은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로마의 시인 오비드는 그의 「변형(Metamorphoses)」에서 재육화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고 카이사르

주38)

는 「갈리아 전기(De Bello Gallico)」 6권에서 그가 정복했던 갈리아(옛 프랑스)의 관습과 예절을 설명하면서, 갈리아인들 사이에 이런 재육화의 믿음이 널리 퍼져있다고 쓰고 있습니다. 

불교가 나타나기 이전 인도의 종교는 브라만교였는데 뒤에 우파니샤드의 단계에 와서 역시 존재의 재육화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가르친 일도 부인한 일도 없었지만 재육화 사상이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구약성서』 여기저기에 재육화의 사상이 희미하게 언급된 곳(예를 들면 「시편」 126)이 나오는 반면 『신약성서』(「마가복음」 7장과 「마태복음」 17장)에는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재육화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시대에 재육화에 대한 믿음이 널리 퍼져있었다는 것은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했던 질문들 가운데 발견되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사도들에게 던진 문제에 대해 그들이 한 대답(「마태복음」 16장과 「누가복음」 9장)에서도 눈에 뜨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록(Confessions)」에서 육화의 교리를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의 제자 오리겐도 「원칙(De Principiis)」과 「콘트라쎌서스(Contra Celsus)」에서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오리겐은 어딜 가나 이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초기 기독교회는 이 교리를 받아들였지만, 후기의 교부들은 강력히 반대하여 A. D. 533에 특별히 소집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이 교리는 기독교 신앙에 들어가지 않는 것으로, 공식 기각되었습니다(「바이드 카톨릭 백과사전(Vide Catholic Encyclopedia)」, 1909년판, p. 236-237).

이 결정의 결과 기독교 안에서 재육화 신앙은 사라졌지만, 19세기경부터 그 믿음이 다시 꾸준히 힘을 얻기 시작하였습니다. W. W. 애트킨슨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재육화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워즈워드, 테니슨, 롱펠로우 그리고 메이스필드 같은 유명한 시인이 이 믿음을 표현했습니다. 금세기에 들어와서는 영국의 유명한 목사 레슬리 웨더헤드가 이에 대해 강의를 하였는데 그것은 「재육화의 사례」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10. 질문(10)

 

 

 

 질문
재생의 조사연구 결과에 관한 것인데, 지금까지 믿음에 의해 받아들여진 사실들이 의심의 여지없이 확실히 밝혀졌다는 지적(知的) 만족감 외에, 재생 문제에 관심없는 사람들에게 무슨 이익을 준단 말입니까?

 대답 
그것은 이 문제를 너무 좁게 본데서 나온 말입니다. 재생의 진리는 모두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싶은 열망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 열망은 분명 교육받은 사람들에게서 더 뚜렷하지만, 배우지 못한 계층에 있어서도 최소한 가끔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특히 소중하고 가까운 가족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당할 때, 이 같은 열망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지적인 추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충동입니다. 삶과 죽음의 신비를 설명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보라는 가슴으로부터 올라오는 자연스런 요구입니다. 삶이 이 생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고, 슬픔과 기쁨, 걱정과 희망, 상실과 이득으로 가득찬 지금의 생은, 작용과 반작용의 위대한 원칙에 따라 논리정연하게 전개되는 재생의 결과임을 충분히 알게 될 때 인생은 더이상 불가사의도 수수께끼도 아닙니다.

 

그렇게되면 삶이 어떤 의미와 목적을 가진 것으로 보여집니다. 삶은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의미심장한 중요성을 띠게 됩니다. 인생은 이제 사건과 상황들의 지루한 반복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새로운 희망이 느껴집니다. 새로운 시야가 활짝 열립니다. 자기 운명의 배를 조정하는 것이 자신이고, 자신의 미래의 생을 짓는 자는 바로 자신이라는 깨달음에 눈뜨기 시작할 때, 인생을 보는 견해는 완전히 새로 자리잡습니다.

 

자신의 모든 생각, 말, 행위가 스스로의 미래를 건설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깨달을 때, 우리는 자신이 하는 생각과 말과 행위 면에서 점점 더 조심하여 선택하게 됩니다. 자신이 훌륭한 삶을 살았다면, 죽음이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유쾌하고 자신있게 다음 생에서의 행복한 경험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설혹 우리가 좋지 않은 인생을 살아왔다 하더라도 업이란 아주 마감된 사항이 아니고 끊임없이 만들어져가는 것이기에 현재의 좋은 행위로 나쁜 행위의 과보가 수정되고 변경될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역시 위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누구나 삶을 다시 세울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과, 참된 마음으로 시작한 그러한 일은 설혹 죽음이 끼여들어 미완으로 남게 되는 경우에도 내생에 다시 착수할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행복해지지 않겠습니까. 

재생에 대한 이해는 우리 자신의 삶을 정화시켜주는 효과를 가져올 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까지도 예외없이 순화시켜 줍니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가 삶이라는 위대한 여행의 도반(道伴)들임을, 우리들이 따르고 있는 보편적 법칙과 기본적 원칙을 똑같이 따르고 있는 동반자, 같은 배를 타고 여행하는 동승객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이해하는 사람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든 항상 도움의 손길을 기꺼이 내밀 준비가 되어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언제나 적대자를 용서할 것입니다. 그는 모든 존재가 행복하게 되기를 항상 기원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