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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가지 마음] 간결함? : 승부심을 알아차리다

GraU 2014. 10. 13. 10:27

 

 

 

마크 트웨인이 설교를 듣고 있었다.
처음 훌륭한 설교에 감동을 받아 헌금을 준비했다.

10분 뒤 목사의 설교는 계속 되었고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한 그는
동전 몇 개만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10분이 흘렀을 때 마크 트웨인은
한 푼도 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길고 긴 설교가 드디어 끝나고 헌금을 낼 때
잔뜩 화가 난 그는 헌금 바구니에서 2달러를 꺼내갔다.

 

 

- ‘마윈처럼 생각하라’에서 인용

 

 

 

 

마크 트웨인에 관한 또 다른 일화 .

언젠가 마크 트웨인이 출판사로부터 전보를 받았다.

“2일 내에 두 쪽짜리 단편 필요”

트웨인은 다음과 같이 회신했다.

“2일 내에 두 쪽짜리는 불가, 2일내 30쪽 짜리는 가능, 두 쪽짜리는 30일 필요”

 

 

 

간단 명료함.

명확하다고 여기다.

 

원 페이지 프로포셜 이 확실히 많이 더 어렵긴 하더라. 행경의 오늘 편지 처럼 경영의 일선이나 판을 공유한 상태에서 구체적 사업을 도모할 경우에는 적절하며, 아주 필요하다.

 

하지만 내 생각에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자세가

아주 친한 친구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나, 내 아이의 주저리 주저리 일상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 내 아버지가 지나간 시간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 왁자찌걸 하게 하실 때에 조차 슬며시 올라오는 것을 알아채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보다 풍요롭게 삶을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세상을 보는 눈;에 관련된 것으로,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판의 상정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는, 그리하여, 그에 맞게 나의 안테나를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싶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모든 사람(세상)을 한가지 기준으로 보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하며, 이는 지극히 당연하게도 '나'라는 상 ; 아상 에서 출발한다.  '내가 내다' 하는 말로 아버지는 아상에 대해 이해하신 바를 말씀하시곤 했지만, 지금 이 '간결함'의 예에서 보면, '내가 알아듣게 설명해라'하는 것이 곧 아상이 근원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 그 강도에 따라 , 또 상호 간의 관계나, 힘을 쥔 쪽의 인품에 따라 다르겠지만,

논문을 쓸 때, 최소한 이정도에는 이르러야 되지 하는 논리와 설명의 수준일 경우는 강요되어도 어느정도 무방하다. 직장에서 기안서를 쓸 때, 업무나 일처리 에 대해 배울 때 등.

이해하기 쉽게도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개인적이면서, 사교적인 경우.. 대화, 수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대화과정이나 수다의 과정에서 조차

내 입장에서 상대방이 하는 말이 아 이것이구나 느끼는 순간, 확인 도 없이 그에 상응하는 다른 대화를 이어가게 되는데, 보통의 경우 사적인 이런 상황에서는 서로에 관해 알기 때문에(잘 안다고 여기고) 그냥 이해하고(사실 이해라기보다는 익숙해짐이겠지만) 넘어간다.

 

많은 사소한 갈등과 다툼의 출발이 이런 순간 부지불식간에 일어나게 됨을 여실히 본다면, 내가 그리 여긴다고 해서 실제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힘의 논리에서의 복종, 따름이 아닌 소위 '제대로 된(진정 전할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극단에서 보면, 보다 노력하는 것일뿐이지만) 전달'을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할 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말로 전하는 것의 한계에 대해 적절히 알지 못하면, 또 그 이전에 그 필요성에 대한 이런 생각에 대해 '왜 필요하지' 싶어 동의하기 어렵다면, 힘을 구가하는 자리에 있어 그를 놓기 싫어하는 상태임을 알아야 한다.

 

 

 

힘이라는 것. 보통의 구도와 다르게 생각하면 많은 것이 달리 보인다.

어린 아기가 울어서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것도 이 힘의 구도로 볼 때.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서도 존재하며,

친구 간에도,

종교에서도 여실히 존재하고,

있지 않은 곳이 없다.

 

이겨먹을라고 하지마라.

 

 

 

단순명료함을 지향했던 모더니즘 까지의 '가치 지음'과 그 확산이 '올바른' 길이라여기던 시대의 성찰까지 굳이 짚어내지 않더라도,

이러한 '단순함' 지향을 보편화 시키는 성향은  앞서 말한대로 동의 된 '판' (일. 작업. 공동관심사 등) 위에서라면 지극히 필요하고, 별 문제 없지만, 대개의 경우는 이 설명, 은 제외되고, 일방향적으로 강요된다.  간결하게 ! 라는 모토는 기본적으로 힘의 논리가 전제되어 있슴이다. 이 논리로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거나, 내 가족을, 내 친구를 대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대부분 헤게모니를 쥔 쪽과 그 반대편이 서로 암묵적으로 그 구도를 동의한 경우가 아니라면 '기분 나쁜' 기억으로 남게 되고, 당시에는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많은 경우, 아주 쪼잔한, 남자답지 않은, 대의에 맞지 않는 불평일 뿐이니까.

 

그 과정에서 학습되고, 전수되며 점점 쌓이는 '불만'의 엔트로피가 증가한다.

 

 

 

 

지금의 아이들은  과거의 우리들보다 ~~~ 이 다르다.

요새 애들은 왜 이래.

 

.

 

일반화하는 줄 모르고, 내가 겪은 아이들 = 요새 아이들  하는  과정에 대한 비판은 차치하고.

 

내가 겪은 '요새 아이'에 대해 나는 얼마나 알고 있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생각의 과정에서 무슨 거창한 논리가 있어야되는 것이 아니듯,

아주 사소하다 여겨지는 이러한 '관계'에서의 힘의 논리가

느끼지 못한 채로 전이되고, 다음 세대로 전이되어가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다만 그 힘에 의해 전달되는 것이 무엇인지의 문제는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이 아님이 그나마 다행하고 고마운 일이다.

 

 

여튼.

 

이런 의미에서 승부심을 알아차리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흔들리며 피어난  꽃이

 

바람을 탓할까

비를 고마워할까

 

비를 탓할까

바람을 고마워할까

 

 

이리 묻는 그 자리를

 

탓이나 할까

고마워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