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제 : Consent/앎으로부터의 출발:마비에 대한 알아차림

H.L. Bergson

GraU 2007. 2. 25. 15:08
 

 

 

http://blog.daum.net/mrpond/7479022 : 창조적 진화 - 영역본

 

 
 

베르그송[Henri-Louis Bergson]

1859. 10. 18 프랑스 파리~1941. 1. 4 파리.

프랑스의 철학자.
[개요]

베르그송

베르그송(1928)

과정철학이라 부르는 철학사조를 최초로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정지보다 운동·변화·진화의 가치를 더 높게 평가했으며 학문적·대중적 호소력을 겸비한 문체의 대가였다(→ 실증주의).

[초기생애]

재능있는 음악가였던 아버지로부터 부유한 폴란드계 유대인 집안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베르그송이란 이름은 베레크의 아들(Berek-son)이란 말에서 나온 것이다. 어머니는 영국계 유대인 집안 출신이었다. 그러나 베르그송의 양육·교육 과정과 관심사는 전형적인 프랑스식이었고, 사실상 전생애를 차지했던 교수생활도 프랑스, 그중에서도 대부분을 파리에서 보냈다.

파리에 있는 리세 콩도르세에서 기초교육을 받았는데 과학과 인문학에 똑같이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878~81년 대학강사 양성기관인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공부했다. 여기서 받은 일반교양교육 덕택에 그리스어와 라틴어 고전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으며, 졸업 후 바로 철학 교사로 출발할 수 있었다. 교육자로서의 그의 경력은 파리 근교의 여러 리세(국립고등학교)에서 시작되었다. 1881~83년 이후 5년간은 클레르몽페랑에 있었다. 클레르몽페랑에서 그는 첫번째 철학 저술에 토대와 영감을 제공한 직관을 얻을 수 있었다. 훗날 그는 저명한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보냈다.

"나는 그때까지 이전에 허버트 스펜서를 읽고 접한 기계론적 이론에 완전히 빠져 있었습니다. …… 내가 몰두하던 문제는 시간개념을 분석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시간개념이 역학과 물리학을 가능하게 만드는 핵심개념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놀랍게도 과학에서 말하는 시간은 '지속하지' 않고 …… 실증과학은 본질적으로 지속을 제거함으로써 성립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을 일련의 사색의 출발점으로 삼아 나는 점차 그때까지 받아들인 거의 모든 것을 거부하고 내 관점을 완전히 바꾸게 되었습니다."

이 변화의 첫 결과물이 박사학위 논문인 〈시간과 자유의지:의식의 직접 자료에 대한 소론 Essai sur l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1889)이었다. 이 글에서 그는 지속 또는 실제 시간개념을 확립함으로써 과학이 사용해온 시간개념, 곧 시계로 측정할 수 있는 공간화한 시간개념을 거부하려 했다. 그는 인간이 자신의 내적 자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분석하여 심리적 사실은 다른 사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증명했고, 심리학자들은 특히 심리적 사실을 양화(量化)해서 계산하려고 함으로써 이를 왜곡한다고 비판했다. 특히 자극의 강도와 이에 상응하는 감각의 강도 사이에 계산할 수 있는 관계를 확립했다고 주장하는 페히너의 법칙을 비판했다(→ 베버-페히너의 법칙). 또한 지속과 연장, 연속과 동시, 질과 양 사이의 혼동을 일단 제거하고 나면, 과학적 결정론의 이름을 빌어서 인간이 자유롭다는 사실을 거부한다는 것은 근거없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철학적 업적]

〈시간과 자유의지:의식의 직접 자료에 대한 소론〉 발간 이후 베르그송은 파리로 돌아와 앙리 4세 리세에서 가르쳤다. 1891년에는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사촌인 루이즈 뇌부르주와 결혼했다. 이동안 그는 심신관계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다(→ 심신이원론). 당시 지배적인 견해는 이른바 심리생리적 평행론으로서 모든 심리적 사실에 상응하는 생리적 사실이 있고 생리적 사실이 심리적 사실을 엄격히 결정한다는 주장이었다. 베르그송은 앞서 박사논문에서 결정론의 주장을 논박하긴 했지만 마음과 몸이 어떻게 관계 맺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이 문제에 관한 탐구결과는 1896년 〈물질과 기억:육체와 정신의 관계에 대한 소론 Matière et mémoire:Essai sur la relation du corps à l'esprit〉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그의 책 중 가장 어렵고 가장 완벽한 것 같다. 이 책의 접근방식은 그의 철학하는 방법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일반적 사변을 통해 문제에 접근하지 않았고 거대한 사변체계를 구성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다른 저술과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특수한 문제에 관해 알려져 있는 경험적 관찰사실을 먼저 탐구했다. 이때문에 〈물질과 기억:육체와 정신의 관계에 대한 소론〉을 쓰기 위해 기억과 특히 언어사용 능력을 잃어버리는 실어증이라는 심리적 사실에 관한 문헌을 공부하는 데 5년을 보냈다. 심리생리적 평행론에 따르면, 뇌의 손상은 심리적 능력의 토대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베르그송의 주장에 의하면 실어증이 생기는 것은 이 주장이 거짓임을 보여준다. 실어증에 걸린 사람은 다른 사람이 말하려 하는 것을 이해하고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도 알고 있으며 언어기관에 아무런 장애가 없지만 말을 할 수 없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 경우 잃어버린 것은 기억이 아니라 그 기억을 표현하는 데 필요한 육체적 기재(mechanism)이다. 이 관찰로부터 베르그송은 기억, 따라서 마음 또는 정신이란 육체와 독립적인 것이며 자신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육체를 이용한다고 결론지었다. 〈시간과 자유의지:의식의 직접적 자료에 대한 소론〉이 전문잡지에서 여러 번 소개된 반면, 〈물질과 기억:육체와 정신의 관계에 대한 소론〉은 많은 일반 독자의 주의를 끌었다. 이 두 저서는 베르그송이 당대의 가장 대중적이고 영향력있는 강연자 겸 저술가로 발돋움하는 데 발판이 되었다. 1897년에는 19세 때 학생으로 입학했던 고등사범학교의 철학교수가 되었다. 그후 1900년 프랑스 최고의 명문 학교인 콜레주 드 프랑스의 강사가 되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베르그송주의를 유행시킬 만큼 큰 인기를 누렸다. 열렬한 독자였던 윌리엄 제임스와는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베르그송 철학에 대한 해설서와 주석서는 전세계 어디에서든 찾아볼 수 있게 되었고, 사람들은 문학·음악·미술·정치·종교 분야를 밝게 비추어 줄 철학의 새 시대가 밝아오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저작이며 베르그송의 가장 유명한 책인 〈창조적 진화 L'Évolution créatrice〉(1907)는 생물학이 그의 사상에 끼친 영향을 보여줌과 동시에 과정철학자로서의 면모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베르그송은 생명개념을 검토하면서 진화를 과학에 의해 확립된 사실로 받아들였다(→ 진화설). 그러나 진화에 대한 이전의 철학적 해석들은 지속개념의 중요성을 보지 못함으로써 생명의 독특성을 무시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진화 과정 전체를 지속적으로 발전하면서 새로운 형태를 발생시키는 '생명의 약동'(élan vital)이 지속되는 것으로 보자고 제안했다. 즉 진화란 기계적이 아니라 창조적이라는 것이다. 이 발전과정에서 베르그송은 2가지 흐름을 추적했다. 하나는 본능을 통해 곤충에 이르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지성의 진화를 통해 인간에 이르는 길이다. 그러나 이 2가지 길은 모두 세계 전체에서 똑같은 생명의 약동이 활동하는 방식이다. '사고에 대한 영화촬영술적 기계론과 기계론의 환상'이라는 제목이 붙은 마지막 장에서 철학적 사유의 역사 전체를 검토하면서, 그동안의 모든 철학이 생성의 본성과 중요성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함으로써 정적·불연속적 개념을 끌어들여 실재의 본성을 왜곡했음을 보여주려고 했다.

 
베르그송의 비교적 짧은 저술로는 〈웃음:희극적인 것의 의미에 관한 소론 Le Rire:Essai sur la significance du comique〉(1900)과 〈형이상학 개론 Introduction à la metaphysique〉(1903)이 있다. 〈형이상학 개론〉은 베르그송 철학에 대한 가장 좋은 소개서로서 그의 방법을 아주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앎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2가지 방법이 있다고 주장했다(→ 인식론). 하나는 과학에서 가장 널리 발전한 것으로 분석화·공간화·개념화하여 사물을 고정적·불연속적인 것으로 보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공감(sympathy)을 통해 사물의 중심부까지 이르는 총체적·직접적인 직관이다. 첫번째 방법은 목적을 성취하고 세계에 영항을 미치는 데는 유용하지만 사물의 본질적 실재에는 도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방법으로는 직관에 의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지속과 끊임없는 흐름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의 저작 전체는 지속이 사물의 가장 내적인 실재를 이루고 있다는 자신의 직관의 의미와 함축을 더 풍부하게 탐구해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말년]

1921년까지 베르그송은 형식상 교수직을 지켰지만 1914년에 이미 콜레주 드 프랑스의 모든 현역에서 은퇴했다. 1915년 이후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불멸의 40인' 회원이 됨으로써 프랑스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명예를 누렸고 1927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창조적 진화〉 이후 25년이 지나 또 하나의 중요한 저술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ion〉(1932)이 발간되었다. 이전의 저술과 마찬가지로 이 책도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의 양극 대립이 근본적인 통찰력을 준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가 보기에 인간의 도덕적·사회적·종교적 삶은 한편으로는 닫힌 사회의 산물로서 성문화한 법과 관습에 복종하여 나타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열린 사회의 산물로서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집단의 구조를 넘어서거나 깨뜨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른 영웅과 신비로운 성인의 동적인 영감을 표현한 것이다(→ 도덕, 종교철학). 그러므로 2종류의 도덕, 아니 2종류의 원천이 있다. 하나는 지성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과학과 과학의 정적·기계론적인 이상에 도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직관에 근거하면서 철학과 예술의 자유로운 창조성뿐만 아니라 성인들의 신비로운 경험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창조적 진화〉에서 생명의 약동이란 개념이 갖고 있던 성격과 비교해보면,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베르그송은 정통 종교의 신(神) 개념에 더 가까이 가 있다. 1937년의 유서에서 "성찰하면 할수록 나는 가톨릭 신앙에 점점 가깝게 다가갔으며 그 속에서 유대교가 완전히 성취되었음을 깨달았다"고 쓰면서 이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가톨릭 신앙에 대한 '도덕적 지지'를 선언한 것일 뿐, 결코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만일 내가 반(反)유대주의의 걷잡을 수 없는 물결이 수년 동안 세계를 뒤흔들 것임을 예견하지 못했더라면, 개종자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미래에 박해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사람들 틈에 남아 있고 싶었다." 이 확신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는 죽기 몇 주 전에 병든 몸을 이끌고 비시 프랑스가 제정한 법에 따라 유대인으로서 등록하기 위해 줄을 섰으며, 특별히 예외로 해주겠다는 정부의 제안을 거부했다.

[영향]

비록 베르그송 학파가 형성되지는 않았지만 베르그송의 영향력은 상당한 것이었다. 베르그송은 프랑스 철학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으나 미국과 영국, 특히 윌리엄 제임스나 G. 산타야나, 20세기의 위대한 과정형이상학자인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