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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 : 헌신과 열정 - 자발성의 핵심이자 스스로 하는 것의 힘

GraU 2014. 11. 7. 13:30

 

 

 

무한한 열정을 쏟는 일은 누구나 성공한다.

 

 

 

평균적인 사람은 자신의 일에
자신이 가진 에너지와 능력의 25%를 투여한다.

세상은 능력의 50%를 쏟아 붓는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100%를 투여하는 극히 드문 사람들에게 머리를 조아린다.

 

- 앤드류 카네기

 

촌철활인 : 한치의 혀로 사람을 살린다!

 

찰스 슈왑은 ‘인간은 무한한 열정을 쏟는 일에서는
거의 반드시 성공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컴퓨터 마우스, 하이퍼 텍스트등을 개발한 더글라스 엥겔바트는

‘우리가 나아지면 나아질수록,
우리가 나아질 수 있는 능력 또한 더 커진다.’

 

고 말합니다. 헌신과 열정이 성공을 부릅니다.

 

 

 

 

먼저

현재 나를 돌아보고,

 

제대로

자기 자신이 되어,

 

진정

내가 하고픈 일을 찾는 것.

 

이 과정에 성공은 없다.

성공은 아들러의 말처럼 타인의 과제일 뿐.

 

다만 온전히 나의 일일 때에만.

 

 

 

11.13 행경

성공을 목표로 하지 마라.

 

성공을 노리고 그것을 목표로 삼을수록
성공할 확률은 낮아진다.

성공은 일의 결과로서 뒤따라와야 한다.

자기 자신 보다 더 큰 목적을 위해 헌신하거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때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이나 부산물로서 말이다.

-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촌철활인 : 한치의 혀로 사람을 살린다! 성공을 ‘어떠한 상황에서도 능력, 기술, 잠재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신이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으로 재 정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성공은 최고 역량을 발휘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는 사실을 알 때 내면에서 우러나는 자기 만족감입니다.

 

 

 

 

 

 

 

 

사실

'등불 하나 키고 가는' 일 조차 쉬 하지 못하는 데에 다가

열정과 헌신을 이야기 하면

그것이 곧 강요로 여겨지는 숨겨진 코드가 된다.

 

 

싸움터에 올라갈 준비가 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싸움터 위에 있는 사람이 제대로 볼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그 첫번째.

 

싸움터의 안이건 밖이건 자기가 있는 현재가

온전히 자신에 의해 만들어졌다 라고 여기는 것이 두번째.

 

싸움터 자체를 자신이 만든 것인지를 알아차리는 것이 세번째.

 

 

자신의 시간을 산다는 것.

내가 내 싸움터를 만드는, 정하는 것.

내가 내 구도로 판을 굴려가는 것.

 

 

 

 

승부심의 구도로서

 

첫번째의 극단에서

 

내가 싸움터 위에서 겪어보니~ 하는 마음이 먼저 떠오르는 것을 보면

그 반대의 경우로, 내가 싸움터에 나서지 않는 이유는~ 으로 시작되는.

 

두번째

 

싸움터에서 포지티브한  쪽, 승자의 쪽에 서있다면, 자신의 긍정적 현재가 자기가 여지껏 겪어 낸 많은 굴곡들의 증거로서 남은 것이라 여겨지면.

그 반대의 경우로, 싸움터에서 진 패자의 경우에 자신의 부정적 현재가 누구누구의 탓, 어떤 어떤 상황의 탓, 요행이 맞지 않은 탓 등으로 여겨지면.

 

세번째

 

싸움의 구도 자체가 어떠한 것이라는 것을 그려놓았음을 보지 못하더라도,

승리의 쾌감을 느끼는 '현재'를 , 또는 '패배'의 불쾌감을 느끼는 그 '상황'은 느낄 수 있으므로.

 

 

'싸움터' 가 곧 '판'이고, 그 이름이 그러할 뿐이고, 보기에 같아 보이는 '판'도 사람에 따라 싸움터가 아닌 해소처 가 될 수도 있고.

 

판은 내가 만들었다는 것의 의미.

내가 내 구도로 판을 굴린다는 것의 의미.

주인공을 본다는 것의 의미.

 

그것이 강요된 것인지 아닌지, 또는 오로지 나의 긍정을 위한 분별 위에 서있는 것인지 아닌지 아주 중요하지만, 그 자체의 '구별'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 판. 스킴. '힘'의 역장. 이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과 연관되어 엮여있는지는 '구별해가는 자리' 자체를 바라볼 때 보인다.

 

목적이라 부르던, 의도라 부르건.

그리스 고전에서 연원하는 케케묵었으나, 성성히 살아있는 커다란 양자구도? 가 왜 유효한지를. 그 근원을 굳이 'the one' 이나 또 다른 무엇 "       " 으로 지칭하려 하지 않아도,

그 '목적' 이나 '의도' 아래에 있는 ' 것 ' 의 존재를

형의상학적으로조차 인정하지 않음은, 곧 아직은 '종교'가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혹자가 이야기 하던 '면죄부' 개념 말고 말이다.

 

 

 

오늘11/8 다음에 소개된 아들러 심리학과 관계된 책의 내용을 보고서.