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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사나이가 있다. 그는 죽는 것이 제일 두렵고 그저 오래 사는 것만이 소원이다. 이런 사람에게 기이한 제안이 들어왔다. 독사 네 마리를 돌보아달라는 것이다. 이 뱀들은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어서 한번 물렸다 하면 극도의 고통을 받다가 결국 죽게 마련이며,게다가 유난스러워서 조금만 잘못 다루었다간 물리고 말테니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무서운 뱀들을 이따금씩 잠에서 깨워 먹이고 씻기고 다시 재우라는 것이다. 물론 그 자리를 맡고 안 맡고는 자신이 결정할 일이므로 기겁을 한 그 사람은 독사를 피해서 멀리 도망을 친다. 한창 도망을 치는 중에 새롭게 경고를 받게 된다. 그를 붙잡기만 하면 그 당장에 요절을 낼 양으로 다섯 살인귀들이 줄곧 뒤를 추적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에 놀란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도망을 친다. 게다가 여섯 번째로 원수같은 산적 두목이 칼을 빼어들고 등 뒤에 바싹 다가와 목을 치려든다는 말을 듣고는 혼비백산하여 죽을 힘을 다해 내뺀다. 무서운 네 마리 독사에다 다섯 살인귀들, 그리고 칼을 빼어든 산적 두목에게서 벗어나려 필사의 노력을 하는 이 가련한 사나이는 마침 어떤 마을에 도달하게 되어 숨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그러나 딱하게도, 그 곳은 빈 마을로 집들이 다 텅텅비고 방안에는 빈 그릇만 썰렁하게 널브러져 있을 뿐이다. 행여나 하고 살피는 중에, 이번에는 또 떼강도 한패가 이 버려진 마을로 약탈하려 몰려오는 것을 보게 된다. 겁에 질려 그는 다시 달아난다. 그러다가 어느 망망한 강변에 이른다. 거기엔 다리는 커녕 나룻배도 거룻배도 없다. 그 넓은 강을 건널 뗏목마저도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강저편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만이 안전하고 불행을 면할 수 있는 길이기에, 그는 널판지나 나무토막, 갈대, 넝쿨, 잎사귀, 송진 같은 것을 주워모아 뗏목을 만든다. 그리고는 팔과 다리로 뗏목을 부지런히 저어 마침내 강을 건너 공포와 고통이 없는 저편 강변에 무사히 올라서게 된다.
이 우화는 무엇을 뜻하는가? '네 마리 독사'는 지 수 화 풍의 사대(四大)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물질의 기본요소, 특히 우리 육신을 구성하는 기본요소들로 견고성(堅固性), 응집성(凝集性), 열성(熱性) 그리고 동성(動性)이다.
'다섯 살인귀'는 오온(五蘊)을 가리킨다. 부처님은 이 용어를 써서, 소위 인간이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물질적 정신적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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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분류해놓고 계시다. 그것은 ①육체, ②감수성, ③인식, ④의지적 행동과 그밖의 모든 정신적 과정, ⑤일체의 인지 또는 의식이다. 이 오온은 인간뿐 아니라 사실상 일체의 유정물을 모두 수렴한다.
'버려진 마을'은 의식생활의 여섯 개 안쪽 바탕[六內處]으로서, 다섯 감각기관 그리고 여섯 번째로 모든 면에서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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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자는 이들 기관중 어느 것을 검토해 봐도 거기서 자기자신, 자아 또는 에고라 부를 그 어떤 지속적인 실체나 정신적인 실재, 혹은 영혼이랄까 아니면 달리 비슷한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그 어떤 것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기에 '빈' 마을이라 한 것이다.
'마을을 터는 떼강도'는 우리 의식생활의 바깥 바탕[六外處]을 가리킨다. 보이는 형상, 소리, 냄새, 맛, 몸의 감촉 대상 그리고 사유대상으로 모든 인식 대상을 말한다. 사실, 우리의 안쪽 주관적 바탕들은 즐겁거나 괴로운 갖가지 바깥 바탕들 때문에 시달리고 있으며, 따라서 이들 바깥의 바탕들을 떼강도의 출몰에 비유한 것이다.
'칼을 빼든 산적두목'은 희탐(喜貪)으로서 고통의 원인인 갈애와 동의어이다.
만약 약탈자인 여섯 바깥 경계들을 이 갈애가 인솔하게 된다면 미상불 큰 재앙이 아닐 수 없다. '망망한 큰 물'은 네 가지 폭류라는 것으로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첫째, 감각적 쾌락을 쫓는 갈애[欲暴流], 둘째, 생에 대한 갈애[有暴流], 셋째, 이론과 삿된 견해에 집착하는 것[見暴流], 넷째, 삼계(三界) 일체중생의 본질에 대한 무지 미망상태에 집착함[無明暴流]이다. 위험으로 충만한 '이편 언덕[此岸]'은 이 고해에 처하여 그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소위 인간이라는 존재를 말한다. '저편 언덕[彼岸]'은 안전한 피난처이며 바로 열반이다. '뗏목'은, 피안으로 기필코 건너가려면 꼭 타야하는 것으로 팔정도(八正道)를 의미한다. 이 팔정도는 말할 것도 없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부분으로 크게 분류하면 계(戒), 정(定), 혜(慧)로 이루어진다.
'팔과 다리로 저어서'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온 힘을 다 쏟는 것을 뜻한다. 강을 건너 마침내 피안에 올라선다는 것은 구경(究境)의 해방, 해탈, 완전한 청정, 성스러움, 다시 말해 아라한과의 성취를 의미하며, 저 깨치신 분께서 선포하셨던 그 목적을 기어코 이루어내었음을 의미한다. 이 '독사의 비유'에서 우리는 불교 철리(哲理)의 요체에 접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이 놀라운 철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실생활에서 실천해 나간다면,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 속한 일체의 것에서 헤어나 그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에 들어간 셈이 된다.
자 그러면, 이 철리를 우리 일상생활에 적용할 때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지 여러분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만일 우리 육신과 일체 유형물을 독사로 여길줄 알게만 되면, 그때 우리는 남이 자기보다 매력적인 외모를 지녔다해서 부러워 하지도 않을 것이며, 내가 못생겼다해서 기가 죽지도 않을 것이다. 외모를 가꾸느라 쓸데없이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남들도 나와 마찬가지 처지로, 허약한 육신과 다치기 쉬운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알게 될 때, 남을 해치는 짓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또 이 새롭고 위대한 철리를 실천에 옮긴다는 것은 우리가 남들을 고통에서 헤어날 수 있도록 힘껏 도와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즉, 차지해보았자 시중이나 들어주어야 할 독사를 더 많이 가지려고 헛되이 애를 쓰지 않게 될 뿐 아니라,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물심양면으로 돕게 되고, 나아가서 그들에게 해탈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 새로운 인생관을 실천에 옮기는데 가장 긴요한 것은 체계적으로 교리를 연구하며 계율을 익히는 길을 택하거나, 아니면 생의 본질에 활연히 눈뜨게 되는 것이다. 이중 후자의 통찰력-또는 저절로 돈발(頓發)하는 순수지-은 때로 대단히 강력하여 폭류를 건너버린다. 그것은 갑자기 찾아든 어떤 한 순간에 일어날 수도 있고, 아니면 그러한 순간들이 연속적으로 올때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직관적 통찰력도, 지금까지 계를 익히고 경전을 연구하고 그리고 선정에 들어'완전한 홀로' *3 를 이룬 경험들과, 그리고 여러 전생동안 쌓아온 공덕의 누적 효과가 빚어낸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와 같은 최종적 실현 *4 을 도와줄 유리한 조건들을 형성해 나가야 한다. 그러자면 깨치신 분의 인생철리를 행위규범으로 삼아 거기에 맞추어 나날의 삶을 살아가도록 부단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끊임없이 마음챙겨, 특히 인생의 결정적 고비에서는 더더욱, 명예, 평판, 명성, 권력 같은 세속적 쾌락의 추구에 정신없이 열중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잘 살피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권력에 대한 의지'를 사심없는 '공동체에 대한 의지'로 승화시켜야만 한다. 고상하고 그러면서도 매사를 빈틈없이 그 본질까지 꿰뚫어 보는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선의를 모두에게로 펴나갈 수 있게 되며, 그때는 계급도, 신앙신조도, 인종도, 적과 동지도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 모두로 하여금 세속과 격정의 폭류를 건네도록 도와줄 채비를 갖추게 될 것이다.
우리는 나날의 삶에서 가장 좋은 시간들을, 우리 생의 진정한 본질과 해탈의 가능성에 대한 상상력이랄까, 통찰력이랄까를 계발하는 데에 바쳐 마땅하다. 삶(일상)에서 떨어져 홀로일 수 있는 능력이 증장되면 될수록 저 '피안'의 더없는 행복 또한 점점 실제적인 것으로 다가와 마침내는 그것만이 우리가 추구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실제로 확신하기에 이를 것이다. 처음에는 꿈같던 환상이, 이 '삶의 새 철리'를 현실에 적용시키기 위해 진지하고도 간단없이 분투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현실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 철학을 마음속 깊이 다져두려면 다음의 비유마저 음미해 보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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