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과 !/수미산이야기

"윤회의 시작은 인지로 알 수 없는 것" : '시작' 始, 初 개념화 된 것, 근원을 알고자 하는 욕망 :

GraU 2007. 3. 9. 12:49

수미산 글 중에서

 

8) 질문과 대답 :

질문

재생 원리는 사람의 전생이 한 번만 있었던 게 아니고 무수히 많았으리라고 가정합니다.

그렇다면 계속되는 태어남의 시발점은 어디일까요?

연기법의 설명은 어째서 직선으로 이어지는 생사의 연속을 말하지 않고, 순환을 말하는지요?

일직선상의 연속으로 설명한다면 생사 흐름의 출발점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달리 말하면 최초 원인(조물주)은 없다는 말인가요?



대답 

부처님께서 불법을 펴신 것은 생명의 기원이나 세상의 태초 발단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부처님의 한 가지 목적은 고통받는 인류에게 둑카[苦, dukkha(부조화)]라는 보편적 질병을 설명하고 그에 대한 처방을 가르쳐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느끼기엔 이 일만이 항상 가장 절박하게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고통의 질곡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자 애썼습니다. 그 밖의 것은 다음과 같은 그분의 말로 알 수 있듯이 그의 목적과는 무관한 것이었습니다.

한 가지만을 나는 설한다
슬픔과 그 끝냄을.

주33)


― 『중부』Ⅰ, 제22경, 140쪽 ―



목적이 이처럼 한정되었던 만큼 부처님은 세상의 시초나 생명의 기원에 관해 형이상학적 이론이나 추상적 개념을 늘어놓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부처님의 지적처럼 그런 것들은 삶의 목표나 목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분에 의하면, 삶의 목적은
우리 자신을 도덕적으로 향상시키고[戒],

정신집중 능력을 기르고[定],

그 도움으로 더 높은 지혜[惠]를 얻음으로써

우리가 사물을 실제 그대로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며[如實智],

그리하여 이 고통의 삶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인생 전체를 구성하는 모든 사실 가운데서 이 목표를 실현하는데 필요한 것들만 내세웠던 것입니다.
 




재생설은 왜 최초 원인(조물주)에 대한 언급이 없는가? 



부처님께서 재생 즉 윤회생사 현상에 대해 말씀하신 목적은 이번 생에서 우리가 한 행위의 결과가 다음 생에 우리를 따라오며, 따라서 우리는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함에 있어 조심스럽게 분별해가며 해야함을 보여주는데 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전생에 대해 이야기하셨던 것은 이번 생에서 우리의 조건, 우리의 기쁨, 슬픔, 기회, 장애 등이 대부분 전생에서 행한 행위의 결과임을 설명하고자 해서였습니다.

그분의 목적은 본래 실제적인 것이어서 윤회의 과정을 파고들어 철학적 추상개념으로 들어가는데엔 전혀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연기설은 왜 최초 원인(조물주)에 대한 언급이 없는가?
 


윤회설의 경우와 같이, 연기설(pa.ticca-samuppaada)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오한 의미를 간직한, 이해하기 힘든 이 교리는 일련의 12조건들 혹은 요인이 되는 상태들을 설하고 있습니다.

그 조건들 혹은 요인들은 다양한 형태로 서로 의지하여 존재하는데, 말하자면 조건지어줌(paccaya)과 조건지워짐(paccuppanna)의 사이클(순환)을 형성합니다. 이는 존재 내에서 전개되고 있는 심오하고 중요한 진행과정을 보여줍니다.

이들 12요소는 끊임없이 작용하는데, 그 작용이 연기(緣起)의 과정이기 때문에 각 조건은 다른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다시 다른 조건으로 진행되어 갑니다.

이 과정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 것은 원인(cause)이라는 매개를 통해서라기보다는 조건성(conditionality)이나 의존성(dependence)이라는 매개를 통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조건성은 이 과정의 전개 방식입니다(pa.ticca는 `조건에 따르는' 혹은 `의존적인' 것을, samuppaada는 `함께 일어남'을 의미함).


여기는 심오한 연기법을 상세히 설명할 자리는 아니지만 제기된 질문에 대해 충분한 답을 얻으려면 부처님께서 이 교리를 설명하실 때 그 과정의 전개 방식이 이중 구조로 되어있다는 것을 지적하신 점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첫번째 방식은 태어남과 고통의 반복 쪽으로 향하는 구조이고, 그 역의 방식은 반복되는 태어남과 고통을 종식시켜 마침내 온갖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찬 존재의 멈춤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꼭 지적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 안에서 그 과정이 전개되는 방향을 선택하는 일은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라는 점입니다.


이 교리의 기반을 이루는 원칙은, 12요소를 일일이 헤아리지 않고 보면 다음과 같이 극히 단순하고 평범한 말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

역순(逆順)으로 이 원칙은 다음과 같이 작용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그치면 저것이 그친다."

주34)



이렇게 하여 우리는 상대성과 상호의존을 특성으로 하는 연기(緣起)의 원칙을 갖게 됩니다.

이 원칙은 모든 일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성질의 것이지만 부처님께서는 이 원칙을 삶의 진행과정을 설명하는데 적용하셨고 또 어떻게 그 과정이 멈추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데만 적용하셨습니다. 



각각 선행요소에 종속하여 일어나는 이들 열두 요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무명(無明, avijjaa) - 무지

 2. 행(行, sa^nkhaaraa)- 의도적 행위들

주35)

 3. 식(識, vi~n~naa.na) 또는 빠띠산디 윈냐나(pa.tisandhi-vi~n~naa.na) - 재생의식 또는 재연결의식

 4. 명색(名色, naama-ruupa) - 마음·몸 복합체

 5. 육입(六入, sa.laayatana) - 여섯 감각영역 또는 통로

 6. 촉(觸, phassa) - 접촉

 7. 수(受, vedanaa) - 느낌

 8. 애(愛, ta.nhaa) - 갈애

 9. 취(取, upaadaana) - 붙잡음 또는 달라붙음

 10. 유(有, bhava, kamma-bhava) - 형성과정 혹은 제활동과정

 11. 생(生, jati) - 태어남

 12. 노·사(老死, jara-mara.na) - 늙음과 죽음


이들이 바로 인간 존재가 생과 사를 끝없이 반복 순환하면서 삼사라(윤회) 속을 헤매는 긴 여정에서 끊임없이 작용하는 요소들입니다.

이것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과정입니다.

처음 두 요소는
전생의 원인적 조건(atiita-hetu)을 언급합니다.

그 다음 다섯 요소는
현생에서의 과보(vattamaana-phala)를 가리킵니다.

그 다음 둘은
현생에서의 원인적 조건(vattamaana-hetu)을

마지막 둘은
내생에서의 과보(anaagata-phala)를 말합니다. 



무명(無明)은 삶의 과정에서 내내 만나게 되는 모든 슬픔과 고통, 부조화의 근본 원인이자 계속되는 원인이기 때문에,

부처님은 삶의 과정을 윤곽 그리면서 무명을 시발점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무명이 생명의 기원이라거나, 이 세상의 최초 기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부처님은 삶의 과정을 이해하고, 또 그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아내는 출발점으로서 무명이 적격이라고 판단하셨던 것입니다. 무명 자체는 행(상카라)에 의해 조건지워지고, 행은 역으로 무명에 의해 조건지워지기 때문에, 또 태어남에는 죽음이 따르고 죽음에는 태어남이 따르기 때문에 이런 과정을 나타내는 데는 직선보다 원이 훨씬 더 적합합니다.

그 과정의 열두 요소는 바퀴 안에 있는 열두 개의 바큇살과 같습니다. 이렇게 각 바큇살을 각각의 요소로 치면 우리는 과정에 대한 고찰을 어느 바큇살에서나 다 시작해볼 수 있으며 결국엔 그 바큇살로 되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 과정은 순환적 질서로 작용합니다. 돌고도는 바퀴와 같습니다.
 



최초 원인(조물주)에 대한 부처님의 견해 


말룽꺄뿟따(Maalu^nkyaaputta)라는 비구가 이 세상은 영원한 것인지 아닌지, 혹은 유한한 것인지 아닌지와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를 명백히 해주지 않는다 하여 부처님에 대해 불평을 하고 이러한 문제들이 분명히 밝혀지지 않는 한 더는 승려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고 선언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조용히 말룽꺄뿟따를 향해 그의 출가가 부처님께서 이 문제들에 대해 분명히 답해준다는 조건부였던가를 물으셨고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대답을 확인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이 어리석은 비구를 다음과 같이 훈계하였습니다.

"말룽꺄뿟따여, 그것은 마치 독을 잔뜩 바른 화살에 맞은 사람이 있어 그 친구와 친척들이 의사를 데려오자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내가 누구에게서 상처를 입었고 내가 맞은 화살의 성질은 어떤 것인지 등 상세한 것을 알기 전엔 이 화살을 뽑게 하지 않겠다.'

그 사람은, 말룽꺄뿟따여, 그런 사실을 알아내기 전에 숨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나서 부처님께서는 자신이 왜 이런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을 다루지 않는지 설명해주셨습니다.

 

"말룽꺄뿟따여,
나는 이 세상이 영원한 것인지 아닌지, 유한한 것인지 무한한 것인지 밝히려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논의들은 이익됨이 없고 성스러운 삶[梵行]의 기초와 관계가 없으며, 싫증냄[厭離], 냉정[離欲], 멈춤[滅, nirodha], 고요[寂止, upasaama], 직관적 지혜[言+正 智, abhi~n~naa], 깨달음[等覺, sambodhi], 열반(涅槃, nibbaana)에 도움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

― 중부 Ⅰ, 제63경, 「소 말룽꺄뿟따경」, 426∼432쪽 ―
 


상응부 의 「아나마따가 상응(Anamatagga Sa.myutta)」에서 부처님은 생명의 최초 기원은 우리의 사유(思惟)로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이 윤회의 시작은 인지로 생각할 수 없는 것(inconceivable)이다.

무명에 덮이고 욕망에 묶인 존재들이 윤회해온 최초의 시발점은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주36)

 



초기 불교적 관점에 의하면, 어떠한 것도 단일 원인으로부터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물, 모든 상태가 서로 조건을 이루고 동시에 조건지어짐으로써 상호의존적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든, 우주 내의 어떤 일도 홀로 떨어져 다른 일들과 관계가 없이 분리되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원인이 독자적으로 유효할 수는 없습니다. 항상 상호관련된, 상호의존하는 원인들과 조건들에서 오는 복잡성이 존재하게 마련이므로, 하나의 원인은 동떨어지고 분리된 단일 원인으로부터가 아니라 여러 원인과 조건들로부터 일어나는 게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그 스스로가 근원이 되는 최초 원인(조물주)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개념일 수는 있습니다. 그것을 맹신에 의해 받아들일 수는 있겠지만, 이성과 경험을 통해서는 결코 인식될 수 없습니다. 




최초 원인에 대한 위대한 사상가들의 견해 


저명한 철학가 조우드는「삶의 의미(The meaning of Life)」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위 우주라고 하는 것은 오로지 근본 원칙, 그 하나만으로는 해석이 되지 않고 그렇게 될 수도 없다.

다원성과 다양성이라는 현상을 설명하려면 최소한 두 원칙이 요구된다."




또 한 사람 유명한 사색가 올더스 헉슬리  
주37)

는 「목적과 수단(Ends and Means)」에서 말했습니다.

"최소한 서구에서는
이제 현상들을 첫째 원인에 소급 귀착시키는 짓들은 하지 않는다 (…)

우리가 세상의 모든 악이 생기게 된 첫째 원인을 찾겠다는 야망을 버리고 그 대신 동시적으로 작용하는 많은 원인들의 존재를, 얽히고 설킨 상관관계와 되풀이되는 작용과 반작용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한

결코 이 철기시대를 황금의 시대로 바꾸지 못할 것이다."



또 유명한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은

「나는 왜 기독교 신자가 아닌가?(Why I am not a Christian)」에서 말했습니다.

"도대체 세계의 시초가 있었다고 가정할만한 이유가 아무것도 없다.

모든 사물에 시작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상상력의 빈곤에서 오는 것이다."



문명의 아주 이른 새벽부터 사색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물의 시초를 찾아내려고 끊임없이 노력해 왔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설사 첫째 원인에 대해 어떤 가설이 나온다 해도 곧 `그 원인의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