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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경전의 비유담--①독사의 비유

GraU 2007. 4. 12.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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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독사의 비유

 

 

 

 

여기 한 사나이가 있다. 그는 죽는 것이 제일 두렵고 그저 오래 사는 것만이 소원이다. 이런 사람에게 기이한 제안이 들어왔다. 독사 네 마리를 돌보아달라는 것이다. 이 뱀들은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어서 한번 물렸다 하면 극도의 고통을 받다가 결국 죽게 마련이며,게다가 유난스러워서 조금만 잘못 다루었다간 물리고 말테니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무서운 뱀들을 이따금씩 잠에서 깨워 먹이고 씻기고 다시 재우라는 것이다. 물론 그 자리를 맡고 안 맡고는 자신이 결정할 일이므로 기겁을 한 그 사람은 독사를 피해서 멀리 도망을 친다. 
한창 도망을 치는 중에 새롭게 경고를 받게 된다. 그를 붙잡기만 하면 그 당장에 요절을 낼 양으로 다섯 살인귀들이 줄곧 뒤를 추적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에 놀란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도망을 친다. 게다가 여섯 번째로 원수같은 산적 두목이 칼을 빼어들고 등 뒤에 바싹 다가와 목을 치려든다는 말을 듣고는 혼비백산하여 죽을 힘을 다해 내뺀다.
  무서운 네 마리 독사에다 다섯 살인귀들, 그리고 칼을 빼어든 산적 두목에게서 벗어나려 필사의 노력을 하는 이 가련한 사나이는 마침 어떤 마을에 도달하게 되어 숨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그러나 딱하게도, 그 곳은 빈 마을로 집들이 다 텅텅비고 방안에는 빈 그릇만 썰렁하게 널브러져 있을 뿐이다. 행여나 하고 살피는 중에, 이번에는 또 떼강도 한패가 이 버려진 마을로 약탈하려 몰려오는 것을 보게 된다. 겁에 질려 그는 다시 달아난다. 그러다가 어느 망망한 강변에 이른다.  거기엔 다리는 커녕 나룻배도 거룻배도 없다. 그 넓은 강을 건널 뗏목마저도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강저편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만이 안전하고 불행을 면할 수 있는 길이기에, 그는 널판지나 나무토막, 갈대, 넝쿨, 잎사귀, 송진 같은 것을 주워모아 뗏목을 만든다. 그리고는 팔과 다리로 뗏목을 부지런히 저어 마침내 강을 건너 공포와 고통이 없는 저편 강변에 무사히 올라서게 된다. 

이 우화는 무엇을 뜻하는가? 
'네 마리 독사'는 지 수 화 풍의 사대(四大)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물질의 기본요소, 특히 우리 육신을 구성하는 기본요소들로 견고성(堅固性), 응집성(凝集性), 열성(熱性) 그리고 동성(動性)이다. 

'다섯 살인귀'는 오온(五蘊)을 가리킨다. 부처님은 이 용어를 써서, 소위 인간이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물질적 정신적 진행

*1

을 분류해놓고 계시다.
그것은 ①육체, ②감수성, ③인식, ④의지적 행동과 그밖의 모든 정신적 과정, ⑤일체의 인지 또는 의식이다. 이 오온은 인간뿐 아니라 사실상 일체의 유정물을 모두 수렴한다.
 

'버려진 마을'은 의식생활의 여섯 개 안쪽 바탕[六內處]으로서, 다섯 감각기관 그리고 여섯 번째로 모든 면에서의 마음

*2

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자는 이들 기관중 어느 것을 검토해 봐도 거기서 자기자신, 자아 또는 에고라 부를 그 어떤 지속적인 실체나 정신적인 실재, 혹은 영혼이랄까 아니면 달리 비슷한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그 어떤 것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기에 '빈' 마을이라 한 것이다. 

'마을을 터는 떼강도'는 우리 의식생활의 바깥 바탕[六外處]을 가리킨다. 보이는 형상, 소리, 냄새, 맛, 몸의 감촉 대상 그리고 사유대상으로 모든 인식 대상을 말한다. 사실, 우리의 안쪽 주관적 바탕들은 즐겁거나 괴로운 갖가지 바깥 바탕들 때문에 시달리고 있으며, 따라서 이들 바깥의 바탕들을 떼강도의 출몰에 비유한 것이다. 

'칼을 빼든 산적두목'은 희탐(喜貪)으로서 고통의 원인인 갈애와 동의어이다.

만약 약탈자인 여섯 바깥 경계들을 이 갈애가 인솔하게 된다면 미상불 큰 재앙이 아닐 수 없다. 
'망망한 큰 물'은 네 가지 폭류라는 것으로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첫째, 감각적 쾌락을 쫓는 갈애[欲暴流], 둘째, 생에 대한 갈애[有暴流], 셋째, 이론과 삿된 견해에 집착하는 것[見暴流], 넷째, 삼계(三界) 일체중생의 본질에 대한 무지 미망상태에 집착함[無明暴流]이다. 
위험으로 충만한 '이편 언덕[此岸]'은 이 고해에 처하여 그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소위 인간이라는 존재를 말한다. '저편 언덕[彼岸]'은 안전한 피난처이며 바로 열반이다. 
'뗏목'은, 피안으로 기필코 건너가려면 꼭 타야하는 것으로 팔정도(八正道)를 의미한다. 이 팔정도는 말할 것도 없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부분으로 크게 분류하면 계(戒), 정(定), 혜(慧)로 이루어진다. 

'팔과 다리로 저어서'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온 힘을 다 쏟는 것을 뜻한다. 
강을 건너 마침내 피안에 올라선다는 것은 구경(究境)의 해방, 해탈, 완전한 청정, 성스러움, 다시 말해 아라한과의 성취를 의미하며, 저 깨치신 분께서 선포하셨던 그 목적을 기어코 이루어내었음을 의미한다.

이 '독사의 비유'에서 우리는 불교 철리(哲理)의 요체에 접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이 놀라운 철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실생활에서 실천해 나간다면,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 속한 일체의 것에서 헤어나 그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에 들어간 셈이 된다. 

자 그러면, 이 철리를 우리 일상생활에 적용할 때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지 여러분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만일 우리 육신과 일체 유형물을 독사로 여길줄 알게만 되면, 그때 우리는 남이 자기보다 매력적인 외모를 지녔다해서 부러워 하지도 않을 것이며, 내가 못생겼다해서 기가 죽지도 않을 것이다. 외모를 가꾸느라 쓸데없이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남들도 나와 마찬가지 처지로, 허약한 육신과 다치기 쉬운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알게 될 때, 남을 해치는 짓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또 이 새롭고 위대한 철리를 실천에 옮긴다는 것은 우리가 남들을 고통에서 헤어날 수 있도록 힘껏 도와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즉, 차지해보았자 시중이나 들어주어야 할 독사를 더 많이 가지려고 헛되이 애를 쓰지 않게 될 뿐 아니라,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물심양면으로 돕게 되고, 나아가서 그들에게 해탈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 새로운 인생관을 실천에 옮기는데 가장 긴요한 것은 체계적으로 교리를 연구하며 계율을 익히는 길을 택하거나, 아니면 생의 본질에 활연히 눈뜨게 되는 것이다.
이중 후자의 통찰력-또는 저절로 돈발(頓發)하는 순수지-은 때로 대단히 강력하여 폭류를 건너버린다. 그것은 갑자기 찾아든 어떤 한 순간에 일어날 수도 있고, 아니면 그러한 순간들이 연속적으로 올때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직관적 통찰력도, 지금까지 계를 익히고 경전을 연구하고 그리고 선정에 들어'완전한 홀로'
*3 를 이룬 경험들과, 그리고 여러 전생동안 쌓아온 공덕의 누적 효과가 빚어낸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와 같은 최종적 실현
*4 을 도와줄 유리한 조건들을 형성해 나가야 한다. 그러자면 깨치신 분의 인생철리를 행위규범으로 삼아 거기에 맞추어 나날의 삶을 살아가도록 부단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끊임없이 마음챙겨, 특히 인생의 결정적 고비에서는 더더욱, 명예, 평판, 명성, 권력 같은 세속적 쾌락의 추구에 정신없이 열중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잘 살피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권력에 대한 의지'를 사심없는 '공동체에 대한 의지'로 승화시켜야만 한다. 고상하고 그러면서도 매사를 빈틈없이 그 본질까지 꿰뚫어 보는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선의를 모두에게로 펴나갈 수 있게 되며, 그때는 계급도, 신앙신조도, 인종도, 적과 동지도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 모두로 하여금 세속과 격정의 폭류를 건네도록 도와줄 채비를 갖추게 될 것이다. 

우리는 나날의 삶에서 가장 좋은 시간들을, 우리 생의 진정한 본질과 해탈의 가능성에 대한 상상력이랄까, 통찰력이랄까를 계발하는 데에 바쳐 마땅하다. 
삶(일상)에서 떨어져 홀로일 수 있는 능력이 증장되면 될수록 저 '피안'의 더없는 행복 또한 점점 실제적인 것으로 다가와 마침내는 그것만이 우리가 추구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실제로 확신하기에 이를 것이다. 처음에는 꿈같던 환상이, 이 '삶의 새 철리'를 현실에 적용시키기 위해 진지하고도 간단없이 분투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현실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 철학을 마음속 깊이 다져두려면 다음의 비유마저 음미해 보는 것이 좋겠다.

 

 

 

② 통나무의 비유

 

 

 

한때 세존께서는 코삼비의 갠지스 강변에 머무르고 계셨다. 그때 스승께서는 커다란 통나무 하나가 강물 위에 떠 있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그 통나무를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만약 저 통나무가 이쪽 강변이나 저쪽 강변으로 밀려가지 않고 강 한가운데서 가라앉지도 않고, 마른 땅 위로 내던져지거나, 사람이나 신령에게 붙들리지 않으며, 소용돌이에 말려 강바닥에 잠기지도 않고, 또 속으로 썩어 부식되지 않는다면 저 통나무는 떠내려가 바다에 들 것이다. 왜냐하면 갠지스 강이 흘러가는 길은 결국 바다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비구들이여, 그대들도 강변 어느 쪽으로 내몰리도록 자신을 방치하지 않고, 마른 땅 위로 내던져지지 않고, 사람이나 신령에게 붙잡히지 않고, 소용돌이에 말려 가라앉지도 않고, 속으로 썩어버리지 않는다면 그대들이 나아가는 길은 열반을 향하고 있을 것이며, 그대들은 해탈에 이를 것이다. 왜냐하면 올바른 견해[正見]는 해탈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듣자 한 제자가 세존께 여쭌다. 
"존사시여, 이 비유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이옵니까?"
스승께선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이쪽 강변'은 우리 정신생활의 여섯 안쪽바탕[內六處]을 의미하니, 다섯 육체적 감각과 여섯 번째로 '의(意)'가 그것이다.
'저쪽 강변'은 여섯 바깥바탕[外六處], 또는 대경(對境)을 말한 것으로 다섯 감각 대상과 의식의 대상이다.

'강 한가운데서 가라앉는다'는 것은 감각적 즐거움에 빠져드는 것을 말하며, '마른 땅에 던져지는 것은 향상을 그르치는 자만(自慢)을 가리킨다. '사람에게 붙들린다'함은 모든 시간을 사람과 어울리는데 빼앗겨, 온갖 시시한 일에는 모든 신경을 쓰면서도 정작 중요한 자기향상은 뒷전에 두는 것을 말한다.

'신령에게 붙들린다'함은 천상 세계에 천신으로 태어날 욕심으로 공덕행을 하거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말한다. 
'소용돌이에 말려 강바닥에 잠긴다'는 것은 세속의 즐거움을 좇는 데에 집착하는 것으로, 이 재미, 저 즐거움을 좇다보니 속된 탐욕의 소용돌이에 말리고 말아 삶의 원대한 과제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지내고 마는 것을 말한다. 
'속으로 썩어 부식된다'는 말은 부도덕, 불륜, 정신적 오염, 종잡을 수 없는 행위, 위선, 속은 폭삭 썩어 있으면서 선하고 덕있는 척하는 것이다.

이 두 번째 비유 역시 불교의 인생철리를 매우 인상적으로 그려보이고 있다. 깨달은 분을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들의 목표가 과연 무엇인지 잘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나는대로 몸이나 보살피고 쓸데없는 독서나 쓰잘데 없는 이야기로 마음을 채워서는 안될 뿐 아니라, 세속적 즐거움이나 단순한 지적 유희의 추구에 열중하고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종류의 자만도 우리 마음속에 자리하게 방치해서는 안될 것이니, 도대체 우리 속에 또는 우리 주변에 자랑할 거리가 얼마나 되겠는가.

여가 시간을 몽땅 속된 인간들과 어울리는 데 써버리는 것은 물론 안될 일이고, 오히려 우리는 마음을 가꾸는 일에 자기보다 앞서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도록 부단히 애씀으로써 분별있게 지혜와 덕을 추구하는데 가능한한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이다. 또한 생활의 일정시간을 지혜를 키우는 책을 연구하고 또 명상하는데 바쳐야 한다.

그리고 '깨달은 이의 제자'라는 이름값을 하려면 천상락만을 목적삼아 청정한 계행을 닦고 있어서도 안된다. 그런데 제대로 깨닫지 못한 속물들이 그런 잘못을 얼마나 많이 범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런 따위들에 현혹되는 일없이, 깨달음의 궁극목표를 굳게 염두에 새기고 금생에 그 목표를 향해 뚜렷한 향상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결의를 견지해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한 향상을 이루기 위해서, 또 불교의 인생 철리를 충분히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피안 또는 구경열반이 가져다줄 안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탐 套치라는 악의 세 뿌리를 근절하는 것이다. '차안'에 아직 매여 있는 주제에 피안의 완전한 소식을 어찌 다 알 수 있으랴만 부처님의 장엄하신 선언에 귀 기울이고 있노라면 그 어렴풋한 모습을 떠 올려볼 수 있다.

"비구들이여, 태어난 것도 아니요[ajaatam:無生], 비롯된 것도 아니요[abhuutam:無有], 만들어진 것도 아니요[akaatam:無作], 형성된것[ asankhaatam:無爲]도 아닌 것이 있다. 만약 이와 같이 태어나지도, 비롯되지도, 만들어지지도, 형성되지도 않은 것이 없다면, 태어나고, 비롯되고, 만들어지고, 형성된 것들의 세계로부터 벗어난다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태어나지도, 비롯되지도, 만들어지지도, 형성되지도 않은 것이 있기에 이 태어나고, 비롯되고, 만들어지고, 형성된것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감흥어 8:3)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인식하려면 그 가르침의 후반부를 이루는 '피안'에 대한 가르침, 즉 해탈 또는 열반의 경지에 관한 교의를 소홀히 넘겨서는 안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 '피안(彼岸)과 차안(此岸) 양안'으로써 그 체계를 완성하고 있다는 점을 언제나 잊지 않아야 한다. 
당신께서도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하시지 않으셨던가. "예나 지금이나 나는 이 두 가지만을 가르친다 -고(苦)와 고로부터의 해방을." 

이 두 비유가 요약 설명해주는 바, 불자가 지녀야할 삶에 대한 기본인식을 때때로 자주 숙고하고 또 실제로 적용해 나간다면 우리는 용기를 잃지 않고 생의 부침을 감내해 낼 수 있게 될 것이며, 모든 동반자, 온갖 생물들까지 선의와 우애로 대하며 정의로운 삶을 영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해탈이라는 구경 목표를 향해 끊임없는 향상을 성취해나가는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원컨데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심해탈, 깨달음, 열반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정진하게 되기를!

이상의 두 비유는 상응부경에 실려있는 부처님의 법문을 번안한 것이다. 즉 육처상응(六處相應) 중의 제197경(毒蛇經:Asivsopama Sutta)와 제200경(통나무經:Darukkhanhopama Sutta)이다. 
앞으로 '고요한 소리'모임은 이 모든 경들을 원문에서 바로 우리말로 옮김으로써 불자님들의 간절한 소망에 부응토록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