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과 !/수미산이야기

[1]②함정에 빠져들게 되는 두번째 원인

GraU 2007. 3. 15. 22:02



2. 함정에 빠져들게 되는 두번째 원인
 

 

  갈애만이 우리가 함정에 빠져 고통받게 되는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즐거움을 찾기 때문에 우리는 즐겁지 않은 일체 사물을 본능적으로 피하게 된다. 그러다 정 피할 수 없게 되면, 이번엔 이 방해물 때문에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의 고통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믿어버리면서 이 장애물을 제거하거나 파괴시키려고 노력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불유쾌한 것들을 증오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고통의 두 번째 뿌리를 이루는 증오 또는 악의이다. 이 증오도 그 형태가 다양하여 쉽게 분별되는 것이 있고, 잠복해 있어서 분간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다.

현대세계가 구가하는 그 모든 풍요에도 불구하고, 또 지상의 모든 인간의 실제적인 필요성을 충족시킬 수 있는 그 역량에도 불구하고, 실제 세상은 언제쯤 굶주림이 없어질지,의류와 주거의 부족이 없어질지, 모든 사람에게 의료혜택이 돌아가게 될지 참으로 만족스런 상태는 요원한 것 같다.

인류의 상당 부분이 필수 불가결한 필요성을 채우지 못하고 있는 한편 나머지 소수는 이들 문제해결의 수단을 주체할 수 없을 지경으로 지나치게 많이 지니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사태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과장된 갈애가 초래한 결과이다. 이 갈애는 별 뚜렷한 목적도 없이 무턱대고 끝없는 미래를 향하여 최대 만족을 위한 수단을 확보하려고 애쓴다. 여기에서 비롯되는 인위적 빈곤과 불필요한 정신적 고통은 인류를, 국가들을, 사회의 자연집단들을, 심지어 가족까지도 분열시키는 증오의 근원이 된다.

그러나 증오는 외부적 힘은 아니다. 갈애와 마찬가지로 증오는 살아 있는 존재들, 즉 우리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 내적인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걸 너무 자주 경험해서 탈이다. 가령 남을 희생시켜 가며 어떤 특권을 얻고자 하는 행위 하나 하나, 남에게 내뱉는 거치른 말씨 하나 하나, 다른 생명체를 못마땅히 여기는 생각 하나 하나가 다 근본적으로는 증오에 기인하고 있다. 물론 이 증오 역시 노골적일 수도 있고,완곡할 수도 있으며,거칠 수도 있고, 섬세할 수도 있다. 

또 '의로운 분노' 니 '선의의 비판' 이니 하는 명분을 표방하지만 기실은 만족추구나 불만을 회피하는 노력을 정당화시키는 데 참 목적이 있을 뿐인 가려진 증오 또한 얼마나 많은가?

증오가 바람직하지 못한, 불유쾌한 마음상태라는 점, 따라서 증오를 그럴싸한 언어로 위장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여겨 모두들 이를 인정해 주거나 아니면 적어도 공감은 느끼고 있는 것같다.

갈애와 비교해 볼 때 증오는 얼핏 이차적인 것으로 보인다. 즐거움에 대한 감관적 갈애로부터, 즐거움을 주는 대상이 존재하기를 바라는 갈애와, 불쾌한 또는 방해되는 대상이 없기를 바라는 갈애가 생기는 것인데, 이 후자가 바로 증오인 것이다. 

갈애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줄 것으로 보이는 것들에게 집착하게 되며, 증오 때문에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방해하는 다른 사물을 파괴하려 든다. 그러나 갈애를 경험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고(苦)를 겪고 있다는 것을 뜻하며, 증오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그렇다. 또 특정 갈애를 충족시킨다는 것은 새로운 갈애를 초래하는 것을 뜻하고, 따라서 새 갈애는 새 고통을 부르는 것이다. 이 점도 증오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 왜 그럴까? 두 말할 것도 없이 갈애와 증오 이 둘이 모두 맹목적인 것이며 무지와 연관된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