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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띠 : rel. 'ambiguity'

GraU 2019. 12. 6. 11:28


s: 애매모호성   퐁티



인지적 차원에서 신체적 차원으로 이동  :   경험축의 이동으로



공간 속에서   몸이 위치하는 것은 


더 이상 사물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행위가 아니라 


지각하는 신체의 과정을 따른다


-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적 조건


세잔의 증언? ㅣ

“내가 그림을 그릴 때, 세계는 나의 손아귀 속에서 나를 중심으로 틀이 짜여 진다. … 만약 그림을 그리면서 내가 생각한다면, 내가 어떤 개입을 한다면, 모든 것은 엉망진창이 되고, 모든 것은 나로부터 도망간다.”



cf.  모호성, 애매모호성  ,   퐁티 메를로퐁띠,  지각의 현상학     존재-의미 매트릭스 



--- 전략


기존의 시각 기호학이 주로 이미지의 구조적 분석에 치중했던 한계를 지적했다. 그리고 구체적인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사용된  시각 이미지로 관심의 축을 이동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더불어 이미지를 다룰 때 분석자가 반드시 명심해야할 두 가지 사항으로 이미지의 복잡성과 유일무이성 내지는 특이성을 지적했다. 파브리 교수는 이미지의 존재론적 조건을 환기하면서 궁극적으로 모든 이미지 분석은 인류학적 학술 분야에 속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마르크스주의와 퍼스 기호학을 접목시켜 사회 기호학 이론 체계를 구축했던 베롱 교수는 이 같은 이미지의 복잡성을 생생한 중남미 일간지의 레이아웃을 통해 정치인들의 이미지 관리 기술을 예시하고, 수많은 이미지들의 변이형을 언급했다. 또한 고전적 기호학에서 설정된 기호 범주들의 획일적 적용에 따르는 무리를 강조했다.



같은 맥락에서 미국 퍼두대의 블레이크슬리 교수는 「시각 수사학의 도해와 자기 정체성의 기호학’이라는 논문에서」 영상과 수사학의 접점을 시도한 20세기 지성사를 일별했다. 능동적인 수사학적 과정으로서 본다는 것을 세계에 대해 자아를 단언하는 서술행위로 봤다.  그는 ‘보는 행위의 한 가지 방식은 또한 보지 않는 방식’이라는 점을 강조한 역사학자 버크의 영상수사학을 환기시킴과 동시에 영상수사학은 이미지의 애매모호성을 연구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개진했다. 이미지의 애매모호성 문제를 코께 교수는 기조 논문을 통해 ‘시각 기호학은 현실 또는 실재에 접근하는 것을 허락하는가’라는 직설적 물음을 던진다.


출처 : 교수신문(http://www.kyosu.net)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0361



 

새롭게 보는 '관점 ㅣ 눈,  시각  -  '  이  끼친   영향 :   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함은,


그들이 쓰던  수사에 빠져 있는 현전 :  에서 드러나고,

이는 또한,   아이러니컬 하게도,  기호학회 가   독해의  난점을   고전적으로   엄숙주의자 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이와 구별되는  자신들만의  어떤 '장식'으로 사용하여,   실제 '진의'가 아닌,  '가치매김'의 도구로써

소위 "선지적, 선구자적 견해 : " 들을  수단화/ 이용 할 때.

당연히,  소통 :  그 이유와  방향성에 대한,  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성과 같은  구축성 만이 남게 되는.







어떠한 지각 대상도 

주체와 분리되어서는 인식될 수 없다


체험을 통한 대상의 변증법적 구성은  ‘표현’이다

궁극적 실재는 ‘표현’이다

http://kyoboelib.smuc.ac.kr/Kyobo_T3/Content/ebook/ebook_View.asp?barcode=NURI_N1604021&product_cd=001&category_id=1231&detail_info_key=index  :  박 이문,  둥지의 철학 중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i3006&logNo=220091688433

+ 리뷰 등


http://cafe.daum.net/ko.art./bGT5/337?q=%EC%95%A0%EB%A7%A4%EB%AA%A8%ED%98%B8%EC%84%B1%20%ED%90%81%ED%8B%B0     책 : 서문



간접적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 

- 모리스 메를로 퐁티



들어가는 말 

 


메를로 퐁티 이전의 프랑스 철학은, 


인간은 명석하게 판명이 가능한 의식을 가진 인식 주체이기 때문에 


목적론적 체계를 통일적으로 인식할 수 있고, 

세계에는 보편적이면서 불변하는 진리가 존재하며, 

이성에 의해 산출된 지식은 세계에 대한 완전하고 확정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


는 등의 헛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반해 메를로 퐁티는 


인간을 순수하고 사유하는 정신과, 이러한 정신을 지탱해 주는 물질적인 육체의 결합체, 


즉 분리되어 잇는 정신과 육체의 결합체로 보는 시각에 반대하고, 

우리가 정확하고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몸의 실존적 상황뿐이라고 주장했다.


즉 분명한 것은 결코 투명하지 않은 세계에 고유한 몸이 존재하고, 몸이 그러한 세계로 향한다는 사실뿐이기 때문에 몸 앞에 주어진 실존적 사태는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사유로는 포착될 수 없고, 불투명하며, 모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메를로 퐁티는 인간의 의식은 감각적으로 실존하는 몸에서 체화(體化)된 것이므로 의식과 몸을 둘로 나눌 수 없고, 모든 인식과 행위는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바로 각자의 몸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인간은 사고하는 주체인 코기토로서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몸으로서 존재하고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인데, 여기에서 세상의 의미는 몸의 체험을 통하기 때문에 늘 개방적이고 발생적이라는, 해석학적인 의미 의 모호성이 개입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메를로 퐁티의 철학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메를로 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을 통해, 


이전의 관념론적 철학과 달리 지각된 세계의 현상에 주목하고,

'지각'은 정신적인 주체가 아니라 몸과 대상과의 상호작용이므로 

'보는 행위'와 '사유하는 행위'는 서로 분리된 활동이 아님을 주장했다.


이처럼 인간의 몸은 '보는 동시에 보이는 구조'를 지닌 수수께끼와 같은 유일한 존재, 즉 보는 주체인 동시에 보이는 대상이므로 인간은 대상을 객관화하는 정신적인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 《눈 과  정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지각된 것' 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교차하며 얽혀 있는 관계 라고 정의하고, '보이는 외관'과 '보이지 않는 깊이'를 지닌 양면적인 존재에 '살 char'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인간의 몸뿐만 아니라 사물도 이와 같은 '살'의 양면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설명했다.


결국 세계는 하나의 '살'로 이루어진 실체라는 것이다.

따라서 메를로 퐁티에게 있어서 '현상'이란 보이는 외관과 보이지 않는 깊이를 모두 잠재적 지평으로 지닌 리얼리티다.


그는 현상과 본질은 나눌 수 없으며, 

'지각'이란 현상적인 몸이 피부를 열고 대상으로   (1.대상을 향, 2.인식 인지과정에서의 3.내 안으로 -또는 '나'의  )   영역을 확장함에 따라 


대상이 몸의 '살'로 변하는 존재론적 조화이기 때문에, 


사물을 '본다는 것'은 보는 것인 동시에 사물에 의해 보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메를로 퐁티는 회화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했다. 


그에게 있어 회화란 가시계의 거울도 아니고, 순수한 자아의 절대적인 주관성으로의 귀환이나 무의식적 환상도 아니다. 

단지 모든 것의 근원인 세계에서 '살'이라는 존재가 드러나는 차원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그는 회화에서 '몸과 정신', '주체와 대상', '나타나는 것과 존재하는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등 이분법에서 벗어나는 점을 포착하고, 이와 같은 회화의 표현적 특징이 언어의 표현적 특징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밝혀냄으로써 철학과 예술의 유사성을 주장했다.


반성(反省)이전의 영역인 지각 체험을 통해 


주객이 분리되기 전의 불투명한 세계에 침묵으로 접근한 뒤


존재의 신비와 깊이를 개념 없이 펼쳐내는 예술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드러내고자 하는 자신의 현상학적 태도의 근거를 찾은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메를로 퐁티는 


철학이 탐구하는 합리성의 모델을 예술에서 찾았으며, 인간의 몸과 세계가 교차하면서 얽혀 있는 '살'의 구조에서 우리의 지각과 해석, 그리고 이해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회화와 언어를 동일한 작업으로 본 메를로 퐁티는, 소쉬르가 이룬 언어학적 성과를 기반으로 하여 기호와 의미를 분리하는 기존의 경험적이고 주지적인 분석을 비판하면서, 목소리나 제스처의 의미는 기호에 내재한다는 존재론을 제시했다. 9.

 

이러한 이해를 통해 메를로 퐁티는 몸으로 감각하는 것이 바로 지식의 시작이며, 인식이든 타자와의 소통 이든 모두 지각하는 삶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


의 지각을 통해   반성 이전의 것 인,  인간과 세계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살'을 되찾고자 한 메를로 퐁티는, '살'이라는 야생적 존재의  비결정적이고 모호한 의미가,  철학의 논리적이고 명료한 언어보다는, 간접적 표현 인 예술 언어를 통해서 더 확실하게 출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는 그가 모호하고 가시적인 세계에 중점을 두었던 초기 사상에서 가시적인 세계의 근원이자 의미인 '살'의 존재론을 펼치는 후기 사상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쓴 글이다.


메를로 퐁티는 이 글에서 합리적 사유의 근거를 찾아 헤매는 회화와 문학처럼, 철학에서도 개념으로 변형 되기 이전의 침묵 속에 존재하는 원초적인 파롤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회화처럼 인간과 세계와의 생생한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존재를 무언으로 표현하고, 수많은 해석을 내포해 하나의 의미로 환원되지 못하는 침묵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 같은 언어와 회화의 표현성은, 전통적인 이분법적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현대의 해체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가시적인 외관과 비가시적인 깊이를 지니고, 

보는 주체인 동시에 보이는 대상인 몸의 존재론적 특징을 통해,

주체와 대상의 고정적이고 결정적인 이중성을 극복한 것이다.

 

메를로 퐁티가 지적했듯이, 있는 그대로의 환영적인 공간을 그리기를 거부하고 회화라는 장르의 순수한 조형 언어를 찾으려는 모더니즘 운동 속에서 출발한 추상 미술이 재현을 거부하는 대신 취하려 한 것은, 개인의 순수하고 절대적인 정신성이라기보다는 그 정신성의 근원일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친화적인 관계를 드러내는 생태학적인 작업들, 몸에 관한 담론이 한동안 주춤하는 듯하다가 다시 뜨거운 논쟁거리로 떠오르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이 밖에도 회화와 사진 등의 장르 구분을 없애는 것, 장르가 혼합된 전시회에서 성의 구별이 모호한 중성적 이거나 양성적인 몸을 다루는 작품 등이 모두 메를로 퐁티가 말한, 이항 대립을 뛰어넘어 실존적이고 비결정적인 인간의 몸과 성에 대한 '살'의 존재를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메를로 퐁티가 지향한 것은 모든 실재(實在)가 분리되기 이전의 상태, 즉 몸과 정신, 여성과 남성, 보는 몸과 보이는 몸, 나와 남, 인간과 자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꿈과 현실,가상과 실재 등이 경계를 넘나드는 근원적 세계이거나, 아니면 양쪽 모두를 포함하는 경계 그 자체다.

 


메를로 퐁티보다 앞서, 힘에의 의지를 외친2 니체, 노동하는 실천을 중시한 마르크스, 합리적 이성에 가려진 무의식의 층을 알아낸 프로이트 등 도 


이성에 의한 논리 중심적인 근대 주체 철학을 해체하고자 한 


탈모더니즘 사상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하지만 탈모더니즘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메를로 퐁티의 '몸의 현상학'과 '살의 존재론'이다.


'몸의 현상학'은 인간의 몸과 정신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분리 자체를 거부하면서 인간을 '세계-로의'존재' 로 기술하고, 세계와 인간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는 지각, 인식, 행위가 삶을 살아가는 몸의 감각적 체험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인식의 보편적 합리성 역시 우연적이고 불투명한 상호 몸성에 입각한다고 보는 이론이다.


'살의 존재론'은 세계는 하나의 '살'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없다는 견해다. 


이 두 가지 이론이 

탈이성, 탈주체, 탈중심을 외치는 탈모더니즘 사상과 잘 맞아떨어진 것이다.



"

언어가 정신을 가득 채우는 바로 그 순간, 

만약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기만 한다면, 


언어는 자신을 진동시키지 않은 채, '기호'를 넘어서 의미로 나아간다.

따라서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의미로부터 떼어놓지 못한다. 


언어는 기호와 의미 간의 대조표를 전제하지 않고 세상의 어린아이들에게 스스로 자신의 비밀들을 드러내어 가르쳐주는, 완전한 드러냄이다.


언어의 애매함, 집요한 자기 지시, 스스로를 향한 방향 전환과 회귀 등은 언어에 정신적인 힘을 불어넣어준다.


언어는 차례로 사물을 의미로 바꾼 후, 

그 안에 사물이 머물 수 있도록 하나의 우주처럼 변하기 때문이다.

 

만약 언어가 원본 텍스트의 번역이나 암호화된 이본(異本)이라는 생각을 버린다면 우리는 완벽한 표현 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알게 될 것이고, 결국 모든 언어는 간접적이고 암시적인, 소위 침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24.

 

"


기호의 부재도 하나의 기호일 수 있고, 

표현은 의미의 각 요소에 담화의 요소를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돌연 의미로 방향을 바꾸는 언어에 대한 언어의 작용이다.


따라서 말한다는 것은 개개의 사유에 단어를 붙이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어떤 것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고, 우리는 언어 안에 살고 있다는 느낌 없이 침묵 속에 남게될 것이다.

왜냐하면 기호는 자신의 의미가 드러남과 동시에 사라질 것이고, 사유는 사유들-기호를 통해 표현하고 싶어 하는 사유와, 지극히 명확한 언어로 형성하려는 사유-외에는 다른 어떤 것과도 만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가끔 


사유가 말의 지표들로 대체되지 않고 

단어에 통합되어 자유롭게 사용되는 경우에는


사유가 이미 발화된 것처럼 느껴진다. 


요컨대 단어에는 어떤 힘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단어들은 서로 작용하면서, 마치 달의 인력이 조수간만을 유발하는 것처럼, 멀리서부터 사유에 의해 끌어당겨지기 때문이다.

3


또한 이처럼 복잡한 작용을 하는 단어는 언어학적 의미 작용 - 이미 예정되어 있고 별 의미도 없는 의미 작용 - 만을 불러오는 개별 단어들에 비해 훨씬 더 뚜렷하게 의미를 환기시켜주기 때문이다.


언어는 사물 자체를 표현하기를 포기할 때 비로소 진정한 발화로 자리매김한다.



언어는 


사유를 복사하는 것을 포기하고 


스스로 해체되었다가 


사유에 의해 다시 결합될 때 


비로소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된다. 


마치 발자국이 몸의 움직임과 노력을 반영하듯, 언어는 사유의 의미를 가진다. 26.

 


따라서 언어란 원래 사유와 직접적으로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이고 자율적이다.


만약 언어가 하나의 사유와 사물을 직접적으로 의미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언어의 내적 생명으로부터 파생된 이차적인 능력에 불과하다. 작가는 옷감의 안쪽 면을 보면서 작업하는 직조공처럼 뒤쪽에서 일을 한다.  즉 작가는 언어하고만 상대하는데, 그렇게 하다 보면 갑자기 자신이 의미로 둘러싸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작가의 작업과 화가의 작업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우리는 흔히 화가는 색과 선으로 이루어진 무언의 세계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와서 우리 내면의 공식화되어 있지 않은 해독 능력에 호소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해독 능력을 맹목적으로 실행하고 나서야, 즉 작품을 좋아하고 나서야 비로소 작품을 자세히 뜯어보게 되는 것이다.


반면 작가는 이미 공들여 만들어진 기호들과, 이미 말이 통용되는 세계 속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자신이 제안한 기호의 지시에 따라서 의미 작용들을 다시 정리할 줄 아는 능력만 요구한다. 28.

 


고전주의 화가들도 화가고, 가치 있는 그림들 가운데 어떤 것도 단순히 재현만을 목적으로 한 것은 없다. 말로는, '창조적 표현' 따위의 회화의 현대적 개념은 이것을 이론으로 구축하기보다는 늘 실행해온 화가 자신 들에게보다, 일반 대중들에게 훨씬 더 새로운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고전주의 작가들의 작품은 또 다른 의미 - 어쩌면 그들의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의미 - 를 지녔을지도 모른다. 34.

 

발롱 Henri Wallon이  말한 대로 우리는  '초超사물들 ultra-choses' 의 질서 안에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초사물들'은 어떤 하나의 단계화된 원근 표현 속에서 가까운 곳의 대상들과 나란히 정렬 되지 않는다.

어느 정도의 크기와 거리를 넘어서면 모든 '초사물들'이 서로 맞닿는 절대 치수에 도달하게 된다.


어린이들이 해를 보고 '집채만큼 크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만일 내가 절대 치수에서 원근법으로 돌아오고 싶다면 전체를 자유롭게 지각하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 또 나의 시선을 제한해야 하고, 내가 선택한 측정 기준에 입각해 달과 동전의 '외관상 치수'를 표시한 뒤, 결국에는 측정한 수치를 종이 위에 옮겨 놓아야만 한다. 36.

 

이처럼 현대의 화가들이 미완성의 그림을 용인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우선, 이런 미완성적인 그림은 


작품이기를 단념하고, 즉각적인 것, 느껴지는 것, 개인적인 것-말로의 표현을 빌리면 '야생적인 표현'-외에는 그 어떤 것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감각에 대한 객관적이고 설득력 있는 제시를 의미하는 완전함이 이제 더 이상 완전한 작품의 자질이나 기호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표현은 감각이나 자연의 잘 알려지지 않은 영역을 거치지 않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일상적인 세계를 가로질러 인간에게서 인간에게로 직접 나아가기 때문이다.


말로는 이에 대해 매우 적절한 인용을 했는데, 

바로 


"완전한 작품이라고 해서 반드시 완성된 것은 아니며,

완성된 작품이라고 해서 반드시 완전한 것도 아니다."


라는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의 말이다.


완성된 작품은 하나의 사물처럼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관객에게 다가와서 그들로 하여금 작품을 창조해낸 제스처를 되찾게 하고, 중재자들을 뛰어넘어서, 거의 무형의 자취인 고안된 선의 움직임 외에는 어떤 안내자의 도움도 없이, 화가의 침묵의 세계에, 이제는 발언되고 다가서기 쉬운 그 세계에 도달하도록 그들을 인도하는 것이다. 40.


 

고흐가 <까마귀들>을 그리는 순간 '보다 멀리 나아가는' 것은 이제 단순히 우리가 향해야 할 실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시선과 그의 시선을 간청하는 사물들과의 만남, 또는 

존재하는 사람과 존재하는 과의 만남을 복원시키기 위해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음을 의미한다.

4


그러한 관계는 서로를 모사하는 것과는 분명하게 다르다. 


"예술에 있어서는 언제나 그렇듯이 진실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해야 한다" 


라고 말한 사르트르의 지적은 옳았다. 50.

5 


하지만 예술이나 정치는 

그들을 즐겁게 하거나 그들에게 아첨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들이 예술가와 정치가에게 기대하는 것은 

자신들이 나중에 가서야 진가를 깨닫게 될 가치로 

자신들을 인도해주는 것이다. 


화가나 정치가는 타인들을 추종하기보다는 타인들을 만들어내므로, 화가나 정치가가

목표로 삼는 대중은 이미 주어져 있는 대중이 아니라, 그들의 작품이 선동할 만한 대중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타인이란, 지금 당장 그들에게 선회하는 타인들의 기대를 통해 규정되는 경험적인 '타인들'이 아니다.

또 다른 종(種)들이 딱딱한 등껍질과 부레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인간적 존엄'이라든가 '인간이라는 명예'를  가지고 있는 하나의 종으로서 이해된 인류도 아니다.

그보다는 화가나 타인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 만한, 타인들인 것이다.


작가가 동참하는 역사는 작가가 '역사적인 것으로 만들' 생각을 하지 않을수록, 역사 속에 문자를 남기려는 생각을 하지 않을수록, 그리고 정직하게 자신의 작품을 생산할수록 더, 작가가 무릎을 꿇어야할 어떤 힘이 아니다.


그것은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타인을 반박하거나 긍정하고 재창조하면서, 모든 파롤과 유효한 행위들 사이에서 계속 이어가는 끊임없는 대화다.

역사의 심판에 호소하는 것은 대중의 환심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며, 세속적인 심판에 호소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사물들 속에서 언급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어떤 것, x에 의해 이해되지 않을 수 없을 어떤 것에 대해 말한 내적 확실성과 혼동되는 것이다.


스탕달은 자신의 작품이 제대로 이해되려면 100년 정도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그가 자신의 작품이 읽히기를 원한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그가 기꺼이 한 세기를 기다리겠다는 뜻이기도 하며, 또한 그의 자유가, 아직 변방에 속해 있는 어떤 세계를, 그가 창안해야 했던 것을 획득된 것으로 인식함으로써 그 자신만큼 자유로워지게 만든다는 뜻이기도 하다.


역사에의 이런 순수한 호소는 진리를 위한 기원이 되는데, 진리는 결코 역사적인 각인에 의해서 창조되지는 않지만 진리로서의 각인은 요구한다.


이러한 호소는 단지 문학이나 미술에만 국한되지 않고, 삶의 모든 시도들 속에 존재한다.


단지 돈을 버는 것만 또는 당연한 것만 생각하는 몇몇 불행한 사람들의 경우를 제외하면 모든 행위, 모든 사랑에는 그것들을 진리로 변화시켰을 어떤 이야기에 대한 기대가, 즉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마침내 알게 된 이상 그러한 기대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것은 겉으로는 타인을 존경하는 듯하지만 결정적으로는 배척하는 어떤 사람의 겸손이고, 그래서 그때부터 그 사람은 그 타인에 수없이 반영되어 나타난다.

혹은 반대로, 그 순간부터 만사가 끝나버려서 그 사랑은 불가능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마 이러한 기대는 어떤 경우에든 항상 실망스러울 것이다.


우리의 의지나 사유의 모든 움직임이 타인들 속에서 비약하고, 이 점에서 대충이라도 그런 것들이 개개인 각자에게서 유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인간의 인간에 대한 부채는 한결같은 것이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표명하고 싶은 소망이 문학에 생기를 불어넣듯, 삶도 항상 활기차게 만들어주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사소한 동기를 뛰어넘어, 작가들로 하여금 자신의 작품이 읽히기를 바라게 하는 것도, 또 때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작가가 되어 말하게 하는 것도, 모두로 하여금 앞에서 자신에 대해 설명하고 싶게 하는 것도, 모두 바로 그러한 소망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사실이, 자신의 삶과 다른 사람의 삶을 마치 역사처럼 단어의 의미를 통해 이야기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역사는 우리의 모든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는 역사다.

역사가 자신의 모든 흔적을 현재에 회복시켜 놓을 힘을 얻는 것도 바로 우리의 현재 속에서다. 내가 존중하는 타인은, 내가 그에게서 삶을 얻듯이, 내게서 삶을 얻는다. 84.


 

형식주의를 비난하는 것이 옳은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종종 형식주의의 과오가 형식을 너무 과대평가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형식을 너무 과소평가해 의미와 분리시키는 데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곤 한다. 88.

 

즉 예술 작품은 우리가 열고 들어갈 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은 세계 속에 자리를 잡고서 우리를 그 세계에 정착시켜주기 때문에, 우리에게 보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궁극적으로는 어떠한 분석적인 작업도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한다.


왜냐하면 분석이라는 것은 대상 속에서 우리가 놔둔 것만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문학적 소통 속에 모험적인 요소가 있다는 사실과, 

위대한 모든 작품들 속에 애매모호한 것과 명제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극복하고 싶어하는 일시적인 약점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관점으로 스스로를 확인하는 대신에 우리를 낯선 관점으로 이끌어주는 정복적인 언어, 즉 문학을 소유하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대가다. 89.

 6


헤겔은 하나의 박물관이다. 

원한다면 철학의 집대성이라고 해도 좋은 데, 이는 그의 철학이 모든 철학이 지닌 유한성과 영향력을 박탈해서 방부 처리해놓은 철학이라는 뜻이다.


헤겔은 모든 철학이 그 자체로 변형된 것이라고 믿지만, 

실제로는 헤겔 자신으로 인해 변형된 철학이다.


우리는, 그가 말하는 종합이라는 것이 사실상 전개된 모든 사상을 포함하고 있지도 않고, 사상들이 전부 과거에 존재했던 그대로도 아니며, 결국 결코 즉자적이지도, 대자적이지도 않다는 데 동의해야 한다.


즉 동일한 운동으로 존재하고 인식하며, 인식하는 대로 존재하고, 존재하는 것을 인식하며, 보존하고 억압하며, 실현하고 파괴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의 진리가 다른 진리들에 통합될 때 어떻게 진리가 쇠퇴하는지 알아보는 것으로 충분한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에서 데카르트주의자들로 넘어가면서 어떻게 코기토가 건성으로 되풀이되는 하나의 관례로 굳어졌는지 알아보면 된다.


만일 헤겔이 말한 것이, 과거가 멀어져감에 다라 과거가 의미로 변해서 우리가 뒤늦게 지적인 사상의 역사를 회고할 수 있다는 내용이라면 그가 옳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종합 속에서, 각각의 용어가, 고찰된 시점에서 세계 전체가 되고, 철학들의 연계가 개방된 의미 작용처럼 각자의 자리를 지키도록 함으로써 의미 작용들 간의 예상과 변형의 교환을 존속시킨다는 조건이 붙는다.


철학의 의미는 발생의 의미이므로 시간을 벗어나서 종합될 수 없는데, 이 때문에 여전히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철학 밖에 있는 작가는 언어를 초월함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사물 자체를 포착 하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말라르메 자신도, 만일 남김없이 모든 것을 다 말해보겠다는 자신의 맹세에 절대적으로 충실했다면 자신의 펜에서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과, 자신이 다른 모든 것을 무효화시키는 걸작을 포기함으로써 몇 권의 시답지 않은 책들을 쓸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떤 기호도, 사물 자체도 없이 존재하는 의미 작용은 최상의 명료성을 보여주는데, 

이는 곧 명료성이 일절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은, 황금 시대와 같은 언어의 발단에서가 아니라 그 언어가 기울인 의 도착점에서다.



언어와  진리의 체계가, 

우리에게 우리의 작용들을 하나씩 떼어놓고 다시 손질할 것을 제안하면서, 

우리 삶의 게 중심을 옮겨놓는다면, 


그 결과 하나하나의 작용은 전체로 옮겨 가고, 


그 전체는 우리가 처음에 작용들 하나하나에 부여했던 공식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만약 여기에서 언어와 진리의 체계가 다른 표현 작용들을 '침묵적'이고 종속적인 것으로 바꾸었다면 그것은 그것들에 침묵이 부족해서가 아니며, 의미단어들에 의해 지시된다기보다 오히려 그러한 단어들의 구조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100.




이와 마찬가지로 

언어는 의미에 봉사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의미를 지배하는 것도 아니다.


이 둘 사이에는 종속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어느 누구도 명령하지 않으며, 어느 누구도 복종하지 않는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파롤 7을 벗어나   순수한 의미 작용으로서 우리 앞에 서지도 못한다.

그것은 이미 말해진 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삶의 과잉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표현 장치와 함께  그 장치가 민감해지는 상황에 정착한 뒤 

장치와 상황을  대면시킨다.


우리의 언표들은 단지 이와 같은 교환의 궁극적인 결산에 불과하다. 

정치적인 사상 자체 도 바로 이러한 질서 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인식과 체험, 가치 등이 동시에 만나는 역사적인 지각의 해명이고, 

우리의 명제 는 지각의 도식적인 공식일 뿐이다.


모든 행위인식 이런 오랜 고심을 거치지 않고, 우리의 개인적 혹은 집단적 역사 속에서 구체화되지 않은 가치들을 상정하기를 원하며, 또는 계산이나 모든 기술적인 절차를 통해 방법들을 선택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모든 행위와 인식은 해결하려던 문제에 못미치고 만다. 개인의 삶과 표현, 인식, 역사 등은 목표와 개념을 향해서 똑바로 전진하지 않고 비스듬히 나아간다.


사람이 지나칠 정도로 집요하게 찾으려 하면 얻지 못하는 법이고, 오히려 명상적인 삶을 영위하면서 자발적인 근원을 해방시킬 수 있는 사람만이 이념과 가치를 얻을 수 있다.


8



- 옮긴이 김화자





*

모리스 메를로퐁티 (Maurice Merleau-Ponty, 1908년 3월 14일~1961년 5월 4일)


프랑스의 철학자이다.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에서 배웠으며, 1930년에는 철학 교수 자격을 취득하고 제2차 세계 대전 때에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했다.


1945년에는 <행동의 구조>, <지각(知覺)의 현상학(現象學)>을 박사논문으로 체출하여 일약 학회에서 명성을 얻고  리옹 대학과 소르본 대학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를 역임했으나 급사했다.


사르트르의 <현대> 창간 이래로 협력하여 커다란 역할을 수행했으나 이윽고 동지를 떠나 사르트르를 비판하게 되었으나 사르트르에 대한 사상적 영향은 후에 인정받았다.


그의 철학은 후설의 현상학, 특히 생의 세계에 대한 후기의 사색을 발전시켜 행동의 구조와 지각세계의 연구로부터 출발하였으며, 관념론과 실재론의 전제를 모두 배척하고 관념으로도 사물로도 환원할 수 없고 인간적 실재의 이의성 (二義性)을 조명하는 동시에 정치·역사·언어·예술 등 제 문제에 독특한 전망을 열려고 한 것이었다.





행동의 구조 (1942)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저서.


『지각의 현상학』(1945)과 더불어 그의 학위논문이 된 것으로서 인간을 문자 그대로 '세계-내'의 '존재'로서 파악 하고자 한 기념비적인 저작이다. 다키우라 시즈오(滝浦静雄) · 기다 겐(木田元)에 의한 일본어 역(みすず書房, 1964)이 있다.


그는 우선 근대 이래의 인간과학이 언제나 물질인가 정신인가, 즉자인가 대자인가와 같은 양자택일에 빠져 있는 것에 불만을 느끼고, 새롭게 성립한 게슈탈트 심리학 등에 의거하여 고전적 반사설과 조건반사학설 등을 재검토함으로써 자극은 그 물리적 특성보다도 오히려 공간적 내지 시간적 배치에 의해 작용하는 '게슈탈트'라는 점을 해명한다(두 개의 곡물 더미 중에서 언제나 상대적으로 <엷은 회색> 쪽을 선택하는 쾰러의 닭의 예 등을 참조).


또한 그는 어떤 반사회로만을 고립적으로 다루는 것도 불가능한바, 개개의 행동에 그 '중추영역'을 지정하고자 하는 '기능국재론'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특히 골드슈타인 등의 자료를 원용하여 역설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는 유기체 자신이 게슈탈트가 되고 있는 것이지만, 다만 그의 입장은 신경 활동의 부분들을 모두 동일시하는 극단적인 전체론이 아니라 특정한 부위가 유기체 전체와의 관계에서 의미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는 절충적 국재론이다.    그러나 이 입장은 인간의 지각과 행동에 관한 근대 이래의 존재론에 중대한 변경을 압박하는 것이 된다.



게슈탈트는 반드시 자극의 물리적 특성과 생체의 해부학적 구조에는 의존하지 않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동물에 의해서도 지각되는 이상, 지성의 판단의 결과 등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러한 인간의 행동 자신도 '혼합적 형태'와 '가환적 형태' 그리고 '상징적 형태'라는 구조의 분화를 지닌다.  그것은 대부분 자연 조건에 유착된 첫 번째 구조(그것은 이른바 '본능'보다도 좀 더 닫힌 것으로 생각된다)로부터 신호에 반응할 수 있는 두 번째 구조를 거쳐, 순수한 의미와 가치 자체로 열려 있는 인간적 구조에 이르는 계층구조이다.


따라서 그것은 당연히 실체적인 구별이 아니라 게슈탈트로서의 유기체의 행동이 통합화되는 정도의 다름인 것이다.


또한 그는 이에 거의 대응하는 것으로서 '물리적 질서'와 '생명적 질서' 그리고 '인간적 질서'라는 계층을 생각하고  있지만, 이것은 이른바 '물질', '생명', '정신'을 역시 구조의 다름으로 다시 파악하고, 구조의 철학 안으로 명확한 위치 부여를 시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각의 현상학 (1945)


1945년에 나온 이 책은 메를로퐁티의 철학적 주저로, 후의 정치·미술·언어 등 다방면에 걸친 사색은 주로 이 책에 기초를 두고 있다.


지각의 문제가 중요한 것은 세계 내에서 대상을 발견하고 또한 타인과 자기를 인식하는 인간의 존재방식이 지각 내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철학적 반성은 과학이 항상 전제하면서도 조명하지 못하는 지각적 의식의 원초적 신념을 형성되고 있는 모습 그대로  재발견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입장으로부터 심리학의 경험주의적·주지주의적 제개념을 비판함으로써 현상적 장(場)으로서의 세계에 되돌아 가야 할 필요를 말하고 

그 중심 인물을 이루는 자기의 신체에 대해 사물이라고도 관념이라고도 할 수 없는 독자적인 존재방식을 조명한다.



신체는 세계에 상주함으로써 습관적 층(層)을 침전시키고 행동의 자유로운 환경을 주는 것이지만, 


예컨대 과거에 손 이나 발을 절단한 사람이 상실한 부분에 아직도 통증을 느끼는 환각에 사로잡히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습관적 신체는 물리적 실제도 아니고, 또 단순한 관념으로 해소되지도 않는다.



인간의 세계에  고유한 중후함을 부여하는 것은 


해방과 예속  ·  진리와 오류의 가능성을 

어느 것이나 나눌 수 없게 내포 하고 있는 양의적(兩義的) 신체존재이며, 


지각의 해명은 여기에 조명을 비침으로써 

자유 문제만이 아니라 

의미의 침전으로서의  문화나 역사 문제에 대해서도 처음으로 구체적인 취급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백과사전)






+

https://artist12.tistory.com/50



  1. 랑그 와 파롤 : 구분 자체의 구조적 현전: 에서 처럼, '존재론'적인 그림자에서 '자유롭지 못한' [본문으로]
  2. rel. '권력에의 의지' [본문으로]
  3. http://blog.daum.net/_blog/'%EA%B8%B0%ED%91%9C'%EC%9D%98%20%22%EB%8F%85%EC%9E%90%EC%84%B1%22%20:%20%EB%A0%88%ED%94%8C%EB%A6%AC%EC%B9%B4 [본문으로]
  4. fur.+ 소위 '양자'간의 관계에 끼어드는 : [본문으로]
  5. '예술은 고등사기 이다" - 백남준 [본문으로]
  6. cf. 我所 의 我 化 [본문으로]
  7. 개별 주체들의 '말' : 하나의 '기호 상징'에 대해, 모두 다 다르게 표현될 수 있는 [본문으로]
  8. 근원적 원인 : 구조에 있지 않게 된 현재에서, 현전: 하는 것으로의 회귀로서, 그 가 가졌던, 아직은 '완전히 분리 되지 못한' 한계가 드러나게 되는.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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