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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乘起信論 :

GraU 2015. 1. 11.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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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乘起信論

 

 

출처; http://sky1999.hihome.com/kj/eotmd.html

 

 

 

 

 

 


목차

 

 

Ⅰ. 대승기신론 해제(大乘起信論 解題)

Ⅱ. 대승기신론 이라는 문헌

Ⅲ. 〈기신론〉의 구조

Ⅳ. 대승기신론의 중심 내용

Ⅴ. 한글로 번역된 대승기신론

Ⅵ. 대승기신론의 사상

Ⅶ. 여래장사상과 다른 사상과의 관계

Ⅷ. 주석서

Ⅸ. 참고할 만한 문헌

Ⅹ. 참고 문헌

 

 




Ⅰ. 대승기신론 해제(大乘起信論 解題)


대승기신론이란 제목에 「대(大)」란 것은 당체(當體)를 말한 것이니, 본론의 입의분(立義分)에 이르되 「마하연(摩訶衍(大乘))에 法과 義의 두 가지 뜻이 있다」했으니.

 

첫째, 法이란 것은 중생심(衆生心)을 말함이니 衆生心에는 체대(疜大), 상대(相大), 용대(用大)가 있어서 衆生心에 진여(眞如)인 본성(本性)은 疜大요, 人間의 마음에 한량없는 성공덕(性功德)이 갖추어져 있음에 이것을 완전히 드러낸 이를 불타라고 하나니 불타가 갖추고 있는 性功德이 相大요, 인간의 마음에 한량없는 활용이 있음에 이것을 완전히 발현하면 불타라 하나니, 불타가 중생을 구제하는 모든 작용이 用大니 중생의 마음에 이와 같은 三大가 갖추어져 있음이 「大」의 뜻이다.

 

「승(乘)」이란 것은 인간의 본성은 眞如인데 탐(貪), 진(嗔), 치(痴) 등 번뇌에 가려져서 나타나지 못하니 이것을 미(迷)라 한다. 이 迷에서 오(悟)에 나아가는 힘을 乘이라 하니, 비유로 말하면 운(運載)의 뜻이니, 二乘(양거(羊車), 녹거(鹿車))의 작은 수레와 달리 菩薩乘(牛車)의 큰 수레로 자도(自度), 타도(他度)해서 많은 중생을 건네는 것이 「乘」의 뜻이다.

 

「기신(起信)」이란 것은 상술(上述)한 바와 같이 인간의 마음에 대승이 갖추어져 있으니 이것이 중생의 自性淸淨心이다. 이 자성청정심을 반조(反照)해 찾는 것을 「起信」이라 한다. 佛性이 번뇌에 덮혀서 보이지 않는 상태를 如來藏이라고 하니 拱珠를 연마하면 더욱 빛남과 같이 信心을 발해서 연마 수행하면 한량없는 性功德이 具足한 佛性을 얻어보게 되니 이것이 「起信」의 뜻이다.

 

「論」이란 것은 모든 보살들이 부처님의 설하신 바 경전을 해석하여 述作한 것을 「論」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알기 쉽게 問者 答者를 세워서 묻고 답하여 正理를 論量해서 뜻을 판단한 것이다. 大乘은 이 論의 宗疜요, 起信은 이 논의 勝能이니, 疜와 用을 합하여 들고, 法과 喩를 가지런히 들어서 제목을 「대승기신론」이라 하였다.


 

 



Ⅱ. 대승기신론 이라는 문헌



漢譯으로만 2종이 있다. 550년에 진제(眞諦)(Paramartha,449∼569)가 번역했다는 1卷本( 32∼575, 17-614)과 695∼704년에 보차實叉難陀(Siksananda, 652∼710)가 번역했다는 2卷本( 32∼583, 17-701)이다. 이 책은 아쉬바고샤 Asvaghosa(馬鳴)의 저작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주석〕 이 책의 영향은 대단해서, 대승불교의 주요한 종파, 즉 華嚴·天台·禪·淨土·眞言 등에 미치고 있다. 따라서 이에 관한 주석서는 놀라울 정도로 많다. 그 중에서도 慧遠·元曉·法藏의 것은 《起信論》의 3疏라고 일컬어지고 있는데, 慧遠의 것은 정말 그의 작품인지에 대해 의심받고 있다. 法藏의 《義記》 (→대승기신론의기) 는 가장 유명하여, 이후의 《기신론》에 대한 해석에 계속 영향을 미쳤다. 마찬가지로 元曉의 《大乘起信論疏》도 그 탁월함을 인정받고 있다. 宗密(780∼841)에게는 《記信論註疏》가 있는데, 子璿(?∼1038)은 다시 이것을 상세히 설하여 《기신론疏筆削記》를 저술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眞諦의 집역(舊譯)에 근거한 것이고, 보차난타(實叉難陀)의 新譯에 대한 주석은 智旭(1599∼1655)의 《기신론裂網疏》뿐이다.

 

〔문제〕 이 책에 대해서는 어디서 누가 제작하였는지가 문제로 되어 있다. 「馬鳴造, 眞 諦譯」으로는 되어 있으나, 산스크리트 原典도 티벳譯도 남아 있지 않고 앞에서 말한 漢譯 2부가 있을 뿐이어서, 과연 인도에서 저작되었는지의 여부가 의문시 되는 것이다. 따라서 대강 다음과 같은 세 가지 說을 제기할 수 있다.

제 ①說은 나가르주나Nagarjuna(龍樹,150∼250경) 이전의 아쉬바고샤(馬鳴)의 作, 제 ②說 나가르주나 이후의 同名異人의 作, 제 ③說은 중국에서의 僞作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중에서 ①은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다. 그래서 ②와 ③이 주목된다. ③을 주장하는 이는 일본의 망월신정(望月信亨)이다. 그의 주장은 수(隋)나라 시대의 《法經錄》에서 眞諦의 번역임을 의심하고 있는 점을 발단으로 삼는다. 이 책에 표현된 譯語의 예로 보아 眞諦의 번역이 아니라고 판정하는 것이다. 한편 僞經이라고 전해지는 《仁王經》《瓔珞經》(→보살영락본업경)으로부터 인용한다든가 같은 僞經인 《占察經(점제경)》과 내용적으로 유사한 점이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 제작된 것이라고 보아, 남도지론(南道地論)의 계통이라 하고, 혹은 그 작자가 우존(曇遵)일지도 모른다고 추제(推察)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제②설을 대표하는 이는 상반대정(常盤大定)이다. 이 說에서는 이 책에서 「馬鳴造. 眞諦譯」이라고 하는 점을 근거로 삼고, 眞諦의 제자인 智愷의 서문이나 隋시대의 《歷代三寶紀》로써 그것을 뒷받침한다. 또한 내용적으로 《능가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나가르주나 이후의 인도에서 제작된 것이라고 인정한다. 중국에서의 제작을 믿는 학자로는 望月 외에 촌상전정(村上專精), 인도에서의 제작을 인정하는 학자는 常盤 외에 경야황양(境野黃洋)·우계요제(羽溪了諦)·송본문삼랑(松本文三郞)·임거우차랑(林屋友次郞) 등이지만, 어느 쪽이 옳은지는 확정짓기 어렵다.

 

「대승기신론」은 산스크리트 원본이 없는 탓으로 印度撰述인가 中國撰述인가가 논란되어 오기도 하지만, 대승불교 시대의 후기에 나타난 불교사상서 중 가장 뛰어난 논서로 알려져 있다. 「대승기신론」은 인도에서 그 당시 대립되고 있던 양대 불교 사상, 즉 中觀派와 유가(唯識)派의 사상을 지양·화합시켜 眞과 俗이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미오(迷汚) 한 현실생활(俗) 가운데에서 깨달음의 단계(眞)이른 사람은 아직 염오한 단계(俗)에 있는 중생을 이끌어 갈 의무가 있는 것임을 주장함으로써 진속일여(眞俗一如)의 사상을 잘 나타낸 논서이다.




Ⅲ. 〈기신론〉의 구조



기신론의 서문에는 무한하고 훌륭한 지혜와 무애자재한 모습을 나타내어 救世의 대자비로 살아가는 부처님께 제일 먼저 귀의한다고 되어있다.

〈기신론〉은 처음의 서분을 제외하면 1)因緣分 2)立義分 3)解釋分 4)修行信心分 5)勸修利益分의 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심을 이루는 것은 〈입의분〉과 〈해석분〉이다.

 

〈입의분〉은 〈기신론〉의 주장을 서술한 것이며, 해석분 이하에서 그것이 설명 논증되고 있다.

 

1) 인연분은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어떠한 이유에서 이 〈기신론〉과 같은 글을 저술하게 되었는가를 밝히고 있다.

2) 입의분은 〈기신론〉교리의 대의와 근원을 밝힌 것이고

3) 해석분은 일심(一心), 이문(二門), 삼대(三大)를 자세하게 설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신론〉의 교리는 2)입의분 과 3)해석분에서 모두 설해진다.

4) 수행신심분은 이론적인 교리를 어떻게 실천하고 수행해 갈 것인가를 설명한 것이다.

5) 권수이익분은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여기서는 〈기신론〉의 가르침을 실행하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밝혀, 〈기신론〉을 받들고, 또한 이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널리 권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위의 내용을 좀더 자세하게 하면 다음과 같다.

제1 인연분(因緣分) : 논을 짓게 된 여덟 가지 인연을 들고 있다. 즉 본 논은 첫째 중생으로 하여금 일체의 고뇌를 떠나 완전한 즐거움 즉 구경락(究竟樂)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둘째 여래가 설한 바 근본 취지를 해석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셋째 선근(善根)이 성숙한 중생으로 하여금 대승의 법에서 물러남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넷째 선근이 적은 중생으로 하여금 믿음을 수습하도록 하기 위해서, 다섯째 방편을 보여 나쁜 업의 장애를 없애고, 그 마음을 잘 보호하여 사견(邪見)의 그물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여섯째 지관(止觀)의 수습을 보여 범부와 2승(乘)의 허물을 대치(對治)하도록 하기 위해서, 일곱째 전념(專念)의 방편을 보여 부처 앞에 태어나 믿는 마음이 물러남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여덟째 이익을 보여 수행을 권장하기 위해서 짓게 되었음을 설한다.

 

 


제2 입의분(立義分) : 마하연(摩訶衍) 즉 대승(大乘)의 법(法)과 의(義) 즉 뜻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함으로써, 논의 근본 취지를 설한다. 그 중에서 법이란 곧 중생심이며, 뜻이란 곧 체대(體大) 상대(相大) 용대(用大) 등의 세 가지인데, 그 마음의 진여상(眞如相)은 마하연의 체(體)를 나타내고, 그 마음의 생멸(生滅) 인연상(因緣相)은 능히 마하연 자체(自體)의 상(相)과 용(用)을 나타내기 때문에, 중생심에 의해 마하연의 뜻이 드러난다. 또 체대란 모든 것이 진여(眞如) 평등(平等)으로서 증감이 없음을 말하며, 상대란 여래장이 온갖 속성과 공덕(功德)을 갖추고 있음을 말하며, 용대란 능히 모든 세간, 출세간의 선인과(善因果)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고 논한다.

 

 


제3 해석분(解釋分) : 논의 본론이 되는 부분으로서 마하연, 즉 대승의 뜻을 해석한다. 이 부분은 다시 현시정의(顯示正義), 대치사집(對治邪執),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 등의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먼저 현시정의이다. 현시정의란 올바른 뜻을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여기서는 마하연의 체와 마하연의 뜻을 자세히 설하고 있다. 마하연의 체는 다시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의 2문으로 나누어지는데, 이 가운데 심진여문에 대해서는 이언(離言) 진여(眞如)와 의언(依言) 진여(眞如)로 구분하여 설하고 있다. 이언 진여란 심진여가 본래 말을 떠나 있음을 뜻한다. 즉 심 진여란 곧 일법계대총상법문(一法界大總相法門)의 체이며, 일체의 법은 본래 언설의 상, 명자(名字)의 상, 심연(心緣)의 상을 떠나 완전히 평등한 것으로서 변하지 않고, 파괴되지 않으며, 다만 일심(一心)이기 때문에 진여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의언 진여란 심 진여가 본래 말을 떠나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말로 표현해 본다는 의미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실(如實) 공(空)과 여실(如實) 불공(不空)으로 나누어 설한다.


심생멸문에서는 심생멸의 법(法)과 심생멸의 인연(因緣)과 심생멸의 상(相)을 밝히고 있다. 이 중에서 심생멸의 법에 대해서는 아려야식(阿黎耶識)을 중심으로 해서 각(覺)과 불각(不覺) 및 각 불각의 상(相)을 설한다. 즉 여래장에 의해서 생멸의 마음이 있게 되는데, 소위 불생(不生) 불멸(不滅)과 생멸이 화합한 것으로서 이를 아려야식(阿黎耶識)이라고 부르며, 여기에 각과 불각이 있어서 모든 법을 포섭하고 모든 법을 생겨나게 한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각이란 마음의 체(體)가 허망한 생각을 떠난 것을 말하며, 불각(不覺)이란 진여의 법이 하나임을 여실하게 알지 못한 까닭에 불각의 마음이 일어나서 생각이 있음을 말한다. 이것은 소위 근본(根本) 불각(不覺)이다.


또 불각에 의하여 3세(細), 즉 무명업상(無明業相) 능견상(能見相) 경계상(境界相)의 세 가지 상이 생겨나게 되고, 그 경계에 따라 6추(序)가 생겨난다고 한다. 6추란 지상(智相) 상속상(相續相) 집취상(執取相) 계명자상(計名字相) 기업상(起業相) 업계고상(業繫苦相)이다. 또 각과 불각의 상으로서 동상(同相)과 이상(異相)을 설하고, 계속해서 심(心) 의(意) 식(識) 및 6염심(染心)을 통하여 심생멸의 인연을 설하고, 추(序) 세(細) 및 염법(染法) 훈습(熏習), 정법(淨法) 훈습(熏習)을 통하여 심생멸의 상을 설하고 있다.


마하연의 뜻에 대해서는 체(體) 상(相) 용(用)의 3대(大)를 가지고 설명한다. 즉 마하연에는 세 가지 큰 뜻이 있다는 것이다. 첫째 체대란 진여의 자체상(自體相)이 범부 성문 연각 보살 부처에 있어서 늘거나 줄지 않으며, 언제나 영원한 것을 말한다. 그것은 전제(前際)에 생겨난 것이 아니고 후제(後際)에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 둘째 상대란 진여의 상이 일체의 공덕을 구족한 것을 말한다. 셋째 용대란 진여의 작용이 큰 것을 말한다. 즉 여러 부처와 여래는 대방편의 지혜를 갖추었으므로 무명을 없애고 본래의 법신을 볼 수가 있으니, 불가사의한 여러 가지 작용이 저절로 나타나 참되고 한결같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이다. 이어서 응신(應身) 보신(補身) 법신(法身)에 대해서 설한다.


이어서 대치사집에 대해서 논한다. 대치사집이란 사집(邪執)을 대치(對治)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는 모든 집착이 인아견(人我見)과 법아견(法我見)이라는 두 가지 사견에 의해서 발생함을 설하고, 그 치유법을 제시한다. 인아견에는 여래를 허공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 진여를 공이라고 집착하는 것, 성덕(性德)과 망념(妄念)이 동일하다고 집착하는 것, 자성에 오염(染)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 등 다섯 가지가 있다. 이 중에서 여래를 허공과 같다고 하는 집착에 대해서는 허공의 상이란 망법(妄法)이며 그 체가 없어서 실법(實法)이 아님을 밝힘으로써 대치해야 하며, 또 5음(陰)이라는 생사의 법이 있다고 생각하여 생사를 두려워하고, 허망되게 열반을 취하고자 하는 등의 법아견에 대해서는, 5음의 법이란 본래 불생(不生)이므로 곧 불멸이고, 나아가 본래 열반이라고 설하여 대치해야 한다고 설한다.


셋째 분별발취도상이란 보살이 발심(發心)하고 수행해서 나아가는 모습을 분별해서 밝힌다는 의미이다. 여기서는 신성취(信成就) 발심(發心), 해행(解行) 발심, 증(證) 발심이라는 3종의 발심을 설하고 있다. 이 중에서 신성취 발심이란 진여에 대한 믿음 즉 신근(信根)을 굳게 하는 것이며, 해행 발심이란 진여를 증득함에 이른 것을 말하며, 증 발심이란 보살의 정심지(淨心地)로부터 구경지(究竟地)에 이르는 모든 경계를 증득하는 것을 말한다.

 

 

 


제4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 대승에 대한 4종의 신심과 5문(門)의 수행을 설한다. 4종의 신심이란 첫째 진여를 믿는 것, 둘째 부처에게 공덕이 있음을 믿는 것, 셋째 법에 큰 이익이 있음을 믿는 것, 넷째 승가(僧伽)가 올바로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수행한다고 믿는 것을 말한다. 5문의 수행이란 시(施) 계(戒) 인(忍) 진(進) 지관(止觀)을 말한다.


제5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 : 대승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권하고 또 올바른 믿음에 대한 비방(誹謗)의 손해와 이익을 보인다. 즉 만약 중생이 여래의 깊고 깊은 경계에 대해 올바른 믿음을 일으키고, 비방을 멀리 떠나 대승의 도에 들어서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 논을 지니고, 생각해서 헤아리고, 수습하여 완전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일체의 여래는 모두 이 법에 의해 열반을 얻었으며, 모든 보살도 이에 근거해서 수행하여 불지(佛智)에 들어서게 된다고 설한다.

 

 


이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 〈기신론〉은 불교의 이론과 실천을 진실로 정교하게 설한 것으로서, 이와 같이 체계적으로 설한 불교입문서는 일찍이 없었다.




Ⅳ. 대승기신론의 중심 내용



대승기신론에는 어떤 것이 설해져 있는가?

 

옛부터 간단하게 일심, 이문, 삼대를 설했다고 한다.

 

·일심이란 物과 心, 자기와 세계, 일체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서 중생심이라고도 부른다. 이 중생심이야 말로 대승 그 자체라고 한다.

 

·二門이란 眞如門과 生滅門을 말한다.

일심 그 자체가 번뇌나 무명에 의해 조금도 더렵혀지지 않고 깊은 물처럼 고요하고 맑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진여문이고, 번뇌나 무명에 의해 일어나 流轉해 가는 것이 생멸문이다. 일심의 두 가지 견해가 바로 二門인 것이다.

 

·三大란 체대, 상대, 용대를 말하며, 일심을 체, 상, 용의 세 관점에서 본 것이다. 大라고 하는 것은 체와 상과 용이 너무나 큰 모습과 작용을 가지기 때문에 大라고 하는 것이다. 체의 관점에서 일심을 보면, 악마도 신도, 부처도 인간도, 동물도 자연도, 모두 이 일심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이 일심에는 무량한 德相, 무수한 덕상이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相大라고 하며, 작용의 측면에서 보면 존재하는 모든 사물을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用大라고 한다. 이와 같이 체대, 상대, 용대를 알게되면 인생이나 자연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진다. 말하자면 인생의 영묘한 작용이 보이기 시작하고, 靈性界가 보이기 시작하며, 법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실천에 관해서는 무엇을 설하고 있는가?

 

옛부터 四信과 五行을 설한다고 한다.

 

· 四信이란 眞如와 揤, 法, 僧의 삼보를 믿는 것이다.

일심, 이문, 삼대의 가르침을 알게되면 만유의 근원이고 우주의 생명이며 대자연의 실상인 진여에 대해 저절로 합장, 경배하게 되며, 이것은 동시에 불, 법, 승 삼보에 귀의하는 것이 된다. 단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일심, 이문, 삼대의 가르침을 이해하면 저절로 귀의하게 되고, 이에 비로소 종교심, 신앙심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 五行이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지관을 수행하는 것이다.

종교심이 생겨나게 되면 이 오행은 불도를 완성하기 위한 방법이 된다. 신앙은 실천 수행에 의해서 깊어지고, 실천 수행은 신앙에 의해서 지탱된다. 더구나 〈기신론〉은 지력에 의한 수행을 설할 뿐만 아니라, 서방극락 세계의 아미타불을 염송하면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것도 설한다.

좌선도 염불도 〈기신론〉에서 보면 완전히 동일한 실천 수행 방법인 것이다.




 

 

Ⅴ. 한글로 번역된 대승기신론




大乘起信論(解釋)


온 十方의 最勝한 業으로 두루 아시며 色이 無碍自在하신 세상을 救濟하시는 大悲者와 저 佛身의 體와 相이신 法性眞如바다의 한량없는 功德藏과 如實히 修行하는 자에게 歸命하옵나니 衆生으로 하여금 疑惑과 邪執을 버리고 大乘의 바른 신심을 일으켜서 佛種子가 끊어지지 않게 하고자 합니다.


논에 이르기를 어떤 법이 능히 마하연의 信根을 일으킬새

그러므로 이 論을 說함이니라.

 

설에 다섯가지로 구분하였으니 무엇인가.

첫째는 因緣分이요,

둘째는 立義分이요,

세째는 解釋分이요,

네째는 修行信心分이요,

다섯째는 勸修利益分이다.


처음 因緣分을 설하리라.

 

묻되 무슨 因緣으로 이 론을 설하는고?

답하되 이 인연이 여덟가지가 있으니 무엇을 여덟가지라 하는고?

첫째는 因緣總相이니 이른바 중생으로 하여금 일체의 고를 여의고 究竟樂을 얻게 하기 위함이지 世間의 名利와 恭敬을 구하는 것이 아닌 연고요.

둘째는 如來의 根本의 뜻을 解釋해서 모든 衆生으로 하여금 올바로 理解하여 誤謬가 없게 하고저 하기 위한 연고요.

세째는 善根이 成熟한 衆生으로 하여금 摩訶衍法응 堪任하여 믿음이 물러나지 않게 하기 위한 연고요.

네째는 善根이 微弱한 중생으로 하여금 信心을 修習하게 하기 위한 연고요.

다섯째는 方便을 보여서 나쁜 業障을 消滅하고 잘 그 마음을 보호해서 어리석고 驕慢함을 멀리 여의고 邪惡한 그물에서 벗어 나게 하기 위한 연고요.

여섯째는 止와 觀 닦는 법을 보여서 凡夫와 二乘(聲聞,緣覺)의 마음의 허물을 對治하기 위한 연고요.

일곱째는 專念의 方便을 보이어 佛前에 태어나서 반드시 결정코 믿는 마음이 물러서지 않게 하기 위한 연고요.

여덟째는 이익을 보여서 수행하도록 권한연고이니 이러한 인연이 있을새

이런 까닭으로 이 논을 지었나니라.

 

묻되 修多羅의 가운데 이 법이 갖추어져 있는데 어찌 거듭 말하는고?

답하되 수다라의 가운데 비록 이 법이 있다 하더라도 衆生의 根行이 같지 아니 하며 받아 드려 이해 하는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니

 

이른바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적에는

중생들의 根機가 영리하고 법문을 설하는 부처님도

色心業이 殊勝하사 圓音으로 한번 연설함에 異類(一切衆生)가 다 같이 알아들음 일새 곧 論을 필요로 하지 않거니와

저 여래께서 涅槃에 드신 뒤에는

혹 어떤 衆生이 능히 自力으로 널리 듣고 아는 사람도 있으며,

혹 어떤 중생은 또한 自力으로서 적게 듣고 많이 아는 자가 있으며,

혹 어떤 衆生은 스스로 힘이 없어서 저 넓은 論을 因하여 아는 사람도 있으며, 스스로 중생이 다시 廣論의 글월이 많은 것을 번거롭게 여겨서 마음에 總持한 적은 글월이 많은 뜻을 攝取함을 즐겨해서 능히 아는 사람도 있나니라.

이와 같아서 이 론은 여래의 넓고 크고 깊은 법의 갓이 없는 뜻을 다 거두어 드리고저 함일새 응당 이 론을 설함이니라.


이미 因緣分을 說했으니 다음에는 立義分을 說하리라.


摩訶衍이란 것은 總說하면 두가지 種類가 있으니 무엇을 둘이라 하는고?

첫째는 法이요,둘째는 義니라.

法이라 말한 것은 衆生의 마음을 이름이니 이 마음이 곧 一切 世間과 出世間의 法을 거두어 들였으니 이 마음을 의지해서 摩訶衍의 뜻을 나타내 보였나니 어찌된 까닭인고? 이 마음의 眞如(離言)相(依言)이 곧 摩訶衍의 體를 보이는 까닭이며,이 마음의 生滅因緣相이 능히 摩訶衍의 體,相,用을 보인 까닭이니라.

 

義라고 말하는 것은 곧 세가지가 있으니 무엇을 셋이라 하는고?

첫째는 體大니 이르되 一切法이 眞如平等하여 더하고 덜하지 않는 까닭이요,

둘째는 相大니 이르되 如來藏이 한량 없는 性功德을 具足한 까닭이요,

세째는 用大니 능히 一切世間과 出世間의 착한 因果를 生하는 까닭이니라.

일체 모든 부처님이 본래 탄 바인 연고며, 一切 菩薩이 다 이법을 타고 如來地에 이른 연고니라.


이미 立義分을 설했으니 다음에는 解釋分을 설하리라.


解釋하는데 세가지가 있으니 무엇을 셋이라 하는고?

첫째는 正義를 나타내 보인 것이요,

둘째는 삿된 執着에 대하여 다스리는 것이요,

세째는 道에 發心趣向하는 相을 分別한 것이니라.

 

正義를 보인다는 것은 一心의 法을 依支하여 두가지 문이 있느니

무엇을 둘이라 하는가?

 

첫째는 心眞如門이요,둘째는 心生滅門이라.

이 두가지 문이 각각 一切의 법을 總攝하니 이 뜻이 어떠한고.

이 두문이 서로 여의지 않는 까닭이니라.

 

心眞如란 것은 곧 이 一法界 大總相法門體이니 이른바 心性이 生도 아니요, 滅도 아님이니라.一切의 모든 法이 오직 妄念을 依支하여 差別이 있으니 만약 心念(妄念)만 여의면 곧 一切境界의 相이 없으리라.이런 까닭으로

一切法이 本來부터 言說의 相을 여의었으며 名字의 相을 여의었으며 心緣의 相을 여의어서 畢竟에 平等하여 변하고 달라짐이 없으며 破壞할 수도 없는 것이니 오직 이 한 마음 인 까닭에 이름을 眞如라고 함이니라.

一切의 言說이 거짓 이름 뿐이요, 실다움이 없는 것이니 다만 妄念을 따랐을지언정 가히 얻을 수 없는 연고니라.

眞如라고 말하는 것도 또한 모양이 없는 것이니 이르되 言說의 窮極으로

말을 因하여 말을 보낸 것이어니와,이 眞如의 體는 가히 보낼 것이 없음이니

一切의 法이 다 참다운 까닭이며, 또한 가히 세울 것도 없음이니 一切의 法이

다 한가지로 如如한 까닭이니라.

 

마땅히 알라. 一切法은 가히 말할 수도 없고

가히 생각할 수도 없는 까닭에 그 이름을 眞如라고 함이니라.

 

묻되 만약 이와 같은 뜻일진대

모든 衆生들이 어떻게 隨順하여야 능히 얻어 들어 가릿닛고?

 

답하되 만약 一切의 法을 비록 말할지라도 능히 말함과(能說) 가히 말할(所說)것이 없으며 비록 생각할지라도 또한 능히 생각함과 가히 생각할것이 없는줄 알면 이것이 이름이 隨順이요 만약 생각을 여의면 이름이 얻어 들어감이 됨이니라.

 

다시 眞如라는 것은 言說에 依支하여

分別한 것이 두가지 뜻이 있으니 무엇을 둘이라 하는고?

첫째는 如實히 空한 것이니 능히 究境에 실다움을 나타내는 까닭이요,

둘째는 如實히 空하지 않은 것이니 自體에 샘이 없는 性功德을 具足한 까닭이니라.

 

말한바 空이란 것은 本來부터 一切의 染法이 相應하지 않는 까닭이니

이르되 일체의 差別相을 여의었으며 虛妄한 心念이 없는 까닭이니라.

 

마땅히 알라 眞如의 自性은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요, 모양이 없는 것도 아니며,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님도 아니요, 모양이 없는 것이 아님도 아니며,

 

있고 없는 두가지 모양도 아니며, 한 모양도 아니며, 다른모양도 아니며,

한모양 아님도 아니며, 다른 모양 아님도 아니며, 하나이니 다름이니 하는

두가지의 모양도 아님이니라

 

내지 통털어서 말할진대 一切衆生들이 妄心이 있음으로써

생각 생각에 分別해서 다 서로 다 응하지 못함을 의지 했을새

이런 까닭으로 말하여 空이라고 했거니와

만약 妄心을 여의면 실로 空이라 할 것도 없는 까닭이니라.

 

말한바 不空이란 것은 이미 법체가 공하여 망령 됨이 없음을 나툰 연고로

곧 眞心이 恒常하여 변하지 아니해서 正法이 만족함일새 곧 이름이

不空이니라.또한 모양있음을 가히 취할 것이 없음이니 생각을 여읜 경계는

오직 증득한 이라야 서로 응하는 까닭이니라.

 

 


心生滅이란 것은 如來藏을 의지한 연고로 生滅心이 있으니

이른바 生도 아니요, 滅도 아닌 것이 生滅하는 것과 더불어 和合하여

하나도 아니요, 다르지도 아니함이니 이름하여 阿梨耶識이라 함이니라.

 

이 阿梨耶識이 두가지 뜻이 있어서 능히 一切法을 거두기도 하며

一切法을 내기도 하나니 무엇을 둘이라 하는고?

 

첫째는 覺義요, 둘째는 不覺義니라.

말한바 覺義란 것은 마음 자체가 생각을 여읜 것을 이름이니

생각을 여읜 相은 虛空界와 같아서 두루하지 않은 바가 없어서 法界가 한 모양이니라.

곧 이것이 如來의 平等한 法身이니 이 法身을 依支해서 설하여 本覺이라 함이니라.

무슨 까닭인고?

本覺의 뜻이란 것은 始覺의 뜻에 대하여 말한 것이니,

始覺이 곧 本覺과 같은 때문이니라.

始覺의 뜻은 本覺을 의지하는 까닭에 不覺이 있고,

不覺을 의지하는 까닭에 始覺이 있다고 설함이니라.

 

또 心源을 깨달은 연고로 이름이 究竟覺이요

心源을 깨닫지 못한 연고로 究竟覺이 아님이니라.

이 뜻이 어떠한고?

 

저 凡夫들이 前念에 惡業을 일으킴을 깨달아 알아서 짐짓 능히 後念을 그쳐서 그로 하여금 일어나지 못하게 하나니 다시 覺이라 이름하나 곧 이것은 覺이 아닌 까닭이니라.

 

저 二乘의 觀智(事理를 觀하는 智慧)와 처음 뜻을 발한 菩薩들은 念의 異相을 깨달아 念에 異相이 없으니 序分別執着의 相을 버린 까닭에 이름을 相似覺이라 함이니라.

 

저 法身菩薩들은 心念에 住相을 깨달아 心念에 住相이 없으니 分別하는 序念相을 여읜 까닭에 이름을 隨分覺이라 함이니라.

 

저 菩薩이 十地에서 배움이 다하여 方便이 滿足하여 一念이 서로 응해서 깨달은 마음이 처음 일어남에 마음에 처음이라는 상이 없음이니 미세한 생각을 멀리 여읜 까닭에 心性을 얻어 보아 그 마음이 곧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을 이름을 究竟覺이라 함이니라.

 

이런 까닭으로 修多羅에 설하사대 만약 어떤 衆生이 능히 無念을 관하는 자는 곧 佛智를 향함이 되는 연고라 하시니라. 또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은 처음이란 모양을 가히 알 수 없거늘 처음의 모양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곧 無念을 말하는 것이니 이런 까닭으로 一切衆生을 覺이라 이름하지 못한다 하나니 본래부터 생각생각이 相續하여 일찌기 생각을 여의지 못한 까닭에 비롯없는 無明이라 말함이니라.

만약 無念을 얻은 자는 곧 心相의 生,住,異,滅을 알 것이니 無念과 같은 까닭이니라.

 

실로 始覺과 다름이 없으니 四相(生.住. 異.滅)이 함께 있어서 다 자립함이 없음이니 본래 平等하여 동일한 覺인 까닭이니라.

 

 

다시 本覺이 染을 따라 分別해서 두가지 相을 내니

저 本覺으로 더불어 서로 버리고 여의지 아니 하나니 무엇을 둘이라 하는고?

 

一은 智淨相이요, 이는 不思議한 業相이니라.

 

智淨相이란 것은 이르되 法力의 熏習에 의하여 如實히 修行해서 方便이 滿足한 연고로 和合하는 識相을 破하고 相續하는 心相을 滅하여 法身의 智慧가 淳淨함을 나투는 까닭이니라.

 

이 뜻이 어떠한고?

一切心識의 相이 다 이 無明이니라.

無明의 相은 覺性을 여의지 아니하여 가히 무너지지도 아니하며,

가히 무너 뜨리지 못할 것도 아님이니

 

마치 大海의 물이 바람을 인하여 파도가 움직이어서 水相과 風相이 서로 버리고 여의지 아니하나 물은 움직이는 性이 아님이니, 만약 바람이 사라지면 움직이는 相은 곧 滅하나 젖는 성질은 무너지지 않는 것과 같은 까닭이니라.

 

이와 같이 중생들의 自性淸淨心이 無明風을 因하여 動하여 마음과 無明이 함께

형상이 없어서 서로 버리고 여의지 아니하나 마음은 動性이 아님이니

만약 無明이 滅하면 相續이 곧 滅할지언정 智性은 무너지지 않는 까닭이니라.

 

 

不思議業相이란 智淨相을 依支하여 능히 일체의 殊勝하고 玄妙한 境界를 짓나니 이른바 한량 없는 功德의 相이 항상 끊어짐이 없어서 중생의 根機를 따라서 자연히 서로 응하여 가지가지로 나타나서 이익을 얻게 하는 까닭이니라.

 

다시 覺의 體와 相은 네가지 큰 뜻이 있으니 虛空으로 더불어 같으며 마치 조촐한 거울과도 같나니라. 어떠한 것이 넷인고?

 

첫째는 如實空鏡이니 一切心의 境界相을 멀리 여의어서 한 법도 가히 드러날 것이 없으니 覺照의 뜻이 아닌 까닭이니라.

 

둘째는 因熏習鏡이니 이르되 如實不空이니 一切世間의 境界가 다 그 가운데 나타나서 나오지도 아니하고, 들어가지도 아니하며, 잃어 버리지도 아니하고, 무너지지도 아니하여 항상 한 마음에 머물러 있음이니 一切의 法이 곧 眞實한 性인 까닭이며 또 일체의 染法이 물 들이지 못할 바이니 智體가 움직이지 아니하여 無漏가 具足해서 衆生을 熏習하는 까닭이니라.

 

세째는 法出離鏡이니 이르되 不空法이 煩惱 와 智 를 벗어나서 和合의 相을 여의어서 순박하고 조촐하고 밝은 까닭이니라.

 

네째는 緣熏習鏡이니 이르되 法에 벗어남을 의지하는 까닭으로 衆生의 마음을 두루 비춰 하여금 善根을 닦아서 생각을 따라 나타내 보이게 하는 까닭이니라.

 

 

말한바 不覺義라는 것은 이르되 如實히 眞如法이 하나인 것을 알지 못한 연고로 不覺의 마음이 일어나서 그 念(分別念)이 있으나 念이 自相이 없어서 本覺을 여의지 아니 하나니

마치 迷惑한 사람이 方位를 의지한 연고로 迷惑했으니 만약 方位를 여의면 곧 迷惑함이 없는 것과 같나니라.

 

衆生도 또한 그러해서 覺을 의지한 연고로 미혹 했으니 만약 覺性을 여의면 곧 不覺이 없으리라. 不覺의 妄想心이 있는 까닭으로 능히 名義만 알아서 眞覺이라 말하나니 만약 不覺의 마음만 여의면 곧 眞覺의 自相을 가히 說할 것이 없으리라.

 

다시 不覺을 依支한 연고로 세가지 상을 생하여 저 不覺으로 더불어 相應하여 여의지 않나니 어떠한 것이 셋인고?

 

첫째는 無明業相이니 不覺을 의지한 연고로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설하여 이름을 業이라 함이니 覺 하면 곧 움직이지 아니하나 움직이면 곧 苦가 있으니 果가 因을 여의지 아니한 연고로니라.

 

둘째는 能見相이니 움직임을 依支한 연고로 능히 보나니 움직이지 아니하면 곧 봄이 없나니라.

 

세째는 境界相이니 能見을 의지하는 연고로 경계가 망녕되이 나타나나 見을 여의면 곧 境界가 없나니라. 境界緣이 있는 연고로 다시 여섯가지 相이 생함이 니 어떠한 것이 여섯인고?

첫째는 智相이니 境界를 의지해서 마음을 일으켜 사랑함과 사랑하지 않는 것을

분별하는 연고니라.

둘째는 相續相이니 智相을 의지하는 연고로 그 苦樂을 깨닫는 마음을 내어서

생각을 일으켜 서로 응하여 끊어지지 않는 연고니라.

세째는 執取相이니 相續을 의지하여 境界를 攀緣해 생각하여 苦樂에 머물러서

마음에 執着을 일으키는 연고니라.

네째는 計名字相이니 망녕된 執相을 의지해서 거짓된 假名言相을 分別하는

연고니라.

다섯째는 起業相이니 名字를 의지해서 이름을 따라 취착하여 가지가지 업을

짓는 연고니라.

여섯째는 業繫苦相이니 業을 의지하여 果報를 받아서 自在하지 못한 연고니라.

 

 

마땅히 알라 無明이 능히 一切의 染法을 생하나니 일체의 染法이 다 이 不覺의 相인 연고니라. 다시 覺과 不覺이 두가지의 相이 있으니 어떠한 것이 둘인고?

 

첫째는 同相이요, 둘째는 異相이라.

 

同相이란 것은 비유하면 가지가지 질그릇이 다 한가지 가는 티끌의 性인 相과 같음이니 이와 같이 無漏와 無明의 가지 가지 業幻이 다 한가지 眞如의 性인 相이니라.

이런 까닭으로 修多羅 가운데 이 뜻을 의지하여 說하시되 一切衆生이 본래 항상 머물러서 涅槃에 들어감과 菩提의 法이 가히 닦는 상이 아니며 가히 짓는 상도 아닌지라 畢竟에 얻을 것이 없다 하니라.또한 色相을 가히 볼 수 없으나 色相을 봄이 있는 것은 오직 이 染을 따르는 幻의 지은 바요, 이 智色 不空의 性은 아님이니, 智相은 가히 볼 수 없는 까닭이니라.

 

異相이란 것은 가지가지 질그릇이 각각 같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이와같이 無漏와 無明이 隨染幻의 差別이며 性染幻의 差別인 연고니라.

 

다시 이 生滅因緣이란 것은 이른바 衆生이 마음을 의지하여 意와 意識이 전하는 연고니라. 이 뜻이 어떠한고?

 

阿梨耶識을 의지하여 無明이 있음을 말했으니 不覺이 일어나서 능히 보고 능히 나투며 능히 境界를 취하여 생각을 일으켜 상속할새 그러므로 설하여 意라고 함이니라.

 

이 뜻에 다시 다섯가지 이름이 있으니 어떠한 것이 다섯인고?

첫째는 이름을 業識이라 함이니,이르되 무명의 힘으로 不覺心이 움직이는 까닭이니라.

둘째는 이름을 轉識이라 함이니, 움직이는 마음에 依支하여 能見의 相이 되는 까닭이니라.

세째는 이름을 現識이라 함이니 이른바 능히 一切의 境界를 드러내나니

마치 明鏡이 色像을 나투는 것과 같아서 現識도 또한 그러하여 그 五塵을 따라서

상대되는 것이 이르면 곧 드러내서 앞과 뒤가 없으니 一切의 때에 따라 마음대로 일어나서 항상 앞에 있는 까닭이니라.

네째는 이름을 智識이라 함이니 이르되 染淨의 法을 分別하는 까닭이니라.

다섯째는 이름을 相續識이라 함이니 생각이 서로 응하여 끊어지지 않는 까닭이며, 過去無量한 세상의 善과惡의 業을 住持하여 하여금 잃지 않는 까닭이며,다시 능히 現在와 未來의 苦樂等 果報를 成熟시켜서 서로 어기지 않게 하는 까닭이니 능히 現在와 이미 겪은 일로 하여금 忽然 생각하게 하며 미래의 일을 不覺에 망령되이 생각하게 함이니라.

 

 

이런 연고로 삼계가 虛僞한지라 오직 마음의 지은 바이니 마음을 여의면 곧 六塵의 경계가 없으리라.이뜻이 어떠한고?

 

일체의 법이 다 마음을 쫓아 일어났으니 妄念이 생한지라 일체의 분별이 곧 自心을 分別함이니 마음이 마음을 보지 못하여 모양을 얻을 수 없으니 마땅히 알라 세간의 일체 境界가 다 衆生의 無明妄心을 依支하여 머물러 가짐을 얻나니라.

이런 까닭으로 일체의 법이 거울가운데 형상과 같아서 體를 가히 얻을 수 없으며, 오직 마음이라 허망함이니 마음이 生하면 가지가지의 法이 生하고 마음이 滅하면 가지 가지의 法이 滅하는 연고니라.

 

다시 의식이라 말함은 곧 이 相續識이니 모든 凡夫가 取着함이 더욱 깊음을 의지하여 我와 我所를 計較하여 六塵을 分別할새 이름을 意識이라 함이요.

또한 이름을 分別識이라 하며 또 다시 이름을 分別事識이라 설함이니 이 識은 見愛(見惑과 愛惑)의 煩惱를 의지하여 增長하는 뜻인 연고니라.

 

 

無明熏習을 의지하여 일어난바 식이라는 것은 凡夫의 능히 알바가 아니며

또한 二乘의 智慧로 깨달을 바가 아니니 이르되 菩薩을 의지할진대

처음에 바로 믿음을 쫓아서 發心하여 觀察해서 만약 法身을 證得했을지라도

少分만 얻어 알것이며 이에 보살의 究竟地에 이러르서도 능히 다 알지 못할 것이요 오직 부처님이라야 다 아나니라. 무슨 까닭인고?

 

이 마음이 본래부터 自性이 淸淨함이로대 無明이 있는지라 無明의 染한 바가 되어 그 물들어진 마음이 있으니 비록 물든 마음이 있으마(本覺의 마음)항상해서 變하지 아니함이니 이런 까닭으로 이 뜻은 오직 부처님이라야 능히 알 수 있나니라.

 

이른바 心性이 항상 無念인 연고로 이름을 不變이라 함이요 一法界를 통달 하지 못한 까닭으로 마음이 서로 응하지 못하여 홀연히 생각이 일어난 것을 이름을 무명이라 함이니라.

 

染心이란 것이 여섯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여섯인고?

 

첫째는 執相應染이니 二乘의 解脫과 信相應地를 의지해서 멀리 여의는 연고요.

 

둘째는 不斷相應染이니 信相應地를 의지해서 方便을 修學하여 漸漸 능히 (相續識) 버려서 淨心地를 얻어 究竟에 여의는 연고요.

 

셋째는 分別地相應染이니 具戒地를 의지하여 漸漸여의어서 이에 無相方便地에 이르러 구경에 여의는 연고요.

 

넷째는 現色不相應染이니 色自在地를 의지해서 능히 여의는 연고요.

 

다섯째는 能見心不相應染이니 心自在地를 의지해서 능히 여의는 연고요.

 

여섯째는 根本業不相應染이니 菩薩의 盡地를 의지해서 如來地에 들어 가서

능히 여의는 연고니라.

 

一法界를 了達하지 못한다는 뜻은

信相應地로 부터 觀察하여 배워 끊어며

淨心地에 들어가서 분을 따라 여의며

이에 如來地에 이르러 能히 究竟에 여의는 연고니라.

 

 

相應이라 말하는 뜻은 이르되 心과 念法이 다르니

 染과 淨의 差別을 의지하여

知相과 緣相이 같은 연고며

 

不相應이란 듯은 이르되 마음 그대로 不覺이라

항상 별다름이 없어서 知相과 緣相이 같지 아니한 연고니라.

 

또 染心의 뜻이란 것은 이름을 煩惱라 함이니

능히 眞如의 根本智를 장애하는 연고니라.

 

 

 

無明의 뜻이란 것은 이름을 智라 함이니 능히 세간의 自然業智를 障碍하는 연고니라.이 뜻이 어떠한고?

染心을 依支하여 능히 보고 능히 나타나며 망녕되이 경계를 취하여 평등한 性을 어기는 까닭이며,

一切法이 항상 고요해서 일어난 상이 없으나 無明不覺이 망녕되이 법으로 더불어 어기는 연고로 능히 세간의 一切境界를 隨順해서 가지 가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니라.

 

다시 生滅의 相을 分別한다는 것은 두가지가 있으니 어떠한 것이 둘인고?

첫째는 序니 마음으로 더불어 相應하는 연고요,

둘째는 細니 마음으로 더불어 相應하지 않는 연고니라.

 

또 序의 가운데 序는 凡夫의 境界요,

序의 가운데 細와 細의 가운데 序는 菩薩의 境界요,

細의 가운데 細는 부처님의 경계니라.

 

이 두가지 生滅이 無明熏習을 의지하여 있으니

이른바 因을 의지하고 緣을 의지함이니라.

因을 의지한다는 것은 不覺의 뜻인 연고요,

緣을 의지한다고 한다는 것은 망녕되이 境界를 짓는다는 뜻인 연고니라.

 

만약 因이 滅하면 緣도 滅하나니

因이 멸한 연고로 서로 응하지 않는 마음이 멸함이요,

緣이 멸하는 연고로 서로 응하는 마음이 멸함이니라.

 

 

 

묻되 만약 마음이 滅한다면 어떻게 相續하며

만약 相續한다면 어떻게 究竟滅을 말하리요?

 

답하되 말한바 滅이란 것은 오직 心相이 멸할지언정

心體가 멸하는 것은 아님이니

 

마치 바람이 물을 의지하여 움직이는 相이 있으니

만약 물이 멸할진대 風相이 끊어져 의지할 바가 없을 것이어니와

물이 멸하지 아니할새 風相이 상속하나니 오직 바람이 멸하는 연고로

움직이는 모양이 따라서 멸할지언정 이 물이 멸하는 것은 아님이니라.

無明도 또한 그러해서 心體를 依支하여 움직이나니

만약 心體가 멸할 진대 衆生이 斷絶해서 의지할바가 없을 것이어니와

체가 멸하지 아니 할새 마음이 상속함을 얻나니

오직 어리석은 것만 멸하는 연고로 심상이 따라서 滅할지언정

心智는 멸하지 아니함이니라.

 

 

다시 네가지의 法이 熏習하는 뜻이 있는 연고로

染法과 淨法이 일어나 끊어지지 않나니 어떻한 것이 넷인고?

첫째는 淨法이니 이름이 眞如요,

둘째는 一切染因이니 이름이 無明이요,

셋째는 妄心이니 이름이 業識이요,

넷째는 妄境界니 이른바 六塵이니라.

 

熏習한다는 뜻은 마치 世間의 衣服이 실은 香氣가 없으나

만약 사람이 香으로써 熏習한 연고로 곧 香氣가 있는 것과 같이

이것도 또한 이와 같아서 眞如의 淨法은 實로 물들임 없으나

다만 無明으로써 熏習하는 연고로 곧 染相이 있음이요,

無明의 染法은 실로 淨業이 없으나

다만 眞如로써 훈습하는 연고로

곧 淨의 作用이 있나니라.

 

어떻게 熏習하여 染法을 일으켜 끊어지지 않는고?

이른바 眞如의 法을 의지하는 연고로 無明이 있음이요,

無明染法의 因이 있는 연고로 곧 眞如를 熏習함이요,

熏習하는 연고로 곧 妄心이 있음이요

妄心이 있어서 곧 無明을 훈습하여 眞如의 法을 了達하지 못하는 연고로

不覺의 念이 일어나서 망녕된 경계를 나타냄이요,

망녕된 경계의 染法의 緣이 있는 연고로 곧 망녕된 마음을 熏習하여

그로 하여 금 念着하여 가지 가지의 業을 지어서

一切의 몸과 마음등 괴로움을 받게 하나니라.

 

 

이 망경계를 熏習하는 뜻이 두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둘인고?

첫째는 增長熏習이요,둘째는 增長熏習이니라

.

妄心을 熏習한다는 뜻이 두가지가 있으니 어떤것이 둘인고?

첫째는 業識根本熏習이니 능히 阿羅漢과 酸支弗과 一切菩薩로 생멸의 고를

받게 하는 연고요,

둘째는 增長分別事識熏習이니 능히 凡夫로 業에 얽메인 苦를 받게하는 연고니라.

 

무명을 熏習하는 뜻이 두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둘인고?

첫째는 根本熏習이니 능히 業識을 성취하는 뜻인 연고요,

둘째는 所起見愛熏習이니 능히 分別事識을 成就하는 뜻인 연고니라.

 

 

 

어떻게 熏習하여 淨法을 일으켜 끊어지지 않게 하는고?

이른바 진여의 법이 있는 연고로 능히 無明을 熏習함이요,

熏習한 因緣의 힘인 연고로 곧 妄心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를 싫어하고

즐거히 열반을 구하게 하나니 이 망령된 마음이 싫어하고

求하는 인연이 있는 연고로 곧 眞如를 熏習함이니라.

 

스스로 自己의 성품을 믿어서 마음이 망녕되이 動하는지라

앞의 경계가 없는 줄 알아서 멀리 여의는 법을 닦나니

여실히 앞의 境界가 없는 줄 아는 연고로

가지가지 방편으로 隨順行을 일으켜서

취하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내지 久遠의 熏習力인 연고로 無明이 멸하며

무명이 滅하는 연고로 마음이 일어남이 없음이요,

일어남이 없는 연고로 경계가 따라 멸함이요,

因緣이 함께 멸하는 연고로 心相이 다함일새

이름을 涅槃을 얻어 自然業을 이룸이라 함이니라.

 

 

 

妄心熏習의 뜻에 두가지가 있으니 어떠한 것이 둘인고?

첫째는 分別事識熏習이니 모든 凡夫와 二乘들이 生死의 苦를 싫어함을 의지하여 힘의 능한 바를 따라서 漸次로 無上道에 취향하는 연고요,

둘째는 意熏習이니 이르되 모든 보살이 發心勇猛하야 속히 열반에 나아가는 연고니라.

 

 

 

眞如熏習의 뜻이 두가지가 있으니 어떠한 것이 둘인고?

첫째는 自體相熏習이요,

둘째는 用熏習이니

 

自體相熏習이란 것은 비롯함이 없는 세상으로부터 옴으로 無漏의 法을 갖추어서 不思義業과 境界를 짓는 性을 갖추어 있나니 이 두가지 뜻이 항상 훈습함을 의지해서 힘이 있는 연고로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를 싫어하고 즐거이 涅槃을 구하여 스스로 자기 몸에 진여의 법이 있는 줄 믿어서 發心하여 修行하게 함이니라.

 

묻되 만약 이와 같은 뜻일진대 일체중생이 다 眞如가 있어서 平等하게 다 熏習하거늘 어찌하여 信이 있고 信이 없으며, 한량없이 前後에 差別하는고,

 

 

다 응당 일시에 스스로 진여의 법이 있음을 알아서 부지런히 方便을 닦아서 평등히 열반에 들게 하리요?

 

답하되 眞如는 본래 하나이나 無量無邊의 無明이 있어서 본래 부터 自性이 차별해서 厚薄이 같지 아니한 연고로 恒河沙等上에 지나는 煩惱가 무명을 의지하여 차별을 일으키며, 我見愛染의 번뇌가 무명을 의지하여 차별을 일으키나니 이와 같이 일체의 煩惱가 無明을 의지하여 일어나는 바라, 前後의 한량 없는 차별을 오직 如來만이 능히 아는 연고라.

또 모든 부처님의 법이 因이 있고 緣이 있으니 因緣이 구족하여야 이에 판단함을 얻나니 마치 나무 가운데 火性이 이 불의 正因이나 만약 사람이 알지 못하여 方便을 가지지 아니하면 능히 스스로 나무를 불 사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나니 중생도 또한 그러해서 비록 正因熏習의 힘은 있으나 만약 모든 불보살과 善知識등을 만나서 이로써 반연하지 아니하면 능히 스스로 번뇌를 끊어서 열반에 들어간다는 것이 곧 옳은 곳이 없나니 만약 비록 外緣의 힘이 있으나 안으로 정법이 아직 熏習의 힘이 있지 아니한자면 또한 능히 究竟에 生死의 고를 싫어 하여 즐거이 열반을 구하지 못함이니라.

 

만약 인연이 具足한 者는 이른바 스스로 熏習의 힘이 있고 또 모든 佛菩薩들의 慈悲願護함이 되는 연고로 능히 고를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켜 열반이 있는 것을 믿어서 善根을 修習함이니 善根을 닦아서 成熟한 연고로 곧 모든 佛菩薩의 교를 보여 利喜케 함을 만나서 이에 능히 進趣하여 涅槃의 도에 向하게 함이니라.

 

 

 

用熏習이란 것은 곧 이 衆生의 外緣의 힘이니 이와 같이 外緣이 限量없는 뜻이 있으나 간략히 두가지로 설하리라. 어떠한 것이 둘인고?

 

첫째는 差別緣이요,둘째는 平等緣이니

 

差別緣이라고 하는 것은 이 사람이 모든 佛菩薩 등을 의지하여 처음에 뜻을 발하여 비로서 도를 구할 때로부터 이에 佛에 이르기까지 저 가운데 만약 보거나 생각하면 혹은 眷屬과 父母와 모든 親戚도 되며, 혹은 給使도 되며 혹은 知友도 되며, 혹은 寃家도 되며,혹은 四攝法을 일으켜서 이에 일체의 짓는 바 무량한 行緣에 이르기까지 大悲熏習의 힘을 일으켜서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善根을 增長하여 저 보고 들음에 이익을 얻게 하는 연고니라.

이 緣이 두가지가 있으니 어떠한 것이 두가지 인고?

첫째는 近緣이니 속히 제도를 얻게하는 연고요.

둘째는 遠緣이니 久遠劫에 제도를 얻게 하는 연고니라.

이 近과 遠의 二緣을 분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떠한 것이 둘인고?

첫째는 增長行緣이요, 둘째는 受道緣이니라.

 

平等緣이란 것은 일체의 모든 佛菩薩이 다 일체의 중생을 도탈하기를 원하사 自然 熏習하여 항상 버리지 아니 해서 同體의 智力을 쓰는 연고로, 보고 들음을 따라 응해서 作業을 나타내나니 이른바 중생이 三昧를 의지하여야 이에 평등하게 모든 부처님을 親見함을 얻는 연고니라.

 

이 體用의 熏習을 분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것이 둘인고?

 

첫째는 未相應이니 이르되 凡夫二乘과 처음 뜻을 발한 보살들이 意와 意識으로 熏習해서 信力을 의지한 연고로 능히 修行하나 분별이 없는 마음이 體로 더불어 서로 응함을 얻지 못한 연고며, 自在業으로 수행하여 用으로 더불어 서로 응함을 얻지 못한 연고요,

 

둘째는 己相應이니 이르되 法身菩薩이 분별 없는 마음이 모든 부처님의 智用으로 더불어 서로 응함을 얻음이니 오직 法力을 의지하여 자연히 수행하여 眞如를 熏習해서 무명을 滅하는 연고니라.

 

다시 染法이 비롯함이 없음으로부터 옴으로 熏習하여 끊어지지 않다가 이에 부처를 얻은 뒤에야 곧 끊어짐이 있음이요, 淨法熏習은 끊어짐이 없어서 미래를 다함이니 이 뜻이 어떠한고?

眞如法이 항상 熏習하는 연고로 망녕된 마음은 곧 滅하고 法身이 나타나 用熏習을 일으킴일새 그러므로 끊어지짐이 없나니라.

 

다시 眞如自體相이란 것은 일체의 凡夫, 聲聞, 緣覺, 菩薩 모든 부처님이 더하고 덜함이 없어서 前際에 生한 것도 아니며 後際에 滅하는 것도 아님이니 畢竟에 항상 해서 본래로부터 옴으로 自性에 일체의 功德이 滿足하니

 

이른바

自體에 大智慧光明의 듯이 있는 연고며,

法界에 두루 비추는 뜻인 연고며,

진실로 아는 뜻인 연고며,

自性淸淨心의 듯인 연고며,

常樂我正의 뜻인 연고며,

淸凉하고 不變하는 自在의 뜻인 연고니,

 

이와 같이 恒河沙에 지나는 여의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는 不思義佛法을 具足하여 이에 만족함에 이르러 조금도 모자라는 바의 뜻이 없는 연고로 이름을

 

如來藏이라 하며 또한 이름을 如來法身이라 함이니라.

 

 

묻되 위에서 설하되 眞如는 그 體가 평등하여 일체의 相을 여의었다고 하고 어찌하여 다시 體에 이와 같은 가지가지의 공덕이 있다고 설하는고?

답하되 비록 진실로 이 모든 공덕의 뜻이 있으나 差別의 상이 없어서 一味가 等同하여 오직 하나인 진여 뿐이니 이 뜻이 어떠 한고?

 

分別이 없으며 分別의 상을 여의었나니 이런 연고로 둘이 없나니라.

 

다시 무슨 뜻으로 차별을 설하는고?

業識의 生滅相을 의지하여 보임이니라.

 

이것을 어떻게 보였는고?

일체의 법이 본래 오직 마음 뿐이라 실로 념이 없으나 망심이 있어서 불각의 념을 일으켜서 모든 境界를 봄일새 그러므로 설하여 무명이라 함이니 心性이 일어나지 아니 하면 곧 이것이 大智慧光明의 뜻인 연고니 만약 마음이 見을 일으키면 곧 不見의 相이 있거니와 心性이 見을 여의면 곧 이것이 법계를 두루 비추는 뜻인 연고니라.

 

만약 마음이 움직임이 있으면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며 自性이 없어서 常도 아니요,樂도 아니며,我도 아니요,淨도 아님이니 熱惱하고 衰變하면 곧 자재하지 못하며, 내지 恒河沙에 지나는 等 망념의 뜻을 갖추어 있으니 이 뜻을 對한 연고로 心性이 움직임이 없으면 곧 恒河沙에 지나는 등 모든 淨功德相의 뜻을 示現함이 있나니라.

 

만약 마음이 일어 남이 있어서 다시 前法을 가히 생각할 것을 보는 자는 곧 모자라는 바가 있거니와 이와 같이 淨法의 무량한 공덕이 곧 이 일심이라 다시 생각할 바가 없음일새 이런 연고로 만족함이니 이름을 法身如來의 장이라 함이니라.

 

 

 

다시 진여의 用이라는 것은 이른바 모든 부처님이 본래 因地 에 있어서 큰 慈悲를 발하여 모든 波羅蜜을 닦아서 중생을 攝化하며, 큰 서원을 세워 다 평등히 중생계를 度脫코져 하며,또한 劫數를 한정하지 아니해서 미래를 다하며, 일체중생을 취하지 아니함이니 이것이 무슨 뜻인고?

 

이르되 여실히 일체의 중생과 다만 自己의 몸이 如實平等하여 별 다름이 없는 줄아는 연고니라. 이와 같은 큰 方便의 智慧가 있어 無明을 除滅하고 本法身을 보아서 自然히 不思議한 業의 가지 가지의 用이 있는지라 곧 진여로 더불어 평등해서 일체처에 두루하며, 또한 用相을 가히 얻을 수 없음이니 무슨 까닭인고?

 

이르되 모든 부처님은 오직 이 法身智相의 몸이라 第一義諦에는 世俗境界가 없어서 施作을 여의었건만 다만 중생의 보고 듣는 것을 따라 利益을 얻게 할새 그러므로 설하여 用이라고 함이니라.

 

이 用이 두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둘인고?

 

첫째는 分別事識을 의지한 凡夫와 二乘의 마음에 보는 바를 이름을 應身이라 함이니 轉識의 나타남인 줄을 알지 못하는 연고로 밖으로 쫓아 옴을 보아서 色의 分齊(즉 色相의 限界)를 취하나니 능히 다 알지 못하는 까닭이요.

 

둘째는 業識을 의지함이니 이르되 모든 보살이 처음 뜻을 발함으로 부터 이에 菩薩의 究竟地에 이르기 까지 마음에 보는 바를 이름을 報身이라 함이니라.

몸에 한량 없는 빛깔이 있으며 빛깔에 한량 없는 모양이 있으며 모양에 한량 없는 좋은 것이 있으니 머무르는 바의 依果(즉 依報器世界)에도 또한 한량 없는 가지 가지의 莊嚴이 있어서 곳을 따라 示現해서 곧 갓이 없으며, 가히 다할 수 없어서 分齊의 相을 여의었으며, 그 應할 바를 따라서 항상 능히 머물러 가져서 헐지도 아니하고 잃지도 아니함이니 이와 같은 공덕이 다 모든 波羅蜜等 샘이 없는 行熏과 및 不思議한 熏習을 因하여 成就한바라 한량 없는 樂相이 具足할새 그러므로 설하여 報身이라 함이니라.

 

또 凡夫의 보는 바는 이것은 그 序色이니 六道衆生이 各各 보는 것이 같지 아니 하여 가지가지의 다른 무리가 樂相을 받지 못함을 따를새 설하여 應身이라 함이니라.

 

다시 처음에 뜻을 발한 보살들이 보는 바는 깊이 진여의 법을 믿는 연고로 少分을 보는지라 저 色相莊嚴等의 일이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어서 分齊를 여의었나니 오직 마음을 의지하여 나타나서 진여를 여의지 아니한 줄 아나니라.

 

그러나 이 보살이 오히려 스스로 분별하는 것은 아직 法身의 位에 들지 못한 까닭이니 만약 淨心을 얻으면 보는 바가 微妙하여 그 用이 더욱 수승할 것이요.이에 菩薩地盡에 이르면 보는 것이 究竟일 것이며, 만약 업식을 여의면 곧 보는 相이 없을 것이니 모든 부처님의 法身은 彼此의 색상으로 부터 서로 볼 수 없는 연고니라.

 

 

 

묻되 만약 모든 부처님의 法身이 色相을 여의었다면 어찌하여 능히 색상을 나투는고?

 

답하되 곧 이 법신이 이 色相의 體인 연고로 능히 色을 나타내나니 이른바 본래부터 옴으로 빛깔과 마음이 둘이 아닌 것이니 色性이 곧 智인 연고로 色의 體가 형상이 없으니 이름을 智身이라 설함이요,

智性이 곧 색인 연고로 이름을 法身이 一切處에 두루한 것이라 설함이니라.

 

 

나타난 바의 색이 分齊가 있지 아니한지라 마음을 따라서 능히 十方世界의 한량 없는 菩薩과 한량 없는 報身과 한량 없는 莊嚴을 示現하니 各各 差別해서 다 분제가 없으나 서로 妨害하지 않는지라 이것은 심식의 분별로 능히 알지 못할지니 진여의 자재한 用의 듯인 까닭이니라.

 

다시 生滅門으로 쫓아 곧 眞如門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내 보인것이니

 

이른바

五陰을 미루어 구하면 色과 마음이며

六塵의 경계는 畢竟에 念이 없는 것이니

 

마음은 形相이 없는 지라 十方에 구할지라도 마침내 가히 얻을 수 없음이니

 

마치 사람이 迷한 고로 東을 일러 西라 하나 方位는 실로 轉하지 않는 것과이 중생도 또한 그러해서 無明의 迷인 연고로 마음을 일러 念이라 하나 마음은 實로 움직이지 않나니라.

만약 능히 觀察해서 마음이 無念인줄 알면

곧 隨順하여 眞如門에 들어 감을 얻는 연고니라.

 

 

邪執을 對治한다는 것은 일체의 邪執이 다 我見을 의지했으니 만약 我를 여의면 곧 邪執이 없어짐이니라.

이 我見이 두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둘인고?

첫째는 人我見이요, 둘째는 法我見이니라.

 

人我見이라 함은 모든 凡夫를 의지해서 다섯가지가 있음을 설했으니

 

어떤 것이 다섯인고?

 

첫째는 修多羅에 설하사대 여래의 法身이 畢竟에 寂寞하여 마치 虛空과 같다고 함을 듣고 執着함을 破하기 위한 것인줄을 알지 못하는 연고로 곧 이르되

허공이 如來의 性이라 하나니라. 어떻게 對治하는고?

허공의 상은 이것이 그 망녕된 법이라, 體에는 실답지 못함이 없음을 밝혔으니 色을 對하는 고로 있는 지라 이것이 가히 볼 相이며 마음으로 하여금 生滅케 하나니 일체의 法이 본래 이 마음이라 실로 外色이 없음이니 만약 색이 없으면 곧 虛空의 相이 없나니라.

이른바 일체의 경계가 오직 마음이 망녕되이 일어난 연고로 있음이니 만약 마음이 망녕되이 움직임을 여의면 곧 일체의 경계가 滅할 것이요. 오직 하나인 眞心이 두루하지 않는 바가 없나니 이것은 니르되 如來의 넓고 큰 性智究竟의 뜻이라 허공의 相과는 같지 않는 연고니라.

 

둘째는 修多羅에 설하사대 세간의 모든 법이 필경에 체가 공하며 乃至 涅槃 眞如의 법이라도 도한 畢竟에 空하여 본래 스스로 공한지라 일체의 상을 여의었다 함을 듣고 執着함을 파하기 위한 것인 줄을 일지 못하는 연고로

 

곧 이르되 眞如涅槃의 性도 오직 이 공한 것이라 하나니 어떻게 對治할 것인고?

진여법신은 自體가 공하지 아니하여 한량 없는 性功德이 구족한 것을 밝힌 연고니라.

 

세째는 修多羅에 說하사대 여래의 藏이 增減이 없어서 체에 일체공덕의 법을 갖추었다는 말을 듣고 알지 못하는 까닭으로 곧 이르되

여래의 藏이 色心法이 있어서 自相이 차별한다 하나니 어떻게 對治할 것인고?

오직 眞如의 뜻을 의지하여 설한 연고요, 生滅染의 뜻을 인하여 示現으로 차별을 설한 연고니라.

 

넷째는 修多羅에 설하사대 일체세간의 生死染法이 다 如來藏을 의지하여 있는지라 ,일체의 모든 법이 진여를 여의지 아니 했다 함을 듣고 알지 못하는 연고로 이르되

如來藏의 자체에 一切世間의 生死等法이 갖추어 있다 하나니 어떻게 對治할 것인고?

如來藏이 본래부터 오직 恒河沙에 지나는 等 모든 性功德이 있어 여의지도 아니하고 끊어지지도 아니 해서 眞如의 뜻과 다르지 아니한 연고니라.

恒河沙에 지나는 等 煩惱의 染法은 오직 이 망으로 있는 지라 성품이 스스로 본래 없어서 비롯 없는 세상으로부터 옴으로 일찍 如來藏으로 더불어 서로 응하지 못한 연고니 만약 如來藏이 體에 妄法이 있을 진대 하여금 證得理會함에 길이 망을 쉰다는 것이 옳은 곳이 없나니라.

 

다섯째는 修多羅에 설하사대 如來藏을 의지하는 연고로 생사가 있으며 如來藏을 의지하는 연고로 涅槃을 얻는다 함을 듣고 理解하지 못하는 까닭으로 이르되 중생이 비롯함이 있다 하며, 비롯함을 보는 까닭으로 다시 이르되

여래의 얻은 바 열반도 그 終盡이 있어 도리어 중생을 짓는다 하나니 어떻게 대치할 것인고?

여래의 장이 前際가 없는 연고로 無明의 相도 또한 비롯함이 없으니 만약 三界밖에 다시 중생이 처음으로 일어남이 있다고 말하면 곧 이것은 外道經의 설이니라.

또 如來藏이 後際가 없으니 모든 부처님의 얻은 바 涅槃도 이 로 더불어 서로 응해서 곧 後際가 없는 연고니라.

 

 

 

法我見이라 함은 二乘의 鈍根을 의지하는 연고로 如來가 다만 爲하여 人無我만 설했으나 설한 것이 究竟이 아닌지라 五陰生滅의 법이 있는 것을 보아서 생사를 두려워 하고 망령되이 열반을 취하나니 어떻게 對治할 것인고?

 

 

五陰의 법은 자성이 생하지 아니하여 곧 滅함이 없으니 本來 涅槃인 까닭이니라.

 

다시 究竟에 망녕된 집착을 여읜다는 것은, 마땅히 알라,  染法과 淨法이 다 相待하는지라, 자체의 상을 가히 말할 수 없음이니 이런 까닭으로 일체의 법이 본래부터 色도 아니요, 心도 아니며, 智도 아니요, 識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닌지라, 畢竟에 可히 相을 설할 수 없건만 言說이 있는 것은, 마땅히 알라, 如來가 善巧한 방편으로 언설을 假藉해서 중생을 引導하시니 그 旨趣는 다 念을 여의고 眞如에 돌아가게 하기 위함이니 일체의 法을 생각하면 마음으로 하여금 生滅케 해서 實智에 들지 못하게 하는 까닭이니라.

 

 

 

 

 

分別發趣道相이라 함은 이르되 일체 모든 부처님의 證得한바 道에 일체의 菩薩이 發心修行하여 趣向하는 듯인 연고니라.

 

간략히 말하면 發心에 세가지가 있으니 어떤것이 셋인고?

 

첫째는 믿음을 성취한 發心이요,

둘째는 알고 행하는 發心이요,

셋째는 證得한 發心이니라.

 

 

 

信成就發心이라 함은 어떠한 사람을 의지하며 어떠한 행을 닦아야 信成就함을 얻어 감히 능히 발심할 것인고?

이른바 不定聚의 중생이 善根을 熏習한 힘이 있는 연고로 業果報를 믿어 능히 十善을 일으키며 생사의 고를 싫어하고 無上菩提를 구하고저 하여 모든 부처님을 만나서 親히 받들어 供養하고 信心을 닦아 행하되 一萬劫을 지나서 信心을 成就하는 연고로 모든 佛菩薩이 가르쳐서 하여금 發心케 하며 或은 大悲를 쓰는 연고로 능히 스스로 발심하며 혹은 正法이 멸하고자 함을 인해서 法을 保護하는 因緣을 쓰는 연고로 능히 스스로 發心하나니 이와 같이 信心을 成就하여 發心함을 얻는 자는 正定聚에 들어가서 필경에 물러가지 아니하나니 이름이 如來種 가운데에 머물러서 正因과 서로 應함이니라.

 

만약 어떤 중생이 善根이 微少하여 久遠以來에 煩惱가 深厚함으로 비록 부처님을 만나 또한 供養을 올리나 人天種子만을 일으키며 혹은 二乘의 種子만을 일으키나니 설사 大乘을 구하는 者가 있더라도 根機가 일정하지 아니한지라

 

혹은 前進하고 혹은 後退하며

혹은 모든 부처님께 공양함이 있으되 一萬劫을 지나지 아니해서 도중에 佛緣을 만나 또한 發心함이 있나니 이른바 부처님의 色相을 보고 그 마음을 發하며 혹은 여러 스님께 供養함을 因해서 그 마음을 發하며 혹은 二乘人의 가르침을 인하여 발심하며 혹은 다른 이에게 배워서 發心하나니

이와 같은 等의 發心은 다 一定하지 아니 해서

만약 惡因緣을 만나면 혹은 문득 물러가서 二乘의 자리에 떨어짐이니라.

 

다시 믿음을 성취하여 마음을 발한다는 것은 어떠한 마음을 發한다는 것인고?

 

간략히 세가지로 설함이니 어떤 것을 셋이라 하는고?

 

첫째는 곧은 마음이니 올바른 眞如의 法을 생각하는 연고요.

둘째는 깊은 마음이니 즐거이 일체의 모든 善行을 모우는 연고요.

셋째는 大悲心이니 一切衆生의 괴로움을 빼어 주고자 하는 연고니라.

 

묻되 위에서 설하기를 法界가 一相이요,佛體가 둘이 없다 하였거늘 무슨 까닭으로 오직 眞如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다시 모든 善行을 구하고 배움을 假藉하는고?

 

답하되 譬喩하면 큰 摩尼寶가 體性이 밝고 조촐하나 鑛穢의 때가 있으니

만약 사람이 비록 보배의 性을 생각하나 方便으로써 가지 가지로 갈고 다스리지 아니하면 마침내 淸淨함을 얻을 수 없는거와 같나니

이와 같이 중생의 진여의 법도 體性이 空淨하나 한량 없는 煩惱의 때에 물듦이 있으니 만약 사람이 비록 진여를 생각하나 方便으로써 가지 가지로 熏修하지 않으면 또한 청정함을 얻지 못하나니 때가 限量이 없어서 일체의 법에 두루한 까닭으로 일체의 善行을 닦아서 對治함이니 만약 사람이 일체의 선법을 닦아 行하면 自然히 진여의 법에 歸順하는 연고니라.

 

간략히 말하면 方便에 네가지가 있으니 무엇을 넷이라 하는고?

 

첫째는 行根本方便이니 이르되

일체의 법이 自性이 無生인 것을 觀해서 妄見을 여의어 생사에 머물지 아니 하며,

일체의 법이 因緣으로 화합하여 業果를 잃지 않음을 觀해서 대비를 일으켜서 모든 복덕을 닦아 중생을 攝化해서 涅槃에 머물지 아니함이니

法性의 머무럼이 없음을 隨順하는 까닭이니라.

 

둘째는 능히 그치는 방편이니 이르되 부끄럽게 여기고 허물을 뉘우쳐 능히

일체의 惡法을 그쳐서 하여금 더 자라지 않게 함이니

法性의 모든 허물 여읜 것을 隨順하는 까닭이니라.

 

셋째는 선근을 發起해서 增長하는 方便이니 이르되 부지런히 三寶에게 供養하고

禮拜하며, 讚歎하고,  따라 기뻐하며, 모든 부처님께 勸請하나니

三寶를 愛敬하는 淳厚한 마음인 까닭으로 믿음이 增長하여 이에 능히 뜻으로 無上의 道를 구하며, 또 佛法僧의 힘에 慰護한 바를 因한 연고로 능히 業障을 消滅하여 善根을 退하지 아니함이니

法性의 痴障을 여읜 것을 隨順하는 까닭이니라.

 

넷째는 大願이 平等한 方便이니 이른바 願을 發하여 未來가 다하도록 一切衆生을 해서 하여금 남음이 없게 하며, 다 하여금 남음이 없는 열반에 구경케 함이니

法性이 끊임 없음을 수순하는 까닭이요, 法性이 광대하여 일체에 두루해서 평등하여 둘이 없으며, 피차를 염하지 아니 해서 구경에 적멸한 까닭이니라.

 

 

보살이 이 마음을 발한 까닭으로 곧 少分으로 法身봄을 얻음이니 법신을 보는 연고로 그 願力을 따라서 능히 여덟가지를 나투어서 衆生을 利益케 하나니

이른바 兜率天으로부터 퇴하여 태에 들어가 胎에 머물다가 胎에서 나와 出家하여 도를 이루어서 法輪을 굴리시고 涅槃에 드신 것이시니라.

그러나 이 보살을 아직 법신이라 이름하지 않는 것은 그 과거 무량한 세상으로부터 옴으로 有漏의 업을 능히 결단하지 못한지라, 그 나는 바를 따라서 적은 괴로움으로 더불어 서로 응하나 또한 업에 얽메이는 것이 아님이니 큰 願力의 自在로운 힘이 있는 까닭이니라.

저 修多羅 가운데 혹은 惡趣에 떨어짐이 있다고 설한 것은 그 실로 퇴함이 아닌지라 다만 초학의 보살이 아직 正位에 들지 못하여 懈怠한 者를 위해서 두려웁게 하여 저로 하여금 勇猛케 하는 까닭이니라.

또 이 보살이 한번 발심한 뒤에는 怯弱을 멀리 여의어 필경에 二乘地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으며 만약 無量無邊한 阿僧祗劫에 어려운 행을 부지런히 하여 이에 涅槃을 얻는다 함을 들을지라도 또한 怯弱치 않나니

일체의 법이 본래부터 옴으로 스스로 涅槃인 줄 믿어 아는 까닭이니라.

 

 

 

 

 

알고 행하는 發心이라 함은, 마땅히 알라,

轉勝이니 이 보살이 처음 正信으로부터 오면서 第一阿僧祗劫이 장차 만족코져 하는 연고로 眞如의 法中에서 깊이 아는 것이 앞에 나타나 닦는 바가 相을 여읜 것이니

 

法性의 체에는 俟貪이 없음을 아는 연고로 隨順하여 檀波羅蜜을 수행하며,

法性에는 물듦이 없어서 五欲의 허물 여읨을 아는 연고로 수순하여 尸波羅蜜을 수행하며,

法性에는 괴로움이 없어서 瞋惱여읨을 아는 연고로 수순하여 提波羅蜜을 수행하며,

法性에는 몸과 마음의 相이 없어서 懈怠여읨을 아는 연고로 隨順하여 毘梨耶波羅蜜을 修行하며,

法性에는 恒常 定하여 體에 어지러움이 없음을 아는 연고로 수순하여 禪波羅蜜을 수행하며,

법성에는 體가 밝아서 無明을 여읨을 아는 연고로 수순하여 般若波羅蜜을 修行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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證發心이라 함은 淨心地로 쫑아 이에 보살의 구경지에 이르도록 무슨 경계를 증득함인고? 이른바 진여인 것이니 轉識을 의지해서 설하여 경계라고 했으나 이를 증득한 이는 경계가 없음이요, 오직 진여지 뿐이니 이름을 法身이라 함이니라.

이 菩薩이 一念頃에 능히 十方無餘세계에 이르러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法輪을 전하시기를 청하나니 오직 중생을 개도하여 이익케 하기 위함이언정 문자를 의지하지 아니 했으며, 혹은 十地에 뛰어나 속히 正覺 이룸을 보인 것이니 怯弱한 중생을 위한 연고요. 혹은 내가 무량한 阿僧祗劫에 마땅히 불도를 이루리라 설하여 懈慢한 중생을 위한 연고니라.

 

능히 이와 같이 무수한 방편을 보인 것이 가히 思量하고 論議할 수 없으나 실로 보살은 種性과 근이 같으며, 發心이 같으며, 증득한 바가 또한 같아서 초과하는 법이 없으니

 

일체보살이 다 三阿僧祗劫을 지나는 연고니라. 다만 중생의 세계가 같지 아니함과 보는 바와 듣는 바의 根과 欲과 性이 다름을 따랐을새 그러므로 행한 바가 또한 差別이 있음을 보였나니라.

 

또 이보살의 발심한 상이 세가지 마음의 微細한 相이 있으니 어떠한 것을 셋이 라 하는고?

첫째는 眞心이니 분별이 없는 까닭이요.

둘째는 方便心이니 自然히 두루 행하여 중생을 이익하게 하는 까닭이요.

셋째는 業識心이니 미세하게 起滅 하는 까닭이니라.

 

또 이 보살이 功德이 成滿하여 色究竟處에 일체세간의 가장 높고 큰 몸을 보이나니 이르되 한 생각이 응한 지혜로써 무명이 문득 다한 것이 이름이 一切種智이니 자연히 不思議한 업이 있어 능히 시방에 나타나서 중생을 이익하게 하나니라.

 

묻되 허공이 갓이 없는 연고로 세계가 갓이 없음이요.

세계가 갓이 없는 연고로 중생이 갓이 없음이요.

중생이 갓이 없는 연고로 心行의 차별도 또한 다시 갓이 없으니

 

이와 같은 경계는 가히 分齊할 수 없는지라 알기가 어려우나

만약 무명을 끊으면 心想이 있을 수 없거니 어떻게 능히 알관대 이름을 일체의 種智라 하는고?

 

답하되 一切境界가 본래 한 마음인지라 想念을 여의었건마는 중생들이 망녕되이 경계를 보는 연고로 마음에 分齊가 있음이요 망녕되이 想念을 일으켜서 법성에 稱合하지 못하는 연고로 능히 알지 못하거니와 모든 부처님은 見相을 여의어서 두루하지 아니한 바가 없으시니 마음이 진실한 까닭이며, 곧 이것이 모든 법의 自性이니라

 

自體가 일체의 妄法을 드러내 비추어 大智用이 있어서 무량한 방편으로 모든 중생이 응하여 아는 바를 따라서 다 능히 가지 가지의 법의를 열어 보이나니 이런 연고로 이름을 一切種智라 함이니라.

 

 

또 묻되 만약 모든 부처님이 자연의 업이 있어서 능히 일체처에 나타나 중생을 이익케 할 진대 일체 중생이 혹 그 몸을 보거나 혹 神變을 보거나 혹 그 말씀을 들으면 利益을 얻지 못함이 없을 것이어는 어찌하여 세간에는 능히 보지 못함이 많은고?

 

답하되 모든 부처님은 법신이 평등하사 일체처에 두루하사대 뜻을 지음이 없는 연고로 자연이라 말하나 다만 중생의 마음을 의지하여 나타나나니 중생의 마음은 마치 거울과 같아서 거울에 만약 때가 있으면 色相이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음 이니 이와 같아서 중생도 마음에 만약 때가 있으면 法身이 나타나지 않는 연고 니라.

 

 

 

 

 

 

 


이미 解釋分을 說하고 다음에 修行信心分을 說하리라,

 

 

이 가운데 正定聚에 들지 못한 衆生을 의지 하는 연고로 修行信心을 說함이니라.

어떤 것이 信心이며,어떤 것이 修行인고?

간략히 說하면 信心에 네가지가 있으니 무엇을 넷이라 하는고?

 

첫째는 根本을 믿음이니 이른바 즐거이 眞如의 法을 생각하는 까닭이요,

둘째는 부처님에게 無量한 功德이 있음을 믿음이니상 親近해서 供養하고 恭敬하기를 생각하며,善根을 일으켜서 一切智 求하기를 願하는 까닭이요,

셋째는 法에 큰 利益이 있는 것을 믿음이니 항상 모든 波羅蜜 修行하기를 생각하는 까닭이요,

넷째는 僧이 能히 올바로 修行하여 自利 利他함을 믿음이니 항상 즐거이 모든 菩薩衆을 親近해서 如實한 行을 배우기를 求하는 까닭이니라.

 

 

 

修行에 다섯가지 門이 있어서 能히 이 信을 이룸이니

어떤 것이 다섯인고?

 

첫째는 布施門이요,

둘째는 持戒門이요,

셋째는 忍辱門이요,

넷째는 精進門이요,

다섯째는 止觀門이니라.

 

 

어떻게 布施門을 修行하는고?

 

만약 一切衆生이 와서 求하여 찾는 者를 보면 所有한 財物을 힘을 따라서 베풀어 주어 자기의 俟貪을 버리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기쁘게 하며,

 

만약 厄難과 恐怖와 위험스러운 逼迫을 보면 자기의 堪任할바를 따라 無畏를 베풀어 주며,

 

만약 어떤 중생이 와서 법을 구하면 자기의 능히 아는 바를 따라 방편으로 설하되 응당 名利와 恭敬을 탐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리와 이타만을 생각하여 菩提에 回向하는 연고니라.

 

 

어떻게 戒門을 수행하는고?

 

이른바 살생도 아니하고, 도둑질도 아니하고, 음행도 아니하며, 양설도 아니하고, 나쁜말도 아니하고, 거짓말도 아니하고, 꾸미는 말도 아니하며, 貪心, 嫉妬, 詐欺, 阿諂, 瞋喪, 邪見을 멀리 여읨이니라.

 

만약 出家한 자일진댄 번뇌를 折伏하기 위한 연고로 또한 응당 시끄러운 곳을 멀리 여의고 항상 고요한 데 머물러 慾心이 없고 만족할 줄 아는 頭陀等의 행을 修習하며,

내지 적은 허물이라도 마음에 두려움을 내어서 부끄러워 하여 뉘우쳐 고치고

如來께서 制定하신바 禁戒를 가벼히 여기지 아니하며,

마땅히 譏弄과 嫌疑를 막아 두호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망녕되이 죄과를 일으키지 않게 하는 연고니라.

 

 

어떻게 忍門을 修行하는고?

 

이른바 다른 사람이 괴롭게 함을 응당히 참아서 마음에 보 갚음을 품지 아니하며,

또한 마땅히 이롭게 하거나, 해롭게 하거나, 훼방 하거나, 기리거나, 칭찬하거나, 희롱하거나, 괴롭게 하거나, 즐겁게 하는 등 법을 참는 연고니라.

 

 

 

어떻게 進門을 수행하는고?

 

이른바 모든 착한 일에 마음이 게으르지 아니해서 立志가 堅强하여 怯弱함을 멀리 여의며 마땅히 과거 久遠 으로 부터 이미 옴으로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으로 큰 괴로움을 받아 이익이 없음을 생각할새 이런 연고로 응당히 모든 功德을 부지런히 닦아서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여 속히 여러가지 괴로움을 여읨이니라.

 

다시 어떤 사람이 비록 信心을 修行하나 先世로 부터 옴으로 허다한 무거운 罪惡과 業障이 있는 까닭으로 邪魔와 모든 鬼神의 惱亂한 바가 되며,

혹은 세간의 사무에 가지 가지로 얽매이게 되며, 혹은 病苦에 시달리는 바가 되어 이와 같은 등 많은 障碍가 있을새 이런 까닭으로 응당히 勇猛精勤하되

밤낮으로 六時에 모든 부처님께 禮拜해서 誠心으로 懺悔하며, 勸請하고 따라 기뻐해서 菩提에 回向하되 항상 쉬지 아니해서 모든 障碍를 면하여 善根이 增長함을 얻는 연고니라.

 

 

 

어떻게 止觀門을 修行하는고?

 

말한바 止라 것은 이르되 一切의 境界相을 그치는 것이니

奢摩他觀의 義를 隨順하는 연고요.

 

말한바 觀이라는 것은 이르되 因緣生滅相을 分別하는 것이니

毘鉢舍那觀의 의를 수순하는 연고니라.

 

어떻게 수순하는고?

이 두가지 뜻으로써 漸漸 수습하여 서로 버리지 아니 하면

止와 觀이 雙으로 앞에 나타나는 연고니라.

 

만약 止를 닦는 자일진대 고요한 곳에 머물러 端正히 앉아서 뜻을 바로 하고 氣息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形色에 의지하지 아니 하며, 空에도 의지하지 아니 하며, 地,水,火,風에도 의지하지 아니 하며, 내지 보고,듣고,깨닫고,아느 것에 의지 하지 아니해서 일체의 모든 생각을 念을 따라 다 除함이요, 또한 除하였다는 생각까지도 보냄이니 일체의 법이 본래 생각이 없는지라 생각 생각이 생하지도 아니 하며 생각 생각이 滅하지도 않나니라.

또한 마음이 밖으로 경계 생각함을 따른 뒤에 마음으로써 마음을 除한다고 말지니 마음이 만약 산란하거던 곧 마땅히 거두어 들여 바른 생각에 머물지니라.

이 바른 생각이란 것은 마땅히 알라 오직 마음 뿐이요. 바깥 경계가 없음이니 곧 다시 이 마음이 또한 자체의 모양이 없어서 생각 생각에 가히 얻지 못할지니라.

 

만약 앉고 일어남을 쫓아 가고, 오고, 나아가고,

그침과 시작하는 바가 있는 일체의 때에 항상 方便을 생각하여 수순하고 관찰해서 오래 익혀 순숙하면 그 마음이 머물음을 얻으리니

마음이 머물은 까닭으로 점점 맹리하여 수순하여 眞如三昧에 들어감을 얻어서

깊이 번뇌가 調伏되고 신심이 증장해서 속히 不退함을 이룸이니라.

 

오직 疑惑과 不信과 誹謗과 중죄업장과 我慢과 懈怠를 제함이니 이와 같은 등 사람은 능히 들어가지 못할 바니라.

 

다시 이 三昧를 의지하는 까닭으로 곧 法界가 一相인줄 앎이니 이르되 일체 모든 부처님의 法身이 중생의 몸으로 더불어 平等하여 둘이 없음이니 곧 이름이 一行三昧니라.

 

 

마땅히 알라 眞如는 이 三昧의 根本이니 만약 사람이 수행하면

점점 능히 무량한 三昧을 생하리니

 

혹 어떤 중생이 善根의 힘이 없으면 곧 모든 魔軍과 外道와 귀신의 惑亂하는 바가 되리니

혹 앉아 있는 가운데 形態를 나타내 두려웁게 하거나 혹은 端正한 남녀들의 모양을 나타내거던

마땅히 오직 마음인줄 念하면 경계가 곧 멸해서 마침내 괴롭히지 못하리라.

 

혹은 天像과 보살승을 나투며, 또한 如來像을 지어 相好가 具足하며, 혹은 다라니를 설하며, 혹은 布施, 持戒, 忍辱, 精進, 禪定, 智慧를 설하며,

혹은 평등하고 공해서 모양도 없고, 願도 없고, 怨도 없고, 親함도 없고, 因도 없고, 果도 없어서 畢竟에 空寂한 것이 이것이 참다운 열반이라 설하며,

혹은 사람으로 하여금 宿命過去의 일을 알게 하며,

또한 미래의 일을 알게 해서 他心智를 얻어 辯才가 거리낌이 없게 하며,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世間名利의 일을 貪着케 하며, 또 사람으로 하여금 자주 성을 내고 자주 기뻐해서 性品이 항상 되고 準함이 없게 하며

혹은 慈愛가 많게 하며, 졸음도 많고 疾病도 많아서 그 마음을 懈怠하게 하며,

혹은 마침내 정진할 생각을 일으켰다가 뒤에 문득 休廢하고

믿지 않는 마음을 내어서 疑心이 많고 생각이 많게하며,

혹은 본래 수승한 행을 버리고 다시 잡된 업을 닦게하며,

혹은 世事에 집착해서 가지 가지로 얽메이게 하며,

또한 능히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삼매를 얻어 少分이라도 서로 비슷하게 하나니

 

다 이것은 외도의 얻은 바라 참다운 三昧가 아니니라.

 

 

혹은 다시 사람으로 하여금 혹 하루나 혹 이틀, 혹 사흘로 이에 칠일에 이르고 定中에 머물러 자연히 향기롭고 아름답운 飮食을 얻어 먹고 몸과 마음이 快適하고 기뻐서 주리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아서 사람으로 하여금 愛着케 하며,

 

혹은 사람으로 하여금 음식에 分齊가 없어 졸지에 많이도 하고 적게도 하여 顔色이 달라지게 하나니

이 뜻을 쓰는 까닭으로 수행하는 자가 항상 응당 지혜로 관찰해서 이 마음으로 하여금 삿된 그물에 떨어지게 하지 말고 마땅히 부지런히 생각을 바르게 하여 取하지 아니하고 着하지 아니하면 곧 능히 이 모든 업장을 멀리 여의게 되리라.

 

 

응당히 알라. 외도의 있는바 三昧는 다 見愛와 我慢의 마음을 여의지 아니 했음이니 세간의 명리와 공경을 貪着한 연고니라.

 

 

眞如三昧란 것은

見相에 머물지 아니하며, 得相에 머물지 아니하며, 내지 定에서 나옴에도 또한 懈弛하거나 태만함이 없어서 있는바 번뇌가 점점 微薄해짐이니라.

 

만약 모든 범부가 이 삼매의 법을 익히지 아니 하고 여래의 種性에 얻어 들어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나니라.

 

세간의 諸禪三昧를 닦으되 흔히 味着을 일으켜서 我見에 의지하여 三界에 繫屬되면 외도로 더불어 같음이니 만약 善知識의 두호하는 바를 여의면 곧 외도의 소견을 일으키는 까닭이니라.

 

다시 精勤해서 專心으로 이 삼매를 修學하는 者는 현세에 마땅히 열가지 이익을 얻나니 어떠한 것이 열가지가 되는고?

첫째는 항상 十方의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護念하는 바가 될것이요.

둘째는 모든 魔軍과 惡鬼에 능히 두려운 바가 되지 않을 것이요.

셋째는 九十五種의 外道와 鬼神의 惑亂하는 바가 되지 않을 것이요.

넷째는 심히 깊은 법을 誹謗함을 멀리 여의어서 重罪와 業障이 점점 微薄하여 지는 것이요.

다섯째는 일체의 疑惑과 모든 나쁜 覺觀(즉 分別心)을 멸하는 것이요.

여섯째는 모든 여래의 경계에 믿음이 增長함을 얻는 것이요.

일곱째는 근심 걱정을 멀리 여의어서 생사 가운데에서도 용맹스러워서 겁내지 않을 것이요.

여덟째는 그 마음이 柔和하여 驕慢함을 버려서 타인의 괴롭게 하는 바가 되지 않을 것이요.

아홉째는 비록 定力은 얻지 못하였으나 일체의 때와 일체경계의 곳에서 곧 능히 번뇌를 減損하여 世間事를 즐기지 않을 것이요.

열째는 만약 三昧를 얻으면 外緣의 일체음성에 놀라 움직이는 바가 되지 않으리라.

 

 

다시 어떤 사람이 오직 止만 닦는 다면 마음이 가라앉게 될 것이며, 혹 懈怠함을 일으켜 모든 善을 즐기지 아니 하고 大悲를 멀리 여의나니 이런 까닭으로 관을 닦음이니라.

 

 

 

觀을 修習하는 자는 마땅히 일체세간의 有爲法이 오래 머무는 것이 없어서 須臾에 變壞하며 일체의 心行이 생각 생각에 생멸하나니 이런 까닭으로 苦인줄 관함이니

 

응당히 과거에 생각한바 모든 법이 恍惚하여 꿈과 같은줄 觀하며,

응당히 현재에 생각한바 모든 법이 마치 번갯불과 같은줄 관하며,

응당히 미래의 생각하는바의 모든 법이 마치 구름과 같아서 홀연히 일어나는 줄 관하며,

응당히 세간의 일체 유신이 다 不淨하여 가지 가지로 더러운지라 하나도 가히 즐거움이 없는 줄 관함이니라.

 

이와 같이 마땅히 생각하라. 일체의 중생이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옴으로 다 無明의 熏習한 바를 因한 연고로 마음으로 하여금 생멸케 해서 이미 일체 身心에 큰 괴로움을 받았으며 현재에도 곧 한량 없는 逼迫이 있으며,미래에 괴로운 바도 또한 分齊가 없어서 버리기도 어려웁고 여의기도 어려워서 깨달아 알지 못함이니 중생도 이와 같아서 심히 가히 불쌍함 이 됨이니라.

 

이렇게 생각을 지어서 곧 응당히 용맹하게 큰 誓願을 세우되 원컨대 내 마음이 하여금 分別을 여읜 연고로 十方에 두루해서 일체의 모든 善功德을 수행하여 미래가 다하도록 하며, 한량없는 方便으로써 일체의 苦惱衆生을 求拔해서 하여금 涅槃第一義의 樂을 얻게 하리라.

 

이와 같은 원을 일으키는 연고로 일체 때와 일체 곳에 있는 바 衆善을 몸소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따라서 修學함을 버리지 아니해서 마음에 게으름이 없나

 

오직 앉아 있을 때 止에 專念함은 除함이니라.

 

혹 나머지 일체에는 다 마땅히 할 것과 하지 못할 것을 觀察함이니라.

혹 가거나, 혹 머물거나, 혹 눕거나, 혹 일어남에 다 응당히 止와 觀을 함께 行함이니

 

이른바 비록 모든 法의 自性이 나는 것이 아닌줄 생각하나 다시 곧 因緣이 화합한 善惡의 업과 苦樂等 果報가 잃어지지도 아니하고, 무너지지도 아니 하며, 비록 因緣善惡의 業報를 생각하나 또한 곧 性을 가히 얻지 못함을 생각함이니

 

저 止를 닦는 자는 범부가 세간에 住着함을 對治하며, 능히 二乘의 怯弱한 견해를 버림이요,

저 觀을 닦는 자는 이승의 大悲心을 일으키지 않고 좁고 비열한 마음의 허물을 대치함이요, 범부의 善根 닦지 않는 것을 멀리 여읨이니라.

 

이 뜻을 쓰는 까닭으로 이 止와 觀의 門이 한가지로 서로 도와 이루어서 서로 버리고 여의지 아니 함이니 만약 止와 觀을 갖추지 못하면 곧 능히 보리의 도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다시 중생이 처음 이 법을 배워서 正信을 구하고저 하나 그 마음이 겁약한 이는 이 娑婆世界에 머물러서 스스로 능히 항상 모든 부처님을 만나서 親히 받들어 공양하지 못할까 두려워 하며, 두려워하여 이르되 信心을 가히 성취하기 어렵다 해서 뜻으로 물러가고저 하는 자는 마땅히 알라 여래께서 수승한 방편을 두어서 신심을 攝護했음이니 이르되 뜻을 오로지 하여 부처님을 念하는 因緣으로 원을 따라 他方의 佛土에 태어나서 항상 부처님을 친견해서 길이 악도를 여의나

 

저 修多羅에 설하사대 만약 사람이 오로지 西方極樂世界의 阿彌陀佛을 생각해서 닦은바 선근을 회향하여 저 세계에 나기를 구원하면 곧 왕생함을 얻는다하시니라.

항상 부처님을 보는 까닭으로 마침내 물러남이 없으며,만약 저 부처님의 진여법신을 관하여 항상 부지런히 수습하면 필경에 태어남을 얻어서 正定에 머무는 연고니라.

 

 

 

 

 

 

 


이미 修行信心分을 설했을새 다음은 勸修利益分을 설하리라.

 

 

이와 같이 摩訶衍인 모든 부처님의 秘藏을 내가 이미 다 설하였으니, 만일 어떤 중생이 여래의 심히 깊은 경계에 바른 마음을 내서 誹謗을 멀리 여의고 大乘의 도에 들어가고자 할진댄 마땅히 이 論을 가져서 思量하고 修習하면 구경에 능히 無上의 道에 이르리라.

만약 사람이 이 법을 들어 마치고 怯弱을 내지 아니 하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결정코 佛種을 이어서 반드시 모든 부처님의 授記하는 바가 되리라.

 

假使 어떤 사람이 능히 三千大千世界에 가득한 중생을 교화해서 하여금 十善을 行하게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한 食頃이라도 바로 이 법을 생각 하는 것만 같지 못함이니 앞의 공덕보다 勝過해서 가히 比喩할 수 없나니라.

 

다시 어떤 사람이 이 論을 受持해서 관찰하고 수행하되 만약 하루나 하룻밤을 하더라도 所有의 공덕이 無量無邊해서 가히 설하지 못할지니라.

 

假令 十方의 일체 모든 부처님이 각각 無量無邊한 阿僧祗劫에 그 공덕을 讚歎하여도 또한 능히 다하지 못할지니 무슨 까닭인고?

이르되 法性의 공덕이 다함이 없는 연고로 이사람의 공덕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邊際가 없나니라.

 

그 어떤 중생이 이 論 가운데에 毁謗하여 믿지 아니하면 얻는 바 죄의 果報는 무량한 劫을 지나도록 큰 괴로움을 받으리니 이런 연고로 중생은 다만 응당히 우러러 믿을 지언정 응당히 毁謗하지 말지니라.

 

自害가 깊음으로써 또한 他人을 害롭게 해서 一切三寶 의 種子를 끊음이니라.

 

일체여래가 다 이 법을 의지하사 열반을 얻은 연고며,

일체보살이 이것을 因하여 수행해서 佛智에 들어 가는 연고니라.

 

미땅히 알라

과거의 보살이 이미 이 법을 의지하여 청정한 믿음을 이루었으며,

현재의 보살이 이제 이 法을 의지하여 청정한 믿음을 이루었으며,

미래의 보살도 마땅히 이 법을 의지하여 청정한 믿음을 이룰 것이니

이런 연고로 중생이 응당 부지런히 닦아 배울지니라.

 

모든 부처님의 심히 깊고 광대한 뜻을 내 이제 隨順하여 다 가져 설하였으니 이

功德이 法性과 같음을 回向해서널리 일체의 衆生界를 利롭게 하노라.


 

 

 

 

 

 



Ⅵ. 대승기신론의 사상



· 如來藏사상 - 미혹한 마음속의 진여 "심생멸문이란 여래장에 의거하기 때문에 생멸의 마음이 있다고 한다."에서 시작되는 데, 여기에 '여래장'이라고 하는 말이 나온다. 「입의분」의 '의(義)'에 대한 설명 중 둘째 항목인 상대의 해석 속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여래장이라고 하는 말이 나오는데, 이 의미는 우리들의 망심 속에 있는 진여를 여래장이라고 하는 것이다. 부처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마음 속에 있는 진여를 여래장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여래장이라고 하는 말은 지금까지 「입의분」의 이 부분 외에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심진여문에서는 여래장이라는 말이 필요없으며, 심생멸문이기 때문에 이 여래장이라고 하는 말이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진여는 심진여문에서는 진여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와 똑같은 진여를 심생멸문에서는 여래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것은 중생의 마음 속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흔들이는 미혹한 마음 속에도 진여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권세와 명예를 구하는 마음도 좌선을 하여 선정에 들면 망심은 소멸한다. 이 선정삼매를 여래장이라고 불러도 좋다. 우리들의 망심 안에도 진여는 찬란히 빛나고 있다. 이 진여는 망심 속에 있는 진여이기 때문에 진여하고 부르면 벌을 받는다. 진여라고 할 때는 불변하고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멈출 줄 모르는 망심속의 진여를 여래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망심속에는 여래장이 있고, 이 여래장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흔들리는 생멸의 마음도 분명히 자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생멸의 마음 뿐이라면 그것이 망심이라는 사실조차 알 수 없게 된다. 흔들리는 어리석은 마음 만으로는 그것이 어리석은 마음이라고 하는 것조차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어리석은 마음 속에 진주 같이 반짝반짝 빛나는 진여, 즉 여래장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어리석은 마음의 존재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여래장은 우리들의 마음이 어리석고, 흔들리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광명인 것이다. 여래장은 물이고, 흔들리는 마음은 파도와 같은 것이다.


 

 

 

 

 

 



Ⅶ. 여래장사상과 다른 사상과의 관계



여래장은 유식설의 유가행파와 관련이 깊다. 즉 여래장사상은 유가행파 속에서 그 체계가 조직되었으며, 空思想의 방편설이라 간주된다. 그래서 여래장사상이 독립된 학파를 이룬 것은 아니지만, 中觀을 잇는 하나의 독립된 제 3의 학파라고 주장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여래장사상은 대승의 궁극적인 진리인 공의 철학을 계승하면서 공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사상체계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중관에 있어서도 공사상은 긍정과 부정의 두 측면을 모두 포괄하고 있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긍정보다는 부정의 측면에서 이해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대해 여래장사상은 공사상이 지닌 無의 측면보다는 有의 측면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근본적인 개혁이었다고 이해된다. 여래장은 현실적으로 번뇌에 쌓여 있는 중생도 그 본질에 있어는 부처와 동질적이라는 점이 강조되었으며,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여래장사상이 기본적으로 부처님의 자비의 측면을 계승하는 사상체계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런 여래장사상은 종교로서 불교의 전통 가운데 보편적인 저류를 이룸으로써 특별한 입장을 내세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여래장이 교의상 지닌 또 하나의 중요한 의의는 새로운 緣起說의 근거가 된 점이다. 윤회의 주체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이미 알라야식으로써 해명했지만, 이 알라야식은 어디서 연유하느냐는 문제가 당연히 제기된다. 이를 여래장으로써 해명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앞에서 말한 여래장사상의 기본적인 입장을 전제로 하여 여래장이 번뇌 또는 미혹의 세계 전체와 갖는 관계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여래장연기설이 전개된다. 여래장연기설에서는 중생의 마음 속에 있는 여래장의 존재 또는 존재의 근거를 주장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여래장이라는 관념을 전제로하여 그 여래장에 바탕을 두고서 어리석음과 오염 속에 싸여있는 중생의 세계 또 미혹한 마음의 영역을 어떻게 설명하느냐하는 점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Ⅷ. 주석서



이 『기신론』의 주석서들은 무려 170여종 넘는다. 이 방대한 분량은 이 논에 대한 학자들의 관심도와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원효대사의 주석서가 유명한데 이 『기신론』의 주석서만도 다섯 가지나 저술했으니, ①『대승기신론소』2권, ②『대승기신론별기』2권, ③『대승기신론종요』1권, ④『대승기신론대기』1권, ⑤『대승기신론료간』1권 등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것으로는 ①과 ②만으로 여기에 한글번역은 그 ①과 ②번에 해당되는 것으로 일찍이 중국과 일본에 널리 알려졌다. 이 중 ①은 『해동소』라고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다.




 

 

 

Ⅸ. 참고할 만한 문헌



일본에서는 島地大等( 譯大 論部) 望月信亭( 譯一 論集部5), 宇井伯壽(岩波文庫) 등이 각각 해설과 함께 번역하였다. 또 渡邊照宏·栢木弘雄이 현대어로 번역을 시도하였고, 근대의 연구로는 村上專精·望月信亨·久松眞一·武內紹晃·平川彰 등의 것이 있는데, 특히 望月의 《大乘起信論의 硏究》(《佛典講座》22, 大藏出版社, 1976)이 참고할 만하다.

국내에서의 연구는 李箕永의 《元曉思想》(弘法院, 1967), 은정희 역주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별기》(일지사)가 참고가 된다.


 

 

 



Ⅹ. 참고 문헌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별기 <일지사> 은정희

·인도 불교의 역사 (下) <민족사> 히라카와 아키라. 이호근 옮김

·불전해설사전 <민족사> 정승석

·대승기신론강의 <보련각> 오고산 편역

·대승기신론 이야기 <장승> 카마타 시게오 지음, 장휘옥 옮김

·100문 100답 불교강좌편 <대원정사> 정승석 지음

·http://211.46.71.249/cgi-bin/kyunginfo.exe?kId=K0623000

·http://211.46.71.249/cgi-bin/kyunginfo.exe?kId=K0623000

·http://jangpaul.com/handan/data/data_body.htm

 

 

 

 

 

 


http://blog.naver.com/sansanotae/221661721877





大乘起信論





 


歸命盡十方 最勝業遍知 色無礙自在 救世大悲者


온 시방이 다하도록 목숨 바쳐 귀의합니다.


가장 뛰어난 활동으로 두루 알고


몸이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하며


세상을 구제하는 대자대비한 분과


 


及彼身體相 法性眞如海 無量功德藏 如實修行等


그 몸의 체와 상인


법성 진여의 바다와


무량한 공덕을 간직하고서


여실하게 수행하는 자 등에게


 


爲欲令衆生 除疑捨耶執 起大乘正信 佛種不斷故


중생으로 하여금 의혹을 제거하고


잘못된 집착을 버리게 하여


대승의 바른 믿음을 일으켜


불종이 끊어지지 않게 하고자 하기 위한 까닭이다.


 


 


論曰에 有法이 能起摩訶衍信根이라 하니 是故로 應說하니라.


논에서 “어떤 법이 대승에 대한 믿음의 근본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니, 이 때문에 반드시 이 내용을 말해야 한다.


 


說有五分인데 云何爲五리오. 一者는 因緣分이요 二者는 立義分이요 三者는 解釋分분이요 四者는 修行信心分이요 五者는 勸修利益分이니라.


이 내용은 다섯 부분으로 설명하니 어떤 것들이 그 다섯인가. 첫째는 ‘논을 쓰게 된 인연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부분’이요, 둘째는 ‘대승의 법과 의는 무슨 내용인가를 간략하게 설명하는 부분’이요, 셋째는 ‘법과 의를 자세히 풀이하는 부분’이요, 넷째는 ‘믿음과 다섯 가지 방편을 수행하는 부분’이요, 다섯째는 ‘수행의 이익을 보여 주어 공부할 것을 권하는 부분’이다.


 


初에 說因緣分이라.


처음은 논을 쓰게 된 인연이 무엇인가를 설명한다.


 


問曰 有何因緣으로 而造此論이오. 答曰 是因緣有八種이니 云何爲八이오.


물음 : 무슨 인연으로 이 논을 지었습니까?


대답 : 이 인연에는 여덟 가지가 있으니 어떠한 것이 그 여덟인가.


 


一者는 因緣總相으로 所謂 爲令衆生이 離一切苦 得究竟樂케 하니 非求世間名利恭敬故이니라.


첫째 인연을 뭉뚱그려 한마디로 말하면 중생들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궁극의 즐거움을 얻게 하는 것이니 세간의 대가와 명예와 존경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二者는 爲欲解釋如來根本之義하여 令諸衆生이 正解不謬故이니라.


둘째 여래의 근본 뜻을 풀이하여 중생들이 모두 그 뜻을 바르게 알아 그릇됨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三者는 爲令善根成熟衆生이 於摩訶衍法에 堪任不退信故니라.


셋째 마음의 좋은 뿌리가 성숙한 중생들이 대승법을 받아들여 대승법에 대한 믿음에서 물러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四者는 爲令善根微少衆生이 修習信心故이니라.


넷째 마음의 좋은 뿌리가 적은 중생들이 믿음을 닦아 익히기를 바라는 것이다.


 


五者는 爲示方便하여 消惡業障하고 善護其心 遠離癡慢하여 出邪網故이니라.


다섯째 중생들이 방편을 배워 악업을 녹이고 그 마음을 잘 보호하여 어리석음과 잘난 체하는 마음을 멀리 여의고 삿되고 나쁜 악업의 그물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六者는 爲示修習止觀이니 對治凡夫二乘心過故이니라.


여섯째 중생들이 지행과 관행을 닦아 익혀 범부와 이승의 허물을 고치도록 바라는 것이다.


 


七者는 爲示專念方便으로 生於佛前하여 必定不退信心故이니라.


일곱째 중생들이 염불에 전념하는 방편을 배워 부처님 앞에 새롭게 태어나 굳은 믿음에서 물러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八者는 爲示利益勸修行故이니라. 有如是等因緣이니 所以로 造論하니라.


여덟째 중생들에게 수행의 이익을 보여 주어 수행을 하도록 권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논을 쓰게 된 인연이다.


 


問曰이라. 修多羅中 具有此法인데 何須重說이요. 答曰이라. 修多羅中 雖有此法이라도 以衆生根行不等이며 受解緣別이라.


물음 : 경 가운데 이 법을 다 갖추고 있는데 다시 설명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대답 : 경 가운데 이 법이 있더라도 중생의 마음과 행동이 다르고 법을 받아들여 이해하는 인연이 다르기 때문이다.


 


所謂 如來 在世에 衆生利根하고 能說之人의 色心業勝일새 圓音一演에 異類等解하며 則不須論이라. 若如來滅後라면 或有衆生 能以自力으로 廣聞而取解者이며 或有衆生 亦以自力으로 少聞而多解者이면 或有衆生 無自心力이어 因於廣論 而得解者이며 亦有衆生 復以廣論文多爲煩 心樂總持少文하여 而攝多義 能取解者라. 如是 此論은 爲欲總攝如來廣大深法無邊義故로 應說此論이니라.


말하자면 여래가 세상에 계실 때는 중생도 근기가 뛰어났고 법을 말씀하시는 분의 능력도 뛰어났기에 오롯한 소리로 한 번 말함에 여러 계층의 중생들이 똑같이 이해하여 논이 필요치 않았다. 그런데 여래께서 입멸하신 뒤에는 혼자 힘으로 불법을 많이 들어야 이해하는 중생이 있을 수 있고, 혼자 힘으로 불법을 적게 듣고도 많이 아는 중생이 있을 수 있으며, 스스로 불법을 알 수 있는 힘이 없기에 많은 논의 도움이 있어야 알 수 있는 중생도 있을 수 있으며, 또한 분량이 많은 논을 번거롭게 여기고 여러 가지 뜻을 간단하게 정리한 것을 좋아하여 적은 글에 많은 뜻이 담겨 있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중생이 있다. 이런 보기들과 같이 이 논은 여래의 깊고 넓은 법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치를 담으려고 하기에 이 논을 설해야 하는 것이다.


 


已說因緣分하고 次說立義分이라. 摩訶衍者는 總說有二種이니 云何爲二리오. 一者는 法이요 二者는 義라.


이미 ‘논을 쓰게 된 인연이 무엇인가’를 말했고 이어서 ‘대승의 법과 의는 무슨 내용인가’를 말하겠다. 대승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법이요 다른 하나는 의이다.


 


所言法者는 謂衆生心이라. 是心이면 則攝一切世間法出世間法이니 依於此心하여 顯示摩訶衍義니라. 何以故오 是心眞如相이 卽示摩訶衍體故이며 是心生滅因緣相이 能示摩訶衍自體相用故이니라.


법이란 중생심을 말한다. 이 마음이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법을 담고 있으므로 이 마음으로 대승의 뜻을 드러내 보인다. 왜냐하면 이 마음에 있는 진여의 모습이 곧 대승의 체를 보이기 때문이며, 이 마음에 있는 생멸인연의 모습이 대승 그 자체의 상과 용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所言義者는 則有三種이니 云何爲三이오. 一者는 體大이니 謂一切法이 眞如平等하여 不增減故이니라. 二者는 相大이니 謂如來藏이 具足無量性功德故이니라. 三者는 用大이니 能生一切世間出世間善因果故이며 一切諸佛이 本所乘故이며 一切菩薩이 皆乘此法하여 到如來地故니라.


의에도 세 종류가 있으니 무엇이 그 셋인가. 첫째 체대이니 모든 법이 진여로서 평등하여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상대이니 여래장이 여래의 성품에서 나오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용대이니 모든 세간과 출세간의 좋은 인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며 모든 부처님이 본디 쓰는 것이기 때문이며, 모든 보살이 이 법을 써서 모두 여래의 경지에 다다르기 때문이다.


 


已說立義分이고 次說解釋分이라. 解釋分에 有三種인데 云何爲三이오. 一者는 顯示正義하고 二者는 對治邪執이며 三者는 分別發趣道相이니라.


이미 ‘대승의 법과 의는 무슨 내용인가’를 설명했고 이어서 ‘법과 의를 자세히 풀이하는 부분’을 말하겠다. 이 부분에는 세 단락이 있는데 무엇이 그 셋인가. 첫 번째는 ‘올바른 뜻을 드러내 보인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삿된 집착을 다스린다는 것’이며 세 번째는 ‘도 닦을 마음을 내어 공부하는 모습을 분별한다는 것’이다.


 


顯示正義者는 依一心法하여 有二種門이니 云何爲二리오. 一者는 心眞如門이며 二者는 心生滅門이라. 是二種門이 皆各總攝一切法이니 此義云何리오 以是二門不相離故이니라.


‘올바른 뜻을 드러내 보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마음 법으로 말미암아 두 종류의 길이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마음에 있는 진여의 길이며 또 하나는 마음에 있는 생멸의 길이다. 이 두 길이 모두 저마다 모든 법을 거두어들이니 이 이치를 어떻게 이야기 할 것인가. 이 이치는 두 길이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心眞如者는 卽是一法界大總相法門體라. 所謂 心性이 不生不滅이니 一切諸法은 唯依妄念이어 而有差別이라. 若離心念하면 則無一切境界之相이니 是故로 一切法이 從本已來로 離言說相 離名字相 離心緣相이니 畢竟에 平等하여 無有變異하고 不可破壞이어 唯是一心이라. 故로 名眞如니라. 以一切言說이 假名無實이어 但隨妄念으로 不可得故니라.


마음에 있는 진여는 곧 하나의 법계로서 ‘전체 큰 모습으로 있는 법에 들어가는 길의 바탕’이다. 이른바 마음의 성품이 불생불멸이니 모든 법은 오직 망념으로 말미암아 차별이 있을 뿐이다. 망념을 여윈다면 경계로 나타나는 모든 모습은 없다. 이 때문에 모든 법이 본디부터 말에 있는 모습과 이름에 있는 모습과 마음이 인연한 모습을 여의어서, 마침내 평등하여 변할 것이 없고 무너뜨릴 수도 없어 오직 한 마음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진여라고 한다. 왜냐하면 모든 말은 임시로 세워진 개념이어서 실체가 없이 다만 망념을 따르므로 그 실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言眞如者란 亦無有相이니 謂言說之極으로 因言遣言이라. 此眞如體는 無有可遣이나 以一切法 悉皆眞故이며 亦無可立이니 以一切法 皆同如故니라. 當知하라. 一切法은 不可說不可念故로 名爲眞如니라.


진여란 또한 어떤 모습이 없으니 이는 최선을 다한 표현으로 말에 기대어 말을 버린 것을 말한다. 이 진여의 바탕은 버릴 수 있는 것이 없으니 모든 법이 다 참되기 때문이며, 또한 세울 수도 없으니 모든 법이 다 똑같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법은 말하거나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진여라고 한다.


 


問曰이라. 若如是義者라면 諸衆生等이 云何隨順해야 而能得入이리오. 答曰이라. 若知 一切法을 雖說이라도 無有能說可說하며 雖念이라도 亦無能念可念하면 是名隨順이라 하고 若離於念하면 名爲得入하니라.


물음 : 이런 뜻이라면 모든 중생들이 어떻게 따라가야 진여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대답 : 모든 법을 말하더라도 말하는 사람이나 말할 법이 없고, 생각하더라도 생각하는 사람이나 생각할 법이 없다는 것을 알면 이를 수순이라고 하고, 만약 망념을 여읜다면 ‘진여 그 자리에 들어갔다’고 한다.


 


復次 [此]眞如者는 依言說分別하면 有二種義이니 云何爲二오. 一者는 如實空이니 以能究竟顯實故며 二者는 如實不空이니 以有自體具足無漏性功德故이니라.


다시 이 진여는 말로 분별하면 두 가지 뜻이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참으로 진실한 공이니 마침내 진실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참으로 진실한 불공이니 그 자체에 번뇌가 사라진 여래의 성품에서 나오는 공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所言空者는 從本已來 一切染法이 不相應故니 謂離一切法差別之相이라. 以無虛妄心念故이니라. 當知하라 眞如自性은 非有相 非無相이며 非非有相 非非無相이며 非有無俱相이며 非一相 非異相이며 非非一相 非非異相이며 非一異俱相이며 乃至總說하면 依一切衆生일새 以有妄心으로 念念分別은 皆不相應故로 說爲空이라. 若離妄心이면 實無可空故이니라.


공이라고 말하는 것은 진여는 본디부터 오염된 모든 법과 서로 붙어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법의 차별된 모습을 벗어나 있는 것을 말하니 진여에는 헛된 망념이 없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진여의 자성은 모습이 있는 것도 아니요 모습이 없는 것도 아니며, 비유상도 아니요 비무상도 아니며, 유와 무를 다 함께 갖춘 모습도 아니다. 또한 같은 모습도 아니요 다른 모습도 아니며 같거나 다른 모습을 다 함께 갖춘 모습도 아니다. 나아가 전체 입장에서 말하면 모든 중생에게 기대었기에 헛된 마음으로 생각마다 분별하는 것은 모두 진여와 서로 붙어 어울리지 않으므로 공이라고 한다. 만약 헛된 마음을 벗어나면 실로 공이라고 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所言不空者는 已顯法體 空無妄故이니라. 卽是眞心이니 常恒不變하고 淨法滿足일새 故則名不空이라. 亦無有相可取이니 以離念境界이어 唯證相應故이니라.


불공이라고 말한 것은 이미 법의 바탕이 공이어서 망념이 없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곧 진심은 늘 변하지 않고 깨끗한 법이 가득 차 있기에 불공이라고 한다. 또한 취할 수 있는 어떤 모습도 없으니 망념의 경계를 벗어나 오직 이 진심을 증해야만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 隨緣(자성이 공함을 알면 산은 산 물은 물)


 


心生滅者는 依如來藏하니 故로 有生滅心이라. 所謂 不生不滅이 與生滅과 和合하여 非一非異이니 名爲阿梨耶識이니라.


마음에 있는 생멸은 여래장에 기댄다. 그러므로 생멸하는 마음이 있다. 말하자면 불생불멸이 생멸과 화합하여 같은 것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닌 것으로 이를 일러 아리야식이라고 한다.


 


此識에는 有二種義일새. 能攝一切法하고 生一切法하니라.


이 식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므로 모든 법을 거두고 모든 법을 낼 수 있다.


 


云何爲二오. 一者는 覺義이요 二者는 不覺義이니라.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각의 뜻이요 또 하나는 불각의 뜻이다.


 


所言覺義者는 謂心體離念이라. 離念相者는 等虛空界하여 無所不遍 法界一相이니 卽是如來平等法身이라. 依此法身하여 說名本覺이니라. 何以故오. 本覺義者는 對始覺義說하니 以始覺者 卽同本覺이라. 始覺義者는 依本覺故로 而有不覺하고 依不覺故로 說有始覺하니라.


각의 뜻은 마음의 바탕이 망념을 여윈 것을 말한다. 망념을 여윈 모습은 허공계와 같아 어떤 곳이라도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는 법계와 똑같은 모습이니 곧 여래의 평등한 법신이다. 이 법신으로 말미암아 본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본각의 뜻은 시각의 뜻에 맞서서 말하니 시각이 곧 본각과 같기 때문이다. 시각의 뜻은 본각으로 말미암아 불각이 있고 불각으로 말미암아 시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又 以覺心源故로 名究竟覺이라 하고 不覺心源故로 非究竟覺이니라.


또 마음의 근원을 깨달았기에 구경각이라 하고, 마음의 근원을 깨닫지 못했기에 구경각이 아니라고 한다.


 


此義는 云何오. 如凡夫人은 覺知前念起惡故로 能止後念일새 令其不起케 하여 雖復名覺이라도 卽是不覺故이니라. 如二乘觀智初發意菩薩 等은 覺於念異하고 念無異相이니 以捨麤分別執著相故로 名相似覺이니라. 如法身菩薩 等은 覺於念住하여 念無住相이니 以離分別麤念相故로 名隨分覺이니라. 如菩薩地盡은 滿足方便하여 一念相應하고 覺心初起하여 心無初相이니 以遠離微細念故로 得見心性하고 心卽常住하니 名究竟覺이니라. 是故로 修多羅에 說하되 若有衆生이 能觀無念者라면 則爲向佛智故이니라.


이 뜻은 무엇인가. 범부들은 앞생각이 나쁜 생각을 일으킨 것을 알고 뒷생각을 그칠 수 있기에 이 나쁜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을 범부각이라고 해도 이는 불각이기 때문이다. 이승의 지혜를 얻은 이나 대승의 가르침에서 처음 공부할 마음을 낸 보살들은 다른 모습인 망념을 깨달아 그 생각에 ‘번뇌로 달라진 모습’이 없으니, 이 거친 분별로 집착하는 모습을 버렸기 때문에 상사각이라고 한다. 법신 보살들은 ‘번뇌로 달라진 모습’ 이 없다는 경계에 머무는 마음을 깨달아 그 생각에 ‘나로 바뀌어 머무는 모습’ 이 없으니, 이 분별하는 거친 망념의 모습을 떠났기 때문에 수분각이라고 한다. 보살의 모든 수행을 다 한 이들은 방편을 다 갖추어 한 생각에 맞서 마음이 처음 일어나는 모습을 깨달아 그 마음에 ‘처음 일어나는 망념의 모습’이 없으니, 이 미세한 망념을 여의었기 때문에 마음의 참 성품을 볼 수 있고 그 마음이 늘 이어지니 구경각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경에서 “중생이 무념을 볼 수 있다면 부처님의 지혜로 간다” 고 말한 것이다.


 


又 心起者란 無有初相可知인데도 而言知初相者는 卽謂無念이라. 是故로 一切衆生을 不名爲覺이라 하니 以從本來 念念이 相續하여 未曾離念故로 說하되 無始無明이니라. 若得無念者라면 則知心相生住異滅하니 以無念等故로 而實無有始覺之異니라. 以四相俱時而有하여 皆無自立이어 本來平等하여 同一覺故니라.


또 ‘마음이 일어난다’고 표현하여 마음에는 알 수 있는 처음 모습이 없는데도 처음 모습을 안다고 말한 것은 곧 무념을 말한다. 이 때문에 모든 중생을 각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중생들은 본디부터 생각마다 이어져 아직 망념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시작이 없는 때부터 시작된 무명이라고 한다. 무념을 얻은 자라면 마음의 모습이 생주이멸하는 것을 아니 무념은 평등하기 때문이다.


 


[논 - 24] 오염된 법을 따르고 있는 본각


復次本覺을 隨染分別하면 生二種相이나 與彼本覺과 不相捨離라. 云何爲二오. 一者는 智淨相이고 二者는 不思議業相이라. 智淨相者는 謂依法力熏習 如實修行이어 滿足方便故로 破和合識相하고 滅相續心相하여 顯現法身 智淳淨故이니라. 此義云何오 以一切心識之相이 皆是無明이더라도 無明之相이 不離覺性일새. 非可壞 非不可壞이니 如大海水 因風 波動에도 水相風相이 不相捨離하며 而水非動性이라. 若風止滅이면 動相則滅이나 濕性不壞故이니라. 如是衆生의 自性淸淨心이 因無明風動하며 心與無明이 俱無形相이어 不相捨離라도 而心非動性이니 若無明滅이면 相續則滅하나 智性不壞故이니라. 不思議業相者란 以依智淨하여 能作一切 勝妙境界이니 所謂無量功德之相은 常無斷絶 隨衆生根하여 自然相應 種種而見일새 得利益故이니라.


다시 본각을 오염된 정도에 따라 분별하면 두 가지 모습이 생기지만 본각과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맑은 지혜의 모습’이고 또 하나는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진여의 활동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맑은 지혜의 모습’이란 법력의 훈습에 따르고 여실하게 수행하여 온갖 방편을 다 갖추기에 화합식을 깨뜨리고 이어지는 망념을 멸하여 법신으로서 순수하고 맑은 지혜를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이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마음을 분별하는 모든 모습이 다 무명이더라도 무명의 모습이 각의 성품을 여의지 않으므로 무너뜨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무너뜨릴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이는 마치 큰 바다의 물이 바람으로 물결치고 움직일 때에도 물의 모습과 바람의 모습이 서로 떨어지지는 않지만 물은 움직이는 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바람이 그치면 움직이는 물결의 모습은 사라지나 축축한 물의 성품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중생의 본디 성품인 깨끗한 마음이 무명의 바람으로 움직이며 마음과 무명의 모습이 다 형체가 없어 서로 떨어지지 않더라도, 마음은 움직이는 성품이 아니므로 무명이 없어지면 상속하는 마음이 곧 없어지나 참 지혜의 성품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진여의 활동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란 맑은 지혜에 따라 뛰어나게 오묘한 온갖 경계를 만드는 것이다. 말하자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의 모습은 끊어짐이 없이 늘 중생의 근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서로 붙어 어울리며 온갖 모습으로 나타나기에 모든 중생들이 이익을 얻는 것이다.


 


復次 覺體相者는 有四種大義일새 與虛空等하고 猶如淨鏡하니라. 云何爲四오.


다시 각 바탕의 모습은 네 종류 큰 뜻이 있기에 허공과 같고 맑은 거울과도 같다. 무엇이 그 넷인가.


 


一者는 如實空鏡이니 遠離一切心境界相하여 無法可現이니 非覺照義故니라.


첫째는 ‘참으로 진실한 공의 거울’이니, 마음의 경계에 나타나는 모든 모습을 멀리 떠나 있기에 나타날 수 있는 어떤 법도 없음을 말한다. 각의 바탕은 각조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二者는 因熏習鏡이니 謂如實不空이라 一切世間境界 悉於中現하나 不出不入하고 不失不壞하여 常住一心하니 以一切法이 卽眞實性故이며 又一切染法이 所不能染이니 智體不動하고 具足無漏하여 熏衆生故이니라.


둘째는 ‘인으로서 중생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거울’ 이니 참으로 진실한 불공을 말한다. 세간의 모든 경계가 모두 그 가운데 나타나지만 별다른 것이 각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각의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도 아니며, 각의 바탕은 잃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부서지는 것도 아니어서 늘 한 마음에 머무른다. 이는 모든 법이 곧 진실한 성품이기 때문이며 또 오염된 모든 법이 오염시킬 수 없는 곳이니, 지혜의 바탕이 움직이지 않고 어떠한 번뇌도 없이 중생을 훈습하기 때문이다.


 


三者는 法出離鏡이니 謂不空法이라. 出煩惱礙智礙 離和合相하여 淳淨明故니라.


셋째는 ‘법이 두 가지 장애를 벗어난 거울’ 이니 불공의 법을 말한다. 이는 번뇌장애와 지혜장애를 벗어나고 생멸과 어울린 모습을 떠나 맑고 깨끗하여 밝기 때문이다.


 


四者는 緣熏習鏡이니 謂依法出離故로 遍照衆生之心하여 令修善根케 하니 隨念示現故이니라.


넷째는 ‘연으로서 중생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거울’이니 ‘법이 두 가지 장애를 벗어난 거울’에 따라 두루 중생의 마음을 비추어 그들이 마음의 좋은 뿌리를 닦게 하는 것을 말한다. 각의 바탕이 중생들의 생각을 따라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所言不覺義者란 謂不如實知 眞如法一故로 不覺心起하여 而有其念이라. 念無自相이나 不離本覺일새 猶如迷人이 依方故로 迷하나 若離於方하면 則無有迷라. 衆生도 亦爾니라. 依覺故로 迷하나 若離覺性하면 則無不覺이라. 以有不覺 妄想心故로 能知名義하여 爲說眞覺이라. 若離不覺之心하면 則無眞覺 自相可說이니라.


불각의 뜻은 무엇인가. 진여의 법이 하나라는 사실을 참으로 진실하게 알지 못하기에 불각의 마음이 일어나 망념이 있게 된 것을 말한다. 망념은 자기 모습이 없으나 본각을 여의지 않는다. 마치 길을 잃은 사람이 방향에 기대기에 길을 잃었으나 방향에 대한 집착을 여의면 길을 잃음도 없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그러하다. 각에 기대기에 어리석지만 각의 성품에 대한 집착을 여읜다면 불각이 없다. 불각인 헛된 생각이 있기에 이름과 뜻을 알아 참된 각이라고 설하게 되나, 불각의 마음을 여윈다면 말할 만한 참된 각의 자기 모습도 없다.


 


復次 依不覺故로 生三種相이니 與彼不覺과 相應不離니라. 云何爲三이오.


다시 불각으로 말미암아 세 가지 모습이 생기니 불각과 서로 붙어 어울려 다닌다. 무엇이 그 세 가지인가.


 


一者는 無明業相이니 以依不覺故로 心動을 說名爲業하나 覺則不動이라. 動則有苦이니 果不離因故니라.


첫째는 무명인 업의 모습이다. 불각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움직임을 업이라고 하지만 이 사실을 깨달으면 마음이 움직이지를 않는다. 마음이 움직이면 괴로움이 있으니 결과가 원인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二者는 能見相이니 以依動故로 能見일새 不動則無見이라


둘째는 능견의 모습이다. 마음의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볼 수 있기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봄이 없다.


 


三者는 境界相이니 以依能見故로 境界妄現일새 離見則無境界니라.


셋째는 경계로 나타난 모습이다. 능견으로 말미암아 헛된 경계가 나타나기에 능견을 떠나면 경계가 없다.


 


[논 - 28] 지말 불각과 거친 모습을 밝힘


以有境界緣故로 復生六種相이니 云何爲六이오.


경계로 나타난 모습의 연이 있기에 다시 여섯 가지 모습이 생기니 무엇이 그 여섯인가.


 


一者는 智相이니 依於境界하여 心起分別 愛與不愛故이니라.


첫째는 ‘세간에 있는 지혜의 모습’이니 경계로 말미암아 마음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二者는 相續相이니 依於智故로 生其苦樂 覺心起念하여 相應不斷故이니라.


둘째는 ‘분별하는 마음이 이어지는 모습’이니 세간에 있는 지혜의 모습으로 말미암아 괴로움과 즐거움이 생기고 그것을 분별하여 망념을 일으키는 것이 서로 맞아떨어져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三者는 執取相이니 依於相續하여 緣念境界하고 住持苦樂하여 心起著故이니라.


셋째는 ‘집착하는 모습’이니 분별하는 마음이 이어지는 모습으로 말미암아 망념의 경계를 반연하고 괴로움과 즐거움에 머물러 마음이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四者는 計名字相이니 依於妄執하여 分別假名言相故이니라.


넷째는 ‘실체가 없는 이름을 붙이는 모습’이니 헛된 집착으로 말미암아 실체가 없는 이름을 짓고 말로 나타내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五者는 起業相이니 依於名字 尋名取著하여 造種種業故니라.


다섯째는 ‘업을 일으키는 모습’이니 실체가 없는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찾고 집착하여 온갖 업을 짓기 때문이다.


 


六者는 業繫苦相이니 以依業受果하여 不自在故이니라.


여섯째는 ‘업에 얽힌 괴로운 모습’이니 업 때문에 그 과보를 받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當知하라. 無明能生一切染法하니 以一切染法이 皆是不覺相故니라.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명이 오염된 모든 법을 낼 수 있으니, 오염된 모든 법이 모두 불각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復次 覺與不覺에 有二種相이니 云何爲二오. 一者는 同相이며 二者는 異相이라. [言]同相者란 譬如種種瓦器 皆同微塵性相이듯 如是無漏無明의 種種業幻이 皆同眞如性相이라.


다시 각과 불각에는 두 가지 모습이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첫째는 같은 모습이고, 둘째는 다른 모습이다. 같은 모습이란 비유하면 온갖 모양의 질그릇이 모두 똑같이 미세한 흙가루의 성품과 모습인 것처럼 무루와 무명의 온갖 허깨비와 같은 업도 모두 똑같은 진여의 성품과 모습이라는 것이다.


 


是故로 修多羅中 依於此眞如義故로 說하되 一切衆生이 本來常住 入於涅槃菩提之法이어 非可修相이며 非可作相이라 畢竟無得이고 亦無色相可見이라.


이 때문에 경에서 이 진여의 뜻에 기대어, “모든 중생이 본디부터 열반과 깨달음에 늘 들어가 있기에 이는 수행으로 이루어지거나 인연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진여의 성품과 모습은 마침내 얻을 것도 없고 또한 볼 수 있는 빛깔이도 없다.


 


而有見色相者는 唯是隨染業幻所作일새 非是智色不空之性이라 以智相無可見故이니라.


빛깔을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오염된 법을 따른 허깨비와 같은 업이 지은 것이기에 “지혜의 빛깔로서 불공‘의 성품이 아니다. 참 지혜의 모습은 볼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고 하였다.


 


[言]異相者는 如種種瓦器 各各不同이듯 如是無漏無明은 隨染幻差別이며 性染幻差別故이니라.


다른 모습이란 온갖 질그릇의 모습이 다른 것처럼 무루와 무명은 다르다. 이와 같이 무루와 무명은 오염된 법의 허깨비와 같은 차별을 따르고 있고, 그 성품은 오염된 허깨비와 같은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논 - 31] 생멸 인연에 기댄다는 뜻을 밝힘


復次 生滅因緣者란 所謂 衆生이 依心하여 意意識轉故니라.


다시 생멸의 인연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른바 중생이 마음에 기대어 의와 의식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논 - 32] 마음에 기대는 내용을 풀이함


此義云何오. 以依阿梨耶識일새 說有無明이라.


이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리야식에 기대기에 무명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논 - 33] 의가 일어나는 내용을 풀이함


不覺而起 能見能現하여 能取境界하고 起念相續하니 故로 說爲意니라. 此意는 復有五種名이니 云何爲五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상태로 한 생각이 일어나 능견과 능현으로 나누어 경계를 취하고 망념을 일으켜 이어가기 때문에 ‘의’ 가 된다고 한다. 이 의에는 다시 다섯 가지 이름이 있으니 무엇이 그 다섯인가.


 


一者는 名爲業識이 謂無明力不覺心動故이니라.


업식이라고 하니 무명의 힘으로 깨닫지 못한 상태로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二者는 名爲轉識이니 依於動心 能見相故니라.


둘째는 전식이라고 하니 움직인 마음에 기대어 모든 경계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三者는 名爲現識이니 所謂 能現一切境界니라. 猶如明鏡에 現於色像하듯 現識도 亦爾하여 隨其五塵하면 對至卽現하여 無有前後이니 以一切時 任運而起하여 常在前故니라.


셋째는 현식이라고 하니 이른바 모든 경계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밝은 거울이 사물의 모습을 나타내듯 현식도 그러하여 다섯 가지 경계를 상대하면 곧 앞뒤가 없이 나타난다. 이는 모든 삶 속에 있는 인연의 흐름에 따라 저절로 언제나 경계 앞에 있기 때문이다.


 


四者는 名爲智識이니 謂分別染淨法故니라.


넷째는 지식이라고 하니 오염된 법과 맑은 법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五者는 名爲相續識이니 以念相應不斷故며 住持過去 無量世等 善惡之業 令不失故며 復能成熟 現在未來 苦樂等報 無差違故이니라. 能令現在 已經之事를 忽然而念하고 未來之事를 不覺妄慮하니 是故로 三界虛僞 唯心所作이라. 離心則無六塵境界니라. 此義云何오. 以一切法이 皆從心起하여 妄念而生일새 一切分別은 卽分別自心이니라. 心不見心하여 無相可得이라. 當知하라. 世間의 一切境界는 皆依衆生 無明妄心하여 而得住持니라. 是故로 一切法은 如鏡中像이듯 無體可得이어 唯心虛妄이니 以心生則種種法生하고 心滅則種種法滅故이니라.


다섯째는 상속식이라고 하니 망념이 맞아 떨어져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과거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월 속에서 지은 좋은 업과 나쁜 업을 잃지 않게 하기 때문이며, 또 현재와 미래에 받을 괴로움과 즐거움의 과보를 어김없이 받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재의 마음으로 하여금 이미 지나간 일을 문득 생각하게 하고 미래의 일을 각성하지 못하고서 자기도 모르게 헛되이 걱정하게 하니, 이 때문에 삼계는 거짓으로서 오직 마음이 지을 뿐이다. 마음을 여의면 바깥의 여섯 경계가 없다. 이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모든 법이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 망념으로 생겼기에 모든 분별은 곧 자기 마음을 분별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마음은 마음을 보지 못하여 얻을 수 있는 어떤 모습도 없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세간의 모든 경계는 모두 중생의 헛된 마음인 무명에 따라 머무를 수 있다. 이 때문에 모든 법은 거울 속의 그림자와 같아 얻을 수 있는 어떤 실체도 없으며 오직 헛된 망념일 뿐이다. 마음이 생기면 온갖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온갖 법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復次 言에 意識者란 卽此相續識이 依諸凡夫 取著轉深하여 計我我所 種種妄執하고 隨事攀緣하여 分別六塵을 名爲意識이라 하고 亦名分離識이라 하며 又復說에 名分別事識이라. 此識은 依見愛煩惱增長義故니라.


다음에 말한 의식이란 무엇인가? 곧 이 상속식이 모든 범부들의 집착이 깊어짐으로 말미암아 ‘나와 내 것’이라고 헤아리는 온갖 헛된 집착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따라 반연하여 여섯 가지 경계를 분별하는 것을 의식이라고 하며, 분리식이나 ‘경계를 분별하는 식’이라고도 한다. 이 식은 견애번뇌로 말미암아 번뇌를 더 늘어나게 한다는 뜻에 기대었기 때문이다.


 


依無明熏習하여 所起識者란 非凡夫能知이며 亦非二乘智慧所覺이니 謂依菩薩從初正信發心觀察하여 若證法身이면 得少分知나 乃至 菩薩究竟地에서도 不能知盡(盡知)일새 唯佛窮了니라. 何以故오 是心은 從本已來 自性淸淨하더라도 而有無明이고 爲無明所染하여 有其染心이니라. 雖有染心이라도 而常恒不變일새 是故로 此義는 唯佛能知니라.


무명의 훈습에 따라 일어난 식은 범부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성문이나 연각의 지혜로 깨달은 바도 아니다. 이 식은 보살이 처음 바른 믿음을 내고 관찰하는 수행에 따라 법신을 증득하면 조금이나마 알 수 있지만, 보살의 구경지에서도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오직 부처님만 다 아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마음은 본디 자기 성품이 깨끗하고 맑더라도 무명이 있고, 무명에 오염되어 오염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염된 마음이 있더라도 늘 그 성품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이 뜻은 오직 부처님만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所謂 心性常無念故로 名爲不變이라.


말하자면 마음의 성품은 늘 망념이 없기에 불변이라고 한다.


 


以不達一法界故로 心不相應하고 忽然 念起하니 名爲無明이라.


하나의 법계를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주와 객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마음’이지만 문득 망념이 일어나니 이를 무명이라 한다.


 


染心者는 有六種이니 云何爲六이오.


오염된 마음에는 여섯 종류가 있으니 무엇이 그 여섯인가.


 


一者는 執相應染이니 依二乘解脫 及信相應地해야 遠離故이니라.


첫 번째는 ‘집착으로서 주와 객으로 맞대응하는 오염된 마음’이니, 성문 연각의 해탈과 믿음이 맞아 떨어지는 위치에 기대야 이 마음을 멀리 벗어나기 때문이다.


 


二者는 不斷相應染이니 依信相應地 修學方便하여야 漸漸能捨로서 得淨心地에 究竟離故니라.


두 번째는 ‘끊임없이 주와 객으로 맞대응하는 오염된 마음’ 이니 믿음이 맞아 떨어지는 위치에 기대고 방편을 닦아 익혀야 차츰차츰 버릴 수 있는 것으로서 맑은 마음의 위치를 얻어야 마침내 이 마음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三者는 分別智相應染이니 依具戒地하여 漸離하고 乃至無相方便地하여야 究竟離故니라.


세 번째는 ‘분별하는 지혜로서 주와 객으로 맞대응하는 오염된 마음’이니 절도 있는 아름다운 삶의 위치에 기대어 잘못된 삶을 차츰차츰 벗어나고 결정된 틀이 없는 방편을 쓰는 위치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이 마음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四者는 現色不相應染이니 依色自在地하여야 能離故이니라.


넷째는 ‘드러난 모습으로서 주와 객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오염된 마음’이니 몸의 활동이 자재하여 거침새가 없는 위치‘에 기대야 이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五者는 能見心不相應染이니 依心自在地하여야 能離故이니라.


다섯째는 ‘능견으로서 주와 객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오염된 마음’이니 마음이자재한 위치‘에 기대야 이 마음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六者는 根本業不相應染이니 依菩薩盡地하여 得入如來地하여야 能離故이니라.


여섯 번째는 ‘근본 업으로서 주와 객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오염된 마음’이니 보살의 수행이 다 끝나는 경계에 기대어 여래의 경계에 들어가야 이 마음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不了一法界義者는 從信相應地에 觀察學斷하여 入淨心地해야 隨分得離하며 乃至 如來地에 能究竟離故니라.


하나의 법계를 알지 못하는 이는 믿음이 맞아 떨어지는 위치에서 자기 마음을 살피고 무명을 다스려서 끊는 법을 배워 맑은 마음의 경계에 들어가야 자기 능력에 따라 무명을 벗어날 수 있으며, 나아가 여래의 경계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모든 무명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言相應義者란 謂心念法異이니 依染淨差別하여 而知相緣相同故니라. 不相應義者란 謂卽心不覺이니 常無別異이어 不同知相緣相故이니라.


‘주와 객으로 맞대응하는 마음’ 이라고 말한 뜻은 ‘마음’과 ‘마음의 작용’은 다르지만 오염된 법과 깨끗한 법의 차별에 따라 아는 모습과 연의 모습이 같기 때문이다. ‘주와 객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마음’ 이라고 말한 뜻은 마음 자체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언제나 다름이 없지만 아는 모습과 연의 모습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又 染心義者란 名爲煩惱礙라 하니 能障眞如根本智故이며 無明義者란 名爲智礙라 하니 能障世間自然業智故니라. 此義云何오. 以依染心하여 能見能現이 妄取境界하여 違平等性故이며 以一切法이 常靜하여 無有起相인데 無明不覺이 妄與法違하니 故로 不能得隨順世間一切境界하는 種種智故니라.


또 오염된 마음이란 뜻은 ‘번뇌 걸림돌’이라고 하니 진여의 근본지혜를 장애하기 때문이며, 무명이란 뜻은 ‘지혜 걸림돌’이라고 하니 세간에서 자연스럽게 활동하는 지혜를 장애하기 때문이다. 이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오염된 마음에 따라 능견과 능현이 헛되이 경계를 취하여 평등한 성품을 어기기 때문이며, 모든 법이 늘 고요하여 일어나는 모습이 없는데 무명으로 깨닫지 못한 채 헛되이 법과 어긋나므로 세간의 모든 경계를 따르는 온갖 앎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復次 分別生滅相者에 有二種이니 云何爲二오. 一者는 麤니 與心相應故이며 二者는 細니 與心不相應故이니라. 又 麤中之麤는 凡夫 境界이고 麤中之細 及細中之麤는 菩薩 境界이며 細中之細는 是佛 境界니라.


다시 생멸하는 모습을 분별하는 것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첫째는 거친 모습이니 주와 객으로 맞대응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며, 미세한 모습이니 주와 객으로 나누어지지 않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또 거친 가운데 거친 모습은 범부의 경계이고, 거친 가운데 미세한 모습과, 미세한 가운데 거친 모습은 보살의 경계이며, 미세한 가운데 미세한 모습은 부처님의 경계이다.


 


此二種生滅은 依於無明熏習而有이니 所謂 依因 依緣이라. 依因者는 不覺義故이며 依緣者는 妄作境界義故니라. 若因滅이 則緣滅이고 因滅故로 不相應心滅이며 緣滅故로 相應心滅이니라.


이 두 종류의 생멸은 무명 훈습에 따라 있으니 이른바 인에 기대고 연에 기댄다. 인에 기댄다는 것은 불각의 뜻이기 때문이며, 연에 기댄다는 것은 헛되이 경계를 만드는 뜻이기 때문이다.


 


問曰. 若心滅者라면 云何相續이며 若相續者라면 云何說究竟滅이리오. 答曰. 所言滅者는 唯心相滅이지 非心體滅이니 如風依水 而有動相이라. 若水滅者라면 則風相斷絶이어 無所依止나 以水不滅로 風相相續이라. 唯風滅故로 動相隨滅해도 非是水滅이라.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 마음을 이어가며, 이어가는 마음이라면 마침내 없어진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답하기를 없어진다는 것은 오직 생멸하는 마음의 모습만 없어지지 마음의 바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치 바람이 물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이 있는 것과 같다. 만약 물이 없어진다면 바람의 모습도 끊어져 기댈 것이 없겠지만 물은 없어지지 않기에 바람의 모습은 이어진다. 오직 바람이 사라지기에 움직이는 모습이 따라서 없어져도 물은 없어지지 않는다.


 


無明도 亦爾하여 依心體而動이라. 若心體滅이면 則衆生斷絶이어 無所依止나 以體不滅로 心得相續이라. 唯癡滅故로 心相隨滅하나 非心智滅이니라.


무명도 그러하여 마음의 바탕에 따라 움직인다. 만약 마음의 바탕이 없어진다면 중생 자체도 사라져 기댈 것이 없겠지만 마음의 바탕은 불멸이기에 그 마음은 이어갈 수 있다. 오직 어리석음만 없어지기에 생멸하는 마음의 모습이 따라서 없어지나 참마음의 지혜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復次 有四種法熏習義故로 染法淨法이 起不斷絶이라. 云何爲四오. 一者는 淨法이니 名爲眞如하고 二者는 一切染因이니 名爲無明하며 三者는 妄心이니 名爲業識하고 四者는 妄境界이니 所謂 六塵이니라.


다시 네 가지 법이 훈습하는 뜻이 있기에 오염된 법과 깨끗한 법이 끊어지지 않고 일어난다. 무엇이 그 넷인가. 첫째는 깨끗한 법이니 진여라고 하고, 둘째는 오염된 모든 법의 인이니 무명이라 하고 셋째는 헛된 마음이니 업식이라고 하고, 넷째는 헛된 경계이니 여섯 가지 경계를 말한다.


 


熏習義者는 如世間衣服이 實無於香이나 若人以香而熏習故로 則有香氣이듯 此亦如是니라. 眞如淨法이 實無於染이나 但以無明而熏習故로 則有染相이고 無明染法이 實無淨業이나 但以眞如而熏習故로 則有淨用이니라.


훈습의 뜻은 무엇인가. 마치 세간의 옷에는 실제 향기가 없지만 사람이 향으로 훈습하기에 향기가 있는 것과 같다. 이 훈습의 뜻도 이와 같다. 진여라는 깨끗한 법은 실제 오염된 것이 없으나 다만 무명으로 훈습하기에 오염된 모습이 있고, 무명이라는 오염된 법은 실제 맑은 업이 없으나 다만 진여로 훈습하기에 맑은 작용이 있다.


 


云何熏習일새 起染法不斷이오. 所謂 以依眞如法故로 有於無明이고 以有無明染法因故로 卽熏習眞如라. 以熏習故로 則有妄心이고 以有妄心일새 卽熏習無明하고 不了眞如法故로 不覺念起하여 現妄境界라.


어떻게 훈습하기에 오염된 법을 일으키는 것이 끊어지질 않는가. 이른바 진여라는 법에 따라 무명이 있고, 무명이라는 오염된 법의 인이 있기에 진여를 훈습한다. 진여를 훈습하기에 곧 헛된 마음이 있고 헛된 마음이 있기에 곧 무명을 훈습하여 진여라는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깨닫지 못한 상태로 헛된 생각이 일어나 헛된 경계를 나타낸다.


 


以有妄境界染法緣故로 卽熏習妄心하고 令其念著이 造種種業케 하여 受於一切身心等苦니라.


헛된 경계인 오염된 법의 연이 있기에 곧 헛된 마음으로 훈습하고 그 헛된 생각으로 집착하여 모든 업을 짓게 하므로 몸과 마음에 있는 온갖 괴로움 같은 것을 받는다.


 


此妄境界熏習義에 則有二種이니 云何爲二오. 一者는 增長念熏習이고 二者는 增長取熏習이니 妄心熏習義에 [則]有二種이니 云何爲二오. 一者는 業識根本熏習이니 能受阿羅漢辟支佛一切菩薩生滅苦故며 二者는 增長分別事識熏習이니 能受凡夫業繫苦故이니라.


이 헛된 경계가 훈습하는 뜻에는 곧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증장념 훈습이고, 또 하나는 증장취 훈습이다. 헛된 마음이 훈습하는 뜻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업식근본훈습’이니 아라한과 벽지불과 보살들에게 모두 생멸하는 괴로움을 받게 하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경계를 분별하는 식을 더 늘어나게 하는 훈습’이니 범부에게 업에 얽힌 괴로움을 받게 하기 때문이다.


 


無明熏習義에 有二種이니 云何爲二오. 一者는 根本熏習이니 以能成就業識義故며 二者는 所起見愛熏習이니 以能成이니 就分別事識義故니라.


무명이 훈습하는 뜻에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근본 훈습이니 업식을 이루게 하는 뜻이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일어난 견혹과 애혹이 훈습하니 경계를 분별하는 식을 이루게 하는 뜻이기 때문이다.


 


云何熏習일새 起淨法不斷이오. 所謂 以有眞如法故로 能熏習無明이라. 以熏習因緣力故로 則令妄心이 厭生死苦 樂求涅槃케 하니라. 以此妄心이 有厭求因緣故로 卽熏習眞如하여 自信己性하고 知心妄動 無前境界일새 修遠離法이니라. 以如實知 無前境界故로 種種方便으로 起隨順行하여 不取하고 不念하며 乃至久遠熏習力故로 無明則滅이라. 以無明滅故로 心無有起하고 以無起故로 境界隨滅이라. 以因緣俱滅故로 心相皆盡하니 名得涅槃 成自然業이니라.


어떻게 훈습하기에 깨끗한 법을 일으키는 것이 끊어지질 않는가. 이른바 진여라는 법이 있기에 무명을 훈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명을 훈습하는 인연의 힘으로 헛된 마음이 삶과 죽음에 있는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 찾기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이 헛된 마음이 삶과 죽음에 있는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 찾기를 좋아하는 인연이 있기에 곧 진여를 훈습하여 스스로 자기 성품을 믿고, 중생의 마음은 헛되이 움직인 것으로서 다른 경계가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헛된 마음을 멀리 벗어나는 법을 닦는 것이다. 다른 경계가 없음을 여실히 알기에 온갖 방편으로 깨달음을 이루는 수행을 일으켜 집착하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은 수행을 오랫동안 훈습한 힘 때문에 무명이 없어진다. 무명이 없어지기에 마음이 일어남이 없고, 마음이 일어남이 없기에 경계가 따라서 없어진다. 인과 연이 모두 없어지기에 마음의 모습이 다시 사라지니 열반을 얻어 자연스럽게 활동하는 업을 이루었다고 한다.


 


妄心熏習義는 有二種이니 云何爲二오 一者는 分別事識熏習이니 依諸凡夫二乘人等 厭生死苦에 隨力所能하여 以漸趣向無上道故니라. 二者는 意熏習이니 謂諸菩薩發心勇猛 速趣涅槃故이니라.


헛된 마음이 훈습하는 뜻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경계를 분별하는 식의 훈습이니, 모든 범부와 성문 연각이 삶과 죽음에 있는 괴로움을 싫어하는 마음에 따라 힘이 닿는 대로 최고의 도를 향하여 차츰차츰 나아가기 때문이다. 둘째는 의훈습이니 모든 보살이 도 닦을 마음을 내어 용맹스럽고 빠르게 열반에 나아가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眞如熏習義에는 有二種이니 云何爲二오. 一者는 自體相熏習이며 二者는 用熏習이라. 自體相熏習者란 從無始世來로 具無漏法하고 備有不思議業하여 作境界之性이라. 依此二義 恒常熏習하여 以有力故로 能令衆生이 厭生死苦하고 樂求涅槃케 하느니라. 自信己身에 有眞如法하고 發心修行하니라.


진여의 훈습의 뜻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자체 모습의 훈습이며, 또 하나는 용의 훈습이다. 자체 모습의 훈습이란 시작이 없는 때부터 무루법을 갖추고 ‘생각할 수 없는 진여의 활동’을 준비하여 경계를 만드는 성품이다. 이 두 가지 뜻이 늘 훈습하는 것에 따라 힘이 있기 때문에 중생들이 삶과 죽음에 있는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 찾기를 즐기며, 스스로 자기 몸에 진여라는 법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도 닦을 마음을 내어 수행하는 것이다.


 


問曰. 若如是義者라면 一切衆生이 悉有眞如일새 等皆熏習인데 云何有信無信이어 하여 無量前後差別이오. 皆應一時에 自知有眞如法하고 勤修方便하여 等入涅槃하리라.


이런 뜻이라면 모두 중생에게 진여가 있기에 똑같이 훈습할 것인데 어찌 믿음이 있고 없는 것과 같은 많은 차별이 있습니까. 모두가 한꺼번에 스스로 진여라는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부지런히 방편을 닦아 똑같이 열반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答曰. 眞如는 本一인데 而有無量無邊無明일새. 從本已來 自性差別이어 厚薄不同故이니라. 過恒沙等上煩惱가 依無明하여 起差別하고 我見愛染煩惱가 依無明하여 起差別이라. 如是一切煩惱는 依於無明하여 所起前後無量差別하니 唯如來能知故니라. 又 諸佛法은 有因有緣이어 因緣具足해야 乃得成辦이라. 如木中火性이 是火正因인데 若無人知하여 不假方便이면 能自燒木은 無有是處이니 衆生도 亦爾니라. 雖有正因 熏習之力이더라도 若不値遇諸佛菩薩善知識等 以之爲緣이면 能自斷煩惱入涅槃者는 則無是處니라. 若雖有外緣之力이더라도 而內淨法이 未有熏習力者라면 亦不能究竟 厭生死苦 樂求涅槃이니라. 若因緣具足者라면 所謂 自有熏習之力하고 又 爲諸佛菩薩等 慈悲願護故로 能起厭苦之心하고 信有涅槃일새 修習善根이라. 以修善根成熟故로 則値諸佛菩薩示敎利喜하고 乃能進趣向涅槃道니라.


진여는 본디 하나이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명이 있기에 본디부터 자기 성품의 차별이 두텁거나 엷어서 같지 않기 때문이다. 갠지스강 모래알 수보다 더 많은 근본번뇌가 무명에 따라 차별을 일으키고 아상과 애염 번뇌가 무명에 따라 차별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모든 번뇌는 무명에 따라 앞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차별을 일으키는 것이니 오직 여래만이 이를 알 수 있다. 또 모든 부처님의 법을 이룩하는 데는 인이 있고 연이 있으니 인연을 갖추어야 이룩할 수 있다. 이는 마치 나무 가운데 있는 불의 성품이 불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지만 사람들이 알지 못하여 볼 놓는 방편을 빌리지 못한다면 스스로 나무를 태울 수 없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그러하니 비록 열반을 이루게 하는 근본 원인이 훈습하는 힘이 있더라도 부처님과 보살과 선지식 모두를 만나 그 분들로 연을 삼지 않는다면 스스로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외연의 힘이 있더라도 안의 깨끗한 법이 훈습하는 힘이 아직 없는 이라면 끝내는 삶과 죽음에 있는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 찾기를 즐겨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인과 연을 다 갖춘다면 이른바 스스로 훈습하는 힘이 있고, 또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의 자비와 원력과 지켜주는 힘 때문에 삶과 죽음에 있는 괴로움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열반에 있는 것을 믿기에 마음의 좋은 뿌리를 닦아서 익힌다. 마음의 좋은 뿌리를 닦아서 익힌 힘이 무르익었기에 곧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의 가르침을 만나 기뻐하고 열반의 도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用熏習者란 卽是衆生外緣之力이라. 如是外緣은 有無量義이나 略說二種이니 云何爲二오. 一者는 差別緣이고 二者는 平等緣이라.


용훈습이란 곧 중생의 바깥 인연이 주는 힘이다. 이와 같은 바깥 인연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치가 있지만 간단히 말하면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차별 인연이고 또 하나는 평등 인연이다.


 


差別緣者란 此人이 依於諸佛菩薩等하여 從初發意始求道時 乃至 得佛에 於中 若見若念이 或爲眷屬父母諸親하며 或爲給使 或爲知友 或爲怨家하며 或起四攝 乃至 一切所作 無量行緣하니 以起大悲 熏習之力으로 能令衆生이 增長善根케 할새 若見若聞에 得利益故이니라.


차별인연이란 공부하는 사람이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께 기대어 처음 공부할 마음을 내 도를 찾기 시작할 때부터 부처님의 경지를 얻을 때까지, 그 가운데 보거나 생각하는 것이 부처님과 보살들이 모두 권속이 되기도 하고 부모나 친척이 되기도 하며, 또는 심부름꾼이나 아는 친구나 원수가 되기도 하며, 또는 보시ㆍ애어ㆍ이행ㆍ동사섭을 일으키기도 하며 나아가 하는 일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모든 보살행의 인연이 된다. 이와 같이 불보살님께서 일으키는 자비로운 큰마음을 가지고 훈습하는 힘으로 중생들의 좋은 뿌리가 더 늘어나게 되어 보는 이나 듣는 이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此緣은 有二種이니 云何爲二오. 一者는 近緣이니 速得度故이며 二者는 遠緣이니 久遠得度故이니라. 是近遠二緣을 分別하면 復有二種이니 云何爲二오. 一者는 增長行緣이며 二者는 受道緣이라.


이 차별 인연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가까운 인연이니 빠르게 도를 얻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먼 인연이니 오랜 시간이 지나야 도를 얻기 때문이다. 가까운 인연과 먼 인연을 분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보살행을 더 늘어나게 하는 인연’이며, 또 하나는 ‘불도를 받아들이게 하는 인연이다.


 


平等緣者는 一切諸佛菩薩이 皆願度脫一切衆生하려 自然熏習 恒常不捨니라. 以同體智力故로 隨應見聞에 而現作業이니 所謂 衆生이 依於三昧해야 乃得平等見諸佛故이니라.


평등연이란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의 원력으로 중생들을 모두 괴로움에서 건지고자 자연스럽게 이들을 훈습하여 언제나 버리지 않는 인연이다. ‘중생들이 불보살과 같은 바탕이라고 아는 데서 나오는 힘’이기에 중생들이 보고 듣는 것에 감응하여 자연스럽게 그 활동을 나타내니, 이른바 중생들이 삼매 속에 들어가야 모든 부처님을 평등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此體用熏習을 分別하면 復有二種이니 云何爲二오. 一者는 未相應이니 謂凡夫二乘 初發意菩薩等이 以意意識熏習 依信力故로 而能修行이나 未得無分別心이 與體相應故이며 未得自在業修行이 與用相應故니라. 二者는 已相應이니 謂法身菩薩이 得無分別心일새 與諸佛智用相應이라. 唯依法力 自然修行하여 熏習眞如하고 滅無明故이니라.


이 체와 용 훈습을 분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아직 맞아 떨어지지 않는 훈습이니, 범부와 이승과 처음 도 닦을 마음을 낸 보살들이 의와 의식의 훈습으로 믿음의 힘에 기대기에 수행할 수는 있으나 아직 분별이 없는 마음이 체와 맞아떨어지는 것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며, 아직 자재한 업의 수행이 용과 맞아떨어지는 것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이미 맞아떨어지는 훈습이니 법신보살이 분별이 없는 마음을 얻었기에 모든 부처님의 지혜와 용과 맞아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오직 법력에 따르고 자연스럽게 수행하여 진여를 훈습하고 무명을 없애기 때문이다.


 


復次 染法은 從無始已來 熏習不斷이라가 乃至得佛이어 後則有斷이라. 淨法 熏習은 則無有斷 盡於未來이니 此義云何오. 以眞如法이 常熏習故이니라. 妄心則滅이면 法身顯現하여 起用熏習이니 故로 無有斷이니라.


오염된 법은 시작이 없는 때부터 훈습하여 끊어지질 않다가 부처님이 되고 난 뒤에 끊어진다. 그러나 깨끗한 법의 훈습은 미래 세상이 다하도록 끊어짐이 없으니 이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진여라는 법이 늘 훈습하기 때문이다. 헛된 마음이 없어지면 법신이 드러나 용의 훈습을 일으키니 그러므로 끊어짐이 없다.


 


復次 眞如自體相者란 一切凡夫 聲聞緣覺 菩薩諸佛이 無有增減이라. 非前際生이요 非後際滅이라. 畢竟에 常恒이어 從本已來로 性自滿足 一切功德이라. 所謂 自體有大智慧光明義故이며 遍照法界義故이며 眞實識知義故이며 自性淸淨心義故이며 常樂我淨義故이며 淸涼不變自在義故니라. 具足如是 過於恒沙 不離不斷不異不思議佛法하여 乃至 滿足無有所少義故로 名爲如來藏이라 하고 亦名如來法身이라 하니라.


또 진여 자체의 모습이란 범부ㆍ성문ㆍ연각ㆍ보살ㆍ부처님 모두에게 더 보태거나 뺄 것이 없다는 것이다. 과거에 생긴 것도 아니요 미래에 없어질 것도 아니다. 끝내는 언제나 변함이 없이 본디부터 그 성품이 스스로 모든 공덕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자체에 큰 지혜 광명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법계를 두루 비추는 뜻이 있기 때문이며, 진실하게 아는 뜻이 있기 때문이며, 자기 성품에 깨끗하고 맑은 마음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상락아적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시원하고 변하지 않는 자유로움의 뜻 곧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열반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갠지스강 모래알 수보다 더 많은 불리ㆍ부단ㆍ불이ㆍ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부처님의 법을 다 갖추고 나아가 만족하여 조금도 모자란 뜻이 없기에 여래장이라고 하며 또한 여래 법신이라고 한다.


 


問曰이라. 上說 眞如 其體는 平等하여 離一切相인데 云何復說 體有如是種種功德이오.


위에서 진여 그 바탕은 평등하여 모든 모습을 벗어났다고 말했는데 어찌 다시 진여 바탕에 이처럼 온갖 공덕이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答曰이라. 雖實有此諸功德義라도 而無差別之相일새 等同一味로 唯一眞如니라. 此義云何오 以無分別로 離分別相이니 是故로 無二니라. 復以何義得說差別이오. 以依業識하여 生滅相示니라. 此云何示오. 以一切法이 本來唯心일새 實無於念이나 而有妄心이어 不覺起念하여 見諸境界故로 說無明이라. 心性不起는 卽是大智慧光明義故니라. 若心起見이면 則有不見之相이나 心性離見이면 卽是遍照法界義故니라. 若心有動이면 非眞識知이니라. 無有自性이 非常非樂非我非淨이라. 熱惱衰變이면 則不自在이며 乃至 具有過恒沙等 妄染之義니라. 對此義故로 心性無動이면 則有過恒沙等 諸淨功德相義示現이라. 若心有起이어 更見前法可念者는 則有所少이나 如是淨法의 無量功德은 卽是一心이니 更無所念이어 是故로 滿足하여 名爲法身如來之藏라 하니라.


대답하기를 실로 이 모든 공덕의 뜻이 있더라도 차별이 없는 모습이기에 똑같은 한 맛으로서 오직하나의 진여일 뿐이다. 이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분별이 없는 것으로 분별된 모습을 벗어났기 때문에 다를 것이 없다. 다시 무슨 뜻으로 차별을 말할 수 있는가. 업식에 따라 생멸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떻게 보이는가. 모든 법이 본디 오직 마음뿐이기에 실로 망념이 없는 것이나, 헛된 마음이 있어 깨닫지 못한 상태로 헛된 생각을 일으켜 모든 경계를 보기에 무명이라고 말한다. 마음의 성품이 헛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곧 큰 지혜 광명의 뜻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보는 것을 일으키면 보이지 않는 모습도 있게 되나, 마음의 성품이 보는 것을 떠나면 곧 법계를 두루 비추는 뜻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움직임이 있으면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성품이 없어 상락아정이 아니다. 뜨거운 고뇌로 쓰러지고 변화하면 자유롭지 않으며, 나아가 갠지스 강 모래알 수만큼 많은 헛되이 오염된 뜻을 갖추게 된다. 이 뜻을 상대하기에 마음의 성품이 움직임이 없으면 갠지스강 모래알 수보다 더 많은 모든 맑은 공덕의 모습이 드러난다고 말했다.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있고 다시 앞의 법을 보고 생각한다는 것은 공부가 모자라나, 이처럼 깨끗한 법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은 곧 한마음이니 다시 생각할 것이 없기에 만족하여 법신 여래장이라고 한다.


 


復次 眞如用者란 所謂諸佛如來가 本在因地에서 發大慈悲하고 修諸波羅蜜하여 攝化衆生하여 立大誓願하고 盡欲度脫 等衆生界라. 亦不限劫數하고 盡於未來에 以取一切衆生 如己身故로 而亦不取衆生相이라 此以何義오 謂如實知 一切衆生이 及與己身과 眞如平等하여 無別異故라. 以有如是大方便智로 除滅無明하고 見本法身하니 自然而有 不思議業 種種之用이라. 卽與眞如等 遍一切處하고 又亦無有用相可得이라. 何以故오 謂諸佛如來가 唯是法身智相之身이며 第一義諦이니 無有世諦境界일새 離於施作이라. 但隨衆生見聞하여 得益故로 說爲用하니라.


또 진여의 용이란 이른바 모든 부처님이 본디 인지에서 자비로운 큰마음을 일으키고 모든 바라밀을 닦아 중생을 거두어 교화하며 크나큰 서원을 세우고 중생계를 다 건져 해탈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세월을 한정하지 않고 미래세상이 다하도록 모든 중생을 자기 몸처럼 취하기에 중생이라는 모습을 취하지 않는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모든 중생과 자기 몸이 진여로서 평등하여 다를 게 없음을 실답게 아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큰 방편으로 쓰는 지혜가 있기에 무명을 없애고 본디 법신을 보니 자연히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진여의 활동으로 나타나는 온갖 작용이 있다. 곧 진여와 평등하여 모든 것에 두루하고 또한 얻을 수 있는 용의 모습도 없다. 무엇 때문인가. 모든 부처님은 오직 법신의 지혜에 있는 몸이며 최고의 진리일 뿐 세간의 이치로서 경계가 없기에 베풀고 만드는 헛된 조작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다만 중생이 보고 듣는 것을 따라 이익을 얻기에 용이라고 말할 뿐이다.


 


此用에 有二種이니 云何爲二오. 一者는 依分別事識하여 凡夫二乘이니 心所見者를 名爲應身이라. 以不知轉識現故로 見從外來하고 取色分齊하여 不能盡知故라.


이 용에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분별사식에 의한 것으로 범부와 이승의 마음으로 보는 것을 응신이라 이름하니, 이는 전식의 나타냄인 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밖에서 온 것이라 보고 색의 분제를 취하여 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二者는 依於業識하여 謂諸菩薩 從初發意 乃至 菩薩究竟地 心所見者를 名爲報身이라. 身에 有無量色이고 色에 有無量相이며 相에 有無量好라. 所住依果도 亦有無量種種莊嚴하고 隨所示現하니 卽無有邊하고 不可窮盡할새 離分齊相이라. 隨其所應하여 常能住持일새 不毁不失이니라.


또 하나는 업식에 기대어 모든 보살이 처음 도 닦을 마음을 내는 것에서부터 보살의 마지막 수행단계까지에서 본 것을 보신이라고 한 것이다. 보신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색이 있고, 그 색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모습이 있으며, 그 모습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좋은 것들이 있다. 머물고 기대는 과보도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온갖 장엄이 있고, 어떤 곳에도 나타나니 곧 그 끝이 없고 다함이 없기에 한정된 모습을 벗어난다. 그 감응한 곳을 따라 늘 머무를 수 있기에 망가지거나 잃어버릴 것이 없다.


 


如是功德이 皆因諸波羅蜜等 無漏行熏 及不思議熏之所成就하여 具足無量樂相故로 說爲報身하니라. 又 爲凡夫所見者는 是其麤色이니 隨於六道 各見不同하여 種種異類로 非受樂相일새 故로 說爲應身이라.


이와 같은 공덕이 모두 모든 바라밀과 번뇌 없는 보살행의 훈습과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훈습’으로 이루어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즐거운 모습을 다 갖추었으므로 보신이 된다고 말한다. 또 범부가 본 것은 거친 색이니 여섯 갈래 중생의 나쁜 길을 따라 저마다 보는 게 달라 온갖 유형으로 즐거운 모습을 받는 것이 아니기에 응신이 된다고 한다.


 


復次 初發意菩薩等所見者는 以深信眞如法故로 少分而見이라 知彼色相莊嚴等事가 無來無去이어 離於分齊하여 唯依心現일뿐 不離眞如니라. 此菩薩은 猶自分別이니 以未入法身位故라.


다시 처음 도 닦을 마음을 낸 보살들이 본 것은 진여라는 법을 깊이 믿기에 조금이나마 보신을 보는 것이다. 그 색의 모습과 장엄 따위의 일들은 오고감이 없으며 분별할 수 있는 한정된 모습을 떠나 오직 마음에 따라 나타날 뿐 진여를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이 보살은 아직 스스로가 분별하고 있으니 이는 법신의 위치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然이나 若得淨心하면 所見微妙 其用이 轉勝하여 乃至 菩薩地盡에 見之究竟이라. 若離業識하면 則無見相일새 以諸佛法身이 無有彼此色相迭相見故이니라.


만약 맑은 마음을 얻는다면 보는 바가 미묘하여 그 작용이 차츰차츰 뛰어나다가 보살의 수행단계가 다 끝나면 보는 경계가 다할 것이다. 업식을 벗어나면 보는 모습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서로가 색의 모습으로 서로 보이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問曰이라. 若諸佛法身 離於色相者라면 云何能現色相이오. 答曰이라. 卽此法身이 是色體故로 能現於色이라. 所謂 從本已來 色心不二니라. 以色性卽智故로 色體無形을 說名智身이라. 以智性卽色故로 說名法身 遍一切處라.


부처님의 법신이 모두 색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벗어났다면 어떻게 색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까. 답하기를 이 법신 자체가 색의 바탕이기에 색을 나타낼 수 있다. 말하자면 본디부터 색과 마음은 둘이 아니다. 색의 성품이 곧 지혜이기에 색의 바탕에 형체가 없는 것을 지혜의 몸이라고 한다. 지혜의 성품이 곧 색이기에 법신이 모든 곳에 두루한다고 한다.


 


所現之色은 無有分齊니라. 隨心 能示 十方世界 無量菩薩 無量報身 無量莊嚴 各各差別이나 皆無分齊일새 而不相妨이라. 此는 非心識分別能知이니 以眞如自在用義故이니라.


나타난 색은 분별할 수 있는 한정된 형태가 없다. 마음대로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살과 보신과 장엄들이 저마다 차별된 모습을 보일 수 있지만 모두 분별할 수 있는 한정된 형태가 없으므로 서로 방해하지 않는다. 이는 마음이 분별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진여의 자유자재한 용을 뜻하기 때문이다.


 


復次 顯示 從生滅門 卽入眞如門이라 所謂 推求五陰 色之與心하면 六塵 境界는 畢竟 無念이며 以心無形相일새 十方求之해도 終不可得이니라. 如人迷故로 謂東 爲西하나 方實不轉하듯 衆生 亦爾하여 無明迷故로 謂心 爲念하나 心實不動하니라. 若能觀察 知心無念 이면 卽得隨順하여 入眞如門故니라.


다시 생멸의 길에서 진여의 길로 들어가는 내용을 드러낸다. 이른바 오음에 있는 색과 몸을 추구해 보면, 육진 경계는 끝내 헛된 생각이 없고 마음의 모습이 없기에 아무리 찾아도 결국 얻을 수 없다. 마치 사람이 헤매기 때문에 동쪽을 서쪽이라고 하나 방향은 실로 바뀌지 않듯, 중생도 그러하여 무명의 어리석으므로 마음을 헛된 생각이라고 해도 마음은 실로 움직인 것이 아니다. 만약 관찰하여 마음에 헛된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 곧 수순하여 진여의 길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對治邪執者란 一切邪執이 皆依我見이니 若離於我하면 則無邪執이라. 是我見에 有二種이니라.


삿된 집착을 다스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삿된 집착이 모두 다 아견이니 ‘나’ 를 여읜다면 삿된 집착이 없다는 것이다. 이 아견에는 두 가지가 있다.


 


云何爲二는 一者는 人我見이고 二者는 法我見이니라.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변하지 않는다는 하나의 주재자로서 내가 존재한다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법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이다.


 


人我見者란 依諸凡夫하여 說하니 有五種이라. 云何爲五오


‘변하지 않는 하나의 주재자로서 내가 존재한다는 견해’란 모든 범부에 기대어 말한 것이니 다섯 가지가 있다. 무엇이 그 다섯인가.


 


一者는 聞하기를 修多羅 說에 如來法身은 畢竟에 寂寞하여 猶如虛空이라 함에 以不知爲破著故로 卽謂虛空 是如來性이니라. 云何對治오. 明 虛空相은 是其妄法이니 體無이어 不實이라. 以對色故로 有是可見相이어 令心生滅 케 하나 以一切色法이 本來是心이어 實無外色이니라. 若無色者면 則無虛空之相이라. 所謂 一初境界는 唯心妄起故로 有이니 若心離於妄動하면 則一切境界滅이라. 唯一眞心이 無所不遍이니라. 此는 謂如來廣大性智究竟之義하니 非如虛空相故니라.


첫째는 경에서 “여래 법신은 마침내 적막하여 허공 같다”고 한 말을 듣고 이 말이 집착을 깨뜨리기 위한 방편인 줄 알지 못하기에 곧 허공이 여래의 성품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상대해 다스릴 것인가. 허공의 모습은 헛된 법이니, 그 바탕이 없어 실답지 않다는 것을 밝혀야 한다. 색을 상대하기에 볼 수 있는 모습이 있어 마음이 생멸하게 하지만 모든 색법이 본디 마음이기에 실로 바깥의 색은 없다. 바깥의 색이 없다면 허공의 모습도 없다. 이른바 모든 경계는 오직 마음이 헛되이 일으키기에 있는 것이니, 마음이 헛된 움직임을 벗어나면 모든 경계는 사라진다. 오직 하나의 참 마음만이 어떤 곳에서도 두루하지 않은 데가 없다. 이는 여래의 크고 넓은 성품 지혜의 가장 뛰어난 뜻을 말하니, 허공과 같은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二者는 聞하기를 修多羅 說에 世間諸法이 畢竟 體空이고 乃至 涅槃眞如之法이 亦畢竟空이며 從本已來 自空이어 離一切相이라 함에 以不知爲破著故로 卽謂眞如涅槃之性이 唯是其空이라. 云何對治오. 明 眞如法身 自體가 不空이니 具足無量性功德故이니라.


둘째는 경에서 “세간의 모든 법이 끝내 그 바탕이 공이고, 열반과 진여라는 법도 끝내 공이며, 본디부터 스스로 공이어서 모든 모습을 벗어났다”고 한 말을 듣고 이 말이 집착을 깨뜨리기 위한 방편인 줄 모르기에 곧 진여와 열반의 성품은 오직 공일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상대하여 다스릴 것인가. 진여에 있는 법신 자체가 불공이라는 사실을 밝혀야 하니, 여래의 성품에서 나오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을 다 갖추었기 때문이다.


 


三者는 聞하기를 修多羅 說에 如來之藏은 無有增減이어 體備一切功德之法이라 함에 以不解故로 卽謂如來之藏에 有色心法일새 自相差別이라. 云何對治오. 以唯依眞如義하여 說故니 因生滅染義示現으로 說差別故이니라.


셋째는 경에서 “여래장은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이 없이 그 바탕에 모든 공덕을 갖추었다”고 한 말을 듣고,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곧 여래장에 색과 마음의 법이 있으므로 근본성품이 차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상대하여 다스릴 것인가. 오직 진여의 뜻만 기대어 말할 뿐이니, 생멸의 오염된 뜻이 나타남에 따라 차별을 말하기 때문이다.


 


四者는 聞하기를 修多羅 說에 一切世間 生死染法이 皆依如來藏하여 而有일새 一切諸法이 不離眞如라 함에 以不解故로 謂如來藏 自體에 具有 一切世間 生死等法이라. 云何對治오. 以如來藏은 從本已來 唯有過恒沙等 諸淨功德이어 不離不斷 不異眞如義故일새 以過恒沙等 煩惱染法은 唯是妄有일뿐 性自本無이어 從無始世來 未曾與如來藏과 相應故이니라. 若如來藏體에 有妄法이면 而使證會永息妄者는 則無是處故이니라.


넷째는 경에서 “모든 세간의 삶과 죽음으로 대두된 오염된 법이 모두 여래장에 기대어 있기에 모든 법이 진여를 여의지 않았다”고 한 말을 듣고 이해하지 못하기에, 여래장 자체에 모든 세간의 삶과 죽음과 같은 법을 다 갖추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상대하여 다스릴 것인가. 여래장은 본디부터 오직 갠지스강 모래알보다 더 많은 깨끗한 공덕만 있어 진여의 뜻을 여의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기에 갠지스강 모래알보다 더 많은 번뇌인 오염된 법은 오직 헛되이 있을 뿐 그 성품 자체가 본디 없어 시작이 없는 때부터 일찍이 여래장과 서로 붙어 어울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여래장 자체에 헛된 법이 있다면 이것을 증득하여 영원히 헛된 법을 없앤다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五者는 聞하기를 修多羅 說에 依如來藏故로 有生死하고 依如來藏故得涅槃이 以不解故로 謂衆生有始니라. 以見始故로 復謂如來所得涅槃이 有其終盡이어 還作衆生이라. 云何對治오. 以如來藏 無前際故로 無明之相도 亦無有始니라. 若說三界外 更有衆生始起者라면 卽是外道經說이니라. 又 如來藏은 無有後際이니 諸佛所得涅槃이 與之相應하여 則無後際故이니라.


다섯째는 경에서 “여래장에 기대기에 삶과 죽음이 있고, 여래장에 기대기에 열반을 얻는다”고 한 말을 듣고 이해하지 못하므로 “중생은 시작이 있다”고 하고, 시작이 있다고 생각하므로 또 “여래가 얻은 열반은 그 끝이 있어 다시 중생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상대하여 다스릴 것인가. 여래장은 과거에 시작인 어떤 시점도 없기에 무명의 모습도 시작이 없다. 만약 삼계 밖에 다시 중생이 시작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곧 외도의 경에서 말한 것이다. 또 여래장은 미래의 끝인 어떤 시점도 없으니 모든 부처님이 얻은 열반도 이와 맞서 미래의 끝인 어떤 시점도 없기 때문이다.


 


法我見者란 依二乘鈍根故로 如來 但爲說人無我하니 以說不究竟으로 見有五陰生滅之法하고 怖畏生死하여 妄取涅槃이니라. 云何對治오. 以五陰法自性이 不生이어 則無有滅이니 本來涅槃故이니라.


‘모든 법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란 무엇인가. 이승의 아둔한 근기에 기대기에 여래께서는 다만 “변하지 않는 하나의 주재자로서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만 말할 뿐이다. 그러나 말한 내용이 가장 뛰어난 법이 아니기에 이승은 오음에 생멸이 있다고 보고 삶과 죽음을 두려워하여 헛되이 열반을 취한다. 이것을 어떻게 상대하여 다스릴 것인가. 오음의 법에 자기 성품이 생겨나지 않으므로 없앨 것이 없으니 본디 열반이기 때문이다.


 


復次 究竟離妄執者란 當知이니 染法과 淨法이 皆悉相待로서 無有自相可說이라. 是故로 一切法이 從本已來 非色非心이며 非智非識이며 非有非無이어 畢竟에 不可說相이니라. 而有言說者란 當知하라. 如來善巧方便으로 假以言說 引導衆生이라. 其旨趣者는 皆爲離念하여 歸於眞如니라. 以念一切法하여 令心生滅케 하면 不入實智故이니라.


또 마침내 헛된 집착을 벗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오염된 법과 깨끗한 법은 서로 맞서 기댐으로 있게 되는 것으로서 말할 만한 근본성품이 없다는 사실을 으레 아는 것이다. 이 때문에 모든 법은 본디부터 물질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요 지혜도 아니요 알음알이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어서 끝내 말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그런데 말이 있게 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으레 알아야 한다. 여래께서는 훌륭한 방편으로 임시 말로써 중생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그 취지는 모두 헛된 생각을 떠나 진여에 돌아가기 위한 것이다. 모든 법을 생각함으로써 마음이 생멸하게 되면 참된 지혜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分別發趣道相者란 謂一切諸佛 所證之道 一切菩薩 發心修行趣向義故이니라.


‘도 닦을 마음을 내어 공부하는 모습을 분별’한다는 것은 모든 부처님께서 증득한 도를 모든 보살이 도 닦을 마음을 내어 수행해 나간다는 뜻을 말하는 것이다.


 


略說發心이면 有三이니 種 云何爲三이오. 一者는 信成就發心이고 二者는 解行發心이며 三者는 證發心이니라.


간단히 도 닦을 마음 내는 것을 말하면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셋인가. 첫째는 ‘믿음을 이룩하여 도 닦을 마음을 내는 것’이고, 둘째는 ‘알고 행하면서 도 닦을 마음을 내는 것’이며, 셋째는 ‘증득하여 도 닦을 마음을 내는 것이다.


 


信成就發心者란 依何等人하고 修何等行하여 得信成就하여야 堪能發心인가. 所謂 依不定聚衆生이 有熏習善根力故로 信業果報하고 能起十善하며 厭生死苦하여 欲求無上菩提하려 得値諸佛하여 親承供養하고 修行信心하며 經一萬劫에 信心成就故이니라. 諸佛菩薩이 敎令發心케 하며 或以大悲故로 能自發心하며 或因正法欲滅로 以護法因緣으로 能自發心하니라.


‘믿음을 이룩하여 도 닦을 마음을 낸다’는 건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사람에게 기대고 어떤 행을 닦아 믿음을 이룩해야 도 닦을 마음을 낼 수 있는가. 이른바 ‘어떤 길로 갈지 결정되지 않은 중생’이 마음의 좋은 뿌리를 훈습한 힘이 있는 것에 기대기에 업의 과보를 믿고 열 가지 좋은 행을 일으켜, 삶과 죽음에 있는 괴로움을 싫어하고 깨달음을 구하고자 모든 부처님을 만나 몸소 공양하고 믿음을 수행하며 일만 겁을 지나 믿음을 이룩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이 그들을 가르쳐 도 닦을 마음을 내게 하며 때로는 자비로운 큰마음의 힘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도 닦을 마음을 내며, 때로는 바른 법이 멸하려고 할 때 법을 보호하고자 하는 인연으로 도 닦을 마음을 내는 것이다.


 


如是 信心 成就하여 得發心者는 入正定聚에 畢竟不退이니 名住如來種中에 正因相應하니라. 若有衆生 善根微少라면 久遠已來 煩惱深厚일새 雖値於佛 亦得供養이더라도 然이나 起人天種子하며 或起二乘種子니라. 設有求大乘者라도 根則不定일새 若進若退니라. 或有供養諸佛하고 未經一萬劫 於中에 遇緣일새 亦有發心이니라. 所謂 見佛色相하고 而發其心하며 或因供養衆僧으로 而發其心하여 或因二乘之人이 敎令發心케 하며 或學他 發心하니라. 如是等發心은 悉皆不定일새 遇惡因緣하면 或便退失 墮二乘地하니라.


이처럼 믿음을 이룩하여 도 닦을 마음을 낸 사람들은 반드시 도를 이루게 할 길로 들어가 끝내 도 닦는 공부에서 물러나지 않으니 이를 여래의 씨앗 가운데 머물러 바른 인과 맞아떨어진다고 한다. 만약 어떤 중생이 마음의 좋은 뿌리가 적다면 아득히 먼 옛날부터 번뇌가 매우 두텁기에 부처님을 만나 공양하더라도 하늘의 신이나 인간의 씨앗을 일으키며 또는 이승의 씨앗을 일으킨다. 설사 대승을 찾는 사람이 있더라도 근기가 일정하지 않으므로 어떤 때는 공부에 나아가고 어떤 때는 공부에서 물러난다. 때로는 부처님을 공양하고 아직 일만 겁이 지나지 않았어도 그 가운데 좋은 인연을 만나기에 또한 도 닦을 마음을 내기도 한다. 이른바 부처님의 겉모습을 보고 도 닦을 마음을 일으키며 때로는 많은 스님들을 공양하므로 도 닦을 마음을 일으키며 때로는 이승의 가르침으로 도 닦을 마음을 일으키며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배워 도 닦을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도 닦을 마음을 낸 것은 아직은 모두 굳은 마음들이 아니므로 나쁜 인연을 만나면 때로는 도에서 물러나 이승의 위치에 떨어지게 된다.


 


復次 信成就發心者은 發何等心인고 略說하면 有三種이니 云何爲三이오. 一者는 直心이니 正念眞如法故요 二者는 深心이니 樂集一切諸善行故요 三者는 大悲心이니 欲拔一切衆生苦故이니라.


다시 믿음을 이룩하여 도 닦을 마음을 낸다는 것은 어떤 마음을 내는 것인가. 간단히 말하면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셋인가. 첫째는 곧은 마음이니 바로 진여라는 법을 생각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깊은 마음이니 좋은 모든 행을 즐겨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자비로운 큰마음이니 중생의 모든 괴로움을 없애려고 하기 때문이다.


 


問曰 上說에 法界一相 佛體無二인데 何故오. 不唯念眞如하고 復假求學諸善之行이리오. 答曰 譬如大摩尼寶 體性이 明淨이나 而有礦穢之垢니라. 若人이 雖念寶性라도 不以方便 種種磨治라면 終無得淨이니라. 如是 衆生의 眞如之法도 體性이 空淨이나 而有無量煩惱染垢니라. 若人이 雖念眞如라도 不以方便 種種熏修라면 亦無得淨이니라. 以垢無量遍一切法故로 修一切善行하여 以爲對治니라. 若人이 修行一切善法하면 自然歸順眞如法故니라.


물음 : 위에서 법계는 하나의 모습이며 부처님의 바탕에 둘이 없다고 말했는데 무슨 까닭에 오직 진여만 생각하지 않고 다시 온갖 좋은 행을 찾아 배워야 합니까.


답 : 비유하면 큰 여의주의 바탕이 맑고 깨끗하나 잘 다듬어지지 않은 것과 같다. 다른 사람들이 여의주의 성품을 생각하더라도 온갖 기술로 갈고 다듬지 않는다면 끝내 깨끗해질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생의 진여라는 법도 그 바탕이 텅 빈 듯 깨끗하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번뇌가 있다. 사람들이 진여를 생각하더라도 온갖 방편으로 그 진여를 닦아 익히지 않는다면 또한 깨끗해질 수 없는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번뇌가 모든 법에 두루하기에 좋은 행을 모두 닦아 이 힘으로 번뇌를 다스려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좋은 모든 법을 수행하면 저절로 진여라는 법을 따르기 때문이다.


 


略說方便하면 有四種이니 云何爲四오. 一者는 行根本方便이라. 謂 觀一切法에 自性이 無生하고 離於妄見하여 不住生死니라. 觀一切法이 因緣和合으로 業果不失하고 起於大悲 修諸福德하여 攝化衆生하며 不住涅槃이니 以隨順法性無住故이니라.


간단히 방편을 말하자면 네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넷인가. 첫째는 ‘근본을 행하는 방편이다’ 이는 모든 법의 자기 성품이 생겨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보고 헛된 견해를 벗어나 삶과 죽음에 머물지 않으며 모든 법은 인연의 어울림으로 업과를 잃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고 자비로운 큰마음을 일으켜서 모든 복덕을 닦아 중생을 거두고 교화하여 열반에 머물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는 법의 성품에 수순하여 머무름이 없기 때문이다.


 


二者는 能止方便이라. 謂 慚愧悔過하여 能止一切惡法일새 不令增長이니 以隨順法性 離諸過故이니라.


둘째는 ‘허물을 멈출 수 있는 방편’이다. 이는 자기 허물을 뉘우치고 부끄러워하여 나쁜 모든 법을 멈추고 더 키우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는 법의 성품에 수순하여 모든 허물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三者는 發起善根하여 增長方便이라 謂 勤供養 禮拜三寶하고 讚歎隨喜하여 勸請諸佛하니라. 以愛敬三寶淳厚心故로 信得增長하여 乃能志求無上之道니라. 又 因佛法僧力所護故로 能消業障하고 善根不退하니 以隨順法性이 離癡障故이니라.


셋째는 ‘마음의 좋은 뿌리를 일으켜 늘리는 방편’이다. 이는 부지런히 삼보를 공양ㆍ예배ㆍ찬탄ㆍ기뻐하며 모든 부처님에게 법을 말씀하시기를 청하는 것이니, 삼보를 아끼고 공경하는 순수한 마음 때문에 믿음이 커져 무상도를 구하려고 하며 또 불ㆍ법ㆍ승 삼보의 힘이 보호하기 때문에 업장을 녹여 마음의 좋은 뿌리에서 물러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이는 법의 성품에 수순하여 어리석음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四者는 大願平等方便이라. 所謂 發願 盡於未來토록 化度一切衆生하여 使無有餘 皆令究竟無餘涅槃케 하니 以隨順法性 無斷絶故이니라. 法性은 廣大하고 遍一切衆生하여 平等無二이어 不念彼此하고 究竟寂滅故이니라.


넷째는 ‘큰 원력의 평등한 방편’이다. 말하자면 미래 세상이 다하도록 모든 중생을 교화하여 빠짐없이 모두 무여열반을 얻게 발원하는 것이다. 이는 법의 성품에 수순하여 단절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법의 성품은 크고 넓어 모든 중생에게 두루하고 평등하여 다를 것이 없어 나와 남의 경계를 생각하지 않는 가장 뛰어난 적멸이기 때문이다.


 


菩薩이 發是心故로 則得少分 見於法身이고 以見法身故로 隨其願力하여 能現八種利益衆生이니라. 所謂 從兜率天에서 退하여 入胎 住胎 出胎 出家 成道 轉法輪하며 入於涅槃하니라. 然이나 是菩薩 未名法身은 以其過去無量世來有漏之業을 未能決斷일새 隨其所生하여 與微苦相應이니라.


보살이 이 마음을 내기에 조금이나마 법신을 볼 수 있고 법신을 보기에 그 원력대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여덟 가지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 이른바 도솔천에서 내려와 모태에 들어가 머물다 모태에서 나와 출가하여 도를 이루고 법을 설파하다가 열반에 들어가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 보살을 법신이라고 하지 않는 것은 과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월 속의 유루업을 아직 끊어버릴 수 없으므로 태어난 곳에서 미세한 괴로움과 서로 붙어 어울리기 때문이다.


 


亦非業繫이니 以有大願自在力故라. 如修多羅中 或說에 有退墮惡趣者는 非其實退라 하니 但爲初學菩薩로서 未入正位하여 而懈怠者가 恐怖하여 令使勇猛故이니라. 又 是菩薩이 一發心後 遠離怯弱하고 畢竟에 不畏墮二乘地라. 若聞 無量無邊阿僧祇劫을 勤苦難行해야 乃得涅槃이라도 亦不怯弱이라. 以信知一切法 從本已來自涅槃故이니라.


이는 또한 업에 얽힌 괴로움은 아니니 큰 원력의 자유자재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경에서 때로는 “방편으로 나쁜 길로 물러나 있음은 진실로 공부에서 물러난 것이 아니다”고 말하는 내용과 같으니, 그 뜻은 다만 처음 도를 배우는 보살로서 아직 바른 위치에 들지 못하고 게으른 자들이 두려워하기에 그들에게 용맹심을 내게 하기 위한 것이다. 또 이 보살은 도 닦을 마음을 한 번 낸 뒤에는 두려운 마음을 멀리 벗어나 마침내 이승의 경계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월 동안 어려운 공부를 부지런히 해야 열반을 얻는다는 소리를 듣고도 약해지거나 두려워하지를 않는다. 이는 모든 법이 본디 열반임을 믿고 알기 때문이다.


 


解行發心者란 當知하라. 轉勝이니 以是菩薩은 從初正信已來於第一阿僧祇劫에 將欲滿故일새 於眞如法中에 深解現前하여 所修離相이라.


‘알고 행하면서 도 닦을 마음을 내는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수행하는 보살이 ‘보살이 닦아야 할 열 가지 행’을 완성하고 ‘보살이 닦아야 할 열 가지 회향’하는 마음을 내는 것으로서 ‘믿음을 이룩하여 도 닦을 마음을 내는 것‘보다 경계가 더욱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보살은 처음 바른 믿음에서 첫 번째 아승기겁을 거쳐 수행이 오롯해지려고 하기에 진여법의 진실에 대해 깊은 이해가 드러나 닦는 수행이 생멸 변화하는 겉모습을 벗어난다.


 


以知法性體 無慳貪故 隨順하여 修行檀波羅蜜하고 以知法性無染이어 離五欲過故로 隨順하여 修行尸波羅蜜하고 以知法性無苦이어 離瞋惱故로 隨順하여 修行羼提波羅蜜하고 以知法性無身心相이어 離懈怠故로 隨順하여 修行毘梨耶波羅蜜하며 以知法性常定이어 體無亂故로 隨順하여 修行禪波羅蜜하고 以知法性體明이어 離無明故로 隨順하여 修行般若波羅蜜하니라.


그리하여 법의 성품에 있는 바탕은 인색하거나 탐욕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에 수순하여 보시바라밀을 수행하고, 법의 성품에 있는 바탕은 오염될 것이 없어 오욕의 허물을 떠난 줄 알기에 이에 수순하여 지계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의 성품에 있는 바탕은 괴로움이 없이 없어 성내거나 번거로움을 벗어난 줄 알기에 이에 수순하여 인욕바라밀을 수행하고, 법의 성품에 있는 바탕은 몸과 마음의 모습이 없어 게으름을 벗어난 줄 알기에 이에 수순하여 정진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의 성품에 있는 바탕은 늘 안정되어 그 바탕에 어지러움이 없는 줄 알기에 이에 수순하여 선정바라밀을 수행하고, 법의 성품에 있는 바탕은 밝아 무명을 여읜 줄 알기에 이에 수순하여 반야바라밀을 수행한다.


 


證發心者란 從淨心地 乃至菩薩究竟地에서 證何境界리오. 所謂 眞如니라. 以依轉識하여 說爲境界하나 而此證者는 無有境界일새 唯眞如智이니 名爲法身이니라. 是菩薩은 於一念頃에 能至十方無餘世界하여 供養諸佛하고 請轉法輪이라. 唯爲開導하여 利益衆生이나 不依文字니라. 或示超地 速成正覺은 以爲怯弱衆生故이며 或說 我於無量阿僧祇劫에 當成佛道는 以爲懈慢衆生故이니라.


‘증득하여 도 닦을 마음을 내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정심지에서 보살의 구경지까지 무슨 경계를 증득한 것인가. 이른바 진여이다. 전식으로 말미암아 경계를 말하지만 깨달음은 경계가 없고 오직 진여에 있는 지혜뿐이므로 법신이라고 한다. 이 보살은 한 생각에 빠짐없이 시방세계에 도달하여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고 법을 말씀하시기를 청한다. 이것이 오직 중생들을 가르쳐 이익을 주고자 함이나 글자에 기대지는 않는다. 때로는 ‘보살이 닦아야 할 열 가지 마지막 수행단계’를 뛰어넘어 빠르게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약하거나 겁이 많은 중생들을 위하기 때문이다.


 


能示如是 無數方便은 不可思議하나 而實菩薩種性根等하고 發心則等하며 所證亦等하여 無有超過之法이라. 以一切菩薩이 皆經三阿僧祇劫故이니라. 但隨衆生 世界不同하여 所見所聞의 根欲性이 異이니 故로 示 所行亦有差別이니라. 又 是菩薩發心相者는 有三種心 微細之相이라. 云何爲三이오. 一者는 眞心이니 無分別故요 二者는 方便心이니 自然 遍行하여 利益衆生故요 三者는 業識心이니 微細起滅故이니라.


이처럼 무수한 방편을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지만 실로 보살의 수행으로 반드시 깨달을 수 있는 이는 근기가 평등하고, 도 닦을 마음을 낸 것도 평등하며 깨달은 것도 평등하여 이를 뛰어넘는 법이 없다. 모든 보살이 다 세 아승기겁을 거치기 때문이다. 또 이 보살이 도 닦을 마음을 낸 모습에는 미세한 모습을 보이는 세 가지 마음이 있다. 무엇이 그 셋인가. 첫째는 ‘참 마음’이니 분별이 없기 때문이요. 둘째는 ‘방편으로 쓰는 마음’이니 스스럼이 없이 두루 행하여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기 때문이요, 셋째는 마음은 ‘업식의 마음’이니 미세하게 생멸하기 때문이다.


 


又 是菩薩은 功德成滿이어 於色究竟處에서 示一切世間 最高大身이라. 謂以一念相應慧로 無明頓盡이니 名一切種智니라. 自然而 有 不思議業일새 能現十方하여 利益衆生하니라.


또 이 보살은 공덕이 다 이루어져 색구경처에서 모든 세간 가운데 가장 높고 큰 몸을 보인다. 이는 한 생각에 진여와 맞아떨어진 지혜로 무명이 단숨에 사라진 것을 말하니 ‘모든 것을 낱낱이 아는 지혜’라고 한다.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진여의 활동이 있기에 시방세계에 나타나 중생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다.


 


問曰. 虛空無邊故로 世界無邊이고 世界無邊故로 衆生無邊이고 衆生無邊故로 心行差別이 亦復無邊이라. 如是境界 不可分齊일새 難知難解니라. 若無明斷이면 無有心想인데 云何能了일새 名一切種智리오. 答曰. 一切境界는 本來一心으로 離於想念이나 以衆生妄見境界故로 心有分齊니라. 以妄起想念하여 不稱法性故로 不能決了니라. 諸佛如來는 離於見想이어 無所不遍이니라. 心眞實故로 卽是諸法之性이라. 自體顯照 一切妄法하니 有大智用 無量方便이니라. 隨諸衆生所應得解하여 皆能開示 種種法義이니 是故로 得名一切種智니라.


물음 : 허공이 끝이 없으므로 세계가 끝이 없고, 세계가 끝이 없으므로 중생이 끝이 없고, 중생이 끝이 없으므로 그 마음의 차별도 끝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경계를 한정지을 수 없으므로 알고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무명이 끊어졌다면 마음에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알 수 있기에 ‘모든 것을 낱낱이 아는 지혜’라고 부릅니까.


답 : 모든 경계는 본디 한마음으로서 상념을 벗어나지만 중생들이 헛되이 경계를 보기에 마음에 분별할 수 있는 한정된 모습이 있다. 헛되이 상념을 일으켜 법의 성품과 들어맞지 않기 때문에 분명히 알 수 없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은 헛된 견해와 생각을 벗어나 어떤 곳이라도 그 지혜가 두루하지 않는 곳이 없으니 마음이 진실하기 때문이며 모든 법의 성품이 그러하다. 자체가 헛된 모든 법을 환하게 비추는 큰 지혜의 작용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방편이 있어 모든 중생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곳을 따라 모두 온갖 법의 이치를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낱낱이 아는 지혜’라고 부른다.


 


又 問曰. 若諸佛이 有自然業이어 能現一切處 利益衆生者라면 一切衆生이 若見其身 若睹神變 若聞其說하여 無不得利인데 云何世間에 多不能見이리오. 答曰. 諸佛如來의 法身이 平等하고 遍一切處하여 無有作意故로 而說自然이라. 但依衆生心現인대 衆生心者는 猶如於鏡이라. 鏡若有垢이면 色像不現이듯 如是衆生心이 若有垢이면 法身不現故이니라.


물음 : 모든 부처님께서 자연스런 업이 있어 모든 곳에 나타나 중생에게 이익을 줄 수 있다면 모든 중생이 부처님과 그 분의 신통변화를 보거나 설법을 듣고 많은 이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세간의 대다수 사람들은 이런 일을 볼 수 없습니까.


답 :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평등하고 모든 곳에 두루하여 억지 의도가 없기 때문에 ‘자연스런’이란 표현을 쓴다. 다만 중생의 마음에 따라 나타날 뿐인데, 중생의 마음은 거울과 같다. 거울에 때가 끼면 모습이 나타나지 않듯, 중생의 마음에 번뇌가 있으면 법신이 나타나지를 않는 것이다.


 


已說 解釋分하고 次說 修行信心分이라. 是中에 依未入正定衆生故로 說修行信心하니라.


이미 ‘법과 의를 자세히 풀이하는 부분’을 설명했고, 다음은 ‘믿음과 다섯 가지 방편을 수행하는 부분’을 말하겠다. 여기서는 반드시 도를 이루게 할 길로 아직 들어가지 못한 중생들을 위하여 ‘믿음과 다섯 가지 방편을 수행하는 것’을 설명한다.


 


何等信心이고 云何修行이오. 略說하면 信心에 有四種이니 云何爲四오. 一者는 信根本이니 所謂 樂念眞如法故니라. 二者는 信佛有無量功德이니 常念親近하고 供養恭敬하며 發起善根하며 願求一切智故니라. 三者는 信法有大利益이익이니 常念修行諸波羅蜜故니라. 四者는 信僧能正修行 自利利他이니 常樂親近 諸菩薩衆하여 求學如實行故니라.


무엇을 믿음이라 하고 어떻게 수행하는가. 간단히 말하면 믿음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넷인가. 첫째는 근본을 믿는 것이니, 이른바 진여라는 법을 즐겨 생각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부처님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이 있음을 믿는 것이니, 늘 부처님을 가까이하고 공양 공경하며 착한 마음을 일으켜 ‘모든 것을 아는 지혜’를 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법에 큰 이익이 있음을 믿는 것이니, 늘 모든 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스님들이 바르게 수행하여 자신은 물론 남의 이익도 가져다줌을 믿는 것이니, 늘 모든 보살들을 즐겨 가까이하고 실다운 행을 배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修行에 有五門일새 能成此信이라.


수행에 다섯 가지 방편이 있기에 이 믿음을 이루게 할 수 있다.


 


云何爲五오. 一者는 施門이요 二者는 戒門이요 三者는 忍門이요 四者는 進門이요 五者는 止觀門이니라.


무엇이 그 다섯인가.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지관이 다섯 가지 방편이라.


 


云何修行施門이오. 若見一切 來求索者면 所有財物을 隨力施與하고 以自捨慳貪으로 令彼歡喜케 하느니라. 若見厄難 恐怖危逼하면 隨己堪任하여 施與無畏니라. 若有衆生 來求法者이면 隨己能解하여 方便爲說이나 不應貪求 名利恭敬이라. 唯念自利利他하고迴向菩提故이니라.


보시를 어떻게 수행하는가. 찾아와 구하는 모든 사람들을 보면 가지고 있는 재물을 힘이 닿는 대로 베풀고 인색한 마음을 버려 그 중생들을 기쁘게 한다. 그들이 재난을 만나 두려워하면 능력이 있는 대로 두려워하는 마음을 없애준다. 법을 구하는 중생이 있다면 알고 있는 대로 방편을 가지고 말하나 명예와 존경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은 물론 남의 이익까지 같이 생각하고 그 공덕을 깨달음에 회향해야 한다.


 


云何修行戒門이오. 所謂 不殺不盜不婬하고 不兩舌不惡口不妄言不綺語하며 遠離貪嫉欺詐諂曲瞋恚邪見하니라. 若出家者라면 爲折伏煩惱故로 亦應遠離憒鬧하여 常處寂靜하며 修習少欲知足頭陀等行하니라. 乃至 小罪心生怖畏하고 慚愧改悔니라. 不得輕於如來所制禁戒하고 當護譏嫌하여 不令衆生 妄起過罪故이니라.


계율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이른바 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으며 나쁜 인간관계를 만들지 않아야 한다. 남을 이간시키거나 나쁜 말을 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말을 꾸미지 않아야 한다. 욕심ㆍ시기ㆍ속임수ㆍ사실을 비트는 것ㆍ분노ㆍ삿된 견해를 멀리 떠나야 한다. 출가 수행자라면 번뇌를 없애기 위하여 시끄러운 곳을 멀리 떠나 늘 고요한 곳에 머물면서 적은 것으로 만족하고 어려움을 참아 이겨내는 수행들을 해야 한다. 작은 죄에도 두려움을 내고 부끄러워하며 허물을 뉘우쳐야 한다. 여래께서 만든 계율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다른 사람의 헐뜯음을 막아 헐뜯는 중생들에게 죄를 짓지 않게 해야 한다.


 


云何修行忍門이오. 所謂 應忍他人之惱하고 心不懷報하며 亦當忍於利衰毁譽稱譏苦樂等法故이니라.


인욕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이른바 다른 사람의 괴롭힘을 참아내며 앙갚음할 마음을 갖지 않아야 한다. 또한 이익과 손해, 명예와 체면의 손상, 칭찬과 헐뜯음, 괴로움과 즐거움 같은 법에서 모든 것을 참고 견디어야 한다.


 


云何修行進門이오. 所謂 於諸善事에 心不懈退하고 立志堅强하여 遠離怯弱이라. 當念過去 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이니라. 是故로 應勤修諸功德하여 自利利他로 速離衆苦니라. 復次 若人이 雖修行信心이라도 以從先世來 多有重罪惡業障故로 爲魔邪諸鬼之所惱亂하고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하며 或爲病苦所惱하니라. 有如是等 衆多障礙이니 是故로 應當勇猛精勤하니 晝夜六時로 禮拜諸佛하고 誠心懺悔하며 勸請隨喜하고 迴向菩提하니라. 常不休廢하고 得免諸障하면 善根增長故이니라.


정진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이른바 좋은 모든 일에 게으러거나 물러날 마음이 없어야 한다. 마음먹은 것이 굳세어 악하고 두려운 마음이 없어야 한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과거 속에서 헛되이 받은 몸과 마음이 모두 커다란 괴로움이니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 때문에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고 자신은 물론 남의 이익까지 생각하는 마음으로 모든 괴로움을 서둘러 벗어나야 한다. 또 사람들이 믿음을 갈고 닦더라도 전생부터 지은 무거운 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기에, 때로는 삿된 마구니와 모든 귀신들의 괴롭힘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세간의 일들이 여러 가지로 꼬이기도 하며, 때로는 병고에 시달리게도 된다. 이런 많은 장애들이 있기 때문에 부지런히 용맹정진을 해야 한다. 아침저녁으로 여섯 때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해야 한다. 부처님께 설법을 청하고 중생의 모든 기쁨을 따라서 기뻐하며 그 공덕을 깨달음에 회향해야 한다. 늘 쉬지 않고 정진하여 모든 장애를 벗어나면 좋은 마음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云何修行止觀門이오. 所言 止者란 謂止一切境界相이니 隨順奢摩他觀義故이니라. 所言 觀者란 謂分別因緣生滅相이니 隨順毘缽舍那觀義故니라. 云何隨順이오. 以此二義로 漸漸修習하여 不相捨離하면 雙現前故이니라.


지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지란 모든 경계에 끄달리는 마음을 그치는 것이니, 사마타관을 수순하는 뜻이기 때문이다. 관이란 인연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습을 분별하는 것이니, 위빠사나관을 수순하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수순하는가. 이 두 뜻으로 차츰차츰 닦아 익혀 서로 여의지 않는다면 지와 관이 함께 드러나기 때문이다.


 


若修止者라면 住於靜處하여 端坐正意라. (내주)


만약 지를 닦는 자라면 고요한 곳에 머물러 단정히 앉아 뜻을 바르게 한다.


 


不依氣息 不依形色하고 不依於空하며 不依地水火風 乃至 不依見聞覺知하라.(등주)


몸속에서 일어나는 숨이나 어떤 모습에 기대지 말고 허공에 기대지 말며, 지수화풍과 견문각지에 기대지 말아야 한다.


 


一切諸想은 隨念 皆除하고 亦遣除想하라. (안주)


모든 생각은 생각대로 모두 없애고 또한 없앤다는 생각마저 없어야 한다.


 


以一切法은 本來無相이어 念念不生 念念不滅하고(근주)


모든 법은 본디 어떤 모습이 없어 생각마다 불생불멸이고


 


亦不得隨心外念境界니라.(조순)


또한 바깥 경계를 생각하는 마음을 따라가지 않아야 한다.


 


後에 以心除心하니(적정)


그 뒤에 마음을 마음으로 없애니


 


心若馳散하면 卽當攝來하여 住於正念하라. 是正念者란 當知하라. 唯心일뿐 無外境界니라. 旣復此心은 亦無自相이어 念念不可得이라.(최극적정)


마음이 흐트러지면 곧 그 마음을 거두어 정념에 머물러야 한다. 이 정념이란 오직 마음일 뿐 바깥에 경계가 없다는 사실을 으레 알아야 한다. 이 마음 또한 근본실체가 없기에 생각마다 얻을 수 없다.


 


若從坐起 去來進止 有所施作 於一切時에 常念方便하고 隨順觀察하며 久習淳熟하면 其心得住니라.(전주일취)


오고 가며 앉고 눕는 삶의 모든 행위에서 늘 방편을 생각하고 이치대로 살피며 오래 공부하다 보면 그 마음을 가질 수 있다.


 


以心住故로 漸漸猛利 隨順得入 眞如三昧하여 深伏煩惱하고 信心增長일새. 速成不退니라.(등지)


이 마음을 가졌기에 차츰차츰 거세게 물이 흐르듯 진여삼매에 들어가 번뇌를 없애고 믿음을 키우기에 서둘러 공부에서 물러나지 않는다.


 


唯除疑惑 不信誹謗 重罪業障 我慢懈怠이니 如是等人은 所不能入이라.


이 공부는 오직 부처님의 법을 의심하고 믿지 못하고 헐뜯는 죄 많은 사람들과 아만이 있거나 게으른 사람들만 빼니 이런 사람은 삼매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復次 依如是三昧故로 則知法界一相이라. 謂 一切諸佛法身이 與衆生身과 平等하여 無二이니 卽名 一行三昧니라. 當知하라. 眞如는 是三昧의 根本이니 若人修行하면 漸漸 能生無量三昧니라.


다시 이 삼매에 기대기에 곧 법계가 하나의 모습인 줄 안다. 이는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중생의 몸과 평등하여 다를 게 없음을 말하니, 이를 일행삼매라고 한다. 진여가 삼매의 근본이니 사람들이 이를 수행하면 차츰차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삼매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으레 알아야 한다.


 


或有衆生이 無善根力이면 則爲諸魔外道鬼神之所惑亂이라. 若於坐中에 現形恐怖나 或現端正男女等相일때 當念唯心하면 境界則滅하여 終不爲惱하리라.


때로는 어떤 중생은 마음의 좋은 뿌리가 없어 마구니나 외도나 귀신들의 모든 홀림을 받는다. 앉아 공부하는 가운데 두려움을 주는 모습으로 나타나거나 때로는 미남 미녀들의 모습들로 나타날 때, 이들이 오직 마음일 뿐이라고


 


或現天像 菩薩像하고 亦作如來像하여 相好具足하고 若說陀羅尼하며 若說布施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하며 或說平等空無相無願 無怨無親 無因無果 畢竟空寂 是眞涅槃이라 하며 或令人知宿命過去之事케 하며 亦知未來之事케 하며 得他心智하고 辯才無礙이어 能令衆生이 貪著世間 名利之事니라. 又 令使人이 數瞋數喜케 하여 性無常准이라. 或多慈愛하고 多睡多病하여 其心懈怠케 하니라. 或卒起精進하다 後便休廢하고 生於不信하여 多疑多慮니라. 或捨本勝行하고 更修雜業하니 若著世事하면 種種牽纏이라. 亦能使人이 得諸三昧 少分相似케 하나 皆是外道所得일새 非眞三昧니라.


때로는 하늘의 모습이나 보살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또한 여래의 모습을 만들어서 부처님의 상호를 다 갖춘다. 때로는 다라니를 말하고 또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를 말한다. 때로는 평등, 공, 無相, 無願, 無怨, 무친, 無因, 無果, 끝내는 비어 고요한 것이 참된 열반이라고 한다. 때로는 사람들이 과거 전생의 일을 알게 하고 또한 미래의 일도 알게 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지혜를 얻고 변재가 막힘이 없어 중생들이 세간의 명리를 집착하게 한다. 또 사람들을 자주 성나게 하거나 기쁘게 하여 그 성품이 오락가락하게 한다. 때로는 지나치게 애정이 많고 잠이나 병이 많아 그 마음을 게으르게 한다. 때로는 갑자기 정진을 시작하다 뒤에 바로 멈추게 하고 믿음이 없어 의심이나 쓸데없는 생각이 많게 한다. 때로는 본디 뛰어난 수행을 버리고 다시 쓸데없는 공부를 하게하며, 세상일에 집착하여 온갖 일을 번거롭게 만든다. 또한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삼매 비슷한 것을 얻게 하지만 이들은 모두 외도들이 얻는 경계이므로 진짜 삼매가 아니다.


 


或復令人이 若一日 若二日 若三日 乃至 七日 住於定中케 하고 得自然香美飮食하며 身心適悅하고 不飢不渴하여 使人愛著케 하니라. 或亦令人이 食無分齊이어 乍多乍少하여 顔色變異케 하니라. 以是義故로 行者는 常應智慧觀察하여 勿令此心이 墮於邪網케 하라. 當勤正念으로 不取不著하면 則能遠離是諸業障일새 應知外道所有三昧는 皆不離見愛我慢之心이니 貪著世間名利恭敬故이니라.


혹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루나 이틀, 사흘이나 이레를 선정 속에 머물게 하고 자연의 향기롭고 맛있는 음식을 얻게 하며 몸과 마음이 상쾌하고 배고프거나 목이 마르지 않아 사람들이 그것을 좋아하게 한다. 때로는 먹는 것이 일정하지 않게 금방 많다가 금방 적게 하여 사람들이 낯빛을 바꾸게 한다. 이런 이치이므로 수행하는 이들은 늘 지혜롭게 관찰하여 마음이 삿된 그물에 떨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부지런히 정념으로 이들을 집착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업의 장애를 멀리 여윌 수 있으므로 외도가 갖는 삼매는 모두 아견ㆍ아애ㆍ아만을 여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아니 그들의 삼매는 세간의 명예와 이익과 존경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眞如三昧者란 不住見相하고 不住得相하며 乃至 出定해도 亦無懈慢이어 所有煩惱가 漸漸微薄하니라. 若諸凡夫 不習此三昧法이면 得入如來種性은 無有是處니 以修世間諸禪三昧하여 多起味著하면 依於我見하여 繫屬三界하니 與外道共이니라. 若離善知識所護하면 則起外道見故니라.


진여의 삼매란 보는 모습에 머물지 않고 얻는 모습에 머물지 않으며 나아가 선정에서 나와도 게으르거나 거만한 것이 없어 모든 번뇌가 차츰차츰 엷어진다. 모든 범부가 이 삼매의 법을 익히지 않고서 ‘여래가 될 수 있는 성품’에 들어간다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세간의 모든 선정 삼매를 닦아 거기에 맛 들여 자주 집착을 일으키면 아견으로 말미암아 삼계에 묶이니 외도와 함께 하는 것이며, 선지식의 보호를 멀리하면 외도의 견해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復次 精勤專心修學此三昧者는 現世에 當得十種利益이니 云何爲十이오. 一者는 常爲十方諸佛菩薩之所護念이요. 二者는 不爲諸魔惡鬼所能恐怖요. 三者는 不爲九十五種外道鬼神之所惑亂이요. 四者는 遠離誹謗甚深之法일새 重罪業障漸漸微薄이요. 五者는 滅一切疑諸惡覺觀이요. 六者는 於如來境界信得增長이요. 七者는 遠離憂悔이어 於生死中에 勇猛不怯이요. 八者는 其心柔和이어 捨於憍慢일새 不爲他人所惱요. 九者는 雖未得定이라도 於一切時 一切境界處에 則能減損煩惱하여 不樂世間이요. 十者는 若得三昧라면 不爲外緣一切音聲之所驚動이니라.


또 한마음으로 부지런히 이 삼매를 배우고 익힌 이는 지금 세상에서 열 가지 이익을 얻으니 무엇이 그 열 가지인가. 첫째 언제나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보호를 받는다. 둘째 모든 마구니와 악귀들이 겁을 주지 못한다. 셋째 아흔다섯 가지 외도와 귀신들이 어지럽히지 못한다. 넷째 깊고 오묘한 부처님의 법을 헐뜯지 않기에 무거운 죄가 차츰차츰 엷어진다. 다섯째 모든 의심과 나쁜 견해가 사라진다. 여섯째 여래의 경계에 있는 믿음이 크게 늘어난다. 일곱째 근심과 회한을 벗어나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 용맹스럽게 공부를 하며 겁을 내지 않는다. 여덟째 그 마음이 부드럽고 온화하여 잘난 체하는 마음을 버렸으므로 다른 사람이 괴롭히지 않는다. 아홉째 비록 선정을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삶의 모든 경계에서 번뇌를 줄일 수 있고 세간의 삶을 즐기지 않는다. 열째 삼매를 얻으면 바깥 인연의 모든 소리에 놀라지 않는다.


 


復次 若人唯修於止이면 則心沈沒하고 或起懈怠하여 不樂衆善하고 遠離大悲하니 是故로 修觀이니라. 修習觀者는 當觀이니 一切世間有爲之法이 無得久停이어 須臾變壞하고 一切心行이 念念生滅하여 以是故로 苦라. 應觀 過去所念諸法이 恍惚如夢이라. 應觀 現在所念諸法이 猶如電光이라. 應觀 未來所念諸法이 猶如於雲이어 忽爾而起라. 應觀 世間 一切有身이 悉皆不淨 種種穢汚이어 無一可樂이라.


또 사람들이 지관만 닦으면 마음이 가라앉거나 때로는 게을러져 좋은 일들을 즐기지 않고 자비로운 큰마음을 멀리하기 때문에 관관을 닦는다. 관관을 닦아 익히는 이는 모든 세간의 생멸하는 법은 오래 머물 수 없어 금방 변하고 사라지며, 모든 마음이 생각마다 생멸하므로 괴로움이라고 보아야 한다. 과거에 생각한 모든 법이 어슴푸레 형체가 없이 꿈과 같음을 보아야 한다. 현재 생각하는 모든 법이 번개와 같음을 보아야 한다. 미래에 생각할 모든 법이 구름이 문득 일어나는 것과 같다고 보아야 한다. 세간의 모든 몸뚱이가 깨끗하지 못하고 온갖 더러움으로 가득 차 하나도 즐거워 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보아야 한다.


 


如是當念 一切衆生이 從無始世來로 皆因無明所熏習故로 令心生滅케 하여 已受一切身心大苦하고 現在卽有無量逼迫하며 未來所苦 亦無分齊일새 難捨難離인데도 而不覺知이니 衆生 如是 甚爲可愍이라.


모든 중생이 시작이 없는 때부터 모든 무명이 훈습한 것 때문에 마음이 생멸하게 되어 이미 모든 몸과 마음의 큰 괴로움을 받았고, 현재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그침이 있으며 미래에 받을 괴로움이 그 끝이 없어 버리고 떠나기가 어려운 데도 이를 깨닫지 못하니 참으로 불쌍하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作此思惟하고 卽應勇猛立大誓願하여 願하옵건대 令我心이 離分別故로 遍於十方하고 修行一切諸善功德하며 盡其未來에 以無量方便으로 救拔一切苦惱衆生하여 令得涅槃第一義樂이니라. 以起如是願故로 於一切時 一切處 所有衆善에서 隨已堪能하고 不捨修學하여 心無懈怠니라. 唯除 坐時 專念於止하고 若餘一切 悉當觀察 應作不應作이니라.


이런 생각을 하고 곧 용맹스럽게 “바라옵건대 제 마음이 분별을 떠나 시방세계에 두루하고 착한 모든 공덕을 수행하며 미래가 다하도록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편으로 모든 중생들을 괴로움에서 건져 그들에게 열반의 즐거움을 얻게 하고자 합니다”고 큰 서원을 세워야 한다. 이런 원력을 일으키므로 모든 삶이 있는 곳에서 좋은 모든 일들을 능력에 따라 처리하고 배우고 익히는 일을 버리지 않아 마음에 게으름이 없어야 한다. 오직 앉을 때 지관에 전념하는 것만 빼놓고 나머지 모든 것에서 해야 할 일인지 아닌지를 관찰해야 한다.


 


若行若住 若臥若起에서 皆應止觀俱行이라. 所謂 雖念諸法自性不生이라도 而復卽念 因緣和合하여 善惡之業 苦樂等報가 不失不壞이고 雖念因緣 善惡業報라도 而亦卽念 性不可得이니라. 若修止者면 對治凡夫 住著世間하여 能捨二乘 怯弱之見하고 若修觀者면 對治二乘 不起大悲 狹劣心過하여 遠離凡夫 不修善根이라. 以此義故로 是止觀二門 共相助成하고 不相捨離니라. 若止觀不具이면 則無能入 菩提之道니라.


수행자는 오고 가며 앉고 눕는 삶 속의 모든 생활에서 모두 지와 관을 함께 수행해야 한다. 이른바 모든 법의 자성이 생겨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지만 다시 인연화합을 통하여 선과 악으로 나타나는 괴로움과 즐거움 같은 과보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고 비록 인연화합을 통하여 선과 악으로 나타나는 과보를 생각하지만 또한 그 자성은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를 닦는다면 세간에 대한 범부의 집착을 다스리고 오음에 대한 이승의 약하고 두려운 생각을 버릴 수 있으며 관을 닦는다면 자비가 없는 이승의 좁은 마음을 다스리고 좋은 일을 하지 않는 범부의 마음을 떠날 수 있다. 이 뜻으로 지와 관은 서로 돕고 떨어질 수 없다. 지와 관을 함께 닦지 않는다면 깨달음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없다.


 


復次 衆生은 初學是法하며 欲求正信이나 其心怯弱이라. 以住於此娑婆世界에 自畏不能常値諸佛 親承供養이니라. 懼謂信心難可成就라 하며 意欲退者는 當知이니 如來는 有勝方便이어 攝護信心이라. 謂 以專意念佛因緣으로 隨願得生他方佛土하여 常見於佛하고 永離惡道니라. 如修多羅에 說하되 若人專念西方極樂世界阿彌陀佛하고 所修善根을 迴向하여 願求生彼世界이면 卽得往生하여 常見佛故로 終無有退니라. 若觀彼佛眞如法身하고 常勤修習이면 畢竟에 得生住正定故이니라.


또 중생들은 처음 이 법을 배우면서 바른 믿음을 갖고자 하지만 그 마음이 약하다. 그 까닭은 이 사바세계에서는 언제나 모든 부처님을 만나 친히 공양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이루기 어렵다’고 걱정하며 공부에서 물러나려고 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여래께서 ‘뛰어난 방편이 있어 믿음을 거두고 보호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는 한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한 인연 때문에 부처님께 바라는 사람의 원대로 다른 부처님의 세계에 태어나 늘 부처님을 보고 영원히 나쁜 길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경에서 “만일 어떤 사람이 한마음으로 서방 극락세계에 계신 아미타불을 생각하고 그가 닦은 마음의 좋은 뿌리를 회향하여 부처님의 세계에 태어나기를 바란다면 곧 태어나 언제나 부처님을 보기 때문에 끝내 공부에서 물러날 일이 없다”고 말한 내용과 같다. 부처님의 진여에 있는 법신을 보고 늘 부지런히 닦아 익히면 마침내 그 세계에 태어나서 바른 선정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已說修行信心分이니 次說勸修利益分이니라. 如是摩訶衍諸佛袐藏을 我已總說이라.


이미 ‘믿음과 다섯 가지 방편을 수행하는 부분’을 말했다. 다음은 ‘수행의 이익을 보여 주어 공부할 것을 권하는 부분’을 말하겠다. 이와 같이 대승에 있는 부처님의 소중한 모든 법을 내가 이미 다 말한 것이다.


 


若有衆生이 欲於如來甚深境界에서 得生正信하고 遠離誹謗하여 入大乘道라면 當持此論 思量修習해야 究竟에 能至無上之道니라. 若人聞是法已에 不生怯弱하면 當知이니 此人은 定紹佛種이어 必爲諸佛之所授記니라.


어떤 중생이 여래의 깊고 깊은 경계에서 바른 믿음을 내며 헐뜯지 않고 대승의 도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으레 이 논을 가지고 생각하고 닦아 익혀야 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최고의 도에 다다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이 법을 듣고도 겁을 내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실하게 이어받아 반드시 모든 부처님이 수기한다는 것을 으레 알아야 한다.


 


假使 有人이 能化三千大千世界滿中衆生하여 令行十善케 하더라도 不如有人이 於一食頃에 正思此法이라. 過前功德이어 不可爲喩니라. 復次 若人이 受持此論하여 觀察修行 若一日一夜하면 所有功德은 無量無邊일새 不可得說이니라. 假令 十方一切諸佛이 各於無量無邊阿僧祇劫에서 歎其功德이라도 亦不能盡이니 何以故오. 謂法性功德無有盡故로 此人功德도 亦復如是이어 無有邊際니라.


설사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중생들을 교화하여 그들에게 열 가지 좋은 행을 행할 수 있게 하여도 잠깐 겨를에 어떤 사람이 이 법을 바르게 생각하는 공덕만 못하다. 앞에 있는 공덕보다 이 법을 바르게 생각한 공덕이 더 뛰어나 뭐로 비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이 이 논을 가지고 하루 밤낮을 수행하면 거기에서 오는 공덕은 헤아릴 수 없으므로 다 말할 수가 없다. 가령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이 저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월 속에 그 공덕을 찬탄하더라도 다 찬탄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법성에 있는 공덕이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 사람의 공덕도 이와 같아서 그 끝이 없다.


 


其有衆生이 於此論中에 毁謗不信하면 所獲罪報는 經無量劫에 受大苦惱이라. 是故로 衆生은 但應仰信일뿐 不應誹謗이라. 以深自害하고 亦害他人하여 斷絶一切三寶之種이며 以一切如來가 皆依此法하여 得涅槃故이며 一切菩薩이 因之로 修行하여 入佛智故이니라.


어떤 중생이 이 논의 내용을 헐뜯고 믿지 않는다면 그 허물의 과보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월이 흐르도록 큰 괴로움을 받는다. 이 때문에 중생들은 오직 우러러 믿을 뿐 이 법을 헐뜯어서는 안 된다. 헐뜯음으로써 심하게 스스로 헤치고 또한 다른 사람까지 헤쳐 삼보의 모든 씨앗을 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모든 여래가 모두 이 법에 따라 열반을 얻었기 때문이며, 모든 보살이 이 법으로 수행하여 부처님의 지혜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當知하라 過去菩薩도 已依此法하여 得成淨信하고 現在菩薩도 今依此法하여 得成淨信하며 未來菩薩도 當依此法하여 得成淨信하니라.


마땅히 알아야 한다. 과거의 보살도 이 법에 따라 맑은 믿음을 이루었고, 현재의 보살도 이 법에 따라 맑은 믿음을 이루며 미래의 보살도 이 법에 따라 맑은 믿음을 이룰 것이다.


 


是故로 衆生은 應勤修學하니라.


이 때문에 중생들은 이 법을 부지런히 배우고 익혀야 한다.


 


諸佛甚深廣大義 我今隨分總持說 迴此功德如法性 普利一切衆生界


세상 모든 부처님의 크고 깊은 많은 뜻을


제가 이제 형편 따라 모든 내용 설명하여


진여 법성 이 공덕을 아낌없이 회향하니


두루 모든 중생계에 이익 있게 하옵소서.


[출처] 大乘起信論  |  작성자 sansanotae

 

 

  1. 파람질도파(波藍質兜波)2)의 초발의(初發意)보살은 마땅히 6바라밀을 행하여야 하느니라. 무엇을 6 가지라 하는가? 첫째 단바라밀(檀波羅蜜)은 보시(布施)의 의행(意行)이며, 둘째 시바라밀(尸波羅蜜)은 지계(持戒)의 의행이며, 셋째 찬제바라밀(提波羅蜜)은 인욕(忍辱)의 의행이며, 넷째 유체바라밀(惟逮波羅蜜)은 정진의 의행이며, 다섯째 선바라밀(禪波羅蜜)은 일심(一心)의 의행이며, 여섯째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은 지혜의 의행이니라출처: http://buddhism007.tistory.com/3748#gsc.tab=0 [불교진리와실천]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