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 to G.

rel. 천균 양행 = 제물론 ? / 균, 성, 명, 원, 욕 / 격- 물, 치- 지 로서의 '도법'

GraU 2020. 3. 30. 17:46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190429.010170749110001





장자 ‘천운(天運)’편에는 노자(老子)가 공자(孔子)에게 도(道)를 가르치는 이야기가 나온다. 


공자는 노자의 가르침에 따라 


석 달 동안 들어앉은 채 나오지 않고 있다가 마침내 노자를 만나 말했다. 


“저도 도를 터득했습니다. 

까막까치는 알을 까서 키우고, 

물고기는 거품을 붙여서 키우며, 

벌 종류는 누에를 갖다 키웁니다. 


사람은 동생이 생기면 젖을 못 먹게 되어 형이 웁니다. 


참된 도란 이런 게 아니겠습니까? 



오래 되었습니다. 제가 조화와 어울리지 못한지가 말입니다. 

조화와 어울리지 않고 어찌 남을 교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노자가 대답했다.


 “됐소. 당신도 도를 터득했소.”



위의 대화에서 공자가 터득한 도는 결국 자연의 이치를 말한다. 특히 종류에 따라 동물이 어떻게 태어나는지 세밀하게 관찰한 결과를 노자에게 보고하고 있다. 


동생이 생기면 형이 운다는 것은 사람은 포유류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자연의 이치가 중요한 까닭으로 그것을 알지 못하면 자연과 조화를 이룰 수 없고, 따라서 남을 가르칠 수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공자가 노자에게 보고한 생물학적 발견은 오늘날의 생물학에 비교하면 많은 오류가 있다. 그렇지만 도는 결국 자연을 본받는 것이고(道自然), 따라서 우리가 도를 알기 위해서는 자연을 관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장자의 주장이다.


물론 관찰한 것을 토대로 자연을 인위적으로 분별하는 것은 조화를 깨뜨려 견해차를 일으키고 또 시비를 만들어낸다. 


장자는 ‘제물론(齊物論)’에서 시비를 평균하여 사물에 구애받지 않는 것을 ‘천균(天均)’이라고 하고, 사물을 사물에 맡겨두어 사물과 자아 사이에 아무런 장애도 나타나지 않는 것을 


양행(兩行)


이라고 하였다. 



또 ‘응제왕(應帝王)’에서는 혼돈설화를 통해 인간의 분별심(七竅)이 궁극적으로 자연을 파괴하게 됨을 날카롭게 지적하기도 하였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329968&cid=58505&categoryId=58527


그렇다면 천균과 양행, 그리고 혼돈의 이야기는 앞에서 인용한 공자의 자연 관찰과 모순되는 것일까. 공자의 자연관찰 역시 분별심에 해당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 


우리가 도를 파악하는 길은 공자와 같이 식물과 새를 관찰하는 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산수유와 회양목이 같은 시기에 꽃을 피우는지를 알지 못하고, 딱새와 박새가 어떻게 노래를 부르는지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1



어떤 사람이 예수에게 물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는 그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고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에게 묻지 말라. 

가서 나무와 꽃과 동물에게 물어보라.” 


출전 찾을 것



이 말은 무슨 뜻일까. 나무와 꽃과 동물은 본성에 따라 살아가는 대표적인 존재들이다. 반면 인간은 주입된 대로 살아간다. 우리는 도덕과 계율, 전통적 관습에 따라 살아간다. 본성에 따라 살기 위해서는 밖에서 주입된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면에서 솟구치는 대로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모세의 십계명에 귀 기울일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성에서 십계명을 발견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공자와 같이 주변의 나무와 꽃과 동물을 관찰해야 한다. 그들이 어떻게 내면의 본성에 따라 사는지 또 어떻게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사는지 관찰해야 한다.




///


"자신의 본성"을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것들.

같은 '글'  : 어의내용, 개념으로  

사건화 되어 겉으로 내놓아져 있더라도,  다 다르게  읽을 수 밖에 없는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드러내어놓은 이유에서 판가름 나는 것과 같은 이치.


자신만의 것을 발견해야한다.






是以 聖人  是非  而     天均   是之 謂  兩行


글귀의  해석:  에 머물러서,


"개념" 을  백과전서파 식으로 ,  terminology : "용어"에 대한 '정의' 로서 파악하는 류의  '앎; ' 의 줄기 에서는, 차라리 2-300여년 전에 그 시기를 철학이라는 생각의 힘으로 '지나쳐 온' 서구의 역사를 되짚는 것이 낫지 않을까.


누군가 이야기 한 것처럼,

말로 아무리  선 :  참선:  명상 에 대해 떠들어봐야

실제  제대로 수행한 적이 있는가와,  그 과정에서  스스로 알아내어  자기의  앎인 것이 있는가 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아니. 글을 또 '만들어 지어서'  묶일 곳을 만들기 보다는,

차라리.


그저 양 쪽의 의견을 들음에  

한쪽에 끄달리지 않고, 

소위  합리주의의 그것으로서  '객관적으로' 머물 수 있다면.


이게 맞다. 내 것이다.  하는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소용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명상을 해보지 않고, 그 자리에 가보지 않은 이가

니밋다를   바방가를   니로다 를 이야기 해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뭐 어떻든간에.




///





제 :  의 의미


물:  의 의미 내용  개념   - 이어지는  개념-현상과의 총합상으로서의   세상 : 외물 :  나 이외의 것  으로서의   '환경;;'  으로까지


ㅁㅊㄱㅈ  에서  "화"   rel.  그렇게 여기다 로서의 화 :   e.g. 문화 

-  프로퍼갠더의 존재론적 불가결성


더하여,  이러한 글들 : '사상이 발생하던' 그리고, 그 발생한 생각들이  체계화 되고,  서로 전할 수 있을 만큼,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던 :   이 쓰여질  시기에 대한 


다소간의 상식과 함께.   마찬가지, 간과하고 있던 '정보'로서의 :  그 시기 한문: 문화권의 주역이 누구 였는지와, 왜 우리말 어순과 동일하게 읽을 때,  의미가 더 명확해지며, 앞 뒤가 맞아 들어가는지를,  소위  따따부따로서의  맞음 이 아닌,   '들어맞는 느낌:  공감'으로서 동의 한 후.


또한, 기존의 제대로 알려진 바 없는,  제대로 된 것들 :

소위   음 양  :  에 대한  이해로서   현묘 함.  통현  :   현  의   '음'의 자리로서의 의미 : 대대의 자리에서   등과 같은,   아주 기본적이지만,  그 때문에,  간단하게 이해가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    해석된  내용을 이해한 것을  앎이라 여기는 자리:  에 대해  소통 가능 할 때에.





당위 : 당연   가 왜 자연과   통하며,  그것이  원래가  '하나'를 이야기 하는 것이고


균형이란  실제  평형의 고정적인  실재가 아니며,


양행이란  지녀 알아  실천할 때에라야  /  보고서 알고, 들어 알아도  따라 하지 조차 못하는,  장인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 /  그냥 그렇게 되어버리지 않는 단계의 증거는, 


우습게도,  권위의 자리에서 권위를 강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화  로 드러나듯이.

끄달리는 순간  이미  결정난 것.



그리보면,

위대한 것들에  얽매이지 않음 은,

얽매여 본 사람만이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양행의  균제적 의미로서,

"그냥 자유로울 수 있는" 자리에서 볼 때,

아예  글을 몰랐던  육조의 그것과 같을까.







뜻을 구하고자 할 때, 

내 앞에  적재적소에   '의미'들이 있어주는 일은,

다시 돌이켜 보아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 보면, 

그 자체로   균 상태에 있으면서도,

그를 모르는 것이지,


당연: 당위의 개념처럼   마땅히 그리하려  '애써야 하는' 것이 아닌 것


'없는'  도  가    '있는'  자연을   법 (화) 하는  이치.







狙公賦芧, 

曰: “朝三而暮四.” 衆狙皆怒. 

曰: “然則朝四而暮三.” 衆狙皆悅. 


名實未虧 而喜怒為用 亦是也. 


是以聖人和之以是非, 而休乎天鈞, 是之謂兩行.


『莊子』 「齊物論」



이 일을   이기고 짐으로 보거나,  얻고 잃음 으로 보거나,

더우기  "이익" 이나   이익됨 으로  보는 한에라야,   왜 원숭이를  굳이 들었는지  모를 밖에.


비인부전의   원래 의미와 마찬가지로,  또한,   정법이  상법이 되고  말법이 되어가는  의미와 마찬가지로.

=  떼어 내어 읽어  원래의  의미에서  '분리' 시켜  자신의  '도구'로  '화' 하는  그 자리가 바로.

  

마찬가지, 다른 편에서  제대로 설명하면 다 알아듣지, 내가 못 알아듣는 건  니가  제대로 설명을 하지 않아서야.그런 이에게는,   소위  '신성'을 보이지 않는 한,   신통을 보이지 않는 한 .   =  신성의 의미  의  다른 자리들.


무언가 있다.

" 진짜다.  혼모노다. "

그 정도 아는 것 만으로도. 


소위 '앎'자체에 대한 이해가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앎에 대해 관심이 없던 사람이 진짜  가 있구나  하는 것 만으로도.


이제 겨우 그 자리인게지.

글로는  균  을 썼지만,  실제로는  균이 문제가 아닌 거.




rel.


///

도덕경 :   '천장지구 '  편  에서의  천균


///


명 : 

의 : 

두개념이 이어지는 이유.


" 천하의 큰 계 가 2개 있는디.  하는  명이고  하나는 의.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 =  명 :  ,  이는  쉼이 없슴.  항상 그러한 것 . 2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 =  의   3

(중요한 것은)   "적합하지 않으면" 임금이 아니다.  =   섬김에 적합하지 않는 이는 임금이 될 수 없슴.

자식으로부터의 사랑 : 효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우러나야 하는 것.

부모이기 때문에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당위로서의 '도'가 아닌,

자연스럽게도,  그 자식이  모시고 싶을 만큼의 사랑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이해의 구도로서,) 


깊게는,  뒤 따른 것이 생기면, 앞에 것이 울게 된다 는 의미로서 비추어보면,

  


명/의가 전해지는 과정에 올라타는 '것'과도 같이,  당위의 '지켜야 하는' 법 이 되는 "왜곡"과 마찬가지로.


///


우: 

주:

실재 하지만  '처'가 없는 것 = 우

길게 이어진, 그러나 민 하지 않는 것 = 주


con.  움츠리고  펴는 것 :    역 에서의  '생'




///


도에 대한  이해도?  에 따라서 

나뉘어지는   선인 진인    지인?  의 개념화



이 모두에 이어진 것으로서의  도 [이르기 위해 상정한 개념] -   그 현장적 양태에 대한  묘사  [지칭하기 위한] 로서의  천균  -     실행 : 의지 - 욕 - 원  처.  으로서의   양행  [ 소위,  지향점으로서의 가치 :  "방편(화) 되는, 실제" 로서 ]





http://cafe.daum.net/bg0115/Ee56/464?q=%E5%A4%A9%E5%9D%87



https://kgvill.tistory.com/987









  1. '도를 논하는 자 와 그 자리'를 어떻게 두느냐에서 이미 다 드러나는. [본문으로]
  2. (마음에서 긴장을 풀지 않는다 = 상속, 단절이 없슴) [본문으로]
  3. 성 vs. 성지 의 구조에서 처럼 : 명은 하늘의 것, 의 는 인간의 것으로서 이해한다면.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