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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심] 보고자 해야 보이는 것, '말의 눈부신 빛'과 마찬가지로

GraU 2014. 12. 12. 10:39

 

 

 

“설령 고약한 이웃이 있더라도 그저 너는
더 좋은 이웃이 되려고 노력해야 하는 거야.

착한 아들을 원한다면 먼저 좋은 아빠가 되는 거고,
좋은 아빠를 원한다면 먼저 좋은 아들이 되어야겠지.

남편이나 아내, 상사 부하직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야.

간단히 말해서 세상을 바꾸는 단 한 가지 방법은
바로 자신을 바꾸는 거야.


 

- ‘어린왕자, 두 번째 이야기’에서

 

 

어릴 적 부터 이 기전에 대해 여기 적힌 이 유루의 무엇인가만을 접해왔음에.

 

도시 계획 수업 이었던가 주제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를 바꾸는 조그만 것부터 시작해야된다'는 소견에 대해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크리틱이 되돌아 왔었던게 기억난다.

 

나의 가족 조차 이런 '싹틈'에의 시작이 한꺼번이 아니었음을 받아들이기 힘들듯이

'주인공'의 관점에서는, 그 누구라도 자신의 이야기, 자신조차 느끼지 못한 채 행해왔던 단초들을 읽을 수 없음은 크게 상관할 바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아주 사소하지만, 이런 부지불식간의 자신의 '내어놓음'에 대한 '상처'는  그 사람 전체를 구성하는 큰 바탕이 되는 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구도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순간에라야, 그 세세하고 미미한 겪음들에서 굴곡이 시작되고 헤메고 부딛히며, 괴로워하고, 분노하며, 종국에는 근기에 따라 더디건, 이르건, 온전히 자신을 찾는 일, 그 모든 과정 자체가 그대로 '자기자신'임을 아는데 까지.

 

누구나에게 내세워 나를 자랑하여, 나 스스로를 굳이 높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어 놓아 강요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 이치다.

 

세상살이에서 적절히 라는 말은  온전히 그 뜻으로 들리지 않는 것처럼

나의 이 공고한 성은, 누군가- '나의 연장'으로서의 나자신에게는 더딘 다가섬, 늦은 깨달음, 서투른 사랑으로 시간적 표상으로 종국에는 남게되고 기억된다.

 

나를 바꾸는 일이 개개인에 있어서 가장 큰 일임은

이런 머리아픈 토로 나 고백이 아니더라도,

이해하건 안 받아들여지건 간에

"세상"을 바꾸는 일과 다르지 않음이라는 단언이 그 부연조차 필요없게 한다.

 

 

야망이나 성공의

갈애

 

그 속에서 이 일을 보는 이는

이 뜻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되려 이 말 조차 자신을 탓하는 쪽으로 들린다면,

아주 좋은 징후 임을 알아채면 좋으리라.

 

.

 

네거티브를 느껴 곤란해 지는 그 순간

자신이 바라는 쪽이 어떤 쪽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순간이다.

피하려 하지 않게 될 때를 굳이 기다리는,

그리하여 시간을 들여 세상의 시간 밖에서 오래 있고 싶지 않으면

 

이 글들에서 느껴지는 글쓴이의 입김을 상관마시길.

내가 그러했듯이 누군가의 말을 따른다는 생각에

굳이 올라오는 지향을 덮어버리는 누를 범하지 않으시기를.1

 

 

 

 

 

  1. 말은 말 한자와 떼어버리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진정 나의 것이 됩니다. 그리하면, 남에게 떠들 필요도 없고, 꺼꾸로 남의 눈을 의식할 필요도 없습니다. 말을 가장 슬기롭게 쓰는 방법은 이것 입니다. 그리고 말 자체가 된 그 뜻은 자기 안에서 커져갈 수 있습니다. 남의 것을 지니고 토시한자 그대로 지키려는 것에서 벋어나서, 순수의 이름으로, 신성을 등에 업고, 진의는 내버리고 '따르라'만 남는. 그 곳을 벗어나서. / http://blog.daum.net/dryocopus/12758945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