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과 !/수미산이야기

[2] ① 새 시대인가 말세인가?

GraU 2007. 3. 28. 08:03

 

① 새 시대인가, 말세인가 

 

 

 

요즘에 와서 사람들이 바야흐로 ‘새 시대’가 동터오고 있다는 얘기들을 많이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중 대개는 젊은이들인 것 같고, 기성세대들은 별로 그런 말을 하지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어쨌든 ‘새 시대‘가 정말로 다가오고 있는지 그 여부에 관심이 깊은 사람들이 그동안 충분하리만큼 많은 얘기를 해왔고, 이 문제를 주제로 한 저술 역시 꽤 많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새 시대’에 붙이는 이름도 각자의 관점에 따라 매우 다양한데, 그 중에는 ‘아카리우스 별자리 시대’

주1)

란 이름도 자주 들먹여지고 있습니다. 그럼 ‘새 시대’의 특징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새 시대’를 설명해 주는 가장 현저한 특징은 사람들이 다 같이 화합하여 살기 위해 이전보다 더 많이 애써야 한다는 점과 정신적 노력을 새롭게 전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요청은 거듭 강조되어 왔고, 그 중 어느 한 가지도 소홀히 되어선 안된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할 것입니다. 문제는 실제로 이 지구상에서 과연 어느 정도로 이런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낙관주의자로서 이상주의적 경향이 다소 짙은 편인 사람이라면, 서슴없이 “그렇다, 현 상태는 낙관적이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러한 낙관주의자는 서구형 사회에서 새로이 나타나고 있는 수많은 정신 수련원들과 그리고 일부 동양국가에서 증대하고 있는 명상과 기도에 대한 관심을 실례로 들 것입니다.사실 요즘은 온갖 종류의 공동체와 집단, 사업기구 및 재단들이 생겨나 인종차별 폐지와 정신적 향상 및 인류의 화합을 목표로 광범하게 건전한 활동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이 날로 번성해져 가고 있는 것도 확실합니다.

그렇지만 비관론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눈에는 ‘새 시대’의 징후도, 정신적인 성장의 징표도 별로 띄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당연히, 금세기에 벌어졌던 두 차례의 끔찍한 대전(大戰)과 그보다 더 가공스러울 삼차대전의 발발 가능성을 지적할 것입니다. 또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뒤틀린 과대망상증 환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고서 벌였던, 저 전무후무한 죄악상을 들 것입니다. 덧붙여 물질주의가 모든 정신적 가치들을 (심지어는 불교국에서마저도!) 꾸준히 잠식하고 있으며, 전보다 많은 사람들이 ‘새 시대’ 추구에 열중하기는커녕, 오히려 물질만능주의에 물들어가고 있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들추어 낼 것입니다. 이처럼 비관론자가 할 말도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에 대해 불교인들은 어떻게 말해야 될까요? 정말 새로운 세계가 다가오고 있는 걸까요? 그리고 그건 어떤 세계일까요? 불교인이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문제든 간에 모든 일에는 반드시 그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인과법에 비추어 그 해결책을 찾으려 하기에, 문제의 어느 한쪽 면만 보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인들은 낙관론자들이 동서양에 걸쳐 갖가지 고무적인 조짐을 열거하며 ‘새 시대’의 도래를 말할 때도 바로 이런(중도적) 자세에서 일단 수긍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불교인들은 몇몇 나라에서 그것도 일부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일시 정신적 향상을 성취시키는 요인을 보았다 해서 그것을 곧바로 이 세계 전체의 변혁요인으로는 착각하지 않는 분별력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듣는 ‘새 시대’의 얘기가 거의 모두 고도로 산업화된 나라들에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이들 나라에선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기네 부모들 세대의 천박한 물질주의에서 등을 돌려, 좀더 깊은 만족감을 가져다 줄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인도,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에서는 ‘새 시대’의 얘기를 거의 들어볼 수 없는 실정입니다. 의식주가 족하지 못하면 ‘새 시대’의 출현 같은 것이 별로 실감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또 ‘새 시대’ 관은 전통적 힌두교 신앙과도 맞지가 않습니다. 힌두교에선 현재를 ‘깔리 유가’ 즉 ‘철의 시대’라 부르는 바, 이는 타락한 말세를 의미하며, 이 세상이 변혁되려면 아직도 요원하다고 봅니다. 

그러면 불교인의 새 시대관은 어떤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불교인들 역시 낙관적인 친구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경고를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물질적으로 진보한 사회에서조차도, 실제로 인생에 대해 좀더 정신적인 접근을 추구해 보고자 열심인 사람은, 전 인구 중 얼마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수가 늘어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들이 자기네 사회의 뿌리깊은 기존 규범을 변경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세력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이렇듯 불교인들은 확실한 근거에 입각해서 낙관론자들과 의견을 달리 하지만, 그렇다고 비관론자들과 똑같은 길을 걷는 것도 아닙니다. 특히 비관론자들이 “인간은 도저히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고 말한다면 절대로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징표가 있는 데도 불구하고, 비관주의자들은 어두운 측면만 보려듭니다.

‘그렇지만 허다한 나라들이 종교를 박해까지는 않는다 치더라도, 종교활동을 달가와하지 않고 있지 않는가? 또 그런 나라들이 늘어가고 있는 게 사실 아닌가?’ 하고 비관론자들이 말할 경우 불교인들은, 이 지상의 광범한 지역에서 종교적인 숭고한 목표가 비웃음을 사고 있으며, 그 목표를 실천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고통을 받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목숨까지 바쳐야 할 경우도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근에 일어난 그런 사례로서,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는 그보다 끔찍한 일은 다시 있을 것 같지 않은 사태가 캄보디아(지금은 크메르 공화국이라 부르지만)에서 실제 발생했으니까요. 그런 비극의 땅에는 어떤 ‘새 시대’도 가까이 다가와 있는 것 같지 않으며, 오로지 날로 격렬해지는 비통과 증오만이 미래의 분쟁의 소지로 자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불교인들의 눈에는, 이 세계 일각에서, 즉 몇몇 나라 그것도 그 사회의 일부에서만 ‘새 시대’의 조짐이 보여질 뿐입니다. 따라서 이 정도의 조짐을 가지고 전 인류가 평화와 풍요를 구가하는 새 시대가 출연하고 있다고 거창하게 떠벌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그래서 불교인은 이 새 시대의 출현방식을 현실론자적 태도로 하나하나 검토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가장 통속적인 사고방식 중에, 지금 태양계가 우주 안에서 어떤 새로운 점성학상의 구획안으로 들어섰는데, 그 구획안에서는 소위 ‘영혼의 진동’이 보다 용이하게 감득 계발되어질 수 있다고들 말합니다. 이 이론은 공간과 시간에 의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뭔가 헛점이 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만 보아도 곧 드러납니다.

즉 서양, 인도, 티베트 탄트라 등 각기 상이한 점성술 체계에서, 제각기 시간과 공간을 다르게 계산한 나머지 새 시대의 도래시기가 다르게 산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맥빠지는 일이지요. 거기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우리가 굳이 ‘새 시대’를 공간과 시간의 요소에 달렸다고 말하고자 한다면, 이것은 바로 이 우주 어디엔가에 하나의 ‘대 계획’이 마련돼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셈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계획은 어떤 창조주의 작업이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불교인은 도대체 그런 계획이나 창조주가 존재한다고 상정할 어떠한 이유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어느 것도 도무지 증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문제를 더이상 다루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관심있는 분은 다음의 글을 참조해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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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새 시대’는 도대체 어떻게 출현하게 될까요? 오늘날 ‘새 시대’는 자기네가 예상하고 있는 방식에 따라서, 그리고 오로지 자기네들에 의해서만이 도래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수많은 조직체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일부는 서양의 종교전통에서 나온 것이고, 동양에서 나온 것도 있으며 심지어는 유물론적 견해에서 나온 것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제각기 미래의 경이적 세계로 틀림없이 이끌어준다는 이론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이론들이란 대개 너무 미래에 빠져들어 현실성을 상실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조직체들이 안고 있는 위험성은 바로 그 자신들의 완고한 편협성입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네 이념만이 이 세계를 새로운 문화에로 이끌어야 한다는 좁은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헌데 놀라운 사실은 자기네만이 ‘새 시대’를 여는 유일한 열쇠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철학마저도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더욱 경이로운 사실은 사람들이 그 철학들을 신봉한다는 것입니다. 이들 신봉자들은, ‘새 시대’를 강매하는 다른 세일즈맨들은 일체 외면해 버리고, 오로지 자신들의 지도자만을 양떼처럼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야 말로, 이천 오 백 년 전에 부처님이 지적하셨던 대로, 견해 및 견해에 대한 집착이 빚어내는 갈등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새 시대’는 이런 조직체들에 의해 도래할 것 같지는 않고, 혹시 온다면, 정복이나 폭력, 또는 혁명에 의해서 올 수밖에 없을 것인데, 그렇게 해서 오는 세상이라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낡은 시대’보다 과연 무엇이 낫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