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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가지 마음] 의심이 올라옴을 쳐다보다 : 계정혜 와의 비교

GraU 2014. 10. 31. 10:56

 

 

 

의심은 우리를 배반한다.

 

 

 

의심은 우리를 배반한다.

 

의심이란 것은 시도할 마음까지
사라지게 만드는 배신자다.

 

마음속에 의심이 싹트기 시작하면
우리는 분명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들 마저 놓치게 된다.

 

 

 

- 세익스피어

 

 

 

촌철활인 : 한치의 혀로 사람을 살린다!

 

 

 

J.A 하트필드 교수 실험에 의하면
보통 상태에서 세 남자의 평균 악력은 101파운드였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약하다’는 최면을 걸고 재어보니
29파운드로 보통 힘의 3분의 1에 불과했습니다.

‘당신은 강하다’는 암시를 준 후의 결과는
무려 142파운드에 달했습니다.

 

 

의심하는 만큼 실패는 가까워지고,
확신하는 만큼 성공이 다가옵니다.

 

 

 

 

 

 여기서는 부정적인 마인드

 할 수 없다  로 이해가능하지만,


ㅡ의 - 치  로 확대하여 보면

.

.

의 는 치를 낳게도 하지만

반추로서 깨달음에 보다 한걸음 가까이 가게도 해준다. 

자신이 그것을 어떻게 보고, 알아차리느냐 와  그 핸들링에 달려있다.

 

여기서는 그 속에 빠져 허우적 대는 상황이 보다 근본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중요함을 보인다. 흔히 이 구절에서 보이는 상식적 수준에서의 '의심할 만한 상황'보다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일단 내 생각으로만  상대나 대상을 판단하게 되었기 때문이고(분별심), 그 순간 의심은 자동적으로 올라온다. 이해하기 쉽게도

 

혹시 이런거 아냐?

안보이는 지금 이럭하고 있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으로 이 일(말, 글, 그 행동)을 한거 아냐?

 

승부심의 이해로서, 이 의심의 순간

자신이 하는 지금의 생각의 근저에 있는 힘의 논리나 바라는 마음, 해주는 마음 을 알아채지 못하면, 이 의심들이 왜 올라오는지 보기 시작하기도 어렵다. 포지티브 던 네가티브 던 지금 현재 올라온 '이 것'의 반대편을 보기가.

 

'나는 이러고 있는데, 너는 그랬단 말이지. 흥'

내가 힘든데 너는 이럴 수 있어?

"내"가 너에게 이렇게 만치 생각해주는데, 어떻게 그걸 몰라주니?

 

 

같이 일하는데 쟤는 왜 쉬운일 해

물론 소위 "뺑실뺑실" 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왜 저와 다르지?

종국은 이것이다. 다름을 인정하는 '다르다'가 아니라,

맞는 것의 반대 의미, '틀리다'를 내포한 '다르다'

 

 

 

간단하게는 '물어서' 확인1 하면 되지만, 특히 '힘'의 구도가 개입되어 있을 때, 확인은 어렵게 되고 의심은 켜켜이 쌓이게 된다. 다름아닌 불만. 그 이름으로. 스트레스가 되지. 실제 눈에 보이는 스트레스보다 이렇게 은근한 불신의 축적 속에 쌓이는 힘듦이 더욱 해소되기도 어렵고, 꺼내 놓기도 어렵다.  근본은 자기의 문제다. '힘'을 느껴 입을 열지 못하는 것. 자기 안에 이렇게 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스키머. '세상'이 내게 그렇게 넣어놓은 것.

 

동의하던 않던 존재한다.  동분망견.

 

근본적으로 이 강요된 채 내 안에 들어앉아 있는 이놈을 보지 못하면, 앎(여기서는 '이해', 즉 다름을 인정하다)은 출발은 요원해진다.

북구, 네덜란드 쪽이던가. 아마 암스테르담이 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루디즘(rudism)"의 연원이 된 즐기면서 하는 일의 개념이 60년대 말인가 부터 대두되기 시작했다는데. 세상이 나에게 그려 놓은 것의 구도를 헤아릴 때, 아주 쉽게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소위 출근시간 이다.

근래에 들어서야 자율 출퇴근 이란 이름으로 '크리에이티브'를 외치는 '일'의 분야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세상의 스키머는 이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여기서 더 중요하게 볼 것은,

이 출근시간을 잘 지키는 것이 다름아닌 계를 지킴에서 오는 잇점을 얻음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떳떳해지는.

 

 

 

규칙을 정해놓고 지키다. 계

의심을 없애주는 근본(출발점)이 된다.

 

계를 지키면  자기의 마음 가운데 잘못이나 나쁜 마음이 없고, 질투와 탐욕과 성냄이 없으며, 남의 것을 억지로 빼앗거나 해치는 일 없이 깨끗하게 사는 모습이 되고, 이렇게 아름답게2 사는 모습의 향기를 계향이라고 한다.3

 

계가 즉각 의심을 없애주는 것은 아니다. 물론 수직적 위계로만 편향적으로 볼 것은 아니지만,

 

계를 지킴(無非)으로 첫번째 당당하게 되고(戒香),

 

두번째, 定에 들어 고요하게 자신을 유지하고 바라볼 수 있게 되면, 좋고 나쁜 경계를 보는데서 자신의 마음이 어지럽지 않는, 고요한 마음의 향기(定香)4로서  어지러이 망상 분별을 하지 않게 되고(無亂),

 

세번째, 그리하여 어떠한 인연이라도 걸림 없고 스스로 막힘 없이 지혜로이 대처하는 향기(慧香)로서  잘못된 일을 하지 않게 되고 온갖 좋은 일을 하더라도 집착하지 않으며5, 순리대로(물순래, 물기거) 풀어가게 되며(無癡), 이 때가 되면 앞서 계를 지킴으로 시작된 의심고리가 끊어진다.

 

위 행경의 글에서와 비슷한 의미의 의심은 아닐지 모르지만,

계를 지키는 자신에 대한 반대급부, 즉 나는 '바른' 생활, 바른 길을 가는데, 그렇지 못한 자들에 대해 네거티브한 관점을 가지게 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높낮이를 두는 그 자리가 의심을 불러일으키기도, 있던 의심을 공고히 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그러고 있는, 양극단에 대한 기준을 부지불식간에 만들어 놓고 있슴을 고요히 바라볼 수 없다면, 눈덩이 처럼 커지고, 이는 남을 향한 것만이 아닌 것이 이 이유. 자신에게로의 암시. 보기 시작해도, 그래서 어쩌란 말인고?

나와 상대에 대한 제대로된 '앎' 만이 그 의심을 끊어줌은, 소위 출세간이 아닌, 세간사의 수준에서도 쉬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런 의미에서 단경에서의 골자와 다섯가지 마음이 말하는 그 것은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 뒤"로, 좋은 일 나쁜 일의 경계를 넘어 자유자재 한 모습의 解脫香,  그 상태에 오래 머물러(바뀌지 않는) 깨달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解脫知見香 6

 

 

 

 

 

보기에 당당해 보이다 :

보기에 어떤 일을 당해도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는다, 어지러이 굴지 않는다 :

보기에 모든 이를 믿음으로 대하는 듯 의심하지 않는 편안함이 있다, 의심의 꺼리가 없이 완벽해 보인다 :

 

 

쉽게 풀어서 보면 이러하다. 신성을, 정통을 강조하여 전통을 유지하려다 보면 의미가 와전되거나, 실제 상황에서 멀어져 괴리감으로 그 진의를 쉬 접하지 못하게 된다.부처가 죽은 뒤 받들지 말라 한 뜻. (물론 이중코드, 나아가 다중코드의 인지를 전제로 한)

 

주변에서 느껴지면, 말로 표현 못해도,

부럽다~ 싶어 했던 그 거.

 

중요한 것은

'보기에' 라고 적은 만큼.

 

실제 그 행동을 한 사람의 속은 내가 부러워 하는 그 것과 같을 수 없다는 것.

우아한 백조도 사실 물 속의 다리는.

 

그 것이 '말'의 한계와 의미상통하는, 바깥으로 보여지는 모든 나의 표현, 은유. 가 가지는 한계. 그와 마찬가지 맥락에서 내가 받아들이는 단계에서의 한계. 불완전함.

이해하기 쉽게 풀어쓰기는 쉬워도.

사실 모든 출발은 "내가 그렇게 여기고 있슴"임을 보기는 쉽지 않다.

재언이지만, 본다해도, 하던 대로 하던 것을 바꿈은 또 쉽지 않다.

하던대로 하던 것을 바꾼다해도,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다가오는 새로운 상황에서

자유로이 대처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진실은.

쉽지 않다고 여기는 그 자리. 그 또한 "그리 여기는" 것일뿐.

 

여튼.

 

 

불가에서

쉽게 일상생활에서 자주 받은 이 느낌을 수행의 차원으로 끌어 올려, 향기로 바꿔 부른 것 뿐이고. "그 뒤"는 잘 모르겠고. 실제로 절에서는 오분향 이라 하여 예불 시에 쓰일 만큼 중요하다.

 

 

 

 

해주는 일의 중요성

 

'착한 말 고운 말을 해라' 로 와전7? 된

이 힘 주는 말, 두려움을 없애주는 해주는 일 (무외시) 의 중요성.

 

암시.

특히 자기 암시.

이 한 단어로 이기와 이타가 다르지 않은 출발점에서 기인됨을 여실히 보여준다. 

 

 

 

 

각주6,  왜 안보이지?

: 이 구절의 마지막에 육조스님은 "각자내훈 막향외멱" 임을 분명히 명시 하였다.

 

 

 

 

 


 

+

http://cafe.daum.net/cigong2500/A1fn/5517 : 사람의 귀천은 신분에 있지 않다.

 

 長阿含 小綠經   :  

 

부처님이 사밧티의 녹자모강당(鹿子母講堂)에 계실 때였다. 

바라문 출신으로 부처님께 귀의하여 출가한 바셋타와 바라드바자에게 부처님은 물으셨다. 

 

"바라문 중에서도 뛰어난 너희들이 집을 버리고 출이 사문의 생활을 하니 바라문들이 혹시 너희를 보고 비난하지 않더냐" 

 

바셋타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부처님. 바라문들은 남을 멸시하는 버릇으로 저희를 비난하며 욕하고 있습니다"

"어떤 말로 비난하고 욕을 하더냐 ?"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 중에 바라문만이 가장 높은 종족이고 그 밖에는 다 하잘것 없은 낮은 종족이다. 바라문은 살빛이 희고 다른 종족은 살빛이 검다. 바라문만이 오직 순수한 범천(梵天)의 혈통을 받은 종족이다. 바라문만이 범천의 입에서 나왔고 범천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범천의 상속자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고귀한 계급을 등지고 미천한 계급의 사람들과 가까이 사귀고 있으니 그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다.  머리 깍은 사문 가운데는 범천의 발에서 나온 천한 자들도 있지 않느냐. '

이러한 말로 저희를 비난하고 욕합니다"

 

"바셋타,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지 않느냐.  바라문도 시집가고 장가가며 여인은 임신해서 아이를 낳고 있지 않더냐.  그들의 출생도 다른 사람과 꼭 같으면서  어떻게 바라문만이 최상의 종족이고 범천의 입에서 나왔으며 범천의 상속자라고  남을 욕하고 업신여긴단 말이냐.   

 

세상에는 왕족과 바라문과 평민과 노예등 네 가지 계급이 있다. 

그러나 왕족이라고 해서, 남의 생명을 해치고 재산을 약탈하거나 음란한 짓을 하고 거짓말과 이간질 악담을 하며 탐욕과 성냄과 그릇된 소견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도 또한 죄를 범하게되며 그 갚음을 받게 된다. 바라문이나 평민 노예도 이와 마찬가지다. 

 

또 왕족이 남의 생명을 해치지 않고  약탈과 음행과 거짓말과  이간질, 악담, 탐욕, 성냄 등에서  벗어나 바른 견해를 지녔다면, 그것은 착한 일이며 착한 갚음을 받게 된다.  이것은 바라문이나 평민이나 노예도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데 바라문만이 최상의 종족이요  나머지은 미천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네 가지 종족이나 계급은 그 사람의 혈통이나 신분으로서 차별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가 똑같은사람이다. 

누구든지 번뇌가 없어지고 청정한 계행이 성취되어  생사의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완전한 지혜을 얻어 해탈의 도를 이루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사성(四姓)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 태생이 다르고 이름이 다르고 성이 다르고 가계이 다르더라도  너희가 출가하여 집을 버린 수행자가 되었을 때  저 바라문들이 '너희는 무엇이냐? '고 묻거든 '우리는 샤카족의 자손이다.  사카무니의 진정한 아들이다.  우리는 그의 입에서 나왔으며 법에서 났으며 법의 상속자이다'  라고 대답하여라.

 

너희는 여래를 의지하여 새로 얻어 

성취된 청정한 계행의 몸이요, 

                   선정의 몸이요, 

                   지혜의 몸이요,

                   해탈의 몸이요, 

                   해탈지견의 몸이기 때문이다" 

 

 

 

 

 

  1. 이 '확인'이라는 것이 제대로 된 연후에 또 다른 경계가 있는데, 그 문제가 '사실' 더 크다. [본문으로]
  2. '선재선재'에서의 의미 와 유사, 진선미 개념 [본문으로]
  3. 원순 역해, 육조단경, 법공양, 2005, p.153~ [본문으로]
  4. 상게서 [본문으로]
  5. 상게서 [본문으로]
  6. ' [본문으로]
  7. 경구로서 강요됨으로 그 진의에서 벋어나 버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