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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가지 마음] 희구심에서 출발하는 진정한 소명찾기 : 즐거움에의 몰입

GraU 2014. 10. 30. 10:49

 

 

 

 

할 일은 많은 데 인생은 짧으니 서두를 수밖에

 

 

나는 평생 단 하루도 일한 적이 없다.
늘 재미있게 놀았다.

 

돈이 발명가의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보이기 쉽다.
하지만 나는 발명하는 내내 엄청난 희열을 느낀다.

 

사실 나에게 돌아오는 가장 큰 보상은
일 자체가 주는 즐거움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이 성공이라고 떠들기 전에
이미 이루어진다.

 

 

 

- 토마스 에디슨

 

 

 

 

 

촌철활인 : 한치의 혀로 사람을 살린다!

 

 

 

에디슨 동료의 이야기를 함께 보내드립니다.
“그는 심각한 난관을 앞에 두고 있을 때 한층 더 신나 보였다.
허리가 뻐근할 지경이 되어도 그의 머릿속엔
늘 아이디어가 넘쳐났다.
이런 내 생각이 터무니없다고 느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엄청난 장애물과 맞닥뜨렸을 때
정말로 행복해 보였던 표정만큼은 도저히 떨칠 수 없었다.”

 


 

 

 

 

소 명.

 

그것은 놀이에서 시작된다.

 

너무도 유명하여 누구나 알고 있는 에디슨의 이름이 가지는 '힘'을 등에 업지 않더라도

앞서의 글들의 구도에서 이 즐거움에 대한 반대급부가 음의 자리에서 조용히 이 명제를 대변하고 있다. 즉 '세상1'이 강요하는 줄 모르고 내 속에 만들어 놓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상, 공간적으로 높낮이 깊고 얕음 넓고 좁음 많고 적음의 분별과 시간적으로 현재의 자신에 대한 인식론적 한계로 인한 소위 '착각'과 그에 따르는 나 이외의 대상에 대한 축적된 무엇인가로 인한 구별로 인하여 즐거움으로 포지티브하게 표현하지 못한 것.

 

내가 즐거워 하는 일을 한다 라는 자연스러운 표방이

공공연하게 당당하게 여겨지게 된 것은 오래 된 일이 아니다.2

사회적으로 해야되는 일. 자아실현과 연관하여 가치 지음의 단순화로 우려했었던 이 부분은 실제로 지금도 이어지고 있음이다.

 

참아내고, 이겨내고, 이루어야하는 것이  소위 '일' 하는 것. 즉 소명이 된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

내 스스로의 개인적 사욕으로서가 아닌

대의 명분을 위해 내가 '해주는' 일 인 것.

즐거움을 보이는 자체가 어느 정도 금기시 되어 온 것.

즐거움을 좇는 자신의 이미지가 어떻게 비칠지에 대한 스스로의 상에 대한 이야기는 뒤로 하고,

일이라는 것을 대한 사회상을 자신이 느끼고 있을 때, 자신만이 즐거워 하고 있슴을 알아채는 순간 그 표현이 머뭇거려짐은 소위 착함도 아니요, 남을 배려함도 아니다. 근본 자리에는 '이기심'으로 표현되는 자리만 있다고 가정할 때(승부심의 이해로는 이기 와 이타가 한짝), 사회가 가진 상, 즉 사회적 고정관념, 누군가 보는 듯한 눈을 느끼는 순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이다.3

 

소명의 장, 즉 사회생활이라는 자리에서의 양 극단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출발이 되는 지점이다.

 

즐거움의 관점으로 다시 돌아가면,

소명찾기 가 왜 어린 시절, 특히 유아시기의 적절한 욕구충족에서 시작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자신이 원한 무엇인가를, 그것이 다른 누군가가 보기에는 (사회적으로, 규범적으로, 게임 등의 예) 해선 안되는 쪽의 것이라도, 그것이 순수하게 자신의 몰입자체를 위한 것이라면 (다시말해, 어떤 스트레스 또는 억눌림의 반대급부나 피난의 통로가 아닌) 숨어서라도 하게 된다.(자신을 속이게 되는 순간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이 숨어있는 시기는 이런 개별적 경우 뿐만 아니라, 현전하는 의식아래에 언제나 존재하는 상수의 구도로 보면 대단히 중요한 스스로에게 하는 발견이며, 단순히 아, 어 식의 구분법으로서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지극히 어렵기도 하다.)

 

물론 모든 의미나 실체가 그렇 듯 홀로 존재하는 것이 없으므로,

단순하게 한 가닥으로 설명되기 곤란한 부분이긴 해도, 이 '순수한 몰입의 방해꾼'들에 의해 그 반대급부로 '거짓'을 시작하게 된다는 점은 다양하게 발생할수 있는 이 상황(+,-)의 경우, 심리적인 페르소나의 그림자를, 그 무게를 등에 지기 시작함을 의미한다.

 

산술적으로 계산하게 되어 눈에 보이는 전개의 구도를 내어 놓는다 해도, 이 단계의 이해는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는 것과 같이 보는 사람의 문제로 귀결될 공산이 크다.

 

공론화 시켜 사회과학적으로 그 원인을 찾아 문제화 시키고 해결하기 쉽지 않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더욱 깊이 근본적인 부분에 대해 이야기 하기도.

교육 체계라는 사회적 시스템에서 눈에 보이는 무엇으로 일시에 구체화 되기 힘든 것.

자발적 앎의 시기를 늦추는 미리  또는 쉬 가르치는 일에 대한 문제.

 

 

 

즐거움의 추구는 그러함에도 내 주변, 우리 주변에서 자연스럽게 번져가고 있다.

이것은 시류 로서가 아니다. 유행이 아니다.

물론 큰 그림으로 보면, 억눌림과 해방의 큰 수레바퀴를 구르는 것이라 이것도 지나가겠지만, 생명체가 가지는 '당연',  소위 진정한 '자연'의 개념으로 볼 때, 어제의 글에서 처럼, 삼법의 구도가 생기는 그 위계에서 볼 때,

 

원래 자리로 가는 것.

 

 

 

 

 

 

 

간단히

인간 대 동물의 구도를 연상시키면서,

 

동물이라서 말 안듣는 거다.

 

 

 

 

동물이라서 말 안듣는 것 이 자연스러운 것. 원래 그러하니 그와 관련된 일로 마음 상하지 말 것.

닭과 달걀 문제처럼 원래 자리가 있어 가는 것인지, 내려가니 원래 자리인지는 상관 없다는 것.

선을 그어 분별하기 전의.

 

 

차라리 몰랐었으면 할 필요도 없다. 그 역시 '겸손'이 필요한 아직 온전히 모르는 상태가 원인일뿐.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님만 알자. 자연스럽게 가는 곳.

 

 

 

 

  1. 실재하는,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외물. 바깥경계 [본문으로]
  2. 엄숙주의, 엄숙주의 비판 참조 (용어가 맞나몰러) [본문으로]
  3. http://media.daum.net/life/health/wellness/newsview?newsId=20141111114703305 약자 뿐만아니라, 강자의 입장도 마찬가지. 지키기위해서. 자신의 권위, 힘, 자리를. 그런 측면에서 소위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는.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