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의 경우 말을 하면서 그 말로 인해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이 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가 말을 하는 그 순간을 항상 보지 못하더라도, 뱉어놓은 후의 전개, 파급양상을 관찰1하면 알수 있으나, 대개의 경우 관심이 없는 한, 즉 사랑(慈愛)가 있지 않는 한 자기가 행한 급부의 영향을 살피려고조차 않는다.
많은 사람이 慈 와 悲의 의미를 안다고 여기면서, 자신에게로의 반추는 쉬 되지 않음이 이 맥락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 자 가 몸에 베이기 시작하면, 말을 함부로 할 수 없게 된다. 말이라는 것이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닌대도 그 에너지로 인하여 퍼져나가는 신기하기까지한 마법과도 같은 힘을 + 쪽에서 느꼈기 때문이리라.2
스스로의 구도에서,
말을 하면서, 그 말과 자신을 떼어놓고 보게 되는 것,
다시말해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어 하는 순간.
이는 사람마다 자신 안에 있는 진정한 의도와 그 내비침 사이의 괴리를 느끼게 되는 아주 쉬운 현상이기도 하거니와, 진정하게 그 의미를 알려고 하기 전까지는 쉬 고쳐지지도 않는 그 것이기 때문이다.
말을 '하는' 과정에서의 이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양상의 다양함 외에
전해지는 과정과
'받아들여지는' 과정에서의 聚 (다층성, 습으로 인한) 때문에
이를 알고도 감정에 휩쓸리게 됨은, 또 휩쓸리는 상황을 바라보며, 깨어진 공든 탑에 대한 미련으로라도.3
실제 아직 진실로 알지는 못하기 때문인가보다.
대문글 중 말의 경계에서
(자신이 왜 그리하는 줄 모르고) 다른 이의 단점을 옮기게 된다는 구절이 있는데,
말을 그 사람이 한 것과 떼어놓고 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함을 보이는 반대편에 있는 증거이다.
지식이 있다, 나는 사려깊다는 사람일수록 이 순간을 잘 느끼지 못하며 그 이유는 세심하게 순간을 판단하려 지극히 노력해나가기 (나는 놓칠리 없다, 나는 완벽하다, 불인, 아만의 발로) 때문이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항상 칼날 위에 있을 수 없슴에 그 반대편으로의 치달음을 쌓아놓는 일이 당연하다 할지라도, 판 을 상정하여 주관하려하는 구도를 인식하지 못하면, 그 판안에 들어온 이를 그 판위에 원래 있었던 자신의 광대(卒)로 여기게 된다.
자신의 긍정적 자리매김의 반대편. 그 그림자의 존재.
대승 의 보살에는 오십이단계가 있고, 그 마흔 단계즈음까지가 다 거기서 거기다.
수능엄경이던가 마음의 업장은 오십삼가지가 있고 앙금의 비유로 업을 보기 위해 맑은 물과의 관계를 이야기 했었던 것 같다.
사실
현재 날씨가 맑다면 (화창) 자신의 일(사)이 잘 보이고( ) 잘 굴러가는( ) 데 맞춰( ) 그 뜻(리)을 밝힐 수 있다.
잘 나갈 때는 무슨 말을 해도 수긍하게 되는
그 때에 허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소위 철학적 의미로서의 니체의 '반추' 조차 시작하기 힘들다. 그의 말대로 깨어떨쳐일어나지 않는 이상, 인간은,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한계에서 벗어나기 힘들며, 또 어쩔수 없이 그 한계에서 초월을 향할 수 밖에 없다는.
싯달타가 최고의 배부른 자리에서 궁구의 길로 들어서게 된 그 일대사가
이 자신의 말을 되돌아보는 자리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음이
나 있는 이 자리에 중생 과 보리 가 함께 있슴을 보이는 단초가 아닐까 싶다.
속과 출세간이 다르지 않아 양행자재 하여야한다는 말이 신의지지라 해도
의방백조차 버릴 수는 없는 것이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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